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논쟁: 서구의 흥기』는 2014년 출간된 미국의 역사학자 조너선 데일리의 저작을 번역한 것으로, 어째서 서구가 중국을 제치고 세계의 패권을 쥐었는가 그 이유를 설명하는 학자들의 주장을 정리한 책이다. 각각의 장에서 저자가 제시한 참고문헌 및 더 읽을 거리 중 역자가 첨부한 국내번역서들을 정리하려 한다. 2020년에 국내에 소개된 책이다보니 그 후에 나온 번역서들은 반영되어 있지 않다.(예를 들어 『법의 정신』) 오래되어 품절/절판되거나 값이 비싼 책들은 도서관의 도움을 빌려야할 것 같다.


서론


참고문헌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I』전2권, 강신준 옮김, 길, 2008.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 선언』, 책세상, 2018.


샤를 루이 드 스콩다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고봉만 옮김, 책세상, 2006.

 


애덤 스미스, 『국부론』, 전2권, 김수행, 비봉출판사, 2007.


조너선 D. 스펜스, 『현대 중국을 찾아서』, 전2권, 김희교 옮김, 이산, 1998.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김덕영 옮김, 길, 2010.


허버트 조지 웰스, 『H. G. 웰스의 세계사산책』, 김희주, 전경훈 옮김, 옥당, 2017.



더 읽을 거리


프랑수아 기조, 『유럽 문명의 역사』, 임승휘 옮김, 아카넷, 2014.


앙리 피렌, 『마호메트와 샤를마뉴』, 강일휴 옮김, 삼천리, 2010.



오스발트 슈펭글러, 『서구의 몰락』전3권, 박광순 옮김, 범우사, 1995.


아놀드 토인비, 『역사의 연구』, 전2권, 홍사중 옮김, 동서문화사, 2016.



1. 서구의 기적


참고문헌


카를로 치폴라, 『대포, 범선, 제국』, 최파일 옮김, 미지북스, 2010.



윌리엄 맥닐, 『전쟁의 세계사』, 신미원 옮김, 이산, 2005.



린 화이트 주니어, 『중세의 기술과 사회변화』, 강일휴 옮김, 지식의 풍경, 2005.



더 읽을 거리


니얼 퍼거슨, 『니얼 퍼거슨의 시빌라이제이션』, 구세희, 김정희 옮김, 21세기 북스, 2011.


로드니 스타크, 『기독교 승리의 발자취』, 허성식 옮김, 새물결플러스, 2020.


대런 애쓰모글루, 제임스 로빈슨,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최완규 옮김, 장경덕 감수, 시공사, 2012.


토비 E. 하프, 『사회 · 법 체계로 본 근대과학사강의』, 김병순 옮김, 모티브북, 2008.


더글러스 노스, 『제도, 제도변화, 경제적 성과』, 이병기 옮김, 자유기업센터, 1997


앨프리드 크로스비, 『수량화 혁명』, 김병화 옮김, 심산, 2005.


잭 골드스톤, 『왜 유럽인가』, 조지형, 김서형 옮김, 서해문집, 2011.



2. 세계사


참고문헌



마셜 호지슨, 『마셜 호지슨의 세계사론』, 이은정 옮김, 사계절, 2006.


앨프리드 W. 크로스비, 『생태제국주의』, 지식의



더 읽을 거리


로버트 B. 마르크스, 『다시쓰는 근대세계사 이야기』, 윤영호 옮김, 코나투스, 2007.


앨프리드 W. 크로스비, 『콜럼버스가 바꾼 세계』, 김기윤 옮김, 지식의숲, 2006.


이언 모리스,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최파일 옮김, 글항아리, 2013.


존 맥닐, 윌리엄 맥닐, 『휴먼 웹』, 유정희, 김우영 옮김, 이산, 2007.



3. 제국주의와 수탈


참고문헌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나종일 외 옮김, 전4권, 까치, 2013.


에릭 밀랜츠, 『자본주의의 기원과 서양의 발흥』, 김병순 옮김, 글항아리, 2012.


재닛 아부-루고드, 『유러 패권 이전』, 박흥식, 이은정 옮김, 까치, 2006. 



참고문헌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 이정인 옮김, 아고라, 2017.


더 읽을 거리


R. 브레너 외 지음, T.H. 이스톤, C.H.E. 필핀 엮음, 『농업계급구조와 경제발전-브레너 논쟁-』, 이연구 옮김, 집문당, 1991.


에릭 R. 울프, 『유럽과 역사 없는 사람들』, 박광식 옮김, 뿌리와이파리, 2015.


제임스 M. 블라우트, 『식민주의자의 세계모델』, 김동택 옮김,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8.


클라이브 폰팅, 『클라이브 폰팅의 녹색 세계사』, 이진아, 김정민 옮김, 2019


조반니 아리기, 『장기 20세기』, 백승옥 옮김, 그린비, 2008.



4. 아시아의 위대함


참고문헌


안드레 군더 프랑크,『리오리엔트』, 이희재 옮김, 이산, 2003.



케네스 포메란츠, 『대분기』, 김규태, 이남희, 심은경 옮김, 에코리브르, 2016.



존 M. 홉슨, 『t서구문명은 동양에서 시작되었다』, 정경옥 옮김, 에코리브르, 2005.


더 읽을 거리


쵸두리, 『유럽 이전의 아시아』, 임민자 옮김, 심산, 2011.



5. 왜 중국이 아니었나?


참고문헌


데이비드 랜즈, 『국가의 부와 빈곤』, 안진환, 최소영 옮김, 한국경제신문, 2009.



