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을 먹다 - 제13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진규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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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황하지 않은 그리고 자칫 진부할 수 있음을 참신(斬新)한 언어로, 또한 압축적 시간의 진행으로 세대의 공감을 형성 할 수 있는 속도감이 느껴지는, 그러나 알지 못하는 느릿한 흐름 속에 짙은 한과 안타까움이 파격적으로 뭉쳐진 사랑의 이야기이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조선 정조전후를 하고 있으나 독서시장의 시류를 형성하는 역사소설은 아니다. 대제학, 좌의정등 조선 사대부 최고 집안의 혈연으로 얽힌 중인, 평민을 아우르는 사회계층의 총합적 시선을 갖는 조명과 3세대에 이르는 시간의 흐름은 수천 쪽에 달하는 대하소설을 압축한 듯하다.

작품의 초반부는 심사평에서 누군가 고인이 된 작가 최명희의 ‘혼불’을 보는 듯하다 했으나 당해 작품의 망라된‘청암 부인’의 제례의식에서 보는 생경한 용어와 같이 예스러움과 민속학적 더듬이가 수반되는 긴장을 주긴 하지만 그렇듯 사전을 끼고 읽어야 할 정도는 아니며, 오히려 이야기의 양념처럼 여성의 섬세한 관찰력을 고양시키는 역할을 한다 할 수 있다.

혹독하고 처절한 사랑이야기이지만 표현 어디에도 천박하거나 자극적 묘사를 사용하여 의미를 과장하고 있지 않다. 등장인물들의 서신인 듯 일기인 듯 각자의 단편적 이야기로 그녀와 그들의 관계를 하나하나 풀어가게 한다. 장안의 난봉꾼인 대제학의 아들, 그를 아비로 하는 딸 묘연의 증오와 연민이 섞인 통증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순간 우리 여성작가들 작품의 한결같은 소재인 아비에 대한 아련한 비애감과 결핍의 증오가 반복 되듯이 다가와 읽기를 중단 할까하는 식상함의 충동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내 향이의 이야기, 여문의 이야기, 후인의 이야기, 설희의 이야기와 같이 낯선 인물들의 등장에서 이이는 누구의 이야기에 나왔던 자인데, 하며 더듬 수를 놓는 순간 작품에 푹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할아버지는 같으나 할머니가 다른 희우와 난이. 두 어린 야릇한 남매의 관계에서 그 끈질긴 인간 욕망의 절정을 보게 된다. 이를 근친상간(近親相姦)적 관계라 하는 것인가? 그래서 애닯다. 설희 어미와 묘연 아비에서 후평과 향이 어미, 향이와 여문, 희우와 난이에 이르는 비극적이고 치명적인 사랑의 이야기가 낮은 시내 소리처럼 잔잔히 흘러내린다.

작가의 어휘 하나, 문장 하나를 놓치지 않는 치밀한 표현들은 스토리와 주제의식, 구성의 정교함을 뛰어넘어 읽는 이들에게 신선한 생동감과 우리 문학의 풍요로움에 자긍을 불러일으킬 정도이다. 작품 전면에 흐르는 비통함, 비릿함, 정말 치명적인, 그리고 쓸쓸한 저녁 노을아래의 움울한 사랑이 책을 손에 놓고서도 시리다. 작가 김진규의 처녀작에 송두리째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심사하는 마음이 아니어야 한다. 비평하는 마음이어서도 아니 된다. 모처럼 우리 문단에 걸출한 작가가 탄생한 듯하다. 갈채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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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지식채널 - 가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본의 모든 것
조양욱 지음, 김민하 그림 / 예담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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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접 국가인 일본은 우리에게 그저 복잡한 심사를 안겨준다. 그래서 많이 알고 있는 듯한 이 나라에 나의 지식이란 편견과 선입견으로 그릇되고 옹색한 것으로 구성되어있다. 매년 150일 정도나 되는 일본에서의 체류를 몇 년간 지속하여오고서도 이러한 내 의지는 별로 바뀐 것이 없었을 뿐 아니라 실제 그들, 일본, 일본인에 대한 이해를 위한 작은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 작은 소책자가 담고 있는 짧은 단락들이 그들의 전통과 역사, 문화, 사회구조를 통해 의식의 뿌리와 가치관, 태도에 대한 높은 지식을 수확하게 해준다. 일본인들의 기본 생활공간인 주택문화에서 다다미를 비롯한 벽장, 불단등 공간의 구성과 이자카야, 야끼니쿠등 음식문화의 현상을 통해 삶의 친숙한 이해의 공간으로 안내하기도 하고, 기모노의 유래와 게다(나막신)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교차하여 그들의 전통에 대한 신념을 느끼게 한다.

