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Do You Want? 왓 두 유 원트? - 선택, 결심, 변화를 이끄는 결정적 질문
김호 지음 / 푸른숲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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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키우다보면 원하는 것이 명확한 게 부럽기도 하고, 때로는 사소한 선택에 지나치게 고민하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있다. 사소하다는 것의 기준이 아이가 아닌 내 기준이기 때문에 아이 입장에서는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닐수도 있긴 하다. 그럴때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면 된다고 말해준다. 반드시 지금 눈앞에 보이는 선택지 안에서만 고를필요도 없고, 주변의 친구나 가족 중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없이 원하는 것을 고르라고 말이다. 아이에게는 그렇게 말해주면서도 나는 엄마로서, 아내로서, 그리고 늦은 공부를 시작한 40대 여성으로 선택의 자유를 스스로 포기할 때가 많다.

물론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알아차리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래야 승진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고, 고객에게 서비스나 상품을 팔 수도 있으니까요. 문제는 남들이 나에게 바라는 것만 중요하게 여기다가, 정작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를 때 발생합니다. 27쪽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내가 경험한 가장 큰 문제는 마지막까지 남들의 눈을 의식하다가 돌연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려고 망설이거나 선택했을 때 일어나곤 했다. 그들은 내가 배려했다고 생각하거나 오히려 나만을 위한 선택이었지 않냐고 되물은 적도 있었다. 그러니 내가 원하는 것, 독불장군처럼 굴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해야 할 내 문제에서 만큼은 '내가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 책에는 저자가 직접 코칭해주었던 사례가 일부분 각색되어 등장하는데 그냥 하나의 사례로 받아들일 게 아니라 직접 일대일 코칭을 받는 것처럼 답을 할 수 있는 페이지가 함께 담겨 있었다. 그렇다보니 파트 하나 넘어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저자의 말처럼 시간은 결코 모으거나 한 번에 몰아서 사용할 수 없지만 코치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시간은 그 어떤 투자보다 귀하게 여겨졌다. 막연하게 내가 원하는 것에 나의 시간과 돈을 투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나 적은 할당량을 차지하고 심지어 원치 않은 것에 귀한 시간과 돈이 새어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미래의 나'를 상상하며 지금의 나를 움직이게 하는 방법은 이전에도 여러 자기개발서에서 등장했던 내용이었다. 여기서 핵심은 저자가 콕 집어 준것처럼 10년 후의 나를 떠올리며 현재의 나를 기준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10년 후의 원하는 모습이 된 나를 기준으로 리스트를 작성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 차이가 실제로 노트에 적어보면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우선 'What do you want?'라는 질문은 단순해 보이지만 누구나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에요. 그리고 원하는 것은 한 번에 '짜잔'하고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평생 계속해서 찾아가는 과정이에요. 무슨 말인가 하면 'What do you want?'라는 질문을 나 자신에게 어쩌면 매일, 매 상황 던져야 한다는 거지요. 246쪽

매일 정해진 시간에 알림을 통해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묻는 다는 저자의 말을 초반에 접했을 때는 긍정확언 같은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니 하루에 단 한 번이라도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내가 원하는 것을 확인하지 않는다면 시시각각 우리는 너무나 쉽게 근무지에서 혹은 거리에서 심지어 가정안에서 휘둘리거나 포기하게 만드는 상황을 마주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이 책을 한 번 읽고 노트에 코칭받은 대로 적더라도 덮어두고 잊거나 매일 같이 확인하지 않으면 어느새 몇 개월 혹은 수년이 지나 다시 이 책과 그때 적은 노트를 보며 다시금 시간이란 주식을 허비하고 있었구나 후회하는 날이 올 수 있다는 것이다. 곁에 두고 읽을 만한 책이라고 말하기가 조심스럽긴 하지만 적어도 이 책을 읽고 노트에 무언가 답을 찾아적은 사람들이라면 분명 소중한 사람들에게, 나의 세계를 확장시켜준 사람에게만큼은 이 책을 선물하고 싶을거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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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기울여 나를 듣는다
전지영 지음 / 소다캣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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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에세이 #소다캣 #전지영 #귀를기울여나를듣는다 #요가 #추천 #명상