사이먼 윈첸스터, 『중국을 사랑한 남자』, 박중서 옮김, 사이언스북스, 2019.



더 읽을 거리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I』전2권, 주경철 옮김, 까치,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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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소통 -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마음근력 훈련
김주환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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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고쳐쓸 수 없다'는 말을 하는 사람을 종종 본다. 그런 사람들은 여러가지 이유를 든다. 습관, 가정환경, 양육환경, 경험, 지리, 문화, 종교, 유전자 등등. 더 나아가 '사람은 선천적으로 유전자가 다 정해진 채로 태어나니 후천적 노력은 무의미하다'는 뉘앙스로 말하는 사람도 자주 보인다. 


어떻게 보면 이런 관점은 인간으로서 '나'와 '나'를 둘러싼 주변과의 관계에서 '나'라는 인간은 주변 요소들에 결정되고 마는 존재로 간주하는 관점이다. 이는 저자도 책에서 지적하는 내용이다. 이런 관점은 흔히 'XX결정론'으로 간단히 표현할 수 있다. 이 XX의 자리에는 뭐든 다 들어간다. '유전자,' '경제,' '지리,' '기술,' '가정,' '환경,' '구조,' '혈액형,' '성격,' 'MBTI,' 더 넣자면 '국가,' '종교,' '문화,' 등등, 판단하는 사람이 무엇을 넣고 싶느냐 명칭은 따라 달라지지만 결과는 정해져 있다. "인간은 'XX'로 인해 결정된 존재이다." 이것이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다양한  'XX'결정론자들의 주장인 것이다.


이런 주장들은 『내면소통』의 저자가 가장 반박하고 싶어 하는 관점이라 할 수 있겠다. 


7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내면소통』은 총 11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두께에 걸맞게 가격도 상당하다. 책을 펼쳐 읽어가다보면 다양한 분야의 과학적 사실과 연구성과들이 가득하다. 두께, 내용, 가격 이 모두 잠재적 독자들을 압도하는 요소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책 저자의 주장은 사실 간결하게 요약할 수 있다. '명상을 하세요.'


『내면소통』의 저자 이력은 독특하다.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이며, 그 유명한 움베르토 에코에게 기호학을 사사받았을 뿐만 아니라 움베르토 에코와 헝가리 출신의 기호학자 토마스 세벅이 편집한 저작 『셜록 홈스, 기호학자를 만나다』의 번역자이기도 하다(책에서 언급되지만, 저자는 자신이 퍼스의 개념 중 abduction의 번역어로 '가추법'을 도입하였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저자는 『내면소통』에서 뉴턴의 고전역학은 물론, 양자역학과 같은 물리학, 뇌의 각종 부위별 기능과 종합적인 뇌의 기능에 관해 다루는 뇌과학,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감정과 같은 정신건강 및 심리학을 포함하는 과학의 영역에서, 인간의 의식, 인간의 자아와 같이 과학과 인문학의 경계선에 서 있는 영역, 나아가 불교의 명상법, 유교의 수양법, 인도의 요가, 근현대 수행법과 같은 종교적 영역까지 '전문 영역'의 벽을 가볍게 뛰어넘으며 나아간다.


이 책에서 저자의 논거로 제시되는 다양한 사항들을 요약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할 것이며 크게 의미도 없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저자의 주장은 '명상을 하세요'이며 이 책에서 제시되는 다양한 논거들은 종교적 색채를 최대한 배제하고 뇌과학적 측면에서 여러 명상기법들의 과학적 특성과 명상이 생리학적 측면에서 어떤 이득이 있느냐를 입증하기 위한 근거들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이 책은 독자들에게 다양한 명상기법을 알려주는 실용서적이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페르시안밀과 같은 고대의 수행법에서부터 우리가 흔히 '명상'하면 떠올리는 전형적인 명상법들, 나아가 알렉산더테크닉 같은 현대적인 수행법까지 접할 수 있다. 당연하게도, 단순히 책만 읽어서는 명상의 자세를 잡기 어렵기 때문에 참고용 온라인 동영상을 시청할 수 있는 QR코드를 첨부해놓았다. 아마 이 책을 읽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것이다. 진짜 문제는 이 책을 읽고 어떻게 명상을 일상 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느냐 일 것이다. 이 문제는 지식이 아니라 개개인의 의지와 실천에 달린 문제여서다. 


그렇다면 이러한 의문이 들 것이다. '명상하는 법에 대한 책자를 쓰면 될 것을, 왜 이리 두꺼운 책을 내놓는단 말인가?' 실제로 그렇다. 스마트폰 어플에서 명상만 검색해도 다양한 명상앱이 나온다. 더 나아가 넷플릭스에서는 명상에 관한 스트리밍도 찾을 수 있다. 이 책을 읽을 경우, 명상 기법을 다룬 7-11장 정도만 읽어도 명상하는 데는 문제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여러장에 걸쳐 편도체와 전전두피질의 기능과 관계, 좌뇌와 우뇌의 관계, 경험자아와 배경자아를 비롯한 인간의 다양한 자아들, 후성유전학의 실제 발현 과정, 양자역학적 관점에서 고전물리학 설명하기, 기계론적 우주론 대신 유기체론적 우주론 속에서 우주와 '나'의 관계, 각종 뇌의 기능에 관한 실험과 그 덕분에 밝혀진 뇌의 기능들을 자세하면서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다. 데카르트 이래 근대의 철학과 과학이 당연하다 상정한 '주체'로서의 나와 '객체'로서의 세계라는 이원론적 가정, 어떻게 보면 현대인들에게 여전히 상식으로 남아 있지만 그 패러다임은 이미 구식이 된 요소들을 타파하기 위해서다. 저자는 양자역학을 포함한 최신 과학 연구성과들을 언급하면서, 해당 분야들이 우리의 '직관'과 어긋남을 강조한다. 그렇기에 고전물리학이 양자역학보다 더 그럴듯해보인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 반대임에도. 


