팡세 : 분류된 단장 (프랑스어 원전 번역, 양장) 기독교 명작 베스트 6
블레즈 파스칼 지음, 김화영 옮김 / 선한청지기 / 202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다시 도전해보는 파스칼의 호교론

- 팡세 - 분류된 단장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 지음 | 김화영 옮김

[선한청지기] (2022)

 



몇 년 전에 파스칼의 팡세를 읽어보려고 책을 펼쳤지만, 오래가지 않아 한쪽으로 치워두었다. ‘고전이라는 이유도 시도해보았지만, 아무런 맥락 없이 시도했던 것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기대치는 높은 반면 분절된 단상 형식의 글에 익숙하지 않아서였을까. 책을 무작정 읽으며 저자의 생각을 단번에 이해해보고자 했던 것이 중단의 이유였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러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나온 이 고전에 다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번역자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번역자이자 파스칼 연구자인 김화영 교수가 이전에 참여했던 번역 작업에서 남겨놓았던 글들이 기억났다. 그의 글은 서문이나 에필로그 혹은 역자의 말 형태로 만났던 것인데, 언제든 작품에 대한 역자의 깊은 이해와 존중, 그리고 독자에 대한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팡세를 읽다보면 역자의 주석에 몽테뉴의 에세에서 가져온 문장들이 많다는 점을 알게 된다. 출생으로만 따지면 90년 늦게 태어난 파스칼이 몽테뉴의 영향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몽테뉴의 글을 읽어본 기억을 떠올려보면 인간에 대한 그의 정밀한 관찰과 이해가 얼마나 놀라운지 깨닫곤 했다. 39세의 생애로 삶을 마감했던 파스칼 역시 인간에 대해 깊은 성찰을 팡세에 고스란히 남겨 놓았다. 거의 4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 맞을까 싶을 정도다. 인간에 대한 적나라하고 놀라운 통찰이 담긴 파스칼의 문장과 만날 때마다 밑줄치고 싶은 부분이 많았다.

 


번역자의 상세한 해설에 따르면, 파스칼은 진보적인 수학자이자 과학자로 이른 나이에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31세가 되던 1654년의 어느 날, 그는 성경에서 예수를 발견하고 회심을 하게 된다. 이 일생일대의 경험은 파스칼의 글이 몽테뉴의 것과 근본적으로 차이를 보이는 특징이 된다. 몽테뉴의 글은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집필되었지만, 파스칼은 유신론자의 확신으로 써나갔다. 두 사람의 글이 갖는 공통점은 바로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한다는 점이겠다. 몽테뉴는 인간과 세계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대상을 진실로 이해하고자 면밀히 살펴보았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에 주목했다. 따라서 에세의 근간을 이루는 관심사를 나는 무엇을 아는가?(Que sais-je?)’라는 몽테뉴의 질문으로 요약해볼 수 있다. 이렇듯 몽테뉴의 관심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시점이 자기 자신을 향한다. 이런 맥락에서 몽테뉴의 글이 회귀적이고 성찰적인 성격이 강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파스칼의 글이 몽테뉴와 마찬가지로 인간으로부터 출발하지만,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의 관심은 결국 신을 향해 나아간다. 역자의 표현을 사용하면, 기독교적 신앙을 옹호하고 이를 되찾기를 바라는 호교론적인 성격을 갖는다. 몽테뉴의 관심이 자신을 향하는 회귀적인 글이라면, 파스칼의 글은 인간의 이성에 호소하며 독자를 설득하여 기독교 신앙으로 안내하는, 점진적이고 직선적인 접근방식을 보여준다. 신앙을 설파하는 글로는 상당히 인식론적이고 지적인 방식을 취하는 셈이다. 여기에서 파스칼은 일반적인 수학자 혹은 과학자들처럼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 혹은 이성이 지니는 우월함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오히려 이성을 경계한다. 파스칼이 파스칼의 정리같은 수학적 업적이나 진공의 존재에 대한 실험을 통해 과학적 사실을 증명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당대의 누구보다도 이성의 힘과 그 한계를 잘 인식했던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회심의 경험 이후, 인간의 이성만능주의에 대해 경고하고 신 앞에 보다 겸허한 자세를 취했던 것 같다.


 

팡세에는 파스칼이 바라보는 인간의 모습, 인간이 위치한 지점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에서 그는 이중적인 인간의 조건을 이야기한다. 바로 비참하고 비열한 존재로서의 인간과 위대하고 유일무이한 존재인 인간의 모습이다. 상반되고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인간의 모습은 바로 이성만능주의에 대한 경계와 인간의 한계를 지적하기 위한 과정에서 제시된 인간의 조건이다. 이 점에 대해 파스칼이 인간이란 얼마나 괴이한 존재인지 이야기하는 대목이 흥미롭다.


 

인간이란 얼마나 괴물 같은 존재인가? 얼마나 진기하고 괴기스러우며, 혼돈하고 또 얼마나 모순투성이이며, 얼마나 경이로운가? 만물의 심판자이면서 쓸모없는 벌레, 진리의 수탁자이면서 불확실한 오류의 시궁창, 우주의 영광이면서 우주의 폐기물 같은 존재다.”(114)


 

파스칼은 이처럼 인간에 대한 촌철살인의 통찰을 가끔씩 꺼내 독자에게 보여준다.


 

한편 인간에 대한 파스칼의 통찰에서 놀라움과 감탄을 느끼면서도, 오늘날의 관점에서 파스칼이 적어내려 갔던 생각들에 모두 동의하기 힘든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파스칼이 거역할 수 없는 기독교 권위 위에 수립된 신앙의 진리 두 가지를 언급한 대목이 그렇다.


 

하나는 인간은 창조의 상태에서든, 은총을 입은 상태에서든 모든 자연 만물보다 높은 위치로 창조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서 신성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죄와 타락의 상태에서 인간은 처음 상태에서 추락하여 짐승과 같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두 명제 모두 견고하며 확실한 것이다.”(118)


 

우리는 인권과 더불어 동물권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논의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 맥락에서 독자가 파스칼의 생각과 만나면 동의하기 힘든 부분이 여럿 나올 것이다. 인간에 대한 파스칼의 성찰에 감탄하는 부분이 훨씬 많이 나오지만, 이런 대목은 시대적인 변화와 역사적·문화적 차이로 이해할 수 있다. 진화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의 본성은 400년 만에 변할 리는 없다. 인간에 대한 파스칼의 깊은 이해를 여전히 참고하고 배울 수 있는 이유다. 반면 독자가 신앙을 회복하도록 의도한 파스칼의 접근 방식은 지금과 달리 당대에는 어떠했는지 이해하는 차원에서 들여다볼 수 있다. 파스칼이 언급한 것처럼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다른 종에 대한 인간의 우월적 시각은, 파스칼이 비판하는 데카르트의 세계관과 더불어 현재 독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파스칼의 글이 단상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빠르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일관된 사고의 흐름 속에서 따라가기도 쉽지 않다. 게다가 앞에서 언급했던 주제가 뒤의 단장에서 다시 변주되면서 반복되곤 한다. 따라서 팡세는 오히려 책의 첫 장부터 순서대로 읽어나가지 않아도 충분히 접근이 가능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처음부터 읽어나가면 주석의 도움으로 차근차근 읽어나갈 수 있겠지만 말이다. 따라서 제1부에서 권태라는 소제목으로 묶인 단장을 읽고 나서 이번에는 오락/기분전환이라는 소제목 아래의 단장들을 읽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한 번 읽고 치워두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 읽으며 이해를 더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책에 좀 더 흥미를 느끼고 읽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번역자의 서문과 세심한 해설 때문이다.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평생 프랑스 문학, 특히 파스칼을 연구해왔던 역자의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적극적으로 가미된 번역본이 다른 번역본과 다르게 느껴졌다. 한 번 도전 했다가 덮었던 파스칼의 책이 이번 기회에 좀 더 친근하게 다가왔다면 무엇보다 역자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겠다. 역자는 클레오파트라의 코에 대한 번역 표현을 위해 서양의 코에 대한 미학적·관상학적 측면까지 고민하고, 파스칼의 육체적 질병에 대한 사항까지 염두에 두고 번역을 했다. 고전 번역은 일반 독자로서 엄두가 잘 나지 않는 작업임에는 분명하다. 나아가 역자의 꼼꼼한 해설은 파스칼의 시대와 팡세가 집필된 이유와 맥락을 파악하는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수학과 과학에 큰 기여를 하며 영민함과 오만함이 흘러 넘쳤을 청년 시절뿐만 아니라, 회심 후 인간에 대해 이해하여 인간의 비참함과 위대함을 설파하며 신에게 다가가고자 했을 30대의 파스칼까지. 이번 독서를 통해 파스칼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다 입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마무리하면서 책의 구성에 대한 생각을 추가해본다. 우선 주석이 본문과 분리되어 책읽기가 편하지 않았다. 독자마다 책 읽는 방식은 다를 것이다. 주석을 읽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고, 주석이 너무 많다고 평점을 낮게 주는 독자도 보았는데, 나는 책을 천천히 읽더라도 주석을 대체로 다 읽는 편이다. 그러므로 팡세와 같은 책을 읽을 때는 본문 내에 주석이 괄호 안에 삽입된 형식이나 책 뒤에 주석이 들어가는 형식은 문장을 놓치게 되거나 피로감을 쉽게 느끼게 된다. 앞에서 끊어진 문장 뒤에 이어지는 지점을 찾거나, 책장을 계속 앞뒤로 들추어야 해서 읽는 흐름을 놓치고 산만해지기 때문이다. 역자의 주석이라면 나는 각주 형태를 선호한다. 책장을 넘기지 않아도 궁금한 점을 곧바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석이 편집되어 있는 형태 중에 가장 피곤한 구성은 주석이 분리되어 각 장 뒤에 달린 형태인데, 아쉽게도 팡세-분류된 단장이 이런 방식을 취하고 있다. 여기에 폰트 크기가 작아서 읽기도 쉽지 않다. 주석의 폰트를 좀 더 크게 하고 각주 형태로 바뀌었으면 좋겠다.




