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정의 발화점 2 - 완결
박선우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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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6 박선우.

 하안이는 은성이를 좋아했다. 몸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는 것이 보일 만큼. 그런 하안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효정이는 하안이를 좋아하게 되었다. 활활 타는 불이 옮겨 붙은 것 같았다. 잘 모르던 사이에서 조금 아는 사이, 친해질락말락 하는 사이, 그리고 좋아하는 사이, 좋아한다고 말했지만 거기서 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이, 이런 미묘한 관계들의 지점을 잘 그린 만화라고 생각했다. 사실 많은 사이들이 그렇게 무 자르듯 선명하지 않고 또 가까워질 듯 멀어지기도 한다. 서사에서나 아예 헤어지거나 뭔가 명확하게 관계에 명명이 되거나 영원한 사랑 어쩌구 하는 거지. 그래도 친절한 작가, 핍진성 바르느라 조금은 고구마 먹은 기분이 될 독자들에게 마지막에는 원하는 장면(?)을 산뜻하게 건네주고 마무리했다.

 수능 국어 단골 작품 중 춘향전을 보다가 든 생각이다. 겨우 열여섯 된 여자아이 남자아이가 만난다. 그네 타러 나온 여자아이 겉모양만 보고 남자아이가 하인 보내서 찔러본다. 편지도 주고 어쩌고 저쩌고 플러팅 성공, 여자애네 집에 가서 폭풍 섹스한다. 정든다. 그런데 우리 아빠가 회사 다른데 발령 났어…서울로 가야 해… 여자애는 야 니가 나 꼬셔 놓고 뭐야 나 죽이고 가든가 데리고 가… 그러다가 체념하고 가라 가… 주안상 잘 차려 먹여 보내준다. 고을에 새 관료새끼가 춘향이 예쁘다는 소문 듣고 와서 야 니 엄마 기생? 너도 기생, 나랑 섹스 해, 한다. 춘향이는 나 이미 몽룡이랑 섹스, 다른 놈이랑은 할 생각 없어, 해 하라고! 안 하면 감옥 가라… 진짜로 감옥에 가두고 나중에 몽룡이가 와서 풀어준다.


 그때는 열여섯이면 어른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열아홉 스물 이렇게 설정해도 뭔가 논란의 서사일 듯하다. 과거 사람들은 삶이 짧아서 그랬던가 그래서 고민할 시간이 짧았던가 좋아하는 마음 뒤에 상대와 뭘 하게 될지 뭘 바라는지 명확했나 보다. 요즘은 사랑은 그런게 아니라고, 너는 나랑 하려고 만나는 거냐고 개처맞을 일이 많아서 하여간에 뭐든 삼가야 한다. 


 청소년기의 사랑은 더 그렇다. 그랬다. 무얼 이루고 무얼 바라는지도 모르고 좋아하는 마음은 커지기만 하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대개는 그냥 좋아만 하다 끝났다. 좋아하는 마음을 들키든 밝히든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귀는 애들은 고3 때까지도 되게 예외적인 경우였다. 경찰대 준비하던 같은 반 남자아이는 옆반 여자아이를 쉬는 시간마다 자기 무릎에 앉혀 놓고 놀았다. 그게 그렇게 열받더라… 왜 내가 열이 받던지 ㅋㅋㅋ 우리 시대에는 춘향이 몽룡이 되기는 드물고 되어서도 그닥 좋을 일도 못 된다. 고딩엄빠 이런데 나왔다가 조혼의 폐해만 보여주고 조기이혼하는 엔딩만 간간히 들리고… 뭐가 좋다 나쁘다 그런건 아니고 그냥 그렇더라고…


