우체국 아가씨 페이지터너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남기철 옮김 / 빛소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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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프랑수아즈 사강은 말하길,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했다. 상황과 배경은 그렇다 쳐도 그 말의 뿌리까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다 츠바이크의 <우체국 아가씨>를 통해 자신을 파괴한다는 의미를 겨우 알아듣게 되었다. 다만 그 권리를 알아차렸을 때에 난 이미 파괴된 후였고, 가난한 권리마저 박탈 당했다는 사실에 분개해 보지도 못했다. 츠바이크 또한 불안의 근원과 분노의 방향에 대해서 소송을 걸었고 이 책과 죽음으로써 판결을 내렸다.


<우체국 아가씨>는 전쟁세대의 잃어버린 청춘과 인권에 대한 연가이다. 이모의 초청을 받은 우체국 직원 C양이 스위스 호텔을 찾아가는 것으로 1부가 시작된다. 우물 안 개구리였던 그녀는 바깥공기를 맡고 기뻐하기보다 자신의 초라함을 감추기에 급급했다. 호텔에 머물면서 온갖 즐거움을 누렸지만 휴가가 끝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텐데, 후유증을 생각한다면 차라리 우물 속에서 계속 있는 편이 나았다고 생각된다. 물론 지독한 가난의 해방감과 경험의 희로애락 등 인간의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을 막아선 안되겠지만, 병상에 누워있는 모친도 잊고 사는 젊은 그대 C양은 누가 보더라도 위험했다.


그럼에도 이모 부부는 저 방정맞은 조카를 말리지 못한다. 시궁창에 빠져있던 청춘을 드디어 건져냈는데 그 기쁨이 오죽했을까. 그렇게 물 만난 물고기는 저도 모르게 수족관 밖으로 튀어나온다. C양의 나쁜 소문에 대해 이모가 둘러대지 말고 제대로 설명했으면 좋았을 것을. 조카의 순수함을 지켜줄 게 아니라, 성인으로서의 교양과 덕목을 심어주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2부에서 그토록 자기 파괴적인 모습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둥지 아래로 떨어진 아기 새처럼 불안해진 C양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거지 같은 시골 처녀로 되돌아가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모친이 위독하단 소식에 별 수없이 귀향하지만 어째선지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저자는 지칠 대로 지친 그녀의 심정을 꾹꾹 눌러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어떤 물질이든 외부에서 가해지는 열에 의해 온도가 올라갈 때 그 물질 고유의 임계점이 있다. 그 지점을 지나면 아무리 열을 가해도 온도가 올라가지 않는다. 물이 끓는 비등점이 있고 쇠가 녹는 용해점이 있듯이, 정신도 똑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행복감 역시 절정에 이르면 더는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고통, 절망, 굴욕, 혐오, 두려움도 마찬가지다. 그릇에 물을 부을 때 가득 차면 더는 부을 수 없는 것과 같다. - 234p


총량을 넘긴 감정은 더 이상 반응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슬픔이 슬픔인 줄도 몰랐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슬픔인 줄 알고도 슬프지가 않게 되었다. 분명히 삶을 송두리째 뺏겼는데 누가 뺏어갔는지를 알 수가 없다. 화가 나는데 화를 낼 대상은 보이지 않는다. 같은 하늘 아래서 누구는 풍요롭고 누구는 그렇지 못한가. 어째서 가난은 공평치 못하고 사람 봐가면서 찾아오는 건가. 그것은 철없던 내가 줄곧 하던 생각이었다. 점점 가난을 망각하고 살았더니 여유가 생긴 지금은 뭘 해도 즐겁지가 않다. 그 감정을 모른 지가 너무 오래됐다. 차라리 이대로 계속 몰랐으면 좋겠는데 츠바이크가 전부 다 망쳐놨다. 나쁜 사람.



