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더듬이 주교 동서 미스터리 북스 107
얼 스탠리 가드너 지음, 장백일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주교는 말을 더듬지 않는다.

라는 당연한 사실에 궁금증을 느끼고, 페리 메이슨은 자신의 사무실로 찾아와 자신이 멜로이 주교라고  하며 의뢰하는  22년전의 과실치사 사건의 변호를 맡기로 한다. 상대는 백만장자 은행가 렌월드 가문이다.

한시간 정도의 재미있는 시리즈물 드라마를 본 기분이다. 추리소설이 갖추어야 할 점들은 갖추고 있는 책이다. 소설의 말미에 등장하는 다음 작품에 대한 예고라고도 할 수 있는 의뢰인의 등장과 같은 장치에, 독자들은 다음 작품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사볼지도 모르겠다. 매주 보는 드라마를 기다리듯이.

페리 메이슨의 첫인상은 '거만함'이었다.

["가난한 여자를 위해 백만장자를 상대로 하여 싸워볼 마음도 있습니까?"

 메이슨이 오만한 표정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의뢰자를 위해서라면 악마라도 상대합니다." ]

그런 나의 인상은 뒤에 가서 더욱 더 굳혀졌다.

["블래너 사건에는 미스터리적인 요소가 있어. 뭔가 시적(詩的) 인 정의를 느끼게 하지. 가슴을 죄는 듯한 인생의 드라마적 요소를 남김없이 갖추고 있다고. 지금 나는 반드시 마지막까지 싸우겠다는 기분은 아니야. 다만 내가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는 기능을 그 시적 정의를 지키기 위해 쓸 작정이야."]

페리 메이슨의 투사 같은 성격이나, 그것을 겉으로 다 드러내는 모습이나, 그의 애인인 비서 델라 스트리트를 거리낌없이 위험으로 내몰아 미끼로 삼는 장면이나, 그런 그를 위해서라면, 감옥에 들어가는 것도 불사하는 비서 델라나 조금씩 조금씩 거슬리는 부분들이 있긴 하지만, 별로 거리끼거나 한것은 아니 것이, 얼 스탠리 가드너의 이 작품은 '시간죽이기' 용 추리 소설이라는 것을 읽으면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레밍턴 스틸'이나 '제시카의 추리극장' 같은 시리즈물을 볼 때, 우리는 사건 그 자체나 그 사건에 얽혀 있는 인물들의 비극이나 심리 보다는 우리의 주인공이 어떻게 사건을 해결하고, 어떻게 궁지에서 빠져나오나에 관심을 가진다.

페리 메이슨 시리즈도 그와 같다고 생각된다. 주인공이 좀 잘난체 한다고 해서( 그것 역시 그의 매력이지만) 우리는 그 주인공에 포커스를 맞추어 사건을 보게 된다. 매력적인 주인공과 흥미로운 조연들 . 예쁘장한 여비서와 투박한 사립탐정 폴 드레이크와 같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잎만 아름다워도 꽃대접을 받는다
이윤기 지음 / 동아일보사 / 2000년 7월
구판절판


우리 나라 사람들은 왜 고향부터 묻는지, 왜 출신학교부터 묻는지, 섬기는 종교부터 묻는지, 나이부터 묻는지 나는 그 까닭이 여간 궁금하지 않다. 어째서 상대에게서 자신과의 '동류항'을 찾아내려 하는지, 찾아내지 못하면, 다시 말해서 동류 의식을 느낄 수 없으면 견딜 수 없이 쓸쓸해 하닌지, 어째서 동류항을 찾아내고 그 안으로 들어가 동아리가 되면 아늑한 평화를 느끼는지, 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이 어째서 우습게 보이는지, 어째서 '불출'로 따돌리고 싶어지는지, 그 까닭이 여간 궁금한 것이 아니다.-227쪽

1453년 오스만 터키 군을 이끌고 지금의 이스탄불을 장악한 술탄 마흐메드는 아야 소피아를 파괴하지 않았다. 술탄 마흐메드는 대성당 옆에 회교 사원식 첨탑을 세우게 하고 그 대성당을 회교 사원으로 쓰게 했을 뿐 파괴한 것이 아니었다. 아야 소피아에는 성직자들이 문맹에 가까운 동방 교회의 신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그려 놓은 무수한 모자이크 벽화가 있었다. 그러나 술탄 마흐메드는 그 벽화를 훼손하지 않았다. 그 위에 회를 칠했을 뿐이다. 내가 찾아간 아야 소피아에서는 공사가 진행중이었다. 1964년부터 시작된 회칠을 뜯어내고 고생창연한 기독교의 벽화를 백일하에 드러내는 공사가 진행중이었다. 그러니까 회교도들은 기독교 교회의 벽화를 훼손한 것이 아니라 그 위에 회칠을 한 다음, 500년 동안 자기네 사원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아야 소피아의 , 성모자상이 올려다 보이는 돔을 두고 '장엄한 광경( Awe- Inspiring Generosity) ' 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내눈에 보인 것은 오스만 터키의 회교가 지닌 '장엄한 아량( Awe-Inspiring Generosity)' 이었다. 회칠이 벗겨지면서 드러나는 고대의 벽화를 보면서 나 자신에게 물었다. 오스만 터키 제국의 저 놀랄 만큼 관대한 문화적 유연성은 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제국을 경영할 역량을 가진 자들의 도량에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종교의 생성과 소멸에 대한 비극적 인식에서 나온 것인가?-24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