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받은 여자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4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강초롱 옮김 / 민음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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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기의 여자>를 떠올리게 만든 장편소설. 그러면 남편의 외도가 나오겠네? <초대받은 여자>에서 주인공 프랑수아즈 미켈과 피에르 라브루스 커플은 면사포 입고 교회에서 식 올린 정식 부부가 아니라 보부아르-사르트르처럼 “계약결혼” 관계인 것처럼 보인다. 작품 속에서 이런 말은 전혀 나오지 않지만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위기의 여자>에서 남편 모리스가 바람을 피운 것과 “유사하게” 연기 하나는 기가 막힌 연극배우이자 연출가인 피에르는 초대받은 여자 그자비에르 파제스 양을 커플 사이에 끼워 자신의 사랑을 나누어준다. <위기의 여자>도 그렇고 <초대받은 여자>도 그런데, 이 두 작품에서는 남자가 외도를 하고, 그로 인해 여성이 고통을 받는다.

  <초대받은 여자>를 읽고나서 보부아르와 사르트르 사이에 있었던 다른 여성들을 검색해봤더니 천일야화 같은 일이 있다. 위키피디아를 보면 보부아르는 1929년에 프랑스 역사상 최연소로 철학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하는데 차석이었고, 당시 수석은 사르트르가 했단다. 물론 전부터 눈이 맞았겠지만 이 해, 1929년에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와 계약결혼을 시작해, 서로의 연애에 관여하지 않고 정직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2년 단위의 계약을 갱신해 나가기 시작한다. 하여간 이래서 보부아르는 고등학교 철학 교사를 하기 시작하면서 교직 기간에 적어도 세 명의 제자와 동성애 관계를 맺는다. 첫번째 상대가 러시아 출신 당년 18세의 올가 코사키예비치. 보부아르는 올가와의 관계를 계약의 의거하여 거짓 없이 사르트르에게 보고했고, 사르트르 또한 올가에게 애정이 가는지라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올가 코사키예비치가 보기에 이거 뭐 복잡하고 이상하고 말도 안 되는 거 같아서(짐작이다) 거절을 하니, 사르트르는 꿩 대신 닭이었을까, 올가의 동생 완다 코사키예비치와 관계를 맺어버린다. 하여간 보부아르는 적어도 세 건에 달하는 제자와의 동성애 때문에 교직에서 쫓겨났으며, 사르트르는 올가가 결혼하기 전까지, 완다는 사르트르 자신이 죽기 전까지 후원자로 있었다. 그러니까 보부아르와 사르트르, 이 계약 부부 사이에 올가와 완다 코사키예비치 자매가 있었던 건 확실하다.

  보부아르가 허리 아래쪽으로 ‘추악’한 것이 자유 연애를 했기 때문이 아니다. 자기 제자에게 직위를 이용해 관계를 맺었다는 것도 있고, 게다가 상대 올가는 혁명 후에 조국을 탈출한 러시아 출신, 두번째 동성애인인 비앙카 비넨벨트도 폴란드 출신이었으며 세번째로 교직에서 쫓겨나게 된 결정적 계기인 나탈리 소로킨은 가난한 이혼/이주가정의 딸로 다방면으로 사회적 약자를 직위와 돈으로 착취한 거였다. 나탈리 소로킨의 어머니한테 고발당한 것이 1941년이니 파리가 독일군에게 점령당했을 때인데, 보부아르는 이때 가난한 동성의 고등학생 제자 성착취 해야지, 레지스탕스 일 해야지, 철학공부 해야지, 작품 써야지, 와, 정말 철인이었다, 철인. 실제로도 매사에, 다양하게 성실하고 부지런해 ‘비버’라는 별명도 있었다고.

  어쨌거나 교직에서 추방당한 보부아르는 올가와 완다를 한 사람으로 축약해 계약 부부로 보이는 커플 사이로 초대한 것으로 상정해서 쓴 장편소설이 <초대받은 여자>이다. 만일 위키피디아 검색을 해보지 않았다면, 작품의 주인공인 프랑수아즈가 어린 그자비에르를 기어이 자기 품에 두고 무한정으로 후원하는 이유를 끝내 몰랐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끝까지 책을 읽고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프랑수아즈-피에르 커플에 얹혀 살면서도 그렇게 파렴치하고 뻔뻔스럽게 까탈을 부릴 수 있었겠지. 이런 작품이야말로 본문 시작하기 전에 역자 서문 같은 거 붙여주면 좋았을 뻔했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그자비에르가 하도 프랑수아즈의 속을 썩이길래 그냥 후원을 끊고 고향인 루앙으로 보내 버리면 깨끗할 것을 왜 저리도 지지리 궁상일까, 당대의 지식인이자, 시대의 양심이자, 철학박사들은 다 저래야 하는 모양이지? 내 속창아리 썩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호메로스가 저 위대한 <일리아드>에서 사용한 방법, 이야기를 시간 순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부터 불쑥 시작하는 인 메디아스 레스 in medias res를 보부아르는 자신의 바람직하지 않은 과거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방향으로 써먹어 버렸……다?


  극장의 작업실에서 작품은 시작한다. 새벽 두시. 프랑수아즈는 소설가를 겸하는 극작가이다. 이이는 셰익스피어의 <율리우스 시저>를 각색하고 있다. 아침에 도착할 극단 연출가이자 주인공 시저를 연기할 피에르에게 대본을 건네야 한다. 프랑수아즈가 손으로 작성하면 대기하고 있는 제르베르가 타이프 한다. 제르베르. 젊은 조연출자. 아름다운 청년이지만 눈 밑 그늘 때문에 스무 살은 더 먹어 보인다. 처음 소개할 때 젊은 청년이란 말 없이 “스무 살은 더 먹어 보인다.” 라고 해서 한 서른 중반 정도의 (1930년대 말 시점으로) 중년 남성인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예쁜 여성보다 더 속눈썹이 길고 부드러운 머리결의 미남 청년이다. 프랑수아즈의 마음 속엔 어느 새 풋풋한 사랑의 마음도 샘솟지만 피에르를 죽자사자 사랑하기 때문에 새파랗게 젊은 청년을 마음 속에 들여놓은 빈 터가 없다. 하지만 독자는 안다. 작품 초장에 이리 초를 쳐 놨으니 저 뒤로 가면 무슨 사달이 나도 나겠군. 허벅지 탁! 그렇다. 한다. 피에르 네까짓 것이 하는데 나라고 못해? 뭐 이렇게 홧김에 서방질 식은 아니지만. 명색이 지식인이고 장안에 이름이 떠르르한 작가가 설마. 설마? 그리고, 큰 기대 마시라. 하나도 안 야하다.

