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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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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읽은 책을 덮고 그 옆에 나란히 엎드려 눕는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가슴속을 쿵쾅쿵쾅 뛰어다니던 말들이 일제히 몸을 숨긴다. 곧 어디서 맞닥뜨리게 될지 모를 말들의 고요가 긴장을 불러온다. 무엇으로 인해 이 책을 그렇게 서둘러 읽어버렸을까. 점점 소란스러워지는 머리를 애써 외면하면서 무엇으로 인해 나는 이 책의 끝을 어서 봐버렸으면, 싶었을까. 
  

  나에게 있었던 일, 을 생각한다.
  책 속 ‘열여섯의 나’가 아닌 나의 열여섯을. 3년을 입어 색이 바란 교복을 입고 고등학교 진학을 걱정하던 시절, 곁의 친구와 성적 때문에 은근한 신경전을 벌이던 시절. 선생님의 칭찬에 우쭐해지던 시절. 시를 옮겨 적고, 따라 써 보던 시절, 부모님의 식당에서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주문을 받고, 테이블을 치우고, 나보다 큰 쟁반을 들고 배달을 나가던 시절.
  나의 열일곱, 고등학교를 남녀공학에 진학하면서 매일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던. 키가 작고 몽둥이로 주걱을 들고 다니는, 웃는 얼굴이 수줍었던 과학 선생님을 오래 짝사랑했던 시절. 시인이 되고 싶었던 때.
  나의 열여덟, 하루가 하나의 생각을 물어오면서 늘 멍해있던 시간.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 절망들. 대학에 가고 싶어 친구들 몰래 공부를 하고 학교가 끝나면 독서실로 가던, 그 때. 그 때.
 『외딴방』 을 덮고 난 뒤 나는 자꾸 내게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들춰본다. 맨발의 나를 그 먼 시간에 떨어뜨려놓고 어서 ‘오늘을 캐어와’라고 말한다. 한 번도 정리해본 적 없었던 그 때의 일들. 갑자기 마주 앉게 된 그 때의 일들. 나는 웃다가 머리를 긁적이다가 시큰해지는 코를 세게 붙들어본다.

“적어도 문학 속에서는 지금 이 순간 이전의 모든 기억들은 성찰의 대상이 되는 거 아닌가. 오늘 속에 흐르는 어제 캐내기 아닌가. 왜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 지금 내가 여기에서 무얼 하려고 하는지 알기 위해서.”

  대학교 1학년 때 처음 만난 이 책은 그저 작가가 유년시절에 겪었던 성장통과 그 아픔이 지금의 글들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었다는, 그런 내용으로 이해했었던 것 같다. 책을 절반도 채 읽지 못하고 덮어두었다. 이제 7년이 흐르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이 책을 읽는 나는 자꾸만 가슴에 파문을 일으키는 ‘무엇’때문에 어지러워진다. 이제 지나왔으니 됐다고 생각했던 일들, ‘잘 버렸어’ 라고 생각했던 일들. 고요했던 수면 위로 순서 없이 둥둥 ‘무엇’들이 떠오르자 자꾸만 책을 읽는 눈이 문장을 잘라먹고 페이지를 떠난다. 책에서 읽은 게 모두 나의 이야기었나. 머릿속에 있는 것은 모두, 나의 먼 이야기들이다.

