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술을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는 작은 사이다 페트병을 홀짝거리면서 자주 Pet Shop Boys의 음악을 듣는다. (그러니 얼굴이 빨개진 채로 귀에 이어폰을 꽂고, 사이다 병나발을 불며, NewYork City Boy~를 흥얼거리는 작자가 있으면 저라고 생각하시길.) 가볍고, 쉽고, 밝다. 그것만이면 충분하다. 좀 다른 얘기겠지만, 이 Pet Shop Boys의 음악들은 어느 소설의 한 부분을 늘 연상시킨다. 그 부분은 그 소설에서 그렇게 중요한 부분도 아니고, 그렇게 공들여 쓰여진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늘 그 부분이 생각나니 신기한 일이다. 강석경의 <숲속의 방>의 한 대목.
옆에선 라디오 소리가 들려 흘끗 보니 남자아이가 트랜지스터를 꺼내 귀에 대고 있었다. 막 다섯 시를 알리면서 음악이 울려나왔다.
"시작할 땐 언제나 밝은 음악이 나와요."
그의 표정도 음악처럼 밝았다. 긴장이 풀리는지 갑자기 눈꺼풀이 무거워지면서 내 포근한 잠자리가 그리웠다. 이젠 집에 돌아가야 했다. 나는 눈을 비비곤 웃음지었다.
"여태 같이 있어 주어서 고마워."
"누나 같은 사람이 많으면 좋겠어요. 또 만날 수 있을까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으리라.
새벽 다섯 시에 라디오가 처음 시작하면 흘러나오는 밝은 음악. 나에게는 그게 Pet Shop Boys의 음악들이다. 새벽 다섯 시, 꿈이 깨어지는 시각,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시각, 아마도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시각. 그리고 술이 깨야만 하는 시각. 술이 깨면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이 강석경의 <숲속의 방>은 고등학교 때 교지편집부 담당 선생님이 단합MT 때 토론하자며 읽어오라던 책이다. 교지편집과 <숲속의 방>이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서 꽤나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토론은 이루어졌냐고? 물론 예상대로 나 외에 아무도 그 소설을 읽어오지 않았고 <숲속의 방>에 대한 토론은 숲속의 방에서 몰래 마시는 술로 대체되었다. 하긴 MT에서 무슨 독서토론이랴. 나는 단지 그 연상작용이 이상스러울 뿐이다. 술-Pet Shop Boys-숲속의 방-교지편집부.
2.
가끔 술을 같이 마시곤 하는 선배는 말버릇이 하나 있다. "중요한 게 뭐냐면..."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은 그 중요한 얘기는 단 몇 마디로 끝나버린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두 시간이 넘게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고 떠들었으면서 "사실 중요한 게 뭐냐면..."으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단 몇 마디로 끝내 버리다니. 그렇다면 정작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는 길게 하고, 중요한 이야기는 짧게 마쳐버리는 셈이니, 그것 참 이상한 일이다.
라고 그 선배가 사주는 소주와 오뎅탕과 꽁치구이 같은 것을 마주 앉아 먹으면서 생각하는 것도 참 송구한 일이긴 하나, 문득 다른 생각들이 들었다. 어쩌면 이 말버릇이라는 것에는 자신이 결코 해낼 수 없는 것, 혹은 자신의 아킬레스건 같은 것이 담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예전 회사(라고 해두자)의 모 동료 하나는 거래처와의 통화시에 자주 "솔직히 말하면요..."라는 말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 뒤에는 늘 그 전화통화에서 가장 솔직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나왔다. 그러니까 "솔직히 말하면요..."라는 그의 말버릇은 이제부터 거짓말을 좀 할께요,라는 일종의 선전포고와 같은 것이었고, 어느쪽 펜스로 공을 넘겨버릴 것이라고 투수에게 호언장담하는 예고홈런과 같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내 말버릇은 어떤 게 있을까. 말버릇은 정확히 잘 모르겠지만, 글에는 종종 그런 말들을 쓰는 것 같다. "음..뭐.." 같은 것. 뭐, 라는 말에 붙어서 가장 어색하지 않은 말은 '어때'나 '괜찮다'와 같은 말들이다. 뭐 어때, 뭐 괜찮아. 그러니까 사실은 나는 괜찮지 않은 것이고, 계속 신경이 쓰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3.