 효정이는 하안이를 좋아하게 되면서 “사랑은 결국 솟구치는 불길 속에 자신을 던져넣는 것 만큼이나 지독히 괴로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조금만 맞는 이야기 같았다. 사랑의 감정은 자각했는데 거기서 뭘 더 어쩌지 못할 때 그런 것 같다. 이해 받고 아끼고 함께 좋은 순간을 나눌 수 있으면 괴로움이 본질은 아니겠지. 그런 좋은 것들을 갈망하지만 그것이 외부의 방해물이든 혹은 관계 자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든 얻지 못할 때 겪는 고통이지 싶다. 그런데 그렇게 이루지 못해 괴로운 건 사랑만은 아니다. 성적 향상도, 취업도, 선거 당선도, 공모전 당선도, 한정판 굿즈 획득이나 최애 가수 콘서트 티켓 획득도 그러하다… 그런 욕망조차 사랑의 범주 안이겠지만… 그러면 살아가는 중의 너무 많은 것들이 다 사랑하는 일이겠다. 


 읽은 것도 쓴 것도 너무 없어 주절주절 말이 많네… 이 웹툰 완결은 2019년도였다는데 단행본은 2023년에 나왔다. 오늘 3년째 공부하고도 개빠가인가 나아질 기미 안 보인다고 징징 좌절했는데 연재+책 엮기 까지 저렇게 걸린 거 보면 내가 징징댈 일도 아니겠다… 아니 그래도 수험 생활 9수 10수 할 수는 없잖아… 그러면 사람이 좀 많이 망가지지 않겠니… 그런 망가진 사람들도 사랑하겠다고 사랑하는 사람 지키겠다고 개삽질도 하고 그러지 않니… 부정칭 미지칭 읍읍 아무말 대잔치

나는 이상하게 이런 장면이 좋더라. 생활의 지혜. 여름 끝나면 보호 덮개를 꼭 씌워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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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essa 2024-05-06 1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Wow

반유행열반인 2024-05-07 15:53   좋아요 0 | URL
Wow!!! lol
 
선생, 세상의 그물을 조심하시오 태학산문선 103
이옥 지음, 심경호 옮김 / 태학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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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3 이옥.

수능 국어공부는 공부라기보다 여가 생활에 가깝다. 문제 풀이하고 틀리면 물론 개빡치지만, 조금이라도 들어보거나 좋아하는 작가 작품, 관심 분야 지문이 나오면 흥미가 생긴다. 고전 시가나 산문은 영 꼴보기 싫고 지긋지긋했는데, 자꾸 보아야 재밌다, 이것도 그렇다. 발췌본으로 토막토막 보는 고전들도 이제는 재밌다. 아무렴, 들여다 봐도 도무지 늘 궁리 안 하는 수학, 과학에 비하면 이건 여가생활 맞다.

