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은 이미 진정한 상아탑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인 듯 하다. 학점 관리에 열을 올리는 아이들은 졸업에 필요한 이수 학점을 맞추기에 급급하며, 어느 과목 성적이 잘 나온다는 소리가 들리는 과목만을 골라 듣기도 한다. 거기에 전공 과목과는 담을 쌓은 채, 컴퓨터와 영어, 각종 자격증에 몰두하며 오로지 취업을 위한 준비의 장으로서 대학은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 그 간단한 진리[?]를 거부한 나는 나름대로 괜찮은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다고 생각하지만 영어 한마디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고, 인턴 경력도 전무인지라 지금까지도 할 일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ㅠ.ㅜ)

하지만 대학은 분명 학문을 위한 목적에서 세워진 공간이다. 어느 정도 경제적 능력을 갖춘 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닌, 공공성을 지닌 교육을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 공간은 학생과 교수 모두에게 적지 않은 책임성을 요구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교육이 많은 부분 변질된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학생과 교수에게 주어진 책임마저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학 사회에 진정한 학문은 존재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숙연해지는 까닭은 왜 일까?

피히테의 이름은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연설문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이 연설로 인해 많은 이들은 피히테를 민족주의자로 기억한다. 하지만 정작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던 분야는 따로 있었다. 그가 적을 옮길 때마다 학자의 사명에 관한 글을 발표했다는 사실은 학자의 역할에 대한 그의 관심이 지대했음을 알게 해준다. 오늘날의 언어(?)로 이야기하자면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고찰' 정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어쩌면 이는 그가 살아가던 시대가 여느 시대보다도 혼란 그 자체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789년 이웃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의 불길은 피히테의 조국 독일에도 영향을 주었다. 처음 일었던 자유주의적 흐름은 피히테를 크게 고무시켰지만 어느새 혁명은 변질되어 독재자(!) 나폴레옹을 낳았다. 상대적으로 약소국이었던 독일로서 프랑스의 강대해짐은 분명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으리라. 사회를 불안케 만드는 원인을 파악하고 더 나아가 사회에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 힘을 지닌 존재로서 학자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피히테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인간의 이성은 감성과는 달리 중심적이며 변치 않는 본질을 지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기에 귀납적인 방법이 아닌 연역적이고도 선험적인 방법을 통해 학문을 하는 것을 그는 학자에게 필요한 요소로 파악했다. 이는 도덕적인 선과 행복에 대한 그의 생각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에게 있어서 행복은 도덕적인 선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었고, 감정은 이성에 의해 제어, 조절 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인간의 존재에 대한 고찰로부터 그는 점차 범위를 좁혀나간다. 인간은 거대한 공동체에 소속된 개인으로서 자신의 공동체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타인과 합일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 사명을 지닌 존재이다. 그리고 학자는 그러한 상호 과정 속에서 타인에게 보다 많은 변화를 미칠 수 있는, 즉 자신의 변화를 위해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것 보다는 타인의 변화를 위해 보다 많이 기여할 수 있는 존재로 파악한 듯 싶다. 그렇기에 그는 진실된 태도로 학문을 연구하는 자세 못지 않게 타인에게 자신의 학문을 전달하는 능력 역시도 학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이라고 파악했던 것이다.

그의 자유주의적인 사상은 자칫 잘못 이해할 경우 지독히도 보수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학자를 하나의 신분으로 보고 자유에 근거해 다양한 신분이 존재할 수 있음을 설명하는 과정은 마치 봉건적 신분제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하지만 자유에 근거한 다양한 신분의 존재가 궁극적으로 사람들이 지닌 능력을 극대화하고 더 나아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물리적 불평등을 없애는데 기여할 수 있다고 파악한 것에 비추어 볼 때,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신분은 계급이나 계층이라기 보다는 '직업'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지 않나 생각된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각종 비리, 부정부패. 한국 사회에 가득한 그 얼룩으로부터 우리의 대학이 자유롭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학문이 학문으로서의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학자의 사명을 강조하는 것은 어이없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문제를 단순화시키고 문제의 근원에 대해 묻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학자로서의 사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어느 때보다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피히테가 무려 200여년 전에 이야기한, 하지만 그의 웅장했을 연설을 들어야만 하는 사람들이 이 시대에는 너무도 많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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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잉크냄새 > 자기 내면의 길로 나아가기

우리는 흔히 자기 내면의 문제를 외적인 부분에서 찾고자 한다. 자기 가슴속에서 솟아나오는 내면의 길로 나아갈 방향을 잃고 방황하고 좌절한다. 설령 다른 부분에서 가시적인 답을 찾았다고 할지라도 또 다시 자기 내면의 문제로 방향전환하는 문제의 본질에는 다가가지 못한다. 자기 내면의 길로 나아가는 것 또한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삶속으로 녹아드는 것은 아니다. 끝없는 자기성찰과 동반되는 고독과 방황의 오랜 시간속에서 쟁취되는 것이다.