저자는 인간에 대한 관점을 바꾼다. 먼저 인간의 의식은 인간 신체의 주인이 아니다. 단지 몸의 일부이자 진화 과정 중에 우리 몸이 발명한 발명품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인간의 의식은 인간의 신체는 고사하고 당장 뇌에서 떠오르는 다양한 생각마저도 조절하지 못한다. 5분후에 내가 무슨 생각을 할지 내 의식은 예측도 못하고 그때 무엇을 생각할 지도 결정할 수도 없다. 인간의 자아는 지금의 경험을 느끼는 경험자아와 이를 조용히 바라보는 배경자아로 나뉜다. 인간은 의식 밖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받아들일 때 이야기로 만들어 받아들인다. 인간이 품는 생각, 감정, 의식 등등은 그동안 살아오면서 스스로 만들어 스스로에게 전달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누적된, 달리 말해 여러 일화기억들의 집적물이다.  


프로이트의 말을 적당히 떠오르는대로 고치자면 코페르니쿠스가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서 밀어냈고, 다윈이 인간을 만물의 영장에서 밀어냈다면 인간은 자기 내면 속에서도 밀려나있다. '나'조차 단수가 아니라 복수다. 그렇기에 인간은 스스로에게 '말을 건다.' 여기서 책의 제목인 '내면소통'의 의미가 드러난다. 인간은 늘 대화하는 존재이며 그 대화 상대에는 '나'가 포함하는 '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고쳐쓸 수 없다'라거나 인간의 일생은 이미 'XX'로 정해져 있다는 'XX'결정론이 설 자리가 사라지게 된다. '나'의 일부인 의식이 나의 몸이나 나의 외부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나'라는 전체가 점차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가 바뀌는 것은 세상을 바꾸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이 유기체적인 우주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일은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을 위해서는 뇌의 구조를, 의식을, 사고방식을 바꿔나가야할 필요가 있다. 그 과정을 위한 것이 바로 명상이다. 


이처럼 명상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는 과정에서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이 드러난다. 저자가 의도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뇌과학, 우주론, 양자역학, 심리학을 비롯한 여러 분야들을 유기적인 전체로서 종합하여 독자에게 제시한다는 것이다. 실용서적으로서 명상하는 법에 다룬 책이긴 하나, 다양한 과학적 설명들을 종합하여 유기체적인 우주관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기계론적인 우주관, 또는 이미 인간은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XX'결정론을 반박하는 이론서적이라는 측면에서도 이 책의 가치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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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립백 카페 테일 하프카프 - 12g, 5개입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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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인이 적어서 부담이 덜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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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중심주의 서강번역총서 3
사미르 아민 지음, 최일성.조현수 옮김 / 서강대학교출판부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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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출생하여 프랑스에서 활동한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자 사미르 아민(سمير أمين)은 1988년의 저작 『유럽중심주의』에서 유럽중심주의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해당 개념이 지닌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이 『유럽중심주의』는 2000년 국내에 번역되었다.


한편, 이 글에서 다루는 『유럽중심주의』(2023)는 2008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근대성, 종교와 민주주의: 유럽중심주의 및 문화주의 비판』(Modernité, religion et démocratie : Critique de l'eurocentrisme et critique des culturalismes, Parangon, 2008)을 번역한 것으로 역자들이 역자 서문에서 밝히길 옮기는 과정에서 『유럽중심주의』로 의역하였으며 그 이유는 저자 아민이 1988년 『유럽중심주의』의 2부와 3부를 『유럽중심주의』(2023)에 그대로 싣고 있고 이 책은 『유럽중심주의』(1988)의 완결판이라 볼 수 있기에 그리 하였다고 들고 있다. 2010년에 옥스퍼드 출판사에서 출간된 영문 번역판도 국내 번역판처럼 『유럽중심주의』라는 제목을 사용하고 있다.


『유럽중심주의』(2023)은 1부 근대성과 종교적 해석들, 2부 공납제 문화의 중심부와 주변부, 3부 자본주의 문화, 4부 역사의 비유럽중심적 전망을 위하여, 이렇게 총 4부로 구성된다. 


1부에서 아민은 근대성의 개념을 밝히고 이러한 근대성이 과연 기독교 유럽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경로인지 의심하며, 나아가 근본주의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현 이슬람 문화권에서 이슬람 근본주의(혹은 원리주의)가 발흥할 수 있었던 이유와 그 한계를 분석한다. 


2부에서는 자본주의 이전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전역에 존재한 다양한 문화권들의 정치, 경제, 사회가 지닌 공통점을 한데 묶은 '공납제 생산양식'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아민에 따르면 현재의 동아시아, 인도, 중근동은 유럽보다 앞선 선진적인 공납제 사회였으며 공납제 사회에서 지배계급의 착취를 정당화하는 공납제 이데올로기(이슬람교나 유교가 이에 해당한다)를 발전시켰다고 본다. 반면 봉건제가 대표적인 유럽은 공납제라는 측면에서는 주변부 사회에 속한 사회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봉건제 유럽은 공납제라는 측면에서 다른 유라시아 지역들보다 뒤처졌기 때문에 위기가 발생했을 때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자본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3부에서 아민은 자본주의를 유럽만의 전유물로 여기고 다른 문화권 혹은 대륙들에게 유럽 대륙의 발전 경로를 따라야만 현재의 빈곤한 상태를 벗어날 수 있다고 현혹하는 유럽중심주의적 주장들이 얼마나 현실을 왜곡시키며 문제가 되는지를 폭로한다. 