 『외딴방』속에서 읽은 ‘나’는 평온했던 집에서의 생활을 떠나 학교에 가기 위해 서울로 상경한 아이였다. 하지만 책 속에서 만난 ‘나’는 꿈을 갖고, 힘든 일을 만날 준비를 모두 마친 아이였다. 지금은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경험할 수 없을 많은 일을 겪으면서, 아파하고 갈등하면서, 큰오빠의 무거운 어깨를 보면서 조금씩 조금씩 성장하는 ‘나’. 그러나 현재, 서른을 넘겨버린 ‘나’에겐 그 때의 기억들이 너무나 아픈 통증일 뿐이다. 그래서 그 기억이 고개를 내밀 때면 손에 잡히는 무엇으로든 덮어 그 시선을 외면하려 했다. 이것 또한 아픈 통증. 작가는 이제 이 아픔과 마주앉아 있을 수 밖에 없다. 어떻게든 이 아픔과 눈을 마주하고, 말을 꺼내 이야기해야만 한다. 그것은 ‘열여섯의 나’가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들어간 ‘동남전기주식회사’에서 만난 사람들,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자신의 인권을 미처 챙기지 못하고 회사에 이용당해야 했던 여린 꿈과 야간학교에서 만난 학급 친구들에게 현재의 자리를 찾아주는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80년대의 나는 너무 어렸고, 바쁜 엄마 아빠를 대신해 할머니가 보살펴주시던 시절이다. 그때 유신말기 산업역군의 풍속화가 그려졌다는 사실을, 너무나 많은 사람이 자신의 인권을 지켜 살지 못했고 강한 자에게 노동을 착취당하며 빈곤한 하루하루를 어렵게 지나왔다는 사실을, 나는 국사책 속에서도 깨닫지 못했었다. 전해 들었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처럼 광주민주항쟁이 지나가고 12·12사태가 지나갔다. 그 시대를 그린 영화를 보면서도 잔인하게 죽는 사람들에 눈물만 났던 그때의 사건들. 하지만 그 사건들이 책 속에서 또렷하게 내 안으로 들어온다. 그 시절을 살아내야 했던 사람들의 슬픔. 잘 시간도 없이 공장에서 잔업을 하고 움직이지 않는 팔을 붙들어 열심히 나사를 박아야 했던 어린 여공들의 고통이 가슴에서 요동한다. 그 여린 몸에 가족의 생계를 매고 공장의 컨테이너벨트를 바라보던 그 눈망울들에 고인 슬픔. 권력을 부리고 지키기 위해 죄 없는 사람들에게 무자비하게 휘둘렀던 칼날의 깊이. 그 시간을 함께 살았지만 너무 어려 경험할 수 없었던 나에게 너무나 생생히 전해진다. 그들의 훌쩍임을 들은 것인지. 내가 출쩍이고 있었던 것인지. 그 시간을 견디느라 마음에 깊은 우물이 생긴 사람들. 그곳에 흘리지 못한 눈물을 감추고 살던 사람들. 모르고 살아온 그 시간에 대해 자꾸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천둥이 치던 밤, 베개를 들고 방으로 찾아든 열아홉의 나에게 희재언니가 한 말은 내게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주었다.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드니?”

“나만 그런 걸까? 다른 사람들도 그러는 걸까?”

  그 시절, 누구나의 가슴속에 있었을 의심. 지금의 우리도 가슴속에 두고 스스로에게 묻는 말. 무엇으로 인해 나는 스스로 물었던 것일까. 어떤 고통 때문에.   

  이런 마음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때, 우리는 외딴방을 찾게 되는 것 아닐까.
  사는 동안 도망치고 싶었던 곳. 떠나와서는 내가 있었던 자리가 아닌 척 외면하던 곳. 하지만 가슴에 몽글몽글 삶이 힘들다는 생각이 피어오르면 힘겹게 견뎌 온 외딴방의 문을 다시 두드리게 되는 것 아닌지. ‘상실의 깊은 멍으로부터, 그 깊디깊은 어둠의 심연으로부터, 금빛 잉어 한 마리가 푸른 물방울을 털어대며, 삶의 표층으로 솟아오르는 환각’을 만들어 내듯이. 상실의 깊은 자리가 되고, 삶의 어둠이라고 생각했던 외딴방이 사실은 삶의 수면 위로 떠오른 현재의 뱃머리를 비추는 등대였음을, 이제서 깨닫게 된다. 아파 본 사람이 고통에 강하고 그 고통을 견뎌 본 사람이 또 다른 고통을 이겨낼 수 있다. 물론 그것을 피하려는 마음을 접고 대면하려는 마음을 펼쳐야 한다. 너무나 어려운 일이지만, 작가가 긴 글을 통해 떠나온 시간들을 정리하고 그 때의 사람들에게 현재를 만들어 준 것처럼, 나의 과거에도 현재를 만들어줄 필요가 있다. 장식과 연출과 과장 없이 꼭 그만큼의 자리를 내어 주어야 한다.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든지, 그 이유를 찾기 위해서라도. 그녀의 글쓰기에 대한 의미도 이 이유를 찾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외딴방에 숨겨 둔 나의 시간이 머리를 단단하게 하고, 닥친 일을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하고, 사람을 대하게 하고, 반성하고, 또 오늘을 살게 하고 있음을 외면할 길이 없다.

