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 소설 전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0
이상 지음, 권영민 엮음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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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이상은 <오감도>보다는 <날개>가 익숙하다. '이상 문학상'에 대하여서도 소설가에게 주는 것만 익숙하여 시인 이상보다는 소설가 이상이 더 친근하다. 무식한가? 그렇다. 나는 그런 무지의 극치 상태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이 난해하다는 선입견만 머리와 마음에 가득 집어 넣은 채  그나마 가장 익숙하게 다가오는 <날개>를 펼쳐 들었다.

  <날개>를 읽으면서 가장 자주 느낀 점은 '어라? 이상은 재밌는데?'였다. 끊임없이 궁시렁거리는 듯도 하고 자기 비하도 끊어지지 않아 어둡기도 하였지만 그의 독특한 문체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유머라는 요소가 있었다. 그 유머는 대체로 자기 학대적이고 냉소적이었지만 바로 그 점이 이상의 소설을 특별하고 흥미롭게 느낄 수 있게 하는 요소였다.

  <날개>를 읽은 후에 또 낯익은 제목이라는 이유로 <김유정>을 읽고 나니 이상의 소설이 너무 재미있어서 좀더 적극적인 자세로 책을 마주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처음으로 돌아와 제대로 읽어보리라는 마음으로 <지도의 암실>을 읽기 시작했다. 마지막 작품인 <십이월 십이 일>을 제외하고는 발표 시기에 따라 차례대로 구성된 터라 애초에 겁을 먹지 않은 사람이라면 <십이월 십이 일>을 먼저 읽은 후, 차례대로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십이월 십이 일>을 읽으며, 이상이 이 때만 하더라도 삶에 대한 의지가 있었던 것이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에 대한 의지만 확고할 때에는 죽음이 불발되지만, 이 작품에서는 죽음이 이루어진다. 아마 그에겐 삶이 죽음이고, 죽음이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의 작품을 여러 편 내리 읽다보면 마치 내가 그의 삶에 깊숙이 관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왠지 내 주변에 이상이나 보산이나 S같은 이가 매일 있을 것만 같다. 아마 그가 그의 작품 속에 그 자신을 많이 이입시킨 탓으로 추측되는데, 그에게 소설이란 제대로 살아지지 않는 현실 속에서 스스로를 괴롭히기 위해 쓰는 글처럼 느껴졌다.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다중이처럼 소설 속에서 이 사람도 되었다가 저 사람도 되었다가 결국은 이도 저도 아닌 이가 되는 것이 자신이라며 스스로를 해치고 비웃는 것이 여러 작품들을 통해 반복된다. 그런 그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는 듯한 나는 어찌할 줄을 모르겠다. T씨처럼 대면대면하게 지낼 수도 없고, 아내처럼 그를 농락할 수도, 윤 처럼 그를 비웃어줄 수도 없다. 아, 난 그가 그저 안됐다. 그를 보듬을 수 없는 것이 아프다. 너무나 힘들었던 시절의 너무나 예민했던 나이에 너무나 섬세했던 사람으로서 살아야했음이 절절하게 힘겹게 느껴졌다.

  <단발>에는 '소녀의 끝없는 고독이 소녀에게 1인 2역을 시킨 것에 틀림없었다.' 문장이 나오는데, 그의 모든 문제는 바로 이 고독에서 나온다. 그는 관계를 굳게 맺지 못하는 고독한 영혼이었다. <지도의 암실>에서 '그의 의미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은 것처럼 그는 고독의 상태에서 자신의 설 자리를 그 어느 곳에서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하기에 끊임없이 여인을 가지려하고, 그러면서도 확신하지 못하여 잡지 못한다. 또한 끊임없이 자살을 꿈꾸지만 결국 그는 그것마저도 실행하지 못하고 아마 누가 자신을 대신 죽여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여인의 다감함과 생의 종결 중 아마 그가 더 원한 것은 여인의 다감함이었지만 현실에서는 생을 마치는 것이 더 현실적이었던 모양이다. <종생기>를 유서로 삶을 마치니 그 딴에는 큰 결심을 한 모양이다.