2부에서는 시궁창 현실로 복귀한 C양의 신세한탄이 펼쳐진다. 호캉스 후로 날카로워진 그녀는 바람 쐬러 간 타 지역에서 형부의 군대 친구인 P군과 친해진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의 불만과 똑닮은 그의 불행하고 가까워진다. P군은 참전용사의 대우를 받기는커녕 어떠한 혜택도 없이 절망 속에 살아간다. 국가와 전쟁에 바쳤던 자신의 젊음이 잠깐 쓰고 버려지는 일회용품만도 못하다니. C양의 폐부를 찌르고 작품 전체를 관통한 P군의 발언을 살펴보자.

"사소한 부상이야, 그렇지 않아? 세계대전을 겪고 시베리아에서 4년간 지내면서 겨우 손가락 두 개 다쳤을 뿐이니. 그런데 죽은 손가락이 살아 있는 손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사람들은 잘 몰라. 건축사가 되고 싶은데 그림을 그릴 수도 없고, 사무실에서 타이핑할 수도 없고, 무거운 물건을 들지도 못하지. 가느다란 힘줄 하나가 썩었을 뿐이지만, 내가 이 세상에서 꼭 하고 싶은 일들이 그 실처럼 가느다란 힘줄에 매달려 있다는 게 문제야. 집을 설계할 때 도면에서 1밀리미터만 잘못 그려도, 겨우 1밀리미터이지만 집 전체가 붕괴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법이야." - 281p


내게서 떨어져 나간 한 줌의 무언가로 인해 삶의 통로가, 세상과의 창구가 닫혀버린 것이다. 나는 멀쩡히 존재하건만 겨우 1%의 결함 때문에 남은 99%를 무가치하다고 판단한 국가였다. 왜 이들은 남들처럼 평범한 인생을 누리지 못하는가. 아픔만 남겨놓고 말없이 떠나간 청춘들을 어디에 가면 보상받을 수 있는가. 교통사고로 다리가 불편한 나는 제한된 일상의 고통과, 소모품으로 살아야만 하는 설움을 너무나도 잘 안다. 쳐다보지도 못하게 된 꿈과 도전들은 질리지도 않고 손짓을 해대는데, 그게 다 희망고문인 줄 알면서도 괜히 연민에 빠져보고 동정 속에 나를 밀어넣어도 봤다. 가난은 나와 C양을 초라하게 만들었고, 신체적 결함은 나와 P군을 세상 밖으로 계속 몰아냈다. 츠바이크도 그렇게 밀려나다가 벼랑 밑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톨스토이는 불행한 가정의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고 했지만, 현대사회에 와서는 죄다 비슷비슷해 보인다. 누가 더 불행한지 겨루는 게 무색해진 현실 앞에서 개인의 아픔은 어린아이의 반찬투정 정도로 느껴진다. 글쎄, 나 같은 사람은 건물주나 복권 당첨을 바라지도 않는다. 기본적인 생활 유지와 인권을 보장받는다면 그걸로 족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에 눈치 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고, 남들과의 비교로 나의 불행을 키우는 상황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평등하길 바랄수록 옐로카드만 꺼내드는 세상이다.


나보다 더한 이들한테서 위안을 얻는다는 건 말도 안 될 뿐더러 할 짓도 못된다. 반대로 잘 사는 누군가가 내 아픔을 감당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남녀의 울분은 끝내 복수와 배신으로 이어진다. 꼭 그래야만 했을까 싶다가도 저자의 말로를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나 또한 가슴속에 총 몇 자루씩 품고 살아가니까. 츠바이크가 그린 시대의 자화상이라. 마음이 참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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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8-21 11: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크- 정말 좋은 소설이죠. 좋은 소설 읽고 나온 감상은 좋지 않을 수 없네요. 크-

물감 2023-08-21 15:55   좋아요 1 | URL
저 아무래도 츠바이크한테 빠질 것 같습니다.
한두 권만 더 읽어보고요 ㅋㅋㅋㅋ

은하수 2023-08-21 1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물감님 생각에 바로 공감입니다. 멋진 작품이죠!!