빈출 작가 중 이옥이란 이름이 눈에 띄었다. 글은 그냥 고만고만했는데, 자꾸 나오니까 궁금해서 산문집이랑 어린이책이랑 갖춰 놨다. 그중 하나를 펼쳤는데, 한문을 한글로 번역한 학자 선생님이 문장을 엄청 힘줘놔서 아니 왜 이렇게 멋을 부려...했다. 이옥의 수많은 수필, 소설, 전 등등 중에서 몇 작품을 선정하고 번역자가 글 끝마다 논평 같은 걸 덧붙여 놨다. 책 머리에 이옥에 대한 소개를 읽고 그제서야 어떻게 살다간 사람인가 알았다. 왕족 후손이긴 한데 뭔 고조부였나 위에 조상이 서얼이라 이옥 신분도 그닥 높지 않았다고 한다. 글깨나 써서 성균관 들어가고 벼슬을 할랑말랑, 그런데 당시에 정조가 문체반정하는 때라서 이옥의 독특한 글쓰기, 문체, 이런 걸 정조가 되게 싫어했나 보다. 얘 문장 고칠 때까지 아침마다 깜지 50줄씩 쓰라고 해, 이러다 못해 야 그냥 군대 보내, 와...죄 지은 벼슬아치나 양반은 군대로 유배처럼 보내버렸는데 이옥은 자꾸 그렇게 쫓겨났다. 군대 끌려갔다가 다시 초시 장원해서 까방권 생겼는데 까먹고 관청에 스스로 신원회복 같은 거 해야 되는데 안 해가지고 벼슬길은 막히고… 그래서 그냥 지방 가서 글쓰고 놀다가 오십대에 죽었다.
계속 공부하고 글쓰고 시험 보고 했던 거 보면, 그리고 좀 잘 써서 계속 시험 통과한 거 보면 나름 벼슬길에 뜻 있고 능력도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뻔한 거 쓰기 싫다고 문체 안 바꿔서 쓸쓸하게 살다 간 인간… 결국엔 이런 반항아들의 글이 남는다. 그당시 관료는 뭐했나 별로 안 궁금하지만 이 사람이 남긴 글은 궁금하지 뭐니. 근데 읽어보면 독특한 깨알 디테일이 있긴 한데 또 막 엄청 명문 그런 건 잘 모르겠다. 어디에 어느 아무개 하고 시시콜콜한 걸 많이도 남기긴 했다. 막 왕가의 일 벼슬아치 나라의 일 이런 거 말고 일반 민중 이야기 떠도는 이야기 아녀자 이야기 이런 걸 적어 둬서 아,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거 비슷하다… 이렇게 알게 해줬다. 소설도 이것저것 남겼는데, 수능 국어 모의 문제 풀다 한 번 읽은 심생전을 책 말미에서 한 번 더 읽으니 또 새로웠다. 다른 신분 간 사랑 나누다 결국 일찍 죽어 버린 연인 이야기를 적어 두고, 이 이야기 출처가 어려서 선생님이 해주시면서 이렇게 연애질 하라는 게 아니라, 하물며 남녀 일도 이렇게 정성을 다하면 여자 마음이 열리는데 니들 공부 열심히 하면 뭔들 못 이루겠니...이러고 교훈적으로 전한 게 오래 기억에 남아 책 뒤져 보니 비슷한 야사가 많아서 여기 글로 남깁니다, 하고 뭔 액자에 액자 구성으로… 괜히 패관문학 같은 거 쓴다고 임금님한테 쳐 맞을까 봐 눈치보면서 교훈도 바르고 내가 지은거 아니고 어디서 주워들은건데...이렇게 틀까지 갖추며 눈치보면서도 그래도 적어두고 싶어 못 견디겠다!!! 이러는 천상 글쟁이…

이옥도 소소하게 재미나게 읽었지만, 정말 뭔 웹소설 같은 거 쓰고 싶은데 소재 없으면 고개를 들어 고전문학을 보라…하고 싶을 정도였다. 하렘물의 정석 구운몽, 기담 금오신화 이런 거 말고도 진짜 막장 전개에 재미난게 많다. 어제는 수능특강에 소개된 삼선기 다이제스트를 공부(?그냥 논 거 아니냐…)했는데, 이게 또 스토리가 스펙타클했다.(궁금하면 수능특강 문학 참조…)

이렇게 온갖 책 읽을 시간을 잃은 유폐된 수험생에게 숨은 명작, 숨은 반항아들 소개해주는 수능 국어는 한줄기 빛… 작가가 불행할수록 읽는 나는 즐거운 사례는 늘어만 가고… 난 그냥 명작 안 남기고 행복하게 살다 갈란다…했지만 이 나이에 수능을 준비한다고 꼴값하는 바람에 행복하게만 살기는 이미 글른 듯… 다음 독서는 수능특강 연계 작가 이문구의 소설집들로 픽...ㅋㅋㅋ 오늘 우리동네 리씨 문제 지문으로 읽는데 이거도 너무 재밌어서 풀버전으로 봐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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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5-03 08: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수능 국어로 여가 생활를 하시는군요?! 근데 이옥이란 사람 재미있네요. 글도 궁금해짐… 그나저나 유열 님 웹소설 쓰시면 깨알 재미날 거 같으니, 올해 수능 뜻대로 안 풀리면…. 웹소설 씁시다.