   사랑이 필요했던 한 섬세한 사내에게는 사랑이 머물 곳이 없었다. 냉소적이긴 하나 그의 유머가 꽤나 매력적인 것을 보면 이상이라는 사람의 매력도 만만치 않았을텐데 사람을 떠나보내야만 하는 모난 성격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의 의미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가' 지금의 그의 의미는 그의 삶과 작품으로 그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크게 나오지만 그를 살리는 데에는 기여하지 못했다. 그의 삶이 그렇게 종결된 데에 마냥 안타깝지만은 않은 것은 나 뿐일까? 그가 생을 달리 어떻게 살아냈을지가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의 작품이 어렵고 쉽고를 떠나 그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하지만 마음이 나약하고 예민한 때에는 피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도 든다. 앞서 말했 듯이 빠져들게 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이 완전히 현대어로 번역된 것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지금의 이해는 그의 작품을 이해한다기 보다는 그를 이해하는 것에 더 가까우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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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짐승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9
모니카 마론 지음, 김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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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이야기'가 아닌 '사랑'

 

 

사랑의 기억은 왜 이렇게 단편적인지, 아니 기억이라는 것이 원래 이렇게 단편적인 것이겠지. 사랑할 즈음엔 그것에 몰입하느라 그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을테니 그 사랑이 끝난 후에야 주섬주섬 기억의 옷을 입으려해도 완전하지가 않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은 '나'가 프란츠를 만나기 위한 운명적 계시였다. 그게 아마 오십 년 전 쯤인가, 아님 사십 년 전쯤인가는 명확하지 않지만 그리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과 프란츠르르 만났던 것의 전후관계도 확실하지 않지만  프란츠를 사랑했던 마음만은 또렷이 기억한다. 딱히 인생에 풍랑이라곤 없었지만  죽기 전에 뜨거운 '사랑'만큼은 한 번 해 보고 싶었던 차에 베를린 장벽은 무너지고 프란츠를 만났다. 젊지 않은 나이에 남은 생을 '사랑 이야기'로만 가득 채우려고 했던 그녀의 결연한 의지가 무모해 보이지만 결국 그녀는 남은 생을 '사랑 이야기'로 가득 채웠다. '사랑'이 아닌 '사랑의 이야기'로.

 

  동독에서의 삶은 어땠을까? 지금 북한의 삶보다는 나았을 테지만 무척이나 차가운 삶이었을 것 같다. 그런 삶을 뜨겁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중년의 여인에겐 '사랑' 밖에 없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현실을 도피하고자 하는 행각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는데, 이건 동독에 살던 사람이 통일된 독일에서 살게 될 경우의 심리와 유사할 것 같다. 뭔가 자신감이 없고, 피해자인 것 같고 위축되는 듯한 느낌을 그녀는 서독 출신의 프란츠를 만나는 내내 갖고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자신은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랑을 택했는데 상대는 그러지 않으려고 했을 때의 상황에서 그녀는 절대적으로 열등하다. 그가 그녀에게 구체적 사랑을 주기까지의 시간이 그녀에겐 고통이었고, 그것을 돌이켜보는 수십 년 후의 지금도 그가 준 구체적 사랑의 결과물보다는 그 사이의 슬픔과 아픔이 더 큰 이야기가 된다. 결핍된 사람은 어느 한 순간도 구체적이지 않은 사랑에 배고픈 육식 동물이 된다는 것을 그녀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그녀 만큼은 아니더라도 사랑에 미쳐 본 사람은 안다. 상대를 얻기 위해 나 자신도 납득이 안되는 행동들을 할 때가 있다는 것을. 나는 당신을 구체적으로 사랑하는데 당신은 나를 추상적으로만 사랑한다는 느낌을 가질 때의 불안함이 불러온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 말이다.  돌이켜 보면 결코 돌이키고 싶지 않은 명백한 장면들이 분명 있다. 그런 면에서 '나'는 매우 용감하다.  그 사랑의 이야기를 오십 년, 혹은 사십 년 혹은 삼십 년 동안 반복해서 되새김질하다니. 어쩌면 지독한 사람이다. 지독한 사랑이다.

 

  마음 같아서는 그날, 그녀는 죽어야 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죽었을 지도 모른다. 아마 그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녀는 죽음을 택하지도, 평온을 택하지도 않은 채 고통스럽게 과거를 되새김질한 것일까. 그렇게 확실하지도 않은 기억들을 부풀리고 변형시켜가면서 무엇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오직 사랑뿐이다."