물감 2023-08-21 15:57   좋아요 1 | URL
은하수 님도 총잡이?! ㅋㅋㅋㅋ
츠바이크는 사랑입니다 ^^

coolcat329 2023-08-21 12: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빨리 읽어야겠어요~^^

물감 2023-08-21 15:58   좋아요 1 | URL
쿨캣님 이거 얼마만입니까요! 잘 지내시죠? ㅋㅋ
언넝 읽고 리뷰써주세요~~~!

은오 2023-08-21 18: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저 아직 초조한마음산것도 안읽었는데 이거 벌써 오별주시면 스트레스받습니다..
굉장히..
매우..
하........

물감 2023-08-21 19:28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근데 요즘의 은오님 행보를 보면 츠바이크도 긴장해야 할 듯요ㅋㅋㅋㅋㅋ

은오 2023-08-21 19:38   좋아요 1 | URL
근데 질문있습니다. 물감님 병렬독서 안하시는걸로 알고있는데 읽고있는책에 왜 4권이나 있는거죠?! 읽으실 책인가요? 😯 리뷰예정 이런거..?

물감 2023-08-21 19:48   좋아요 1 | URL
곧 읽을 목록이에요. 지금 4권은 대여한 책들이고요. 물론 병렬독서는 안합니다ㅋㅋㅋ

은오 2023-08-21 19:56   좋아요 1 | URL
그렇다면 또질문있습니다. 대여하시는 책과 구입하시는 책은 어떤 기준이죠? 궁금한게 많아 죄송..ㅋㅋㅋ 그래도 알려주세요!!

물감 2023-08-21 20:11   좋아요 1 | URL
음 딱히 기준이 없네요. 그날그날 제 기분에 따라서?ㅋㅋㅋ
그래도 평소에 눈여겨봐둔 작가들 안에서 고르려고는 하네요. 아 그건 있어요. 저는 신간, 베스트셀러, 추천 책, 입소문 책을 철저히 외면합니다. 절대 유행이나 지름신에게 휘둘리지 않아요. 제 스스로 읽을 책을 발견하는 맛을 좋아해서요ㅋㅋㅋㅋ또 질문있나요😀

은오 2023-08-21 20:37   좋아요 1 | URL
기분에 따라서라니 이건 좀 의외입니다! ㅋㅋㅋ 오늘은 질문 여기까지하겠습니다 알찬 질문타임이었다 😆 물감님 굿밤!!!!

구단씨 2023-08-21 19: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제목만 봤을 때는 잔잔한 분위기가 먼저 연상되었는데,
내용 듣다 보니 파도가 막 치는 느낌입니다.
문제는,
제가 이 책을 구판으로 가지고 있었다는 거죠.... ㅠㅠ
네, 가지고만 있었어요.
제목만 보고 다른 책인 줄 알았는데, 물감님 리뷰 안 봤으면 같은 책인 줄도 몰랐네요. ㅎㅎ

물감 2023-08-21 19:35   좋아요 1 | URL
잔잔한 파도가 계속 치다가 어느새 해수면이 상승하더니 쓰나미로 바뀌더군요. 꼼짝없이 당했습니다....
구판은 제목이 다른가봐요? 내용은 같으니까 이번에 한 번 읽어보셔요ㅎㅎㅎ

잠자냥 2023-08-21 20:44   좋아요 1 | URL
물감 님, 구판 제목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이건 줄 모르고 산 책 또 산 사람(다락방) 읽은 책 또 읽다 중간에 알아차리고 접은 사람(골드문트), 다행히 구판 갖고 있는 거 알게 된 사람(구단씨) 등등 ㅋㅋㅋㅋ 사연도 재미납니다.