반유행열반인 2024-05-03 10:44   좋아요 1 | URL
저는 웹소설이란 걸 존재만 알았지 도무지 읽을 엄두가 안 나서 + 대중 보편적인 감정과 취향 파악이나 공감 능력도 부족해서 창작도 어렵지 않을까요? 무엇보다도 ‘책만 읽던 서생 두 남장 기생 제자에 훼절 당하고 기생학교 교장 되다!’(삼선기 대략 줄거리…) 이런 제목 붙인 글 읽기도 쓰기도 저에겐 너무 고난도 ㅋㅋㅋㅋ으으으 ㅋㅋㅋㅋ

잠자냥 2024-05-03 11:04   좋아요 1 | URL
웹소설 계 평정중이신 고라니상한테 좀만 배우면 될 거 같은데요? 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4-05-03 12:55   좋아요 0 | URL
평정은 그분이계속하시면 되고 남에게 배우는 걸 제일 잘 못하는 저는 그냥 이렇게 까까까 독후감이나 쓰고 살다 죽는 걸로….ㅋㅋㅋㅋㅋ
 



 네 권만 어떻게 골라. 네 권이나 어떻게 골라. 모아 보니 다들 좋긴 한데 어딘가 모서리 하나씩 콩콩 빻은 책들이다. ㅎㅎㅎㅎㅎ

 닉네임 다섯글자 제한 모르고 막 적었다가 열인됨… 나 멕일려고 여섯자 안 한 거지…



오늘 치인 시 한 편. 그지 손글씨. 오세영 시집 살 것 같다. 전집(절판) 말고 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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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 2024-04-23 2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명의 벌레처럼 무명을 ㅜㅜ

반유행열반인 2024-04-23 22:42   좋아요 1 | URL
이름이랑 빛이랑 다 없는데 나는 다 있다 ㅋㅋㅋ 저는 세상의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다. 다만 가까이 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헉 했는데 치이는 부분이 다 다른듯요 ㅋㅋ 공부하다 보면 여기저기서 온갖 유수 한자 다 다른 단어가 나와서 저는 그때마다 유수님을 떠올립니다 ㅋㅋㅋ

유수 2024-04-23 22:44   좋아요 1 | URL
저도 거기도 치였는데(질척) 지금 스스로가 벌레같아갖구 꽂혔나봐요

반유행열반인 2024-04-23 22:45   좋아요 1 | URL
아이참 이렇게 반짝거리는 벌레가 ㅋㅋㅋ너는 유충 나는 반충 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4-04-23 2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 이벤트 남들 올린 책 보는 거도 되게 재미있다. 나랑 백년의 고독이랑 죽음의 한 연구 겹치는 사람보고 쿵 해서 오, 누구야 밤샘소년 어딨어 나와, 이러고ㅋㅋㅋ

잠자냥 2024-04-24 10:37   좋아요 1 | URL
왜 사드는 안 넣으셨쬬? 실망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4-04-24 14:15   좋아요 1 | URL
걔는 책은 별로고 인생책 아니고 인생인생이어서???(???)잠자냥남이 왜 실망하셔요…대체 왜…

잠자냥 2024-04-24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엿 많이 드셨나요? 🤣

반유행열반인 2024-04-24 14:15   좋아요 0 | URL
??? 이거 욕한 건가요????? ????

잠자냥 2024-04-24 14:20   좋아요 1 | URL
엥? 아침에 읽을 땐 분명 ˝나 멕일려고 여섯자 안 한 거지…˝에 엿이 있었는데....!!!!😱😱😱

(제가 잠이 덜 깼나 봅니다..... 헐.. 욕 아닙니다. 죄송)