 

[1] "상상력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49)

[2] "(우리는) 과거와 미래 속에서 헤매면서도 자기에게 속한 유일한 시간, 즉 현재를 고려하지 않는다."(52)

[3] "자신을 알아야 한다. (...) 이보다 더 바람직한 일은 없다."(71)

[4] "생각하는 갈대. 나의 가치는 공간적 차원이 아니라, 생각을 조절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 (...) 우주가 공간으로 나를 포함하면 나는 하나의 점처럼 삼켜진다. 반면, 나는 생각으로 우주를 포함한다."(100)

[5] "결국 우리가 진정으로 자신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오만한 이성의 떠들썩한 움직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겸허한 굴복에 있다."(118)

"이성의 굴복과 활용. 참된 기독교는 이에 근거한다."(168)

[6] "인간 본성 전체를 이해한 다음에. 어떤 종교가 참된 것이 되려면 우리의 본성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위대함과 비루함, 그리고 각각에 대한 이유를 알고 있어야 한다. 기독교 이외에 어떤 종교가 그것을 알고 있었는가?"(207)

[7] "성경의 유일한 목적은 사랑이다."(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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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9-08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축하드립니다. 즐거운 추석보내세요 ~

그레이스 2022-09-08 0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새파랑 2022-09-08 16: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팡세 엄청 어려워보입니다 ㅡㅡ 그래도 역시 당선! 축하드립니다 초란공님~!!
 



















20세기의 소돔과 고모라, 할버슈타트에 무슨 일이?

- 194548일 할버슈타트 공습



알렉산더 클루게(Alexander Kluge) 지음 | 토마스 콤브링크 주해

이호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1)



그 상품들은 아래 도시로 떨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아주 비싼 물건들이지요. 실용적 관점에서 보아도 고향에서 많은 노동력을 들여 생산한 것을 산이나 빈 들판에 그냥 버릴 수는 없습니다.”(81)

 

인용문만을 보면 UN이나 국제인권단체에 속한 사람이 난민들이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국가의 사람들에게 구호물자를 전하는 임무를 맡은 상황을 떠올려볼 수도 있겠다. 숭고한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의 자부심 어린 진술처럼 보이니 말이다. 여기에서 상품이란 무엇일지 짐작할 수 있는가? 바로 폭격기에 매단 폭탄을 의미한다. , 다시 위의 인용문을 읽어보자. 어떤 느낌이 드는가? 이 말을 한 인물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 8공군 여단장이었던 프레드릭 L. 앤더슨으로, 그가 한 독일 기자와 했던 인터뷰에서 가져왔다.



194548일 할버슈타트 공습의 작가 알렉산더 클루게는 독일의 소도시 할버슈타트 출신이다. 독일 작가이자 영화감독, 방송 제작자로도 활동했다. 무엇보다 전후 독일을 대표하는 비판적 지식인으로 여겨진다. 유대인 철학자 테어도어 아도르노와도 아주 가까운 교우관계를 맺었고, 그를 통해 프리츠 랑을 만나 영화계에도 입문하게 되었다고 한다. 클루게가 1932년 생이므로, 고향 할버슈타트가 연합군의 폭격기가 떨어뜨린 값비싼 상품으로 불타오를 때 겨우 13살이었다. 이 책은 할버슈타트 폭격 당시 살아남았던 여러 시민들의 증언도 기록하고 있다. 클루게의 경험담은 이 책의 해설을 담당한 토마스 콤브링크의 재인용으로 등장한다.


 

고폭탄의 폭발은 깊게 파인 자국을 남긴다. (...) 194548일 그런 것이 떨어져 파고드는 것을 나는 10미터 떨어진 곳에서 경험했다.”(197)





지금의 체코지역에서 태어난 작가 프란츠 카프카는 1912년에 이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 할버슈타트를 방문하면서 자신의 일기에, ‘완전히 오래된 도시로 묘사했다. 사람들이 창 안에 기대고 있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운 것을 본 적이 없다고도 기록해 놓았다.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 도시는 서기 804년에 카를 대제로부터 주교령으로 지정되어 종교적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오랜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던 독일 북부의 작은 도시는 194548, 30분 가량 이어지던 공습으로 고폭탄 504톤과 소이탄 50톤이 투하된 후 도심의 80%가 파괴되고, 2000명 가까운 희생자를 냈다. 작가 클루게는 이 폭격 속에서 살아남았지만, 시청사를 포함하여 도심부가 빈터로 변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숱한 잔해와 수많은 시신, 피의 냄새를 맡았으리라. 이 기록들이 소위 연합군의 적국 시민이 남긴 기록이므로, 그 피해가 과장된 것은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당시 연합군에 소속되어 있던 미래의 유명 작가의 말도 들어보자.

 


내가 떠올린 이 작가는 바로 커트 보니것이다. 그는 제2차 대전 당시 육군 정찰병으로 참전했다가 치열했던 벌지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이후 그는 독일의 동부 지역 도시인 드레스덴에서 전쟁포로 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여기 있을 때 저 유명한 드레스덴 폭격을 직접 경험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25년 후에 쓴 소설이 바로 5도살장이다. 지금은 드레스덴이 독일의 반도체 산업을 이끌고 있는 첨단 도시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방공호도 거의 없었고, 담배 공장이나 클라리넷 공장 정도가 전부였던 낙후된 중소도시였다고 한다. 폭격이 시작되자 보니것은 지하 2층의 거대한 고기 저장소로 몸을 피했는데, 폭격이 끝나고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는 도시가 사라져있었다고 했다. 참고로 작가 맬컴 글래드웰은 어떤 선택의 재검토에서 영국 공군이 수행한 3일간의 폭격으로 650만 제곱미터에 달하는 드레스덴 중심지를 파괴하고 민간인 25000명을 죽였다고 언급한 바 있다.


 

구약 성경창세기에는 타락한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하느님이 보기에 이 도시의 사람들이 엄청난 죄를 저질러 의인이 남아있지 않았기에, 유황과 불을 소나기처럼 퍼부으며 도시를 멸망시켜버렸다.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파괴해버리는 도착적이고 모순적인 신에 관한 이야기는 제쳐두자.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 힌두교의 신들 역시 창조와 파괴 행위를 하나의 우주 원리처럼 받아들이고 있지 않던가. 그렇다면 적국의 시민 클루게와 연합군 소속 보니것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값비싼 합성 마그마에도 끄떡없이 하느님이 지켜주었던 의인이었던 것일까. 물론 이들이 살아남은 이유는 오로지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 이 운에 관한 이야기는 다른 주제의 책에서 이야기하기로 하고, 오늘은 클루게의 전후 기록문학의 성격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기로 한다.



 

전쟁과 자본주의의 논리


 

위에서 인용한 미 8공군 여단장 앤더슨의 말에는 전쟁의 본질에 관한 중요한 진실이 담겨있다. 클루게는 본문에서 할버슈타트의 여러 시민들이 남긴 증언과 자신이 기록한 내용을 종합해두었다. 하지만 이는 공습에 대한 분석보다는 1차 사료로서 중요성이 드러난다. 클루게의 기록들이 갖는 의미와 중요성은 주해를 맡은 콤브링크의 도움으로 좀 더 생각해볼 수 있다. 콤브링크에 따르면, “클루게는 공중전이 수요와 공급 체계를 통해 규율된다는 점과 이것이 경제 분과의 하나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공중전을 도덕적 이유에서 좀처럼 정당화할 수 없을지라도 사람들은 실업을 감수하지 않으려 한다.”(222) 이 진술은 클루게가 주목하고 지적하고자 했던 전쟁의 본질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준다. 말하자면 할버슈타트 공습을 포함한 폭격전, 나아가 전쟁은 전쟁을 치르지 않는 후방의 고향에서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산업이라는 말이었다. 이는 전쟁이 어떤 근사한 명분을 내세우든, 혹은 얼마나 참혹하고 잔인할 수 있든, 우리의 일자리가 보전되고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대중은 한 전쟁에 한쪽 눈을 감고 찬성표를 던질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클루게는 전쟁 뒤에 가려진 자본주의의 논리를 이토록 생생하게 간파해내고 있었다.