  두번째 씬은 프랑수아즈와 그자비에르. 루앙에서 파리로 올라온 그자비에르는 제르베르와 비슷한 젊은 또래의 여성으로 아랍풍의 카페에 앉아 있다. <초대받은 여자>는 파리 좌안을 무대로 한다. 이게 아마 일반적으로 지도를 그릴 때 센 강의 왼쪽 편에 있는 동네를 칭하는 걸로 알고 있다. 다양한 문화생활 공간과 대학, 카페, 술집, 댄스홀 등 인텔리겐치아들이 서로서로 잘난 척하기에 여념이 없는 지성의 진검승부가 벌어지는 곳. 이 카페에 둘이 앉아 아무런 설명 없이 프랑수아즈가 루앙 촌년 그자비에르에게 파리에 머물면서 속기 타이핑이라도 배우기만 하면 자기가 일자리를 알아줄 수 있으니 머물러 있으라고 권유한다. 이 시점부터 끝날 때까지 독자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도대체 30대 프랑수아즈와 20대 그자비에르가 무슨 관계일까? 그자비에르는 싫단다. 손재주가 없어 속기도 타이프도 못 배울 거라고 지레 짐작한다. 프랑수아즈는 자기한테 신세지기 싫어 핑계대는 거라 생각하지만 곧 밝혀지니 오산이다. 그자비에르는 애초부터, 이왕 프랑수아즈와 살며 구차하게 일을 하고 싶지 않은 거다. 저는 특별한 관심이 있는 게 없어요. 반드시 뭔가를 해야만 하나요? 원하는 대로 살 수 없다면 안 살면 그만이예요. 독자 입장에서 더 가관인 것은 입고, 자고, 먹고, 술과 담배, 춤 등의 기호와 취미, 이동, 생리현상, 기타 등등에 필요한 모든 돈이 프랑수아즈의 계좌에서 나오는 것을 당연하게 알고 전혀 부족함 없이 향유한다. 게다가 사람 관계에서도, 혼자 누구를 독점하면 마음이 놓이지만 살면서 재미있는 대상을 하나 만들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족속이다. 독점하기 위하여 지독하게 질투를 부리며, 모든 사고 방식이 오직 자신을 위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전형적인 소시오패스. 너무 독한 평가 아니냐고? 천만에. 읽어 보시라. 이게 독한 건지 아닌지.

  드디어 날이 밝고, 기차를 타고 파리에 도착한 피에르는 곧바로 극장으로 온다. 그는 극장의 분장실에서 먹고 산다. 물론 거의 프랑수아즈가 살고 있는 호텔방에서 잠을 자지만. 나이트 가운 차림으로 분장실에서 쉬고 있는 피에르에게 프랑수아즈는 그자비에르 문제를 상의한다. 그 아이는 도통 내 신세를 지려고 하지 않아. 피에르는 도저히 벗어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할 법한 난처한 상황 속에서 순수한 미래를 발견해 자기만의 방식대로 미래를 만들어가는 일을 자신의 임무라고 여기기도 하는 잘난 척 대마왕이다. 그가 해법을 일러주기를, 그자비에르에게 들어가는 자금은 프랑수아즈가 빌려주는 것이니 후에 직업을 갖게 되면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 말하라 한다. 그래서 그자비에르는 프랑수아즈가 사는 호텔의 아래층 방에서 살게 된다.

  프랑수아즈와 피에르. 피에르가 말하기를 당신과 나, “우리”는 하나이며 함께가 아닌 우리는 우리라고 할 수 없는, 우리말로 일심동체라고 한다. 다른 사람과 엑스터시를 체험하는 일이 있더라도 진정한 사랑은 “우리”의 것뿐이라고. 그러나, 피에르는 심드렁하게 그자비에르를 면담하고 한 방에 눈이 홱, 돌아간다. 한 번 봤더니 정말 예쁘거든. 그러다 프랑수아즈가 일을 하고 있는 동안 둘만 카페에 가서 오랜 시간동안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하고, 입술에 가볍게, 마치 새 부리로 쪼듯 키스도 나누고 돌아와, 프랑수아즈에게 자신들의 계약에 의거해 솔직하게 선언한다. 프랑수아즈, 우리는 서로 사랑하게 됐어. 이렇게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밖에 모르는 소시오패스 젊은 처자 그자비에르가 이들 사이에 정식으로 들어앉아 세 명의 앞에는 본격적으로 지옥의 문이 열리게 되는데…….

  당연히 프랑수아즈도 사람이니 아무리 계약에 있더라도 질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중에 그건 피에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계약 부부는 싸움이라기보다 다툼을 하는데 역시 많이 배운 시대의 석학들은 싸울 때도 말이 참 근사하다.

  “당신은 눈치조차 못 챈 거군요.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에요. 우리 사랑을 몹시 소중히 여긴 나머지 시간을 초월하고 수명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곳에, 그 무엇의 영향도 받지 않는 곳에 보관해 왔을 테니까. 그런 당신에겐 이따금 우리 사랑을 떠올리며 만족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겠죠. 그러다 보니 변해 버린 우리 사랑의 실체를 단 한 번도 들여다본 적이 없는 거라고요.”

  거참. 부부싸움도 열라 형이상학적이다. 

  “그렇지만 당신으로 가득 찬 순간들, 그게 바로 내 인생을 이루고 있어요. 만일 그 순간들이 비어 있다면, 그것들이 하나의 충만한 전체를 이루고 있다고 당신이 아무리 말하더라도 난 받아들일 수 없을 거예요.”

  “내가 당신과 함께 충만한 순간들을 수없이 맛보고 있음을 모르겠소? 마치 내가 무신경한 잡놈이라도 된다는 듯 당신은 말하는군.”

  어이, 피에르. 또는 사르트르, 당신, 잡놈 맞아!


  작품은 프랑수아즈라고 읽는 보부아르의 입장에서 서술한다. 그러니 어쩌겠어?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결말의 딱 한 장면만 빼고 프랑수아즈는 천사 자체다. 적어도 피에르가 그자비에르와 (눈치로 봐서) 깊어지기 전까지 우리가 아는 계약이 허용함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정절을 지키고, 그자비에르의 모든 비용을 온전히 감당하면서도 아이가 자신에게 가하는 질투와 멸시와 정신적 학대에 이르는 가해를 견뎌내며, 프랑수아즈 스스로 판단하기에 자기가 무슨 현현한 신인줄 오해하고 사는 피에르가 가하는 가스라이팅도 기껍게 다 받아들인다. 무슨 말인고 하면, 하도 그래서 아주 가끔은 그자비에르와 피에르가 필요 이상으로 나쁜 배역을 맡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의심도 든다는 말이다.