  라는 말을 그렇게까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확인시켜야 했을까.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이지만 이해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프란츠가 되어 곁에서 안아주고 말을 걸어주고,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해 주고 싶다. 그녀가 '사랑 이야기'가 아닌 '사랑'으로 남은 생을 다 보낼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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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2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안장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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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와 나의 첫 인연은 수능을 마치고 난 후 시간을 때우기 위해 읽었던 <괴테의 마지막 사랑>이라는 책이었는데 그때 나의 나이가 이야기 속의 괴테보다는 그가 사랑해 마지 않았던 소녀와 더 가까웠던 지라 괴테의 사랑을 다소 못마땅해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그래서 괴테의 책을 일부러 멀리 했는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7년 후, <파우스트>를 읽었다. 읽으며 감탄했다. 괴테가 괜히 괴테가 아니구나! 그래도 읽는 과정에서 쉽지 않았던 탓인지 오랜 시간 또 괴테의 책을 읽어보지 못했다.

     이런 두 번의 만남은 내가 괴테를 나이 지긋한 대작가로만 떠올리게 했다는 한계를 만들었다. 그런 선입견을 가지고 읽어 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놀라움이었다. 듣기로만 치면 수 백 번도 더 들었을 이 제목이 그런 선입견 때문에 괴테의 당시가 아니라 괴테의 회고일 것이라고 제멋대로 생각해 버린 것이다. 이 작품을 쓸 당시 괴테는 20대 초반이었다. 하! 괴테에게도 20대 초반의 나이가 있었구나!

    베르테르의 죽음을 감지하는 1771년 11월 30일과 12월 4일의 편지를 읽자면, 그의 괴로움과 외로움이 얼마나 깊은지, 얼마나 아픈지 고스란히 느껴진다. 한 여인을 사랑함으로 인해 자기 자신을 찾지 못하는 베르테르의 마음을 나 역시 괴로워했던 경험이 있기에 더욱 안타까웠다. 죽음을 결정할 것을 이미 알고 있다할 지라도 어떻게든 막아보고픈 마음도 생기고 말이다.

     죽기로 결심한 그날, 죽음을 감행한 그날은 12월 20일에서 21로 넘어가는 밤 12시이다. 오싹한 마음이 들었다. 그날이 바로 내가 태어난 날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사랑을 감당하지 못하는 한 사내가 세상을 등진 그날 때어난 난 어쩌면 베르테르의 마음을 가진 채 태어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래서 유독 이런 깊은 슬픈 감정에 마음이 더 짠해지는지도 모르겠다.

      그에게 몰입해 본다면, 그는 12월 20일 밤 즈음부터 오직 로테만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사랑해주어 자신이 소중한 존재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던 때, 그리고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오직 그녀를 만날 생각만으로 충만하던 때, 그녀가 없다면 이 세상 그 무엇도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심정, 그녀를 포기하고 동시에 삶을 포기해야하는 현재의 마음까지. 12시이기에  결코 번복할 수 없는 베르테르의 결심이 이해가 되지만 안타까운 것은 어쩔 수 없다. 피끓는 그 마음을 당사자 아닌 그 누가 이해하겠는가.

   이 책을 읽고 나니 70대 노인이 되어서도 사랑의 마음을 잃지 않았던 괴테가 달리 보인다. 20대의 베르테르인 채로 괴테는 평생을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베르테르는 자신의 사랑을 얻지 못해 비극을 선택하지만 그 조차도 자신의 선택이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 사회적 여파야 어쨌든 간에 자신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증명한 것 아니겠는가. 차라리 미쳐버린 자를 부러워하는 베르테르를 볼 때면, 그의 선택이 무모하고 이기적이고 어리석을지언정 그의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은 아니었을까 이해하는 마음도 든다.