물감 2023-08-21 20:56   좋아요 1 | URL
딱 보니까 출판사가 노린 거네요. 피해자 속출ㅋㅋㅋ 이래서 신간은 주의해야 하나봐요ㅋㅋㅋㅋㅋ
 
젊은 남자
아니 에르노 지음, 윤석헌 옮김 / 레모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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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좋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기분이 이런 걸까. 이 짤막한 이야기가 지닌 아련함에 나는 몇 번이고 감전돼버렸다. 그동안 알듯 말듯 했던 에르노의 글과는 호흡이 어려웠는데, <젊은 남자>에서는 저자가 ‘평평한‘ 글쓰기를 해준 덕분에 좀 더 객관적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문장보다 서사가 중요한 나로서는 사실 에르노와 궁합이 좋은 편은 아니다. 그러나 ‘문장‘만으로 구성된 이 서사의 치명적인 매력에 그만 나는 항복하고 말았다.


서른 살 연하남과의 연애라니. 에르노도 상당한 팜 파탈이었나 보다. 한국인의 정서상 나이차가 많은 연인에 대한 시선이 절대 곱지 못한 데, 프랑스라서 그런가 거부감은 들지 않는다. 이 작품은 연하와의 연애 속에서 느낀 ‘나‘의 감정과 생각들을 풀어놓는 수필 형식을 띄고 있다. 순간순간에 대한 고백들이 서사와 주제를 동시에 가져가는 기교도 좋았지만, 나와 1도 관련 없는 내용을 마치 내 얘기처럼 들려주는 게 참 좋았다. 그래서 읽는 내내 멜랑꼴리한 기분이 들었더랬다.


A는 청춘의 소란 속에 ‘나‘를 데려다 놓았고, 잃어버렸던 젊음의 감각까지 되돌려 주었다. 그러나 황홀과는 별개로 A와의 시간들은 젊은 시절의 자신을 연기하는 것일 뿐이었다. ‘나‘와 다른 그의 습관들을 볼 때마다 무심했던 세대 차이를 체감했고, 하나였던 젊음이 둘로 분리되는 아픔을 느껴야 했다. 타인들의 시선보다도 본인의 잣대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나‘는, 자신의 기억 전달자인 A에게 삶의 안내자가 되어줄 것을 다짐한다. 쾌락과 고독이 공존하는, 시한부 사랑의 비즈니스 관계라니.


음악도 영화도 음식도 여행도, 처음 공유했던 추억 속에 박제된 것에 불과하다. 지난 경험을 새로운 사람과 수차례 나눈다 해도 고유의 추억은 변하거나 지워지지 않는다. 주인공은 깊은 사랑의 형벌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슬퍼지려 하기 전에 그를 떠나보냈다. 받은 만큼 줄 수 있는 사랑이 아니라면 몇 번을 사랑해 본들 같은 연극의 반복이란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내가 나 자신으로 있지 못하고 기억 전달자 또는 안내자 역할에 그친다면 그건 너무 슬프지 않을까. 나의 존재가 슬픔이 아닌 기쁨의 이유에 속했으면 싶은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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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8-15 20: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 물감님이 이 소설을 좋아하시다니, 의외네요!!

물감 2023-08-15 22:02   좋아요 1 | URL
저도 제 의외성에 놀랐어요ㅋㅋㅋㅋ

잠자냥 2023-08-16 09:46   좋아요 2 | URL
그것은 물감님이 젊은 남자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물감 2023-08-16 09:54   좋아요 1 | URL
젊은 남자인 저는 왜 쉰 네살의 주인공 입장에서 공감하고 있는지 ㅋㅋㅋㅋ
 
감정의 혼란 - 지성 세계를 향한 열망, 제어되지 않는 사랑의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서정일 옮김 / 녹색광선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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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혼란이라면 내가 또 할 얘기가 많이 있지. 이건 가장 최근에 있었던 일인데, 길에서 누가 내 이름을 하이톤으로 부르길래 봤더니 중3~고1때 좋아했던 몇 살 위의 누나였다. 못 본 지 10년도 넘은 나를 바로 알아본 것도 신기했지만, 여전히 나와 편하게 웃고 장난치는 이 순간이 더 신기했다. 누나의 변함없는 모습은 내 오래전 날들의 감정을 끄집어내었고, 그 잠깐 동안을 나는 고등학생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실컷 반가움을 나누던 중에 중학생 하나가 우리한테 다가왔고, 누나는 자기 딸이라고 소개해 주었다. 아 그렇구나. 격정의 기쁨은 이내 곧 당황이 되었고, 이 형용 못할 감정을 최대한 누르면서 급히 작별 인사를 건넸다. 나는 무엇이 그리도 두려웠을까. 은연중에 다시 가까워지기를 바랐던 것일까. 내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상대에게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되자 크게 혼란스러워졌다. 흩날리던 벚꽃 잎은 어느새 눈송이로 변해 있었다.


