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제임스 - 문명의 한복판에서 만난 코스모폴리탄 클래식 클라우드 32
김사과 지음 / arte(아르테) / 202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뉴욕 맨해튼에서 태어난 미국 작가지만 평생 미국보다 런던에서 오랫동안 살며 작품을 많이 썼던 헨리 제임스. 그는 미국의 시민으로 태어났다. 미국의 독립전쟁 직후 아일랜드에서 이주해와 큰 부자가 된 조부 윌리엄 제임스 덕택에 아버지 헨리 제임스 시니어와 손자인 헨리 제임스까지 큰돈을 물려받아 생활하는 데 별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이 책 『헨리 제임스』에는 할아버지가 물려준 재산은 300만 달러(현재 가치로 9,000억 원)에 이른다. 아버지 헨리 제임스(이름이 아들과 같다) 시니어는 매년 1만 달러(현재 가치로 약 30억 원)을 지급받아 직업 없이 오랜 세월을 유한계급의 삶을 살았다고 한다. 이 책의 주인공 헨리 제임스의 아버지는 엄격한 집안 분위기에 숨 막히는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대학에 진학한 후부터 해방되어 사치스러운 생활에 빠지기도 했다고 한다. 방탕해진 아들의 소식을 전해 들은 할아버지 윌리엄 제임스는 격노했고, 헨리 제임스 시니어는 보스턴으로 도망친다. 몇 년 뒤 아버지의 사망으로 자유를 얻게 된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혹은 자연스러운 귀결로서 정신적 방황에 빠져들게 된다. 그의 형 윌리엄 제임스(할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았다)는 미국의 실험심리학 창시자 중 한 명으로 활동했다. 또 철학에서는 실용주의를 널리 사상운동으로 발전시키고, 현대철학의 주류의 하나로 한 지도적 학자로서 알려져 있다. 

이 책의 주인공 헨리 제임스는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널리 알려진 편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세계 문학계에서 그는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이 책의 저자 김사과는 밝힌다. 헨리 제임스(이하 헨리 제임스는 모두 이 책의 주인공인 미국 작가를 지칭)는 사실상 ‘현대 소설의 아버지’로 인식되고 있다는 저자의 주장이다. 그것은 바로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고난도의 소설 기법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헨리 제임스는 인간의 행동과 마음의 내면 작용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헨리 제임스 소설의 특징은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탐구하고, 특히 외부 사건이 개인의 의식에 미치는 영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코스모폴리탄으로서의 소설가 속 완벽한 망명객의 삶을 자처한 헨리 제임스의 삶과 예술 세계를 이 책은 조명하고 있다.



이 책은 아르테의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32번째로, 헨리 제임스의 족적을 따라 미국에서 영국, 프랑스 등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지역을 찾아가며 헨리 제임스의 작품이 탄생한 배경과 그 문학적 성취에 대한 탐구로 가득 차 있다. 미국 소설가였지만 영국 문학의 전통에 속해 있고, 파리를 꿈꾸었으며, 런던에 정착했고, 이탈리아를 사랑했던 헨리 제임스, 극단적 자유를 추구한 그의 예술 세계는 어떻게 축적되었을까? 소설가이자 문학평론가인 저자 김사과가 붓끝을 따라 코스모폴리탄적 이방인의 유럽과 미국에서의 삶과 문학을 좇아간다. 할아버지의 막대한 유산으로 우리말로 한량처럼 살았던 아버지는 헨리 제임스에게 미국 문화에 대한 부적응자 기질을 물려줬다고 저자는 판단한다. 일단 본인 스스로가 다른 평범한 미국 아버지들과 달랐다는 것이다. 미국 남자들에게 정체성의 상징과 같은 공식적 '직업'이 그에게는 없었다. 한편 아이들을 미국의 주류 종교(개신교)와 교육 방식에서 멀리 떼어 놓았다. 제한 없는 자유를 자식들에게 선사해 주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다고. 결과적으로 그의 아이들은 교회와 학교, 즉 당시 미국의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단위에 대한 감각을 익히지 못한 채로 성장했다. 

아버지 영향으로 어른으로 자라난 제임스가의 아이들은 하나같이 정신적인 문제에 시달렸고, 사회적으로 고립되었으며, 삶 자체를 커다란 혼란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 저자 김사과의 분석이다. 첫째 윌리엄은 아버지와 비슷한 신경 쇼크를 겪어야 했다. 셋째 윌킨슨과 넷째 로버트슨은 미국 독립전쟁에서 활약하며 이른 나이에 삶의 전성기를 맛보지만 이후 사업 실패, 심리적 방황, 알코올중독 등으로 불운하게 삶을 마감하게 된다. 또 사후에 일기 작가로 명성을 얻게 되는 막내 앨리스(이름으로 미루어 여성)의 삶은 고독하고 병약했다고 저자는 전한다. 헨리 제임스가 집안의 유일한 생존자라고 할 만했다. 그는 자신의 정신적 혼란을 문학으로 형상화해 내는 데 성공한, 그리고 평생 코스모폴리탄으로 살아간 희귀한 미국인 예술가였다.



저자 김사과는 헨리 제임스의 족적을 좇아 그의 삶과 문학을 설명하는 핵심어로 '제국'과 '문명'을 꼽고 있다. 이는 그가 국적인 미국과 대영제국의 수도, 런던, 프랑스 나폴레옹이 구축하려 했던 제국과 파리, 로마 제국과 이탈리아에 대한 동경에서 끄집어낸 키워드로 본 것으로 독자는 이해된다. 저자는 「제국의 소설가」란 제목의 〈프롤로그〉를 통해 떠오르는 제국의 수도 뉴욕(사실상 미국 문명의 발상지)을 뒤로 하고, 런던, 파리, 이탈리아 로마 등 영락한 수도를 떠도는 '제국의 유령'을 좇았다고 분석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저자인 김사과는 “현실 세계에서 그(헨리 제임스)는 어디에 있든 어색함을 느꼈다. 무신론자로 키워져 뉴잉글랜드의 청교도주의를 이해할 수 없었던 그는 발자크의 파리를 선망했지만 편협한 파리 문학계는 이방인에게 좁은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결국 런던에 정착하는 데 성공했지만, 각광받는 사교계 인사가 된 뒤에도 런던 사람들에게 자신이 그저 미국에서 온 괴짜 소설가로 여겨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따금 의심했다”라고 쓰고 있다. 이 말로 미루어 짐작하자면 헨리 제임스는 자기 안에 있는 두 세계관의 충돌, 혹은 구세계(유럽)와 신세계(미국)의 충돌을 작품으로 빚어낸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다른 특이점은 그의 작품은 새로운 세계(미국)의 순수함과 활력, 오래된 세계(유럽)의 부패와 지혜를 대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 두 세계의 개성과 문화가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탐구하는 그의 작품들은 종종 예술적이고 부패하며 매혹적인 오래된 세계(유럽)와 종종 거칠고, 개방적이고, 공격적인 새로운 세계(미국)의 캐릭터를 대조시키면서 그 충돌에서 생기는 긴장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에 따라 헨리 제임스는 미국 문학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있다. 그의 생애와 작품은 미국과 유럽, 특히 영국 사이의 문화적 간극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뉴욕에서 태어나, 유럽의 여러 나라를 방문한 후, 영국에 정착하여 삶의 대부분을 보냈다. 이러한 생애는 그의 작품에 깊이 반영되어 있다. 또한 제임스의 작품은 복잡한 심리 묘사와 섬세한 문체로 유명하다.



이 책은 「제국의 소설가」, 「가장 완벽했던 시간」란 제목의 〈프롤로그〉, 〈에필로그〉 외에 「뉴욕」 「파리」 「런던 」「라이」 「소설과 자유」 등 5개의 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뉴욕, 파리, 런던 등은 모두 제국의 수도로 번성했던 곳이고, 세계의 문명에 영향을 끼쳤던 도시들이다. 그리고 뒤늦게 번영한 뉴욕만 아직 명맥을 유지할 뿐 런던과 파리, 두 도시는 영락해 가는 모습의 우울감이 내려앉은 분위기라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4장의 '라이'는 영국 본토인 그레이트브리튼 섬의 동남쪽 끝, 서식스 지방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라이는 로더 강, 틸링엄 강, 그리고 브레드 강에 삼면이 둘러싸여 있다. 세 강이 영국 해협을 향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이 작은 마을은 1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역사가 말해 주듯, 동화 같은 중세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p.137) 

시간이 흘러 라이를 방문하게 된 헨리 제임스는 램 하우스에서 머물게 된다. 램 하우스는 18세기 수 차례 시장을 지냈던 제임스 램이 장인 소유의 땅이었던 라이 중심가 구역의 건물을 사들여 재건축한 곳이다. 영국의 국왕 조지 1세가 라이를 방문했을 때 이 건물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헨리 제임스는 이 집과 동네가 마음에 들었다. 작고 오래된 영국 소도시의 중심가에 있는 담쟁이넝쿨에 덮인 붉은 벽돌집이라니 근사하다. 우연하게도 제임스가 머물러 있는 지 얼마 되지 않아 램 하우스 주인이 세상을 떠났다. 헨리 제임스는 1897년 램 하우스의 임대 계약을 맺는다. 

제임스가 라이로 이주한 것은 1898년 6월이다. 그는 열정적으로 집과 정원을 꾸몄다. 친분이 있는 귀족 부인을 통해서 조지 왕조 시기 만들어진 마호가니 장식품들을 사들였다. 벽에는 번존스(19세기 영국 화가)의 그림과, 플로베르의 초상화, 『데이지 밀러』에 수록된 일러스트를 걸어 놓았다. 소설가 제임스는 램 하우스의 정원을 특히 아꼈다. 그 가운데에서도 그가 처음 그 집을 방문했을 때부터 있던 커다란 뽕나무와 탐스러운 복숭아나무를 좋아했는데 자신이 미국에서 보낸 유년 시절을 떠오르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지냈던 나날들로부터 한 세기가 훌쩍 지났지만 램 하우스의 정원은 여전히 근사했다. 집을 둘러싼 붉은 벽돌담을 짙은 초록빛 잎사귀들이 뒤덮고 있는 가운데 그 주변으로 보라, 노랑, 분홍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있었다. 저자 김사과의 추적기는 계속 이어지지만 결국 찾아낸 것은 제임스의 후기 걸작 3부작인 『황금의 잔』, 『대사들』, 『비둘기의 날개』가 이곳 램 하우스에서 지내던 시절에 쓰였다는 사실이다. 



