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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도 좋고, 맛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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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산책 9권 - 연애열풍에서 입시지옥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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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어느덧 강준만의 <한국 근대사 산책> 9권이구나. 9권에서는 역사적인 사건이 아닌, 일제 시대, 특히 1930년대 우리 나라 사람들의 생활 문화와 풍습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단다. 그래서 부제도 <연애열풍에서 입시지옥까지>란다. ‘한국 근대사 산책이라는 제목 없이 부제만 본다면 오늘날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싶었어. 오늘날도 연애열풍, 입시지옥이라는 말이 꼭 맞으니까 말이야. 일제 강점기가 길어지면, 그것이 일상이 되어 가면서 강제로 근대화되긴 했지만 우리나라 보통 사람들도 그 사회에 적응을 해 나가는 듯 보였어. 그런 모습들은 9권에서 이야기를 해주고 있단다. 차례도 보면 여성문화, 대중문화, 소비문화, 생활문화, 중독문화 이렇게 되어 있단다. 지금까지 달리 역사적인 사건 없이 이야기가 펼쳐져 다시 지루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당시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도 괜찮았고, 보통 사람들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들도 있었단다.

1930년대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이라고 하는 신세대 젊은이의 모습들이 등장하였고, 사랑에 목숨 거는 것이 유행처럼 늘어났다고 하는구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자살을 하고, 도피하는 사람들도 많았어. 특이 기존 유교 중심의 사회를 깨고 신여성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등장했는데, 대표적인 이가 나혜석이 아닐까 싶구나. 나혜석은 아빠가 여러 책들을 통해서 이야기를 해서 오늘은 건너 뛸게.. 다만 아빠가 나혜석에 대해 몰랐을 때는 그냥 신여성이자 화가라고만 알았는데, 비참한 최후를 알게 된 뒤로는 나혜석의 이야기를 볼 때마다 가슴 아프고 안타깝고 그렇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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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9)

나혜석은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1021년 최초의 개인전을 가진 화가로 한국 근대 미술사에서 중요하게 자리매김되고 있다. 또 그녀는 한국 근대 문화사에서 최초의 여류소설가 역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안숙원은 그의 소설 <경희>는 한국 현대문학사상 최초의 페미니즘 텍스트라고 평가하면서 이 소설에 나타난 신여성론은 동시대 이광수의 민족개조론과 맞겨룰 만한 담론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나혜석은 여성도 사람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여성 계몽적 시 <노라>를 발표, 1920년대 계몽주의 문학의 중요 작가로 재평가 받고 있다. 이상경은 나혜석은 자유연애주의자가 아니라 자기 성취를 추구하며 온몸으로 계몽주의 사상을 밀고 나갔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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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여성이라고 부르는 이들 중에 박인덕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자신이 남편에게 위자료를 던져주고 이혼을 한 뒤에 미국으로 가서 공부를 해서 박사 학위까지 받고 다시 국내로 와서 이런저런 활동까지 했다는구나. 하지만 나중에 친일 활동을 했다고 하니 이미지가 확 추락하는구나.

신여성들이 등장하면서, 현모양처에 반기를 들고 나서는 이들이 있었어. 그런데, 현모양처라는 말이 우리나라에 있던 말이 아니고, 일제시대에 일본에서 건너온 말이라고 하는구나. .. 앞으로 이 말을 좀 쓰지 말아야겠구나.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들어나면서 여성 운동도 활기를 띠게 되었는데, 아내에게 월급을 주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단다. 일제는 우리나라 생활 문화에 이런 저런 간섭도 많이 했어. 예를 들어 조혼제, 그러니까 일찍 결혼하는 것을 폐지하였고, 흰 옷을 입지 못하게 했고, 장례를 간소화하여 간단히 하라고 했어. 일제의 강점기가 길어지면서, 강제로 우리 문화를 서서히 변화해갔단다.

 

1.

1930년대 대중 문화는 어땠을까? 대중 잡기가 성행하여 <삼천리>, <신동아> 등을 비롯하여 많은 잡지들이 출간되었대. 특히 <삼천리>리는 가장 오래 유지되었는데, 조선일보 기자 출신 김동환이라는 사람이 만든 잡지인데, 조선일보 기자답게 1937년 이후로는 친일의 길을 걸었다고 하는구나. 이전에는 돈 많은 집에서나 가질 수 있는 라디오가 많이 대중화되었다고 하는구나. 그로 인해 라디오 드라마가 급증하였고, 스포츠 실황도 라디오로 해주었대. 이렇게 라디오가 인기를 끌자, 일본은 라디오를 황국신민화 선전용으로 적극 활용했단다. 이때도 언론과 방송의 힘은 권력의 노예가 되었구나. 하기야, 이것보다 효과적으로 자신의 정권을 홍보하는 게 어디 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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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94)

