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론자들을 위한 성스러운 책 

-에세 Les Essais를 만나 읽기 시작했다


미셸 드 몽테뉴 지음, 심민화·최권행 옮김, [민음사] (2022)



 

말복이 지나고 아침, 저녁으로 확연히 달라진 기온을 느낀다. 덥고 비도 많았던 올 여름도 지나고 있다. 에너지가 바닥나도록 한 주를 보내고 주말에 거실에 누워 창밖에서 들려오는 매미 소리를 듣다 눈물이 핑 돌았다. 힘 빠진 매미 소리. 여름 끝의 마지막 생의 떨림 같이 느껴져서다. 문득 내가 사는 모습, 내 주변 가족의 모습이 떠올라 순간 울컥했더랬다. 명절 때마다 보는 조카들은 무럭무럭 자라는 반면, 어른들은 점점 더 허리가 굽고, 통증을 더 호소한다. 나이가 들어가서 그런가. 이런 나의 멜랑콜리가 웬일인가 싶다가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나이에 가까워 지다보니 생각이 더 많아진다. 그래서인지 요즈음 나는 잘 살고 있는 걸까?’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알라딘에서 두 달 정도 마일리지와 적립금을 모아 미셸 몽테뉴의 에세를 구입했다. 토막 시간을 내어 조금씩 읽는다. 반세기도 전에 수상록이란 제목으로 정성스레 번역되긴 했으나, 다시 새롭게 번역되어 나왔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누군가가 번역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다만 언젠간 다시 번역되지 않을까 막연히 기다리고만 있던 셈이었다. 이제 새로운 번역으로 몽테뉴의 글을 직접 만날 수 있게 되어 반가웠다. 1권의 앞부분에 실려 있는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이 책을 번역하는 데 15여 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 밖에 옮긴이의 해설과 감회의 말도 좋았는데, 무엇보다 번역이라는 이 거대한 작업과 관련하여 그간 옮긴이의 고충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축약본 형태의 수상록을 몇 권 읽어보았다. 그리고 나서 이 책이 새로 번역되어 나오면 오랫동안 곁에 두고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인격적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내게 에세무신론자들을 위한 성스러운 책, 혹은 성경인 셈이다(내가 이런 표현을 만들어낼 리는 없고, 어디선가 이 표현을 본 것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분명히 난 이런 표현을 만들어 낼 깜냥이 안 된다). 최근에 블레즈 파스칼의 팡세를 읽다가 파스칼의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성찰에 놀라게 되었는데, 파스칼이 특히 몽테뉴의 에세를 많이 인용한 정황을 통해 그가 몽테뉴로부터 여러 모로 영향을 받은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파스칼의 이해에 몽테뉴가 준 영향은 무시하기 힘들다고 할 수 있겠다. 그만큼 에세는 영향력이 있는 책이다. 후대의 독자 및 작가들에 큰 영향을 남긴 것을 금방 알아볼 수 있다. 파스칼뿐만 아니라 앙드레 지드, 랄프 왈도 에머슨와 같은 작가와 사상가들이 몽테뉴가 하는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라고 하는 걸 보면 말이다.


 

파스칼의 팡세를 읽으면서 정리했던 앞선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파스칼의 글은 나와 인간에 대한 통찰을 통해 신으로 향하는 길을 터놓았다. 반면 몽테뉴의 글은 오히려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기 자신을 향한다고 말했다. 곧 그의 글쓰기는 나를 탐구하는방편에 보다 가깝다. 공공연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인격적인) 신의 존재에 대해 줄곧 회의했던 사람으로 보인다. 고대의 신탁이나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기적, 미신에 대해 당시의 사람들과 달리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오래도록 몽테뉴의 글을 곁에 두고 읽고 싶어졌던 이유도 몽테뉴는 종교가 강요할 수 있는 특정 교리나 독단으로부터 자유롭고 열린 태도로 세계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몽테뉴가 근대를 열어젖힌 한 사람이라는 데 많은 이들이 동의하는 이유이기도 할 테다.


 

한편 몽테뉴가 모비 딕의 작가 허먼 멜빌에게도 영향을 준 정황이 보이는데, 우선 모비 딕의 앞부분에 실린 발췌록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발췌록에서 멜빌은 에세에 수록된 레이몽 스봉의 변호라는 글 가운데 한 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 인용부의 이야기는 구약성경요나서에 나오는 고래, 혹은 거대한 물고기에 대한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 같다. 내용면에서도 작중인물인 이슈메일이 식인종 퀴퀘그를 편견 없이 바라보는 장면, 그리고 술에 취한 기독교인들보다 술에 취하지 않은 식인종과 함께 지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대목에서도 몽테뉴적인 태도 혹은 세계관이 엿보인다. 멜빌의 소설에는 그가 태평양의 어느 섬에서 식인종들과 한동안 살았던 경험을 더하긴 했지만, 그보다 앞서 몽테뉴는 《에에서 식인종족 몇 명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본 경험을 이야기한 바 있다. 그는 이 때의 경험을 자신의 글에 자세히 기록해두었다. 멜빌은 에세의 이 장면에서 크게 공감하고 이 부분에 주목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이런 정황을 보면 몽테뉴가 멜빌에게 준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해보기에 충분하다.


 

이번에 완역되어 출간된 에세를 읽기 시작하면서 무엇보다 주목하게 되는 주제는 인간의 유한성’, 죽음에 대한 것이다. 역자의 말에 따르면, 죽음이야말로 몽테뉴의 평생에 걸친 주제였다. 사실 보다 넓게 보면 모든 문화 예술의 태생적 모티브는 다름아닌 죽음이라고도 볼 수 있는 면이 있다. 몽테뉴의 말을 들어보자.


 

이처럼 잦은 예들이 이처럼 예사로 우리 눈앞을 지나가는데, 죽음에 대한 생각을 어떻게 떨쳐 버릴 수 있으며, 어떻게 매 순간 죽음이 우리의 멱살을 쥐고 있는 듯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역자의 말에서 재인용)


 

몽테뉴는 30대 말에 은퇴했다. 이후 조상이 마련해 준 몽테뉴성의 원형 공간을 자신의 서재로 꾸미고, 이 방에 들어가 매일매일 읽기와 쓰기를 해나갔다. 매일 같이 죽음을 성찰했던 그에게 끊임없이 생각과 글을 생산해내는 둥그런 자궁 같은 서재가 있었던 것이다. 그가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사상가들을 인용하는 대목에서 이 죽음과 거리를 두어 대상화하고 이를 탐구하듯 글을 쓰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원자론자들 혹은 에피쿠로스학파 계열로 보이는 사상가들의 말을 많이 언급했다. 몽테뉴의 말을 통해 그가 죽음이란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고자 했을지 짐작해본다. 물론 그는 인간의 유한성을 자각하면서도 맹목적인 회의주의나 허무주의로 빠져드는 것 역시 스스로 경계했던 것 같다. 매일 죽음에 대해 생각했지만, 그의 글쓰기는 결국 자신의 을 향했다.