   여느 여고생과 똑같은 꿈을 꾸었던 80년대의 여공들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어떤 가정을 꾸리고, 그 때의 일을 ‘추억’할까. 그들은 힘들었던 시절을 추억할 것이다. 손등에 꽂혔던 미싱 바늘의 아픔보다도, 지치고 힘들던 몸보다도, 열심히 일하고 먼 미래를 기약했던 그들의 희망을 추억할 것이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피울 것이다.
  ‘외딴방’은 내가 애써 외면했던 과거를 되돌아보게 했다. 그 아픔이 다시 살아날까 두려워 돌아보지 못했던 그 기억들을 이제는 ‘추억’해 본다. 그 시절의 아픔이 있어 나는 더 단단해졌고 그래서 또 지금 살아가며 겪는 일들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이라고. ‘열여섯의 나’가 서른이 되어 그 추억을 반추하면서 남아있던 마음의 흉터를 제 것으로 인정하고 그 계절을 떠올리듯이. 그리워하듯이. 돌아가고 싶어 하듯이, 지금, 현재는 지나고 나면 또 기억하고 싶은 무엇이 되는 것이다.

나는 작가의 글 속에서 나의 외딴방으로 닿는 길을 찾았다.  그곳은 그리 험하지 않은 길이었다.
이제 그곳은 내가 머무를 수 있는 곳이 되었다.  

  가만가만 내 발자국을 남기고 되돌아 나온다. 엄마가 되어 한 아이의 걸음을 붙잡고 그 아이의 전부가 되어주는 ‘현재’로, 돌아온다. 불완전함을 안아주던 그 곳, 내가 자란 곳. 그 곳이 있어 나는 오늘도, 앞으로도, 내 자리를 지키고 앉아 연약한 몸 위에 기억들을 하나 둘 얹고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외딴방에 하나 둘 또 다른 추억들을 쌓으면서.

홀가분하게 나의, 외딴방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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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걸음 내딛다 보름달문고 33
은이정 글, 안희건 그림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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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 얼마나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있을까?......

한 소녀가 그런 물음을 남기고 사라졌다.

 

책을 읽으면서 먼 어느 날 내게 불쑥 찾아 왔던 몇 개의 사랑을 떠올려보았다. 초등학교 시절, 학년이 바뀔 때마다 달라지던 좋아한 남자아이. 중학교 때 항상 같은 버스를 탔던 다른 교복의 고등학생 오빠, 내게 좋은 문장을 선물해주신 국어선생님. 얼굴이 발그레해지면서 입가로 따뜻한 미소가 다녀간다.

책 속 주인공 희영은 이제 막 그런 기억을 쌓기 위해 걸음을 떼는 소녀였다. 수줍음 많고 말수가 없어 친구들과 활달히 지내지 못하지만 낭만을 좋아하고 이제 사랑을 배우려는 가슴 따뜻한 소녀.

하지만 그런 희영의 시선 속 가족과 친구들과의 관계는 뻑뻑하고 부자연스럽기만 하다.

말없이 거실에서 컴퓨터를 하는 아빠와 안방 속의 엄마, (그 관계는 분명 사랑으로 채워졌을 텐데) 함께 놀러간 바닷가에서도 아빠와 엄마 사이는 수북이 모래가 쌓인 듯 서걱거린다. 또,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재준과 있었던 창피한 일은 희영을 두고두고 가슴 아프게 한다. 일기장 속 중학생 엄마는 너무나 당차고 씩씩하지만 지금 곁에 엄마는 너무나 피곤하고 지친 얼굴이다. 사랑은 어쩌면 나를 그리고 누군가를 피곤하고 지치게 하는 그런 것이라는 의심마저 든다. 희영은 이렇게 겪는 몇 개의 사건들을 통해 점점 사랑을 얻고 사랑하는 법을 알아간다. 사춘기가 찾아올 때면 겪게 되는 마음 속 불안한 몇 개의 일들. 가족과 나와 그리고 짝사랑. 어른이 되기 위해 겪는 성장통, 사춘기. 여린 꽃 같았던 희영은 조금 당차게 그 시간을 견뎌내려고 한다.