 

그러면 연합군의 폭격 정당성을 주장하는 연합군 측의 진술도 살펴보자. 당시 준장이었던 로버트 B. 윌리엄스는 도시를 파괴함으로써 거기 사는 주민들의 저항 정신을 없애버려야 합니다”(185)라고 말했다. 일견 그럴듯한 견해다. 전쟁은 한편으로는 심리전이기도 하다는 맥락에서 그렇다. 그리고 전쟁을 최소한의 노력으로 빠른 시기에 종결짓는다면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다는 이들의 논리도 그럴듯해 보인다. 이 논리는 독일 도시들을 폭격했던 미 공군의 두 군부집단(폭격 마피아)의 논리를 보여준 맬컴 글래드웰의 저서 어떤 선택의 재검토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논리다. 이 두 집단의 차이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쓸 것인가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이 논리는 제2차 대전, 혹은 지금까지도 적국의 시민들로 하여금 사기를 떨어뜨림으로써 전쟁을 더 효과적으로 빠르게 종결할 수 있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 준다. 곧 적국의 시민들을 대상화함으로써 이들을 폭격대상으로 삼는 데 어떤 도덕적 논의도 불필요하게 만들어주는 효과를 발휘한다.


 

맬컴 글래드웰도 책에서 자세히 묘사하고 있듯이, 연합군이 독일 도시를 폭격할 때 우선 적용했던 폭격 방식으로 우선 도살자 해리스라고 불렸던 영국 공군 사령관 아서 해리스의 융단 폭격방식을 꼽을 수 있다. 해리스는 앞서 보니것이 경험했던 드레스덴 폭격을 직접 지휘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여기에 이 폭격의 효과를 보다 높이기 위해 불에 잘 타는 목재가 많은 지역, 특히 구시가지의 빈곤한 지역을 중심으로 폭격이 계획되고 작전이 수행되었다. 할버슈타트의 구시가지는 30여년 전 이곳을 방문했던 카프카가 자신의 일기에 남겼던 것처럼 중세식 목골조 건물이 많고 인구가 조밀한 지역이었다. 여기에 고폭탄뿐만 아니라 합성 마그마나 다름없던 소이탄(화염방사 폭탄)을 떨어뜨렸다고 생각해보라. 소이탄은 하버드 대학의 화학 교수가 점성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달라붙어 복사에너지를 전달한다는 목표로 일본에 사용하기 위해 개발한 무기다(맬컴 글래드웰, 어떤 선택의 재검토 7장 참조). 이를 쉽게 풀어 이야기하면 소이탄은 불꽃이 작게 나뉘어져도 불을 끄기 매우 어려워 달라붙은 모든 대상을 끊임없이 태우는 무기다.


 

또 소이탄(혹은 네이팜탄)은 베트남 전쟁 당시 숲과 민간인을 불태우는데 무수히 떨어졌던 폭탄인데, 더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전쟁 당시 미 공군이 인천의 월미도와 주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 때 사용했던 무기이기도 하다. 이 무기는 주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에 더욱 두렵기도 하다. 여기서 내가 주목한 문제는 이 무기가 적국 시민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과 모순이 된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은 미국의 우군이었음에도 우리 시민들은 소이탄으로 무차별 폭격을 받았다. 한 마을에 함께 살던 일가친척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고 생각해보라. 여기에는 미 군부가 주장하는 어떤 엄정한 도덕적 근거도 찾아볼 수 없다.


 

내가 보기에 폭격 마피아들에게는 오직 현재 전쟁이 일어나는 지역이 어디인가만이 중요하다. “우리에게 도시는 전혀 아무런 의미도 없었습니다.”(82) 이 말은 앞에서 언급했던 미 8공군 여단장 앤더슨의 진술이다. 클루게의 기록에 앤더슨은 이런 말도 덧붙인다. ‘폭격에 침착한 접근이란 없으며, ‘의심 속의 접근만이 존재 한다고 말이다. 그러니까 앤더슨으로 대표되는 폭격 마피아들의 논리는 적군이거나 적군과 내통할 수 있다고 보이는 모든 시민들을 싹쓸이하듯 폭격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논리다. 여기에 어떤 도덕적 정당성이 들어갈 여지가 있을까? 이들이 하는 말이 다 개소리라고 여기는 이유다. 오히려 앞에서 값비싼 상품(폭격기에 매단 폭탄)을 산이나 빈 들판에 그냥 버릴 수는 없다고 했던 프레드릭 앤더슨의 대답이 솔직하게 들린다. 이 폭격 마피아들이 주장하는 도덕적 정당성은 그 자체로 모순적이며 부실한 주장일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만술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콤브링크의 해설에 따르면, 클루게 역시 사기 저하용 폭격이라는 생각이 무의미하다고 이야기한다. 그 근거는 당시 폭격을 직접 경험한 사람으로서 그가 지적하는 대목에서 찾아볼 수 있다. 클루게는 폭격을 당하는 도시의 시민들이 처한 극단적이고 무력한 상황을 언급한다. ‘방어력이 전무한 상태에 있는 시민들과 폭격기 비행단 사이에 존재하는 동등하지 않은 부당한 관계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아주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콤브링크가 곁들인 설명을 덧붙이자면, ‘주민들은 항복 할 수 있는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공격자와 공격당하는 자 사이에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는 접촉을 할 수 없기’(211) 때문이다.

 


또 현실적으로 폭격을 위해 값비싼 상품을 잔뜩 싣고 이륙한 폭격기들은 실제로 주민들이 항복 신호를 보내와도 발견하기 어렵고, 항복 신호를 보았다고 해도 이들이 현장에서 폭격을 중단할 권한은 없다. 지상에 있는 사람들의 삶과 죽음이 오가는 이 순간에, 몇 시간이나 걸릴 수 있는 비행단 책임자들의 판단을 기다릴 수 있는 폭격수는 아무도 없다. 뿐만 아니라 폭탄을 잔뜩 싣고 돌아와서 착륙하는 행위는 또 다른 자살행위나 다름없이 위험한 행위다. 그러니 이 상품들은 이륙한 이상 반드시투하되어야만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 모든 행위의 제약은 보다 큰 범주에서, 그러니까 자본주의 체제 아래의 전쟁이라는 범주 아래에서 이해될 수 있다. 파괴에 대한 도덕적 책임은 후방의 고향에서 일자리를 유지하고 경제를 부흥한다는 실질적인 효과에 비하면 논의 대상 자체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클루게의 할버슈타트 공습은 바로 서방에서 수행하는 전쟁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이런 맥락을 제공한다.



 

전후 독일인들이 안게 된 도덕적 딜레마


 

독일 시민에 대한 공습의 도덕적 정당성에 대해, 위에서 언급한 도살자 해리스’(영국 공군 사령관 아서 해리스)의 논리는 독일이 먼저 도시들을 공습하기 시작했고, 따라서 독일 시민의 이익에 관해 고려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볼 때 이들의 인간에 대한 이해와 도덕적 감수성의 수준은 딱 이정도 수준에서만 작동했다. 얼마나 좋은 학교를 졸업했고, 얼마나 많은 책을 읽은 것과 무관하다. 또 이들이 가정에서 누구보다 자랑스럽고 훌륭한 가장이자 부모였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조건과 별개로 현실은 보니것이 포로로 있던 드레스덴에 융단 폭격으로 싹쓸이하도록 지시했던 지도자의 도덕성을 날 것 그대로 보여준다. 1942년 영국 공군 선전 영화에서 아서 해리스가 구두로 한 표현을 콤브링크가 재인용한 대목을 다시 보자.


 

나치들은 마음대로 다른 누구나 폭격할 수 있는데 절대로 거꾸로 폭격 당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상당히 유치한 미신을 가지고 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로테르담, 런던, 바르샤바와 거의 반백(半百)에 가까운 다른 장소에서 상당히 어리석은 자기 이론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바람의 씨를 부려놓았는데, 이제 그들은 폭풍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189)


 

나는 이 대목이 특히 소름이 돋았는데, 문득 생각나는 장면에 대한 기시감 때문이었다. 구약 성경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노아의 홍수이야기가 등장한다. 하느님이 물로 세상을 멸망시킨 이후 노아에게 했던 말이 떠올라서다. 영어판 성경에는 이 대목이 The fire next time!이라고 적혀있다. 이 표현은 이번에는 물로 했지만, 다음에는 불로 멸할 것이라고 전하는 하느님의 경고의 메시지였다. 나는 이 대목에서 해리스의 모습이 보복하는 신과 오버랩되었다. ‘도살자 해리스는 자본주의를 작동시켜주는 신의 역할을 해내고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어서다. 아서 해리스는 내가 좋아하는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에 등장하는 한 인물도 떠올리게 한다. 누구와 닮았을까? 나는 해리스의 진술을 읽으면서 나의 다리를 물어뜯어 갔으니 너는 나의 복수를 받을 것이다라고 외치던 선장 에이해브의 광기를 떠올렸다.