 

나는 사람들이 여기서 꾸밈없이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보통 때의 내 모습을 봐 주기 바란다. 왜냐하면 내가 그려 보이는 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35)


 

이어서 그는 이 글, 이 책의 재료가 바로 나 자신임을 재확인하며, 미래의 독자에게 자신의 소박한 희망을 전한다. 어쩌면 몽테뉴의 끊임없는 자기 확인과 글쓰기는 유한한 존재로서의 한계를 인정하되, 이를 넘어서고자 했던 소망이 담긴 행위로 볼 수도 있겠다. 글로서 오래도록 가까운독자에게 기억되고 문화적인 유전자 을 남기는 행위로서 말이다. 후대의 수많은 독자와 작가들에게 그에 대한 기억과 영향을 남겨두었다는 점에서 그는 여전히 살아 있는 셈이다.

 


그러면 몽테뉴가 글쓰기를 통해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하는 방법은 어떤 것이었을까? 우선 그가 스스로 재확인하고 독자에게 건네는 메시지는 지금/여기(hic et nunc)의 시간을 살라는 것으로 이해된다. 에세에는 키케로나 세네카와 같은 고대 로마의 웅변가, 사상가의 말이 많이 언급된다. “미래를 근심하는 영혼은 불행으로 짓눌린다.”(52)와 같은 세네카의 말을 보면 현대인의 미래를 염려하는 습관이 근대산업사회에서 처음 생겨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생각보다 더 오래전, 그러니까 어쩌면 신탁에 의지했던 고대 문명에서도 인간이 미래를 근심하고 있던 정황을 파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 인간으로 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이 지금/여기의 삶을 사는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야생 동물들과 같은 본성을 잃어버리기 시작하면서 말이다.


 

그것(잡다한 상념거리)이 어찌나 많은 악몽과 환상적인 괴물들을 낳아 두서도 목적도 없이 이것저것 쌓아 올리던지, 나는 정신의 어리석음과 기이함을 내 마음대로 관찰하려고 기록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 정신 스스로 그것들을 부끄러워하게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서 말이다.”(82)


 

몽테뉴의 이런 속마음을 알고 나면, 그가 정말 400여 년 전에 지구 반대편에 살았던 사람인지, 최근에 세상을 뜬 인물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러니 수많은 시인과 소설가, 사상가들이 몽테뉴의 글에서 각자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게 에세무신론자들을 위한 성경처럼 여겨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신앙심 깊은 이들이 매일 성경/불경 등 경전을 읽듯, 나 역시 에세를 매일 조금씩 읽어보기로 한다. 자신을 들여다보고 탐구하여 글을 써나갔던 몽테뉴의 모습을 상상하고 따라가다 보면, ‘지금/여기의 삶으로 향하는 길을 발견해나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걱정삼아 나에게 한 번 더 묻는다. 에세를 읽는 나, 잘 살고 있는 걸까?




 



추가로 함께 읽고 싶은 책들

: 사라 베이크웰의 어떻게 살 것인가(책읽는수요일, 2012)

몽테뉴 여행기(필로소픽, 2020)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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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2-09-08 15:3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지금까지 이 책이 서재에 여러 번 올라왔어도 한 번도 읽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었는데, 초란공 님의 이 글은 몽테뉴의 <에세>를 드디어 제대로 읽어보고 싶단 생각이 들게 하네요.

초란공 2022-09-08 15:35   좋아요 3 | URL
잠자냥님이 남겨주신 말씀이 더 감동이에요!! 읽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평안한 연휴 보내세요!

scott 2022-09-08 16:1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 출판 해준 민음이 역자분들의 노고에 감탄하지만
첫장 부터 오타가 뙁!


초란공님 추석 밥상
에세 완독!
기원 합니다 ^^

초란공 2022-09-08 16:15   좋아요 4 | URL
눈 밝으신 scott님! 첫장 어디에요 어디? ㅋ 행복한 한가위 보내시구요!

stella.K 2022-09-08 19: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읽을 준비가 다 되어있군요.
<어떻게 살 것인가>꺼정. 현재 절판으로 나오는데...
<에세>가 안 나왔으면 <수상록>쯤 살짝 제꼈을 것 같은데 고민이네요.
저는 팡세도 안 읽었는데...ㅎ
근데 왜 울고 그러십니까? 아무래도 호르몬이...ㅋ
저도 올해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나이를 살고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정말 내가 덤으로 살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추석 잘 보내십시오.^^

초란공 2022-09-08 19:33   좋아요 2 | URL
추석 연휴 평안히 보내세요. 모든건 다 호르몬 탓입니다!! ㅎㅎㅎ

얄라알라 2022-09-11 2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플친 transient님께서 마침 오늘 <몽테뉴 여행기> 리뷰를 올려주셨던데 초란공님의 페이퍼에서 또 만나니, 기억에 콕 담고 갑니다!

페크pek0501 2022-09-13 13: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훌륭한 페이퍼입니당~~~
 
북극 허풍담 5 - 휴가
요른 릴 지음, 지연리 옮김 / 열림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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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의 사내들이 순간을 사는 법

- 북극 허풍담 5를 읽고


요른 릴 지음, 지연리 옮김, [열림원] (2022)

 



이른바 문명 세계에서 성장한 한 인간이 북극의 오지를 방문하고 매료되어 16년을 눌러 살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보기 드문 이 경험의 주인공은 덴마크의 작가 요른 릴이다. 그가 19세가 되었을 때 한 탐험가와 함께 방문한 그린란드에 매료되어 그대로 16년을 눌러 살았다고 한다. 북극 허풍담은 작가의 이런 경험이 바탕이 되어 쓰인 소설이다. 북극 허풍담 5를 읽으면서 줄곧 작가의 정체가 궁금했다. 그가 지구의 외딴 곳에서 발견한 매력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먼저 나온 북극 허풍담네 권을 아직 읽지 못했지만, 번역가가 직접 그린 재미있는 삽화를 보면서 각 인물의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하며 읽었다.