일본인들이 찰나의 미에 탐닉하는 모습을 벚꽃과 하나비(불꽃놀이)를 즐기는 의식에서 발견해내고, 한점 흔적도 남기지 않고 순식간에 얼마나 깨끗이 사라지는가가 관건이란 듯이 “소모의 예술”이라고까지 미화한 그네들의 미학적 태도를 통찰하기도 한다.

또한 나보다 상대를 먼저 생각하라는‘오모이야리’라는 생활속 태도나 간바루, 잇쇼켄메이 등 그들의 정신(精神)속 구호들로부터 오늘의 일본을 구성하는 의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인류의 공존과 같은 국제화를 외치는 일본과는 달리 일본사회의 구석진 곳에 아이누, 재일(在日), 부라쿠민(部落民)과 같은 인종차별적인 태도와 같이 편협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음을 지적한다. 또한 야쿠자, 원조교제, 이지메등 부조리한 그네들의 사회현상과 구조의 뒤안길을 조명하고, 사무라이의 정신이 함축하는 함축적인 사적 의미나 계승되어 스며있는 일본인들의 내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위와 같은 전통과 사회구조, 정신에 대한 소개뿐 아니라 월세방의 계약시 관습과 부동산중개소의 실태, 전철의 막차(슈덴(終電))가 갖는 일상속의 지혜, 복권번호가 있는 연하장(넨가죠)의 아이디어등 생활에 드러나는 그들의 일상이 재미있게 소개되기도 한다.

일본에 유학을 준비하는 사람, 비즈니스를 위해 일본인들과 마주해야 하는 사람, 여행을 하려는 사람뿐 아니라 이웃나라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그네들의 오늘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아내고 대비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유익한 지침이 되기도 한다. 무력 포기와 군사력 불보유, 교전권 불인정이란 내용을 포함하는 일본 헌법 제9조의 2개항의 개정이 갖는 의미는 인접국인 우리로서의 대응과 준비라는 측면에서 자못 심각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며, 이웃나라의 영토에 대한 탐욕과 신사(神社)참배와 같은 모욕적 행위의 지속과 같은 파렴치를 지속하는 그들의 야심을 경계치 않을 수 없게 하기도 한다.

“일본 지식 채널”에는 정말 많은 정보가 담겨져 있다. 일본 최고의 문학상인‘아쿠타가와상(芥川償)’의 유래와 수상자들의 면면, 일본최고의 고전작품인 주신구라(忠臣藏)등 문학인들이 흥미롭게 볼 이야기까지 풍성한 정보가 그득하다. 바로 우리 옆에 있는 그들에 대한 바른 인식과 이해는 우리의 오늘과 미래의 준비에 있어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이 작은 책이 그러한 출발에 충분한 자원이 되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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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
김종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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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골에 소름과 전율이 좌르륵 흘러내리는 진저리를 몇 번인가 치다보면 어느덧 작품의 말미에 이르러있을 정도로 이야기의 재미에서 시선을 뗄 수 없게 한다. 기시감이란 그 음험한 느낌의 언어에서 적나라한 살인의 묘사와 죽음 앞에 몸서리쳐대는 추악한 인간의 양면성이 그 형태를 달리하며 반복될 때 마다 내 몸 어딘가가 파헤쳐지는 듯 고통스러움에 머리채를 흔들게 된다.