마찬가지로 일제는 조선의 라디오를 황국신민화 사업에 적극 활용하고자 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과 함께 일제는 본격적으로 방송을 국민동원과 전시선전의 도구로 삼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는 황국신민화, 내선일체, 일본어 상용 등의 명분을 내걸어 우리말 뉴스방송에서도 일본어 혼용을 강요하였고, ‘궁성요배(宮城遙拜)의 시간이니 심전개발(心田開發)’이니 하는 프로그램을 방송토록 하였다. 그런가 하면 나중엔 일본군이 되어 천황폐하를 위해 싸우다가 백골이 되어 호국신사에 봉안되는 것이 효도의 길이라는 노래 아들의 혈서를 당대의 인기 가수 백년설이 매일 방송하느라고 2개월간 방송국에 통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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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절 영화도 유행하여 극장도 많이 지어졌단다. 한 동안 영화의 인기를 이끌었던 변사는 유성 영화의 등장과 함께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되었단다.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영화뿐만 아니라, 할리우드 영화도 대거 유입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하는구나. 라디오와 함께 축음기도 갖고 있는 사람도 많이 늘어났는데, 이와 함께 가요도 같이 발전하였단다. 이때 활동했던 가수들과 유행했던 가요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몇몇 노래들은 아빠도 알고 있는 노래들이었단다. 그 중에 목포의 눈물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이 노래가 가사를 통해서 몰래 항일을 노래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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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서울 종로경찰서 고등계에서는 이 노래의 가사에 의심을 품고 레코드사 사장 이하 관련자들을 불렀다. 경찰이 문제 삼은 건 삼백연 원안풍은 노적봉 밑에라는 구절이었다. 손목인의 회고에 따르면, “사장 이하 관련자들은 원안풍은원한 품은아니라 원안풍은이라고 극구 해명하고 사정하여 간신히 무마는 되었지만, 솔직히 말해 목포의 눈물삼백연 원안풍삼백 년 원한 품은이라는 뜻으로 우리 민족의 설움과 일제에 대한 겨레의 분노를 노래한 것이다. ‘목포의 눈물’ SP는 이 사건을 겪으면서 더욱 잘 팔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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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절 커피도 많이 유행했다고 하는데, 당시에도 커피가 못에 좋다거나 나쁘다는 내용의 신문기사가 있었다고 하는구나. 오늘날도 어떤 기사에서는 커피가 몸에 좋다고 하고, 어떤 기사에서는 커피가 몸에 나쁘다고 하고그때나 지금이나커피는 몸에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니, 과하게 먹지 말라고 이해해야겠다. 커피가 유행하면 덩달아 커피를 파는 카페와 끽다라고 하는 다방이 함께 유행했단다. 카페는 에로로 문제가 되기도 해서 총독부에서 강한 규제를 하기도 했대. 그 밖에 음악 장르 측면에서는 재즈도 유행을 하고, 댄스도 유행을 했는데, 일제총독부에서는 서울에 댄스홀을 허가하지 않았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일부 춤꾼들은 댄스홀 허가해 달라고 편지도 썼으나, 총독부는 끝내 허가하지 않았대.

 

2.

백화점도 생기기 시작해서, 동아백화점과 화신백화점은 서로 경쟁을 했는데, 화신백화점의 주인 박홍식은 민족주의 마케팅을 하고, 공격전인 할인을 통해서 시장 점유율을 높였어. 그로 인해 동아백화점은 개업 반년 만에 화신백화점에 흡수 합병되었다고 하는구나. 당시 여자들의 패션을 살펴보면, 머리는 단발, 파마 등 여러 가지 헤어스타일이 유행하였대. 남자들의 헤어스타일도 개성 있는 헤어스타일을 고집하는 이들이 있었대. 하지만 장발 단속이 이때도 있었나 보구나. 일제 시대 장발에 대한 탄압이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고, 그 한 사람 때문에 불우한 현대사를 갖게 되었으니, 일제가 장발에 대한 탄압은 잘못해도 엄청 잘못한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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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

1920년대 말부터 유행한 남성의 장발에 가해진 탄압은 한 사나이의 운명을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1937 3월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일하던 박정희가 교사 일을 그만두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게 된 계기에 장발이 관련돼 있다는 게 흥미롭다. 교사 생활 3년째 되던 1939년 가을 연구수업 시찰차 나왔던 일본이 시학(오늘날 장학사)과 교장이 술자리에서 박정희의 장발을 문제 삼자 박정희는 이에 반발, 술잔을 던지는 등 소동을 벌인 후 사표를 냈다는 것이다. 당시 교사들은 머리를 박박 깎게 되어 있었으나, 박정희만은 머리를 기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먼 훗날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 뒤에 장발을 혹독하게 탄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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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들 사이에서는 여우목도리도 유행을 했다고 하는구나. 최초로 패션쇼도 열렸다고 했어.

이 시대 전화 보급도 급증을 했대. 그러면서 전화 범죄도 발생했다는데, 보이스 피싱의 역사는 전화의 역사와 함께 했나 보구나. 시간이 지나면서 국제 전화도 가능해졌다는구나. 일본 문화는 계속 물밀듯이 들어와서, 대중 목욕탕도 생겼는데,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꼈다고 하는구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옷을 다 벗는다는 것이 유교 주의 사회에서 이해를 할 수가 없었을 테지. 크리스마스도 전래되어 크리스마스 이브를 즐기기 시작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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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

해마다 화려해지는 유흥가의 축하연 덕분에 크리스마스 이브는 일 년 중 가장 퇴폐적인 밤이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총독부는 유흥업소의 크리스마스 축하연을 전면 금지했다. 그러나 맘먹고 놀겠다는 데야 어디 빠져나갈 길이 없겠는가.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 유흥가는 생뚱맞게 국위선양 기념회’ ‘남경 함락 축하 만찬회’ ‘황국 전승 대연회현수막을 갈아 달고 축하연의 전통을 이어갔다. 크리스마스가 상업적으로 왜곡된 것은 공교롭게도 크리스마스 직전인 12 16일이 200~400페센트씩 지급되는 연말보너스 받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월급쟁이들은 12월 봉급까지 더해 평상시 월급의 3~5배까지 두툼한 월급봉투를 받았다. 오랜만에 두툼해진 월급쟁이의 호주머니를 털기에 크리스마스 이브 축하연만큼 그럴듯한 명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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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의 유행은 그 이전에도 이야기한 것 같구나. 이 시절 경성과 평양의 정기 축가 대항전이 있었대. 경평전이라고 불렀다는구나. 승부욕이 지나쳐서 경평전을 열기만 하면 난투극이 벌어졌고, 지역 갈등도 있었지만, 축구를 통해서 항일한다는 의미도 있었다는구나. 이때 평양팀의 김영근이라는 선수가 큰 인기를 끌었다는구나. 이 경평전은 매년 펼치다가 해방이 되고 남북에 삼팔선이 그어지면서, 1946년 마지막 경기를 펼쳤다고 하는구나. 축구만큼 권투의 인기도 많았대. 서정권이라는 선수가 있었는데, 세계 랭킹 6위까지 올랐다고 하는구나.

이 당시 이 책의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교육열이 엄청 났어. 중학교든 고등학교든 입학정원이 적어서 상위 학교에 진학하는데 평균 경쟁률이 6:1이나 되었대. 그렇다 보니 더욱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었고, 시험에서 떨어지면 자살하는 이들도 있다는구나. 예나 지금이나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가 엄청 심했고, 우리나라의 교육열은 DNA에 새겨져 있는 것 같구나.