 

보급 물자를 실은 배가 그린란드 북동부의 항구 톰슨 곶에 들어오면, 이곳 사내들 사이에는 기대와 흥분이 감돈다. 배가 이 오지에 닿는 일은 일 년에 한 두 번이다. 누구는 거대한 사향소 사육장을 만드는 데 필요한 철망을 기다리고, 다른 이는 새 파이프 담배 하나가 도착하기를 목이 빠져라 기다린다. 또 어떤 시인은 반년 전 혹은 일 년 전에 자신의 원고를 문명 세계의 출판사로 보내 그 결과를 기다리기도 한다. 각자 하는 일이 어떻든지 간에 이 곳에 사는 사내들은 모두 사냥꾼들이기도 하다. 또 이들은 자연이 만들어 놓은 수도원에서 침묵이란 기도를 배우는 수도승 같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곳에서는 문명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놀라운 일과 불가사의한 일이 삶 속에 깊이 들어와 있었다.


 

아마 앞부분에 자세한 내막이 나와 있을 테지만, 북극 허풍담 5에서는 어떤 실수(?)로 닐스 노인을 먹어버린 할보르 로네센이 다른 사내들보다 주목을 받고 있다. 그린란드 북동부의 항구로 들어오는 배를 타고 돌아온 그는 자신이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으려고 한다고 말한다. 한 남자가 얼떨결에 식인을 해버렸다는 소설의 설정부터 충격적이지만, 이 곳의 도덕은 오히려 실수로 벌어진 일인데 어쩌랴에 가깝다. 문명 세계에서 통용되는 상식이 이곳에서는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소설에서 재미있는 장면이 많이 등장하지만, 무엇보다 내 눈에 들어온 건 이곳 사내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이곳에서의 삶을 지배하는 규율은 문명이 만든 형이상학이 아니라, 철저히 경험주의적인 야생의 법칙이었다. 북극의 혹독한 기후와 절대 고독이 만들어낸 삶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이곳에선 문명이 만들어 낸 외곬수적이고 편집증적인, 그리고 신경증적인 규율이나 법과 도덕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문명 세계였다면 이곳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띄게 되었을 것이다. 문명 세계에선 사람을 잡아먹은 전적이 있는 사내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신부님이 될 수는 없을 테니까. 아마도 할보르는 식인 살인마라는 오명과 함께 사회로부터 격리되거나, 사형을 당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곳에선 현지의 야생과 집단의 규율이 곧 법이었다.


 

이 소설이 북극 허풍담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아주 중요한 삶의 진실 하나를 담고 있다고 보인다. 그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태도 혹은 철학이다. 기나 긴 겨울이 지배하는 북극 세계에서 봄은 아직 멀었고, 여름과 가을은 순식간에 지나가버린다. 그러니 이곳에는 대부분 어둠의 시기만이 남는다.

 


이 시기가 오면 말 그대로 순간을 살았다. 하루가 가면 또 하루를 살고, 과거도 미래도 없이 이 순간에서 저 순간으로 이동했다.”(115)


 

이 부분에서 잠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내게 이 대목은 아주 중요한 삶의 철학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순간을 산다는 것 말이다. 어쩌면 이런 삶의 방식이야말로 대부분의 현대인이 잃어버린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나인지 모른다. 철학자 마크 롤랜즈가 철학자와 늑대에서 저자는 인간의 삶과 늑대의 삶을 비교하고 있는데, 그가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늑대가 순간을 살아가는방식이었다. 이는 늑대의 본성(nature)이라고 해도 좋겠다. 고통이 닥치면 피하지 않고 그저 견디는 것이다. 이는 하루하루 주어진 순간을 온전히 경험하며 살아가는 방식이다. 반면 인간은 온전히 순간에 머물지 못하고 미래를 걱정하는데 보다 많은 시간을 보낸다.


 

현대인의 시각에서 순간을 사는삶의 방식은 무모해보이거나 미개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우리는 끊임없이 과거를 캐내어 스스로를 괴롭히거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우리를 줄곧 채찍질하곤 한다. 문명 세계는 사람들에게 더 좋은 삶, 더 안락한 삶을 살기위해 미래에 시선을 맞추게 한다. ‘지금을 희생하도록 무언의 요구를 하는 것이다. 이는 현대인을 길들인 문명의 규율이다. 인간의 문명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양분삼아 유지된다고 볼 수도 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돈으로, 물질로 대체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든다. 따라서 문명 세계로 떠나 신부가 된 할보르가 잃어버렸다고 하는 대상은 대부분의 현대인이 잃어버린 것이기도 하다. 작가 요른 릴이 청년기의 대부분을 북극의 오지에서 보내면서 인간이 잃어버린 본성의 모습을 다시 발견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할보르는 눈폭풍 속에서 며칠 동안 나아가다 죽음의 문턱에 서기도 했다. 동상으로 엄지발가락을 잃기도 했지만, 그보다 내면의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는 이제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과거를 돌아보지 않았고, 미래를 갈망하지 않았다. 대신 깊은 평화가 내면에 자리 잡았다.”(177) 이 경험을 한 직후 그 앞에 구릿빛 피부의 여인 마 킨이 그야말로 하늘에서 떨어졌다. 할보르는 마 킨과 섬을 타고 사랑을 나누게 된다. 하지만 할보르가 행복감을 느끼게 되었던 것은 마 킨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게 되는 것이다. 잃어버린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허풍 같이 보이는 북극 사내들의 삶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문명 세계 사람들이 잃어버린 본성일 것이다. 문명은 사람들을 북극 오지의 사람들보다 더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고립시켜버렸다. 문명인들은 곧 순간을 사는 법을 잃어버린 셈이다. 요른 릴이 줄곧 이야기하고자 하던 것이 바로 이런 삶의 양식이 아니었을까. ‘문명인들의 행복감은 물질에 의존적이고 조건적이며 피상적이다. 반면 엉뚱하면서도 순수한 북극 사내들이 느낀 행복감은 삶에 보다 밀착되어 있고 본질적이었다. 행복감의 결이 분명 달랐던 것이다.


 

할보르는 하늘에서 내려온 구릿빛 여인 마 킨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그린란드를 떠났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두 사람이 다시 문명 세계로 돌아간다면, 그들은 다시 북극에서 느꼈던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까? 또 다시 문명 세계의 규율에 영향을 받고, 여기에 익숙해져가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그린란드에는 다시 봄이 오고 북동부 항구 톰슨 곶에는 물자와 소식을 가득 실은 베슬 마리호가 들어왔다. 스스로를 좌초된 인생들이라고 부르는 북극 사내들의 세계에 여전히 커다란 행복과 평화가 깃들 수 있을까? 아직 읽지 않은 앞부분이 궁금하고, 동시에 다음 책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책 속으로]



[1] "봄은 아직 멀었다. 따라서 즐거운 일도 없었다. 여름은 자잘한 기쁨을 몰고 왔지만 황당하게도 왔는가 싶으면 그새 지나갔다. 가을도 마찬가지였다. (...) 그러니 남는 건 어둠의 시기뿐이었다. 이 시기가 오면 말 그대로 순간을 살았다. 하루가 가면 또 하루를 살고, 과거도 미래도 없이 이 순간에서 저 순간으로 이동했다."(115)