독자 역시 헨리 제임스란 인물에 대해 문외한이다. 물론 그의 작품도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접하지 못했다. 책 이름(황금의 잔)과 주인공 이름(아메리고)으로 가까스로 기억 반대편에 있던 한 조각 접점을 붙들었다. 어느 책에선가 사례를 들은 것을 잠깐 읽었던 기억이다. 이 책에서 『황금의 잔』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제임스의 후기 걸작으로 꼽히는 데서 그 중요성을 찾을 수 있고, 몰락한 이탈리아 왕족이란 주인공의 이름이 '아메리고'라서 더욱 미국과의 관계 있는 인물임을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임스가 램 하우스에 머무는 동안 사들였던 장식품 중에 이탈리아 왕족이 남긴 것들이 있지 않았을까 추정되는 대목이다. 꼭 '황금의 잔'은 아니더라도 비슷한 의미의 장식품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세계관과 제임스의 관점이 다르기에 도시에 대한 느낌이 다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을 구별해 주는 상징으로 '황금'이 사용된다. 미국 뉴욕을 떠난 제임스가 왜 제국의 수도를 돌아다녔을까? 어쩌면 제국의 원동력이 되고, 제국의 완성에 가장 큰 힘을 주었던 곳이 수도였기에 동경했던 것일까? 코스모폴리탄으로서 세계 여러 나라를 이방인이라는 의식 없이 돌아다녔을지라도 제국의 수도였던 곳에 집착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저자는 자신의 세계관에 빗대어 분석한다. 제국과 문명, 그것은 여전히 내겐 낯선 세계다. 그리고 제국의 수도, 신기루처럼 반짝이는 문명의 표면을 우아하게 떠다니는 제임스 소설 속 인물들 또한 외계인들처럼 생경하다. 그르이 완벽한 언어와 몸가짐으로 표류하던 그 시기의 유럽은 정치경제적 혼란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전쟁을 향해 돌진하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태였다.(p.18) 

저자는 이를 통해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내용이 19세기 후반 가장 국제적이었던 인간의 진짜 모습과, 그것을 가능케 한 인간 문명의 본질적 폭력성에 대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피라미드의 꼭대기, 정지된 듯 기이한 침묵 속 완벽한 풍경. 제임스 소설 속 인물들은 황금으로 도금된 철창 속에 갇혀 있다. 희생자들의 비명과 핏자국이 솜씨 좋게 제거된 그곳은 문명의 최정점에 놓인 화려한 응접실이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최상위 포식자들, 지배자들, 부자들, 권력자들, 즉 뱀파이어 백작과 암사자 공작부인, 그리고 그들의 불운한 희생자 친구들을 초대 손님으로 하는, 잔혹한 저녁 만찬이다.(p.19)



헨리 제임스의 소설들은 자연의 변화를 시간순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동시에 주인공의 내면을 따라 흐르는 의식을 독자들이 따라가면서 살펴볼 수 있도록 짜여 있다. 이러한 문체는 그의 전 작품을 통해 드러난다. 저자는 제임스가 당시 사회의 다양한 계층과 성별, 그리고 그들의 상호 작용을 이런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아마도 이런 문체의 형성은 소심한 개인적 성격에서부터 비롯됐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만났던 여인들에게 속마음을 드러내는 일에도 늘 소극적이었다는 것도 이를 뒷받침해 줄 수 있다는 설명이다. 마음속으로만 흠모하던 여인이 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긴 해도, 작품 속에서조차 적극적으로 자신을 어필하는 데 주저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소심한 성격 자체가 꼼꼼하고 치밀한 세부 묘사에서는 강점을 발휘했으며, 그런 소설 기법으로 인해서 그는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또 제임스의 작품에는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주제로 탐구하며 해외 생활의 자유와 도전 사이의 복잡한 상호 작용을 헤쳐 나가는 캐릭터들이 자주 등장한다. 저자는 제임스 자신의 인생 경험과 미국인과 유럽인 사이의 문화적, 심리적 차이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제임스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미국의 문화적 제약으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적인 측면과 유럽 사회에서 삶에 수반될 수 있는 소외와 모호한 도덕성을 모두 경험하면서 외국 땅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씨름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이중성은 개인적 성장, 사회적 기대, 그리고 자신의 고유한 문화적 맥락을 벗어난 진정한 자기 표현에 대한 탐구를 풍부하게 해 준다. 새로운 자유에 대한 유혹과 친숙한 소속감에 대한 갈망 등 이방인으로서의 생활에 내재된 모순은 등장인물이 사회적 압력과 관계없이 자신의 가치를 정의하려고 노력하는 자본주의와 상품 문화에 대한 제임스의 비판을 반영하는 것이다.

제임스는 외국인으로서의 경험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통해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서로 다른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현실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을 열었다. 그의 작품은 개인적인 여행과 발견에 대한 서술일 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더 넓은 사회적, 문화적 역동성에 대한 논평이기도 하다는 저자의 설득력 있는 분석에 귀 기울이다 보면 헨리 제임스와 삶과 문학에 대해 가깝게 접근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저자 : 김사과


1984년 서울에서 태어나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과를 졸업했다. 2005년 창비신인소설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02』 『더 나쁜 쪽으로』, 장편소설 『미나』 『풀이 눕는다』 『나b책』 『테러의 시』 『천국에서』 『N. E. W.』 『바캉스 소설』, 중편소설 『0 영 ZERO 零』, 산문집 『설탕의 맛』 『0 이하의 날들』 『바깥은 불타는 늪/정신병원에 갇힘』 『헨리 제임스』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붉은 상자
김정용 지음 / 델피노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느 날 출근하는데 집 앞에 내 이름이 적힌 붉은 상자가 놓여 있다면 상자를 열어 볼까? 이 책 『붉은 상자』는 아주 단순한 질문을 시작으로 사건이 벌어진다. 경찰공무원 시험을 보러 가는 날 아침, 주인공 최도익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상자를 받는다. 보낸 이가 쓰여 있지 않은 작은 붉은 상자에는 의문의 쪽지만 하나 덜렁 들어있을 뿐. 발신인은 물론 주소도 없고, 심지어는 송장도 없이 택배 상자의 모습으로 덩그러니 문 앞에 놓인 상자. 별 생각 없이 열어본 상자 안에는 밑도 끝도 없이 쪽지만 달랑 놓여 있다. 최도익은 내용은 찜찜했지만 시험을 보러 가는 길이기에 시험장으로 출발한다. 그때부터 그의 앞에 이상한 일들이 자꾸 펼쳐지며 미스터리 사건에 휘말리기 시작한다.

한국의 히가시노 게이고를 넘보는, 작가 김정용이 미스터리 스릴러 ‘붉은 상자’를 출간했다. ‘붉은 상자’는 택배 공화국이 되어버린 대한민국을 미스터리의 한복판으로 이끌며, 종횡무진 펼쳐지는 이야기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대한민국은 택배 공화국’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리는 음식부터 건축 자재에 이르기까지 택배로 못 받는 물건이 없다. 원래 우리 사회에서 '배달'이란 음식 정도만 집 앞 혹은 집 안까지 배달해주는 일을 의미했다. 음식은 집 안까지 배달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식 배달도 지금처럼 모르는 음식점보다는 믿을 수 있는 음식점, 자신이 직접 가봤던 음식점을 배달해 달라고 했던 일이다. 다른 물건은 우체국을 통해 '소포'를 전달해주고, 수령했다는 수령 증명서에 사인을 하는 형식이었다. 그 점이 가능한 것은 소포 배달은 우체국이란 국가 기관에서 공무를 담당하는 우체국 직원이 배달하는 것이어서 믿을 수 있어 비싼 요금을 치러야만 보내고 받을 수 있는 제도다. 이것이 세상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으로 음식점에 직접 가서 주문하고 그곳에서 먹는 음식을 사람 밀집 지역의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소포 배달과 음식 배달이 택배업으로 진화한 것이다.



지금 우리 민족이 배달(倍達)이라는 용어로 지칭되었기에 여러 단어와 합성되어 근대 이후 지금까지 사용되는 말이라고 한다. 이때 배달의 연원은 단군(檀君)의 단을 박달 혹은 배달로 부르는데 기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배달'이란 단어도 '배달의 민족'이란 말도 우리 민족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그러던 것이 우리의 산업화 시대에 점심 시간도 아껴 일해야 하는 시대 상황이 만들어낸 신조어로 음식 배달이란 '배달(配達)'과 동음이어서 가능했던 일이다. 이때까지 배달이란 우리 민족의 또 다른 별칭으로 사용되었었다. 이 용어와 똑같은 발음인 '배달(配達)'로 전환시킨 사람이 있다. 중국음식은 빨리 만들어 싸고, 양도 많아 우리나라에서 특화돼 발전된 '짜장면'의 배달로 매우 적합했다. 산업화 시대에는 대부분의 소규모 업체나 가난한 학생, 현장 노동자들이 밥 먹으러 왔다갔다 하는 시간을 아끼려고 중국집 짜장면 등 배달 주문을 시작했다. 배달의 민족이란 용어를 통째로 빌려다가 택배 전문업체로 발전시켜 업계 1위의 매출을 기록하고 있는 '배달의 민족'의 사장도 입지전적 인물로 알려지기도 했다. 

