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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 오스카 와일드 ㅣ 펭귄클래식 7
오스카 와일드 지음, 김진석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10월
평점 :
비록 표지에 대한 실망감과 아쉬움은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해소되지 않았지만 이 이야기가 가진 힘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기괴하다고 치부하기엔 우리 내면이 그리 깨끗하지만은 않아 많은 장면과 많은 글귀들이 가슴에 팍팍 와닿았던 책이다.
도대체 해리는 왜 나타난 걸까? 도리언의 입장에서 보면 그가 원망스러울 수 있을 것 같다. 차라리 아무 것도 몰랐더라면, 바질과의 그 화목한 시간을 아무런 생각없이 보낼 수 있었더라면 그의 삶은 순탄을 넘어 소소하게 행복하지 않았을까? 도리언에게만 유독 해리와의 접촉이 파멸로 연결된 까닭은 무엇일까?
허영심
우리의 내부에 자리한 그 허영심 때문이리라. 허영심이라는 녀석은 사람에 따라 마음 속 너무도 깊은 곳에 있어 죽을 때까지 만나지 못하는 경우에서부터 심장 바로 아래 쪽에 있어 틈만 나면 마음을 툭툭 건드리는 녀석까지, 어쨌든 인간 내부에 존재한다. 도리언은 바로 심장 바로 아래 쪽에 허영심이 있어 해리가 그저 툭툭 건드리기만 했을 뿐인데도 그것이 자신의 마음과 머리뿐에 꽉꽉 차 버렸다.
감각만큼 영혼을 치유하는 것은 없고, 또 영혼만큼 감각을 치유하는 것도 없다는 헨리의 말을 곰곰히 생각해 본다. 어떤 감각이 어떤 영혼을 치유하고, 또 어떤 영혼이 어떤 감각을 치유할 수 있을까? 젊음과 아름다움에 대한 부질없는 도리언의 열망은 그의 영혼을 갉아먹었으며, 허영심으로 가득 찬 그의 영혼은 도리언의 그림을 혐오스럽게 만들었는데 도대체 무엇이 무엇을 치유한다는 말인가? 해리의 이 말에 도리언이 넘어갔다니, 이따위 궤변에 '내가 언제나 젊고 이 그림이 대신 나이를 먹을 수 있다면!'이라고 빌어버리다니!
해리의 말에 반박할 궤변을 하나 펼치자면, 우리에게 감각과 영혼은 모두 균일한 양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보통의 사람들에겐 그 둘의 비율이 반반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지만 감각이 지나치게 발달한 사람의 영혼은 그에 비해 나약할 것이고, 영혼이 굳은 사람은 어쩌면 감각이 많이 무딜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영혼이 단단한 바질은 그동안 해리를 꾸준히 만나왔지만 별다른 변화를 가질 수 없었지만 평범했던 도리언은 해리를 만난 후 감각이 지나치게 발달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 흥미로운 사내에게 해리는 감각의 크기를 더 크게 불어넣는 말을 지속적으로 한다. 마치 과학자가 자신의 실험쥐에게 약을 조금씩 양을 더해가며 투여하듯이 말이다.
맨 처음 일그러진 자신의 초상화를 보았을 때, 그에겐 두려움과 혐오감 외에 쾌감이 분명 존재했다. 자신의 흘려뱉은 소원을 이뤄준 신을 원망하기도 했겠지만 자신은 결코 늙지도 추해지지도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 기뻤을 것이다. 자신에게 도취된 사람은 남의 불행이 보이지 않는 법, 자신 때문에 목숨을 끊은 시빌 베인은 이미 그의 안중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그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찬양해 줄 쾌락적인 것, 그 외엔 없었다.
바질에게 초상화를 보여주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을 찬양하지 않는 단 한 사람, 바질 홀워드에 대한 복수심은 그가 가진 허영심의 또다른 이름이었다. 평생을 불안에 떨며 살아야하면서도 절대 놓을 수 없는 감각에 대한 집착은 이렇게 난폭함과 비열함으로 표출되곤 한다. 우리는 무엇을 놓고 살아야하는 걸까, 지금 내가 절대 놓을 수 없다고 고집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떠오를 때 우리는 두려워진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책의 많은 문장들이 평범한 나의 마음을 움찔하게 한다. 내 안에도 어딘가 숨겨져 있을 허영심이 고개를 들까봐 경계하게 된다. 이 기괴한 이야기는 감각에 대한 기괴한 집착 때문에 처절하게 파멸한 도리언을 통해 그것을 경계하도록 나 자신을 만들어버린다. 극단적 과정과 결말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의 허영심을 스스로 단속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다소 억울하기도 하지만 책의 한 구절인 다음을 부정할 수 없어 얼른 단속모드로 입장을 정해야겠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살고, 그러한 삶에 대한 대가를 치른다. 다만 한 가지 유감스러운 일은 단 한 번의 과실에 대해 그 대가를 여러 번 치러야 한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사람은 몇 번이나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인간과의 거래에서 운명의 여신은 절대로 계산을 마감하는 일이 없었다. (308-30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