마지막으로 4부에서는 아민이 앞서 제시한 논지들에 맞추어 유럽중심주의가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으며, 그 대안으로서 자신의 가설들이 어떻게 유럽중심주의가 왜곡한 현실을 설명하고 보다 정확히 바라볼 수 있는 지점들이 무엇인가를 검토해본다.


이 책에서 저자 아민의 주장을 몇 가지 제시할 수 있다.


첫째는 머리말에서 제시되듯이 문화주의 비판이다. 아민이 이 책에서 규정하는 문화주의는 문화를 초역사적 요소로 환원시키는 관점으로, 현실의 여러 사회들은 각각의 특유한 초역사적 문화적 요소를 지닌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현실의 여러 사회들에 대한 역사적인 분석으로부터 보편적인 일반법칙을 추론하는 것이 방해하게 만든다. 이 책에서 아민이 주장하는 바는 바로 이 문화주의 비판을 기본 전제로 깔고 진행된다.


이어서 이 책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는 2, 3부에서 아민은 이러한 문화주의에 맞서 유라시아와 아프리카의 다양한 문명권들로부터 공통점을 추출하여 보편성이라할 법칙을 추론하는 시도로 이어진다. 이는 '공납제 생산양식'이라는 가설로 이어진다. 앞서 2부를 요약할 때 설명했듯이, 자본주의가 유럽에서 나타나 전 세계적으로 팽창하여 병합시키기 이전,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나아가 아메리카까지도 공납제 생산양식이 존재했으며 각각의 사회에는 공납제라는 해당 지배구조를 정당화하는 여러 이데올로기가 존재했다. 공납제 생산양식이 가장 완성에 다다른 지역은 중국, 인도, 중동권이었고 봉건제 유럽은 이런 공납제 생산양식에서 볼 때 오히려 그 완성도가 떨어지는, 후진적인 지역이었다. 


이러한 아민의 주장은 흔히 마르크스주의(실제로는 레닌과 스탈린을 거치며 변형되어 전파된) 5단계 역사발전단계론, 원시 공산제-고대 노예제-중세 봉건제-근대 부르주아 자본주의-미래에 도래할 프롤레타리아 공산주의라는 유럽중심주의적 역사 발전 단계론을 벗어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이 역사발전 5단계론은 유럽, 그중에서도 산업혁명을 제일 먼저 겪은 영국의 사례만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때문에 소련의 레닌과 스탈린, 중국의 마오쩌둥은 자본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공산주의로 이행한 소련과 중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 '법칙'을 수정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예컨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 역사발전 5단계론이 설명하지 못하는 아시아 사회들을 이른바 정체된 '아시아적 생산양식'으로 규정하고 말았다. 이와 비교했을 때, 아민이 제기하는 역사 단계론은 원시 공산제 혹은 공동체적 단계-공납제-자본주의-향후 도래할 사회주의로 볼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아민의 시도는 유럽의 사례를 벗어나 다양한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문화권들을 역사발전의 법칙에 포함시키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민의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가장 통렬한 비판 지점은 유럽중심주의가 자본주의를 내세워 다른 국가들에게 유럽의 발전 경로를 따르라는 거짓된 신화를 주입시킨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유럽중심주의는 유럽이 거친 진보의 단계를 비유럽권이 따라갈 때에만 유럽처럼 선진 사회로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민은 이를 '따라잡기'라고 간결히 표현한다. 그러면서 각 사회의 생산양식을 분석하여 유럽이 아닌 보편적인 사회 발전 단계를 제기할 수도 있었을 마르크스주의조차도 앞서 역사발전 5단계론이 보여주듯이 유럽중심주의적라는 덫에 빠지고 말았고, 제3세계의 발전이 지체된 이유도 유럽중심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대안으로 삼았기 때문이라 지적한다. 그러나 아민에 따르면 이 같은 유럽중심주의의 모델은 허상이다. 


아민은 유럽중심주의가 중심부/주변부로 나뉘어 주변부(대체로 비유럽권)로부터 이익을 이전받아 자본을 축적하는 중심부(유럽권, 미국, 일본)의 착취적인 현재의 세계체제를 은폐해왔음을 폭로한다. 중심부와 주변부의 부르주아들은 국경을 넘어선 계급동맹을 통해 국가를 지배하고 주변부의 민중을 억압해왔으며, 중심부의 노동자계급조차도 주변부로 부터 이전받은 이익 덕분에 높은 소득을 누리게 되었다. 그런데도 유럽중심주의는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출현하여 발전을 이루었던 것과 달리 비유럽권의 각 국가들의 내부적 요인(예컨대 민족성이나 지리 등등)을 저발전의 탓으로 돌리며 이런 세계체제를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아민은 현재 상황에서 '따라잡기' 모델을 제시하여 비유럽권 국가들을 현혹하는 유럽중심주의적 모델이 아예 불가능한 기획이라 말한다. 전 세계인구가 서구인들의 생활 혹은 소비수준을 누린다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그렇기에 현재의 자본주의 세계경제체제를 넘어설 대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그 대안은 사회주의이며 그렇기에 실패로 돌아간 사회주의 기획들은 유럽중심주의적 관점이 아닌 다른 관점에서 다시 검토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아민은 과거 공납제 생산양식에서는 그 어느 사회보다 뒤처졌던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발흥하였던 것처럼, 자본주의 생산양식이라는 측면에서 세계경제체제에서 뒤처진 주변부에서 오히려 새로운 체제가 등장할 수 있을 것이라 진단한다. 요컨대 주변부에서 현 세계경제체제와 '절연'함으로써 그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아민은 유럽중심주의에 가려진 역사 발전의 보편성을 강구한다. 저자는 그 유명한 막스 베버의 주장처럼 기독교, 그 중에서도 개신교만이 자본주의의 등장을 낳은 토대가 될 수 있었는지 묻는다. 그 답은 당연히 아니오다. 한때 중국의 퇴보를 설명한 유교가 오히려 동아시아 국가들의 성장에 따라 해당 국가들의 성장을 견인한 요인으로 설명된 것처럼, 다른 문화권들의 이데올로기들(이슬람교, 힌두교, 애니미즘 등등)도 언제든 공납제 생산양식에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의 이행을 견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유럽에서 나타난 부르주아 자본주의 문화는 그 이전의 그리스-로마와도, 기독교와도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유럽중심주의적 기획은 자신의 뿌리를 고대 그리스, 로마와 기독교와 결부지었다. 그 과정에서 고대 그리스, 로마의 노예제가 역사적으로 거치는 보편적인 단계의 생산양식으로 둔갑했고 그리스는 동방과의 연결 없이 순수하게 독자적으로 발달한 문화가 되었으며 동방에서 등장한 기독교는 서구만의 종교적 토대가 되었다.  