싱클레어가 부모라는 안정된 세상속에서 처음으로 접하게 되는 불안한 세상으로의 첫 나아감은 프란츠 크리머를 통해서이다. 처음으로 자신의 내적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기존 규범의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 느끼는 불안이 그를 통해 표현되고 있다. 그런 시기에 그에게 모습을 드러낸 데미안은 때론 구원자의 모습으로 때론 유혹자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결국 데미안은 그가 나아간 길에서 만나게 된 완성된 자기 내면의 길과 동일시되지만 기존의 삶의 틀을 벗어나려는 부분에서는 구원자의 모습으로 그에 동반되는 안정된 틀에의 불안함에는 세상의 유혹자로 그려지고 있다. 알을 깨고 나온 새가 날아가는 방향에 존재하는 신, [압락사스]는 신성과 마성, 남성과 여성, 선과 악, 카인과 아벨 등으로 묘사되는 우리의 가슴속에 존재하는 이중적인 모습의 상징이다. 그러나 [압락사스]는 이중성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내면의 길로 나아가는 삶속에서 직면하게 되는 인정하고 받아들여 자신의 삶으로 고스란히 녹여들여야할 사고의 한 단면이다.

싱클레어가 최초로 접하게 되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 데미안을 만나게 되면서 느끼게 되는 또 다른 삶에 대한 열망과 현재의 안정된 삶으로의 복귀, 홀로 맞이하게 되는 처절한 방황과 고독의 시간, 그런 과정을 거친후 결국 바라보게 되는 자기 내면의 길. 자기 가슴속에 솟아나오는 길을 따라 사는 것이 그토록 처절하고 어려운 과정에 있음을 데미안은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거치고 자기 내면의 길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수많은 젊은이들을 말하고 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이 부분에 대한 번역은 기존의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라는 번역과는 다르다. 주인공이 마지막에 자신이 그토록 추구하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에바부인을 사랑할때 그녀는 [당신에게 다가가지는 않겠습니다. 쟁취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새가 알을 깨는 행위, 새로운 세계로의 나아감은 당연한 수순처럼 지나게 되는 그런 과정은 아니다. 투쟁과 쟁취라는 표현처럼 현재의 자기의 모습을 고스란히 버리고 미래의 자신을 받아들인 준비가 된 자에게만 그 길은 열리는 것이다. 이 구절은 트리나 포올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에 나오는 [한 마리의 애벌레의 상태를 기꺼이 버릴 수 있을만큼 날기를 원하면 이루어진다] 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데미안>은 10대에 선생님의 권유로 한번, 20대에 먼지 폴폴나던 세로줄의 낡고 두꺼운 책으로 한번, 그리고 30대에 다시 집어들었다. 전쟁에서 부상한 싱클레어에게 가벼운 입맞춤으로 떠난 데미안과 그의 모습과 사상이 이제는 남이 아닌 내안의 완전한 그가 되었음을 말하는 마지막 장면처럼 책장을 덮는 순간 나는 데미안과 하나가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아마 10대,20대,30대에 느끼는 데미안은 모습을 달리하며 내 속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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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8일 이야드 알라위 이라크 총리가 취임하는 것으로 미국의 이라크 정권 이양은 형식적으로나마 그 모양새를 갖춘 듯 하다. 이에 대해 미국은 이라크인들에게 기쁨의 날이 도래했노라며 큰소리 떵떵 치고 있지만, 정작 이라크인들은 말이 없다. 그들은 과도 정부에 그다지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 듯 하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연이어 터지는 폭탄 테러로부터의 안전이 가장 시급한 문제일런지도 모르겠다. 몇몇 인들은 미국의 세력 하에서 이라크 총리는 아무런 권한도 행사할 수 없노라고 말하기도 한다. 몇몇 저항세력들이 이라크 정권을 친미 집단으로 간주하고 테러를 가하겠노라고 위협하기도 한다. 이것이 미국이 그토록 선전하던 민주주의였던가?