[2] "할보르, 미친 건 우리가 아니야. 오히려 우리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놈들이지. 놀랍긴 하지만 불가사의한 일은 삶에서 언제고 일어날 수 있어. 그런 걸 부정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이상해."(176)


[3] "그는 이제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과거를 돌아보지 않았고, 미래를 갈망하지 않았다. 대신 깊은 평화가 내면에 자리 잡았다."(177)

[4] "안톤에게 그해 봄은 특별한 계절이었다. 젖먹이 송아지가 똥을 싸듯 시가 쉼 없이 쏟아져 나왔다."(215)

[5] "세상에서 가장 멋진 신부님이기도 했지만, 사람을 잡아먹은 전적이 있었다."(249)

[6] "그렇게 그들은 로이비크가 썰매 가득 고철과 강철 케이블, 용접용 램프를 싣고 도착할 때까지 사랑의 시간을 살았다."(250)

[7] "할보르는 행복했다. 행복한 빛에 휘감기고 나서야 그는 자신의 과거가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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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0-07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이달상 추카!

초란공님은 허풍 1도 없으실 것 같습니다 ^ㅅ^

이하라 2022-10-07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thkang1001 2022-10-07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연휴 보내세요!

새파랑 2022-10-07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mini74 2022-10-07 21: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 이렇게 재미있는 글을 저는 왜 못 본거지요 ㅎㅎ
초란공님 축하드립니다 *^^*

그레이스 2022-10-07 2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부터가 예사롭지 않은 책
축하드려요~
초란공님~~~
 
사울 레이터 더 가까이
사울 레이터 지음, 송예슬 옮김 / 윌북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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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사진: (c)사울 레이터




평범한 일상에서 놀라운 무언가를 발견한 사람

- 사울 레이터 더 가까이

(원제: The Unseen Saul Leiter)

 


사울 레이터(사진), 마깃 어브 & 마이클 파릴로(편집/) | [윌북] (2022)

 



언젠가 뉴욕 맨해튼을 방문했던 적이 있다. 도시의 모습이 궁금하여 하루 종일 돌아다녔더랬다. 제한된 시간과 경제적인 여건 때문에 아침 6시부터 밤 12시까지 대략 18시간을, 도시의 사람들을 지켜보고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북쪽의 200번가에서 무역센터가 무너졌던 남쪽의 그라운드제로까지, 그리고 강 건너 브루클린까지 말이다. 12시가 다 되어 가던 맨해튼의 어두컴컴한 골목에서 후드 티를 입고 마주 오던 사람과 지나칠 때 등골이 서늘했던 느낌이 아직도 선명하다(일부러 이런 경험을 하진 마시길. 나는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다). 이제는 시간과 돈이 있다고 해도 이렇게 다니질 못할 테지만, 그 때는 내게 그런 절실함이 있었던 것 같다.


마천루 사이로 비치는 파란 하늘을 가로질러 떠다니던 하얀 구름들, 군데군데 영원히 계속 이어질 것 같은 도시의 보수공사 현장에서 몽글몽글 피어나던 하안 연기들, 도로 위로 아치의 일부처럼 뻗어 있던 노란 신호등 기둥과 여기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신호등, 노란 택시, 노란 백열등이 켜져 있던 집과 가게의 실내, 빨간 색의 우체통과 코카콜라 광고, 붉은 벽돌집, 차이나타운의 붉은 글씨나 가게 천막, 가끔 볼 수 있는 붉은 코트나 드레스를 입은 여인, 아일랜드와 이탈리아계 사람들이 많이 쓰던 초록색 등등. 내가 기억하던 도시의 색이 있었다. 이렇게 적고 보니 기억에 남아 있는 도시의 색은 대략 흰색, 노란색, 파란색, 빨간색, 초록색을 띠고 있었다.


이 모든 색들을 사울 레이터의 슬라이드 사진집 사울 레이터 더 가까이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다소 빛이 바랜 상태이긴 하지만 말이다. 사실 내 기억 속의 맨해튼과 여러 색들이 갑자기 떠올랐던 것은 사울 레이터의 사진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전에 출간된 사진집 사울 레이터의 모든 것영원히 사울 레이터는 이미 공개되어 있던 그의 대표작을 보여주는 도록 같은 느낌에 흑백 사진이 섞여 있어서 다소 아쉬운 감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출간된 컬러 사진집은 1만장이 넘는 슬라이드 사진 가운데 76장이 선별되어 대중에게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책 전체는 마치 레이터의 사진을 환등기에 꽂아서 그가 직접 보여주는 것처럼 구성되어 있었다. 이번 사진집은 좀 더 사진집다운 모습을 갖추어 더 마음이 간다. 사울 레이터가 생전에 친구들에게 자신의 사진을 환등기로 비추어 보여주길 좋아했다는 편집자의 글을 보니, 다른 이들도 사진집을 펼치면 환등기로 슬라이드 사진을 보는 느낌을 받을 것 같다.


지금까지 공개된 사울 레이터의 사진을 보면, 그가 깨어 있던 시간이라면 줄곧 세상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면밀히 바라보고 있었을 것 같다. 철학자들처럼 삶을 추상적으로 통찰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오감과 직관을 총 동원하여 지금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주시하고 있다는 의미에서다. 차 안에서 창밖을 보거나, 유리창 너머의 풍경이 반사된 상과 만나는 새로운 형태를 찾아낸다. 혹은 거리의 난간 뒤에서 숨죽이며 바라보았을 사진가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사울 레이터가 분수대에서 물이 솟구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양산을 든 여인이 멀리서 지나가는 장면을 목격하는 사진을 보자(98). 현상되어 마운트에 끼워진 필름을 라이트박스 위에 올려놓고 웅크린 채 루페(loupe)로 이 사진을 들여다보았을 사진가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분명 어린아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놀라워했으리라.


레이터의 사진에 남아 있는 빛바랜 뉴욕의 색은 눈 오는 길거리에서 차가 지나가는 사진(27)에도 남아 있다. 형체가 분명하진 않지만 노란색과 초록색이 있는 전경의 차와 원경의 빨간 차가, 그리고 길게 늘어진 흰 눈의 이미지만이 시간의 흐름을 알려줄 뿐이다. 이어지는 몇 장의 사진들도 마찬가지다. 거리의 붉은 리본과 노란색 차나 빨간색 글자, 어느 가을날 거리 벤치에 앉아 연인에게 키스하는, 빨간 코트를 입은 여인의 모습에서 내가 기억하던 맨해튼의 색을 찾아낼 수 있었다. 강렬하지만 오래된 코다크롬 필름 특유의 빛바랜 상태로 말이다. 20대에 입성하여 집에서 눈을 감을 때까지, 해외 전시나 강연을 제외하고는 거의 뉴욕을 벗어난 적이 없었던 레이터에게 이 지역은 익숙한 장소, 익숙한 거리였을 테다. 하지만 업으로 패션 사진을 찍던 사람의 눈이 거리로 향했을 때, 그 눈은 뻔해 보이는 일상에서 새로움을 지치지 않고 발견해나갔다.