책을 읽고, 요가를 하며 글을 쓰는 전지영 작가의 <귀를 기울여 나를 듣는다>의 총 페이지수는 175쪽. 그마저도 서지정보랑 이런저런 페이지를 제외하면 150여페이지 정도랄까. 맘 잡고 읽으면 80분도 걸리지 않을 정도의 얇은 책이라 수업을 오가며 읽을 요량으로 가지고 나왔다가 아차 싶었다.
공간을 청소할 수 없을 정도로 피곤하고 제대로 된 밥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여유가 없다면 그건 비인간적인 삶이다. (...) 주변을 정돈하면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있다면 이미 잘살고 있으므로 사는 것에 대해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26쪽
지난 봄에 이사를 해놓고 여전히 바쁘다는 핑계로 남편이 허락해준 나만의 방을 정리도 못하고 창고처럼 해두고 있었다. 최근에는 주말에 아르바이트까지 시작했더니 이젠 아이 밥상 차려주는 것 외에 이렇다할 요리조차 버거울 정도의 체력이 소진된 상태였는데 ’비인간적인삶‘, 도저히 부정할 수 없었다. 비인간적인삶이라니. 저자는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덤덤하게 들려준다. 햇빛이 제대로 들지 않았던 오피스텔에서는 작은 틈으로 들어온 빛에 고양이들과 함께 의지했던 시절이나, 섬으로 들어와 강한 태풍을 맞이하면서도 살아있어 다행이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된 때 등 저자가 지나온 때로는 혼자라서 외롭고 때로는 누군가로 인해 버거운 삶의 모습들이 내이야기 같아 마음이 동동거렸다.
명상가 마이클 싱어는 그 목소리를 한시도 떼어놓을 수 없는 미치광이 룸메이트에 비유했다. 내 머릿속에도 미치광이 룸메이트가 살고 있었다. 108쪽
요가에서는 마음과 영혼 그리고 변하지 않고 실재하는 자아, 이 모든 것을 구분지어 설명한다. 마지막의 변함없이 존재하는 나, 존재하기에 사라지지 않는 나를 아만타라고 하는데 시시때때로 떠오르는 생각이나 마음, 감정을 요동치게 만드는 그 목소리가 다름아닌 ’미치광이 룸메이트‘다. 연인을 의심하게 만들고, 친구를 오해하게 만들고 자기비하의 늪으로 끌어당기는 미치광이 룸메이트. 저자가 명상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로 명상이란 마음이라는 방을 청소하는 일(109쪽)이었기 때문이다.
요가를 하면 몸에서 일어나는 소리를 듣게 되고, 나에게 집중하는 훈련을 통해 명상이 자유자재로 될 거라 생각했다. 저자의 말처럼 저절로 되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 가장 기본적인 것에 집중하고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이 과도한 욕망이나 욕구를 자제할 뿐 삶의 흐름이나 변화를 막아서는 것이 아니기에 그 중심을 잘 잡아야했다. 그 중심을 흐트리는 고통, 고통은 다음과 같다.
고통은 갈망과 혐오를 오가는 것이라고 한다. 무언가 간절하게 원했다가 가질 수 없어서 좌절하고 그로인해 혐오를 느끼고 다시 또 가지려고 발버둥 치다가 눈앞에서 놓쳐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고통이었다. 114쪽