잠자냥 2024-04-24 21:21   좋아요 1 | URL
아 유열 님 제 댓글 욕으로 듣고 사라지셨어 ㅠㅠㅠㅠㅠㅠㅠ

반유행열반인 2024-04-25 19:34   좋아요 1 | URL
우리 자냥이 언니… 제 또래 젊은이인가 했는데 없던 엿 글자도 보이고 노안 초기 증상을 보니 아무래두 저보다 한참 언니이실 것 같습니다 ㅋㅋㅋㅋㅋㅋ 막 던지는 것 같아도 은근 선타기에 신경쓰시는 군요 ㅋㅋㅋㅋ

잠자냥 2024-04-25 23:54   좋아요 1 | URL
아 제가 예의에 어긋나는 건 또 싫어해서… 다행입니다. 오해로 상처드렸을까 봐 진심 그제어제오늘 걱정. 🥹

공쟝쟝 2024-04-24 17: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는 박상륭을 담아둡니다… 사드 왜없냐며 ㅋㅋ

반유행열반인 2024-04-25 19:36   좋아요 1 | URL
박상륭 진짜 저는 외롭게 개샹마웨로 살다 이거저거 막 써 갈기고 디진 변태들이 왜 이리 사랑스러운지…살아있으면 좀 덜 사랑스러웠을 듯 ㅋㅋㅋ

새파랑 2024-04-24 20: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죽음의 한 연구> 사놓긴 했는데 손이 안갑니다. 열반인님 인생책이군요~!!

그런데 <새버쓰의 극장>은 안보이는군요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4-04-25 19:37   좋아요 1 | URL
진짜로 새버스의 극장 한 3초 고민하다가 다독한 책 위주로 골랐습니다. 새버스도 한 십년 후 한 번 더 읽고 그때도 좋으면 인생네권을 다섯권으로 갱신하는 것으로 ㅋㅋㅋ
죽음의 한 연구는 이십년 간격으로 두 번 읽었는데 두 번 다 좋더라구요. 저는 보뱅을 못 좋아하잖아요. 다 각자 맞는 책의 결이 있지 싶습니다.
 
효정의 발화점 1
박선우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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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1 박선우. 

 웹툰을 안 본지 아주 오래되었다. 얼마나 오래되었냐면 기안84가 웹툰 연재 마치고 만화를 안 그린지가 3년쯤 된 것도 오늘 알았다. 이말년도 침착맨이 되고, 만화가들은 다들 연예인이 되어 떠나가는 구나… 가끔 자기 블로그에 미친 만화 그려 올려주는 귀귀님 사랑합니다… 종이 만화책만 보는 놈이 되어 송구합니다…

 중고책 무더기로 사다가 제목이 독특해서 하나 담아두었다. 효정의 발화점이래. 왠지 어디서 한번 마주쳤을 이름 같기도 하고, 안개 낀 한강물과 도로를 함께 내려다 볼 수 있는 효사정도 생각나는, 그런데 발화점이라면 불이 붙잖아. 아무 때나는 아니고 어떤 조건이 갖춰진다면. 일단 이름은 잘 지었다 해서 모셨다. 그리고 다른 판매자한테 2권도 주문해 놓고, 오늘 펼쳤다. 


 학교 다닐 때 나는 주로 배경이었다. 친한 애들이 단체로 웃으며 찍어 올린 사진 뒤편에 책상에 턱을 괴고 앉아 (겉보기엔) 공부하고 있는 엑스트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공부 좀 하고, 노래도 좀 하는데다 딱딱한 나름의 분위기가 있어 존재감이 없진 않았지만 이너서클안에 들어본 적이 드물었다. 그와중에 내가 들어있는 공동체 안에서는 꼭 누구 하나를 짚어 좋아하곤 했지만(공동체가 여럿이면 대상은 복수일 수도…) 미처 친해지기도 전에 좋아하는 걸 들통나서 서먹해지고 결국 친해지지도 못하는 뭐 그런 어린이였다. 엄청 밀착되어 끈끈한 사이는 드물었지만, 늘 반목하는 사람들은 있어서, 왜냐면 나란 새끼 아닌 건 아니라고, 싫은 건 싫다고 말하는데 스스럼없었고, 인정 투쟁에 목숨 거는 인싸들한테 어머어머 멋져멋져 시녀짓하는 것도 대놓고 거부하는 편이라(오히려 우상파괴범에 가깝게 제일 잘나가는 애들의 못난 면을 가리키곤 해…) 못 친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대놓고 왕따 당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런 초딩이 자라면 또 그런 어른이 됩니다…