배달 음식을 주문해 먹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놀라는 외국인이 많았다는 사실을 이제는 모두가 안다. 노동 임금이 싸기에 음식점은 음식값만 받고 배달해주는 제도가 정착될 수 있었다. 이런 서비스가 코로나 팬데믹이 발생하자 특수 호황을 맞았다. 사람과의 접촉이나 대화 등을 통해 감염되는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서 생활의 모든 물품을 배달해주는 제도로 확대된 것이다. 이제 택배는 큰 시장을 형성한 산업군으로 분류되어 있다. 이런 사회 속에서 살다 보면 아파트에는 문 앞에 택배 상자가 늘 하나둘쯤은 있기 마련이다. 어느 날이든 내 이름이 쓰인 상자가 놓여있으면 으레 누구나 집안으로 들고 들어와 뜯어보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상자에 섬뜩한 쪽지 한 장뿐이라면? 이 책 『붉은 상자』는 조건반사적으로 상자를 열어보는 요즘 같은 비대면 시대를 날카로운 미스터리로 풀어내 독자들의 머리칼을 쭈뼛 서게 만든다. 한국식 미스터리에 매우 적합한 소재가 될 가능성에 공감한다. 저자는 이런 사회 문화에 익숙한 시대에 “그때 그 상자를 열어보지 않았더라면···.”이란 여운을 남기는 멘트로 독자들을 미스터리 세계로 안내한다.



소설이 진행되면서 알게 되지만 붉은 상자를 받은 것은 단지 도익만이 아니다. 소설이 전개될수록 다른 곳에서도 붉은 상자를 받은 사람들이 하나둘 그 존재를 드러낸다. 붉은 상자를 받은 것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이다. 저자는 공시생 최도익, 체대 준비생 민정희, 순댓국집 아줌마처럼 보통 사람들을 통해, 운명에 저항한다고 해도 결코 피할 수 없는 숙명적 운명의 상흔을 처참하리만큼 날카롭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동시에 지금 눈앞에 펼쳐진 사건들을 추적하면서 그것이 단순히 운명적으로 펼쳐진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얼키설키 얽힌 또 다른 사건이 숨겨 있음을 슬며시 내비친다. 저자가 미스터리 소설을 작정하고 구상했다는 반증일 것이다. 상자에 얽힌 비밀을 파헤치려 애써보지만 의문의 사고가 연이어 발생한다. 더욱이 형사는 도익을 강력한 사건 용의자로 지목하고 그를 추적하기에 이른다.

저자는 이 소설을 위해 소설의 시작에서부터 독자를 오리무중의 세상으로 이끈다. 즉 꿈의 세계다. 단순히 악몽도 아니지만, 깨고 나면 개운하지 않은 꿈. 그것도 깨면 다행이지만 깬 것인지, 꿈속의 현실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생생한 꿈. 그마저도 한두 번이 아니라 꿈을 꿀 때마다 똑같은 상황이 나타난다면... 꿈속의 상황이 신경이 안 쓰일 수 없다. 

여기서 저자가 쓰는 방법은 꿈속에서의 '가위 바위 보 게임'이다. "도대체 언제 시작된 걸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 무리에 섞여 이 무의미한 듯 보이는 게임을 계속하고 있는 걸까?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건 모두들 계속해서 주먹만 내고 있다는 점이다. 보자기를 내면 이긴다는 걸 알고 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나조차도 계속해서 주먹만을 내고 있다. 이기는 게 두려운 걸까? 아니면 언제 시작된지조차 모르는 이 미친 가위바위보가 끝나버리는 것이 두려운 것일까? 그러는 사이, 이들 중 한 명이 보자기를 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뒤통수를 때렸다. 상상만으로도 침이 마르고 등골이 시큰해졌다. 뇌에서는 보자기를 내라고 다급하게 신경 세포들을 자극해댔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주먹만을 내고 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보자기를 내려 해도 꽉 쥐어진 주먹이 펴지질 않았다."(p.9~10)



현실이 어쩌면 운명이라고 저자는 생각하는 것일까? 저자는 책의 〈프롤로그〉를 통해 이 일련의 꿈속 현실을 꿈속에서 끄집어 내려고 무진 애를 쓰는 모습을 보여준다. 〈프롤로그〉 속의 화자인 '나'는 이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이 꿈에서 깨어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다. 보자기를 내는 법 또한 알지 못한다고 표현한다. 운명인가? 꿈인가? 아니면 두 가지가 뒤섞여 있는 것인가? 독자도 쉽게 단정할 수 없다. 

갑자기 무리 사이에서 알 수 없는 동요가 일어난다. 마치 짜기라도 한 듯이 여러 개의 눈동자가 당황한 표정으로 모여 있는 손과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본다. 여러 개의 주먹 사이로 보란 듯이 쫙 펴져 있는 손바닥이 보인다. 재빨리 누가 보자기를 냈는지 확인한다. 하지만 누가 보자기를 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저자는 다시 강조한다. 이것은 꿈이다. 재빨리 손의 감각을 느껴보려 애써봤지만, 아무것도 전달되지 않는다. 내가 낸 건 주먹일까? 보자기일까? 아니면···. 모두들 나와 같은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무슨 수를 쓰든, 어떤 방법을 동원하든 운명은 운명적으로 작동한다. 최도익이 아무리 발버둥친들 운명은 그 버둥거림조차 운명이라 비웃는 듯하다. 자신의 운명을 걸고 붉은 상자에 얽힌 운명의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운명적 이야기, 그것이 바로 미스터리 소설 『붉은 상자』다.

다시 소설 속으로 들어간다. 붉은 상자 속의 쪽지에 적힌 내용은 무언인가? 송장이 없어 보낸 이도 주소도 없다. 다만 최도익이란 이름과 주소만 적혀 있을 뿐이다. '시험 날 아침부터 참···' 속으로만 되뇌이고 쪽지를 읽어본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와 절대로 대화하지 말 것>. 쪽지를 보자마자 최도익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절친인 영운이 녀석이다. 이런 짓을 하고도 남을 놈이다.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이 난다. 괘씸한 생각해 전화를 걸어 따지려다가, 그렇게 하면 결국 녀석의 장난에 놀아나는 꼴이니 아무런 반응도 않기로 하고 최도익은 상자째 분리수거함에 버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선다.



이 소설 작품 『붉은 상자』는 짧은 〈프롤로그〉 외에 15개의 장(章)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험의 날」 「폭우」 「173」 「연결 고리」 「만남」 「악연, 혹은 인연」 「막다른 길」 「엄습하는 그림자」 「약한 고리」 「지독한 안개의 밤」 「거미줄」 「벼랑 끝에서」 「방향 전환」 「그리고」 「다시」 15개의 제목을 열거해놓고 쭈욱 살펴도 제목간 연결 고리가 별로 없다. 그냥 각 장의 핵심어를 나열한 것일까? 마지막에 〈에필로그〉가 짧게 첨부돼 있다. 긴 사건을 돌아와 마지막에 쓴 〈에필로그〉에도 다서가 될 만한 어떤 것도 남기지 않았다. 다만 "모두가 주먹만 내는 가위바위보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따. 이 게임의 끝이 어딘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길고 지루한 시간이 허깨비처럼 흘러갔다. 그러다 누군가 보자기를 냈고, 그것으로 작은 동요가 일었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보자기를 낸 것이 나인지 아닌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누구라도 상관없다. 보자기를 냈다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 핵심은 우리를 가둔 이 운명이라는 ㄲ무을 부수고 나갈 수 있는 첫 번째 꿈틀거림이 시작됐다는 데 있다. 보자기는 그 출발점이다. // 확실한 것 하나는 언제나 보자기는 주먹을 이긴다는 사실이다. // 붉은 상자는 다시 돌아온다."(p.285)

이 소설은 작중 '나'가 현실인가 꿈속인가를 헛갈리는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최도익은 물론 등장하는 많은 인물이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사건 속에서 해결하려 해도, 무시하려 해도 결국은 휘말리게 되고 급기야 최도식은 살해범으로 몰리기도 한다. 저자의 말대로 꿈속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세상의 일을 아무리 바꾸려 해도 바꿔지지 않고 정해진 대로 진행되기 마련이다는 점은 '운명'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비현실적 현실을 부딪쳐 이겨내고 극복하는 자체가 우리의 삶인지를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 정확하게 짚어내기 위해 독자들은 저자가 마련한 장치와 복선에 조금이라도 더 신경을 써야 한다. 자칫 모든 것을 포기하면 결국 아무것도 얻어내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암시하듯.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이 특수한 임무를 갖거나 특별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 극히 평범한 우리들 삶과 비숫하게 사는 것에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노력을 기울이는지, 결과는 어떻게 나타나는지 등에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이면 저자의 집필 취지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심지어는 저자가 깔아놓은 복선도 찾아낼 수 있다. 이 소설을 읽는 순간부터 독자는 저자와 추리게임을 시작하는 것이다.