    사실, 문학동네 번역을 읽고 나서 우연히 다른 출판사의 책을 들춰볼 기회가 있었다. 인상적인 구절을 찾아봤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때의 그 공감이 안 생겼기 때문이다. 낭만적이고 저돌적인 베르테르의 마음을 느끼기에 문학동네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좋지 않은가 권해 본다.  그리고 일부 출판사에서는 제목을 '고뇌'라고 했던데 원작의 느낌과는 상관없이 개인적인 후감으로는 '슬픔'이라는 말이 더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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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 오스카 와일드 펭귄클래식 7
오스카 와일드 지음, 김진석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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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표지에 대한 실망감과 아쉬움은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해소되지 않았지만 이 이야기가 가진 힘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기괴하다고 치부하기엔 우리 내면이 그리 깨끗하지만은 않아 많은 장면과 많은 글귀들이 가슴에 팍팍 와닿았던 책이다.

 

도대체 해리는 왜 나타난 걸까? 도리언의 입장에서 보면 그가 원망스러울 수 있을 것 같다. 차라리 아무 것도 몰랐더라면, 바질과의 그  화목한 시간을 아무런 생각없이 보낼 수 있었더라면 그의 삶은 순탄을 넘어 소소하게 행복하지 않았을까? 도리언에게만 유독 해리와의 접촉이 파멸로 연결된 까닭은 무엇일까?

 

허영심

 

우리의 내부에 자리한 그 허영심 때문이리라. 허영심이라는 녀석은 사람에 따라 마음 속 너무도 깊은 곳에 있어 죽을 때까지 만나지 못하는 경우에서부터 심장 바로 아래 쪽에 있어 틈만 나면 마음을 툭툭 건드리는 녀석까지, 어쨌든 인간 내부에 존재한다. 도리언은 바로 심장 바로 아래 쪽에 허영심이 있어 해리가 그저 툭툭 건드리기만 했을 뿐인데도 그것이 자신의 마음과 머리뿐에 꽉꽉 차 버렸다.

 

감각만큼 영혼을 치유하는 것은 없고, 또 영혼만큼 감각을 치유하는 것도 없다는 헨리의 말을 곰곰히 생각해 본다. 어떤 감각이 어떤 영혼을 치유하고, 또 어떤 영혼이 어떤 감각을 치유할 수 있을까? 젊음과 아름다움에 대한 부질없는 도리언의 열망은 그의 영혼을 갉아먹었으며, 허영심으로 가득 찬 그의 영혼은 도리언의 그림을 혐오스럽게 만들었는데 도대체 무엇이 무엇을 치유한다는 말인가? 해리의 이 말에 도리언이 넘어갔다니, 이따위 궤변에 '내가 언제나 젊고 이 그림이 대신 나이를 먹을 수 있다면!'이라고 빌어버리다니!

 

해리의 말에 반박할 궤변을 하나 펼치자면, 우리에게 감각과 영혼은 모두 균일한 양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보통의 사람들에겐 그 둘의 비율이 반반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지만 감각이 지나치게 발달한 사람의 영혼은 그에 비해 나약할 것이고, 영혼이 굳은 사람은 어쩌면 감각이 많이 무딜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영혼이 단단한 바질은 그동안 해리를 꾸준히 만나왔지만 별다른 변화를 가질 수 없었지만 평범했던 도리언은 해리를 만난 후 감각이 지나치게 발달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 흥미로운 사내에게 해리는 감각의 크기를 더 크게 불어넣는 말을 지속적으로 한다. 마치 과학자가 자신의 실험쥐에게 약을 조금씩 양을 더해가며 투여하듯이 말이다.

 

맨 처음 일그러진 자신의 초상화를 보았을 때, 그에겐 두려움과 혐오감 외에 쾌감이 분명 존재했다. 자신의 흘려뱉은 소원을 이뤄준 신을 원망하기도 했겠지만 자신은 결코 늙지도 추해지지도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 기뻤을 것이다. 자신에게 도취된 사람은 남의 불행이 보이지 않는 법, 자신 때문에 목숨을 끊은 시빌 베인은 이미 그의 안중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그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찬양해 줄 쾌락적인 것, 그 외엔 없었다.