 만화 속 고1 효정이도 처음엔 피곤해, 인간관계 부질없다, 어린애치고는 너무 무심하고 체념적으로 학교 생활 기대 안 했지만 같이 놀자고 덤벼드는 미소랑 로솔이 같은 친구도 생기고, 이상한 소문의 중심인 박하안 또한 효정에게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오려 든다. 만화 속 아이들의 관계, 복잡한 감정, 배척과 친밀감, 이런 것들이 만화나 드라마 속 클리셰인지 실존의 반영인지 나는 잘 모르겠긴 하다. 예나지금이나 나는 온라인 친구가 더 많고, 십년 이십년 오래도록 여태 연락 주고 받은 친구들도 죄 온라인 공동체(피씨통신 락동호회, 다음의 만화가 팬카페, 알라딘?ㅋㅋ) 인연이고, 대학 때 그나마 친해지고 이후로도 연이 닿던 친구들도 메신저나 SNS에서 수다를 많이 떨던 경우였다. 만화 속 아이들은 (스마트폰 등장 이전 과거 회상장면이라 그런지) 서로 전화 연락을 주고 받는 장면이 거의 드물고, 학교에서 모여 떠들고, 같이 떡볶이를 먹으러 가고, 방과후 귀가길을 함께 걷고, 빈집에 들어가 속내를 터놓는다. 어디서나 나쁜 소문을 내고 다가오다 멀어지고 그러다 못해 마음을 다칠만큼 나쁘게 대하는 아이들은 존재해서, 그런 아이들 때문에 등장인물들이 겪는 곤란은 평범한 듯 보편적인 듯했다. 다만 어떤 강렬한 마음 때문에 온몸이 활활 불타는 환영?에 휩싸이는 건 그나마 허구적이고 흥미로운 소재랄까… 


 시시콜콜해서 좋았고, 고1 이야기이지만 중1 큰어린이가 좋아할 것 같아서 옛다, 가져다 줄 생각이고, 주문한 2권은 얼른 오거라…ㅋㅋㅋ


+책 속 짤 줍기

강하게 키우기. 속내랑 다른 해석이지만 이런 거에 잘 꽂힘 ㅋㅋ


츤데레. 까까 가져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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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살 어린이가 종이접기에 푹 빠졌다. 유치원에 종이접기 책 있는 걸 보고 접다 빠졌는지 집에 돌아와서 가방을 뒤집어 쏟으면 색색의 괴물체들이 우수수수… 유치원 색종이 얘가 다 쓰겠다 싶어 쿠팡에서 1000장짜리 한 상자를 사줬다. 사면서 이거 두 박스가 할인율 더 높은데? 했는데 곁의 사람이 하나면 되지 해서 그치, 저거 다 접기도 전에 시들해질지도…했지만 과소평가였다. 한 달도 못 되어 색종이 500장이 넘게 사라졌으니…


 큰어린이 방을 뒤져보니 초등 저학년-중학년 때 마련해 준 종이접기책이 몇 권 있어서 그걸 주자 설득해서 내놓았다. 나랑 동생이 어릴 때 보던 종이접기 책도 있고, 가장 최근 것은 3-4학년 쯤 사준 유튜버로도 유명한 네모아저씨 책이었다.