붉은 상자 때문에 평생을 숨어다녔다. 가족은 부서졌고, 삶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래도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전국을 떠돌면서 도망자처럼 살아온 인생이었다. 마음을 나눌 만한 사람이 생기면 도망쳤고, 정들면 아반도주했다. 운명이라 생각했고, 사명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니 전부 쓸데없는 짓이었다. 어차피 이렇게 될 것이었다. 운명은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고 그대로 정면충돌해왔다.(p.158))


말이 공개수사지 진행 과정, 수색 범위, 그리고 수사 대책까지 전부 매스컴을 통해 납치범에게 낱낱이 알려주는 바보짓이다. 어리숙한 유괴범이면 조여 오는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조급해지겠지만, 머리가 제대로 박혀 있는 놈이라면 상황이 얼마나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지 알고서 만세를 부를 것이다.(p.180)


전부 운명이라면 제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소용없는 일 아닐까? 게다가 발버둥 치는 것까지 정해져있다면, 그런 거라면…… 이렇게 초조해할 필요가 없는 거 아닌가?(p.255)


“아무리 애를 써도 정해진 것은 바뀌지 않아. 물론 바뀐 것처럼 보일 때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언제나 같지. 그러니 헛심 쓰지 말라는 말이네.”(p.272)


저자 : 김정용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연기를 전공했다. 이후 소설가, 희곡작가, 작사가, 연출가를 넘나들며 활동하고 있는 다양한 재주의 소유자. 200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 [문득, 멈춰 서서 이야기하다]가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뮤지컬 [사이드 미러]의 대본을, [라이팅 핸즈], [만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덩굴져 펼쳐지는 이야기] 등의 대본과 연출을 담당하였다. 또한 [그대로 머물다], [난민] 등의 가사를 작사하고 다수의 독립영화와 콘텐츠 제작에도 참여하였다. 2023년 장편소설 [서커스 물개]를 출간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십에 처음 만나는 예술 - 가우디에서 임영웅까지 인생 후반전, 예술에서 삶을 재발견하다
유창선 지음 / 새빛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가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은 오랜 시간 동안 변하지 않았다. 예술 작품은 제작법이 분야별로 각기 달라 예술가들의 숫자는 늘어나더라도 감상을 위해서는 관람과 전시회 등 제한된 공간과 시간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예술의 시작은 인류의 기원과 같다고 알려지는데 감상은 여전히 쉽지는 않다. 가장 뒤늦게 시작된 예술인 영화는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대량으로 여러 장소에서 관람이 가능하지만 연극이나 오페라, 음악 등은 공연을 통해, 미술은 전시회를 통해 한정된 장소에서만 감상이 가능하다. 또 한정된 장소에서 한정된 연주자(배우)가 직접 실현해야 가능한 탓에 멀리 있거나 다른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감상이 제한된다. 그래도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전 세계 어디든지 하루 만에 이동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고, 특히 출판, 영상, 음향 등의 기술 발달은 그나마 간접적으로 예술의 대중화에 큰 기여를 했다. 

제한된 수요와 공급으로 예술은 대중에게 알려지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예술가들의 끊임없는 열정으로 결국은 오늘날 대중 다수가 편하게 즐기고 감상할 수 있는 대중적 인기를 확보할 수 있게 됐다. 인쇄술 발명 이전 책은 일부 귀족 계급이나 젊은 지식인들의 전유물이었고, 공연 예술 또한 지배 계급만 향유할 수 있었다. 예술가들 역시 사람이기에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예술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지배 계급이 좋아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기 마련이었다. 그래도 수많은 삶의 난관과 역경을 딛고 오로지 예술에만 온 노력을 기울여온 예술가들의 작품은 뒤늦게라도 인정돼 그의 작품이 재조명되는 경우도 많다. 바야흐로 현대는 모든 사람이 진정한 보고 느낄 수 있는 진정한 예술의 시대다. 예술은 사람에 따라 좋아하는 분야가 다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분야라고 그 분야를 폄훼하지는 않는다. 모든 예술은 인간의 삶과 역경까지도 품어 작품 속에 녹여냄으로써 인간 삶을 아름답게 꾸며나가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이 책 『오십에 처음 만나는 예술』은 정치평론가로 주로 정치평론을 하던 저자 유창선이 쓴 예술 에세이다. 이 책은 예술을 좋아하지만 정식으로 배운 적도 없고, 전문지식도 없는 문외한인 독자에게 우선 양적으로 압도감을 준다. 부제로 쓰인 「가우디에서 임영웅까지 인생 후반전, 예술에서 삶을 재발견하다」에서 알 수 있듯이 클래식이든 대중가요든, 거장의 그림 관람이든, 이름 없는 화가의 그림이든 예술을 대하는 저자의 태도가 왕성한 예술 감상 욕구를 자극하는 것이라면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정치평론가로서 예술에 늦깎이 입문이라고 말하지만 평소에 예술적 관심은 컸던 것 같다는 느낌을 독자는 지울 수 없다. 저자는 우연한 기회에 예술에 빠져들었다고 「50대에 나는 그만 예술에 빠져 버렸다」란 제목의 〈프롤로그〉를 통해 밝힌다. ‘1세대 정치평론가’로 널리 알려진 저자는 5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학교와 정가를 누볐다. 대학 졸업할 무렵부터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엔 방송과 언론, 그리고 SNS를 통해 정치 얘기만 하면서 살았다다. 그랬던 그가 하필이면 정치의 계절(4월 총선을 앞두고 이 글을 썼다)에 문화예술에 대한 책을 썼다. 무슨 사연, 무슨 생각이 있었던 것일까.〈프롤로그〉에 따르면 ‘예알못’이었던 저자가 예술이 주는 감흥과 행복감에 눈뜨기 시작한 것은 5년 전 병상에서였다. 생사를 가르는 뇌종양 수술을 하고 8개월 동안 병상 생활을 해야 했다. 밤 9시만 되면 일제히 소등하는 병실에서 저자는 밤마다 이어폰을 꽂고는 휴대폰에 담아놓은 음악들을 들었다. 깜깜한 병실에서였지만 쇼팽의 녹턴과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들을 듣다 보면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다.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더 없이 편해졌다. 50대의 나이를 떠나 보내던 마지막 시간에 저자는 병실에서 예술이 주는 위로와 치유의 고마움에 비로소 눈뜨기 시작했던 것이다.



예술 문외한인 독자가 저자의 이름을 책으로는 처음 접한다. 방송에서 가끔씩 들은 기억이 있지만 정치와는 담 쌓은 지 오래된 독자로서는 그의 정치평론을 기억하지도,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할 리 없다. 심지어는 그가 흔히 말하는 진보적 성향인지, 보수적 성향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가 쓴 책을 왜 선택했을까? 독자에게 선택의 이유를 묻는 사람이 있을 리 없지만 독자는 순전히 이 책에 담긴 모든 예술 아이템이 매우 세상 흐름에 민감하게 작용한 것이라는 느낌 때문이다. 또 분야를 막론하고 저자의 예술적 감흥을 최소한 질적으로는 따라가고 싶은 마음에서다. 예술적 공감대는 정치색이나 경제 문제로 가려서는 형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저자는 지난 세월에는 “심각한 표정을 짓고는 무겁고 날선 얘기를 하며 살다보니 예술의 아름다움과 감흥 같은 것을 느끼고 보존할 마음의 빈자리가 없었다. 머릿속은 내가 아닌 다른 세상으로 향해 있었다.”고 털어놓는다. 그러니 저자의 시선은 자신이 아닌 저 멀리 있는 광장으로 향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인생의 가장 긴 시간이 그렇게 지나갔다고 이야기한다. 역사의 무게를 혼자 짊어지기라도 한 듯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는 무겁고 날선 얘기를 하며 살다보니 예술의 아름다움과 감흥 같은 것을 느끼고 보존할 마음의 빈자리가 없었다고 정직하게 고백한다.

50이란 나이를 정점으로 인생의 오후에 접어든다고 어떤 철학자는 표현했었다. 그 표현을 저자에 적용한다면 저자는 병원에서 나오면서 이제 남은 생은 자신을 돌보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는 시점이 바로 인생 2막의 시작점이었을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건강을 조금씩 회복하면서 연주회장을 찾기 시작한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고 〈프롤로그〉를 통해 말한다. 아직 몸이 불편해서 때로는 문화공연장에 힘들게 도착하지만 오케스트라의 아름다운 선율이 들려오기 시작하면 그런 불편 따위는 모두 잊게 된다고도 말한다. 



특히 저녁 시간에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갖고 있는 저자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고 설명한다. 공연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다 나은 것 같은 힘찬 모습이었다고 느끼면서 독자가 홀로 곱씹었을 생각은 예술. 흔히들 얘기하는 치유의 힘일 것이다. 그렇게 저자는 음악을 통해 위로받곤 했다. 독자도 저자의 이 말에 공감하면서 인생의 오후에 예술과 더 가깝게 다가가고 싶고, 더 예술적 삶에 접근하고 싶다는 생각에 이 책을 읽었다. 책의 목차를 들여다보다 깜짝 놀랐다. 이렇게 많은 공연, 콘서트, 전시회, 극장을 찾아다니며 예술을 수년 내에 접근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더욱이 앞서 언급한 대로 대중적이든 클래식하든 문화라는 타이틀을 붙일 수 있는 모든 분야에 심취할 수 기간이 이렇게 단 시간 내에 이뤄질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모두 5부로 이뤄져 있다. 1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 2부 〈우리를 위로해주는 영웅들〉, 3부 〈예술가들의 투혼이 낳은 성취〉, 4부 〈슬픔조차 아름답게 들리는 선율〉, 5부 〈자유를 찾아가는 인간의 숙명〉, 그리고 '부록'으로 202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아니 에르노(Annie Ernaux)에 대해 〈‘자아’를 지킨 아니 에르노의 글쓰기〉라는 제목으로 5편의 에세이를 보여준다. 작가론과 작품론을 겸한 저자의 감상평이다. 감상평이라기보다 평론에 가깝다. 「아니 에르노의 ‘칼 같은 글쓰기’」, 「내 어머니는 어떤 기억으로 남을까」, 「아버지와 딸 사이의 거리」, 「사랑의 열정은 정말 단순한 것일까」, 「내 삶은 역사적일 수 있을까」 등이다. 독자 생각으로는 아니 에르노에 천착하지 않고서는 쓰기 어려운 내용들이다. 

이 책은 저자가 관람했던 공연, 영화, 전시회 등 다양한 문화예술 작품들에 대한 글들을 담고 있다. 단순한 후기를 넘어 저자가 갖고 있는 인문학적 시선 위에서 작품과 예술가들에 대한 생각을 풀은 글들이다. 독자가 '예술 평론'에 가깝다고 말하는 이유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작품 이상의 인사이트를 얻게 되기를 저자는 소망한다. 작품을 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관람의 욕구를 부여하고, 작품을 이미 접했던 사람들에게는 그 이면의 더 많은 것들을 사유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책이라고 독자는 믿는다.