꿈을 꿀 때마다 피살자로 빙의되고 살해자를 확인하는 거듭되는 악몽과 피살되는 인간의 수만큼 사라지는 나의 손톱, 약지에서 검지, 중지, 그리곤 어느 날은 세 개씩,...생 손톱이 사라진 곳의 통증과 선홍색 피, 꿈과 실재의 혼란이 착란처럼 다가온다. 빙의되었던 피살자인 나를 죽였던 인간이 실재한다.

‘라만고(Ramango)’, 악몽을 꿀 때마다 내 손톱을 먹어치우는, 인간본연의 영혼을 지옥으로 내치고 그 육신에 깃들어 원소유자로 살아가는 심판자! 이 괴물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 작품의 중요한 단서이자 핵심 소재로서 라만고는 인간에 내재하는 악의 정화자로서의 영적 존재임을 알려준다.

무참하게 살해된 자신의 여섯 살 아이에 대한 상실의 고통, 그리곤 이혼한 남편의 사망, 주변의 화냥년이라는 비난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32세의 여인, 홍지인의 악몽은 이렇게 지속되고 악몽을 현실 속에서 또렷이 찾아 헤맨다. 점점 가까이 엄습해오는 알지 못하는 죽음의 그림자, 네일아트의 공동 운영자인 친구 민경과 연인 세준까지 악몽의 주인공이 되어 모습을 나타낸다.

선택적 기억상실증, 우리 인간의 뇌는 자아의 생존 확률을 높이도록 진화되어왔다. 내 일상의 안위와 즐거움, 내 욕구의 실현을 위해 방해되는 고통의 기억을 지우는 이기적 기능을 멋지게 수행해낸다. 내가 믿는 나의 기억은 온전히 올바른 것일까? 이 작품이 인간의 원죄적 악(惡)을 말하지는 않지만 인간에 내재하는 악을 내몰고 자신을 정화하여 재생(再生)하는 고통의 본질을 처절하게 표현하고 있음에는 틀림없다.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뜨끈한 피가 팔목을 흘러내린다...머리의 뒤, 페부, 내장 깊숙이 파고드는 손톱의 난자, 쏟아지는 내장을 움켜쥐고..., 공포와 전율이 흐르는 그야말로 공포스릴러의 진수를 보여 준다. 젊은 작가의 상상력 넘치는 대단한 스토리와 야무진 구성이 돋보인다. 뛰어난 장르소설로서 또한 그 내재하는 인간 숙원의 선과 악의 본질을 탐험하는 악몽의 여행은 우리들이 자행하는 왜곡된 진실에 대한 어두운 이면을 재생의 밝음으로 견인하는 역량으로까지 나아간다. 많은 독자들이 새롭게 형성될 것처럼 보인다. 다만, 부분적으로 작가의 다듬어지지 않은 중복되는 어휘의 사용이 독서를 이따금 방해하지만, 작품의 치밀성과 구성의 정교함, 신선감 넘치는 이야기의 전개는 수준 높은 장르문학의 가능성을 기대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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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 진화가 준 최고의 선물
조너선 밸컴 지음, 노태복 옮김 / 도솔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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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나아가 자연의 모든 생물과 인간의 차별이란 가능한 것인가? 인간이 저만치 서서 홀로이 우월한 개체라고 오만을 부리는 것은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하는 자문(自問)을 던진다. 진화론적 측면에서 우리들 인간보다 더 오랜 시간 진화를 거쳐 온 생물들에게 감성이란 것이 존재치 않는다는 발상의 근원은 타당한 것인가? 과학에서 조차 동물들이 즐거움을 가지리라는 연구는 헛된 망상으로 치부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고 따라서 이에 대한 축적된 연구나 지식이 일천할 수 밖에 없음을 저자는 안타까워한다.

그럼에도 저자는 동물들은 정서적 감정과 의식적인 사고가 있다는 관점에서 그의 주장을 전개하고 있으며, 오늘의 대다수 권위를 인정받는 생물학자, 진화론자들의 동물에 대한 편견, 즉 “동물은 생존 투쟁에서 벗어난 휴식의 순간은 극히 드물다.” 또는 리처드 도킨스의 <에덴의 강: 생명에 관한 다윈주의적 관점>의 표현에 등장하는“다른 동물은 두려움에 벌벌 떨며 살려고 도망 다니며”와 같이 자연계에는 손톱만큼의 평화와 평온도 존재치 않는다고 결론짓는 그릇된 시선과 태도를 지적한다.