 

전후 기록문학으로서 클루게의 공습 기록을 높이 평가한 인물은 같은 독일인이었던 W.G. 제발트(Sebald)였다. 이 책의 해설을 담당했던 콤브링크의 언급에 따르면, ‘제발트는 공중전에 관한 모든 소설과 이야기들의 실제적인 숫자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공중전에 대한 질적 분석이 더 중요하다’(200)면서 클루게의 할버슈타트 공습을 높게 평가했다고 말한다. 실제로도 연합군의 독일 도시 공습에 관해 강연하고 정리한 공중전과 문학에서 제발트는 클루게의 기록을 상당히 비중 있게 언급했다. 제발트는 할버슈타트 공습가운데, 폭격 직후 방공삽을 들고 영화관을 치우려 했던 영화관 직원 슈라더 부인의 이야기를 인용하는데, 이 부분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슈라더 부인은 영화 상영이 시작될 오후까지 폭격으로 아수라장이 된 영화관을 치우려고 했다. 그녀는 영화관 지하실에서 발견한 불에 탄 시체 부위를 모아 빨래용 솥단지에 담으며 주변을 정리했다는 것이다(공중전과 문학, 61). 이 이야기의 진실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불타는 도시 한 가운데에서 살아남았지만 판단이 중지된 인물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가 이런 상황이었다면 달리 어떻게 행동할 수 있을까?

 


제발트가 제기하는 또 다른 물음 가운데 전후 독일인들이 안게 된 도덕적 딜레마가 있다. 수백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간 민족이 이를 응징하려던 연합군의 폭격을 받은 상황에서 시작해보자. 콤브링크는 히틀러를 권좌에 올려놓은 이 독일인들이 가해자인가 아니면 피해자인가를 물었던 제발트의 문제의식을 가져온다. 콤브링크는 이런 도덕적 책임에 관한 질문이 할버슈타트 공습과 같은 사건들에 대해 독일인들이 이야기를 꺼내길 주저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희생자는 자신에게 벌어진 부당함을 고발할 수 있고 다른 이들에게 해를 입힌 사람은 그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 자기 말을 들어줄 누군가를 찾기 힘들다.”(189)고 말이다. 이런 상황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인권을 유린하며 자원과 재화를 약탈했던 일본 정치계 및 군부의 입장과도 조금 다른 결을 갖는다. 이들은 피해 보상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언제나 자신들도 피해자임을 내세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이 이야기하는 피해자에는 순수한 일본인들만이 포함되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까다롭고 안타까운 상황 속에 있다.


 

제발트는 공중전과 문학에서 공중전에 대한 양적 분석 말고도 질적 분석이 중요하다는 말을 했다고 앞에서 언급했다. 그 이유 가운데 한 가지를 생각해보면, 피해 보상에 대한 문제보다 희생된 자국 국민에 대한 애도가 전무한 상황 때문이다. 제발트는 희생자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고 있는 상황, 이들에 대한 애도가 없는 독일 사회에 분노하고 이를 비판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폭격을 받는 도시의 시민들은 이 순간 항복 할 수 있는 길이 근본적으로 차단되어 있었다. 또 폭격 이후에도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꺼낼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 그리고 이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망각되어 갔다. 할버슈타트 공습 당시에 불 폭풍한 가운데 있던 당사자로서 클루게는 이러한 도덕적 딜레마를 자신과 당시 시민들의 증언으로서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공중전과 폭격에 대한 양적 분석만으로 도덕적 우월성을 결코 논할 수 없다. 콤브링크가 인용한 볼프강 벤츠의 국가사회주의 백과사전에는 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 공습으로 독일 시민 약 60만 명이 사망했다고 언급되어 있다(188). 우리는 나치에 의해 사망한 600만 명의 유대인과 독일 시민의 희생자 수를 단순히 비교하여 도덕성을 결정할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미국이 일본에 두 개의 원자 폭탄을 떨어뜨리기 전에도 1945년의 6개월 간 일본의 도시 67개국을 공습했으며, 원자폭탄과 더불어 수 십 만 명의 희생자를 낸 것도 일본이 적국이어서 정당하고 당연한 것이었을까? 우리는 제발트의 지적을 염두에 두고 이런 문제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이를 계속 이야기해야만 한다.



 

전쟁에 당연한 것이란 없다: 상상력이 필요한 이유


 

클루게가 할버슈타트 공습을 발표한 이후 제발트와 같은 지식인들의 인정을 받았겠지만, 많은 이들의 비판과 의구심도 받았을 테다. 특히 가해국의 시민이 제기하는 이런 문제는 특히 민감한 사안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할버슈타트의 영화관 직원 슈라더 부인의 이야기는 믿기 힘들거나 과장된 이야기라고 의심할 수도 있겠다. 반면 기록문학으로서 그리고 폭격이 이루어지고 있던 현장에서 직접 경험한 작가의 이야기이므로 독자는 아무런 의심 없이 믿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기록문학, 다큐멘터리 작업은 으레 진실이라고 여겨지는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고 여겨지지만, 콤브링크는 기록문학의 본질적인 문제도 놓치지 않고 언급한다. 바로 여러 사건과 글의 소재를 작가가 선별하고 조합한다는 문제다. 콤브링크는 작가가 개입하기 때문에 작가의 주관적인 관점이 융합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 문제에 대한 클루게의 입장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무언가 더 그럴듯하게 보이면 보일수록 더 미심쩍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저는 항상 현실인 듯한 태도를 취합니다. 그러나 저는 현실이란 가장 거짓말을 잘하는 자라고 보기 때문에 저에게는 종종 오류들이야말로 소위 팩트로서 더 정확한 증거가 됩니다.”(207)


 

따라서 아무리 핍진성을 전제로 하는 기록문학, 다큐멘터리 작업이라고 해도 내게는 작가가 어느 지점에 서서 문제를 바라보는가를 독자는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만약 절대 현실이라는 것이 있다면, 다큐멘터리의 현실은 이 절대 현실과 맞닿아 있는 어느 지점에서 형성된 하나의 구성된 현실이라는 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전쟁의 현실에서 당연한 것은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여기에 기록문학 작가에 의해서 재구성된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사건을 제시해도 누군가에게는 그렇다면 다른 방식의 폭격이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공중전을 정당화한 이들의 논리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아마도 이들이 지나치게 자본주의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들이 불합리해서가 결코 아니다. 다만 당신이 자본주의가 어때서? 라고 묻는다면, ‘자본주의만이 옳다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은 것이다. 오로지 모비 딕에 대한 복수를 꿈꾸며 이 한 가지에만 미쳐 있는 에이해브 선장의 일신주의적 광기와 무엇이 다른가 묻고 싶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작가 알렉산더 클루게나 제발트뿐만아니라 독일인들이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반드시 마주하고 극복해야할 문제이기도 하다. 클루게가 기록해놓은 대목 가운데 한 독일인 기자가 미 공군 여단장 프레드릭 앤더슨과 했던 인터뷰 중 질문하는 대목이 나온다. 기자는 독일 도시 폭격에 대한 대화를 나눈 후, 앤더슨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 공격이 미칠 영향에 대해서 상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83)라고. 물론 이들은 폭격 전에 면밀하게 상상해보긴 했을 것이다. 불에 잘 타는 목재가 많이 있는 구시가지에 집중적으로 폭격할 때 만들어지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가져오는 굴뚝효과에 대해서 말이다. 이 거대한 불기둥은 도시 주변의 신선한 공기를 계속 화재 지점으로 끌어와 부채질할 것이라는 점을 치밀하게 상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독일 기자가 정말로 물었던 것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불타게 될 도시에 있던 수많은 죄인들이 폭격으로 어떻게 될지 상상해보았냐는 질문이었다.