책에 따르면 저자는 공연을 즐기는 생활에 빠져들면서 점차 문화를 향유하는 장르도 다양해졌다. 관심과 궁금증이 꼬리를 물고 연결됐다. 오케스트라, 독주와 앙상블, 실내악, 뮤지컬, 오페라, 콘서트, 발레, 국악관현악, 판소리, 연극, 전시회, 영화 등 듣고 볼 좋은 작품들이 있으면 달려가곤 했다. 가족들과 유럽 여행을 갔을 때는 그림들이 너무 좋아 나 혼자 아침부터 저녁까지 끼니도 걸러가며 뮤지엄들을 순례하던 날들도 있었다. 임영웅의 공연을 보려고 ‘피케팅’(피나는 티케팅)을 거쳐 대구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관람을 하기도 했다. 스스로 ‘중독’이라는 말을 할 정도로 문화예술이 좋았고 빠져들었다. 인생 후반기에 예술에 푹 빠져든 사람의 사유가 담긴 현장 기록들을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접할 수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과 작품명만 열거해도 여러 페이지에 달할 것이다. 이 책의 5개 파트는 각각 2~6개의 장(章)으로 구성돼 있다. 1부에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괴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 「케이트 블란쳇 주연의 영화 〈타르〉」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나폴레옹〉」, 「마일리스 드 케랑갈 원작의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등 영화 예술의 이야기다. 2부는 「임영웅 콘서트 〈IM HERO TOUR 2023〉」, 「〈김수철과 동서양 100인조 오케스트라〉 공연」 등 2개 장으로 대중음악에 관한 이야기다. 3부에는 「호암미술관 〈한 점 하늘_김환기〉 & 뮤지컬 〈라흐 헤스트〉」「장욱진 회고전 〈가장 진지한 고백〉」「뮤지엄 산에서의 개인전 〈안도 타다오-청춘〉

」 「리움미술관의 카렐란전 〈우리(WE)〉」 「정작 가우디는 고생했고 피카소는 화려하게 살았다」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등 국적에 관계없이 공연과 건축예술, 전시회 이야기가 실려 있다. 4부는 「벨리니의 오페라극 〈노르마〉」 「서울시립교향악단 〈아주 특별한 콘서트〉」 「임현정 피아노 리사이틀」 「세계의 포디엄을 누비는 한국의 마에스트라들」 등에 관한 이야기다. 마지막 5부는 「극단 파수꾼의 연극 〈아이히만, 암흑이 시작하는 곳에서〉」 「산울림 편지콘서트 〈쇼팽, 블루노트〉」 「전무송-전현아 부녀의 연극 〈더 파더〉」 「100년만에 무대에 올려진 연극 〈의붓자식〉」 「시몬 드 보부아르, 한나 아렌트, 시몬 베유, 아인 랜드의 삶과 철학」 등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다. 책, 전시, 공연, 영화 등 예술의 전 분야에 걸친 문화평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올 봄이 가기 전에 이 책을 읽고, 많은 독자들이 예술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살기를 권유해본다. 



”음악사 연보를 들여다보니까 브라질 작곡가 시키냐 곤자가가 1885년에 자작곡을 갖고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최초의 여성 지휘자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녀는 당시 브라질 음악계에서 보기 드문 여성 음악가로, 많은 차별 속에서도 활발한 음악활동을 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많은 여성들이 지휘봉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여성 음악가에 대한 편견과 차별에 맞선 여성 지휘자들의 오랜 분투가 있었기에 이제는 여성 지휘자들이 포디엄(podium)에 당당하게 서고 있는 것이다. 오늘 여성 지휘자들을 향한 박수 세례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님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p.195) - 「4부 ‘세계의 포디엄을 누비는 한국의 마에스트라들」 중에서


저자 : 유창선


연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한 뒤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0년대부터 방송, 신문, 잡지, 인터넷 등을 통해 활발히 정치평론을 해온 1세대 정치평론가였다. 평생 정치 얘기를 하던 사람이 문화예술에 관한 책을 써서 나타나니 독자들은 의아할지 모르겠다. 저자는 5년 전 생사를 가르는 뇌종양 수술을 받고 오랜 투병과 재활의 시간을 가졌다. 그때 병상에서 만난 것이 음악이었다. 불 꺼진 병실에서 밤마다 음악을 들으며 예술이 갖는 위로와 치유의 힘을 실감했던 저자는 병원에서 나온 뒤로 각종 공연과 전시회를 찾아다니게 됐다. 오십 대의 마지막에 예술을 제대로 만나 푹 빠져들게 된 것이다. 배신감과 허망함을 안겨주었던 정치와 달리 예술은 우리의 마음에 공감해주며 더 좋은 인간이 되도록 손잡아 주는 동반자임을 저자는 발견했다.

『오십에 처음 만나는 예술』은 근래에 저자가 보고 들었던 문화예술 작품들에 대해 쓴 글들을 싣고 있다. 공연이나 전시 등에 대한 단순한 후기가 아니라 작품을 통해 우리가 생각해야 할 지점이 무엇인가를 던져주고 있다. 이 책에서는 최근에 주목받았던 공연과 작품들이 많이 소개된다. 책에나오는 작품을 아직 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관람의 욕구를 부여하고, 이미 접했던 사람들에게는 그 이면의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 줄 것이다.

저자는 현재 <여성신문>에 ‘유창선의 문화이야기’를 연재하는 등 문화예술에 대한 글쓰기를 활발하게 하고 있다. 저서로는 인문 에세이 『나를 찾는 시간』 『나를 위해 살기로 했다』 『삶은 사랑이며 싸움이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삶과 죽음의 대화』(공저) 등이 있고, 정치평론집으로는 『김건희 죽이기』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정치의 재발견』 등이 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법정유희
이가라시 리쓰토 지음, 김은모 옮김 / 리드비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희(遊?)란 국어사전에 ① 즐겁게 놀며 장난함. 또는 그런 행위. ②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서, 어린이들의 육체적 단련과 정서 교육을 위하여 일정한 방법에 따라 재미있게 하는 운동 따위를 이르는 말이다. 이 말 앞에 어떤 단어를 붙여 사용하기도 한다. 이를 테면 '언어유희(言語遊戱)'가 있다. 언어유희란 문학에서 주로 사용하며 다른 의미를 암시하기 위해 말이나 동음이의어를 해학적으로 사용하는 표현방법이다. 즉, 말이나 문자를 소재로 하는 유희를 의미한다. 문학비평용어사전에 따르면 언어유희란 일차적으로 저급한 기지(wit)의 형식으로 낱말놀이의 초기유형에 든다. 이때 언어유희는 해학을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이중의 의미를 나타내는 명칭을 중심으로 진지하게 사용된다. 낱말의 소리들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토대로 발생한 언어유희는 차츰 해학을 목적으로 하게 된다. 아이러니의 한 변형으로서 언어유희는 단순한 말장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풍부한 기지와 날카로운 어조로 풍자의 형식이 된다.

언어유희를 시에서 사용되는 기법으로 나누면 다음의 여덟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애매한 말의 기법이 있다. 한 낱말이 두 가지 뜻을 가지는 경우, 즉 동음이의어를 활용하는 경우를 말한다. 둘째, 수수께끼의 기법이 있다. "아버지가 어디로 들어가셨니?" 하는 대답에 "아버지가 방으로 들어가셨다"라는 대답이 "아버지 가방으로 들어가셨다"로 들릴 수 있는 경우이다. 셋째, 상이한 의미를 지닌 하나의 낱말을 대상으로 하는 기법이 있다. 그리고 넷째로 하나의 어법이 이중의미가 되게 하는 말놀이의 기법이 있으며, 다섯째로 하나의 소리를 다른 의미가 되게 하는 기법, 여섯째로 유사한 소리가 나지만 의미는 서로 다른 낱말들을 대상으로 하는 기법, 일곱째로 모음전환을 이용한 발전의 기법이 있다. 마지막 여덟째로 낯익은 어법에 가벼운 변화를 주는 기법이 있다. 언어유희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은 희극적 효과든 진지한 효과든 낯익은 어법들을 숙고하면서 이루어진다. 여덟 번째 기법의 예로는 오규원의 "콩밭에 콩심기 언어밭에 언어심기 / 그와 같은 방법으로 아픔밭에 아픔심기"를 들 수 있다.



이 책 『법정유희』의 표제어는 법학이나 법정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단어가 아니다. 책을 읽어보면 이 책에서 '유희'의 뜻은 문학에서 사용하는 의미로 저자 이가라시 리쓰토가 임의로 붙인 제목임을 알 수 있다. 이 소설 작품의 스토리는 법률 용어인 무고, 무고죄 등에 대한 '사적제재'와 관련이 깊다. 독자는 법이나 법학과는 완전 문외한이라 '사적제제'란 낯선 용어에 대해 백과사전의 풀이를 먼저 구한다. 의외로 쉬운 표현임을 비로소 알게 됐다. 사형(私刑, lynch law; 린치) 또는 사적제재(私的制裁, vigilantism)는 정당한 사법절차를 거치지 않고, 개인이나 집단에 의해 결정되고 집행되는 모든 형태의 폭력, 유형적 또는 사회적 제재(制裁)를 가리킨다고 사전은 말하고 있다. 이 용어는 오랜 옛날부터 전해져 오는 용어라고 한다. 한자어에서 비롯됐으니 중국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한자 문화권인 우리와 일본 등에서도 법률 용어에 사용되고 있다. 사적제재란 국가 또는 공공의 권력이나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 개인이나 사적 단체가 특정인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할 수 있다. 좁은 의미로는 법적 절차 없이 개인적으로 죄인에게 내리는 형벌을 의미한다는 덧붙인 말이 뜻을 더욱 명확하게 보여준다. 