이 책에서 아민의 비판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점은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저자는 이슬람교의 특징을 먼저 설명한다. 비잔티움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의 틈바구니에서 기독교를 수용할 수 없었던(그랬다간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므로) 아랍 부족들은 유대교를 변용하여 수용하였다. 아민은 이슬람교가 태생부터 '종교기획'이었지 사회를 개혁시키는 '사회기획'이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예언자는 아랍 부족 사회를 바꾸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어쩌면 '아랍 민족의 유대교'가 될 수도 있었던 이슬람교는 아랍 부족 사회보다 월등히 발달한 동방 기독교 사회를 정복하면서 손쉽게 확산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바꿔말해, 현재의 이슬람 근본주의는 바로 이 헤지라가 시작된 시기로 돌아갈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슬람 근본주의에는 사회를 바꾸는 '사회기획'이라는 측면이 결여되어 있다. 이 지점에서 아민이 지적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12세기 이후 이집트를 비롯한 이슬람권 지역에 전사 계급(예컨대 맘루크)가 정치 권력을 쥐고 신학자들에게 샤리아를 주재할 권한을 용인하는 이른바 '맘루크' 모델이 출현하여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고 말한다. 아민이 보기에 현재(2008년 당시겠지만) 이슬람권의 맘루크 체제는 군인, 신학자, 그리고 현지의 매판 부르주아들이 결탁하여 세계경제체제를 지배하는 현실자본주의와 동맹을 맺어 지금껏 지속되고 있다. 이슬람 근본주의를 내세우는 이들은 단순히 일상생활의 의례적 측면(예컨대 여성에게 각종 의복을 강제하는)을 규제하는 데 그칠뿐이지, 세계체제로부터의 절연을 통해 자본주의를 넘어설 새로운 사회를 기획하려는 역량도, 의도도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 서적에 가까운데, 저자가 '세계체제'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는 점에서 이메뉴얼 월러스틴의 『근대 세계체제』를 연상시키는 점이 있기에, 그리고 '공납제 생산양식'처럼 과거 역사에 대한 분석을 진행한다는 점에서 사회과학적 측면에서 주목할만한 지점들이 있다. 


첫째는 공납제 생산양식이다. 유라시아와 아프리카를 포함해 전(前)자본주의 시대 각 문화권으로부터 '공납제 생산양식'과 이를 정당화하는 '공납제 이데올로기'를 추출하려는 아민의 기획은 어떻게 보면 대담한 역사학적 기획이라 할 수 있다. 아민의 주장에 화답하는 길은 역사학자들이 정말 그게 가능한지 따져보는 것일 것이다. 이 같은 아민의 주장은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각지의 문화권들을 직접 비교하면서 과연 이론적 틀로서 기능할 수 있을지를 따지며 검증되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는 아민이 제시한 중심부/주변부를 바탕으로 삼는 현실자본주의와 세계경제체제를 다른 세계체제론자들이 내세운 세계체제, 예컨대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세계체제론과 비교하면서 이론에 대한 비교를 진행해보는 것이다. 누가 옳고 그른지 보다는, 이러한 비교를 통해 보다 정합성있고 현실을 보다 잘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수립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세 번째는 기존 사회과학에 대한 비판이다. 특히 아민은 근대에 들어 사회생활 전반을 경제로 환원하는 점을 지적한다. 아민의 비판점은 특히 경제학을 향한다. 속류 경제학은 균형 잡힌 허구의 자본주의만을 상정하나 현실적으로 그 결말은 마르크스와 케인즈가 이미 내린 결론, 즉 시장에는 불균형만이 존재한다에 이른다는 것이다. 세계체제를 아우르는 현실자본주의는 속류 경제학이 간과하고 다루지 못한 지점이며,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조차도 유럽중심주의를 포용하는 과정에서 제3세계나 주변부를 위한 대안적 의미를 상실하였다는 것이 아민의 요지다. 그런 의미에서 경제학을 포함한 사회과학은 현실을 달리 바라볼 필요가 있다.