신경이 쓰인다는 것은 예를 들어 일종의 강박증 같은 것이다. 가벼운 강박증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데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라고 누군가가 말했지만, 내 강박증이 그런 필수요소의 범주에 들어가는지, 아니면 그 범주를 벗어나, 일상생활을 방해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물론 가끔 그런 강박증이 강하게 인지되는 때가 있다. 예를 들어 CD 정리를 할 때. 나는 음악 CD를 뮤지션의 ABC, 혹은 가나다 순서로 놓기 때문에 새 CD를 사게 되면, 다시 하나하나 배열을 맞춰야 한다. 그것은 어지간히 귀찮은 일인데, 왜냐하면 CD를 일일이 빼서 다시 꽂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리하다가 가끔 생각이 멈추기도 한다. Verve가 그냥 Verve더라, 아니면 The Verve더라..
그것은 온라인 상에 글을 쓸 때도 묘하게 발휘되는 것 같다. 나는 퇴고하는 것을 어지간히 귀찮아해서, 한번 쭉 읽어보고 눈에 보이는 몇 가지를 고친 후 그냥 올려버리는 편인데, 그러다보니 계속 어딘가에서 오타들, 잘못된 맞춤법들이 튀어나온다. 그래서 일단 글을 올려놓고 매번 수정 버튼을 클릭해서 창을 띄운 후 오타를 고치고, 맞춤법을 바로잡고는 한다. (물론 내 맞춤법 실력이 좋은 편이 아니어서, 그 수정작업은 완벽하지 않으며, 계속 후속작업들을 동반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예전 글들에도 적용된다는 것. 가끔 예전에 썼던 리뷰들을 읽어보고는 하는데, 그 때마다 새로운 오타와 맞춤법들이 발견되어 나를 괴롭히곤 한다. 물론 그것을 이제와서 고쳐야 할 이유는 없다. 2009년에 썼던 글을 이제 누가 볼 것인가. 그러나 그 오타와 맞춤법은 화면상에서 점점 확대되어 기어이 내 손목을 붙들고, 수정 버튼을 누르게 만든다. 왜 오타들은 늘 뒤늦게 발견되는지. 물론 가장 고마운 것은 뒤늦은 수정 시에도 예전에 글을 올렸던 시간이 그대로 보존된다는 사실이다.
4.
이러한 강박증은 예를 들어 무엇인가를 요리할 때도 그 빛을 어느정도는 발하는 듯 하다. 뭐 요리라고 해도 거창한 것을 하는 것은 아니고, 끽 해봐야 간단한 반찬 같은 것들이지만, 그 강박증은 이상한 지점에서 발휘가 된다. 나는 레시피 요리의 신봉자라 항상 아주 간단한 반찬을 할 때도, 인터넷에 널려있는 수많은 레시피들을 참고하는 편이다. 그런데 레시피에서 가끔 이상한 요구들을 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계란찜을 한다고 해보자. 갑자기 어떤 레시피에서 계란을 풀고 그 액을 체에 걸러야 한다는 일반적이지 않은 요구를 한다. 물론 나는 그 요구에 따를 마음이 없으며, 더군다나 체도 없다. 그렇다면 아마도 그 부분을 건너뛰고 다음으로 넘어가면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강박증은 이때부터 슬슬 시작된다. 그 레시피가 미심쩍어진 나는 다른 레시피를 찾기 시작한다. 물론 레시피는 얼마든지 있다. 새로운 레시피를 발견했다. 이 레시피는 계란을 풀 때 체는 커녕, 거품기 대신에 과감히 숟가락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는 아주 마음에 드는 레시피다. 그런데 이 단계를 넘어가니 또 난관이 생긴다. 이 레시피는 계란을 푼 다음 거기에 다시마를 삶은 물을 섞을 것을 주장한다. 오 마이 갓. 아니 계란도 숟가락으로 푼 주제에 무슨 다시마 삶은 물이람. 다시 레시피를 찾는다. 이번에는 레시피를 찾는 조건이 좀 복잡해졌다. 체와 거품기도 없어야 하고, 다시마 삶은 물도 없어야 한다. 몇 십분을 찾은 끝에 용케 새로운 레시피 발견. 그리고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이번에는...
에라, 계란후라이나 먹자.
5.