 

바질에게 초상화를 보여주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을 찬양하지 않는 단 한 사람, 바질 홀워드에 대한 복수심은 그가 가진 허영심의 또다른 이름이었다. 평생을 불안에 떨며 살아야하면서도 절대 놓을 수 없는 감각에 대한 집착은 이렇게 난폭함과 비열함으로 표출되곤 한다. 우리는 무엇을 놓고 살아야하는 걸까, 지금 내가 절대 놓을 수 없다고 고집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떠오를 때 우리는 두려워진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책의 많은 문장들이 평범한 나의 마음을 움찔하게 한다. 내 안에도 어딘가 숨겨져 있을 허영심이 고개를 들까봐 경계하게 된다. 이 기괴한 이야기는 감각에 대한 기괴한 집착 때문에 처절하게 파멸한 도리언을 통해 그것을 경계하도록 나 자신을 만들어버린다. 극단적 과정과 결말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의 허영심을 스스로 단속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다소 억울하기도 하지만 책의 한 구절인 다음을 부정할 수 없어 얼른 단속모드로 입장을 정해야겠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살고, 그러한 삶에 대한 대가를 치른다. 다만 한 가지 유감스러운 일은 단 한 번의 과실에 대해 그 대가를 여러 번 치러야 한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사람은 몇 번이나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인간과의 거래에서 운명의 여신은 절대로 계산을 마감하는 일이 없었다. (308-3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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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7
조지 오웰 지음, 김기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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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리뷰는 <걸리버 여행기>와 같은 내용을 두 번 게재합니다.알라딘 서재에서는 리뷰 쓰기로 상품을 두 가지 이상 지정할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제대로 된 풍자이다. 인간이 곧 돼지이고, 돼지가 곧 인간의 모습을 하는 것 그리고 후이넘(말)의 격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야만스러운 야후(인간)의 모습 모두 아주 제대로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 돼지와 같고 말보다 못하다는데 그보다 심한 모욕은 없다만 읽는 내내 그렇지 않다고 애써 반박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동물 농장 - 조지 오웰 / 문학동네

 

걸리버 여행기 -조너선 스위프트 / 느낌이 있는 책

     

우선, 이 책의 표지가 조지오웰급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비가 내리는 배경은 돼지의 위치(물리적, 사회적)를 도드라지게 해 준다. 그 뿐만이 아니다. 조지오웰급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은 풍향계의 약자의 배치이다. NEWS로 묘하게 틀어놓은 방향! 아!! 볼수록 매력있다. 돼지 주제에 뉴스라니! 하! 감탄스럽다! 

 

"---인간은 생산은 하지 않고 소비만 하는 유일한 동물이요. ---그런데도 모든 동물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소.---." (13쪽)

 

그렇다. 인간은 알을 낳는 것도 아니고 우유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고 가죽을 내놓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자신들은 취하기만 할 뿐 다른 동물들에게 아무 것도 제공하지 않는다. 가끔 사랑을 제공한다는 이도 있으나 그것 역시 제공이라고 하기엔 이득이 너무 크다. 개인적으로 모든 동물은 평등해야 했어야 한다는 생각을 메이저 영감을 통해 처음 해 보는 것 같다. 인간이 모든 동물의 우위에 있는 것, 그거 누가 정한걸까? 난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배워서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우리는 대부분 그렇게 인간을 모든 동물의 우위에 스스로 올려놓고 산다. 동물의 왕인 호랑이가 콧방귀를 낄 노릇이군.

 

왼쪽의 저 돼지들의 혁명과 달리 <걸리버 여행기>에서 인간 세상을 풍자하는 것은 돼지나 말이 아닌 사람이다. 여행을 좋아했던 한 남자가 16년의 특별한 여행을 통해 인간보다 추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것을 사실 그대로 알리고자 썼다는 책. 인간의 입에서 소인국, 거인국, 후이넘의 나라를 동경하고 존경하는 말들이 나오는 것은 다른 동물들에게 듣는 말보다 강했다.  

 

타락한 인간과 반대편에 있는 탁월한 네발짐승, 즉 후이넘들의 미덕이 내 눈을 밝혀 주고 이해의 폭을 넓혀준 결과, 인간의 행동과 욕망들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인간의 명예를 내세울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는 것을 고백해야겠다. (379쪽)

 

탐욕스럽고, 야비하고, 자신의 이성을 나쁜 일에만 쓰고자 하는 비인격적인 모습이 가장 사람다운 모습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후 걸리버는 거울을 보는 순간 가장 치욕스럽다. 자신이 야후(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자신의 종족 본성에 역함을 느끼게되는 그 시간이 우리에게 전혀 없는 걸까? 수많은 다툼들과 범죄들이 역겹다는 건 작가가 살았던 그 때보다 더 심해진 것 같다.