  근데 우습게도 이거, 명백하게 실존주의 소설이다. 현재 실존하는 것의 중요함. 결국 결론은 이렇게 끝난다. 그래서 어떻게 끝나냐고? 에이, 참. 안 알려드리는 거 뻔히 아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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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4-04-29 06:2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게다가 보부아르의 연애 상대였던 자크 로랑 보스트라는 사람과 올가가 나중에 결혼하죠..

공쟝쟝 2024-04-29 12:46   좋아요 2 | URL
역시... 작가들이란 자기 인생을 파서 글을 쓰는 종족들일까요?~ 나는 왜 보봐르에 대한 사적인 관심으로 이 책이 읽고 싶은 것인가.... (하지만 졸릴 것 같다....)

Falstaff 2024-04-29 16:02   좋아요 1 | URL
으... 답글이 늦었습니다. 오후 네 시도 안 돼서 벌써 꽐라... ㅋㅋㅋ 인생이 천국입니다.
깊게 생각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지까짓 것들이 해봐야 작가 밖에 더 됩니까, 읽어주는 말 그대로 읽어 ˝주는˝ 독자 없으면 다 찌그러지는 것들 ㅎㅎㅎ
 
달콤한 목요일
존 스타인벡 지음, 박영원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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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연말에 전편 격인 <통조림 공장 골목>을 읽자마자 <달콤한 목요일>이 다음 차례 스타인벡이 될 것이라고 확정했다. 그리고 석 달 만에 읽었다. 3개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면, 캐너리 로 유일의 식품점 사장 리청이 재산을 싹 정리해 현금으로 바꿔 남태평양 섬으로 들어갔다. 남은 평생을 신선처럼 지내기로 했다. 그리하여 우리의 엉뚱한 사고뭉치 영웅 맥이 생각하기를, 지금쯤 야자나무 그늘에 걸어놓은 해먹에 누워 흔들거리고 있을 텐데 틀림없이 리청의 옆엔 생각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옷만 입은 남태평양 미녀가 다소곳하게 앉아 있을 거라나? 그리고 나중에 ‘세계대전‘이라 불릴 큰 전쟁이 나서 옛 어분 창고였지만 엉뚱하게 “팰리스 플롭하우스 앤드 그릴”이란 이름의 맥 일당 숙소 일원이었던 게이가 폭격기를 몰고 런던 근교를 날다가 대공포화를 맞아 폭사해버렸다. 마음 약한 플롭하우스 일당들은 게이의 침대와 물품을 그대로 보관하고 있어서 그가 펼쳐 놓은 책도 여태 26페이지를 가리키지만 그렇다고 죽은 사람이 다시 돌아오기나 할지 원. 화이티 No.1은 오클랜드 군수공장에 군역 대신 들어갔다가 이틀만에 다리를 다쳐 석달 동안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다 의병 제대했고, 화이티 No.2는 제1해병대를 지원해 교체요원으로 복무했다. 청동성장星章을 받았다고 하지만 훈장을 직접 본 사람은 없다. 작은 유리병 속에 1쿼트의 브랜디를 부어 절인 적군의 귀를 가지고 있다가 검열관에 빼앗긴 걸 안타까워한다. 미친 놈인 거 맞다. 맥은 나이가 많아 징집대상이 아니었고, 에디는 진짜 나이보다 신체 나이가 워낙 많다고 측정이 되어 부적합 판정을 받고 아직도 ‘와이드 이다’의 바텐더를 하고 있다. 술꾼들이 남긴 술을 주종에 관계없이 단지에 담아 가득 차면 땅 속에 묻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다. “팰리스 플롭하우스 앤드 그릴”이란 이름을 지은 장본인인 헤이즐은 사람이 조금 모자라 여전히 아무 생각 없다.

  후덕한 포주, 훌륭하고 큼지막한 여장부 도라 플러드는 유곽 베어 플래그를 유산으로 남기고 잠 자다 죽고 말았다. 유곽은 친언니 플로라가 물려 받았는데, 피는 속이지 못한다는 말이 맞아서 플로라 역시 동생 도라 못지않게 선한 품성을 지닌 포주다. 매춘 아가씨들에게 교양 교육을 시키고 욕을 금지하며, 열두세 개에 달하는 식탁의 포크와 나이프 사용법을 익히게 하는 등 몸 파는 아가씨들에게 숙녀교육을 지속적으로 시켜 정상적인 결혼을 통해 사회에 복귀시키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안다. 아가씨 한 명이 결혼해 나갈 때마다 벽에 사진과 더불어 별을 하나씩 붙여 놓는다.

  리청이 사라진 식료품점은 멕시코인 조지프 앤 메리 리바스가 인수받았다. 터프한 인간으로 조지프 앤 메리에 비교하면 맥 패거리는 순결하고 성실한 어린 양 수준이다. LA 출신으로 어린 나이에 십대들의 길거리 깡패 조직을 이끌면서 동산current asset의 사적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았었다. 즉 내 돈이 내 돈이고 네 돈이 내 돈이었다. 12세에 소년원에 들어가 2년 후 퇴소할 때는 현존하는 모든 범죄 수법을 섭렵했으나 하여간 외모는 슬프고 순진해 보이는 눈을 가졌다. 돈을 모아 과거를 정리하고 몬터레이에 정착해 존 스타인벡 이웃에 살게 된 사내.


  전편 <통조림 공장 골목>에서 맥과 더불어 투 톱을 이루었던 닥은 <달콤한 목요일>에서도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전쟁이 터져 징병이 되는 바람에 웨스턴 생물학 연구소를 부자 친구 올드 징글블릭스에게 맡기고 기술하사관으로 복무했다. 무제한 공급되는 군용 술과 친구 사귀기에 여가시간을 몽땅 사용하다가 전쟁이 끝나자 재고 문제를 해결하는 보직을 맡아 2년을 더 복무하고 제대해 연구소에 복귀했다. 그동안 부자 친구 징글블릭스가 거의 손을 놓고 있어서 폐허가 된 생물학 연구소를 앞에 놓고, 금방 군역을 마친 닥은 좀처럼 길을 찾지 못한다. 전에는 부드럽고 유쾌한 삶을 영위하며 음악과 다양한 해양생물을 수집/배양해 대학과 박물관에 납품을 하며 연구하는 데 자신의 인생을 걸었었는데, 이제는 닥 안에 세 명의 닥이 있어서, ①연구, ②생각해보고 결정해, ③외로워,를 연발하고 있다.