또 미국에서는 독립전쟁 중 법정이 기능을 정지했을 때, 버지니아 주 베드포드에서 치안판사 찰스 린치가 비공식 법정을 열고 법의 집행과 질서유지를 담당했다. 비공식 법정이라고는 하나 린치 판사가 내린 판결은 거의 벌금형, 태형 등의 가벼운 것이었고, 단 하나 사형선고는 반역범에 대한 것으로 주 정부에서도 1782년에 정당성을 인정한 것이었다. 그랬던 것이 시대가 지나자 린치 판사의 자비로운 판결은 잊혀지고 비공식 법정에 대한 기억만 남아(또는 린치 판사가 독립전쟁 지지파로서 월권하여 친영파를 처벌한 것 때문에), 마침내 악의에 찬 폭도들의 재판을 가리키는 말로 굳어져 버렸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건 수많은 가설의 일부다. 일단 당시 인물들 중 린치(Lynch)라는 성씨를 가진 사람은 모조리 후보에 올라오는 신세고, 심지어 사적제재가 자주 이루어지던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어떤 강의 지류의 이름이라는 설까지 있다. 영어권에서는 정설이라고 받아들여지는 어떠한 풀이가 없는 듯하다.



이 책은 일본에서 지금까지 행해진 '사적제재'의 위법성을 소설에 담아 풍자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일본 호토대학교 로스쿨에는 일종의 '사적제재'인 ‘무고 게임’이 모의 법정에서 종종 진행된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사적제재'에 대해 로스쿨에서 모의법정을 열어 토론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일종의 '사적 복수'라고 말할 수 있는 '사적 체제가 허용되는 사회가 우리나라에도 있었다고 백과사전은 소개한다. 바로 고려 시대의 '복수법'이다. 당시 이 법의 주요 내용은 "개인적 원한이 있다면 마음대로 복수를 해도 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전국적으로 복수의 피바람이 불었으며 개인적 원한이란 것 자체가 정확한 기준 따위가 있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복수를 빙자한 사적제재가 전국적으로 벌어졌다고 한다. 당시에도 자신의 폭력욕구 해소를 위해 별 이해관계가 없는 상대를 원한이 있다면서 위해를 가한다거나 쾌락살인마가 있었을 것이기에 당연한 결과라고 기록하고 있다. 더구나 이 당시엔 국가를 불문하고 전쟁도 거의 수시로 터지고, 내전도 거의 걸핏하면 일어나고, 공권력과 범죄집단 사이의 전투도 거의 툭하면 일어나던 세상이라 그렇잖아도 성격이 거칠거나 전투의 영향으로 정신병이 생긴 사람들이 지금보다 많았을 시대였으니 이 복수법은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물론 1년도 안 되어서 취소됐다. 

『법정유희』에 따르면 로스쿨 내에서 법률에 저촉되는 사건이 발생한 경우, 피해자는 무고 게임을 신청할 수 있다. 피해자는 증거를 모아 범인을 지목하고, 심판자의 심증 또한 그와 일치하면 범인은 벌을 받는다. 하지만 무고한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할 경우, 거꾸로 피해자가 벌을 받는다. 엄밀히 말하자면 사적제재는 법으로 금지되는 사적제재와 법으로 인정되는 사적제재로 나뉜다고 한다. 다만, 흔히 사적제재라고 하면 법적인 절차 없이 내려지는 형벌을 지칭하는 것이므로 좁은 의미인 사적으로 내리는 형벌을 금지한다고 한다는 것. 사실 사적제재가 허용되는 상황에서는 돈이나 권력이 있는 자들이야말로 사적제재를 그야말로 전쟁 수준으로 저지를 수 있지만 반대로 권력이 없는 일반인들은 이에 대한 응징은커녕 몸 사리기도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될 우려가 있다. 또 일반인들은 되레 이 권력이 있는 자들이 특정인에 대한 사적제재를 지시했을 때 그대로 따라야 할 수도 있다.



이 소설 작품은 법률가를 꿈꾸며 호토대학교 로스쿨에 재학중인 구가 기요요시, 오리모토 미레이, 그리고 무고 게임의 심판자 유키 가오루. 어느 날 구가 기요요시의 과거를 폭로하는 글과 사진이 로스쿨에 나돌고, 오리모토 미레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에게 협박당한다. 몇 년 후, 변호사가 된 구가 기요요시에게 무고 게임의 초대장이 도착한다. 발신자는 유키 가오루. 오랜만에 찾은 모교 모의 법정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피를 뒤집어쓴 오리모토 미레이와 유키 가오루의 시신이었다. 피해자, 피고인, 변호사로 다시 얽힌 세 사람. 모든 이야기는 복선이 되고, 최후의 법정으로 향한다. 

로스쿨 학생에게 법정의 경험이 될 수 있다는 무고 게임. 여기서 말하는 무고게임은 피해자가 범인을 특정하여 심판자에게 처벌을 맡기고 그 죄가 인정되었을 때 동해보복으로 같은 죄값을 받는다. 이것이 그들이 정한 무고 게임의 원칙이다. 사실 무고죄를 규정한 중국에서부터 이 같은 무고죄에 대한 법률적 규정이 명문화 돼 있다. 명나라 때 완성된 법전 〈대명률(大明律)〉에 "사실이 없는 일을 거짓으로 꾸며 해당 기관에 고소하는 일을 한 자(무고(誣告)하는 자)에 대한 규정을 두고 있다.(한국고전용어사전) 이에 따르면 남을 태형에 해당한 죄로 무고한 자는 그 무고한 죄에 2등을 더하여 처벌하고, 유형·도형·장형에 해당한 죄로 무고한 자는 3등을 더하되, 각각 장(杖) 1백, 유(流) 3천 리에 그치며, 무고를 당한 사람이 사죄(死罪)로 형이 집행되었으면 무고한 사람은 사형으로 반좌(反坐)하고, 형이 집행되지 않았으면 무고인은 장(杖) 1백, 유(流) 3천 리에 형에 3년간의 노역을 더한다. 

같은 로스쿨의 학생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법정 미스터리인 이 소설은 자신에게만 가혹했던 인재의 죽음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출간 후 15만 부를 돌파하며 2023년에는 영화로도 개봉됐다고 하니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이 작품은 연속된 복선으로 제대로 된 법정 스릴러의 맛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에 몰입도 또한 크다. 현직 변호사가 집필한 소설이라 법이나 법정 용어가 많이 인용되고, 재판권이 인간에게 부여된 것까지 경계의 눈빛을 보내기도 한다. 일반 사람들이나 독자들도 대부분 법에 대해 문외한이다. 법은 엄격한 법치주의로서 국가를 인정하고 법의 의해 국민의 생명과 안전, 삶을 보장하는 목적이어야 하는데 잘못 적용될 경우 오히려 인간의 삶과 생명을 앗아가는 흉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법이 어려운 것이다.



이 소설 『법정유희』는 2부로 이루어져 있다. 로스쿨의 세 동급생이 휘말리는 〈제1부 무고 게임〉과 로스쿨 졸업 후 그들이 피해자, 피고인, 변호사로 다시 만나는 〈제2부 법정유희〉다. 앞서 언급한 대로 등장인물들이 다닌 로스쿨에는 ‘법률에 저촉되는 사건이 발생한 경우, 피해자는 천칭 일러스트와 함께 무고 게임을 신청할 수 있다. 피해자는 증거를 모아 범인을 지목하고, 심판자의 심증 또한 그와 일치하면 범인은 벌을 받는다. 하지만 무고한 사람을 지목할 경우, 거꾸로 피해자가 벌을 받는다.’는 모의법정을 여는 제도가 있다. 이 소설은 로스쿨 학생들의 치기 어린 사적제재인 ‘무고 게임’을 벌인다. 게임이 시작되기도 전에 뜻밖의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이어 본격적인 형사재판으로 이어진다.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연결된 두 파트와 곳곳의 다양한 에피소드들은 언뜻 보기에 살인 사건과 아무 관계도 없어 보이지만, 경악할 만한 진상이 서서히 밝혀지면서 모두 복선으로 작용한다. 저자가 철저히 복선을 깔아두고 스토리를 진행한 것이다. 치밀하고 모두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어 눈치를 채기 쉽지 않다. 

‘왜 사건이 일어났는가?’, ‘사건을 일으킨 인물은 누구인가?’, ‘그 인물이 사건을 일으킨 목적은 무엇인가?’ 질문의 답이 하나씩 밝혀질 때 독자는 모든 것이 뚜렷한 한 선으로 연결되는 쾌감을 맛볼 수 있을 것 같다. 『법정유희』가 탁월한 법정 미스터리이면서도 본격 미스터리로서 왜 극찬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소설은 본격적인 법정 드라마이고, 수수께끼와 반전이 있는 탁월한 미스터리이다. 한편으론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청춘 군상의 드라마이기도 하다. 창작 당시, 법률가를 목표로 했던 사법연수생 이가라시 리쓰토는 극적인 서사 구조를 통해, ‘법’과 ‘재판’의 존재에 대해 흥미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법정유희』는 제가 알고 있는 법의 매력을 최대한 담아낸 소설입니다. 다 읽었을 때 법과 재판에 대한 인상이 달라졌다면, 흑과 백 사이의 회색을 생각해 주신다면, 저자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출판사 측은 전한다.

사건의 진상이 드러날 즈음, 저자의 소감처럼, 이 책은 독자들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다양한 질문들을 던진다. ‘신이 아닌 불완전한 인간이 누군가를 심판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적정한 양형이란 무엇인가?’, ‘진정한 피해자의 구제란 무엇인가?’ 등. 사실 이런 질문은 법 문외한들에게는 어렵긴 하지만 우리나라 TV에서 방영한 수많은 법정 드라마나 수사 드라마 등에서 자주 던지는 질문들이다. 대답하기는 어렵지만 낯선 질문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모서리가 깎여서 둥그스름해진 글자, 과도하게 각진 글자, 시간과 공간이 통째로 일그러진 듯한 글자, 멈춤과 파임이 강조된 글자, 도장에 새기는 서체처럼 가공된 글자.

분명 글자마다 완전히 다른 이미지가 느껴졌다.

무고의 제재(無辜の制裁)

화선지에는 이 다섯 글자가 난잡하게 줄지어 있었다.

“무슨 뜻이야?”

그 질문에 나는 나 자신에게 들려주듯 대답했다.