츠바이크가 쓴 <감정의 혼란>도 내가 느꼈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방탕에 빠져있던 롤란트는 한 문학 교수의 강의를 듣고 수제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는 교수의 집 위층에 세를 얻어 교수 부부와 급속도로 친해진다. 이제 문학으로 하나 된 두 사람은 길 잃은 어린 양과 목자의 관계로 발전한다. 그런데 꼭 한 번씩 교수가 제자의 동경심에 스크래치를 내는 게 아닌가. 모진 말을 내뱉기도 하고, 갑자기 잠수타버리는 등 교수의 돌발행동에 아주 그냥 멘탈이 바사사삭. 점점 시들어가는 롤란트를 보다 못한 교수 부인은, 그에게 절대 의존해선 안된다고 경고한다. 이유를 물었더니 알면 다친다는 뉘앙스만 풍기는데, 대체 그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제자가 달궈질 때마다 교수는 얼음 물을 들이붓는다. 제동장치 차원에서 그러는 걸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일편단심이 그렇게나 잘못인가. 병 주고 약 주고가 반복되다 보니 스승에 대한 사랑은 이내 방탕과 원망으로 이어졌다. 떼쓰는 어린아이가 되어 자신을 돌보지 않은 부모를 일방적으로 탓하게 된 것이다. 그의 투정을 받아준 건 교수의 부인이었고, 자신의 만행을 후회한 롤란트는 그길로 떠나갈 채비를 한다. 이때 사라졌던 교수가 돌아와 제자의 푸념을 듣고, 이제까지의 자초지종을 설명해 준다. 서로 간에 오해를 풀긴 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돼버린 두 사람. 감정의 터닝 포인트가 이들에게 몇 번이나 찾아온 건지. 예나 지금이나 인생은 타이밍이다.


일인칭시점의 이 작품은 주인공의 심경 변화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의 가슴속에서 맴돌던 사랑의 언어들은 끝내 호소력을 잃었지만 그 마음을 교수가 몰라준 것은 아니었다. 제자의 앞날을 내다본 스승이 나름의 결단을 내렸던 건데, 그 역시 혼란했던 이유로 표현이 서툴렀을 뿐이다. 나는 적나라했던 롤란트의 감정보다도, 설명이 없다시피 했던 교수의 심정에 더 마음이 동하였다. 감정이라는 건 움직여야 할 때보다 멈춰세워야 할 때에 더 많은 힘을 쏟게 되어있다. 그런 이유로 떠나는 사람보다 남겨진 사람이 더 아픈 법이다. 하여 감정을 통제하기 힘들 때마다 차라리 누가 대신 밀고 당겨줬으면 싶어진다. 교수와 제자도 그래 보였다. 서로가 원하고 있는데도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의 잔인함. 사랑에는 분명 용기가 필요하지만 때론 그것이 상대를 찔러 죽이는 비수가 되기도 한다.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고는 하나 어쩐지 알 것 같아서 자꾸 망설여지는 것이다. 나처럼 멘탈 바사삭이 지긋지긋한 사람이라면 무슨 말인지 이해할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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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2023-08-15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것은 교수의 동성애적 사랑을 표출하지 않기 위한 안간힘이 아니었나요?