인간들은 동물이 하는 어떠한 행위에도 그들의 생존과 종족 번식에 기여하는 행동이라고 인간 본위적인 시각에 맞추어 대는 것과 같이 해당 동물로부터‘즐거움’이란 감정을 배제하는 과학적 판단에 정면에 서서 반박하고 있다.

그렇다면 저자가 주장하듯이 동물의 즐거움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으며, 실제 그렇게 판단해야 할 만한 동인(動因)과 과학적 타당성(반복적 입증 가능성)이 있는 것일까? 이 저술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제2장은 이러한 의문에 대한 연구와 조사사례들을 수록하고 있다.

동물들의 즐거움에 대해서 놀이, 먹는 행위, 교미, 접촉, 그리고 사랑과 미의식과 같은 초월적 즐거움에 대해 반박하기 어려울 정도의 사례들이 소개되고 있다. 놀이가 동물들이 살아남고 성공적인 삶을 누리는데 도움을 준다는 종족의 보호와 진화론적으로도 타당한 논리로서 저자의 설치류(쥐)에 대한 실험을 비롯해 놀이라고 보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듯이 놀이라고 판단 할 만한 사유들을 소개한다. 또한 맛의 진화와 같이 동물의 먹이에 대한 선택적 행동과 균형 잡힌 식사등의 선호등과 같은 실험을 통해 생존만을 위한 행동으로서 먹이를 구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도 한다.

인간이 유일하게 번식 행동으로서가 아닌 성적 접촉을 하는 동물이라는 견해는 저자에 의해 여지없이 무너진다. 많은 동물들이 번식을 위한 교미가 아닌 접촉을 통해 즐기는 즉, 즐거움을 찾기 위한 행동으로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다수의 관찰과 조사를 통해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저자는 이와 같이 다양한 관찰, 조사, 실험, 연구를 통해“자연 선택과 같은 종의 유전적 연속성을 확보하기 위한 행위로서만 동물들의 행동을 해석하는 과학적 추구는 자연계의 전체적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없다”고 진화론적 해석만을 주장하는 인식에 반론을 제기한다.

다만, 저자의 아쉬움과 같이 이 저술의 상당한 근거들이 일화(一話)적 사례에 의존하고 있어 이의 과학적 증거로서의 가치가 훼손되고 있으며, 인간들의 감성에 호소하고 있음으로 인해 이론적 타당성을 획득하기에는 다소의 무리가 존재하고 있다.

또한, 동물의 감정과 의식적 사고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서 인간의 먹이와 생존에 대한 회의적 시각을 유발하고 있음은 많은 논쟁의 여지를 던진다. 인간이 인간과 동일하게 아픔과 슬픔, 즐거움, 그리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사고한다고 할 때 도덕적으로 해당 동물을 인간의 먹이로서 살해할 수 있는가의 문제와 같다. 자연계의 진화라는 거대한 굴레속에서 인간은 또한 나름의 생존방식으로 많은 동물을 먹이로서 인식해왔다. 저자의 궁극적 주장인 우리에게 더 이상 동물을 먹이로 인식하지 말 것을 주문하는 것은 자연의 진화방식에 대한 새로운 거스름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또 다른 인간의 오만 아닌가?

성장한 동물과 새끼들의 놀이를 통하여 싸움으로 번지지 않고 새끼와 같은 약자를 배려하기 위한 핸디캡을 만들어내는 그들의 균형되고 제한된 행위를 통해‘도덕율’의 본질이 내재하고 있다는 설명과 같이 저자의 주장은 파격적이고 발칙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 저술에서 제기되고 있는 동물의 즐거움에 대한 연구가 인간의 이기적이고 실리적인 측면에서만 진행되는 동물의 통증 연구와 같이 보다 많은 연구조사가, 많은 시간 축적되고 수행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에 대한 발제(發題)로서 의의는 탁월하고 시의(時宜)적 이라 할 수 있다.

