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읽고 쓰는 존재다. 무엇을 읽고 쓰냐가 다를 뿐이다. 소설을 좋아하는 나에게 소설가의 문장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아주 잠깐 소설을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으니까. 그런 생각을 일으켜 세운 건 내가 읽은 소설들 때문이다. 그러니까 꽤 오랜 시간 전에 책을 붙잡고 빠져있던 시간이 있었다. 지금도 책을 좋아하고 읽고 있지만 당시에는 책이 내 마음을 다잡는 유일한 통로였다. 그때 만났던 소설들, 그때 만났던 마음 잡이 글들이 나를 도왔다. 소설이 주는 위안, 소설 속 주인공도 나와 다르지 않게 힘겹게 하루하루를 지탱하고 있다는 게 큰 위안이 되었다.


그런 소설을 쓴 소설가는 어떤 마음으로 글을 쓸까, 언제 어디서 소설을 시작할까. 궁금했다. 쓰는 마음이 시작되는 공간, 쓰는 마음이 모이지 않을 때 어떻게 할까. 작가정신 35주년 기념 에세이 『소설엔 마진이 얼마나 남을까』엔 그런 글들이 있다. 김사과, 김엄지, 김이설로 시작해 박솔뫼, 손보미, 정용준, 한정현, 조경란, 하성란 등 23명의 작가가 쓴 솔직한 자기 고백과도 같은 글에는 소설 쓰기의 즐거움과 어려움이 담겨있다. 그들에게 소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수록된 작가의 소설을 읽었다. 단편 하나부터 많게는 작가가 낸 소설을 거의 읽은 작가도 있다. 그래서 에세이를 읽으면서 그의 소설들이 따라왔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소설과 에세이는 그 형식이 다르고 추구하는 바가 다른데도 소설 속 문장이 떠올랐다. 결이 같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개인적인 의견일지만 김엄지나 박솔뫼의 경우, 에세이지만 소설처럼 읽혔다. 그의 소설이 마치 산문처럼 여겨졌던 것처럼.


한편의 에세이마다 작가가 보낸 사진이 함께 한다. 글을 쓰는 카페, 서재의 일부가 많았다. 사진과 글을 읽으면서 잠깐 상상한다. 그 자리에서 작가는 하루의 작업을 시작하는구나. 작가의 공간에서 얼핏 보이는 책등의 제목을 보면서 작가도 이 소설을 읽었구나 괜히 기뻐하면서 말이다. 글을 쓰는 작가의 많은 에세이가 그러하듯 『소설엔 마진이 얼마나 남을까』에서 들려주는 소설을 향한 그들의 마음은 매우 곡진하다.


내가 언제까지 소설 쓰기에 하루 여섯 시간을 고수할 수 있을까. 아주 오랫동안 가능할 수 있다면 좋겠다. 동료와 후배 작가들과 약속했던 것처럼 건강하게 오래 쓰는 작가가 되어야 하니 더더욱 여섯 시간을 지키자. 부디 그러자고, 촌스럽지만 굳은 다짐 같은 것이라도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김이설, 37쪽)


살림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오롯이 소설을 쓰는 여섯 시간을 갖기 위해 무려 십오 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는 김이설 작가가 쓰는 작업 일지, 이제는 체력이 되지 않아 운동을 하며 소설을 쓴다는 박민정, 정체와 지친 상태를 인정하면서도 쉬는 일의 두려움을 조심스럽게 들려주는 손보미, 너무 쉽게 글을 배우고 읽혀서 소설에 대한 상상력을 키우는 게 힘들다는 정소현, 소리가 깃든 문장을 쓸 수 있기를 바란다는 정용준의 글을 읽으면서 그의 첫 소설집의 단편이 생각나기도 했다.


문장에 소리가 있으면 좋겠다. 소리를 닮은 문장이 아닌, 소리가 들리는 듯한 문장이 아닌, 실제로 소리가 깃든 문장이 있으면 좋겠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장 속에 리듬을 깔고 화음을 만들어 마음대로 변주할 수 있다면 얼마나 근사하겠는가. (정용준, 127쪽)


소설을 썼을 때 이익은 얼마이며 마진이 얼마인지 남을까 알 수 없지만 언제 어디서나 타이핑 살 수 있도록 빠른 속도의 암살자 같은 태도로 글을 쓴다는 오한기, 자분자분 자신이 살았던 과거와 현재를 통해 그 안에 소설이 어떻게 녹아들었는지 말하는 전성태와 조경란, 소설을 쓸 수 있는 ‘그런 자리’에 대해 설명하는 한은형. 첫 책의 출간을 축하하며 진짜 직업을 구하라는 아버지의 말을 들려주는 정지돈의 유쾌한 농담 같은 글에 담긴 소설에 대한 진심은 그동안 어렵다고 여겨 내가 읽지 않은 그의 소설을 궁금하게 만들었다. 