 

다시 정리하면, 전쟁에 당연한 것은 없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고 들여다보아야 하며,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공중전과 공습은 산업화된 문명을 굴러가게 하는 바퀴의 한쪽 축이었다. 자본의 논리는 전쟁의 국면에서 도덕적 정당성을 무화시키는 절대 교리인 셈이다. 그럼에도 폭격에 희생당한 모든 이들을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 이점이 알렉산더 클루게의 194548일 할버슈타트 공습이 내게 준 강력한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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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8-07 17: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발트의 공중전과 문학 반갑네요
읽으려고 쌓아놓고 있거든요
다른 일정에 밀려서 조금 늦춰지긴 했는데 조만간 읽으려구요

노아시대 불의 심판은 세상의 마지막날까지는 이런식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아는데...;;;
그 전의 전쟁과 고통은 인간들로부터 비롯된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초란공 2022-08-07 20:34   좋아요 1 | URL
불의 심판 모티브를 따오긴 했는데 제가 배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군요^^;; 구약의 신과 신약의 신이 워낙 다르게 느껴지긴해요. 요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와 신의 설계를 어떻게 양립할 수 있을까하고요. ^^;;
 
그림으로 보는 모든 순간의 과학 - 내 방에서 우주 끝까지, 세상의 온갖 법칙과 현상을 찾아서
브라이언 크레그.애덤 댄트 지음, 이종필 옮김 / 김영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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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과학 속에 산다

- 그림으로 보는 모든 순간의 과학


브라이언 클레그(글), 애덤 댄트(그림)

이종필 옮김 [김영사] (2022)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R.P. Feynman)은 자신의 강의록을 담은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에서 별의 아름다움에 대해 언급했다. 시인들은 으레 과학자들이 별은 단순히 기체 원자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음을 이야기하며 별의 아름다움을 앗아가 버린다고 말이다. 하지만 과학자인 자신 역시 사막의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낀다고 말한다. 과학자들은 여기에 더하여 별들의 패턴과 형성 원리, 존재의 이유를 더 숙고할 수 있는 사람들이란 취지로 언급했다. 그러니 과학자들은 자연으로부터 아름다움을 제거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연의 심오한 아름다움을 더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는 이들이라는 말을 하려고 했을 것이다. 과학자들이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도 어쩌면 편견일 뿐이다.


 

현대인은 방대한 인터넷의 바다에서 무한에 가까운 정보를 검색하고 찾아볼 수 있다. 말하자면 무제한에 가까운 방대한 사전을 곁에 지니고 다니는 셈이다. 그런데 여기 꽤나 특이한 종류의 과학 사전이 있다. 빽빽하게 그림이 채워진 페이지를 지나면 그림의 각 부분에 관계된 과학 현상이나 과학 법칙이 간단히 소개되어 있는 사전이다. ‘내 방에서 우주 끝까지, 세상의 온갖 법칙과 현상을 찾아서라는 부제가 달린 그림으로 보는 모든 순간의 과학(이후 모든 순간의 과학)이다. 물리학을 전공한 과학 저술가 브라이언 클레그와 수차례 국제적인 상을 수상하고 MoMA(뉴욕현대미술관)나 리옹현대미술관 등에서 전시 경력을 갖고 있는 예술가 애덤 댄트가 힘을 모아 만든 과학 사전이다. 저자들은 이 방대한 인터넷 기술의 시대에 왜 이러한 형태의 과학 사전을 만들었을까? 앞에서 언급한 파인만의 말에서 한 가지 실마리를 떠올리자면, 그건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이해를 더하고 인식을 확장할 수 있을 때 우리 주변의 모든 대상에 대한 아름다움을 보다 깊게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우선 이 책의 주요 특징을 살펴보자. ‘모든 순간의 과학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부엌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과학에서 시작하여 대우주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자연 현상과 과학법칙을 책 속의 그림과 더불어 간단히 설명해놓았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재미있게 보는 방법을 정리해보자면, 우선 각 장의 첫 페이지에 배치되어 있는 전면 그림을 찬찬히, 하지만 꼼꼼히 살펴보는 것에서 시작해본다. 예를 들어 4장 과학관 편을 보자. 그림의 한 가운데에 물리학자 파인만의 초상이 신전 모양의 구조물 지붕에 올라가 있다. 각 장마다 주요 과학자 한 명씩 등장하는데, 4장을 대표하는 과학자가 바로 파인만이었다. 책의 부록을 참고하면 파인만에 대해 좀 더 자세한 프로필이 나와 있다. 프로필 설명을 보면 그의 주요 업적으로 빛과 물질에 대한 과학인 양자전기역학(QED)를 개발한 공로를 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본문에는 파인만이 개발한 파인만 도형그림과 함께 양자전기역학에 대한 표제어를 간단히 설명해놓았다(45). 물론 이 설명만으로 관련 표제어의 내용에 대해 이해하기에는 부족하다. 하지만 이 주제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 학생 혹은 일반 독자들은 이 표제어를 출발점으로 삼아 시작해볼 수 있다. 이 책은 이런 독자들에게 분명한 길잡이 역할을 하는 책이다. (아래 사진 참조)


 




여러 장면이 빼곡하게 들어찬 그림 구석구석을 살펴보면 아무런 이유 없이 들어간 경우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액자 속에서 호랑이가 나오는 장면을 찾아보자(40-41). 이 그림은 어떤 과학 현상 혹은 법칙을 염두에 두고 그려졌을까? 알쏭달쏭하다. 책장을 넘기면 전체 그림 가운데 특정 부분을 가져와 설명해놓은 부분이 나온다(44). 내가 궁금해 했던 이 그림은 바로 레이저로 3차원 영상을 만드는 홀로그램이라는 표제어를 설명하는 대목이었다. 또 이 책이 과학사전인만큼 앞에서부터 끝까지 책을 읽어나갈 필요는 없겠다. 무엇보다 이 책의 묘미는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상황이나 장면이 과학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에 있다. 아울러 추가적인 공부에 대한 확장 가능성에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따라서 이 책을 즐기는 법 하나는 각 장의 처음에 등장하는 그림들을 천천히 살펴보면서 어떤 과학이 관련되어 있을지 상상해보는 일에서 지적 탐험을 시작해볼 수 있다.


 

반면 모든 순간의 과학을 통해 어떤 과학 법칙이나 현상에 대해 곧바로 이해하기에는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는 아쉬움은 있다. 각 개념에 대해 상당히 간결하고 핵심적인 설명만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의 목적과 용도는 오히려 분명하다. 일상에서 보고 경험할 수 있는 수많은 사례들을 과학과 연관 짓고, 이를 발견하여 새로운 앎으로 나아가도록 해주는 마중물이 되는 일이다. 본문을 볼 때 여기에 소개된 번역 용어들의 원어도 함께 표시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책 뒤의 색인을 보니 우리말 용어를 기준으로 분류되어 있고 여기에 영어로 된 용어가 함께 제시되어 있었다. 따라서 해당 표제어를 출발점삼아 관련 사항을 더 찾아보려고 할 때 검색의 실마리로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정리하면, 이 책은 이 한 권으로 과학에 대해 지식을 습득하도록 의도된 책이 아니다. 반면 독자의 호기심과 지식의 확장을 준비하는 여정에 출발점이 되어주는 책이라고 그 성격을 규정해볼 수 있다.


 

이 책은 여러 과학 영역을 넘나들며 주요 핵심 용어들을 담고 있다. 각 과학 영역은 인간이 정한 기준에 따라 나눈 것일 뿐이다. 자연은 그 스스로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을 나누지 않는다. 또 우리의 소소한 일상 한 가운데에 과학이 존재한다. 과학은 어느 순간, 어느 장소든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말이다. 천체 물리학자이자 작가였던 칼 세이건은 자신의 저서 코스모스에서 인간의 이성, 그 중에서도 과학이 이루어낸 성취를 집대성했다. 인류의 조상이 자연과 우주와 만난 어느 시점에서 과학은 이미 시작되었을 것이다. 주술에서 마술로, 그리고 마술이 다시 과학으로 말이다. 모든 순간의 과학은 자연 현상에 대한 호기심을 지닌 독자가 세계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던 과정을 직관적으로 따라갈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그림의 어느 부분에서 호기심이 일었다면 해당 그림에 대한 항목을 찾아보고 궁금증을 풀어갈 실마리를 얻는 것이다. 그림으로 가득한 이 과학책이 내게 준 메시지가 하나 있다면 그건 우리가 과학 속에 살고 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깨달음이었다. 우리의 일상에서 마주하는 대상에 대해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때, 대상에 대한 아름다움을 감수하는 능력도 더욱 깊어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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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멀 멜빌의 탄생 203주년을 지나며

- 모든 것은 빛난다를 읽고

 



 

올해도 어김없이 한여름이 지나고 있다. 8월이 되면 어김없이 한 작가를 좀 더 떠올리곤 한다. 요즘 인기 있는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로 관심도가 높아진 모비 딕의 작가인데, 바로 허먼 멜빌이다. 1년 전 오늘도 멜빌에 대해 글을 올렸는데, 오늘은 그가 태어난 지 203년째 되는 날이다. 어제(731) 공교롭게도 프리모 레비가 태어난 지 103년 되었다는 글을 올린 바 있으니, 레비와 멜빌은 태어난 지 딱 100년 하고 하루 차이가 난다는 것도 오늘 알았다. 멜빌의 생일을 기억하며 그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니 그동안 멜빌의 작품을 더 읽지는 못했고, 대신 두 철학자가 모비 딕을 읽고 쓴 책에 대해 조금 언급해보려고 한다. 말하자면 철학자의 문학읽기쯤 되겠다.