“이게 사건의 진상인지도 몰라.”(p.249)


저자 : 이가라시 리쓰토(いがらし りつと, 五十嵐 律人)


현재 가장 주목받고 있는 일본 미스터리 최대 신인. 1990년 이와테현 출생. 도호쿠 대학 법학부와 동 대학원을 수료하고 사법 시험에 합격 후, 현직 변호사이자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본명은 이가라시 유우키로, 이가라시 리쓰토라는 필명을 사용한다. 2020년 《법정유희》로 화려하게 데뷔, 이후 《불가역소년不可逆少年》, 《원인에 있어서 자유로운 이야기原因において自由な物語》, 《육법추리六法推理》, 《뒤틀린 시간의 법정幻告》, 《마녀의 원죄魔女の原罪》, 《한밤중 법률 사무소?夜中法律事務所》 등 법률의 매력을 전하기 위하여 꾸준히 소설을 발표해 왔다. 《법정유희》는 제62회 메피스토상 만장일치 수상을 시작으로, 그해 〈주간문춘 미스터리 베스트10〉 4위, 〈미스터리가 읽고 싶다!〉 3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3위에 올랐으며, 2021년 코믹스, 2023년 영화로까지 제작되며 법정 미스터리와 엔터테인먼트가 완벽하게 결합된 걸작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뒤틀린 시간의 법정》은 타임 슬립과 법정 추리를 융합한 복합장르 소설로, 법원서기관인 주인공이 우연한 계기로 5년 전 아버지가 형사재판을 받던 날로 돌아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출간 직후 각종 매체와 독자들로부터 기발한 착상 아래 치밀하게 설계된 로직, 차원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탄탄한 필력, 사법부의 책임 등 다양한 사회적 메시지를 균형 있게 잘 녹여냈다는 평을 받았다. 저자는 리얼한 사건 전개에 몽환적인 SF 요소를 접목한 이 책으로 명실공히 대체 불가한 미스터리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오늘도 여전히 법조인으로 활약하며 왕성한 집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역자 : 김은모


일본 문학 번역가. 1982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북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일본어를 공부하던 도중 일본 미스터리의 깊은 바다에 빠져들어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직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작가의 작품을 소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테후테후장에 어서 오세요』, 『너는 기억 못하겠지만』, 『별 내리는 산장의 살인』, 『여자 친구』를 비롯하여 아시베 다쿠의 고바야시 히로키의 『Q&A』, 미치오 슈스케의 『투명 카멜레온』, 『달과 게』, 『기담을 파는 가게』, 이사카 고타로의 『화이트 래빗』, 『후가는 유가』 야쿠마루 가쿠의 『우죄』, 고바야시 야스미의 『앨리스 죽이기』, 『클라라 죽이기』, 『도로시 죽이기』, 지넨 미키토의 병동 시리즈 『가면병동』, 『시한병동』, 누쿠이 도쿠로의 『미소 짓는 사람』, 『프리즘』, 미야베 미유키의 『비탄의 문 1, 2』, 이마무라 마사히로의 『시인장의 살인』, 『마안갑의 살인』을 비롯하여, 미쓰다 신조의 ‘작가’ 시리즈, 아비코 다케마루의 ‘하야미 삼남매’ 시리즈, 『지나가는 녹색 바람』, 『검찰 측 죄인』, 『달과 게』, 『성스러운 검은 밤』, 『열대야』, 『밀실살인게임』, 『사이언스?』,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592 진주성 - 전라도로 가는 마지막 관문
정용연 그림, 권숯돌 글 / 레드리버 / 202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임진왜란은 우리 한민족 역사상 외적으로부터 받은 가장 큰 인적·물적 피해를 입은 전쟁이다. 전 국토(한반도)가 7년 간 유린됐으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임진왜란 전 조선의 인구는 1409만여 명(1591)에서 1175만여 명(1598)으로 줄었다. 임진왜란 동안 무려 250만 명 이상이 죽거나 포로로 잡혀 갔다는 이야기다. 농지 또한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없었다. 농사 짓는 인구가 줄어든 데다 수많은 토지가 황폐화됐기 때문이다. 한 조사 통계로는 세종 때 150만 결에서 선조 때는 100만 결, 광해군에 이르러서는 50만 결로 엄청나게 줄었다. 청나라가 침입하기 전에 이미 조선의 경제는 붕괴되었음을 뜻한다.

임진왜란을 돌아볼 때 우리는 으레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떠올린다. 역사 교육을 통해 수없이 반복되었고, 이순신은 우리 민족에게 불멸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순신의 업적은 전 세계 해군에서 배울 정도로 뛰어난 전술에 있다고 한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일 이순신 장군이 없었다면 조선과 우리 민족은 멸망했을지도 모른다. 이순신의 애국애민 정신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기린다. 임진왜란 동안 조선군은 주로 패배만 했다. 이순신의 수군 빼고는 열 손가락도 안 된 횟수지만 곳곳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육군도 승전을 한 적이 있다. 가장 큰 전투는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이고 다음으로는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1차 전투)'이다. 이순신의 한산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꼽는다. 

1592년 제1차 진주성 전투는 김시민 장군과 그의 부하, 휘하 병사들, 진주성 사람들이 힘을 합쳐 전라도로 가는 마지막 관문인 진주성을 사수해낸, 임진왜란의 결정적인 전투라고 군사학자들은 말한다. 당시 충분한 전투 경험이 있는 왜군은 철저한 준비로 부산에서 서울까지 채 한 달도 안 걸렸다. 거의 육지 방어가 힘을 쓰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1차 진주성 전투는 역사 책에 기록된 것보다 큰 의미가 있음을 이 책 『1592 진주성』을 통해 알 수 있다.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왜군은 끝내 진주성을 넘지 못했고, 조선의 곡창지대 전라도를 차지할 수 없었다. 이는 보급에 차질을 빚고 결국 왜군의 패배로 이어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역사서에도,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배울 때에도 진주성 전투는 김시민 장군 한 사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것은 어느 전쟁이거나 마찬가지지만 임진왜란 당시의 우리 군의 전투는 체계적이지도, 사전 준비도 없었기에 수많은 민초들이 낫과 곡괭이 등 농기구로 전투에 참가하고 행주 산성에서는 아낙네들의 행주에 돌을 날랐기에 승전했다고 기록되고 이곳 전투 현장의 이름도 '행주산성'으로 기록되었다. 수많은 이들이 군적에 이름이 없었기에 희생되고나서도 이름을 남길 수도 없었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천민 등은 이름마저 없거나 이름이라고 특정할 수 없는 보통명사들이기에 이름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적장을 껴안고 함께 남강에 뛰어들어 적장을 죽인 기생 논개의 의절 또한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왜의 지휘 장군을 죽였기 때문일 것이다. 진주성 전투 역시 김시민의 이름을 지우면 떠오르는 것이 많지 않다. 오늘의 우리와 멀어질수록 그곳에 사람이 살았음을 실감하기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 권숯돌은 당시 민초들의 희생정신을 높이 기리는 차원에서 그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놓지 않고 역사 속 사람 냄새를 이 책에 담아냈다.

"진주성에는 한 사람의 영웅만 존재하지 않았다. 김시민을 비롯한 사람들이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자아낸 비범한 힘이 노도처럼 밀려들던 왜군의 발목을 붙잡고, 동아시아를 태풍처럼 집어삼키려던 왜군의 야욕을 잠재웠다"고 저자는 진주성 전투를 평가한다. 이 책 『1592 진주성』을 통해 430여 년 전으로 돌아가는 일은 역경에 대처한 우리 조상들의 용기와 삶의 의지를 배우는 좋은 역사적 실증이 될 것이다. 배어 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한마음이 되어 돌을 깨고 물을 끓이던 진주성 사람들이 바로 옆에 있는 사람처럼 살갑고 친근하게 다가올 것으로 기대되는 이유다.



앞서 언급한 대로 오늘의 우리와 시간과 공간이 멀어질수록 그곳에 사람이 살았음을 실감하기란 쉽지 않다.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도 마찬가지다. 430여 년이란 시차를 한줄기 역사 의식으로 거슬러 올라가기엔 힘이 부칠 때가 많다. 그러나 이 땅 조선에서 벌어진 전쟁이기에 그나마 정확한 기록을 찾아낼 수 있다. 침략국은 물론 아무리 좋은 우방이라도 우리의 시선과 같지는 않을 터, 이런 점에서 조선의 '기록 정신'은 후손들이 배우고 익혀야 할 소중한 무형의 자산이기도 하다. 임진왜란은 사실 이순신, 선조,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 몇몇 주요 인물과 사건명을 지우면 떠오르는 것이 많지 않다. 사료에 기록되기 어려운 말단 병사, 백성이 전란을 어떻게 겪어냈는지 알기란 더욱 어렵다. 전 국토와 전 국민이 전란에 휩싸였는데 모든 병사나 의병, 그리고 부인네들의 조력은 기록 자체가 어려울 것이다. 이 때문에 '역사적 상상력'도 중요하다. 물론 실증된 사실과 인물이어야 한다. 

전 국민이 참여하더라도 그들을 모두 적는 일은 어쩌면 무의미한 일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사람의 영웅을 중심으로 역사를 기억하려는 유혹에 강하게 끌린다. 그게 기억하거나 선전하기 간편하고, 선악이 분명해 매력적인 서사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웅 중심의 기억은 과연 얼마나 역사적 사실에 가까울까?하는 생각은 접어두어도 괜찮다. 우리네 삶도 켜켜이 누적되어 언젠가 역사로 남을 것이다. 우리 삶에 신화적 영웅이 있던가? 영웅이 아닌 우리는 그저 영웅을 추종하는 삶을 살다가 잊혀질 수동적인 존재인가? 영웅의 후광이 강하게 빛날수록 우리의 눈은 어두워지고 역사의 다채로움은 가려진다는 것이 이 책의 저자가 가지는 '역사 의식이'다. 