문학은 포기라는 사실을, 모든 것을 시도하고 모든 것에 실패했을 때에야 비로소 문학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내 능력 너머에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 밖에서 문학이 나온다는 사실을 말이다. (정지돈, 144쪽)


순서에 구애를 받지 않고 좋아하는 작가, 끌리는 작가의 글을 먼저 읽어도 상관없다. 아마도 좋아하는 작가의 편을 먼저 읽는 이가 많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 작가의 소설을 곁에 두고 읽을지도 모른다.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의 마음도 작가의 마음 못지않게 정성스러우니까. 여기 실린 23편의 에세이를 통해 작가들의 소설 쓰기에 대한 궁금증이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좋아하는 소설가의 소설을 읽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그 작가가 좋아하는 카페의 어느 자리에서 시작되었구나, 한 문장을 쓰면서 몇 번을 고치고 고쳤겠구나. 산책과 수영을 하고 일상을 이어가면서도 소설 쓰기에 대한 고민과 걱정을 끌어안고 지내다 모든 걸 포기하고 편안해졌을 때 쓰인 문장일지도 모른다는. 소설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게 무엇일까 조금 더 닿고 싶은 마음도 들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최진영의 문장이 괜히 좋아서 소설을 읽을 때마다 한 번쯤 혼잣말로 따라 해보려고 한다. “나도 소설을 좋아하는 내가 좋습니다”라고 말이다. 


세상에는 훌륭한 소설이 너무나 많습니다. 어쩌면 나는 그중에 1퍼센트도 읽지 못하고 죽을 거예요. 이제는 그 사실이 전혀 슬프지 않습니다. 나는 오늘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읽고 오늘 쓸 수 있는 글을 씁니다. 나는 소설을 좋아하는 나를 좋아합니다. (193쪽, 최진영)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읽고 싶은 소설 몇 권이 생각났다. 김이설, 정용준, 박솔뫼, 박민정, 정지돈, 한유주의 소설들. 어쩌면 다시 읽으면 작가의 마음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꼐. 아직 읽지 못한 작가의 에세이와 새로운 소설에 대한 기대를 품는 시간이 쓰는 마음과 나란하게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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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2-12-06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자목련님 덕에 이 책 읽어봐야겠네요.

자목련 2022-12-07 09:58   좋아요 0 | URL
저는 참 좋았어요. 블랑카 님도 좋았으면 좋겠습니다^^*

서니데이 2022-12-06 2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엔 마진이 얼마나 남을까, 책 소개가 나오는 건 본 적 있는데, 조금 더 상품 페이지의 소개를 읽어봐야겠어요.
잘읽었습니다. 자목련님,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자목련 2022-12-07 09:58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 님도 포근하고 건강한 하루 이어가세요^^
 

깊은 밤의 한 가운데에 있는 기분이다. 비가 오기 때문이다. 겨울비다. 빗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어둠이 내려오는 기운이 전해졌을 뿐이다. 아직 11월인데 겨울의 한복판에 외롭게 서 있는 가을 같다. 어쩌면 가을은 이미 저 멀리 떠났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본격적인 추위라고 말해야 할까. 추위가 오고 있다고 한다. 어제는 생각보다 춥지 않아서 오늘 이후의 추위가 예상되지 않는다. 다만 그저 겨울이니까 하고 생각할 뿐이다. 올해가 가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이 떠오르고 미루고 미룬 내가 싫은 뿐이다. 치과 예약을 했다. 원했던 날짜에는 예약을 잡을 수 없었고 그보다 2주 뒤에 예약을 잡았다. 연말에 나처럼 미뤄든 일정 가운데 치과 방문이 있는 이들이 많은가 보다 싶었다.


미뤄둔 일에는 항상 책 읽기 목록이 있다. 정리하고 기록하는 일도 그렇다. 읽은 책에 대한 리뷰, 정리한 책에 대한 기록. 기록이 중요하다는 걸 알기에 바지런한 움직임이 요구된다. 제목처럼 궁금해진다. 당신은 시, 에세이, 소설 가운데 무얼 좋아하나요? 어떤 책을 먼저 읽을 것 같나요? 나라면 이 책을 먼저 읽겠다, 이런 답글은 어떨까요?





정현종의 시집 『어디선가 눈물은 발원하며』는 출간 소식을 뒤늦게 접했다. 정현종 시인을 좋아하는 나는, 조금 더 빨리 알았어야 했다. 이 책은 10월 말에 동네 책방에서 샀다. 동네 책방을 방문한 것도 처음이고 책을 구매한 것도 처음이라 더 남다르게 기억될 책이다. 사두고 읽지는 않았다. 이 시집엔 정현종의 산문이 있어 더 좋다. 괜히 좋아서 아끼느라 읽지 못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신승은의 『아무튼, 할머니』는 아무튼 시리즈로 이웃 님의 리뷰를 보고 읽고 싶어진 책이다. 리뷰는 이렇게 중요하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다. 대부분 잔소리가 많지만 나이가 들면서 할머니가 했던 잔소리가 그리워진다. 누군가 내게 잔소리를 한다는 건 사랑받고 있다는 증거니까. 


천선란의 『랑과 나의 사막』은 표지와 제목에 끌렸다. 그러니까 이 책에 대한 정보는 모른 채 읽게 될 것이다. 온라인 서점의 소개 글이나 리뷰도 꼼꼼하게 읽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읽고 싶은 소설이다. 나는 사막도 좋아하고 선인장은 더욱 좋아한다. 사막에 갈 수도 없고 선인장을 안아볼 수도 없지만 외롭지 않은 고독의 이미지, 텅 빈 충만의 이미지라고 할까. 세 권 다 빨리 읽고 싶다. 