사울 레이터 재단의 이사장이면서 이번 사진집 제작에 참여했던 마이클 파릴로는 레이터를 아주 평범한 것들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는 게 즐겁다”(67)라고 말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화가의 재능을 지니기도 했던 레이터가 나에게 일러주는 삶의 깨달음은 일상의 삶 속에 놀라움이 숨어 있다는 사실이다. 앞서 언급한 분수사진에서처럼 서로 무관한 사건, 이를테면 멀리서 양산을 들고 가는 여인의 이미지와 가까운 곳에서 솟구쳐 나오는 분수사이의 우발적인 관계로부터 새로움을 발견하듯 말이다. 하지만 분수사진은 전통적인 흑백 사진의 문법이 강하게 엿보인다.


여기에 이라는 요소가 더해진다. 레이터의 사진을 흑백으로 바꾸어보면, 대부분의 사진에서 느껴지는 발견의 즐거움이나 잔잔한 감흥을 느끼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 반면 나와는 무관한 대상들을 찍었지만 오래된 슬라이드 필름 특유의 빛바랜 사진들은 내 기억 속에 숨어 있던 아픔의 기억이나 상처를 보여주기도 한다. 바로 이 작용이 레이터의 사진과 내가 연결되고 내가 비로소 그의 사진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 색은 추상적인 요소다. 누군가에겐 우리의 유한한 삶의 덧없음을 일깨워줄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이에겐 흑백사진의 명암 변화에 버금가는 사진의 정서와 분위기를 더해주며 컬러 사진을 완결하기도 한다. 내겐 사울 레이터의 아름다운 컬러 사진들이 바로 그렇다.


물론 이 사진집은 사울 레이터가 직접 편집에 참여하지 못해 아쉬운 감은 있다. 하지만 그가 우선 골라놓은 사진 중에서 사진가를 오랫동안 잘 알고 지내던 지인들이 선별한 것이기에 같은 사진을 다른 방식으로 보여줄 뿐이다. 그 차이가 크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더라도 독자가 레이터의 사진으로부터 받는 즐거움과 감동이 덜하진 않을 것이다. 문자텍스트로 이루어진 다른 책들의 운명처럼 원고 혹은 책이 작가의 손을 떠난 이상, 이를 즐기고, 해석하고 평가하는 일은 마찬가지로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이것이 레이터가 대중들에게 자신의 사진에 대한 설명이나 분석하는 일을 거절했던 이유일 테다.


10여 년 전에 사울 레이터를 알지 못했지만, 그의 말년에 그가 살던 장소, 그와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도시 거리를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찾고 있던 내 모습을 떠올려보면 신기한 느낌이 든다. 어디로 가야할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막막하고 방황했던 시절, 그의 존재를 알았다면 필름 카메라를 메고 한번쯤 그를 찾아가보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레이터는 장난기 어린 웃음을 띠고 대뜸 이렇게 말해줄 것 같다. ‘나도 필름카메라를 꽤 오래 썼지. 지금은 디지털 카메라로 써. 디카로 찍기 시작한지 한 10년쯤 되었을 거야. 필름카메라로 찍고 결과물을 볼 때가 더 재미있긴 했었어. 필름카메라를 쓰고 있다면 익숙한 주변에서 계속 찍어 보라구. 시간은 사진가의 편이니까!*’(마지막 문장은 사울 레이터가 한 말(98)에서 인용함.)






[번역에 관한 사항]

121면에 사울 레이터가 <에스콰이어> 작업용으로 촬영한 슬라이드 500여 장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이어서 재즈 연주자 찰리 파커에 관한 기사 새의 발라드(Ballad of the Bird, 1957)’를 언급하는데, 아마 번역가는 찰리 파커의 별명이 (the Bird)’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 같지만 여기에 주석을 더해주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the Bird'를 단순히 로 번역했는지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대신 찰리라고 번역해두어도 좋지 않았을까 싶다. 단순히 라고 번역을 해두면 이 가 찰리 파커와 무슨 상관인지 그 뉘앙스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번역자와 편집자의 결정일 테다. 아쉬운 것은 모든 독자가 이런 점을 알지 못할 테니, 주석을 달아 주는 것이 더 좋았을 것 같다.

 

[1] "우리는 색채의 세상에서, 색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67)

[2] "어째서 색을 홀대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색은 삶의 중요한 구성 요소이며, 사진에서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합니다."(67)
- 2002년 뉴욕 유대인 박물관 강연에서 사울 레이터가 ‘색’에 대해 한 말

[3] "아주 평범한 것들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는 게 즐겁다."(67)
- 내가 사울 레이터의 사진을 좋아하는 이유

[4] "컬러 슬라이드는 벽에 영사해 볼 수도 있고, 인화해 볼 수도 있어요. 네거티브 필름과는 다르죠. 라이트테이블에 올려만 놓아도 그 고유하고 특별한 아름다움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인 컬러 슬라이드는 라이트테이블 위에 올리는 순간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입니다."(68)

[5]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는 그 나름의 고귀함이 있습니다."(68)
- 아마도 이 말의 진의는 사진의 본질 외에 사진을 꾸미려고 의도하거나 감상자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주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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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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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국 속에서도 다시 관계를 회복하는 인간의 모습

-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를 읽고


 

우리는 지구라는 환경에 맞추어 태어나 살아간다. 지역이나 시대마다 조금씩 다른 환경에서 각자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다. 다만 세계에 대한 우리의 앎은 지구라는 환경에 한해 유효하다.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는 수많은 지식과 믿음은 지구를 벗어나면 곧바로 도전을 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는 세계에 대한 앎이 끊임없이 도전을 받고 전진과 후퇴를 반복한 역사이기도 하다. 네덜란드 작가 벵하민 라바투트의 단편 소설집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는 과학 분야 지식의 거장들이 새로운 발견으로 기존의 앎이 도전을 받았던 순간, 무지(無知)의 지()와 마주했던 순간을 이야기한다. 만약 당신이 평생 믿어온 신념과 지식체계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음을 깨닫는다면 어떻겠는가?