저자의 역사 정신은 이 책을 통해 임진왜란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을 보여준다. 김시민 장군의 리더십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 함께 승리를 일군 평범한 사람들에게 정당한 몫의 조명을 비출 뿐이다. 1592년 제1차 진주성 전투는 김시민 장군과 그의 부하, 휘하 병사들, 진주성 사람들이 한마음이 되어 전라도로 가는 마지막 관문인 진주성을 사수해낸, 임진왜란의 결정적인 전투다. 이때 왜적에 대항해 전투에 참여한 이들을 역사의 전면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저자는 여기에 맞춰 이 책을 썼다.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왜군은 끝내 진주성을 넘지 못했고, 조선의 곡창지대 전라도를 차지할 수 없었다. 수군은 이순신에 의해, 육군은 김시민에 의해 전라도를 점령해 곡식을 확보하려던 보급전은 실패한 것이다. 지금 전투와는 달리 옛날 전쟁에는 보급이 전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다. 인구가 가장 많은 중국 대륙의 통일 황제가 우리나라를 쳐들어 올 때 30만~100만 대군이란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는 실제 전투병은 3분의 1정도 일 뿐이다. 보급선이 길어질 경우 전투원의 숫자는 더욱 줄어든다. 얼마 전 〈고려거란전쟁〉이란 드라마가 관심을 끌었다. 고려의 자주국방 의식을 크게 부각했다. 거란의 여섯 차례에 걸친 대군으로 침략해 들어온 것을 모두 막아내고 마지막 3차 침입 때는 10만 대군 중 살아 돌아간 사람이 겨우 3,000명 안팎이었다고 하니 말 그대로 궤멸됐다. 거란은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얼마 못 가 멸망에 이른다. 이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던 점은 군 체제에 대한 정확한 해석과 고려의 자주 국방 의식, 전쟁 수행 능력 등이 잘 드러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장군의 전술 능력보다 개별 병사의 전투 의지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 등이 잘 나나탄 것으로 평가된 드라마다. 진주성 전투가 임진왜란 전체의 판도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같은 의미로 합리적이고 설득력을 갖춘다. 당시 철저히 준비된 왜군은 여러 전투에서 위력을 떨쳤지만, 결국 전쟁에서 패배하게 된다. 진주성에서의 승리는 평범한 사람들이 자아낸 비범한 역사였다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1592년 제 1차 진주성 전투 시 왜군은 조선에 침입한 이래 조선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였지만 곡창지대인 전라도 지역은 점령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러한 처지에 있었던 왜군은 전라도로 가는 경상우도의 대읍(大邑, 오늘날 도시)인 진주를 먼저 점령하고자 하였다. 더욱이 경상우도 조선의 주력 군대가 진주에 주둔하고 있다는 첩보를 가지고 진주를 공격할 계획이었다. 9월 말께 왜장 나가오카·하세가와 등은 2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창원과 함안을 거쳐, 편대를 2갈래로 나누어 진주를 향해 공격해 오고 있었다. 이 당시 진주에는 진주목사 김시민이 이끄는 군사 3,700여 명과 곤양군수의 이광악이 이끄는 군사 100여 명이 고작이었다. 같은 시기 왜군이 진주를 향해 공격해 온다는 소식에 접한 경상우도순찰사 김성일은 각지에 원군을 요청하고 있었다.



10월 5일 왜군 선봉대가 진주에 이르자 김성일 등은 진주의 남녀노소 주민들까지 동원하여 이들까지 무장시켰다. 이튿날 나가오카 휘하의 왜군 약 2만 명은 3개 부대로 편성, 2개 부대는 동문 밖에서 성이 내려다보이는 산 위와 동문를 지나 봉명루 앞에 각각 진을 쳤으며, 나머지 1개 부대는 봉명루 앞의 왜군들끼리 합세했다. 이후 11일까지 조선군과 왜군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조선은 진주성 내의 군사와 주민들이 왜군과 정면으로 대치했고, 진주성 밖에서는 응원군인 의병과 지원군들이 배후에서 왜군을 교란했다. 이때 진주성 내의 조선군은 의병장 김시민 등이 동문 북쪽에서 현자포를 발사하면서 적의 심장부를 공격하였고, 판관 성수경 등은 동문에서 군사를 지휘했다. 북문 쪽에서는 전 만호 최득량과 군관 이눌이 분전하였다. 목사 김시민이 왜적의 탄환에 맞아 쓰러지자 곤양군수 이광악이 대신 작전을 지휘해 많은 적을 살상했다.

성 밖에서는 곽재우가 의병 200명을 이끌고 배후에서 공격하고, 임시 고성현령 조응도, 복병장 정유경 등도 군사 500명을 이끌고 진현 고개 위에 올라가 배후에서 왜군을 위협했다. 또한 합천가장 김준민, 별장 정기룡 등이 왜군과 대결하고, 의병장 최경회 등도 2,0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진주로 와서 적의 배후를 교란했다. 얼마나 처절한 전투였는지, 결사 항전의 각오로 싸우는 조선 사람들의 전투 의지에 적의 기세가 꺾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진주성 내의 관군민들은 힘을 합쳐 협력하면서 죽을힘을 다해 활·진천뢰·질려포·돌과 불에 달군 쇠붙이 등을 무기로 하여 적의 공격을 줄기차게 막아냈다고 역사서는 기록하고 있다. 또한 성내에서는 준비한 끓는 물을 적에게 붓거나 적진에 불을 붙이기 위해 짚에 불을 붙여 던지면서 적의 공격을 줄기차게 막아냈다. 이 싸움에서 왜군은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결국 패퇴했다. 다음해 벌어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조선은 김천일 장군과 많은 의병장 및 의병 등 7만여 명이 합세해 1차 때처럼 끈질긴 항전을 벌였으나 노련한 전투요원 부족으로 성을 내주고 만다. 진주성 전투는 1, 2차 모두 조선에 커다란 교훈을 안겨주고 막을 내리지만 300년 후 또다시 일본은 조선 정복의 야욕을 드러낸다.



이 책 『1592 진주성』는 1592년 진주성 전투를 그린 그래픽 노블이다. 그래픽 노블은 만화와 소설의 중간 형식을 취하는 작품을 이르는 말이다. 일반 만화보다 철학적이고 진지한 주제를 다루며 스토리에 완결성을 가진 단행본 형식으로 발간되는 것이 특징이다. 이 책은 1차 진주성 전투가 주 배경이다. 모두 11화로 구분되어 있다. 이는 TV 드라마가 시리즈로 제작되며 각 주제별로 번호를 매기는 것과 같은 형식이다. 다만 사자성어로 이뤄져 독자들에게 쉽게 이해하고 잘 읽히도록 많은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하다. 1화 「강구연월」 2화 「마부작침」 3화 「누란지세」 4화 「초미지급」 5화 「연진천리」 6화 「무중생유」 7화 「풍림화산」 8화 「호각지세」 9화 「호마의북풍」 10화 「만천과해」 11화 「당비당거」 등이다. 사자성어를 모르는 독자들도 겁 먹을 일 없다. 각 장(章)의 사자성어에 대한 풀이를 책에 모두 해놓았다. 특히 이 책은 정용연 일러스트레이터의 그림이 세심하고 풍부한 표정으로 전면에 하지 못한 말들을 대신하는 노련함이 돋보인다. 또 책의 뒷 부분에 「진주성을 그리며 알게 된 것들」이라는 면을 따로 만들어 열 세개의 생소한 단어들을 설명하고 있다. 독자들의 역사 의식과 관심에 진일보할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독자도 궁금했던 '임진왜란 참전 왜군의 수'를 기술하고 있다. 배 1,500여 척, 군사 15만여 명이라고 알려져 있다. 당시 왜군은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략했다. 1차 침입이 1592년 임진년이어서 임진왜란이라고 통칭한다. 또 다시 물러갔다 2차 침입 때도 비숫한 규모의 재침략을 단행한다. 1592년 정유년의 일이다. 이를 정유재란이라고 한다. 햇수로 7년, 만 5년이 넘는다. 1차와 2차를 합쳐 모두 29만 8,700여 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1차 때가 15만 8.700여 명으로 약간 많은 정도이다. 진주성 침략 병력은 1차 침입 후 2차 때가 더 많다. 약 6만여 명이 증원됐다고 밝히고 있다. 1차 침략 때 참전한 기무라 시게코레, 하세가와 히데카즈, 가토 미츠야스는 나고야성의 예비대 병력이었다.(p.298)


저자 : 권숯돌


1972년 한국에서 태어나 이십대 후반에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삶의 반반씩을 한국과 일본에서 보내고 있다. 문학과 심리학 공부에 오랜 시간을 쏟았고 지금은 글과 그림으로 소통하는 일을 좋아한다. 글 작가로 참여한 작품으로 여성 의병장 윤희순의 생애를 극화한 『의병장 희순』(휴머니스트, 2020)이 있으며, 『진주성 1592(가제)』이 출간 예정이다. 현재 국학진흥원 웹진 「담담」에서 선인들의 일기를 소재로 작품을 연재하고 있다.


그림 : 정용연


1968년생. 멀리 모악산이 바라다보이는 김제 들녘에서 나고 자랐다. 청소년기엔 서울 청량리에서 신문 배달을 했고, 성인이 된 뒤에는 서울과 경기 지역에 살며 만화와 만화 아닌 일을 함께했다. 기술 문명보다는 사라져가는 것에 관심이 많다. 무너진 돌무더기에서 옛사람들의 삶을 떠올리고, 북한산을 바라보며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느끼곤 한다. 지금은 북한산 국립공원 끝자락인 사패산 아래에서 살고 있다.

[주간만화]에 단편 만화 ‘하데스의 밤’으로 데뷔. 월간 [민족예술], [한겨레]에 만화 연재. 월간 [작은책] 표지그림. 다큐멘타리 만화 [사람사는 이야기]에 ‘나무 이야기’를 그렸고 2012년『정가네 소사』1, 2, 3권을 출간, 이듬해 부천만화대상 우수만화상을 수상했다. 2015과 2016년 한국국학진흥원의 스토리테마파크 웹진 ‘談’과 서울시 홈페이지에 조선 시대를 무대로 한 중·단편 만화를 그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