시를 좋아하는 이라면 시집을 먼저 읽을까? 뻔한 예측일까. 아니면 하루에 세 권을 다 읽을 수도 있겠다. 출근길이나 외출 시에는 소설을 읽고 잠깐씩 시 한 편을 읽고 침대에 누워서는 소설을 읽는 일. 이렇게 읽는 일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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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2-11-28 19: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절입니다. 지금 절정의 Novembering을 하고 있잖습니까. 도서관 창 밖으로 보이는 야산이 느므느므 좋습니다. ˝좋다˝ 보다 더 적절한 술어를 찾기가 힘듭니다.
참. 저는 에세이 빼고 시와 소설을 좋아합니다. ^^;;

자목련 2022-11-29 16:50   좋아요 1 | URL
댓글을 쓰시던 시각에 도서관에 계셨을까요? 절정의 Novembering을 맘껏 즐기시면 좋겠습니다
이제 골드문트 님을 가을 타는 남자로 기억할 것 같습니다. ㅎ
요즘엔 시 리뷰는 올라오지 않던데요, 기다리겠습니다^^*

hnine 2022-11-28 19: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권을 동시에, 돌려가며 읽어요^^

자목련 2022-11-29 16:51   좋아요 1 | URL
동시에 즐겁게 읽는 일도 좋아요^^
나인 님, 책과 함께 따뜻한 오후 이어가세요!

햇살과함께 2022-11-28 2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무튼 시리즈요~!

자목련 2022-11-29 16:52   좋아요 2 | URL
살짝 알려드리면 저도 아무튼 시리즈를 먼저 읽고 있습니다 ㅎ

책읽는나무 2022-11-28 21: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시집은 잘 읽질 않았었는데, 그래서 예전 같았음 소설이랑 에세이요!!!!! 했을텐데,
요즘 디킨슨이랑 에이드리언 리치 시를 읽고 있다 보니...외국 시라서 적응을 못하기도 하지만, 또 은근 읽을만 하기도 하고??
그래서 요즘은 세 권 다 읽고 싶습니다ㅋㅋ
그 중 고르라면 소설 먼저 읽을 것 같기도 하구요?^^
비가 오나 보군요?
여긴 저녁에 비가 온다더니 아직 오진 않고 조금 습하기만 합니다.
곧 추워진다니 건강 조심하세요^^

자목련 2022-11-29 16:54   좋아요 2 | URL
저는 많이 접하지 못해서 그런지 외국 시는 훨씬 어렵게 느껴져요.
세 권을 다 읽고 있다고 하시니 어떤 책들을 읽고 계실까 궁금하네요.
이곳은 어제 비가 많이 내렸어요. 그리고 아주 많이 추워졌어요.
나무 님도 따뜻하게 지내세요^^

공쟝쟝 2022-11-28 22: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시를 읽지 않는 그런 사람이지만 ㅋㅋㅋㅋ 시요 라고 대답하고 싶어지는 글이네요! 겨울이라기엔 너무 따뜻한 오늘 같은 가을비엔 누구들은 축구를 보더라도 전 소설을 읽으려고 합니다아!

자목련 2022-11-29 16:56   좋아요 2 | URL
음, 공쟝쟝 님은 시도 잘 읽으실 것 같아요. 분석도 잘 하실 것 같고요.
조만간 쟝쟝 님의 서재에 시집이 등장할 것 같은 예감이~~
어제 비 내리는 밤에는 전반전까지 축구를 보고 침대에 쏙.
쟝쟝 님의 소설이 궁금해지는 오후입니다^^*

공쟝쟝 2022-11-29 20:05   좋아요 1 | URL
제가 읽은 소설은…. 조만간 페이퍼에서 밝히도록 하겠사와요 ㅋㅋㅋ

감은빛 2022-11-29 1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권을 야금야금 조금씩 읽을 것 같아요. 특히 시집은 오래 두고 읽는 편이예요. 한번에 읽으면 아까우니까요. 제일 먼저 다 읽는 건 아마도 소설일 것 같구요.

겨울비라고 불러야 할까요? 예전에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배철수 님이 이 시기의 추위를 단풍추위라고 부르더라구요. 그럴듯하다고 여겼어요. 내일부터는 정말 추워진다고 하네요. 몸은 추워도 마음만은 따뜻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자목련 2022-11-29 16:58   좋아요 1 | URL
야금야금 조금씩 읽는 재미도 남다르지요. 그러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기도 하고요. ㅎ
한번에 읽으면 아까운 시집, 그래서 쌓이는 게 시집인지도 모르겠습니다,ㅠㅠ
‘단풍추위‘ 기억해두었다가 내년에 쓰고 싶은 말이네요. 감은빛 님도 따뜻하고 다정한 날들 이어가세요^^

구단씨 2022-11-29 16: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을 가장 좋아하지만,
지금은 소설과 에세이를 같이 뒤적이고 있네요.
추운 건 싫은데 이불 속에 파묻혀 책 읽기에는 좋은(?) 날입니다. ^^

자목련 2022-11-29 17:00   좋아요 1 | URL
소설과 에세이를 뒤적이는 날들!
집콕, 방콕이 많아지겠지요. 따뜻한 걸 곁에 두고 책을 읽는 시간으로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조금 엉뚱하지만 소설가의 첫 에세이는 언제쯤 출판되는 게 좋은가 생각해 보았다. 독자에게 좋아하는 소설가의 에세이는 등단이나 활동 기간과 상관없이 언제라도 반갑다. 글이라는 건 같지만 그 주제가 다르니 기존에 만났던 글과는 색다른 분위기를 기대하게 된다. 시인이나 소설가의 산문을 떠올리면 어떤 작가는 주 종목이라고 하기엔 그렇지만 시나 소설보다 에세이가 더 좋을 때가 있다. 그리하여 그 작가의 에세이가 연이어 나오기도 한다. 어쩌면 그건 출판사의 마케팅일지도 모른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지 모르지만 김초엽의 소설이 아닌 에세이가 반갑다는 말이다.