물감 2023-08-16 08:03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대로 안간힘이 맞습니다. 다만 교수가 자신의 사랑과, 제자의 사랑의 현주소를 잘 파악했다고 봐요. 몇 수 앞을 내다봐야 하는 바둑처럼, 제자에 대한 사랑이 커져갈수록 그의 걸림돌이 되어선 안된다 싶었을 거구요. 하지만 이렇게까지 자신을 좋아해준 사람이 나타났으니, 결말을 알아도 현재의 게임을 즐기고는 싶었겠죠. 그래서 영영 안볼 것처럼 매몰차지는 못했다고 봅니다. 아무래도 교수 시점의 내용이 적다보니 독자의 상상으로 채워야만 하나, 교수 자신보다도 제자를 지키려는 사랑의 번민으로 느껴졌어요. 저였어도 스승의 돌발행동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겠네요.
 
새의 선물 -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개정판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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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태풍 ‘카눈‘이 한국을 강타하기 직전에 이사를 끝마쳤다. 고층에서 내려다보는 바깥 풍경은 짓궂은 날씨 속에서도 촉촉한 감성이 돋게 해 기분이 이상했다. 국민들이 태풍 피해로 한숨짓는 마당에 눈치 없이 감상에 젖어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 마침 읽고 있던 <새의 선물>은 이 모호한 기분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몰라 난감한 상황을 매 화마다 연출해 내는 다소 잔인한 작품이었다. 장면 하나하나가 너무도 인간적이라서 중립 상태를 유지하기도 버거웠다. 무엇보다 이토록 정제된 감정의 글과 서사라니. 정녕 내가 생각하던 한국문학의 표본이었다.


이것은 한국의 1960년대, 한참 어수선했던 시절을 다룬 근현대사이다. 일찍이 고아가 된 진희는 겨우 12살에 다 성장했다고 할 만큼 조숙한 아이이다. 진희가 이모할머니 집에 사는 동안 느꼈던 인간사의 이모저모를, 12살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설명해 준다. 홀로서기의 중요성을 깨우쳤으나 세상의 부조리를 이해하기에 아직 어렸던 소녀는, 벌어지는 일련의 해프닝들로 순수를 잃으며 성장통을 겪는다. 그리고 이것은 그 과정을 지나쳐온 독자들의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기도 하다.


사실 진희보다도 이모인 ‘영옥‘이 주인공이다. 철딱서니 없는 영옥은 진희와 대조되는 인물이자 조용할 날이 없는 트러블 메이커인데, 그 덕분에 진희의 성숙도는 날로 깊어만 간다. 소녀는 이모를 매일 혼 내키는 할머니에게서 미운 정을 배웠고, 사랑놀음에 데인 이모에게서 감정 낭비의 교훈을 얻었다. 진희가 생각하는 어린이의 역할이란 성숙한 어른으로 되기 위한 준비과정일 뿐이었다. 자신은 자타 공인의 조숙한 아이였고, 그래서 더는 성장할 이유가 없다고 믿었다. 헌데 저 한심해 보이는 기분파 이모에게 사람들이 왜 자꾸 모여드는 것일까. 세상은 반듯하게 살아가는 의젓한 진희보다, 늘 사고 치고 울상인 영옥의 손을 몇 번이고 잡아주었다. 그럴 때마다 소녀는 착실히 살아온 것에 대한 보답이 고작 이건가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밖에도 이해하기 힘든 사람은 많았다. 험담하면서도 계속 만나는 부인들, 때리는 남편을 감싸고도는 아내, 모자란 아들을 대놓고 치켜세우는 엄마, 절친의 애인을 빼앗은 죽마고우, 미약한 존재감을 죽음으로 겨우 어필한 선생 등등... 그게 다 지긋지긋한 현실을 부정하려는 각자만의 방편이었으나 결코 정답이 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돌을 던질 수 있는 ‘죄 없는 자‘란 아무도 없었기에, 서로를 욕하고 탓하면서도 어떻게든 계속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 곧 인생이자 요지경 세상이었다. 진희는 온통 오답만 체크하는 어른들의 세계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받아들인다.