여기까지가 <한국 근대사 산책> 9권의 이야기란다. 이제 한 권 남았는데, 아빠가 지금까지는 시간 간격을 두고 한 권씩 읽었는데, 마지막 10권은 그냥 연달아 읽어서 끝내버렸단다. 10권도 읽은 지 좀  되었는데, 아빠가 게을러서 너희들한테는 아직 이야기를 못해주었구나. 곧 해줄게. 9권은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역사적인 사건은 없었지만, 당시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단다. 그 어려운 시절에도 우리랑 똑 같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기도 하고 말이야.

,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1920년대 도시 고학력층에서 등장한 모던 보이모던 걸 1930년대에 이르러 숙성되면서 그 저변을 넓혀 나갔다.

책의 끝 문장: 각개약진할 때 하더라도 이젠 다른 방식의 삶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는 슬기가 필요하다 하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박인덕을 비난했지만, 윤치호는 박인덕을 옹호했다. 그는 1931년 10월 26일자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첫째로, 나는 수많은 젊은 남자들이 자기 아내와 이혼하는 것과 똑같이 그녀 역시 남편과 이혼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런 남자들 중에는 더 매력적인 여자와 결혼하길 바라는 것 말고 어떤 이유도 없는 자들이 많다. 이들 무정한 젊은 남자들은 비난하지 않고 그저 박인덕만 욕하고 온갖 험담을 늘어놓는 것은 ‘여성은 영원히 남성의 노예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 P46

1930년대 조선의 중상류층은 행여 뒤처질세라 서양 냄새를 피우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서양화가 곧 계급이요 교양의 척도이자 상징이었다. 1930년 11월 <매일신보>가 여러 차례에 걸쳐 그런 경향을 지적하고 나선 게 흥미롭다.
11월 23일자에 따르면, "서양류의 가수는 성악가라 하여 숭상하고 우리 조선의 고유한 가수는 광대라 하여 천시하고 멸시함은 무슨 까닭인고? 물론 이에는 여러 가지 원인과 동기가 있겠으나 도대체 남의 것이라면 좋으나 그르나 귀하에 여기고 우리의 것이라면 덮어 놓고 천하게 여기는 과도기에 처한 조선의 사회적 결함과 일반 가수의 인격적 저하(低下)가 그 주요한 원인이 된 것은 묻지 않아도 알 일이니 조선의 가수가 결코 본시부터 천한 것은 아니었다."
- P114

일제강점기의 대중가요에 대해 "민족의 정서를 황폐화시키고 시적 표현을 왜곡시켰다"거나 "유행 창가 전반의 의식세계는 결국 식민지배에의 봉사로 귀결"되었다는 분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나라 잃은 식민지 민중에게 ‘슬픔’을 벗어나라고 주문하는 건 오늘의 관점에서 본 무리한 요구가 아닌가 싶다. 때론 슬픔도 힘이 되는 게 아닐까? 게다가 슬픈 노래가 나라 찾고 경제발전 이룬 뒤에도 계속되는 걸 보면, 이는 좀 더 정교한 분석을 필요로 한다는 걸 말해주는 거라고 볼 수 있다. - P160

이효석은 조선일보사가 발생한 <조선문학독본>(1938년 12월호)에 쓴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에서 가을 낙엽을 태우는 냄새에서 ‘갓 볶음 커피 냄새가 난다’라고 썼다. 이에 대해 이영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고등학교 때 이 구절을 읽으면서 정말 커피 냄새가 낙엽 태우는 냄새와 비슷한 줄 알았다. 1970년대만 해도 원두커피를 갈아서 끓어주는 커피 전문점들이 없었고, 다방은 미성년자가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갓 볶은 커피 냄새’가 뭔지 알게 된 지금 생각하면 웬걸, 낙엽 태우는 냄새와 비슷도 하지 않다. 그러고 보면 이효석은 커피 냄새를 잘 몰랐던 것이 분명하다. 구태여 익숙하지도 않은 커피 냄새를 들먹인 것은 분명 ‘커피’라는 말이 주는 문화적 의미 때문이었을 것이다. "
- P179

위생에 대한 문화적 차이도 있었다. 일본인들의 기준에선 조선인들이 목욕을 잘 하지 않는 게 야만이었겠지만, 조선인들의 기준으로 볼 때엔 일본의 목욕문화가 야만이었다. 한국 최초의 대중목욕탕은 1905년 서울 서린동 근방에 등장했지만, 여럿이 벌가벗고 목욕을 한다는 것이 익숙지 않은 문화적 저항 때문에 사람이 오질 않아 곧 문을 닫고 말았다. 대중목욕탕에 익숙해질 때까진 10여 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 왕실에서도 1919년에서야 목욕실을 두었고, 대중목욕탕은 1920년대에서야 본격적으로 생겨나게 된다.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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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피아빛 초상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06
이사벨 아옌데 지음, 조영실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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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이사벨 아옌데의 삼부작 중 마지막 작품인 <세피아빛 초상>을 읽었단다. 삼부작의 마지막 작품이긴 하지만, 시간 상으로는 <운명의 딸> <영혼의 집>의 사이에 해당하는 시간이란다. 먼저 쓴 <운명의 딸> <영혼의 집>을 연결해주는 작품이자 삼부작을 매조지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그래서 <세피아빛 초상>에는 <운명의 딸>에 나오는 등장인물도 나오고, <영혼의 집>에 나오는 등장인물들도 나와서 읽는데 색다른 재미를 주기도 한단다.

소설 제목에 있는 세피아빛이라는 말은 우리나라 자동차 브랜드가 자꾸 연상이 되는데, ‘세피아빛이라는 것은 오징어 먹물로 만든 암갈색의 안료가 내는 빛이라고 책의 마지막 문장의 주석으로 설명이 나와 있더구나. 이사벨 아옌데의 이번 작품도 아빠를 실망시키지 않았단다. 삼부작을 다시 정리하면 지은이 아옌데가 쓴 순서는 <영혼의 집>, <운명의 딸>, <세피아빛 초상> 순서이고, 시간 순서는 <운명의 딸>, <세피아빛 초상>, <영혼의 집> 순서란다. , 그럼 <세피아빛 초상>의 이야기를 해줄게..