누구나 겪게 되는 그 일을 어떻게 만나고 헤어지느냐가 불안했던 몇 개의 일들을 추억으로 혹은 악몽으로 남길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주변, 나와 함께 살고 있는 가족이 이 시간을 보내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내가 먼저 눈치 채고, 내가 먼저 그 마음을 만져 줄 수 있다면 그에겐 악몽보다 좋은 추억을 남길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드는 아이에게, 그 마음을 차마 어쩌지 못하는 부모에게, 사랑이 상처인 것 같은 사람에게, 반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줄 책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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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노니는 집 - 제9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30
이영서 지음, 김동성 그림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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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으며 책이 가진 다른 얼굴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지금은 쉽게 반복해서 찍고, 만날 수 있는 책들이 옛날에는 필사쟁이를 통해 한 권, 한 권 태어났다는 게 특별하게 느껴졌다. 한 사람의 묵묵한 시간이 담겨 생겨나는 한권의 책. 참 근사하다. ‘책과 노니는 집’이란 제목 또한 마음을 끌기에 참 근사한 제목이었다. 역사를 담고 있는 책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다 읽은 책을 덮으며 한 페이지 접혀진 곳을 발견했다. 이야기 속 주인공 장이에게 홍교리가 한 말이 담긴 자리였다. 


  “책은 읽은 재미도 좋지만, 모아 두고 아껴 두는 재미도 그만이다. 재미있다, 유익하다 주변에서 권해주는 책을 한 권, 두 권 사 모아서 서가에 꽂아 놓으면 드나들 때마다 그 책들이 안부라도 건네는 양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지. (중략) 책을 차곡차곡 모아놓으면 당장 읽을 수는 없어도 겨울 양식이라도 마련해 놓은 양 뿌듯하고 행복하다” 


  역사서가 주는 부담을 덜어내고 아이의 시선을 통해 담담히 옛 이야기를 풀어가는 책. 


조곤조곤 한 아이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 이 책의 첫 느낌은 그랬다. 먼 역사 속의 아이를 만나 그 때, 그 시대 속 한 아이 사정을 듣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천주교 탄압이 사건의 발단이고, 그 일을 겪으며 아이는 성장하지만 그 역사 속 사실이 주저리주저리 정보를 주기위해 담겨있지 않은 것이 읽는 부담을 덜어주었다. 책은 역사를 담고 있지만 그것은 굳이 익혀야할 골치 아픈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장이에게서 아버지를 빼앗았고, 필사쟁이가 되게 했고, 홍교리와 최 서캐와 낙심이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마음을 갖게 한 사건일 뿐이며, 이야기다.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지은 역사, 그것은 무엇일까? 이야기는 호기심을 갖게 하고, 그 호기심이 책 밖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찾게 한다. 


  굳이 역사를 운운하지 않아도 이 이야기는 한 아이의 모험과 깊이 있는 시선을 담고 있어 한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을 통해 나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도 마련해 준다. 


  낯선 조선시대의 단어와 지명들이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어 색다른 재미를 주고 있다. 우리가 암기하고 잊어버린 국사 책 속 이야기들이 드라마, 책 등 색다른 모습으로 다시금 얼굴을 내밀고 있는 이 때 평범한 한 아이를 만나 조선시대의 모습을 만나는 일은 특별한 경험이 될 것이다. 


  역사를 접하기 시작하는 아이와 이 책을 함께 읽는다면, 최고의 ‘마음시중’이 되지 않을까. 