삶이란 장난기와 악의로 차 있다. 기쁨을 준 다음에는 그것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에 장난기가 발동해서 그 기쁨을 도로 뺏어갈지도 모르고, 또 기쁨을 준 만큼의 슬픔을 주려고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너무 기쁨을 내색해도 안 된다. 그 기쁨에 완전히 취하는 것도 삶의 악의를 자극하는 것이 된다. - 343p


12살의 진희도 언젠가는 저 어른들의 세계로 들어가야만 한다. 삶을 조롱하기 위해 세상이 존재한다면, 최소한 놀리는 재미가 없다고 느끼게 해주자는 판단을 내렸다. 상처받기 싫어서 보이는 진희의 방어기제들이 안타까우면서도 이해되는 나 자신이 싫어진다. 어른이란 다 그런거야 라는 변명을 애써 삼키고 있는 내 모습이 가여워서. 이제는 오답도 정답 중에 하나라고 믿게 된 내가 슬퍼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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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8-13 02: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오별 실시간으로 본 건 처음인 것 같다 ㅋㅋㅋㅋ 리뷰부터 흥미롭습니다. 담아가요! 이사도 축하드리고요 😆

물감 2023-08-13 14:23   좋아요 1 | URL
워낙 별점폭격기라서 저의 별다섯 기준이 뭔지도 잊어버렸어요. 딱히 흠 잡을 게 없다면 오별 줘버리죠 뭐 ㅋㅋㅋ 여러 독서 커뮤니티에서 자주 언급하길래 궁금했었는데 과연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피곤한데도 이렇게 리뷰까지 쓰고 싶어질 정도로요^^
‘진희‘가 잠자냥 님하고 되게 비슷해요. 어쩌면 은오 님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까 하네요. 읽게 된다면 한 번 느껴보시길요ㅋㅋㅋ

2023-08-13 14: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8-13 14: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잠자냥 2023-08-14 17: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의 선물> 커버가 이렇게 달라졌군요! 은희경 작품 중엔 이 작품이 원탑 같습니다. 리뷰도 잘 읽었습니다~

물감 2023-08-14 18:08   좋아요 1 | URL
보면 볼수록 화자가 리틀 잠자냥..... ㅋㅋㅋㅋㅋ
너무 좋았어서 다른 작품들도 봐볼까 했는데 이 작품만한 평이 잘 없더라고요?
일단 좀 더 지켜보기로...

다락방 2023-08-15 22:02   좋아요 2 | URL
은희경 작품 중엔 이 작품이 원탑이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물감 2023-08-15 22:12   좋아요 1 | URL
어쩐지 이것만 읽어도 된다는 말로 들리네요ㅋㅋㅋ

페크pek0501 2023-08-17 2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엄청 재미있게 읽은 책이에요. 그다음 은희경 작가의 소설을 또 사 보게 되었는데 이것만 못했다는...^^

물감 2023-08-17 21:45   좋아요 1 | URL
진희의 조숙함과 순수함의 균형을 잘 잡았더라구요. 요즘 젊은 친구들은 이런 글을 재밌어하긴 할까 싶네요ㅋㅋㅋ 6070문학도 어느새 고전이 돼버린 현실...ㅋ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0
헤르만 헤세 지음, 황승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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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를 참 좋아하지만 이 작품은 전혀 그럴 기분이 안 든다. 이렇다 할 서사도 없고 주제나 메시지도 느껴지지 않고, 그렇다고 막 의식의 흐름도 아닌 어중간한 전개 방식. 이제껏 보아 온 작품들과 전혀 다른 스타일을 해갖고 아주 그냥 당황했다. 분량이 짧았기에 망정이지, 길었으면 바로 포기했을 정도였다. 나 말고도 많은 독자들이 별점을 짜게 주긴 했네. 또 나하고만 궁합이 안 맞는 줄 알았더니 그건 또 아닌듯해서 기분은 좋다.