 

멜빌의 작품을 다룬 책이면 어느 책이든 모비 딕1851년에 출간되었다는 정보를 놓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작품이 나오기 전에 글이 쓰였을 텐데, 내게는 멜빌의 1850년 여름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이 때는 멜빌이 이미 자신의 초고를 거의 완성해가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다만 이 시기의 모비 딕은 지금 우리가 보는 작품과는 매우 다를 뿐이었다. 이 작품이 영문학의 3대 비극 가운데 하나로 꼽히기도 하지만, 이 때는 비극의 형태를 지닌 소설도 아니었다고 한다. 그럼 어떻게 우리가 읽고 있는 작품이 나올 수 있었을까.


 

이 관점에서 1850년 여름은 허먼 멜빌에게, 그리고 세계문학사에 중요한 일이 적어도 두 가지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멜빌이 셰익스피어를 재발견한 일이고, 다른 하나는 너새니얼 호손과 친해지고 교류하게 된 일이다. 멜빌이 셰익스피어를 재발견하지 않았다면, 작품 전체를 규정하는 비극의 요소가 과연 소설에 적용될 수 있었을까? 영문학 연구자는 이 부분에 대한 답변을 명쾌하게 제시할 수 있겠지만 나는 몇 가지 사례에 한정하여 단서를 찾아보는 것으로 오늘은 마무리하려고 한다. 멜빌이 호손에게 보낸 편지에서 셰익스피어와 호손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멜빌은 이 두 가지 사건을 통해 자신이 거의 완성해가고 있던 작품의 방향에 큰 변화를 주게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가정이긴 하지만 만약 멜빌이 셰익스피어와 호손의 영향으로 작품을 수정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밋밋하게 고래와 싸운 인간의 모험 이야기정도에서 끝나는 이야기와 만나지 않았을까싶다.


 

멜빌에게 일어난 두 가지 사건의 관점에서 좀 더 생각해보게 된 것은, 두 철학자(휴버트 드레이퍼스와 숀 켈리)가 고전문학을 읽고 쓴 책 모든 것은 빛난다 All Things Shining이라는 책을 만나서부터다. 물론 이 책은 허무와 무기력의 시대, 서양 고전에서 삶의 의미 되찾기라는 부제를 갖고 있지만, 나는 이미 셰익스피어와 호손이 멜빌에게 준 영향에 대한 관심에서 저자들이 모비 딕을 읽고 쓴 부분을 읽어 보았다. 이전에 올린 글에서 멜빌의 문장에 셰익스피어가 썼던 형식의 표현 일부를 사용하기도 했다는 점을 이야기하기도 했는데, 오늘은 표현적인 특징뿐만 아니라 내용 혹은 전략적인 측면에서 셰익스피어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너새니얼 호손의 영향은 호손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식을 표출한 부분과 연결지어 생각해보았다.




셰익스피어의 영향

 


우선 모비 딕에서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받게 되는 정황은 그가 셰익스피어 전집을 구하게 되었다는 편지를 호손에게 보낸 상황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시점이 1850년 상반기인지는 좀 더 알아봐야할 일지만 멜빌은 흥분하며 셰익스피어 작품을 탐독했다. 모든 것은 빛난다에 따르면 일부 문학 연구자들은 멜빌이 셰익스피어를 읽고 모비 딕에 얼마나 영향을 주었는지 면밀하게 연구했다. 멜빌은 자신의 작품을 탈고하면서 너새니얼 호손에게 보낸 편지(1851629일자 편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당신께 맛보기 견본으로 고래 지느러미 하나를 보내드릴까요? 꼬리는 아직 요리되지 않았습니다. 책 전체를 구워내는 지옥불이 터무니없이 꼬리까지 모두 요리해버리지는 않았으니까요. 'Ego non baptiso te in nomine...,' 이것이 이 채의 모토(비밀스런 모토)입니다. 나머지 문구는 알아서 완성하시기를.”(259)


 

여기에서 멜빌이 끝맺지 않은 원래의 라틴어 문장을 번역하면 나는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세례를 베푸는 게 아니요, 오히려 악마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노라.”라는 의미라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연구자들은 멜빌이 셰익스피어를 읽고 받은 영향을 연구했으나, 후대 연구자들의 결론은 이 문장이 셰익스피어가 아니라 마법에 관해 쓴 프랜시스 팔그레이브라는 사람의 에세이를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이렇든 문학 연구자들은 이런 미묘하고 상세한 문제들을 계속 연구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두 철학자 저자가 멜빌에게 준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언급한 대목을 찾을 수 있다. 모비 딕에서 피쿼드호의 선장 에이해브를 따르는 배화교도 페달라가 한 예언과 관련이 있다. 페달라는 117장에서 에이해브가 죽기 전에 바다에서 두 개의 관을 보게 될 것이며, 그 중 하나는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고 예언했다. 여기에서 역자는 인간이 만들지 않은 관이 바로 모비 딕이 부순 보트 널판이라고 보는 것 같다. 나는 조금 다르게 보았는데, 인간이 만들지 않은 관은 바로 모비 딕자신이라는 견해다. 그 이유는 모비 딕을 추격하던 둘째 날에 모비 딕에 밧줄이 감겨 죽어 있는 페달라가 에이해브 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만들지 않은 관은 바로 모비 딕자신이라고 나는 보았다.

 


흥미로운 것은 페달라의 예언에 대해 모든 것은 빛난다의 저자들은 이를 맥베스적인 예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역자의 주석에 따르면, 이 부분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맥베스가 마녀로부터 여자의 자궁에서 태어난 자는 결코 당신을 죽이지 못할 것이라는 예언을 듣게 된다. 하지만 맥베스는 결국 제왕절개로 태어난 사람에게 죽음을 맞게 된다. 그렇다면 페달라가 예언한 두 번째 관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건 에이해브가 죽기 전에 모비 딕이 들이받아 침몰시키는 피쿼드호를 의미하지 않을까 싶다. 이 과정에서 화자 이슈메일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수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두 철학자가 피쿼드호의 침몰을 서양 역사 전체의 침몰을 상징할 수 있다’(322)고 언급하는 대목이었다. 이 부분이 셰익스피어의 비극으로부터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는지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혹은 문학 연구자들이 더 알려주겠지만), 비극의 구조 속에 에이해브의 광기와 고뇌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않을까라고 정리해두기로 한다.



 

멜빌이 호손으로부터 받은 영향이란?


 

한편 지금 시점에서 보다 궁금해지는 것은 멜빌이 호손과 교류하게 되면서 이 두 사람의 상호작용이 모비 딕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에 관해서다. 멜빌과 호손 사이에 오간 편지나 호손 부인이 남긴 기록 일부를 참조하여 상상해보면 호손은 과묵하고 사람으로 번잡한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았던 인물인 것 같다. 호손 부인은 멜빌의 속을 알 길이 업어 보이는 깊이 꿰뚤어 보는 듯한 눈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멜빌은 목소리가 크고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호손 부인이 묘사한 기록에 보면 말이다. 어쩌면 호손이 15살 연상이었음에도 에너지 넘치고 큰 목소리를 가진 멜빌을 다소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다만 호손의 작품 경향(예를 들면 주홍글씨와 같은 작품)을 참고해보면 호손이 멜빌에게 주었던 영향가운데 큰 부분은 무엇보다 기독교 비판적인 시각이 아니었을까 싶다.


 

모든 것은 빛난다의 저자 드레이퍼스와 켈리는 이 소설(모비 딕) 역시 해양모험소설로 분류할 수 있기는 하지만, 어둠을 더 깊이 꿰뚫고 있다는 의미에서 사악한 것이었다.”(258)고 평한다. 이 부분이 호손과의 교류를 통해 작품에 미친 영향은 아닐까. 소설의 시작 부분에 이슈메일이 출항 전에 머무는 물보라 여인숙에서 발견한 그림에는 작품 전체의 방향을 암시하는 듯한 그림이 등장한다. 바로 그림 속에 있는 삼중돛대에 대한 두 철학자들의 해석 때문인데, 세 개의 돛대는 삼위일체설에 근거한 기독교적인 일신론을, 그리고 침몰하는 배는 여기에 의존하는 서구 문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기독교 문화에 기반한 서구 문명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상징적으로 배치해놓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시각은 이교도 퀴퀘그에 대한 비교에서 두드러진다. 바로 멜빌이 이웃의 기독교도보다 이교도 식인종 동료가 더 낫다는 암시를 작품에서 드러내기 때문이다. 두 철학자 저자들은 멜빌이 자신의 책이 지닌 사악함의 요소가 바로 이런 부분이라고 지적한다.