 작은어린이는 실력 대비 야망만 큰 편이라 책을 받자마자 맨 뒷장 끝판왕 사람 접기를 하겠다고 그런데 어렵고 안 된다고 몇 날을 끙끙댔다. 하다가 안 되면 울고불고 바닥을 주먹으로 치며 원통해하고…(수학문제 못 푼다고 질질 짜는 나를 보면 저렇게 속이 터지겠구나…) 어느날 보다 못해 내가 한 번 접어줬더니 신이 났다. 그러고는 색종이 위에 사인펜으로 보조선을 긋고 난리를 치더니 결국 사람 접기에 성공. 그리고…

사람 접기를 활용한 홀로코스트(…) 재현 구성

 바닥에는 무수한 종이 사람이 쌓여갔다… 쌓아둔 걸 보면 조금 섬뜩할 지경…살구색 색종이로 접은 건 조금 더 무섭네…


 책이 있어도 지맘대로 하는 성질 탓에 나름 창의적 접기를 시도하는데, 분명 책에는 2차원 동백, 무궁화꽃이었는데 얘는 접고 보니 3차원… 맛있는 화과자 같다고 내가 집어 먹는 시늉을 하니 아이들이 웃었다.

이런 꽃 접기 설명서를 보고

대체 왜 이런 꽃이 나온 것이냐. 동백, 무궁화, 접시 위에 담은 화과자 같다.

정체 불명의 형체 수십 개를 접어 늘어 놓기도 하고…이건 마치 울산 반구대 암각화의 고래 무리. 새끼 고래도 있구나…


 지난 주에는 작은어린이 생일이 있었는데, 모진 어미는 사 달라는 거 다 사주고 매일매일이 생일날인데, 생일 선물은 색종이 한 상자나 더 사줄게, 지금 있는 거 다 쓰면… 이러고 퉁치려다가… 알라딘에 들어가 주섬주섬 새로 나온 종이접기 책을 검색해서 아침에 주문해서 저녁에 받는 당일배송으로다 새로 한 권 마련해 드렸다. 어린이가 쌍날 표창 접고 싶은데 유튜브 보고 하긴 너무 어려워…했던 걸 기억해서 찾아보니 표창 접기로만 한 권 가득 채운 신간이 있더라…

 대부분 색종이 두 장 이상, 심한 건 색종이 8장까지 써야 해서 작은어린이 수준엔 어렵고…나랑 14살 큰어린이가 몇 개 접어주고 그거 보며 작은어린이도 열을 올리고 거실에는 색종이들(접은 것과 망친 것)이 쌓여가고… 큰어린이가 색종이 8장으로 접어준 유닛을 내가 조립해서 작은어린이가 노래를 부르던 레인보우 표창을 완성하고만 나는 뭔 정신인지 다음 날 한 권 더…(그만 사!)


종이로 접은 표창과 팽이들


 종이의 시대는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그나마 내 대신 접어줄 큰어린이(미안)가 있어서 다행이지만… 저 종이접기책들은 다 어린이용이 아닌 보호자용이었구나…


 팽이 종이접기책 사면서 집에 있던 알사탕 책 스핀오프 같은 게 나왔길래 같이 주문했다. 알사탕 제조법의 비슷한 장면 최근에 스폰지밥 보니까 나왔다. 스펀지밥이 물속에서 물방울(비누방울 같은 거) 불려면 이렇게 저렇게 요렇게 자세 취하고 춤추고 돌리고 한 다음에 불면 된다고… 징징이가 말 안 듣고 맘대로 불다 잘 안되었는데 스펀지밥이 시키는대로 하고 나니 잘 되더라… 종이접기도 사탕 만들기도 물방울 불기도 기본이 중요하지… 작은어린이는 책을 스윽 훑더니 사탕 먹고 싶다아…사탕… 사탕 타령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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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24-04-23 2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차원 꽃이 3차원 화과자가 되는 창의력! 우리도 종이 한 장으로 행복하고 즐거웠던 시절이 있었는데..

아이가 참 잘 만드네요

반유행열반인 2024-04-23 22:47   좋아요 1 | URL
지금도 종이 몇(백)장(책)이면 하루이틀며칠 너끈하잖아요 ㅎㅎㅎ 어린 솜씨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와같다면님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