SF 소설에 대한 경계심을 풀어준 작가라고 할까. 그러니 김초엽이 들려주는 SF 이야기, 책과 소설 작업에 대한 이야기, 쓰는 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은 『책과 우연들』을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그가 어떻게 소설을 쓰는 작가로 살게 되었는지, 거기가 SF 소설을 사랑하는 이유와 그로 인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진솔한 진심이 담긴 책이다. 특히 내게는 SF에 대한 이해와 그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소설이 아닌 다양한 분야의 책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막연하게 작가라면 방대한 양의 독서를 할 거라는 생각에 편협한 독자라는 답이 왠지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가 소개하는 책들은 제목만으로도 어렵고 난해한 내용이라는 걸 알 수 있었는데 정작 그의 글로 통해 만나보니 궁금하고 직접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한 권의 소설을 쓰면서 부수적으로 읽은 책도 많았다. 역시 쓰기 위해서는 읽는 일도 중요하구나 싶다. 과학책을 읽고 다큐멘터리를 보는 작가, 과학과 SF의 경계는 미묘하다면서도 그가 과학을 사랑하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에세이에서 독자는 작가의 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한다. 김초엽은 이 책에서 자신의 소설 쓰기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데 대학원 시절 직접 소설 쓰기 모임을 만들고 주말마다 그 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때는 소설가가 되려는 생각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소설 작법에 대한 책도 소개하는데 한 번씩 소설을 쓰다가 난항에 빠질 때 참고를 하는 정도였다. 결국엔 쓰기는 누군가의 기술이 아니라 저마다의 방식이 있는 법이다. 그럼에도 그런 책들을 보면 든든한 마음이 드는 건 작가도 마찬가지.


에세이에서 김원영 작가와 『사이보그가 되다』를 쓰는 과정을 들려주는 부분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김초엽 작가가 후천적으로 청각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첫 소설집을 읽고 한참 후에 알았던 나는 그가 기고한 글을 검색해 읽은 기억이 있다. 해서 초고를 거의 뒤엎는 과정, 편집자가 제시한 방향성, 기술발전으로 인한 장애의 미래를 다루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 과정의 진정성이 느껴졌다. 


개인의 경험이 어떻게 사회와 연결되는지, 이 경험을 구조 속에서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나와 타인의 경험은 얼마나 같고 또 다른지, 그런 이야기까지 도달할 수 있어야만 개인의 경험은 사적인 서술에 그치지 않고 풍부한 의미를 갖게 된다. (104쪽)


다른 의미일 수 있지만 최근 노벨문학상 수상을 한 아니 에르노가 떠올랐다.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자전적 글쓰기가 타인과 연결되어 어떻게 공감과 연대로 이어지는지 생각했다. 결국 쓴다는 건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모두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멋있는 일이구나. 작가라는 주체가 아니라도 말이다. 물론 작가에게 글쓰기는 보통의 독자나 일반인과는 다른 무게가 있겠지만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을 때는 누구에게라도 찾아오니까. 그게 무슨 글이든 말이다. 


글 쓰는 일은 때로 세계 전체를 뭉쳐 내 손에 가져다 놓고, 과거와 현재 곳곳으로 나를 데려가 주는 빽빽한 거미줄 위에서 벌어지는 화려한 작업 같다가도, 때로는 나를 뚝 떼어내 좁고 작은방, 오직 책들로만 둘러싸인 방에 고립시킨다. 재미있지만 가끔은 심심하고 외롭고 심지어 고통스러울 때도 있다.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154쪽)


책과는 떼어놓을 수 없는 작가이기에 책방이나 읽은 책에 대한 부분은 빼놓을 수 없다. 이런 책을 사야지 하고 들어갔지만 의도한 것과는 다르게 엉뚱한 책을 손에 넣게 되는 일, 일이든 여행이든 어떤 지역을 방문할 때 작은 책방을 찾아 그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책을 사는 일. 책 목록에서 내가 읽고 좋았던 책(레이철 카슨의 『침묵의 봄』이나 가즈오 이시구로의 『클라라와 태양』, 이유리의 『브로콜리 펀치』, 배명훈의 『안녕, 인공존재』)을 발견하는 일도 즐겁지만 아직 만나지 못한 새로운 책과의 우연한 만남도 즐겁다. 에세이의 제목처럼 말이다. 