새벽녘에 슈바르츠실트는 자신이 파국을 발견한 것 같다고 말했다.”(70) 슈바르츠실트 특이점에서 물리학자 카를 슈바르츠실트는 군병원에서 죽음을 앞두고 있었지만, 전장에서 부상을 입고 같은 병원에서 회복 중이던 젊은 수학자 리하르트 쿠란트와 만나 밤새 대화를 나누다가 이런 고백을 한다. 슈바르츠실트는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에 대한 정확한 답을 처음 얻은 인물이다. 그가 쿠란트에게 파국을 발견했다고 말했을 때, 이 파국은 특이점이라는 이름으로 일반화될 수 있는 블랙홀의 존재를 이론적으로 계산해냈음을 의미했다. 빛마저도 탈출할 수 없는 이 영역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결코 정의되지 않았다. 이것이 위대한 천문학자, 수학자이기도 했던 슈바르츠실트가 맹점과도 같은 이 특이점의 존재를 두려워했던 이유다. 이 지점에선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법칙도, 나아가 물리학도 무너지기 때문이었다.


슈바르츠실트에게 특이점 발견이란 지적 파국의 순간이 있었다면, 20세기 초의 수학자 알렉산더 그로텐디크에게는 심장의 심장이라고 부른 실체가 있었다. 또 양자역학의 기초를 놓은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순수한 수학만으로 행렬에 기반을 둔 양자 역학을 구축했다. 슈뢰딩거의 양자 역학이 파동성에 토대를 두고 있는 반면, 하이젠베르크의 체계는 입자성에 토대를 두었다. 그동안 완벽하게 들어맞는 지식체계였던 뉴턴역학이 원자의 세계에서 와르르 무너질 위기에 놓였는데, 이 파국의 한 가운데에 자신이 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 새로운 분야의 토대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고 여기게 되어 괴로워했다. 슈바르츠실트나 그로텐디크, 그리고 하이젠베르크 모두 자신들이 발견한 모순들에 두려움을 느꼈다. 무엇보다 더 이상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해보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누군가의 신념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파국의 순간에 사람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인슈타인은 슈바르츠실트의 특이점이 존재하지 않음을 입증하기 위해 자신이 발견한 시공간 구조의 균열을 보수하고 우주를 파국적 중력 붕괴로부터 보호하려 했다. 화학자 프리츠 하버가 감독한 독가스 공격으로 전장에서 많은 군인들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부인 이머바르는 분노와 절망을 안고 자살했다. 그녀 역시 화학박사였기에 남편이 관여한 일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유대인이었던 하버가 알아낸 지식이 절멸 수용소의 수많은 유대인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데 활용되었고, 그가 개발한 질소 고정법이 수백만 명을 죽인 화약과 폭약 제조에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또 하나의 파국이었다. 반면 같은 기술이 비료 생산에 적용되어 수많은 이들의 굶주림을 해결하고 세계 인구 증가에 기여했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나아가 슈바르츠실트가 물질이 낳을 수 있는 파국이 인간의 정신과도 관계가 있을지 자문하는 대목은 자뭇 섬뜩하다. “인간의지가 충분히 집중되면, 수백만 명의 정신이 하나의 정신 공간에 압축되어 하나의 목적에 동원되면 특이점에 비길 만한 일이 벌어질까?.”(71) 이러한 장면에 대해 저자는 마지막 단편 밤의 정원사에서 화자의 입을 빌어 독자에게 메시지를 건네는 듯하다. 하나는 과학자들조차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레몬 나무가 죽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다. 정원사의 말에 따르면, 레몬 나무는 무수한 열매가 초과 중량으로 한꺼번에 익어 가지가 부러지고 죽어간다. 우리의 앎에 비판적인 성찰이 결여되어 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파국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세계에 대한 믿음이 굳건할 때, 우리는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이 믿음이 붕괴되는 파국의 순간에 우리는 세계와의 연대가 끊어지고 고립감을 느낄 것이다. 술집에 있던 한 사람이 하이젠베르크에게 말해봐요, 교수양반. 이 모든 광기는 어디서 시작됐지요? 언제부터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춘 겁니까?”(211)라고 물었던 것은, 우리가 세계와의 관계가 끊어질 때 광기가 시작된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 같다. 특이점처럼 그 이유를 결코 이해할 수도, 정의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수학자 그로텐디크가 수학을 하는 것은 사랑을 나누는 것과 같다”(99)고 말한 것처럼, 파국을 둘러싼 상황은 사랑과 관계의 경우에도 다를 바 없을 법하다. 나와 세계, 나와 너 사이의 관계에서 때론 불가피하게 파국을 맞는다. 우리가 이러한 파국을 두려워하여 세계와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중단한다면 그야말로 관계회복의 가능성은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사랑과 관계 회복의 본질에 대한 실마리를 숨은 변수처럼 감춰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자신을 아낌없이 불태우다 마주한 파국 속에서도 다시 사랑하고, 관계 또는 삶을 회복하는 인간의 모습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인간에게 주어진 고유한 조건은 아닐까.

 

 

 

 

 

 

[1] "새벽녘에 슈바르츠실트는 자신이 파국을 발견한 것 같다고 말했다."(70)

"진짜 두려운 것은 특이점이 맹점이며 기본적으로 불가지라는 사실이라고 그는 말했다."(70)

[2] "빛은 특이점에서 결코 탈출할 수 없으므로 우리의 눈은 특이점을 볼 수 없다. 우리의 정신 또한 특이점을 이해할 수 없다. 특이점에서는 일반상대성 법칙이 여지없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물리학은 아무 의미도 없어진다."(71)

[3] "그로텐디크는 다른 어떤 말로도 묘사할 수 없다. 그는 매혹적이면서도 두려웠는데, 그것은 이 남자가 어떤 인간과도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93)
- 수학자 그로텐디크 자신이 바로 정의되지 않는 특이점같은 존재가 아닐까.


[4] "내가 추구하는 총체적 이해로부터 어떤 새로운 참상이 벌어질까? 인류가 심장의 심장에 도달하면 무슨 짓을 저지르게 될까?"(97)

[5] "하이젠베르크는 이 분야의 토대에 근본적 결함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 때문에 괴로워했다. 그 결함이란 아이작 뉴턴의 시대 이래로 거시 세계에 그토록 완벽하게 들어맞던 법칙들이 원자 내부에만 적용할라치면 와르르 무너진다는 사실이었다."(122)

[6] "그(하이젠베르크)는 비유를 전혀 동원하지 않고 오직 순수한 수학만 이용하여 뉴턴이 태양계를 묘사한 것처럼 아원자 세계를 묘사했다."(138)

[7] "드 브로이는 파동 함수를 존재의 확률 밀도로 번역했다. 흐릿한 이미지, 희미한 존재, 확산하고 막연한 것. 이 세상 것이 아닌 무언가의 모호한 윤곽."(206)

[8] "하나를 더 정확히 파악할수록 다른 하나는 더 불확실해졌다."(215)
-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에 대한 서술.