네번 째로 세계사와 관련해서 조금 길게 짚고 넘어갈 지점들이 있다. 아민은 서양사, 나아가 세계사의 시대발전 도식으로 익숙한 고대-중세-근대의 시대구분을 조금 다르게 본다. 아민은 중세를 헬레니즘 시대로 앞당긴다. 적어도 중근동 지역에서 고대는 고대 그리스로 끝나고, 그리스의 각 폴리스들이 마케도니아에 굴복한 이후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이 세워진 시점부터 중세라는 것이다. 그 근거로 아민이 내세우는 바는 고대 그리스 말기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서부터 출현해 헬레니즘 시대에 개화한 형이상학이다. 이성의 연역을 내세우는 헬레니즘 형이상학은 이집트의 플라티노스에 이르러 신플라톤주의로 완성되면서 지배계급을 만족시켰다면, 토착 종교(그리스, 로마의 다신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들)에 불만을 품은 일반 민중들을 만족시킨 것은 동방의 기독교와 이슬람교이며, 두 종교는 이성을 내세우는 헬레니즘 철학을 신앙과 화해시켰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동방)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헬레니즘의 유산을 이어받은 쌍둥이이다. 나아가 이슬람교의 철학은 고스란히 서구 기독교권에 전해져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신학자들의 등장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처럼 중세를 앞당긴 것은 (얼마나 사실에 적합한지를 떠나) 서양사의 고대-중세-근대의 도식을 달리 볼 수 있는 한 가지 가능한 신선한 관점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미국에 대한 지적도 눈여겨볼 점이다. 아민은 유럽 국가들이 노동자계급이 형성되면서 시민사회로 가는 길이 열린 반면, 미국은 근본주의적인 개신교도들이 정착한 이래 끊임없는 이주의 물결 속에서 공동체주의가 주도권을 쥐었다고 본다. 기존의 이주민들이 미국으로 몰려와 자리를 잡을만 하면 새로운 이주민들이 미국에 몰려오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이민자 집단 끼리 뭉쳐 세력을 형성하여 이민자 끼리 다투고 지배계급은 그러한 상황을 이용했다는 점을 꼬집는다. 아울러 미국의 독립전쟁이 혁명으로 많이 연구되긴 하나 미국의 이데올로기에는 프랑스처럼 자유, 평등, 형제애(박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시장을 최우선시하는 의미에서의 자유와 소유만이 있을 뿐이며, 정치의 시장에 대한 개입을 중단시켜 미국에서 노동자 정당 대신 '자본주의 정당'을 출현하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나아가 이러한 미국화가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사로 한정지어 말하자면, 아민의 『유럽중심주의』(2023)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주지했듯이 아민은 중심부/주변부로 나뉘는 현실자본주의의 구조 내에서 주변부가 중심부를 따라잡기는 불가능한데 유럽중심주의는 이런 불가능한 기획이 마치 가능한 것처럼 포장한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아민은 '공납제 생산양식'에서 중심부였던 중국에 비해 주변부에 해당한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한 점에 주목하고, 중국이 '따라잡기'에 성공할 수 있을지 관심을 품는 반면, 한국 근현대사에는 거의 주목하지 않는다. 이 책을 통틀어 한국은 두 어차례 언급되는데 그친다. 여기서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동아시아 국가들의 성공은 아민의 주장을 약화시킬 수도, 강화시킬 수도 있는 헐거운 연결고리로 보인다. 


이 지점에서, 한국은 19세기 말 일찍이 중심부로 도약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음에도 20세기 중반 해방 이후 우여곡절 끝에 21세기 현재에 이르러 중심부 국가이거나 적어도 그에 준하는 상태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 지점에서 한국의 근현대사, 특히 20세기 후반 한국의 경제발전사는 유럽중심주의의 '따라잡기' 모델을 정당화하여 아민의 논증을 무너뜨리는 사례가 될 수도 있다. 반대로 '따라잡기' 모델의 허구를 입증하여 아민의 주장을 강화하는 사례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 한국 근현대사는 일본, 중국의 근현대사와 유사성과 차이점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세계사적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본다. 비록 시작은 일본보다 늦었지만, 중국보다 먼저 '따라잡기'에 성공했거나 그에 가까워진 것으로 보이는 한국의 경제발전사는 제3세계 국가들에게 희망찬 모델이 될수도, 아니면 발전의 기회를 혼자 독차지하고 다른 제3세계 국가들의 사다리를 걷어찬 선두주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보다 엄밀하게 평가하기 위해, 그리고 현재 우리가 직면한 인간과 자연이 동시에 처한 미증유의 위기 속에서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한국 근현대사를 세계사 속에서 재평가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 근현대사 연구자들이 연구범위를 한국의 경제 발전을 한국 사회 내부의 내적 요인으로 설명하는 것을 넘어 동아시아 및 태평앙의 주변국가들의 관계 속에서, 나아가 이러한 주변국가들과 세계를 한데 묶는 세계체제라는 분석단위로 넓힐 필요가 있다. 이러한 맥락에 더해 유럽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 세계사를 보편적이고 대안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에서 한국 현대사를 위치시켜야 할 것이다. 그렇게 볼 때 한국 사회의 경제 발전은 유럽중심주의에 충실히 따라간 결과인지, 아니면 유럽중심적인 발전경로를 벗어나면서도 근대와 근대 너머의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이 될 수 있을지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유럽중심주의』(2023)는 단순히 유럽중심주의 비판을 떠나 인문사회과학이라는 측면에서 독자들에게 던져주는 의미가 있다. 지금 보기에 아민의 가설들은 어떤 것은 옳을 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완전히 틀린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민의 가설은 옳고 그름을 떠나 독자들에게(유럽권이든 비유럽권이든) 현실 사회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여 현실에 의문을 품게 만든다. 그동안 알지 못한 현실에 눈뜨게 만드는 것, 혹은 그러한 통찰력을 길러주는 것, 그것이 아마 현실 사회를 엄청난 속도로 변화시키는 과학과 기술의 발전 속에서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맡아야할 여러 역할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그런 점에서 『유럽중심주의』(2023)는 2008년, 좀 더 거슬러가자면 1988년의 진단임에도 과거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이 지배한 구조 속에서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이상, 항상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책으로서 앞으로도 시의성을 지니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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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학과 유럽 중심주의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책들 2
강철구.안병직 지음 / 용의숲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서양 문화를 모르는 척할 필요는 없잖아, 수백 년이 지나서 이젠 우리 전통의 일부가 됐으니까" - 살만 루슈디,『악마의 시』상, P355.