..

<세피아빛 초상>은 총 3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1부는 1862년부터 1880년까지의 이야기란다. <운명의 딸>에서 등장했던 엘리사와 타오 치엔 기억나니? 그들은 결혼 후 샌프란시스코에 정착을 하게 되었단다. 엘리사는 칠레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온 영국계 사람이고, 타오 치엔은 중국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중국계 사람이잖아. 엘리사와 타오 치엔은 아이를 둘을 낳았는데 첫째는 아들 럭키였고, 둘째는 딸 린이었단다. 미국에서 살기에는 중국인 성을 따르는 것보다 엄마의 성을 따르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여 엘리사와 타오 치엔은 아이들에게 엄마의 성인 소머스를 붙여주었단다. 타오 치엔은 이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었지. 린 소머스는 커 가면서 엄마의 얼굴와 아빠의 큰 키를 닮아서 뛰어난 외모로 유명했단다. 그래서 공화국 여인상이라는 동상의 모델로도 뽑혔어. 그런 린 소머스가 한 방에 훅 가는 일이 생기는데 그것은 마티아스라는 바람둥이를 만나서부터였단다.


1.

마티아스를 이야기하자면 그 집안의 이야기를 좀 해야겠구나. 마티아스의 아버지는 펠리시아노 로드리게스 데 산타크루스라는 사람이고 어머니는 파울리나 델 바예라는 사람인데, 마티아스의 어머니 파울리나의 집안이 엄청난 부자였단다. 칠레에서 살다가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엄청난 돈을 벌었어. 그들에게는 아들이 셋이 있는데 모두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어. 장남 마티아스는 예술에 관심 있어하지만, 공부에 관심 없고 방탕한 생활을 했어. 행실이 바르지 못했고 술도 좋아하고 심지어 아편까지 했단다. 마티아스의 장점이자 단점은 잘 생겼다는 것. 그에 반해 파울리나의 조카 세베로는 참 성실했단다. 세베로 델 바예는 칠레의 엄격한 보수주의 집안에서 자랐는데 세베로는 진보 성향을 가지고 있었어. 보수적인 성향의 집안에서 보자면 늘 사고만 치고 다니는 것처럼 보였어. 그래서 세베로는 칠레에서 쫓겨나 미국에 있는 파울리나 고모의 집에 오게 된 거야. 파울리나는 그런 세베로를 적극적으로 후원해주었어. 세베로는 고모의 후원으로 변호사가 되었어.

….

마티아스도 린 소머스의 소문을 들었어. 마티아스는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린 소머스를 유혹해서 하룻밤을 자겠다고 장담했어. 린 소머스는 너무 쉽게 마티아스의 외모에 빠지고 말았단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세베로는 가슴 아파했단다. 세베로도 린 소머스를 짝사랑하고 있었거든. 마티아스의 장담대로 린 소머스와 하룻밤 사랑을 나누었는데 그만 린이 임신을 했단다.

이 일로 엘리사와 타오 치엔이 파울리나를 찾아왔단다. 마티아스는 아기의 아빠가 자신이 아닐 거라고 잡아떼고 유럽으로 도망가 버렸단다. 세베로는 가족의 대표로 린의 집에 찾아가 잘못을 사과했단다. 세베로는 그렇게 얼굴을 익힌 이후 계속 린의 집을 찾아갔어. 앞서 이야기했듯이 세베로는 린을 짝사랑하고 있었거든어느 정도 친해진 이후 세베로는 린에서 청혼을 했지만, 린은 거절했단다. 하지만 세베로는 아기에게 아버지가 필요하다고 계속 설득을 했고, 린은 세베로의 진정성을 알게 되어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단다.

결혼식은 세베로, 린의 가족들(엘리사, 타오 치엔), 그리고 세베로를 도와준 파울리나 집안의 착한 집사 윌리엄스만 모여서 조용히 식을 올렸단다. 그런데 린은 딸은 아우로라를 낳고 얼마 못 가서 산후열로 그만 세상을 등졌단다. 린이 딸을 낳았다는 소식과 린이 죽었다는 소식을 파울리나도 들었어. 파울리나는 엘리사를 찾아와 아우로라를 데리러 가겠다고 했으나, 엘리사는 거절을 했단다. 파울리나는 격분하면서 집으로 돌아갔어.


2.

2부는 1880년부터 1896년까지의 이야기란다. 세베로는 아우로라의 법적인 아버지였지만, 갓난아이를 돌볼 수가 없었어. 당연히 경험도 없었고 말이야. 아우로라는 외조부모인 엘리사와 타오 치엔이 보살폈단다.

당시 칠레는 1879년부터 주변 국가와 전쟁을 치르고 있었어. 애국심이 뛰어난 세베로는 칠레 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칠레로 돌아왔단다. 세베로가 린 소머스와 결혼하긴 했지만, 사실 칠레에 약혼녀가 있었단다. 약혼녀 이름은 니베아였어. 니베아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세베로를 용서하고 여전히 세베로를 사랑했단다. 세베로는 니베아와 만남을 뒤로 하고 전쟁에 참여했어. 하지만, 전쟁 중에 중상을 입어 한쪽 다리를 절단하는 큰 수술을 했단다. 이 소식을 들은 니베아는 전쟁터에 와서 세베로를 지극히 간호했단다. 니베아의 계속된 구애로 니베아와 세베로는 결혼을 했단다. 이후 그들의 사랑은 아이를 열다섯 명이나 낳았단다. 니베아와 세베로의 막내딸 이름이 클라라였는데, 많이 익숙한 이름이었어. <영혼의 집>의 주인공 이름이 클라라였던 거 같은데…. 하면서… <영혼의 집>을 읽고 쓴 독서편지를 찾아보니, 맞더구나. 그리고 독서편지를 읽어보니 클라라의 부모님 이름이 니베아와 세베로였어. 그제서야 <세피아빛 초상>이라는 소설이 <운명의 딸>뿐만 아니라 <영혼의 집>까지 이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약간의 희열도 느꼈단다. 책을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이랄까. 그리고 책 읽고 독서편지가 써놓길 다행이라고 생각했지.^^