물론 미국은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나름대로 구색을 맞추어 보려는 노력을 가했다. 2001년 9.11 테러의 배후로 지목된 알-카에다와 (자신들이 지금껏 열심히 지원해온) 후세인을 연관시키는 것이 그 첫째 작업이었고, 독재 정권으로부터 이라크인들을 해방시키겠는 대대적 선전을 벌인 것이 둘째 작업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부시 2세가 있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부시에게 있어서 아니 미국에게 이라크는 지극히 작은 나라에 불과했다. 후세인만 제거하고 나면 자신들이 마음껏 점령할 수 있는, 석유가 솟구치는 그 땅을 향한 부시의 욕망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전 세계 위에 군림해온 그들의 자존심에 이라크 저항세력의 저항은 적지 않은 상처를 가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라크를 공격하기 전에 먼저 알아야만 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거대한 나라 미국이 작은 나라 이라크를 공격하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부끄러운 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마이클 무어는 부시의 재선을 막기 위해 모든 것을 하겠노라고 말했었다. 이 책에서 밝히고 있는 부시와 빈 라덴의 모종의 관계는 분명 부시의 재선을 막는데 어느 정도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 부시는 자신이 테러 배후 세력으로 지목한 자의 가족들이-심지어 미국 내 모든 항공기 운항이 중단된 그 시점에서-안전하게 미국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왔던 것일까? 빈 라덴은 신장에 이상이 있어서 신장 투석기를 필요로 한다는 소리도 있던데,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아프가니스탄은 너무도 부유한 나머지 동굴마다 신장 투석기를 갖추고 있다는 것일까? 9.11 테러 소식을 듣고 나서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던 그의 행보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만 하는 것일까 등등의 많은 질문들을 그는 던지고 있다. 부시는 분명 미국의 대통령이긴 하지만 미국을 위한 대통령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너무도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이다. 섹스 파문으로 얼룩진, 하지만 미국 경제 부흥에 성공했던 클린턴 정부가 이룬 모든 것을 부시는 한순간에 망가뜨려버렸다.

부시는 테러리즘을 향한 전쟁을 선포했지만 의도적으로 테러리즘의 중심을 회피했다. 어쩌면 그로서는 자신의 가문과 모종의 사업 관계를 가지고 있는 빈 라덴을 잡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테러 리스트를 공공연히 양산해온 사우디 왕가 역시도 그는 표적으로 삼지 않는다. 이렇게 핵심을 빗겨나간 전쟁으로 인해 수만명이 목숨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테러와의 전쟁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다 못해 재선을 노린다. 아니, 오히려 전쟁은 그에게 일종의 정책적 필요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중산층을 하층민으로 전락시키고, 부자만을 위한 정책들의 난무 속에서 미국은 여느 때보다도 취약한 경제를 가지게 되었다. 부시에게 전쟁은 이러한 경제난으로부터 국민들의 관심을 돌릴 수 있는 무기였던 것이다. 그는 9.11의 희생자들을 이용해 전쟁의 정당성을 부추겼고, "God Bless America!" 를 외치면서 기독교 신앙에 근거한 성전인 것 마냥 포장해버렸다. (부시 부자(父子)에게 경제 정책이라곤 오로지 군수산업 육성 밖에 없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물론 그것도 경제를 살리는 하나의 방법일 수는 있다. 6.25가 일본 경제를 호황으로 가져다 주었던 것은 분명 사실이니 말이다. 하지만 너무도 많은 생명을 담보로 하는 경제 호황을 바람직하다고 볼 수 밖엔 없을 것이다.)

마이클 무어는 이 모든 것을 통해 부시가 다시 대통령이 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고 확고히 말한다. 하지만 그의 확고함 속에는 아무도 따라갈 수 없는 유머가 살아 있었으니, 누구라도 좋으니 부시를 이길 수 있는 누군가에게 표를 던져야 한다며 그가 오프라 윈프리를 거론하는 부분에 이르렀을 때 나는 깔깔대는 웃음을 터뜨릴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그녀는 대중을 사로잡는 매력과 훌륭한 성품을 가진 것은 분명하고, 무어의 태도는 너무도 진지했다.)

부시가 재선에 성공하면 다음 대상은 이란과 북한이 될 것이라는 소리가 한동안 떠들썩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부시 정권의 특성상 사실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그의 재선은 결코 우리 나라로서도 달갑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죄 없는 민간인이 먼 이국 땅에서, 그것도 너무도 잔혹한 방법에 의해 죽어가는 모습 앞에서도 한국의 파병 의지가 변함없음을 칭찬하는 연설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으로부터 또 다른 전쟁을 예견하는 것은 결코 지나친 태도가 아닐 테니 말이다. 이런 무시를 향해 마이클 무어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봐, 내 나라를 돌려줘!" 라고. 하지만 이는 미국인들만의 바람이 아닐 것이다. 부시 한 사람의 선택으로 인해 고통 받는 이들이 이 땅에는 너무도 많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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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홍당무 > 자본주의 사회에서 직장인이란

요즘은 정말로 바쁘다. 언제는 바쁘지 않았나 싶지만, 어쨌든 지금은 바쁘다.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오겠지 하면서 지내온 바쁜 날이 이제 5년째다. 앞으로라고 뭔가 확실히 변할 것 같은 것이 보이지도 않는다. 지금보다는 나아지겠지라고 생각할 뿐.