유럽중심주의(Eurocentrism)은 이집트 출신의 마르크스주의자 사미르 아민(Samir Amin)이 1980년대에 제기한 개념으로, 유럽인의 관점을 중심으로 현실을 파악하는 거대한 담론 체계에 붙은 이름이라 요약할 수 있다. 아민의 저작『유럽중심주의』(2000)는 아쉽게도 지금은 구할 수 없다. 작년에 같은 제목으로 서강대학교 번역출판부에서 번역하여 출판한 『유럽중심주의』(2023)는 역자들이 의역한 제목이긴 하나 2, 3부는 『유럽중심주의』(2000)의 내용을 그대로 싣고 있다. 따라서 34,000원이라는 가격에 대한 심리적 저항만 어떻게 한다면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미르 아민, 더불어 『오리엔탈리즘』으로 널리 알려진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영문학자 에드워드 사이드는 각각의 저작들을 통해 으레 보편적이라 당연히 여긴 지식 체계가 사실은 유럽중심적 시각을 보편성으로 위장시켰다는 점을 들춰냈고, 21세기 초 한국의 서양사학계도 그 같은 지적 파동에 휩쓸리게 되었다. 『서양사학과 유럽중심주의』는 바로 그런 지적 흐름이 한국에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2009년 작고한 한국의 서양사 원로 연구자 이민호 교수의 2주기를 기리는 차원에서 고인의 논문 4편, 그리고 그와 친분을 맺은 뉴욕 주립대의 조지 이거스 교수, 고인의 가르침을 받은 서울대 출신 제자들의 논문을 모은 단행본이다. 


이 책은 총 12개의 논문으로 구성되나 읽는 기준에 따라 임의로 2부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1부는 이민호 교수의 논문 4부로, 2부는 조지 이거스 교수 및 제자들의 논문으로 구성된 총 8장의 논문으로. 책은 2011년에 발간되었고, 이 책에 수록된 논문들은 2000년대에 저술되었다. 2024년 시점에서는 이미 상식 수준에 다다른 내용을 장황하게 설명한다거나, 서구중심주의, 혹은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과도한 비판이 이루어졌다거나, 현재의 실정과는 맞지 않는 지점들이 거슬리더라도 시기상의 한계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총 12장의 논문이 수록되어있고 각각의 논문들이 다루는 주제가 상이하기 때문에 내용을 완전히 요약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생각된다. 그보다는 이 책의 저자들이 생각하는 문제의식을 정리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요컨대, 그동안 유럽인들이 고대-중세-(르네상스)-근대로 이어지는 유럽의 역사적 발전 과정과 진보, 특히 근대를 거치면서 유럽인들이 내세운 가치관에 '보편성'을 부여하였으며, 나아가 비유럽권은 '역사가 없다'거나 '정체되었'으므로 유럽의 발전 과정을 따라야만 한다는 거대한 지식 체계를 창조하였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서양사학자들이 여태 서구만을 추종하여 여태 이 같은 유럽중심주의를 맹목적으로 추종했다는 점을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흔히 '보편적 가치'나 유럽의 특성으로 간주된 개념들, 예컨대 국민국가, 민주주의, 자본주의부터 시작해 시민혁명, 산업혁명, 인권, 자유, 평등을 비롯한 다방면에 걸친 개념과 사실의 재검토가 요구된다. 나아가 종국에는 유럽중심주의와 그에 의거한 세계사 서술을 대체할 새로운 대안적 역사 서술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유럽중심주의라는 논쟁적 주제를 다루는 책이니 만큼, 유럽중심주의와 연계된 개념들에 대한 내용을 충실히 다룬다는 점이 이 책의 장점이다. 이민호 교수의 논문들은 식민지 타자에 비추어 유럽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인식한 과정, 오리엔탈리즘, 유럽과 이슬람의 관계(1장, 세계사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유럽에서 국민국가의 형성과 위기(3장, 유럽과 국민국가), 동아시아에서 민족국가라는 개념을 수용하고 적용한 과정(4장, 동아시아의 민족국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동아시아의 서양 수용과 민족국가의 지평) 등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의 5장, 조지 이거스 교수의 논문은 서발턴 연구에서 시작된 인도 학자들의 연구를 해설하고 있다. 크게 3명의 인도인 학자가 언급된다. 각각 아시스 낸디, 디페시 차크라바티, 슈미트 사카다. 그 중에서 차크라바티는 미국의 시카고 대학 역사학과 교수로 그의 대표적인 저작이 바로 『유럽을 지방화하기』이다. 이 책은 국내에 번역되었으나 읽기에는 난이도가 상당한 책인데, 이거스 교수의 논문은 이 책을 읽기 전 참고용으로 읽으면 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민호, 이거스 교수 이외의 논문 저자들도 각각의 개별적인 주제를 다룬다. 한국 서양사학의 발전 과정을 돌이켜보며 한계점을 반성하고 이를 개선할 것을 제기하거나(6장, 유럽중심주의의 극복과 대안적 역사상의 모색), 유럽과 이슬람권의 근대사 인식에 관해 다루거나(8장, 유럽중심주의 극복을 위한 일모색--유럽과 이슬람 세계 근대사 인식의 문제를 중심으로), 계몽사상이 유럽이라는 근대적 관념을 어떻게 창조해냈으며, 보편사를 추구하던 유럽의 지식인들이 계몽사상을 기점으로 비유럽 세계에 대한 우월의식을 지니게 되었는지(9장, 계몽사상과 유럽의 이념), 자본주의 개념을 비판하고 부정하는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의 논리적 한계점을 지적하고(10장, 서구중심주의 역사학에 대한 비판과 반비판--페르낭 브로델을 중심으로, 11장, 유럽중심주의와 '자본주의'의 문제), 마지막으로 유럽 연합과 유럽 민족에 관해 다루는 12장 "유럽 연합은 유럽 민족이 될 것인가"로 요약될 수 있다.