다시 아우로라 이야기를 해볼게. 아우로라는 외할머니 엘리사와 외할아버지 타오 치엔와 함께 행복하게 살았어. 그런데 아우로라가 다섯 살 때 타오 치엔이 죽고 말았단다. 엘리사는 타오 치엔의 유언에 따라 그의 유해를 타오 치엔의 고향인 중국에 가져가려고 했어. 오랜 여행이 될 거라는 생각에 엘리사는 아우로라는 친할머니에 맡기기로 했단다. 파울리나라는 기쁘게 받아들이고, 아우로라가 온 날 이후로 아우로라에게 헌신을 다했단다. 아우로라의 뿌리가 칠레이므로, 파울리나는 아우로라가 칠레의 교육으로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오랜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모두 칠레로 가기로 했단다. 오랫동안 집안을 완벽하게 해준 집사 윌리엄스와도 헤어져야 하는데, 집사 윌리엄스는 뜻밖에 파울리나에게 청혼을 했단다. 파울리나의 남편이 이미 오래 전에 죽어서 혼자였어. 윌리엄스는 칠레에 가면 어떤 식으로는 집안을 관리해야 하는 사람이 필요할 테고, 형식적이지만 남편도 필요하지 않겠냐면서 평생 보필하겠다고 하자, 파울리나도 그렇게 하겠다고 했단다.

그들은 칠레에 가기 전에 잠깐 유럽에 들러서 아들 마티아스를 잠깐 만나고 칠레에 도착했단다. 아직 아우로라는 자신의 친아빠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어. 그런데 샌프란시스코에서 해변 따라 내려오면 칠레인데, 칠레 오기 전에 유럽을 들렀다가 온다는 것이 파울리나가 얼마나 부자인지 알려주는 듯 하구나. 칠레에 도착한 파울리나 일행은 처음에는 적응이 쉽지 않았지만, 잘 지냈단다. 아우로라는 마틸데 피네다라는 가정교사한테 공부를 배웠단다.

.

당시 칠레의 상황은 점점 안 좋아졌단다. 호세 마누엘 발마세다 대통령이 집권을 하고 있었는데, 독재 정치를 기획하고 있어서 반대파의 거센 항의로 내전이 일어났어. 세베로 역시 목발을 짚고 반대파 진영으로 이 전쟁에 참여했단다. 니베아는 파울리나의 집에 머물면서 반대파의 유인물을 몰래 인쇄했단다. 이 일은 윌리엄스가 도와주었고, 가정교사 피네다도 적극 관여했단다. 파울리나만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유인물 전달책이 정부군에 잡히면서 알게 되었다. 일단 파울리나의 집에서 모두 피신해야했어. 윌리엄스는 자신은 영국인이기 때문에 함부로 못할 거라면서 남겠다고 하고 파울리나와 나머지 식구들은 모두 피신했다가 사태가 안정되었을 때 다시 집으로 돌아왔단다.

얼마 후 유럽에 있던 마티아스가 악성 성병에 걸려 휠체어에 탄 상태로 집에 돌아왔단다. 이미 회복할 수 없는 몸이었어. 그나마 생애 마지막을 자신의 유일한 혈육인 아우로라와 지낼 수 있었지. 아우로라도 이제서야 마티아스가 자신의 친아빠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단다. 십대 소녀가 된 아우로라는 사진을 배우고 자신이 어느 정도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한편 윌리엄스는 유럽에 갔다가 포도씨를 가지고 돌아왔는데 파울리나에게 칠레에서 포도사업을 하자고 제안했단다. 프랑스의 날씨와 칠레의 날씨가 비슷해서 성공할 거라면서파울리나는 포도 사업을 알아보기 위해 유럽에 식구들과 가기로 하고, 아우로라도 함께 갔단다. 파울리나는 사실 이때 몰래 수술을 받기 위해 유럽에 간 것이었어. 병이 생겨 몸이 많이 안 좋았거든


3.

3부는 1896년부터 1910년까지의 이야기란다. 다행히 파울리나의 수술은 잘 끝냈어. 프랑스에 가서 포도와 와인 사업에 대해 알아보고 칠레로 돌아왔단다. 파울리나는 몸이 안 좋게 되자, 자신이 죽기 전에 아우로라의 결혼을 봐야겠다면서 아우로라에게 결혼을 종용했단다. 그래서 파티에서 만난 디에고 도밍게스라는 사람과 결혼하기로 했단다. 할머니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한 결혼처럼 보였어. 그런데 사람을 좀 잘못 고른 것 같구나. 디에고 도밍게스의 집은 상당히 보수적인 농장 집안이었단다. 결혼하고 나서 아우로라는 시골에서 생활하는데 적응이 쉽지 않았어. 그리고 모든 면에서 남편과 맞지 않았어. 답답함과 지루함의 연속이었지. 그나마 시누이 아델라와 마음이 맞아서 아델라와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았어. 이 결혼으로 얻은 것은 아델라라는 친구뿐.

할머니가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왔단다. 이때 시누이 아델라도 함께 왔어. 할머니가 좀 나아지셔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어. 밤마다 어딘가 나가는 남편을 뒤따라 갔다가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게 된단다. 남편이 자신의 형수와 사랑을 나누고 있었던 거야. 심한 배신감을 느끼고 남편에게 직접 이야기를 하고 어떻게 할거냐고 했어. 그 즈음 다시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았단다. 다시 할머니 집에 왔어. 다행히 할머니의 임종을 지켰단다. 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그냥 할머니 집에 머물기로 했단다. 형수와 불륜 관계인 남편에게 돌아가고픈 생각이 전혀 없었어. 할머니의 집에 머물면서 할머니의 담당의사였던 이반 라도빅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단다. 사실 그 전부터 서로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호감으로만 머물고 있었지.

….