 아무튼 상이 변했다. 혁명을 통해 농장은 돼지들의 것이 되었고 그들에겐 자유가 있었고 풍족함과 여유로움, 민주적인 절차가 보장되는 듯 했다.이름도 <동물 농장>. 동물이 주인이 된 농장이다.

 

일곱 계명

1. 두 발로 걷는 자는 누구나 적이다.

2. 네 발로 걷는 자 또는 날개를 가진 자는 누구나 친구이다.

3. 어떤 동물도 옷을 입어서는 안된다.

4.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자서는 안 된다.

5. 어떤 동물도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

6.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죽여서는 안된다.

7.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고 나면 결국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권력이란 그런 것이다. 가지게 되면 돼지도 두 발로 걷게 하고 침대에서 자게 하며, 더 평등한 몇몇 동물이 되게 한다.

 

힘없고 선량한 동물들은 권력을 가진 지도자들을 믿고 따르지만 결국, 그들은 점점 굶주리고, 속고, 버려진다. 그들이 노동한 대가는 더 평등한 몇몇 동물들이 취하게 되고, 그들이 그리워한 자유 역시 그 돼지들의 차지이다. 풍향계 위에 올라가서 새로운 소식이라며 거드름을 피우고 사기를 치는 모습에 분통해 하지만 이미 한참을 속은 뒤이다. 이름도 <매너 농장>으로 바뀌지 않는가.

 

벤저민이 믿었던 단 한 가지 "풍차가 있든 없든 삶이란 언제나처럼 고생스러울 것"이라는 항목만이 유효할 뿐이다. 어리석은 우리들이여, 권력을 차지한 채 언제나 새로운 소식이라며 우리를 현혹하는 돼지들을 조심할 지어다. 그것은 아주 인간적인 더럽게 인간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걸리버가 처음부터 인간에 대해 역겨움을 갖게 된 것은 아니었다. 릴리풋(소인국)이나 브로브당나그(거인국), 라퓨타 등에 갔을 때는 자신과 다른 존재들에 대한 넓은 이해를 하는 좀더 나은 인간의 모습이었다. 영국인으로서의 품위도 가지고 있었고 자긍심도 있었다. 각 지역의 특색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유연하나 태도가 있었지만 그것에 지배당하지 않았고 영국에서의 삶도 별 탈없이 살 수 있었다.

 

유연한 사고의 소유자인 걸리버는 동시에 당시로서도 무척 깨어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생각은 지금 세상에 태어나도 전혀 구닥다리같지 않다. 오히려 지금 세상에서도 매우 파격적이다.

 

모든 자녀들은 부모가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것에 대해 보답할 필요가 없다. 더구나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어야 할 여러 가지 고달픈 일들을 생각해 볼 때, 자녀 입장에서는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것이 그렇게 고맙게 여겨야 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부모 입장에서도 사랑의 결합을 할 때는 자녀가 아닌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75쪽)

 

이런 그이기에 후이넘의 나라에 가서도 그들을 존경할 수 있었던 것이지 일반적인 사람은 아마 후이넘은 후이넘이고 야후는 야후고 인간은 인간이라고 합리화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걸리버가 서술한 후이넘과 야후의 극단적인 대비는 독자에게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게 했다. 진화론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야후와 같다는 것을 결코 인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야후가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란 말이야? 지금 우리는 그 야후에서 좀더 사기꾼 기질이 보태어진 악질 야후이고? 어떻게 그걸 쉽게 인정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거참, 인간의 본성이란 알고 싶어지지 않는다.

  두 작품은 모두 성추설에서 시작한다. 인간의 본성은 추하다. <걸리버 여행기>는 여기에 한 발 더 얹어서 가뜩이나 추한 본성에 이성이 자리하면서 더 추해졌다고 말한다. 정말, 이렇게 자기혐오를 하면서 살아야 할까? 비참하다.

  그러니 그 추함이 사라진 아름다운 사람은 도대체 얼마나 덕을 쌓은 거란 말인가? 내가 후이넘까지는 아니더라도 <동물 농장>의 선량한 동물들만큼은 가치있어야 할 텐데, 아무 것도 자신할 수 없는 것이니 제발 자신을 먼저 돌아보며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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