물론 내 개인적인 상황은 계속 좋아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사회 초년생에서 이제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나아진 것, 그 이상이 아니다. 그나마 운이 좋아서 경기가 안좋은 상황에서 일자리를 잡고, 월급도 꼬박꼬박 나오고 있다. 하지만 앞날에 대해서 생각하면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회사에서 앞으로 얼마나 있을지도 알 수 없고, 이 회사를 떠나면 어떤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게 될지도 불확실하다.

회사들은 정규직보다는 계약직을 선호한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필요하면 아무때나 짜르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월급이 오르는 것이나 물가가 오르는 것이나 비슷해 보이는데 우리나라 임금이 너무 높아서 경쟁력이 없다고 한다. 월급을 너무 많이 줘서 경쟁력이 없다는 나라에 살면서 나는 왜 못 사는 걸까?

이런 질문에 대해서 [화이트칼라의 위기]는 부분적인 답을 준다. 왜 부분적이냐 하면 내용이 미국에 관련된 내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우리의 미래이기도 하다. 우리나라가 현재 서구권을 따라가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앞으로 우리의 미래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연 화이트칼라는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지금 미국 기업들은 전에 없는 호황을 맞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화이트칼라들은 그러한 호황의 열매를 공유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도 사실 마찬가지다. 최근 한국의 회사들은 전에 없는 호황이고, 수출도 잘 되고 있다. 하지만 내수 기업들은 수급이 안되고 있다. 왜냐고? 회사는 돈을 벌지만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지는 않다.  사람들이 쓸 돈이 없다(물론 이것이 다는 아니지만, 돈이 없어서 못 쓰는 것도 크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현재의 호황이란 바로 직원들의 착취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전보다 더 일하고, 덜 받는 구조가 되어지면서 거기서 돈을 벌고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IMF를 생각해보면 된다. 내가 아는 사람의 말에 의하면 정말로 직원을 딱 절반을 정리해고 했다고 한다. 이유는? 단지 다른 회사가 하니까였다. 그 회사는 적자도 아니었고 사람들이 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 사람 수를 절반으로 줄이면 회사가 어찌 되겠는가? 남아있는 사람들이 2배로 일을 했다고 한다. 그 때의 사회 분위기는 정리해고로 사람을 짜르는 것이 당연시 되고, 언제 짤릴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아니면 회사가 망할 것이라는 사회적 암묵적 협박속에 사람들은 그냥 참고 죽기살기로 일을 했다. 사람 수를 줄인 것이 다가 아니다. 월급은 동결되고, 보너스는 절반으로 줄었다. 휴가는 눈치를 보고도 쓰기 힘들게 되었고, 격주 토요휴무도 없어졌다.

IMF가 끝난 지금은 어떤가? 회사는 일을 IMF때 만큼 하기를 원한다. 사실은 시키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실제로 그렇게 하기를 강요한다. 사람을 점차 늘리기는 하지만 일의 양은 IMF 이전에 비해서 여전히 많다. 하지만 보너스는 IMF 이전의 2/3으로 된 것이 다이고, 주5일제 이야기에 간신히 격주토요 휴무가 생겼다.

회사가 돈을 버는 것이 직원들에게 연결되지 않는 상황. 그것이 현재의 우리나라, 그리고 전 세계적인 추세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도 돈을 버는 사람은 있다. 바로 CEO와 주주들이다.

딜버트 만화의 한 내용이 생각난다.
1컷 : 회사의 사정이 나빠서 정리해고를 한다고 발표가 난다.
2컷 : CEO의 연봉이 2배인상된다.
3컷 : CEO의 연봉이 높은 이유는 경영을 잘못하면 짤릴 확률이 크기 때문이라고 한다.
4컷 : 딜버트는 회사의 상황이 나빠지면 정리해고 되는 것은 일반직원이라고 투덜댄다.

정규직과 계약직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다. 현재 정규직은 계약직의 임금 감소를 무기로 살아남고 있는데, 그것은 결국 정규직 자체에게 독이 된다는 것이다. 회사는 점차 정규직들을 계약직으로 돌릴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은 계약직의 낮은 임금이 정규직을 위협하게 되는 것이다.