  뭐라? “외로워”를 연발한다고? 그럼 사랑, 아니면 적어도 여자가 문제겠네? 그렇다. 여전히 인간이 이룩한 업적 가운데 가장 뛰어난 두 가지는 괴테의 <파우스트>와 바흐의 <푸가의 기법>이란 생각은 변하지 않았건만, 통조림 골목 시절엔 상상도 하지 못하게, 젊은 여자와 640킬로미터 떨어진 라호야로 여유롭고 긴 채취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가는 도중, 오는 도중 쉼 없이 두족류 생명체인 문어 이야기만 죽자사자 해서 상대 여성으로 하여금 정이 똑 떨어지게 만들어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해 문제지만.

  새로 수지라는 이름의 아가씨가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몬터레이에 도착한다. 낮은 코에 큰 입을 가진 예쁜 아가씨로 21세에 키 165센티미터이며, 큰 가슴을 가지고 있다. 엣다 모르겠다. 확 깨놓고 말해, 수지 아가씨는 당장 먹고 잘 곳이 없어서 애칭 ‘포나’로 불리는 플로라 여사가 운영하는 유곽 베어 플래그에 자진해 들어가 매춘부가 되는데, 매춘부를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큰 가슴을 가지고 있다. 또 처음 알았네, 프로 매춘부는 가슴이 크면 불리하단다. 산전수전 다 겪은 조지프 앤 메리가 그렇게 이야기하니 믿어야지 뭐. 그가 몬터레이에 도착해 간이 음식점인 포피 식당에 들어가자 곧바로 수지의 뒤를 따라 식당에 들어서는 이가 있었으니 몬터레이의 선량한 경찰 조 블레이키. 그는 마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아는 유일한 사람이다. 하느님이냐고? 아니, 아니. 워낙 좁은 마을이라 동네 경찰 또는 보안관은 누구네집 빨래하는 날짜까지 훤하게 알고 있는 거다. 식당 주인 피곤한 엘라한테 커피 한 잔을 주문한 조 블레이키는 수지와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은 다음에, 만일 돌아가고 싶은데 차비가 없으면 기꺼이 꾸어 주겠다고 말한다. 괜찮다고 하고 취직한 곳이 베어 플래그.

  <통조림 공장 골목>을 읽은 독자는 안다. 베어 플래그가 식료품점과 공터 하나를 경계에 두고 반대편에 있으며, 이 가게들과 삼각형을 이루는 꼭지점에 우리의 닥이 사장으로 있는 웨스턴 생물학 연구소가 있다는 것을. 연구소에서 연구가 안 되어, 혹은 어떤 연구를 할까 고민중인, 그것도 아니면 외로워, 외로워서 못 살겠어요 타령을 하던 닥이 2층에서 무심코 내려다보는 거리에 발랄한 발걸음의 베어 플래그 아가씨의 뒷모습이 보인 것은 당연하겠지? 아가씨가 팔랑팔랑 길을 걷다가, 제발 조금만 더 계속 앞으로 죽 갔으면, 하는 닥의 바람과 달리 모퉁이를 돌아 모습이 사라져도 닥의 눈에는 치마와 종아리와 어깨의 잔상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대강 그림을 그려지는 거다.


  하나 더. 악당이 살지 않는 이 작은 동네 통조림 공장 골목에 대하여. 전쟁은 몬터레이 풍경도 바꾸어 놓았다. 자국 청년을 징집해 유럽과 태평양으로 보낸 미국은 자국 국민뿐만 아니라 생산활동을 할 수 없는 유럽인들도 먹여 살려야 했다. 당연히 아시아인은 중요 고려대상이 아니었지만. 그러나 미국에서도 생산활동에 참여할 노동력이 줄어들었으니 이걸 우짜? 무조건 대량 생산. 농산물은 당연하고 수산물도 어획량 제한이 철폐되어 어부들은 생선의 씨를 말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통조림 공장이 하루 스물네 시간 힘차게 돌아가다가, 돌아가다가, 돌아가는 듯했는데, 어느 새 조금씩 가동 시간이 줄어들더니, 드디어 거리에 모터 도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 골목은 텅 비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생산활동이 줄어들면 기업의 이익이 줄고, 그래서 정부는 걷어들일 세금이… 물에 빠진 할배 그거처럼 쪼그라들어버렸다. 정부가 가만히 있나 어디? 세무서는 새로운 세금원을 찾아내기에 혈안이 되고, 집집마다 생각도 못했던 세금 고지서를 받기 시작하자, 천하에 가진 것 없는 맥이 엉뚱한 고민에 휩싸이게 된다. 지금 살고 있는 팰리스 플롭하우스 앤드 그릴이 떠나버린 중국인 리청이 소유하고 있었으니 분명히 조지프 앤드 메리가 소유권을 가지고 있을 텐데, 아직까지는 그게 자기 건물인지 몰라 월세 받을 생각을 안 하고 있지만 세무서에서 청구서가 날아들면 득달같이 월세는 물론이고 자기가 가게를 인수했던 시점부터 오늘 이때까지의 월세를 추징해 달라고 할 게 분명하다, 분명할까? 아마 그렇겠지? 그러면 아무 수도 없이 그냥 쫓겨나야 한다. 함부로 덤볐다가는 몬터레이 뿐만 아니고 캘리포니아의 멕시칸 커뮤니티에서 한 성깔 하는 종족들을 불러오는 일도 생길 수 있다. 그러면 죽은 목숨이라고 봐야 하니 이걸 어쩌나. 이렇게 저렇게 맥은 조금 부족한 두뇌를 짜기 시작하고, 이 계략에 다른 의도로 선량한 포주 포나가 가세해 또 한 편의 난장판, 당연히 전편과 마찬가지로 실패로 끝날 운명인 난장판을 준비한다.