"양자의 실체를 ‘보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양자가 단일한 정체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단순한 이유에서다. 양자의 성질들 중 하나를 규명하면 다른 것이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217)

[9] "과학자들조차 더는 세계를 이용하지 못한다."(252)

"우리는 양자역학을 이용할 줄 알며 양자역학은 마치 신기한 기적처럼 작동하지만, 이것을 실제로 이해하는 사람은 산 자와 죽은 자를 막론하고 단 한 명도 없다."(253)
-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이 말했을 법한 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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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비행
리처드 도킨스 지음, 야나 렌초바 그림, 이한음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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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 제약을 극복하고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간 도약 

- 마법의 비행


(원제) Flights of Fancy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지음 | 야나 렌초바(Jana Lenzova) 그림

이한음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



 

지난 5(202285)에 날아올랐던 대한민국 최초의 달 궤도 탐사선 다누리가 순항중이라고 한다. 달에 도착하면 달 궤도를 돌면서 탐사활동을 하게 된다. 다누리를 탑재한 로켓이 하늘로 솟구치는 장면에서 어린 시절 할머니의 흑백텔레비전을 통해 보았던 우주왕복선 콜럼비아호의 비상 장면을 떠올렸다. 꽤나 오랫동안 나를 사로잡았던 장면이었다. 마침 이번에 생물학자이자 저술가 리처드 도킨스가의 마법의 비행을 읽으면서, 그가 비행을 중력으로부터 새로운 차원으로의 탈출이라고 언급한 대목이 남다르게 다가왔다.

 


아프리카 케냐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생물학자로서, 도킨스는 수많은 육상 동물뿐만 하늘을 나는 동물들(, 곤충 등)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을 간직했을 것이다. 이번에 출간된 마법의 비행은 비행에 대한 저자의 호기심과 설레임이 담긴 책이 아닐까하는 인상을 받았다. 창조론을 강하게 비판하고 진화론을 강력하게 옹호해온 과학자로서, 그에게 이번 책은 비행이라는 키워드 아래 동물의 비행과 인간이 쌓아 올린 비행으로의 도전 과정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가 이 책을 엔지니어이자 테슬라 자동차의 창업자, 민간우주기업 스페이스 X의 창업자인 일론 머스크에게 헌정한 것도 어쩌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처음 던지는 질문은 생물들에게 비행이 필요한 이유다. 특히 진화적 관점에서 비행이 지니는 이점이 무엇이기에 그토록 많은 생물들이 날아다니게 된 것일까. 우선 주목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생존을 위해 이주할 필요성이 있었다는 점이다. 지구는 자전축이 공전면에 대해 일정한 각도로 기울어져 자전하면서 태양 주위를 돈다. 이것이 주기적인 계절의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말은 지구상의 지역에 따라 거주 동물의 서식 환경이 변화한다는 의미다. 이 때 비행은 생물 종의 생존을 보장하는 해결사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북국제비갈매기의 사례를 보자. 이 새는 두 달 간 북극권에서 남극권 사이를 오가며 매년 겨울 없이 여름만 두 번 보낸다고 한다. 날개가 있다는 것따라서 비행은 특정 생물이 환경 변화에 대해 융통성 있게 대응하도록 해주었다.

 


이와 달리 어느 지역 환경이 좋아서 생물이 이주할 필요가 없다면 어떨까? 특히 천적이 없고 이동할 필요가 없는 환경에서 살았던 새는 날아다닐 필요가 없게 된다고 도킨스는 말한다. 한 사례로, 날개가 있지만 날 필요가 없게 된모리셔스 섬의 도도를 떠올려볼 수 있다. 이 새는 비둘기과의 대형조류로 유럽에서 온 선원들에 의해 17세기에 멸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도와 마찬가지로 날 필요가 없게 된 새에는 날개가 퇴화해버린 뉴질랜드의 국조 키위, 아프리가의 타조, 남아메리카의 레아, 호주의 에뮤, 지금은 멸종해버린 뉴질랜드의 모아, 그리고 역시 멸종한 마다가스카르의 코끼리새가 있다. 도도를 제외하고 지금 언급한 새들은 모두 날지 못하지만 튼튼한 다리로 달리기를 잘하는 주금류(ratite, 走禽類)에 속한다.


 

여기에서 다시 궁금해지는 것은 북극제비갈매기와 도도가 모두 날개를 지니고 있지만, 어느 종은 날개의 기능을 다 하지만 또 다른 종에게 날개의 기능이 퇴화되는 이유다. 비둘기과에 속한다는 도도의 선조가 날 수 있었다면, 멸종하던 시기의 도도는 왜 날지 못하게 되었을까. 그냥 나는 기능을 유지하면 되는 것 아닐까싶은데 말이다. 저자는 이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큰 의문을 던지고 있다. 도킨스에 따르면, 비행이라는 것이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진화적 관점에서 생물이 비행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아마도 이 점을 짚고 가보겠다는 것이 저자의 의도였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비행은 생물들에게 보기보다 많은 것을 요구하는 기능이다. 생물이 이 기능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가 만만치 않다. 깃털처럼 가벼운 벌새의 경우, 정지비행을 비롯한 정교한 비행 기술을 펼치기 위해서 몸집에 비해 매우 큰 용골돌기(가슴뼈)와 잘 발달된 날개근육을 필요로 한다. 반면 날개가 있는 여왕개미나 흰 개미 여왕은 평생 한 번 하는 짝짓기 후 자신의 날개를 떼어내는 행동을 한다(64, 67). 이들에게 날개가 얼마나 거추장스러운 도구일지를 보여준다. 새뿐만 아니라 말벌도 비행을 위한 날갯짓에 엄청난 당을 태워야 한다. 게다가, 튼튼한 날개를 자라게 하고 유지하는 데에는 결국 상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65). 따라서 모리셔스 섬의 도도처럼 날개가 그 기능을 잃어버리게 된 이유도, 생존을 위해 날아야 할 필요가 없는 환경에서는 비행에 필요한 엄청난 에너지를 절약하여 이를 번식과 종족 보존에 더 투자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곧 종의 생존 과정에는 한정된 자원과 생존을 위해 이 자원을 사용한 무기 장착 과정 사이의 경제학이 강력하게 작용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가 진화는 기회주의적이다. 새롭게 무언가를 만들어 내기보다 기존의 것을 땜질해 쓰곤 한다”(114)라고 한 이유를 검토해볼 수 있다. 예컨대, 칼새는 알을 낳고 품을 때만 지상에 내려오는 반면 짝찟기를 비롯하여 일생 대부분을 하늘에서 보낸다. 이렇게 에너지가 훨씬 많이 드는 비행을 칼새는 극단적으로 밀고 나갔다. 반면, 갈비뼈가 양옆으로 나온 구조를 활공에 사용하는 날도마뱀이나(290) 갈비뼈를 양옆으로 내밀어 몸 전체를 납작하게 만들고 30미터를 활공하는 날뱀(309), 가슴의 겉뼈대가 자라 갖추어진 곤충의 날개(183)처럼 생물은 생존에 필요한 몸의 특정 기능을 새로 만들어내기 보다는 기존의 해부학적 구조를 변형 또는 보완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진화론의 관점에서 모든 생물은 환경에 적응하고자 하지만, 조류의 깃털이 파충류의 비늘에서 변형된 것(119)이라는 설명은 여러 생물들이 자연의 제약 조건 아래에서 비행을 향해 보여주는 진화 과정(수렴 진화)을 잘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특정 개체, 혹은 종이 갖추게 된 생존전략의 실패는 곧 죽음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생물들은 거창하게 생존을 위한 장치부터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설계를 조금씩 변형해가는 방식을 취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여러 변이를 통해 생존 확률을 확보하는 것은 물론이다. 물론 다양성을 갖추게 되는 변이의 과정이 이를 위한 목적을 갖추고 여기에 따른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양성을 갖춘 변이를 통해 특정 환경에서 생존에 유리한 개체들이 결과적으로남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환경이 주는 선택압과 자신이 갖고 있는 자원을 총동원하여 필요한 기능을 갖추되, 이를 이루기 위한 균형점을 찾는 융통성이 필요하게 된다. 이처럼 진화의 관점에서 생물의 비행은 생존에 필요한 경우 몸을 변형시켜서라도 갖추게 되지만, 어떤 이유로 필요 없어지면 곧바로 퇴화해버리는 값비싼 기능이었던 셈이다.