회사에 너무 애착을 가지지는 말자. 아니, 회사에 목숨을 걸지는 말자. 회사는 직원과 같이 목숨을 걸 생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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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브리즈 > '비스듬히' 세상을 받치는 시

지난해 11월 언젠가 정현종의 새 시집 <견딜 수 없네>가 나온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일간지 문화면에 여러 차례 소개된 시집의 내용이나 시인의 근황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보니 새 시집이 읽고 싶어졌다. 하지만, 시집을 읽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때 이미 꽤 오랜 동안 시집을 읽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새 시집을 읽을 만큼 겨를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새로운 시인을 알고자 하는 욕구도 이전에 알던 시인의 새 시집을 통해서 기대하는 것도 거의 없어져버린 탓이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정현종의 새 시집 <견딜 수 없네>를 구입했다. 그리고 천천히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진작에 읽을걸 하는 아쉬움이 들 만큼 이번 시집은 마음에 여러 가지 울림을 전해줬다. 그것은 아직도 정현종 시인이 당대의 중요한 시인이 보여줄 수 있는 시적 발언과 세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며, 또 다른 시적 성취를 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짧은 글은 그 울림에 대한 기록인 셈이다.

<견딜 수 없네>를 지배하는 정서는 거칠게 말해, 연민과 분노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몇 년 전까지 시인은 <세상의 나무들> <갈증이며 샘물인> 등의 시집을 통해 혼탁한 세계 속에서도 살아남은 작은 생명의 숨결들을 건져내며 죽음의 세계를 껴안았었다. 하지만, 이번 시집을 통해 시인은 여전히 이전 시집에서 보여준 세계를 지속하면서도, 나날이 비인간화되고 단절화되는 세상 속에서 벼랑 끝까지 몰리고 있는 삶의 몰락을 연민과 분노라는 상반된 감정으로 통찰한다.

'권력이나 돈이 걸린 싸움이 너무 상스럽고 맹목적이면 / 그 탐욕의 난경은 우리 모두의 고통이 된다. / 국가든 정부든 정당이든 무슨 기관이든 개인이든 / 그 탐욕과 맹목은 / 사회 전체를 거지 같은 난경에 처하게 한다. / 난경에도 종류와 질(質)이 있다. / 오늘날 이 나라의 난경은 거지 같지 않은가.' '난경'이라는 시의 부분이다. 또 다른 시를 보자. '이 세상은 / 나쁜 사람들이 지배하게 되어 있다. / (그야 불문가지) / '좋은' 사람들은 '지배'하고 싶어하지 않고 / '지배'할 줄 모르며 그리하여 / '지배'하지 않으니까. / 따라서 '지배자'나 '지배행위'가 있는 한 이 세상의 불행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나쁜 운명'이라는 시의 전문이다.

인용한 두 편의 시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분노이다. 시인의 낮게 가라앉은 분노는 시적 여과를 거치고 있음에도 상당히 '날것'의 냄새가 난다. 우리네 삶을 벼랑 끝까지 몰아가고 있는 세상사를 바라보는 시인의 참담한 심경이 이렇듯 '날것'의 냄새를 풍기면서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분노하는 동시에 연민의 시선도 보여준다.

'말하지 않은 슬픔이 얼마나 많으냐 / 말하지 않은 분노는 얼마나 많으냐 / 들리지 않는 한숨은 또 얼마나 많으냐 / 그런 걸 자세히 헤아릴 수 있다면 / 지껄이는 모든 말들 / 지껄이는 입들은 / 한결 견딜 만하리' '말하지 않은 슬픔이...'라는 시의 전문인데, 시인의 분노가 연민과 만나 '난경'의 세상을 '견디는 힘'을 가리키고 있다.

시인이 가리키는 견디는 힘은 연민에서 오고, 그 연민은 자연과 생명이 보여주는 작은 이치와 아름다움에서 다시 자양분을 얻는다. 시인 특유의 생명 의식이 있기에 분노를 다스리는 연민을 갖고 자연과 생명이 보여주는 작은 이치와 아름다움을 기릴 수 있는 것이다. '생명은 그래요. /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 우리 또한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지요. //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비스듬히' 전문)

이미 몇 해 전에 환갑을 넘긴 시인은 세월이 흐를수록 유연해지고 유연해져서는 이제는 '비스듬히' 세상을 받치는 시를 쓰고 있다. 누가 있어 비스듬히 세상을 받칠 수 있을까. 정현종 시인이 있어 잠시, 비스듬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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