어떤 책들이 우리를 생각지도 못했던 낯선 세계로 이끈다면, 책방은 그 우연한 마주침을 가능하게 하는 통로다. 좀 더 많은 책이 그렇게 우연히 우리에게 도달하면 좋겠다. 우리 각자가 지닌 닫힌 세계에 금이 간다거나 하는 거창한 일까지는 일어나지 않더라도, 적어도 우리는 조금 말랑하고 유연해질 것이다. 어쩌면 그냥, 그런 우연한 충돌을 일상에 더해가는 것만으로 충분할지도. (234쪽)


작가의 에세이는 그가 쓴 소설에 대한 궁금증과 이해를 위한 안내서 같은 역할을 한다. 무엇을 바라는 마음으로 소설을 썼는지,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지 전체를 다 알 수는 없지만 일부라도 느낄 수 있기에 이미 읽었던 소설이나 예정된 소설 읽기를 더욱 풍성하게 이끌어준다. 김초엽의 소설로 SF 소설에 대한 친근감이 생긴 후 예전보다 SF를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책과 우연들』 통해서 읽고 쓰는 일의 기쁨이 커졌다. 


나는 내가 쓰고 싶었던 것이 유토피아 자체가 아니라 유토피아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에 관한 것임을 알았다. 불가능에 맞서는 태도에 관한 것임을 알았다. (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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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2-11-04 13: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이참. 이런 문장을 쓰시면 괜히 저는 감동을 받잖아요.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자전적 글쓰기가 타인과 연결되어 어떻게 공감과 연대로 이어지는지 생각했다. 결국 쓴다는 건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모두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멋있는 일이구나. 작가라는 주체가 아니라도 말이다. 물론 작가에게 글쓰기는 보통의 독자나 일반인과는 다른 무게가 있겠지만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을 때는 누구에게라도 찾아오니까. 그게 무슨 글이든 말이다.˝

무물론 저한테 쓰신 말이 아니라 아니에르노와 김초엽과 여타의 훌륭하신작가님을 포함해!!! ㅋㅋ. 글을 쓰는 우리 모두가 감동받을 문장이지만... 괜히 오늘 쓴 글도 생각나고 그래서 저는 그냥 감동을 받아 버리는 것이지요.

그럴 수 있을까요? 앞이 보이지 않을 때의 공감과 연대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저는 그래온 것 같아요. 어느 시기마다 분명 어떤 책이 있었고 어떤 문장이 있었습니다. 하하. 그래서 저도 그 경험들을 토대삼아 읽고 쓰는 모양입니다. 어쨌든 나의 언어를 만들어가는 것. 멈추지 말아요, 우리! ​힘!!

자목련 2022-11-06 10:37   좋아요 2 | URL
♡♡♡♡♡♡♡
네, 우리는 그럴 수 있어요. 말씀처럼 어떤 시기에 어떤 책의 어떤 문장으로 힘을 얻고 위로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서로를 알지 못해도 서로를 만나지 못해도 서로를 응원하고 서로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 마음으로 우리는 조금씩 더 나은 삶으로 성장하고 있어요. 그것이 서툴고 애쓰는 몸짓일지라도 말이에요!

서니데이 2022-12-08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자목련 2022-12-09 08:57   좋아요 1 | URL
^^*
 

‘놀라운 책이다’란 최재천 교수의 추천으로 시작하는 하버드대 인간진화생물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조지프 헨릭의 『위어드』는 현재의 우리가 있기까지의 인류 역사에 대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인류가 농경을 시작한 1만 2000년 전부터 인간 사회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생물 지리적으로 추적한다. 하여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나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관심 있게 읽은 이라면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물론 그렇지 않더라도 인류의 역사와 문화가 어떤 과정으로 변화하고 발전했는지 알려주는 인문 지식의 안내서로 충분하다. 


‘WEIRD’(위어드)는 서구의(Western)의 교육 수준이 높고(Educated), 산업화된(Industrialized), 부유하고(Rich), 민주적인(Democratic)사회에서 자란 사람들을 말한다. 국제사회를 이끄는 이들(강대국의 모습), 아마도 현대인이 추구하는 대표적 모습이라고 하면 맞겠다. 하지만 인류가 이렇게 변화하기까지 결정적 역할을 한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대답할 수 있을까? 산업혁명과 전쟁 정도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통해 그보다 더 구체적이고 세밀한 변화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워어드 심리의 시작점이 어디인지 알게 된다. 


인류가 농경생활을 시작할 때 부족과 씨족은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족장과 대표의 권한이 가장 컸고 그들은 대부분 연장자였고 남성이었다. 부족 내 결혼을 통해 인구를 확장시켰고 부족 내의 결속을 중시했다. 그러나 집단 형태의 삶은 어느 순간 개인으로 바뀌었고 그에 따라 심리적 변화도 일어났다. WEIRD(위어드) 심리의 핵심 요소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로 알 수 있다. 개인주의와 개인적 동시가 발생하여 자기중심, 자존감, 자기 고양의 태도가 생겼고 전통과 연장자에 대한 순응과 복종은 낮아졌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인내심과 자제력을 기르는 쪽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전체론적 사고보다는 분석적 사고를 키우게 만들었고 단체가 아닌 개인의 소유를 중요하게 여겼다. 집단에서 벗어나니 자유의지의 선택이 중요해졌다. 누구가 당연한 일 아니냐고 할 수 있다. 현재 시점에서 보면 그렇지만 개인이 아닌 부족사회로 돌아가 보면 놀랍고 대단한 일이다.


집단에서 개인으로 바뀌는 일, 그것은 친족 간의 결혼을 금지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저자는 강력한 동기로 종교를 언급한다. 성경을 읽는 것으로 문해율을 높이고 결혼과 가족에 대한 구체적인 조항을 내세운 '결혼 가족 강령'을 통해 집단적 친족 기반 조직을 해체하고 파괴한다. 기독교의 이러한 관행은 기독교 제도의 확산을 촉진하기 위한 방한이기도 했다.