  이야기 속속 시선을 빼앗는 그림들 가운데 148쪽과 149쪽의 그림은 오래 마음을 빼앗는다. 그 속에서 들리는 이야기가, 풋풋한 꽃내가, 이야기를 향해 기운 사람들의 몸짓이 연신 책 밖으로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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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통한 날 문학동네 동시집 2
이안 지음, 김세현 그림 / 문학동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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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시는 동화와는 다르게 하나의 단어, 하나의 사물을 포착하여 가리키는 손끝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가만히 그 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간결하고 다정한 문장들이 마음속에 고스란히 들어와 앉는다. 그것은 오래된 추억을 퍼 올리는 것처럼 온 몸을 간지럽고 긴장되게 하는 일이다. 한 편의 동시를 읽고 한 송이 꽃 이름을 알게 되었고, 한 편의 동시를 읽고 한 명의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문학동네 동시집 시리즈 두 번째 권인 『고양이와 통한 날』은 특히 현대화된 생활 속에 잊힌 자연의 모습과 그 속에 어울려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소박하게 담겨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이야기 속에는 ‘빨래를 해서 널면 잘 말려 줄 건지/ 하늘에 여쭤 보고/ 바람에게 물으시는’ 아버지와 ‘나물거리로 뜯기고/ 소꿉놀이 꽃 반찬으로 꺾여도/ 해에 한 번은/ 둥근/ 씨앗 둥지를 트는’ 제자리 민들레가, ‘눈만 숨는 숨바꼭질’하는 아기가, 개장수의 ‘염소 삽니다아 개애새애끼이’하는 확성기 소리 등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쉰다.
  벌에게 겁 없이 얼굴을 내준 해바라기를 착하다고 말하는 것, 천둥 치는 밤 새 용서를 빌다 새벽에 깨는 마음은 매일 서너 개의 학원 가방을 챙겨 달아나는 거리의 아이들에겐 놓치기 쉬운 동심일 수밖에 없다. 길을 건너는 두꺼비 한 마리에게 사람들이 차를 멈추고 길을 양보하는 마음을 아이들은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하지만 아이들에게 동시를 통해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유익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이 동시를 읽지 못했다면 결코 이러한 생각에 닿지 못했을 것이다.
  동시는 짧고 간결하지만 그 안에 무수히 뻗어 있는 이야기 주머니는 결코 가볍지 않다. 아이와 앉아 눈을 나란히 하고 천천히 동시를 읽어 본다. 소리 내어 읽으면 오래전 할머니에게 들은 노래처럼 정겹다. “시골에는 이런 꽃이 살지, 엄마는 어렸을 때 이런 생각을 했었지, 네가 올려다보는 나무는 아마 너에게 이런 말을 건네고 있을거야.” 자연과 눈을 마주치고 말문을 트게 하는 책. 잠들기 전에 꿈길을 열어주는 책. 아이에게 좋은 친구를 한 명 소개한 것 같은 뿌듯한 마음이 들어 내내 내가 먼저 펼쳐보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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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스퐁나무 보름달문고 25
하은경 지음, 이형진 그림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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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원을 집어 삼킨다는 괴기스러운 스퐁나무는 결국 사원을 지탱시켜주는 힘이었다. 등을 맞대고 있어 때론 보이지 않고 함께 있어도 외로운 가족. 늘 곁에 있다는 것으로 안도하면서 정작 마주보지 못하는 사람들. 사랑해서 곁에 두고, 늘 그곳에 있음으로 안도했던 시간을, 아빠는 조금 미안해하며 깨닫고 있었다. 현이가 아빠의 감정의 문제를 이해하면서, 엄마에게 새 남자친구를 사귀라고 말하겠다고 하는 만큼 아빠도 자신의 감정을 사과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한 것이다. 
  어떨 땐 어린 아이의 생각이 어른의 깊이를 앞지른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도 다 성장했다고 이야기 할 순 없다. 단지 그 단계를 지나 다른 단계에 접해 있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움직이는 마음에 대해 이해받을 곳 없던 아빠가 아들에게 털어놓는 이야기는 서슴없다. 너무나 감성적으로, 눈물을 숨기지 않으며, 머리와 맘이 따로 움직이는 걸 어떻게 할 수 없어 잔뜩 겁먹은 얼굴엔 물음표를 툭툭 띄우며. 현이는 어른스럽게 아빠의 갈등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렇게 씩씩해 보이던 신이 누나가 속으론 예쁘지 못한 외모와 짝사랑 때문에 많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며,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화를 내고, 두려운 꿈을 꾸면서도 엄마의 입장과 아빠의 입장을 따로 생각하고 이해하려하고 있었다. 
    함께 성장한 두 사람과 한국 땅에서 홀로 아파했을 한 사람이 만나 상처를 다 치유했을지, 상처의 딱지를 떼어버렸을지는 알 순 없다. 하지만 곁에서 빛나는 별을 보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없는 줄 알았지만 신경 써 보고 좀 더 가까이 가면 늘 거기 있는 무엇에 대해 알고 돌아가는 중이라고, 이젠 웃으며 서로에게 더 든든한 스퐁나무가 될 것이라고. 부모의 갈등에 아파하는 아이에게, 아이의 아픔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어느 부모에게 슬쩍 건네고픈 싶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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