 

나아가 저자들은 모비 딕에서 가장 치명적인 요소가 바로 에이해브의 광기, 다시 말하면 모비 딕에 대한 복수를 꿈꾸며 한 가지에 미쳐 있는 일신주의의 사악한 성격이라고 지적한다. 이에 대해 대립되는, 혹은 대안으로서 제시된 것이 바로 모비 딕이 가진 다신주의적인 성격에 주목한다. 저자들은 이 점을 모비 딕의 규정하기 힘든 흰 색얼굴이 없음에서 찾고 있다. 얼굴이 없는 존재는 우리의 이해 능력을 벗어나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대신 우주에는 숨겨진 진리가 없고, 표면적인 사건들 자체가 의미의 전부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저자들은 이런 생각이 유대적 전통에서 왔음을 말한다.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신에서 말이다.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나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느니라. 그러나 너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이것은 나를 보고 살아남을 자가 없기 때문이다.”(출애굽기 33:18-20)

 


이와 유사하게 멜빌은 모비 딕 79장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향유고래의 경우에는 이마에 본래 갖추어진 고귀하고 위대한 신 같은 위엄이 너무 크게 확대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자연계의 어떤 생물을 볼 때보다 훨씬 강력하게 신성과 그 무서운 힘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향유고래의 이마에서 어느 한 점도 정확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이목구비가 하나도 뚜렷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 , , 입도 없고 얼굴도 없다. 향유고래에게는 진정한 의미의 얼굴이 없다. 주름투성이 이마가 넓은 하늘처럼 펼쳐져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멜빌이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졌다고 해서 신을 거부했던 것일까? 철학자가 소설에서 주목한 점은 간접적이지만 이슈메일의 입장에서 짐작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슈메일은 다분히 기독교 신앙에 대해 반대 혹은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가진 고유성을 다시 회복하자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그 근거로 고래를 해체하며 경뇌유를 짜는 선원들의 공동작업 장면을 꼽는다. 향유고래(sperm whale)라는 이름은 머리에서 채취되는 경뇌유(spermaceti)에서 유래했는데, 예전에는 이를 정액(sperm)으로 오해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일부 연구자들은 이 장면에서의 성적인 암시를 언급하지만, 나는 이 공동작업 의식에서 두 철학자들이 읽어내는 해석이 더 설득력 있다고 본다. 두 저자는 이 장면에서 보이는 풍부하고 애정이 넘치며 친근하고 다정한 감정을 근거로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아가페적 사랑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랑은 곧 타인에 대한 기독교적 사랑의 핵심이다. 정리해보면 멜빌이 호손에게서 받았음직한 영향이 있다면 그건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식과 기독교 신앙의 회복(혹은 신앙의 자정작용에 대한 필요성)에 있지 않을까 싶다. 이는 작품에서 이교도와 다른 문화에 대한 수용적 시각으로 나타나고 있다.

 



두 유형의 광기, 흥미로운 짝패


사실 철학자가 읽은 모비 딕이 쉽게 다가오진 않았지만, 드레이퍼스와 켈리는 멜빌의 작품에서 두 가지 유형을 구분하는 점이 흥미로웠다. 우선 뚜렷하게 드러나는 한 가지 광기는 선장 에이해브의 광기다. 철학자들이 지적하는 에이해브의 광기는 완고한 일신주의를 대변한다. 강력한 정체성을 가진 이로서, 궁극적인 진리를 증명하느라 미쳐버릴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반면 다른 유형의 광기는 모비 딕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의외의 인물에서 나온다. 바로 흑인 소년 핍이다. 핍은 선원들이 고래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바다에 두 번 빠지는데, 망망대해에 빠져 홀로 남게 된 핍은 완전한 단절의 공포를 경험하고 미쳐버리는 것이다. 멜빌은 소설에서 핍의 육체는 물 위에 떴으나 영혼은 익사해버렸다고 묘사해놓았다. 그 결과 핍이 보인 광기는 정체성의 상실을 가져왔는데, 드레이퍼스와 켈리는 에이해브의 경우와 반대로 핍의 사례는 궁극적인 진리란 없음을 보여주고, 이 때문에 미쳐버린 것이라고 해석한다.


 

나는 모비 딕을 읽을 때 핍의 존재에 의문을 가졌었는데, 철학자들은 핍과 에이해브가 서로 대척점에 있는 짝패로 보는 점이 흥미롭다. 또한 핍이 겪은 정체성의 상실은 오히려 이슈메일의 태도에서 보이는 다신교적인 존재에 대한 관용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정체성을 갖지 않게 되었기에 에이해브의 일신주의와 달리 다양한 해석에 대해 열린 모습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하긴 했지만 다시 정리하면, 멜빌이 호손으로부터 기독교 비판적인 시각의 영향을 받았다면 이는 무엇보다 변질되어버린 기독교의 전체주의적인 모습에 대한 비판의식일 것이다. 따라서 멜빌이 자신의 작품을 사악한 책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정작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그가 단순히 기독교 모독적인 작품을 쓴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오히려 멜빌은 타락하고 변질되어버린 종교에 대해 비판하고, 예수의 본래적 가르침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음을 작품 전체에서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멜빌이 말하는 모비 딕의 사악함은 기독교 고유의 신앙 회복을 말하는 과정에서 충격요법을 쓴 것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관점에서 현재 대한민국에서 일부 변질되어버린 기독교의 모습을 보면 멜빌이 태어난 지 20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의 소설이 유효한 이유, 모비 딕읽기가 왜 필요한지 그 이유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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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9-08 09: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당선 축하드려요. 추석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

초란공 2022-09-08 15:53   좋아요 1 | URL
항상 관심을 갖고 정성껏 읽어주시는 mini74님! 감사합니다.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thkang1001 2022-09-08 09: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하고 풍성한 한가위 보내세요!

초란공 2022-09-08 15:54   좋아요 1 | URL
thkang1001님도 행복한 한가위 보내시길요~! 감사합니다.

얄라알라 2022-09-08 13: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당선작 제목을 보고 바로, ˝초란공님이시구나!˝를 알았습니다
모비딕 전문가 초란공님, 축하드립니다! 좋은 글 감사들요

초란공 2022-09-08 15:55   좋아요 0 | URL
남다른 기억력의 얄라님이십니다^^ 항상 관심을 갖고 보아주셔서 감사해요. 즐거운 연휴 보내시구요~

이하라 2022-09-08 13:1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추석연휴 되세요.^^

초란공 2022-09-08 15:58   좋아요 2 | URL
이하라님, 꾸준히 관심을 갖고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안하게 연휴 보내시길 바래요~!
 





프리모 레비의 탄생 103주년을 지나며

- 주기율표를 읽고

 



언젠가 나탈리아 긴츠부르크의 가족어 사전을 읽다가 긴츠부르크의 친정이 레비(Levi) 가문이라는 대목을 보게 되었다. 그럼 혹시 긴츠부르크 가문이 프리모 레비와 관계가 있는 것일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특히 긴츠부르크와 프리모 레비의 가문이 이탈리아 북부(각각 밀라노와 토리노)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더 그럴듯해 보였다. 한동안 이 궁금증을 잊고 있었는데,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라는 책에서 우연히도 답을 얻었다. 책 뒤에 실린 작가 필립 로스와의 대담에서 프리모 레비는 긴츠부르크와 친하고 교류가 있었긴 하지만 자신의 가문이 긴츠부르크의 친정은 아니라고 답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런 사소해보이는 문제에 대해 나 말고도 궁금해 하거나 물어본 이들이 또 있었던 모양이다.















 

긴츠부르크 가문이든 프리모 레비의 가문이든 이들은 20세기 전반기의 엄혹한 시대를 겪어 냈다. 특히 주기율표는 아직 레비의 책을 몇 권 읽지 않았음에도, 읽기 시작하자마자 반해버린 작품이다. 비가 내리는 7월의 마지막 날에 프리모 레비의 작품을 다시 떠올린 것은, 오늘(731)이 프리모 레비가 태어난 지 103년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파시즘의 폭력성에 대항하여 빨치산 활동을 하기 위해 산으로 들어간 레비는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동료 중 누군가의 밀고로 19431213일에 파시스트공화국 군인들에게 포위되어 포로가 되었다. 명망 있는 토리노 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화학자가 된 그가 주기율표의 원소를 제목삼아, 에세이 같은 단편 소설을 핍진성 있게 그려낸 작품이 바로 주기율표.