그러던 어느날 외할머니 엘리사가 찾아오셨단다. 티오 치엔의 유해를 가지고 중국에 가서 묻어주고, 영국에 가서 엘리사의 고모인 로스 스머스를 돌아가실 때까지 보살펴 주셨대. 엘리사의 고모 로스 스머스도 <운명의 집>에서 등장했던 분인데 기억나니? 로스 스머스가 돌아가신 다음에 다시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아들 럭키와 지내다가 아우로라 생각이 나서 칠레로 왔다는구나. 엘리사 할머니는 여전히 정정하셨어. 파울리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혼자가 된 아우로라에게 다시 든든한 버팀목이 나타나신 거란다. 아우로라와 엘리사 할머니는 함께 지내기로 했단다.

그렇게 소설은 끝났단다.

아빠가 메모를 한 것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하긴 했는데 중간중간은 기억을 바탕으로 이야기한 부분도 있어. 기억을 잘못하여 내용이 잘못된 부분이 있을 수 있는데, 이해해 주길 바란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아우로라, 파울리나 할머니, 엘리사 할머니 모두 강단 있고 자신감 넘치는 그런 캐릭터로 나오는 것 같구나. 그런 강단 있고 주장이 강한 그들의 성격을 배우고 싶더구나. 그런 이들이 모두 여자여서 더 매력적이었던 것 같구나.

아빠가 읽은 이사벨 아옌데의 소설들은 모두 매력적인 여자 주인공들이었단다. 최근에 이사벨 아옌데의 신간이 한 권 출간되어 읽었는데, 그것도 조만간 이야기해줄게. 그 책에도 또 다른 매력적인 주인공이 등장한단다. ,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나는 1880년 가을 어느 화요일, 샌프란시스코의 외할아버지 댁에서 태어났다.

책의 끝 문장: 그리하여 내 인생의 이야기는 세피아빛 초상의 색조를 띤다.


카메라는 간단한 기계여서 제아무리 바보라도 사용할 수 있는데, 도전이라면 그것으로 예술, 곧 참된 것과 아름다움의 결합을 창조하는 데 있다. 그러한 탐색은 무엇보다도 정신적인 일이다. 나는 투명한 가을 낙엽과 해변의 완벽한 모양의 소라에서, 여체의 등허리 곡선과 오래된 나무둥치의 결 조직에서 참과 아름다움을 찾는다. 포착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형태들에서도 찾는다. 때때로 암실에서 하나의 상을 가지고 작업하다가 한 사람의 영혼, 한 사건의 감동 또는 한 사물의 생동하는 본질을 만난다. 그러면 감사하는 마음이 치솟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그렇게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 내 일의 목적이다. - P142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진보의 메아리는 우리에게 들려왔고 사회의 변화를 모르고 지낼 수 없었다. 산티아고에서는 이미 실외 스포츠와 실외 게임, 산책 등 카스티야 이레온 귀족의 느긋한 후손들보다는 외향적인 영국인들에게 맞는 놀이들을 광적으로 즐기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 유래한 예술과 문화의 바람으로 칠레의 분위기가 새로워졌고, 독일산 기계들이 중후하게 돌아가는 소리에 칠레의 오랜 식민기적 낮잠은 중단되고 말았다. 벼락부자에 교육도 받고 부자들처럼 살고 싶어 하는 새로운 중산층이 탄생했다. 파업, 폭행, 실업, 칼을 뽑아 든 기마경찰의 공격 등으로 국가 기강이 흔들리는 사회 위기가 조성되었지만, 우리에게는 아주 먼 이야기여서 칼레우푸의 생활 리듬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러나 백 년 전에 같은 침대를 썼던 고조부들처럼 여전히 농장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20세기는 찾아들었다. - P348

기억은 허구다. 우리는 부끄러운 부분은 잊어버리고 가장 밝은 부분과 가장 어두운 부분만 선택하여 인생이라는 널찍한 융단에 수를 놓는다. 나는 사진과 글을 통해 내 존재의 덧없는 상황을 이겨 내고 사라져 가는 순간들을 붙들어 과거의 혼돈을 벗겨 내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매 순간은 순식간에 사라져 금방 과거가 되어 버린다. 현실은 하루살이같이 덧없고 변하는 것이며 순순한 그리움일 따름이다. - P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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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인
이혁진 지음 / 민음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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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작년에 아빠가 새로 알게 된 작가들 중에 최고는 이혁진이라는 작가란다. <누운 배>를 통해 알게 된 다음, 그의 장편을 다 찾아 읽었단다. ‘라고 해 봤자 데뷔하신 지가 얼마 안 되어 권뿐이더구나..^^ 3권뿐이라서 아쉬웠지. 그런데 두어 달 전에 신간 소식 알림이 떴어. 그 책이 이번에 아빠가 읽은 <광인>이라는 소설이란다. 책 두께가 어마어마 하구나. 700페이지 가까이 되는 책인데,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책은 두께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는 책이었어. 한 번 잡은 책을 놓지 못하게 하는 재미가 있었단다. 아빠가 회사를 다니다 보니 평일에는 책을 읽는데 아무래도 제한이 있단다. 이 책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지만 다음날 출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잠이 들고 했어. 주말이 되자마자 남아 있는 페이지들을 한 자리에 앉아서 읽었단다.

전작들에서도 등장인물들의 심리 묘사를 잘 했는데, 이 책에서도 여전하구나. 그리고 이혁진 님의 소설의 장점은 기억하고 싶은 좋은 문구들이 책에 많이 실려 있다는 거야. 어떻게 그런 공감 가는 글들을 쉼 없이 쏟아낼 수 있는지 모르겠구나. 이따가 몇 개 소개해줄게. 한가지 아쉬웠다면, 소설의 뒷부분에 소설의 제목처럼 광인이 되어가는 등장인물이란다. 그가 그렇게 되어갈 수밖에 없는지 조금 이해가 가질 않았단다. 아빠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장면들이 있었어. 사람마다 제각각이니까 그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겠거니 하겠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아무튼 평범치는 않았지.

아빠가 이 소설을 너무 극찬한 것 같은데, 아빠가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다는 점, 알지? 이혁진 님의 그 전에 작품들을 좋아했던 아빠의 관점에 이번 <광인>이라는 소설을 이야기한 것이니까 말이야. 아참, 아빠의 기억력을 위해서 책의 내용은 거의 끝까지 다 이야기를 하는데, 스포일러를 방지하기 위해서 어디서 이야기를 끊어야 할지 고민 좀 해야겠구나.