기독교의 방침들은 설득, 배척, 초자연적 위험, 세속적 처벌과 결합되며 점차 의례로 포장되어 가능한 모든 곳에 전파되었다. 이 관행이 서서히 기독교인들의 내면에 자리 잡고 이후 세대들에게 상식적인 사회규범으로 전달되는 가운데 사람들의 삶과 심리가 크게 바뀌었다. 이 방침들은 보통 사람들에게 집약적인 친족 기반 제도가 없는 세계에 적응하고, 이 세계를 중심으로 사회 관습을 재편하도록 강제하면서 그들의 경험을 서서히 변형시켰다. (220쪽)


친족이라는 이유로 어떤 일이나 범죄가 발생했을 때 집단적으로 보였던 도덕적 심리적 기준이 개인의 몫으로 바뀐 것이다. 대표자를 선출하거나 경제적 활동을 하거나 모든 분야에서 말이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표와 그림도 사촌 간의 결혼의 비율에 따라 다양한 관계에 대한 것으로 그만큼 중요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이 책에는 많은 그림과 표, 그리고 그래프가 등장한다. 하여 어렵고 힘들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부분도 많았다.


종교에 대한 인간의 의존적 심리를 전쟁과 연결한 부분도 흥미롭다. 알다시피 전쟁이 인간 심리에 작용하는 부분은 크다. 사회적 유대와 공동체에 대한 결속력이 커지고 그 분야에 투자한다. 사회 규범은 집단의 생존을 증진하도록 문화적으로 진화했기 때문에 전쟁을 비롯한 충격적 사건은 심리적으로 이런 규범 및 관련된 믿음에 대한 헌신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상호 의존으로 집단을 단결시키고 전쟁, 지진, 그 밖의 재난을 통해 종교에 더 헌신하고 참여하게 된다고.


전쟁은 사람들의 상호의존적 심리를 부추김으로써 도시 중심지의 시민 전체를 포함한 자발적 결사체 성원들 사이의 결속을 강화했을 것이다. 전쟁은 또한 자발적 결사체의 성원을 늘렸을 것이다. (431쪽)


이처럼 친족 기반 제도의 중요성이 줄어들면서 고된 노동과 효율, 자제력, 인내심, 시간 엄수에 대한 개인의 평판을 높이는 것이 중요해졌다. 앞에서 언급한 WEIRD(위어드) 심리의 핵심 요소다. 이러한 것들은 도시가 성장하고, 시장이 확대되고 친족이 아닌 자발적 결사체가 늘어남에 따라 자신의 특성에 맞는 사회 분야와 직업을 선택하게 된다. 이 과정은 인성의 구조를 새롭게 정식화하여 맥락이나 관계보다 개인적 성향의 중심성을 공고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친족 기반 제도의 중요성이 줄어들면서 고된 노동과 효율, 자제력, 인내심, 시간 엄수에 대한 개인의 평판을 높이는 것이 중요해졌다. 앞에서 언급한 WEIRD(위어드) 심리의 핵심 요소다. 이러한 것들은 도시가 성장하고, 시장이 확대되고 친족이 아닌 자발적 결사체가 늘어남에 따라 자신의 특성에 맞는 사회 분야와 직업을 선택하게 된다. 이 과정은 인성의 구조를 새롭게 정식화하여 맥락이나 관계보다 개인적 성향의 중심성을 공고하게 만들었다.


혁신이라는 것은 결국 집단 지성으로 이끌어 낸 법률, 과학, 사회 전반의 규범 같은 것들이다. WEIRD(위어드)의 심리가 더 낭느 사회로의 진화를 이끌어내고 계속해서 진화할 것이라는 걸 저자는 말한다. 최재천 교수의 말대로 놀라운 책이며 방대한 자료에 감탄한다. 무려 10년 동안의 시간을 들여 이 책을 썼다는 걸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연구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저자가 고백한 대로 편향된 인구 집단을 표본으로 했다고 하지만 아시아(특히 한국)의 경우는 많이 부족해 아쉬운 건 사실이다. 


책 전체를 다 이해하는 일은 무척 어렵지만 인류 심리 진화와 문화를 조금이나마 배우고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인류학을 공부하거나 관심이 있다면 훌륭한 교과서가 될 것이며 인문 교양서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책이다. 오늘날의 세계 전반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며 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것이 무엇인가 조금 더 깊게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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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과함께 2022-10-27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보니 올해 <총 균 쇠>를 읽기로 했던 연초의 계획이 생각나네요… 이 책도 흥미롭네요~

자목련 2022-10-28 14:09   좋아요 1 | URL
네, 말씀처럼 흥미로운데 어렵기도 했어요.
목표치를 정해두고 읽어야 읽을 수 있는 책이었어요. 꼼꼼하게 읽지는 못했고요. ㅎ

stella.K 2022-10-27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을 것 같긴한데 책값도 장난 아니고
벽돌책이네요.ㅠ

자목련 2022-10-28 14:11   좋아요 1 | URL
벽돌책은 하루에 읽어야 할 양을 정해두어야 읽게 되는 것 같아요.
요즘 책값이 너무 비싸요. ㅠ.ㅠ
 

평전은 엄중하게 다가온다. 한 사람의 일생을 압축해 놓은 기록이라서 그럴까. 사만다 로즈 힐의 『한나 아렌트 평전』 을 읽기 전 조금 주저했다. 한나 아렌트란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그의 작품을 읽지 않았기에 어려운 책이 아닐까 걱정을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려운 책은 아니라고 하겠다. 나 같은 독자도 읽었으니 누구라도 한나 아렌트에 대해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마련해 줄 책이라고 자신할 수 있다. 이미 한나 아렌트에 대해 말하는 책들은 많지만 처음 접하는 이에게는 친절한 입문서다. 그의 저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조건』만 알고 있던 내게 이 책은 그녀의 다른 책들도 궁금하게 만들었으니까.