고통으로 만들어진 몸, 고통체. 고통체가 정체성이 되어버린 삶이 무엇일까 굳이 궁금해하지 않는다. 고통으로 점철되었던 삶을 살았던 적이 있었고, 그런 삶은 언제고 다시 훈련되지 않은 내 마음을 통해, 다시금 나의 정체성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시련은 특히 주변의 소중한 무언가를 잃은 상실감이 크게 증폭시킨다. 저자는 밋츠라는 고양이를 잃은 것이 생애 소중한 존재가 사라지는 첫 경험이었다고 했다. 두렵고 무서웠다는 글자가 그대로 마음에 와닿는다. 소중한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 그것이 심지어 생과사를 누릴 수 없는 것이라 할 지라도 원치않은 상실은 흔적을 남긴다. 무언가를 남기는 것, 그것은 존재했다는 사실이고, 존재했음에 사라지지 않기에 저자는 다시 태어나도 같은 모습으로 살고 싶다고 말한다. 그녀에게는 아픔의 날들보다 다시금 꼭 만나 지키고픈 귀한 인연들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을 키워가는 것 같다. 내게는 아이가 그런 역할을 해주고 있지만 아이에게는 내가 어떤 존재일까 확신할 수 없다. 책의 마지막 장에는 ’라파엘라‘라는 대천사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받은 여성과의 대화가 등장한다. ’하느님의 치유를 상징하는 대천사‘라파엘. ’비인간적 삶‘이란 단어에 동동거리던 마음에서 우리가 만나는 서로에게 그런 존재가 되길 바라는 고운 마음으로 책장을 덮을 수 있어 고맙다. 누군가 이런 마음의 변화에 동참하고 싶다면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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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일 비비언 고닉 선집 3
비비언 고닉 지음, 김선형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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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언고닉 #끝나지않은일 #글항아리

책 읽는 사람들이 대체로 그렇듯, 가끔은 내가 날 때부터 책을 읽은 건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세상일을 까맣게 잊은 채 손에 책을 들고 있지 않았던 시간은 기억에 없다. - 책 본문 중에서-

어른이 되어 자기소개서를 비롯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할 때, '독서'라는 키워드가 빠졌던 적은 없었다. 고리타분하게 보일테지만 실제 내 삶에 책은 항상 있었고, 특히 문학의 경우 모든 것이 자리를 잃고 방황하던 때에도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비비언 고닉의 <끝나지 않은 일>은 읽기에 관한 책이다. 그것도 '다시 읽기'. 고전은 시대를 달리하더라도 항상 갖가지 이유로, 판형의 변화, 새 역자를 만나 거듭 출판되어 우리를 찾아온다. 주변에 가까운 지인은 문학 뿐아니라 자기개발서인데도 초판본의 번역이 훨씬 동기유발에 효과적이라며 새 책 대신 도서관에서 대여하거나 중고서점을 기웃거린다. 역자의 역할도 당연 중요하지만 정작 책을 읽는 독자의 연령과 주변환경의 변화는 또 얼마나 다른 감상의 책 읽기가 가능한가.

내 경험으론, 인생 초년에 중요했던 책을 다시 읽다보면 긴 의자에 누워 정신분석을 받는 느낌이 들 때가 꽤 있다. 다년간 마음에 품었던 서사가 느닷없이 불려 나오면 정신이 번쩍 들도록 심각한 의문점들을 맞닥뜨리기 마련이다. -본문 중에서-

고입을 앞두고 예비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국내외 잘 알려진 단편소설집을 여러 권 읽었었다. 아마 내가 읽은 고전에 절반 이상이 그 때 읽었을 것이다. 그렇다보니 20여년이 지난 지금 그 작품들을 다시 마주할 때면 책을 읽어야 할 '때'가 분명 있음을 느낀다. 그 시절 그렇게 읽었다고, 내용을 대충 알고 있다고 다시 읽지 않았더라면 작품의 진가를 평생 모르고 살았겠구나 안타까울 때가 많다. 그때 적어두었던 서평노트를 제출할 때 별도의 사본을 보관하지 않은 것이 속상할 정도다. 물론 그때는 서평이라기 보다는 줄거리 요약에 한 두 줄 정도의 감상이 달린 수준이었을테지만 <끝나지 않은 일>을 읽을수록 이전에 적었던 글, 읽었던 책들을 다시금 꺼내어 보는 것이 단순히 과거에 집착하거나 매달리는 것이 아닌 다른 차원의 새로운 경험과 자기인식의 과정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데, 대체 누구십니까?" 생각할 겨를도 없이 대답했다.