 

1.

주인공은 41살의 싱글남 정해원. 41살의 싱글남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듣는 소리 중에 하나가 결혼이 아닐까 싶구나. 해원도 엄마의 결혼하라는 잔소리에 싫증을 내고 뭔가 새로운 것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오히려 들었어. 벽보에 붙은 플루트 레슨 광고를 우연히 보고 무작정 교습소로 갔단다. 그곳에는 권준연이라는 동년배로 보이는(알고 보니 한 살 적은 40) 권준연이라는 이가 있었어. 권준연은 가난한 작곡가이지만 생계를 위해서 레슨도 한다고 했어. 플루트 배우러 갔다가 플루트 가르치는 여자 선생님과 썸씽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나 싶었는데, 강사는 남자였구나.

준연은 상담 온 해연에게 대뜸 위스키를 하자고 해서 처음 만난 자리에 술을 같이 하고 금방 절친이 되었단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해연은 준연이 자신과 잘 맞는 친구라고 생각해서 오래된 친구처럼 느껴졌어. 그 이후 본격적으로 플루트 레슨을 받으면서 둘은 더 친해졌어. 준연이 엄마가 자궁암에 걸리셨는데 돈이 없어 걱정하는 모습에 해원은 선뜻 1000만원을 빌려주기도 했어. 해원은 그동안 직장 생활이 잘 풀려서 스톡옵션 등으로 큰 돈을 벌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단다.

어느날 준연은 고향 친구가 위스키를 직접 만들어 올 거라면서 같이 마시자고 했어. 고향 친구라고 하니, 그리고 위스키를 만든다고 하니 당연히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위스키를 들고 온 조하진이라는 사람은 여자였단다. 플루트 강사는 여자일 줄 알았는데 남자이고, 고향 친구는 남자일 줄 알았는데 여자이고.. 약간의 비틀림을 줌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긴장감을 갖게 했단다.

해원은 첫눈에 하진에 반했단다. 하지만 하진은 준연의 친구였고, 옆에서 보니 준연도 하진을 여자로 대하는 느낌이었어 해원은 준연을 둘도 없는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하진이 처음 보는 그 자리에서 그 완벽한 친구의 금이 가는 것이 느껴지더구나. 하진인 위스키 사업 때문에 당분간 서울에 머물러서 가끔씩 셋이 술자리를 했단다. 해원은 하진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거짓말도 하고 그랬어. 함께 대화를 나누다 보니 점점 하진의 매력에 빠지고 말았단다. 하진은 위스키 사업 설명 PPT를 만들었는데, 해원이 도와주었단다. 해원은 직장 생활을 하면서 PPT는 많이 만들어봤거든. 하진에게 잘 보이려고 했던 해원은 퇴근하고 하고 PPT에만 매달렸지. 하진은 고맙다면서 술을 사겠다고 했는데 이때 처음으로 해원은 하진과 단 둘이 만났단다. 하진은 정말 스스럼 없이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다 했단다.

이 만남 이후 해원의 머릿속은 온통 하진뿐이었단다. 하지만 하진은 절친 준연이 좋아하는 친구라는 것에 해원을 괴롭혔어. 몇 번을 고민하던 해원은 결국 하진에게 고백을 했단다. 그리고 하진도 해원을 좋아하고 있었다면서 그 고백을 받아주고 둘은 사랑을 하기 시작했어. 해원은 이 사실을 준연에게도 이야기했고 준연도 속마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겉으로는 축하해준다고 했단다. 하진에게 준연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하진에게 준연은 세상에서 가장 친한, 둘도 없는 친구였단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했던 죽마고우. 그건 하진이 해원과 사랑을 시작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단다. 이것이 앞으로 이야기에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란다. 지금까지는 왜 소설 제목이 애인이 아닌 광인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단다. 하지만 앞으로는

 

2.

해원은 하진이 운영하는 시골에 있는 증류소를 찾아가 일도 도와주었단다. 시간 날 때마다 하진의 증류소를 찾아가고 가지 못할 때는 매일 전화하고….

그러던 어느날 암에 걸렸던 준연의 어머니가 결국 돌아가셨어. 준연의 어머니는 치료가 호전되어 시골집으로 내려가시고 얼마 후 돌아가신 것이라 예상치 못한 죽음이었단다. 알고 보니 준연의 어머니는 처방해 간 약을 하나도 드시지 않았어. 준연은 충격을 받고 무척 힘들어했단다. 장례식을 마치고 해원, 하진, 준연과 술을 먹었는데 힘들어 하는 준연은 자해까지 했단다. 그런 그를 하진은 자신이 옆에서 보살펴주겠다고 했어. 해원은 자신의 여자친구가 밤새 다른 남자와 함께 하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어. 몇 번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냐고 물었고, 하진 대신 자신이 준연 옆에 있겠다고 했지만, 하진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단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하진에게 준연은 둘도 없는 친구이고,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말이야.

해원도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그 때는 하진을 믿어주었어야 하지 않을까 싶구나. 장례식을 마친 준연은 어머니의 시골집에 내려갔어. 준연이 없어지자 해원은 하진과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되어 좋아했단다. 하진은 위스키 투자자와 미팅도 가졌는데 큰돈을 대면서 사업하겠다고 하는 투자자도 있었어. 해원도 그 투자자의 제안을 들어보니 정말 좋은 계획이었어. 하지만, 하진은 그 투자자의 제안을 거절했단다. 이유는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과 맞지 않다는 거였어. 오랜 회사 생활로 인해 실적을 중요시 생각하는 해원에게 그 투자자의 제안은 둘도 없는 기회였는데 그것을 거절한 하진을 이해할 수 없어서 또 티격태격했어. 금방 화해를 하긴 했지만, 점점 부딪히는 일들이 많아졌어.