저자 사만다 로즈 힐은 한나 아렌트 선임 연구원으로 『한나 아렌트 평전』에서 한나 아렌트의 일생과 함께 그의 저작과 그가 추구하는 삶의 가치와 인간관계를 다룬다. 한나 아렌트의 사상이나 철학에 치우치지 않고 삶과 작품을 균형 있게 다루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으로 1906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그는 좀 남다른 내면을 지닌 소녀였다. 한나가 일곱 살에 아빠 파울이 세상을 떠났을 때 “엄마, 모든 여자가 겪는 일이잖아요”라며 엄마 마르타를 위로했다고 한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놀림을 당할 때 마르타는 유대인으로서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다. 


한나는 열네 살부터 철학을 공부할 거라 생각했다. 아버지의 서재를 통해 발견한 세계, 삶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이해하고 싶어서 철학을 택한 것이다. 그 공간이 한나의 철학을 향한 열정의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열여덟 살 즈음에 하이데거의 제자가 되고 연인으로 발전한 건 운명의 일부였는지도 모른다. 에드문트 후설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야스퍼스를 만나 철학적 사유를 배우게 되었다. 귄터 안더스와 결혼 후 한나는 안더스의 글을 교정하고 안더스는 한나의 논문 출간을 도왔다. 그러나 한나의 정치적 활동으로 균열이 시작되어 안더스는 파리로 떠나자 한나는 공산주의자들의 탈출을 돕는 지하 조직체를 도왔다. 그 과정에서 당국에 체포를 당했으나 다행히 풀려나자마자 독일을 떠났다.





한나는 파리에서 난민 신세가 되었다.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독일이 아닌 프랑스에서 당한 일이라는 게 놀라웠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그런 부당함을 당해야 하다니. 강제수용소를 탈출해 미국으로 망명을 신청했다. 그 후 영어를 배우기 위해 미국 가정에서 가정부로 일하며 공부와 연구를 했다. 한나는 유대인이면서도 유대인으로 특별한 유대인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대인을 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항상 생각했다. ‘한나에게 유대인 문제는 언제나 정치적 문제였다.’(157쪽) 최초의 여성 교수 임용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자 제안을 거절했다. “저는 여성이라는 데 그다지 특별함을 느끼지 않아요. 언제나 여성이었거든요.” (203쪽) 언제나 여성이었다는 한나 아렌트, 정말 멋지다.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으로서 자신의 경험과 독일을 비롯한 전체주의와 그 안의 유대인 문제를 연구하고 논문의 주제로 삼았다. 그리하여 『전체주의의 기원』이 나왔고 전쟁이 끝나고 이스라엘에서 열린 전범재판을 직접 보기 위해 다른 일정을 다 취소했다. 한나는 아이히만의 재판 참석이 과거에 대한 의무라고 생각했다. 재판은 한나에게 유대인의 슬픔에 대한 일종의 역사적 실태 조사에 가까웠다. 그 기록을 담은 보고서 『예루살렘이 아이히만』은 논란과 비판을 받았다.


한나는 타인의 잘못에 내가 책임을 질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즉 내가 하지 않은 일에 죄책감을 느낄 수는 없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잘못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들이 죄책감을 느끼고, 아이히만처럼 모든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은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한나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가담한 자들과 저항을 선택한 자들의 차이는 무엇인가? 대답은 ‘사유’였다. 가담하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스스로 사유라는 것을 했다. (240~241쪽)


한나 아렌트에게 철학과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유였다. ‘한나는 낙관과 절망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으로 현재가 아닌 과거나 미래를 바라보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131쪽) ‘한나에게는 개인의 책임이 집단 경험보다 훨씬 중요했다. 결코 가벼운 고민이 아니었음에도 ‘가볍게’ 결론을 내렸다는 건 한나가 그만큼 개인의 책임에 더 큰 무게를 두었음을 의미한다.’ (133쪽) 현재를 직시하는 힘, “그러므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하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 (212쪽) 그는 그런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우리에게 사상가로 알려진 한나가 시를 썼다는 사실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땅은 곳곳에서 시를 쓴다.

가지런히 나무를 땋아놓고 

우리더러 나아가라고 한다.

이 세상 곳곳을.


활짝 핀 꽃은 바람을 맞으며 기쁨을 누리고

풀은 연하고 나긋한 바닥에 싹을 틔우며

하늘은 파란색으로 물들어 밝게 인사하고

태양은 부드러운 체인처럼 회전한다.