"잘 모르겠네요. 제가 누굴까요. 전화하신 분께서 말씀해주시지요." -본문 중에서

자신을 아는 것이 정말 중요하며, 단순히 사춘기시절의 자아찾기 이상의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 쉽게 스스로를 알고 있거나 알 수 있다고 착각한다. 비비언 고닉의 경우 읽기를 통해, 또 쓰기를 통해 자신을 알아가기 시작했고, 나 역시 어쩌면 내가 먹은 음식들이 아니라 내가 읽은 책들, 그 중에서 별도의 시간을 할애 해 기록을 남긴 책들이 나를 말해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나를 말하고자 할 때,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을 때 이 책이 빠지지 않을 것 같다. 엄청나게 얇은 이 티저북 만으로도 이토록 큰 공감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이제 한 권의 온전한 책을 읽어야 할 차례다. 그러면 또 어떤 감상이 나를 찾아들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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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상체중 - 크고 뚱뚱한 몸을 둘러싼 사람들의 헛소리
케이트 맨 지음, 이초희 옮김 / 현암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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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당신의 몸은 당신을 위한 것이다. 255쪽

당신의 몸은 누구의 것인가? 질문이 너무 멍청하게 들리겠지만 뚱뚱한 사람들의 몸은 때때로, 아니 의외로 자주 평가받고, 언어폭력을 당할 뿐 아니라 연애, 취업, 결혼은 말할 것도 없고 운동이나 여행앞에서도 죄인이 되고 만다. 도대체 뚱뚱해서 아프거나 일상생활이 힘겹고 불편해져도 뚱뚱한 사람들 자신인데 왜 주변에서 그들을 비난하는 것일까. 책속에 등장하는 영화 <더 웨일>의 포스터를 보고 처음 떠올렸던 표지가 있었다. 마사 너스바움의 <혐오와 수치심>의 표지였다. 영화 속 찰리를 회화로 표현한 것처럼 고도비만의 남성의 뒷모습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영화 포스터와 책 표지에 등장하는 남성의 표정은 행복하지도 그렇다고 탐욕스럽게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무언가, 스스로를 포기한 표정이었다.

그는 혈압이 치솟는데도 죽고 싶다는 생각으로 병원에 가기를 거부한다. (...) 찰리는 지독한 비만혐오에 빠진 의료계와 적대적인 사회의 구속이 아니라 자신의 뚱뚱함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 183-184쪽

저자가 말한 것처럼 뚱뚱한 사람들이 결코 부당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경우가 다름아닌 '뚱뚱하다'는 말일 것이다. 그 말은 그 어떤 욕과 비난과 견줄 수 없을 만큼 강하게 뚱뚱한 사람들의 고개를 떨궈버린다. 그런 비난과 혐오가 싫으면 다이어트를 하면 된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상당하다. 체중감량이 생각을 바꾸고 운동을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가능하다면 지금까지 그 수많은 다이어트 관련 약을 포함한 보조제나 프로그램등이 지속적으로 개발될 수 없을 것이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애더럴과 그 비슷한 약물은 필요한 사람이 적정량을 복용할 경우 생명을 구할 수 있다. 하지만 나처럼 여러 문제 중 특히 불안증을 치료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파멸을 초래할 수 있다. 212쪽

실제 어린시절의 학대를 당했거나 지나친 스트레스나 우울증상 등으로 인해 식이의 문제가 발생해 뚱뚱한 경우가 많다. 혹은 그런 문제가 없었더라도 뚱뚱해진 이후 지속되는 비만혐오 혹은 비만으로 인해 받은 차별등으로 인해 비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다이어트로 인한 즐거움과 만족감보다 과식이나 폭식등으로 더 빠르게 즉각적으로 만족을 얻기 때문이다.