  이때까지도 <달콤한 목요일>의 히든 히어로, 백치 천사, 헤이즐의 기가 막힌 마지막 한 방이 뭔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걸? 그거 읽으면서 조용한 평일 열람실에서 미친 놈처럼 키득거렸다. 역시 스타인벡은 날 배신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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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4-26 05: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시몬 드 보부아르, <초대받은 여자>
화요일. 오타 요코, <시체의 거리>
목요일. 최은영,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금요일. 유진 오닐, <이상한 막간극>
 
12월 10일
조지 손더스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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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을 때는 독특하게 그로테스크한 묘사로 꽉 차 있는 괜찮은 단편집이구나, 좀 감탄하면서 읽었는데, 읽고나서 4일이 지나 독후감을 쓰려 하니 탁 떠오르는 것이 없다. 책을 읽자마자 썼더라면 분명히 상찬을 했을 것 같다. 지금 기억하는 것은 별점 주면 넷 정도가 적당하겠다 라고 마음먹었던 것하고, 얼어붙은 호수 위를 건너가다 얼음이 깨져 빠진 아이를 구출하는 자살기도자 이야기 정도. 책을 휙휙 날려 보니 딱 하나 생각나는 스토리가 표제작 <12월 10일>이다.

  여러가지로 난감하게 됐다. 이러니 무슨 독후감을 쓰나 그래. 물론 책 뒤편에 달려 있는 역자 해설을 컨닝하면 좀 쓸 수 있겠지만 그건 내 이야기, 내 감상이 아니잖여? 하여튼 작가 조지 손더스가 미국에서 가장 흥미로운 단편 작가라는데, 적어도 이런 주례사가 터무니없는 과장이 아니란 건 기억한다.

  지금 품절도 아니고 절판된 책이라 이 정도로 끝내도 양해해주시리라 믿음. 솔직한 심정은, 거의 쉬지 않고 독후감 한 십 년 썼더니 이젠 키보드 두드리기가 징글징글하기도 하고, 독후감 쓰느라 책 다시 읽는 건 누가 십만원 주겠다고 하지 않으면 하기 싫고 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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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4-25 09: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폴스타프님 리뷰 예고편이 짐이 되고 있진 않으신지...!
리뷰 미뤄두고 못한 책이 너무 많네요 ㅋ


Falstaff 2024-04-25 16:25   좋아요 1 | URL
ㅎㅎㅎ 괜찮습니다. 이 책 읽은 날이 딱 한 달 전인 3월 25일이군요.
요즘 점점 게을러져서 책 읽고 독후감 쓰기가 점점 싫어서 문젭니다.
 
하얀 악마
존 웹스터 지음, 고현동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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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66년에 런던에서 큰 화재가 발생했다. 이때 런던의 랜드마크이기도 했던 여러 성당도 홀랑 타버렸는데 당시 런던 시민들의 출생증명서는 세례를 받은 교회에서 보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내가 뭐 아나, 소설책 읽어보니까 그렇더라. 근데 런던교구 예배당이 불길에 휩싸이는 바람에 유명인사의 생몰 기록도 함께 사라져 정확한 출생, 사망 연도를 모르는 일도 생겼다. 이 가운데 하필이면 셰익스피어와 거의 동시대에 극작가 활동을 하는 바람에 우리나라 독자들에겐 이름이 생소한 존 웹스터도 끼어 있어 이제 영문학자들이 탄생이 1578년 아니면 79년, 사망은 1627년에서 34년 사이로 추정한다. 오늘의 교양. 런던 대화재 때문에 사라진 교회를 새로 짓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이 여전히 세계적인 건축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크리스토퍼 렌’이다. 소설 작품 여러 편에서 이이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렌의 제자 가운데 니컬러스 혹스무어라는 인간이 있어 이때 교회 여섯 개를 개축하며 이름을 날렸으나, 혹스무어가 슐레밀 성향이 있는 인간이라 하는 일마다 꼬여 아마 말년이 좋지 않았지? (슐레밀: 하는 일마다 꼬이는 불운한 인간. 토머스 핀천의 작품 <브이.>에 나오는 이디시어 단어) 이 혹스무어를 차용해 대체역사 소설을 쓴 피터 애크로이드의 작품이 읽어볼 만하다.

  하긴 존 웹스터가 때를 잘못 골라 하필이면 셰익스피어와 동시대에 활약한 것만 가지고도 웹스터 역시 슐레밀 인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상이 더러워 2등은 별로 기억하지 않거든. 제일 유명한 2등이 모차르트한테 찌그러진 안토니오 살리에르? 위대한 소프라노 가운데 한 명이라서 그래도 ‘라이벌’이란 칭호를 얻어듣기는 했던 칼라스 시대의 레나타 테발디. 근데 내가 지금 뭘 쓰고 있는 거지? 하여간 웹스터가 <하얀 악마>를 쓴 것이 1612년 왔다갔다니까 만년의 셰익스피어시대 맞다. 이거 얘기하느라.

  누가 썼는지 밝히지 않았지만 관례로 보아 역자 고현동이 썼을 거 같은, 본문 뒤에 붙은 해설을 보면, 작품의 초연이 1612년에 런던 레드불Red Bull 극장에서 있었고, <하얀 악마>는 공연되기 30년 전쯤에 이탈리아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극화했다고 한다. 그러나 작중 등장하는 피렌체의 추기경 몬티첼소가 콘클라베에서 교왕으로 선출, 바오로 4세가 된 해가 1555년이니 적어도 60년 전쯤에 있었던 사건이 맞겠다. 바오로 4세는,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하여튼 극 중에서 교왕이 되자마자 제일 먼저 내린 교왕령이 매춘부 교화소에서 탈출한 비토리아 코롬보나와 이 매춘부의 정부이자 브라치아노의 공작 파울로 지오다노 오르시니를 파문하고 로마에서 추방하는 일이었다. 그게 그렇게 큰 일이었을까? 그렇다. 한 마디로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뽑은 사건이다.


  여기부터 등장인물도 많고 이름도 길어서 헷갈리기 쉽다. 눈 피곤하면 단락 그냥 훌쩍, 뛰시라.