한껏 취한 사람들…

땅, 하늘, 햇살, 나무…

봄마다 새로 태어나

전지전능한 놀이 속에서 즐거워한다. (〈프랑스 드라이브〉, 199쪽)





권더 안서스와 이혼 후 하인리히 블뤼허와의 결혼 생활은 균형 있는 삶이라고 말하고 싶다. 서로가 서로를 지지하면서도 간섭하지 않는 어려운 관계를 둘은 지속했다. 노년에 친구들을 만나고 여행을 다니며 보낸 시기에서 사상가가 아닌 한나는 자유로웠다. 생이 끝날 때까지 집필을 놓지 않았던 한나. 그로 인해 지금까지 많은 이들의 관심과 연구가 끊이지 않는다. 사만다 로즈 힐가의 『한나 아렌트 평전』 은 어렵지 않은 평전으로 철학이나 사상을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훌륭한 안내서다. 이 책을 시작으로 한나 아렌트의 저작을 차례로 만나도 좋을 것이다. 


한나는 사유를 ‘난간 없는 사유’라고 표현했다. 사유란 붙잡을 곳 없는 계단을 하염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다. 한나의 따르면 붙잡을 곳 하나 없을지 몰라도 계단이라는 서 있을 곳은 주어진다. 자유롭게 밟고 디딜 이 계단이야말로 한나에게 유서 없이 남겨진 유산이었다. (3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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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0-10 1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나 아렌트의 지적 사유적인 삶의 이력에 비해 이 책의 서술량이 얇고 좁다고 생각 했습니다
아마도 이책의 작가는 한나 아렌트가 세상에 남긴 수많은 저서와 논문을 독자들이 스스로 찾아 읽기 바랬던 것 같네요

범람하는 정보 속에서 깊고 넓게 사유하는 시간이 줄어 버렸습니다
현재를 직시하는 힘!
결국 독서 만이 오늘 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

수이 2022-10-10 12:47   좋아요 2 | URL
와 스콧님 말씀 정곡을 찌르네요. 저도 같은 걸 느꼈어요, 이 책 읽으면서. 저자 역시 한나 아렌트 전공이지만 이 평전을 쓰면서 미지의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한나 아렌트를 직접 스스로 찾아 읽으면서 사유하고 더듬어 나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느껴졌어요. 많은 이들이 한나 아렌트의 사유의 깊이와 폭에 지레 질리지 않고 용기를 낼 수 있도록 사만다가 응원하고 있다는 걸 느꼈거든요.

자목련 2022-10-11 14:36   좋아요 2 | URL
스콧님과 비타 님의 말씀처럼 이 책은 그런 부분이 아쉬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데, 저 같은 독자에게는오히려 이런 접근이 더 좋았던 것 같아요.
한나 아렌트에 대해, 그의 저서에 대해 검색하게 만들었으니까요^^

레삭매냐 2022-10-10 1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사서 대기 중이랍니다.

곧 읽기 시작해야겠네요.

자목련 2022-10-11 14:36   좋아요 1 | URL
매냐 님, 즐겁게 만나세요^^*

미미 2022-10-10 12: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읽고서야 그녀가 시를 썼다는 걸 알았어요.
시(詩) 적인 표현력이 그녀의 글에도 드러나는것 같아 신기했고요.*^^*

자목련 2022-10-11 14:37   좋아요 2 | URL
어쩌면 철학이 아닌 시인이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도 잠깐 했어요^^

수이 2022-10-10 12: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나의 시적 감수성은 한나의 사유를 더 정밀하게 다듬어나갈 수 있도록 만들었던 거 같습니다. 그게 하이데거의 영향인지 아니면 한나에게 있었던 본래적인 시적 감수성을 하이데거가 알아보고 그 촉을 건드린 걸 수도 있구요. 여러모로 훌륭한 평전이라고 여깁니다. 자목련님 말씀대로 더할나위 없을 정도로 ‘훌륭한 안내서’라고 여깁니다. :)

자목련 2022-10-11 14:38   좋아요 2 | URL
저는 아버지의 서재도 한 몫을 하지 않았을까 혼자 생각했어요.
이 책으로 한나 아렌트에 대한 접근이 용이하지 않을까 싶어요.

거리의화가 2022-10-10 18: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나 아렌트를 아예 모르는 사람에게는 입문서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할 것 같습니다. 읽어봐야겠어요^^

자목련 2022-10-11 14:38   좋아요 1 | URL
저 같은 독자에게 특히 그랬어요. 화가 님도 즐겁게 만나시길 바라요^^

책읽는나무 2022-10-10 2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난간 없는 사유...표현 자체도 참 멋있어요.
저도 아렌트 노블책 잡고 읽고 있어서 반갑네요^^
자목련님도 아렌트!!! 그래서 또 반갑구요^^

자목련 2022-10-11 14:40   좋아요 2 | URL
한나를 바라보는 저자의 이해와 사유도 좋았어요.
그로 인해 저 같은 독자도 쉽게 다가갈 수 있겠구나 생각했으니까요.
노블책도 흥미로울 것 같아요!

그레이스 2022-10-12 2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인용문 ‘난간 없는 사유 ‘ 정말 멋있는 표현! 무엇에 기대어 사유하는것이 아니라 위험할지 모르지만 자유롭게 사유하는 것의 의미!일듯요
데려갑니다

자목련 2022-10-13 09:38   좋아요 1 | URL
평전은, 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그 인물을 대해 연구하고 세상에 내놓은 저자도 중요하구나 생각했어요.제가 한나 아렌트의 생을 다룬 다른 책들을 만나지 못한 덕분이기도 할 테고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