세상은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 당신에게 더 좋은 곳이 되어야 한다. 특히 극히 무의미하지만 널리 퍼진 '미'의 경쟁에 사람들을 자동으로 끌고 들어가는 행태를 중단해야 한다. 267쪽

흔히 불가능한 바람을 가졌을 때 '다시 태어나야 한다'라고 말할 때가 있다. '세상이 다시 만들어져야'하는 것과 스스로가 '다시 태어나야'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쉬울까. 아니, 어떤 것이 더 옳을까. 내가 아무리 변해도, 아무리 다시 태어나도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만족스런 결말은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서두에 적은 것처럼,' 당신의 몸은 당신을 위한 것'이 당연하다면, 결국 저자의 말처럼 잘못되어 있는 경쟁심과 비만혐오가 사라져야 한다는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저자가 말한것처럼 체형은 물론 여러 혐오에서 벗어난 세상에서 아이들이 살길 바라는 부모의 희망은 이루기 어려운 꿈이기도 하다. 하지만 뚱뚱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딸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지 않기로 한 저자의 작은 실천을 어른들이 하나하나 이뤄간다면 '다시 태어나는 것'이 가능한 세상보다는 이루기 쉬울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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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여자, 작희 - 교유서가 소설
고은규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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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전문 퇴마사'라고 들어보았는가. 소설 쓰는 여자, 작희는 첫 장에 등장하는이 퇴마사의 직업이 심상치 않다. 잘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작가의 길을 걷는 은섬은 작업실을 같이 쓰는 동료들에 의해 퇴마사와 만나게 되었지만 구마를 위한 생활규칙은 마치 유명 작가들이 제시한 노하우, 집필 규칙처럼 실용적이었다. 가령, 정해진 시간동안 반드시 글을 써야 한다든가, 식사는 규칙적이며 영양소를 균형있게 섭취해야 한다든가 하는 내용이었다. 하기 싫거나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은섬은 퇴마사가 제시한 규칙을 따르면서 큰아버지의 조언대로 실력있는 작가에서 '잘팔리는 작가'가 되기 위해 1930년대에 활동했던 소설가 오영락 기념관 사업에 동참하게 된다. 그의 오래된 문서와 함께 발견되었던 일기장이 다름아닌 '작희'의 일기였고, 고문서를 복원일을 하던 퇴마사의 도움으로 오영락의 이름으로 발표된 소설 중 한 편이 실제 저자가 그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렇게보면 마치 이 소설이 작품에 숨겨진 비밀을 파헤쳐가는 추리물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제목에서 느껴지듯 이 작품은 여성의 학업과 사회활동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할 뿐 아니라 가정폭력이 비일비재했던 참혹한 여인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었다. 몰입해서 읽으면서도 해도 너무한 내용들, 하지만 분명 있었을법한 일들이기에 화가나 책을 잠시 덮기도 했다.


수술이 끝나길 기다리면서 핏물로 물드는 저녁 하늘을 보았다. 이곳은 온통 한스럽고 고통으로만 가득찬 수라와 같은 세상이다. 지금 울고 있는 사람이 또 있는가. (본문 중에서)


작희는 어쩌다가 오영락에게 글을 빼앗길 수 밖에 없었을까. 애초에 그녀는 여성이기에 더 자유로울 수 없었던 시절에 글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려고 했을까? 소설가가 꿈인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작품 속 안나처럼 준비없이 우연한 계기로 작가가 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꿈이라고 차마 말하진 못해도 '언젠가 한 번은 꼭' 책을 쓰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들은 왜 그렇게 쓰고 싶은것일까? 소설속에서도 서로에게 묻는다. 왜 그렇게까지 글을 쓰고 싶어하냐고.


"글이 너에게 뭘 해줄 거라 바라고 글을 쓴 건 아니지 않니? 그냥 기쁠 때가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행복할 때나 매일같이 쓴다고 하지 않았어? 네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사는 거지. 작희야, 그렇게 글에 기대 사는 거다." (본문 중에서)


독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삶의 시련이 찾아왔을 때 책을 읽는다고 슬픔이 사라지거나 괴로움이 줄어들진 않는다. 심지어 바쁠때일수록 소설과 시는 변함없이 가슴을 두드리고 마음을 흔들어댄다. 작희를 만나서, 또 은섬을 만나 또 다른 누구의 문장을 품에 안을 수 있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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