그래도 알라딘이니까 책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그래서 시작은 강석경의 <숲속의 방>으로 시작했건만), 뜬금없이 요리 이야기와 급기야는 계란후라이로 빠지고 말았다. 다시 책 얘기로 돌아오자. 오늘 저녁부터 알라딘 중고 서점에서 충동구매한 엘러리 퀸의 <그리스 관 미스터리>를 읽고 있다. 이런 본격 추리소설을 읽는 것은 오랜만이다. 책도 옛날 느낌이 나고, 한 때 셜록홈즈니 미스 마플이니 에르큘 포와로니 하는 것을 즐겨 읽었던 아주 오래전이 생각이 난다. 읽은 것은 아직 초반부까지인데, 여러 등장인물에 대한 간단한 스케치들이 끝나고 사건이 본격적으로 머리를 들려는 찰나, 그러니까 엘러리 퀸이 등장인물들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에 지하철은 목적지에 도착했고, 나는 책을 집어서 가방에 넣고는 술을 마시러 갔다.
다만 아직까지는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서 머리가 복잡해지고 있다. 아마도 읽는이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어 추리를 어렵게 하려는 작가의 심산이겠지만(등장인물이 많아질수록 그만큼 범인을 맞출 확률은 낮아질테니), 이런 류의 책을 오랜만에 보다보니 책 앞의 나오는 사람들 목록과 저택 평면도만 보아도 머리가 복잡해진다. 사촌이니 집사니 가정부니, 갤러리 관리인이니 주치의니 이웃 사람이니 한명한명씩 내가 누구입니다, 라고 등장할 때마다 등장인물 엄청 나오는 사극을 보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그 때마다 맥이 딱딱 끊겨버리고 만다. (사실 개인적으로 대하사극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하사극에는 꼭 누군가 한 명 등장할 때마다 그 밑에 자막-그러니까 간단한 인물소개가 붙는데, 이것을 볼 때마다 왠지 몰입감이 뚝뚝 떨어진다. 이거 드라마야, 다큐야.) 물론 아직 초반이니까 그럴테지. 그리고 나올만한 양반도 어느정도 다 나온듯 하고.
이왕 시작한 김에 책 얘기를 조금 더하면, 이번에 영화와 관련된 책을 한두권 구입할까 생각 중이다. 갑자기 어떤 책이 흥미를 끌었다기 보다는 그저 단지 메일로 날아온 예술도서 관련 이벤트를 보고 든 생각이다. 이럴 때가 가장 고민이고 동시에 가장 위험하다. 책과 수중의 돈과 이벤트 금액을 놓고 벌이는 삼각의 저울질. 저울의 균형을 맞춰보려 하지만, 저울은 늘 불균형하고, 저울질하는 사이에 책을 읽고 얻게 될 마음의 양식 따위는 이미 하늘 저 멀리 어딘가로 날아가버린다. 그래도 한 권은 사야지.
6.
그러니까 다시 책에서 영화얘기. 딴 건 몰라도 이번 주 개봉하는 <두 개의 문>은 봐야지 싶다. 지난 용산참사를 비교적 객관적인 시선에서 다루었다고 하는 다큐다. 그러므로 영화를 본 뒤에는 '무엇이' 객관적인지, '어떻게' 객관적인지, 혹은 '객관적'이라는 것이 가능한지도 물어야만 할 것이다. 물론 이 영화를 본다고 해서 (나의) 무엇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거나, 내가 무엇인가 좋은 방향으로 조금 나아갔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의 영화가 한 인간(의 행동)을 바꾸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그것은 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동시에 완전히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영화를 보지 않았으면 나는 아마도 훨씬 나쁜 인간이 되었을 것이라는, 나에 국한된 사실 뿐이다. 물론 이는 이 영화 <두 개의 문>을 놓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저 '영화'라는 것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이다.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본 그저 몇 편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영화들을 보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나는 내가 예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안좋은 인간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자신의 예상이라는 것은 늘 현재의 자신이라는 것의 범주, 혹은 한계 안에 들어있으므로 장담할 수는 없다.) 내가 영화에 감사하는 점은 단지 그 뿐이다.
7.
조금 더 버텨서 유로게임을 봐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방금 오늘은 유로게임이 없는 날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니 글을 더 연장할 이유는 없다. 쉐브첸코의 국가대표의 마지막 게임은 그렇게 되어서는 아니되었다. 첼시로 이적한 후 그가 보여준 모습들은 상당히 실망스러웠지만, 그래도 나는 그의 국가대표로서의 마지막 게임이 그런 게임이었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TOP밴드도 그렇고, LG도 그렇고, 내가 응원하는 팀은 왜 늘상 그 모양인지. 그러니 역레발. 잉글랜드 우승에 한표를 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