  다른 가문도 아니고 피렌체 디 메디치 가문의 딸 이사벨라를 막대한 지참금과 함께 아내로 맞은 브라치아노 공작. 당연히 이사벨라는 살아 생전 손끝에 물 한 방울 묻혀본 적 없이 곱게 자랐을 터이니 살갗 뽀야니 얼마나 예뻤겠나. 그래 젊어서는 여기서 쪽, 저기서 쪽, 볼때마다 물고 빨고 했지만 아들 지오바니가 이제 열다섯 왔다갔다 할 때는 그저 소 닭 보듯 했다. 사실 뭘 몰라서 그러는 거다. 더 늙어 아내한테 얻어 터지지 않고 살려면 딱 이 때부터 잘 보여야 하거늘, 공작은 안면 싹 가리고 귀족 떨거지이자 자기 부하인 카밀로의 환장하게 어여쁜 젊은 아내 비토리아 코롬보나한테 눈이 휙 돌아가 버렸다. 죽으려고 환장을 한 거지. 아내 이사벨라는 15세기부터 유럽 최고의 재력을 바탕으로 세 명의 교왕과 두 명의 프랑스 왕비를 배출한 디 메디치 가문의 영애였고, 눈독 들인 비토리아도 현직 추기경(훗날 바오로 4세 교왕이 될 지는 몰랐겠지만) 몬티첼소의 조카 며느리였다. 이사벨라가 메디치 가문의 그냥 영애도 아니고 현 토스카나 대공위의 자리에 있는 피렌체 공작 프란체스코 디 메디치의 친 동생이었으니. 하긴 뭐 여자한테 눈이 돌아가면 무슨 짓을 못해? 하여간 꼬다리 달린 남자새끼들이란…….

  근데 이게 브라치아노 공작 혼자 죽기살기로 비토리아의 몸과 마음을 갈망하는 게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비토리아도 나이 들어 머리가 홀랑 벗겨진 남편, 아니면 매독이 벌써 상당히 진행해 머리카락까지 말짱하게 빠져버린 남편하고 잠자리는커녕 입맞춤도 하지 않은 게 하 세월이었다. 정나미가 뚝 떨어졌는데, 왜 그랬는지는 설명이 없다. 진짜 매독 때문이지(아닐 듯), 늙어 발기부전이 생겼는지(조금 그럴 듯), 너무 못생겼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든지(조금 더 그렇다), 권태를 더 못 견디겠든지(많이 그렇다), 공작의 아내가 되어 더 멋있게 살고 있었든지(아주, 아주 많이 그렇다) 했다가, 이게 시간이 갈수록 진짜 사랑이란 걸 하게 된 거다. 덧붙여 친동생이자 세상없는 악당인 플라미니오가 공작과의 사이에서 슬금슬금 모닥불을 피워주니 비토리아 간땡이가 슬슬 붓기도 했고.

  이 비토리아 코롬보나가 작품의 제목인 “하얀 악마”인데, 간이 얼마나 부었느냐 하면, 꿈 꾼 이야기를 이렇게 한다. 당연히 진짜 꾼 꿈은 아니겠지만.

  “한밤중에 교회 옆 묘지로 걸어간 것 같아요. 그런데 그곳에 크고 매력적인 주목(朱木) 나무가 땅에 커다란 뿌리를 내리고 있었죠. 그 주목 아래에서 오랜 세월 비바람에 상처 난 어떤 무덤에 기대앉아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그곳으로 공작님의 부인과 제 남편이 슬그머니 왔어요. 한 명은 곡괭이를, 다른 한 명은 녹슨 삽을 들고서 말이에요. (중략) 공작부인과 남편이 말하더군요. 제가 잘 자란 주목을 뽑아 버리고 그 자리에 시든 가시나무를 심어 놓으려 한다고요. 그래서 저를 산채로 묻어 버리겠다고 맹세했어요. (중략) 그때 회오리바람이 불어와 커다란 주목의 거대한 가지를 떨어뜨렸고, 공작부인과 제 남편은 그 성스러운 주목에 맞아 그들에게 걸맞은 초라하고 얕은 무덤 안에서 죽어 버렸어요.”

  여기서 “주목朱木”의 영어 발음이 you와 같단다. 그리하여 비토리아가 꾼 개꿈의 결론은 자기를 위하여 공작부인 이사벨라와 자기 남편 카밀로를 죽여달라는 거다. 그래야 자신이 공작부인의 자리를 꿰찰 수 있으니까. 나는 여기까지 읽으면서 기어이 브라치아노 공작이 아내와 카밀로를 죽이고 말겠구나, 하는 건 탁 눈치를 챘지만, 이게 16세기 중반에 실제로 다른 집구석도 아니고 메디치 일가에서 있었던 일이란 건 생각도 못했다. 출연진에 “프란체스코 드 메디치: 피렌체의 공작이며 이사벨라의 오빠”라고 씌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디 메디치 가문한테 이런 불명예를 줄 깡다구 있는 바보 멍청이라 있었을까, 생각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철없는 브라치아노 공작은 자꾸 귀찮게 구는 디 메디치 공작한테 정 꼬우면 전쟁 한 판 뜨자고 하더라니까, 글쎄. 자기들 집안의 명예 하나 때문에 공국 백성들의 목숨과 재산을 망실할까봐 오히려 디 메디치 공작이 전쟁에 반대하고 말이지.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고? 좋다. 이 희곡은 안 읽거나 아주 극소수만 읽을 거 같아 화끈하게 일러드리지. 사실은 희곡이나 오페라, 발레 같은 공연물, 당연히 영화 장르는 빼고, 거의 모든 공연물은 극의 내용을 미리 알고 관람하는 것이 백번, 천번 옳은 일이어서 내용을 몽땅 드러내는 일에 거부감이 훨씬 덜하긴 하다. 미리 희곡을 읽고 연극을 보는 거하고, 말짱 생으로(‘생으로’라고 쓰지만 발음은 ‘쌩으로’ 하는 게 훨씬 더 호소력 있지?) 극장에 가는 거하고, 이거 많이 다르다.

  1. 이사벨라 브라치아노 공작부인. 공작의 파도바 성에서 늘 습관적으로 자기 전에 세 번 인사하고 입맞춤을 하는 공작의 초상화 입술에 독을 발라놓은 줄 꿈에도 모르고 평상시처럼 아무렇지 않게 두 번 입맞추었다가 밤새도록 고통에 시달리다 새벽에 죽는다. 물론 조금 과장해서.

  2. 카밀로. 공작의 하수인이자 비토리아의 동생인 플라미니오가 카밀로와 뜀틀 놀이를 하다가 카밀로의 목 경추를 거꾸로 접어버린 후 뜀틀에서 떨어져 목뼈가 부러져 죽은 것처럼 위장한다.