- 동물의 도덕적 행동에 대한 신념을 설명하는 내용 中에서

자연 선택은 다른 이들에 대해 관심 갖기를 선호한다고 짐작 할 수 있다.
도덕성이 적응에 이롭기 때문에 진화되었다고 믿는다.
미덕은 그 스스로가 보답이 된다. 공정 할수록 적응에 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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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종의 라틴화첩기행] 서평단 알림
김병종의 라틴화첩기행 문학동네 화첩기행 5
김병종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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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인생에 깊은 감동을 선사해준 사람들, 그리고 의식의 저 뒤편에 자리하고 항상 동경을 자아냈던 자연의 풍광을 찾아 나서는 설레임과 즐거움을 무엇이라 표현 할까?

김병종의 라틴 기행은 울긋불긋한 황홀한 색채의 열정에서 자욱한 해무(海霧)의 공허함까지 우리 사람들이 쫒는 그 이상의 세계를 소설의 한 장면 한 장면이 지나가듯이 읊조린다.

그가 지나가는 자연과 사연들, 그리고 도시와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너와나 그리고 그 대상이 서로 다르지 않은 일체감을 갖게 한다. 다름 아닌 감정이입의 시적 향취가 물씬 풍기는 그의 글속에서 평온하게 교차하는 라틴의 정열과 슬픔을 같이하게 된다.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Buena Vista Social Club)의 재즈선율과 빗물에 튀기는 기타소리가 태양과 열기의 도시 아바나와 교묘히 어울리며 잊혀진 추억으로 빨려들게 한다. 20세기 불세출의 작가‘헤밍웨이’의 파편이 묻어있는 암보스문도스 호텔, 카페 프로리디타를 따라 걷는 느낌이 여행자에게서 우리에게 그대로 전해져온다. 쿠바인에게는 사랑과 공기와 같은 존재,‘체 게바라’를 통한 억압과 차별의 역사, 아니 현실의 쿠바와 그들에 대한 연민의 정이 짙은 공감을 형성하게 한다.

시인이자 화가인 작가의 발길이 머무는 멕시코에서 우리는‘프리다 칼로’와 그녀의 푸른집을 마주하게 된다.“우울이 출렁이는 푸른색 깊은 곳”이라는 김병종의 표현처럼 고통의 격렬함 속에 그려진 그녀의 역동적 작품들이 그저 바로 옆에서 보여 지고 느껴지는 듯만 하다. 남미의 파리라 했던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그 관능적이고 격정적인 탱고의 선율을 선사한다. 그리곤 20세기 라틴문학의 스승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시구와 마주하며, 문학적 내음과 열정의 기묘한 기운을 느끼게 된다.

음악과 현란한 화폭, 지성과 삶의 숨결이 느껴지는 문학, 그리고 그 주체자인 추억의 인물들을 따라가는 발걸음으로 독서가 내내 즐겁다. 작가의 다듬어진 문장과 진솔한 내면의 소리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라틴 예술에 대한 뛰어난 에세이라 할 수 있다.

브라질의 삼바드로모,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 코르코바도 예수상, 마라카낭 축구경기장, 이구아수폭포 등 역사와 사회 이면의 외면된 고통을 어루만지고 인간으로서의 보편적 아픔을 공유하기도 한다. 안데스의 영봉아래 칠레의 산티아고에서 사실주의 현대문학의 거장인‘이사벨 아옌데’와 그녀의 작품 “영혼의 집”을 반추하며,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하는 네루다의 시(詩)에 잠시 빠져들어 잊었던 사랑을 괜시리 기억에서 꺼집어 내는 자신을 발견케 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세계의 끝을 찾아오는 건, 다시 돌아가기 위한 것”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짙은 안개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리마, 로맹가리(에밀 아자르)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반추하며, 인생의 석양을 보는 듯, 화첩을 덮는다. 아름답다. 과장하지 아니하는 진정함과 예향이 솔솔 묻어난다. 면면이 놓여있는 작가의 그림들도 독서를 흥겹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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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아 2008-02-12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단 선정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