 

도킨스는 진화론의 옹호자로서, 그리고 무신론자로서 줄곧 창조론자들과 논쟁을 해왔을 뿐만 아니라 동료 과학자들과의 비판을 받기도 하고 논쟁을 해온 과학자다. 자신의 대표작 이기적 유전자이나 만들어진 신 비롯한 여러 작업을 통해 거침없고 신랄한 표현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면밀한 관찰자로서 도킨스의 섬세한 설명이 돋보이는 부분도 만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인간의 동력 비행과 작동방식을 다룬 장에서 비행기 날개가 기류와 만나는 각도가 커져 비행기의 속도와 안정성이 크게 떨어지는 현상(실속)을 언급한 대목이 나온다. 그는 왜가리나 백로 같은 큰 새가 착륙할 때 일부러 실속(통제된 실속)을 일으킨다고 언급하는데, 이 새들이 내려앉을 때 뒤쪽 깃털이 위로 솟아오르는 것은 바로 이 실속 때문이라는 것이다. 항공기 전문가였다면, 새의 이런 미묘한 순간을 포착하고 그 이유를 항공기 날개의 구조와 연관 지어 이처럼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이런 부분은 도킨스의 섬세한 설명과 글쓰기가 빛을 발하는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마법의 비행에서 다소 아쉬운 점 몇 가지가 있다. 예를 들면, 앞부분에서 했던 내용이 뒤에서 여러 번 중복되어 설명되고 있어서 짜임새가 떨어진다는 느낌을 주는 부분이 나온다. 또 뒤로 갈수록 앞에서 유지되던 글의 힘과 집중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다른 아쉬운 점은 이 책에 참고도서 목록이 없다는 점이다. 이 책이 애초에 청소년 대상으로 집필된 책이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외국의 교양과학서에 빠지지 않는 참고도서 목록이 원서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참고도서 목록이 없다는 것은, 독자가 저자의 주장이나 근거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싶을 때 활용할 수 있는 정보가 주어지지 않고 있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이 책은 인간을 포함한 생물의 비행이라는 기능에 도달하고자 했던 노력을 종합하며 흥미 있게 전달한다. 생물학자의 관점에서 비행을 둘러싼 자연의 제약과 생존 전략 사이의 균형을 찾아온 자연의 사례를 흥미롭게 제시했다. 말벌이나 여왕개미와 같은 곤충의 날개나 흰 개미 여왕의 날개, 날다람쥐의 활공을 돕는 비막이나 박쥐의 날개 사례는 서로 독자적으로 몸의 일부 구조를 변형 또는 보완하여 비행이라는 기능을 갖춘 자연의 수렴진화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에게 달 궤도 탐사선의 비상이 갖는 의미처럼, 인류에게 비행은 중력을 극복하여 인류가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간 도약을 의미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이 인간의 이성에 기반 한 과학 활동을 통해 가능했다는 점이었다. 이에 저자는 나는 과학 자체를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영웅적인 비행이라고 여긴다”(322)고 과학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며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수정 건의]

(41) ‘태양을 기준으로 을 수 없다 을 수 없다

(70) “한편 비둘기의 몸집은 점점 커졌다.” 도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비둘기를 언급하는데, 이 부분은 도도가 비둘기(pigeon & dove)를 포함하는 과(family)에 속하기 때문에 도킨스가 도도를 the pigeon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역주를 추가적으로 달지 않는 한, ‘비둘기를 그냥 도도라고 번역하는 것이 혼동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1] "외딴섬은 대체로 포유류가 아니라 조류의 세상이다."(54)
- 모리셔스 섬의 도도와 이웃 섬의 날지 못하는 새(특히 주금류)에 대한 언급을 하며

[2] "진화는 기회주의적이다. 새롭게 무언가를 만들어 내기보다 기존의 것을 땜질해 쓰곤 한다."(114)

"진화는 기계 설계자처럼 처음부터 새로 그리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설계를 조금씩 하나하나 변형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각 변형 단계에서 번식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살아남아야 한다."(278)

[3] "깃털은 세계의 경이 중 하나다. 공중에 띄울 수 있을 만치 튼튼하면서 뼈보다 딱딱하지 않은 경이로운 장치다."(116)

[4] "복잡한 기관과 행동은 많은 작은 구성 요소 하나하나가 단순한 규칙을 따를 때 출현한다. 즉, 복잡성은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서 출현한다."(193)
- 찌르레기들의 군무와 창발(emergence)의 원리에 대한 언급.

[5] "나는 과학 자체를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영웅적인 비행이라고 여긴다."(322)

"비행이 중력으로부터 세 번째 차원으로의 탈출인 것처럼, 과학은 일상생활의 평범함으로부터 나선을 그리면서 상상력이 점점 희박해지는 높이까지 탈출하는 것이다."(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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