  카밀로의 죽음으로 의심을 받아 비토리아는 종교재판에 넘겨져 매춘부 교화소에 입소한다. 공작과 불륜관계라는 건 세상이 다 알았고, 당시에 불륜은 교회에서 재판을 했다고. 거기서 얼마 지내다가 현직 교왕이 사망해 콩클라베가 소집되어 교회가 어수선해지자 브라치아노 공작이 비토리아를 빼내 파도바의 성으로 데려가 새로 결혼을 한다. 이런 커플이 행복하면 참 불공평하겠지? 그리하여 파도바의 성으로 진입하는 정의의 사나이들. 누구냐하면, 차마 알려드리지 못하겠네. 재미있으니 직접 확인하시면 좋겠다는 의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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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4-23 1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알기론 존 웹스터가 영어 사전을 낸 그 사람 아닌가 싶기도 한데요. 7,80년대 중고등학교를 다닌 사람은 웹스터 영어사전 하나씩은 있었다고 하던데 암튼 영어 사전을 낸 사람도 대단하지만 그걸 번역한 사람도 대단하지 않나 싶습니다.

Falstaff 2024-04-23 16:13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웹스터가 그 웹스터군요. ㅎㅎㅎ 전 XX년대 영어사전 쪽인데 아무래도 민중서관이던가에서 나온 에센스가 제일이었습죠.
큰 아이 고등학교 올라갈 적에 영어사전 사줬더니 이게 멍뮈? 하던 표정을 잊지 못합니다. ㅋㅋㅋㅋ 사전은 말 그대로 사전적 의미로만 있더구먼요.
아하, 그 웹스터가 이 웹스터! ㅎㅎㅎ 고맙습니다. 처음 알았습니다.

stella.K 2024-04-23 18:12   좋아요 1 | URL
가만히 계셨으면 중간은 하셨을텐데 그 순간 나쁜 아빠로 등극하는 순간이셨겠어요. ㅋㅋㅋ 아드님은 내심 입학축하 상여금이나 최소한 문학이나 사상전집 같은 걸 기대하지 않았을까요?^^

다락방 2024-04-23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너무 재미있겠는데요??

Falstaff 2024-04-23 16:14   좋아요 0 | URL
ㅎㅎㅎ 재미 죽입니다. 원래 치정, 살인이 기가 막힌 소재 아닙니까.
 
잃어버린 사람
김숨 지음 / 모요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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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년 9월 16일. 이날 하루 부산 이곳에서 많은 뜨내기들과 토박이들이 얽히고설킨 이야기와 그들의 지난 경험을 모은 책. 표지에 “김숨 장편소설”이라 박혀 있어 독자는 자연스럽게 언제 주인공이 출현하는지 촉각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백 쪽에 육박할 때까지 도무지 이야기를 끌고가는 주인공을 찾을 수 없을 때쯤, 이 작품이 수많은 인물의 단상을 연결해 1947년 당시 부산의 모습을 그렸구나, 짐작할 수 있다. 즉, 많은 등장인물은 어떤 방식으로라도, 길을 지나다 옷깃도 스치지 않고 그냥 서로 지나치기도 한다. 초판이 2023년. 무대는 1947년. 76년 세월의 간극은 생각보다 크다. 당시의 거리, 물가, 의상, 언어를 그대로 되살리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자료와 사진을 많이 궁리하고 들여다보면 훨씬 도움이 되겠지만 특히 언어는 가능하지 않다. 김숨도 현명하게 작품 속에서 부산 사투리나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이 구사하는 사투리 대신 거의 현대 표준말을 사용했다. 나는 김숨이 쓴 <바느질하는 여자>를 읽었다. 그러나 준수한 작품 속에서 너무도 많은 오류를 발견하는 바람에 이번에 읽은 <잃어버린 사람>은 겉으로만 훌훌 훑었을 뿐 꼼꼼하게 읽지 않았다. <바느질…>처럼 오류투성이 명작일까봐.

  이번에도 참 유려한 문장이다. 너무 유려하고, 섬세하고, 어떤 때는 화려하다. 수식하고자 하는 대상이 아침에 죽 끓여먹고 점심과 저녁은 냉수 한 사발로 대신하는 극빈자일지언정. 작품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검은 새 하나가 쇠사슬에 매달린 저울추처럼, 땅이라는 접시 위에 오롯이 놓인 세상과 무게를 겨누며 높아지고 낮아지기를 반복한다.”

  여기 나오는 “검은 새”는 정말로 조류, 하늘을 나는 새를 말한다. 요즘에도 이렇게 쓰는 작가가 있다. 까마귀? 까치? 정확하게 새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냥 검은 새로 일컫는 이 조류는 책이 끝날 즈음에 한 번 더 나온다. 새 “한 마리”가 아닌 물질 “하나”가 하늘에서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는 광경을 이렇게 쓴 거다. 하필이면 그 하나가 “쇠사슬에 매달린 저울추”라고 쇳덩어리를 연상해 그냥 중력방향으로 꽂히고 마는 단단한 것, 그래서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새 대신, 이게 도대체 뭘 은유하는 것일까, 쓸데없이 고민하게 만든다. 바로 다음 페이지에서는 부두를 이렇게 묘사한다.

  “바다에 반사돼 생겨난 빛까지 더해지자, 부두는 썩은 고구마 같은 몰골로 죽어 있는 생쥐의 부패한 눈동자마저도 금은보화처럼 영롱히 반짝일 만큼 빛으로 넘쳐난다.”

  어떤 광경인지는 알겠는데, 좀 심한 거 같지 않나? 도무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수사법 교범을 읽는 기분이 들만큼 극한의 미문이 촘촘하게 박여 있다. 마음먹고 인용 해야겠다, 싶은 문장이 있었지만 본문만 650쪽이 넘어가는 책이라 그 문장이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찾을 수 없다. 글 좋은 건 알겠는데, 좀 심하다. 다듬고 쪼고 갈아 만든 문장도 과하면 질릴 수 있구나.


  그래도 가장 많은 빈도로 출연하는 등장인물이 애신. 어린 나이에 정신대로 끌려가 만주 일대에서 종군위안부 생활을 하다가 해방 이후 귀국해 집에서는 일본군 군복 만드는 공장에 있었다고 말했다. 집안 어른들은 속으로 믿지 않는 눈치지만 이런 거야 안 믿으면 서로 속만 썩는 거라서 그냥 믿기로 작정해주었다는 것이 표가 났다. 때마침 부산 미도리마치, 녹정綠町, 1916년 일제가 서구 충무로에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공창지역에서 윤락여성으로 있는 친구가 해운대 사진이 찍힌 엽서를 보내 자기한테 오면 취직을 시켜주겠다고,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한 번 한 것을 철썩 같이 믿고 부산에 도착한다. 언제? 1947년 9월 16일에. 부산진역에 내린 애신은 여러 사람한테 길을 물어가며 내년인 1948년엔 달을 보며 즐기는 동네 완월동으로 개명하고, 1982년엔 다시 충무동으로 이름을 바꿀 곳을 향해 걸어간다. 가는 길에 조선 남자와 결혼해 패전 후 남편을 따라 조선에 왔다가 소박맞고 돌아갈 뱃삯도 없어 거지꼴이 된 일본 여성도 만나고, 전혀 쓸모없는 금붕어 한 마리가 든 어항도 사고, 실물보다 예쁘게 보인다는 거울도 선물로 산다. 그렇게 오후가 되어서야 언덕배기의 영업장에서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야한 원피스를 입은 친구를 만나, 아마도 친구와 비슷한 일을 할 것 같다. 짐작이다. 그렇다는 말은 없다. 이곳의 친구는 애신과 같은 위안소에서 위안부로 있다가 귀국해 집에 가서 부모한테 자기가 무슨 일을 했는지 말할 용기가 없어 미도리마치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을 듯.