 

원소 을 제목으로 한 글에서 레비는 자신의 경험과 모습을 글로 묘사했다. 당시에 포로가 되어 감방에 있던 화자(혹은 레비)가 생리적인 활동 외에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이 바로 독서였다. “겨우 글씨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빛이 희미했지만 그래도 나는 쉴 새 없이 독서했다.”(197) 그러면서 이 일을 겪을 당시의 느낌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매우 용기 있게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그 며칠 동안 나는 모든 일을, 머리에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인간적인 경험들을 하고 싶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픈 바람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201) 또 화자는 수용소에서 자신의 소중한 추억과 죽음에 대한 공포 보다 더 가까이 있던 것은 바로 굶주림이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삶과 죽음이 수시로 교차하는 경계에서 위태로운 삶을 경험했던 프리모 레비를 상상해본다. 그는 실력 있는 화학자였기에 구술시험을 거쳐 수용소 내의 화학실험실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화자는 수용소에서 살기위해, 빵과 바꿀 수 있는 라이터 부싯돌을 이리들처럼 도둑질했다라고 고백하는데, 아마 실제 레비 역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싶다.


 

프리모 레비를 알게 된 것은 아마도 많은 독자들이 그렇듯 서경식 교수의 저작을 통해서였다. 그 중에서도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박광현 옮김, 창비, 2006)는 읽고 나서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책이었다. 서경식은 이 책에서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한 인물로서, 나치 독일의 야만적 행적을 증언하며, 이 때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고 인상적인 소설 작품을 남겼던 인물이 왜 자살로 생을 마쳤을까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고 했다. 나 역시 이 책에서 그를 따라가며 그가 품었던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었던 마음이었던 기억이 난다. 어쩌면 레비가 했던 여러 생각들 가운데 한 가지 단서가 될 만한 부분이 주기율표크롬이라는 제목의 글에 나와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가깝게 느껴졌고 내가 인간이라는 것에 죄의식을 느꼈다. 인간들이 아우슈비츠를 지었고 아우슈비츠가 수백만의 사람들을, 내 많은 친구들을,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한 여인을 집어삼켜버렸기 때문이다.”(222)


 

아마도 이 말은 레비가 했던 고뇌의 일부, 거대한 빙산의 일부일 뿐이라 생각한다. ‘내가 인간이라는 것에 대한 죄의식수치심’, ‘염치라고 간단히 바꾸어 놓을 수 있을지 몰라도 이 표현 역시 어딘가 부족해 보인다. 서경식이 토리노의 레비 자택을 찾아가보고자 했던 당시, 서경식의 삶 역시 휘청거리고 너덜너덜했던 상태였다고 고백한다. 가족은 정치적인 상황으로 풍비박산이 난 상태였고, 고난을 겪던 두 아들의 구명을 위해 애쓰셨던 모친이 아들의 귀환을 끝내 보지 못하고 세상을 뜬 상황. 당장 본인은 직장 없이 불안한 앞날을 끌어안고 있던 암울한 상황이었다. 이 배경은 서경식을 읽고 영향을 받거나 그와 교유해온 여러 문인들, 지인들의 글을 모아 출간한 서경식 다시 읽기(연립서가, 2022)에도 그 정황이 어느 정도 나와 있다. 하지만 이 책들을 읽고 난 후에도 프리모 레비가 왜 자살로 생을 마감해야 했던 것인지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직 나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일단 지금 단계에서 레비의 행동과 생각에 대해 단정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서경식이 쓴 작품해설에서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로 인해 유대인이 되었다는 대목이 강하게 기억에 남는다.

















 

주기율표에는 흥미로운 단편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 바나듐 편이 인상 깊었다. 이 글은 화자 ’(혹은 레비 자신)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화학 실험실에서 함께 일하던 독일 장교와의 인연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이야기의 어디 까지가 소설적인 부분이고 어디 까지가 사실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화자는 단지 함께 일했던 독일 장교에 대한 적의나 보복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화자의 태도는 냉정하고 이성적이다. 특히 수용소 시절에 상관이었던 독일인을 이해하고자 했다. 나아가 당시 독일 장교의 인간적인 대우에 대해 감사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화자는 이 전직 장교에게, 그리고 독일인들에게 자신들이 같은 인간에게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아는가라고 묻고 그 대답을 듣고 싶었던 것 같다. 이 이야기의 결말이 궁금하다면 직접 읽어보시라. 묘한 여운을 주는 단편이다.


 

또 이 책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작가 필립 로스와의 대담인데, 전업 작가가 아니었던 레비의 직업에 대한 양가적 감정에 대한 이야기가 기억난다. 특히 생계를 위해 화학공장의 공장장으로 일하는 밥벌이의 지겨움과 작가로서 글쓰기 활동의 양립이 안 되는 상황을 말하는 대목에 공감이 간다. “저는 과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전쟁과 수용소가 그것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기술자로 만족해야 했습니다.”(350) 시대와 현실 속에서 휘청거리는 한 인간의 모습이 보인다. 반면 생계를 책임진 생활인이자, 직업을 가진 작가로서 자신을 비추어보기도 한다. “저는 후회하지 않아요. 공장을 감독하느라 제 시간을 허비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공장 밀리탄차 덕택에, 그리고 거기서 내가 해야 했던 그 강제적이거나 명예로운 일들 덕택에 저는 진짜 현실적인 세계와 동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358) 



어쩌면 레비의 글이 그토록 힘을 갖게 된 이유도 단지 그가 겪은 극적인 경험 때문만은 아닐지 모른다. 그의 현실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균형 감각이 레비의 경험들을 분명히 받쳐주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따라서 현실적이고 성숙한 레비의 인식을 마주할 때면, 그가 자살로 생애를 마감했다는 사실이 선뜻 믿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므로, 이 이유 역시 내 맘대로 재단하고 단정하기 않기로 한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수많은 결을 내면에 지니고 다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늘 프리모 레비가 태어난 지 103년이 되는 날이다. 우리는 어떤 세계를 살고 있는지 후두둑 떨어지는 비 소리를 들으며 생각해본다.

 


 





[1] "내게 화학은 미래의 모든 가능성을 담은, 무한한 형태의 구름이었다. 이 구름은 내 미래를 번쩍이는 불꽃에 찢기는 검은 소용돌이로 에워쌌는데, 마치 시나이 산을 어둡게 둘러싼 구름과 비슷했다."(35)

[2]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는 한 편의 시이며, 우리가 중고등학교에서 소화해온 그 어떤 시보다도 고귀하고 경건하다. 그리고 잘 생각해보면, 주기율표는 압운까지도 들어맞는다."(64)

[3] "증류는 아름답다. 무엇보다 느리고 철학적이며 조용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 작업은 사람을 분주하게 하지만 다른 것들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 자전거 타기와 비슷한 일이다. 또 증류가 아름다운 건 변신이 일어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액체에서 (보이지 않는) 증기로, 증기에서 다시 액체로 말이다."(89)

[4] "겨우 글씨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빛이 희미했지만 그래도 나는 쉴 새 없이 독서했다."(197)
-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감방에 있던 화자가 했던 행동.

[5]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가깝게 느껴졌고 내가 인간이라는 것에 죄의식을 느꼈다. 인간들이 아우슈비츠를 지었고 아우슈비츠가 수백만의 사람들을, 내 많은 친구들을,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한 여인을 집어삼켜버렸기 때문이다."(222)

[6] "이방인을 사랑하라,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는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282)
- 구약 성경 <신명기> 10장 19절의 글귀 재인용. 유대인이었던 레비에게 이 문장은 누구보다 다르게 다가왔을 것 같다.

[7] "내 목소리는 약하고 심지어 약간은 세속적이기까지 합니다."(325)
- 볼테르가 자신의 시 <오를레앙의 처녀>(1762)에서 잔다르크를 찬양하며 쓴 글귀.

[8] "지금 이 순간 미궁처럼 복잡한 줄거리를 벗어나 내 손으로 하여금 종이 위의 어떤 여정을 따라 달려가며 기호들의 소용돌이를 그리게 해주는 것은 바로 이 세포다. 위로 아래로, 두 차원의 에너지 사이로 이중 도약을 한 이 세포는 내 손을 이끌어 종이 위에 점 하나를 찍게 만든다, 바로 이 마침표를."(337)
- 마지막 문장.

[9] "생각하고 관찰한다는 것이 제 생존의 요인이기도 했어요. (...) 비록 제가 보기에는 맹목적인 경우가 많았지만 말입니다. 저는 특이할 정도로 정신이 살아 있는 상황에서 아우슈비츠를 경험한 것 같아요. (...) 사실 저는 제 주위의 세계와 인간들에 대한 기록을 멈춰본 적이 없습니다. (...) 어떤 사람들에게는 냉소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호기심이었고 그로테스크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새로운 환경 속으로 옮겨진 자연주의자의 호기심이었습니다."(348)
- 작가 필립 로스와의 대담에서

[10] "저는 후회하지 않아요. 공장을 감독하느라 제 시간을 허비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공장 밀리탄차 덕택에, 그리고 거기서 내가 해야 했던 그 강제적이거나 명예로운 일들 덕택에 저는 진짜 현실적인 세계와 동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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