나는 노래에서 멜로디가 가사보다 중요하다고 본다. 그것처럼 소설에서는 문장보다 스토리가 더 우선이다. 이런 성향 때문에 이번 작품과는 정말 상성이 맞지 않았는데, 자연의 아름다움과 끓어오르는 감정 등을 시적 표현으로 잔뜩 도배해놨기 때문이었다. 이해는 되는 게, 주인공이 시인 이태백을 너무나 동경한다는 설정이라서 그렇다. 하여 문장 문장마다 시처럼 써놔가지고 읽는 데 아주 곤욕을 치렀다. 시의 아름다움은 짧은 단락 속에 깃든 강렬함에 있다고 보는데, 그런 기교를 남발하고 있으니 1절만 하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화가 클링조어는 자신의 죽음이 다가왔음을 인지한다. 이유는 안 말해주는데 아무튼 그렇다고 한다. 정처 없이 돌아다니고 술자리 몇 번 가지다 옛 친구에게 편지 한통 써주고 끝나는 이야기. 아, 마지막에 자화상을 그리긴 했다. 그래 뭐, 죽음을 목전에 둔 이의 허망함을 그린 내용이라면 오히려 낭만 있게 느껴지기도 한다. 죽음과 전혀 무관하다는 듯한 태도와 언행은 보기에 따라 완벽한 스웩이자 힙하다고도 하겠다. 하지만 클링조어가 그런 말들로 포장해 줄 만한 깜냥은 아니었다. 솔직히 이 작품이 좋았다는 분들은 모두 문장력만을 칭찬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강조하는 내용이 있었으니, 바로 예술가의 몰락이다. 아무리 멋들어진 그림 한 폭을 완성해도 세월이 가면 색을 잃고 표현도 무너져버린다. 여기서 헤세의 몰락은, 낡은 것을 내보내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세대교체의 개념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기존의 예술성이 무너지고 새로운 내면을 통해 재탄생한 예술성과 탈바꿈하는, 새로운 감각의 질서를 말하는 듯하다. 나름대로 해설을 요약해 본 건데 이해는 되지만 정리하기는 어렵다. 아무튼 감각의 교체를 주장하고, 독특한 문체를 사용하게 된 배경에는, 1차 대전을 지나온 저자의 심경 변화에 있단다. 징하게도 안 풀리는 헤세의 인생사를 보노라면 충분히 납득이 간다. 그러나 이 같은 해설과 보충 설명이 필수인 작품들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모름지기 작품의 본 내용만으로도 알아듣고 이해하고 해석할 수가 있어야 한다. 여러 사람들이 난해해한다면 그건 독서력을 탓할 게 아니기 때문이다. 또 이런 작품이 있을까 봐 걱정되지만 헤세 뽀개기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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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8-07 09: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안 읽고 싶더라니...... 영원히 안 읽을 목록에 추가 완료. 감사. ㅋㅋㅋ

물감 2023-08-07 13:51   좋아요 1 | URL
이걸 안 읽으셨다는 사실이 놀라운데요? 정녕 헤세가 쓴 책인가 할 정도였습니다... 헤세도 욕 좀 먹어보고 그래야죠ㅎㅎㅎ

잠자냥 2023-08-07 14:06   좋아요 1 | URL
헤세는 주요 작품? <데미안>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수레바퀴> <싯다르타> <황야의 이리> <크눌프>만 읽었어요. 그나마 대부분 10대 때 읽은 거고, <황야의 이리> <싯다르타>는 성인 때 읽었는데 그냥 그랬고요. ㅋㅋㅋ 성인이 되어 다시 읽어 본 <데미안>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도 아, 괜히 다시 읽었다 싶어서 헤세는 이제 그만 졸업...하려고 했으나 물감 님이 말씀하신 <로스할데>와 <유리알 유희>까지만 읽어보고 졸업하려고 합니다.

물감 2023-08-07 14:24   좋아요 1 | URL
전 아직 못 읽은 작품이 많은데, 잠자냥 님처럼 장편만 다 읽어볼 계획이에요. 죄다 비슷비슷해서 질리기도 한데 어쩌다 읽으면 나름 쏠쏠한 맛이라서요ㅎㅎ 날 더운데 건강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