  등장인물 거의 다 이동거리가 긴 편이지만 애신이 부산진역에서 미도리마치까지 하루 종일 걷는 역할이라 걸으면서 앞에서 이야기했듯 다른 등장인물과 제일 많이 스쳐 지나가면서 인연이면 인연이랄 수 있는 만남을, 대부분 하루만 지나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만나 인물들끼리 얽힌 고리를 만든다. 도대체 몇 명이나 등장하는데 그러느냐고? 모르겠다. 안 세 봤다.


  일제강점기를 마감한 미군정기의 부산. 일본과 중국으로 떠난 징용/유민들이 공식적으로 입국하고, 배를 타지 못한 사람들은 소위 야매배를 타고 오는 바람에 빈손으로 도착한 조국. 그들이 전부 고향으로 돌아간 건 아니었다. 숱한 사람들이 부산에 남아 거친 노동에 종사했고, 삼팔선 이남 지역에서도 미군들의 도착지라서 일자리가 제일 많다는 소문을 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일거리를 찾아 몰려들었다. 이 가운데 김숨이 주목한 것은, 일본과 중국으로 떠났다가 돌아왔으나 고향에 가지 못한 군상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반 강제 징용살이를 하다 원자폭탄에 피폭되어 얼굴과 손이 뭉그러진 사내, 도끼 같은 사람들. 간도에서 열심히 농사를 지어 종잣돈을 마련해 은붙이 장사를 하며 중국 각지를 떠돌다 상하이 귀국길에 사기를 당해 완전히 빈털터리가 된 천복. 앞에서 이야기했던 버림받은 일본인 처 가쓰코, 시나마치 거리 중국음식점 춘화원 사장 천서방의 치파오를 입은 중국인 며느리를 위해서도 한 꼭지 씩을 마련해두었다. 당연히 부산 토박이들도 대거 등장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두 인물은 모지포의 가장 늙은 과부 쑥국과 재작년 입춘 무렵에 풍을 맞아 얼굴이 조금 돌아가고 팔이 불편한 백발의 어부 말똥. 말똥은 돛이 하나 달린 외돛배를 타고 나가 생선을 잡는데 유난히 쇳빛나는 물고기를 많이 잡는다. 사실 여부는 다음으로 하고, 김숨은 이 쇳빛 물고기를 ‘다금바리’라고 말한다. 말똥은 어려서부터 거의 이 물고기를 먹고 자랐다고 해도 괜찮을 정도라는데, 그게 부산 근해에서 그리 많이 잡혔나? 하여간 이 날 새벽에도 다금바리를 몇 마리 건져 들고 오다가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쑥국 할머니 집 울타리 넘어 휙 던진다. 마당에 앉았던 쑥국 할머니는 눈이 지물지물하지만 귀는 잘 들려 무엇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고, 그게 다금바리인 것을 알고 냅다 문밖으로 달려나갔지만 그새에 골목엔 아무도 없다. 조금 지나 오중, 오정을 넘어 점심 때가 됐고, 쑥국은 다금바리를 손에 들고 동네의 끝에서 다른 끝 쪽으로 걸어간다. 그곳에 먹을 것이 다 떨어진 외로운 여자 혼자 사는 집이 있다는 걸 알아서, 먹을 것을 나누기 위하여. 이 시간에 15년 전에 집을 뛰쳐나간 아들 호식이 억새밭을 뚫고 길을 찾아 옛집으로 오고 있다는 건 쑥국이 알 턱이 없다.

  낳은 아이마다 몇날 며칠 살지 못하고 죽는 바람에 다음에 낳은 아이한테 명줄을 붙들고 있으라는 뜻으로 이름을 붙들이라 지었다. 붙들은 곡정 까치고개에서 나이 깨나 들도록 살았다. 그러다 1947년 9월 16일이 왔다. 까치고개에 움막을 짓고 들어와 사는 아낙네가 이날 아침에 아이를 낳고 삼을 갈랐다(삼을 가르다 = 탯줄을 자르다. 이 단어가 몇 번 나온다). 없는 집에서 산모가 조리는커녕 밥이나 한 끼 제대로 먹었을까 싶은 붙들이. 붙들이는 직접 겨울 바다에 나가 바위에 붙은 걸 낫으로 베어내 말린 미역과 말린 갈치를 쑴벙쑴벙 썰어 넣어 끓인 미역국을 들고 산모를 찾아간다. 땜질한 자국이 많은 양은 솥을 높이 걸고, 늙은 땔감 장수 옆에 앉은 젊은 땔감 장수한테 산 땔감으로 불을 피워 국수를 한 솥 끓여 이제 새롭게 장사를 시작한 석분은 작품이 끝날 때쯤 해서 자기 양은 솥보다 한뼘은 더 큰 양은솥을 발견하고 모른 척, 시치미 뚝 떼고 손수레에 싣고 가버린다. 조금 후 풀밭에서 오줌을 누고 나온 아낙네가 자기 양은솥이 없어진 걸 알고 땅바닥에 철퍽 주저앉아 망연히 한숨을 쉬고.


  참 없던 시절에 없이 살던 사람들의 초상. 섬세하고 유려한 문장이 다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문장 때문에 리얼한 느낌이 감해졌다고 말하면 그게 못 배운 티를 내는 것일지 모르겠으나, 하여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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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4-22 08: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과하면 질릴 수 있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Falstaff 2024-04-22 16:00   좋아요 1 | URL
그럼요, 뭐든지 마찬가지지요. ㅎㅎㅎ 저도 독후감을 너무 많이 쓴 거 같아서 말입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