6장의 경우, 한국 서양사학계의 역사를 다루는 점에서 한국 서양사학계가 어떤 발자취를 남겼는지 알아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9장의 경우, 서구의 계몽주의에 숨겨진 우월의식이 등장한 양상이 어떠했는지 알아보는 데 유용할 것이다. 10, 11장은 유럽이 아시아를 경제적으로 추월하게 만든 근대의 등장을 두고, 유럽이 중국을 넘어선 것은 불과 19세기의 일이며 서구의 우위는 200년에 불과하다는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를 비판적으로 독해하는 데 유용한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2024년 시점에서 13년 전의 책이긴 하나, 여전히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준다. 먼저 한국의 서양사 연구자들이 서양의 연구성과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서양을 맹목적으로 추종한 것은 아닌지, 한국에서 서양사를 연구하는 입장에서 서양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그리고 너무 비판에 몰두하다가 자가당착에 빠지지는 않았는지 일깨워준다.


이런 측면에서 먼저 떠오르는 곳은 인도다. 오랜 기간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은 인도는 한편으로는 서구문물을 장기간 수용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서구문물과 사상을 수용하면서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데 이르렀다는 점에서 복잡한 생각이 들게 만든다. 어쩌면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도 있겠다. 앞서 이 책의 5장과 관련해 언급된 학자들을 비롯해 인도의 학자들이 유럽중심주의 비판에 큰 역할을 한 것은 아마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기인할 것이다. 살만 루슈디의 작품에서 언급된 것처럼, 서양을 그만큼 잘 알기 때문에, 차크라바티 식으로 말하면 오랫동안 '유럽을 지방화'했기 때문에 그러한 성과를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긴 하나 인도의 학자들은 인도라는 특수한 문화적 환경을 바탕으로 그러한 성과를 냈다. 한국의 서양사학자들도 연구성과가 충분히 누적되고 훌륭한 연구자들이 연구에 매진하다보면 분명 세계의 역사학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편 6장 "유럽중심주의의 극복과 대안적 역사상의 모색"은 한국의 역사 교육 체계를 고민하게 만든다. 한국의 전문 역사학계는 크게 한국사-동양사-서양사라는, 마치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연상케하는 구조다. 이 3가지 상위 분류 휘하에서 전문 연구자들은 세부적인 시대/지역사를 주제로 삼는 학회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개별 학회들은 연구자들이 연구 성과를 공유하는 장인 동시에 연구 경력을 인정받는 장이기도 하다. 전국역사학대회처럼 한국의 역사학계가 모두 참가하는 대규모 학회가 열리기도 하지만 그 역시 세부적인 행사는 앞서 말한 한국사/동양사/서양사로 나뉘어 진행된다. 


이는 대학의 역사학 학부 교육과도 관련이 있다. 대부분의 대학은 '사학과'나 '역사학과'를 마련해두고 있지만 일부 대학들은 한국사/동양사/서양사를 나누거나, 한국사/동양사와 서양사를 나누거나 하는 식으로 학과를 나누어두는 경우도 있다. 다만 최근들어 사정이 악화되어 역사학과가 '역사문화콘텐츠학과'와 같은 식으로 다른 학과와 통폐합되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제도적 구성 속에서 한국의 서양사학자들은 전문분야인 서양사에만 매진하기도 바쁘다 보니 한국사나 동양사 연구자들과 협업하기 힘들게 된다. 여기에는 전문주의라는 벽도 있다. 같은 서양사라는 울타리 안에서도 사료 해석을 위해 각기 다른 언어가 요구되다보니 상대적으로 언어의 장벽이 낮은 미국사나 영국사의 비중이 큰 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양사학자가 동양사나 한국사를 다루고자 큰맘 먹고 '월권'을 행하더라도 기본적으로 그들의 서양사 전문분야와 접점이 있는 동양 근현대사 정도에만 개입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실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국사/동양사/서양사로 이루어지는 역사학 삼위일체의 구조를 바꿀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긴 하나 전망은 그리 녹록치 않다. 앞서 언급했듯이 역사학과가 사라지거나 통폐합되는 것처럼, 학령 인구 감소로 인해 역사학자들의 주무대라 할 대학의 축소가 이미 예정된 상황이다. 여기에 이미 오래전부터, 적어도 20세기 말부터 역사학을 포함한 인문학은 일자리를, 나아가 계급상승을 전혀 담보해주지 못해 입시 결과가 나날이 추락한 탓에, 수능과 내신 점수에 맞춰 입학하여 졸업할 때는 전공과 전혀 상관없는 진로를 택하는 학생들이 많다. 물론 과도한 비관주의로 치닫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정확히 현실을 인식하는 것과 대책없이 절망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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