둘이 깊이 사랑할수록 둘은 서로 더 많이 알게 되어가고 그러면서 실망하는 모습도 보일 텐데,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해. 그런데 해원은 그때마다 이해하지 못하고 하진과 말다툼을 하는구나. 하진도 자존심이 세어서 해원의 말을 그냥 넘기지 못하고 맞부닥치고둘 다 나이가 마흔 살이 넘었는데 사랑도 여러 번 해봤을 텐데, 사랑의 초짜처럼 구는 것이 안타까웠단다. 그래서 그 때까지 혼자였던가, 싶기도 하고아무튼 해원은 하진을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정성 들여 편지와 꽃을 준비하여 하진에게 청혼을 했지만, 그 자리에서 거절당했단다. 그럴 줄 알았어. 하진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위스키 사업이었거든. 타이밍이 좋지 않았지. 하지만 해원은 굽히지 않고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 결혼하자고 설득을 하려고 했어. 하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단다. 해원이 아직 하진을 잘 모르고 있구나. 하지만 나이 사십에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서 놓치고 싶지 않은 해원의 마음도 이해는 가는구나.

 

3.

준연은 시골집에서 돌아와 교습소를 그만두고 배달일을 했어. 준연이 다소 대책 없이 일을 관두고 또 다른 일은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 또한 해원은 좀 이해가 가길 않았단다. 오토바이에 익숙하지 않던 준연이 배달을 하다니.. 얼마 못가 교통사고가 났어. 이 일이 있자 곧바로 하진이 서울로 올라왔단다. 하진의 남자친구해원은 속이 끓겠지. 이젠 준연이 친구로 보이지 않으려고 했어. 그런데 며칠 뒤 하진이 이야기 하기를 준연이 자신의 증류소에게 일하기로 했다는구나. 해원은 이것만은 참을 수 없었어. 하지만 하진의 뜻을 꺾지 못하리라는 것도 알았어. 아빠 생각에는 하진이 이건 좀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애인이 있는데, 아무리 둘도 없는 친구라지만 이성인데, 단 둘이 그 시골집에서 지낸다고 하면 괜찮다고 할 남자친구가 얼마나 될까. 남자친구 생각도 좀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하진의 뜻을 꺾을 수 없다고 생각한 해원은 준연의 뜻을 꺾어보려고 준연을 찾아갔어. 해원은 준연에게 자신이 돈을 대 줄 테니 교습소를 다시 차려 보라고 했어. 제발 증류소에 가지 말라고 애원하고 설득했단다. 하지만 준연도 뜻을 굽히지 않았어. 준연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같은 남자로서 해원이 왜 그러는지 이해를 할 것 같은데 말이야. 해원이 그렇게 애원하고 설득을 해도 준연이 하진의 증류소를 가겠다는 뜻은 증류소의 일보다 다른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랑 똑같다고 생각해. 결국 해원은 큰 소리를 치게 되었고, 해원과 준연은 크게 말다툼을 했단다.

준연은 하진의 증류소에 내려가서 일을 하기 시작했어. 일만 한 것이 아니라 준연과 하진은 증류소를 배경으로 악기 연주도 하고 그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려 인기를 끌게 되었단다. 위스키와 듀엣 연주이 동영상들이 인기를 끌면서 대중들의 위스키에 대한 관심도 늘어났단다. 하지만 해원이 속은 새까맣게 타 들어갔어.

그렇지.. 아빠가 해원이라면 이쯤에서 끝냈을 것 같구나. 하진이 아직 해원을 좋아하고 남자친구로 생각을 하고 있지만, 이런 상황은 너무 스트레스를 받을 것 같구나. 해원은 이 모든 일의 원인의 제거하려고 했단다. 그렇다고 사람을 죽이고 그런 것은 아니야. 해원이 생각하기에 하진의 시골 증류소만 없어지면 될 것 같았어. 증류소야 자신이 다시 지어주면 될 거라 생각했지. 그것도 시골이 아닌 서울 근처에 말이야. 해원은 다음 완전 범죄를 하려고 눈이나 비오는 날에 몰래 가서 증류소만 불태워 없애려고 했단다. 괜히 맑은 날 일을 벌였다가는 증류소 뿐만 아니라 인근에 있는 산과 집까지 다 탈 수 있으니

하지만 해원이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그런 일을 해봤나. 예상치 못한 일들이 계속 벌어졌지. 눈이 많이 온 날 밤에 몰래 아무도 없는 증류소에 가서 불을 냈. 예상치 못한 증류소 폭발에 해원은 당황했단다. 증류소가 알코올 등 발화물질이 엄청 많았으니 그런 폭발이 있었던 거야. 해원은 당황하여 여기저기 증거물들을 다 떨어뜨리고 간신히 몸만 빠져 나왔단다. 증류소의 폭발과 강한 바람으로 인해 눈이 왔지만, 불은 무섭게 번져나갔단다. 인근 집들과 산이 모두 화마에 휩싸였어. 증거물을 남기고 온 해원은 그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단다. 화마가 다 쓸고 갔으니화재로 증류소를 잃어버린 하진은 망연자실하고 말도 하지 않으려고 했어. 엄청난 충격을 받았지. 해원은 하진에게 그 증류소가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사랑에 눈에 멀었는데 그 사랑을 잃을까 봐 이성을 잃어버린 모습이 해원의 모습이었어.

 

4.

아빠가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서 이야기를 중간에서 끊는다고 했는데, 이쯤 그만 해야겠구나. 해원과 준연과 하진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해원은 자신이 계획했던 대로 완전범죄가 되었을까? 과연 누가 광인인가? 초반부의 잔잔한 우정과 사랑은 끝으로 갈수록 극단적인 전개가 이어진단다.

사실 소설 제목이 광인이었기 때문에 앞 부분에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이어질 때도 계속 불안감이 있었단다. 해원과 하진과 준연이 조금씩만 상대방을 이해해 주었다면 소설의 제목을 광인이라 하지 못했을 텐데 말이야. 지은이 이혁진 님께서 사랑의 극단을 보여주려고 하신 것 같구나. 그 부분은 평범한 삶을 지향하는 아빠로서는 좀 공감이 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재미 부분에서는 최고였단다. 이혁진 님의 전작 <사랑의 이해>가 이미 드라마로 만들어졌는데 이 소설 또한 영상화가 되지 않을까 싶구나. 드라마로 영화로 만들어지면 꼭 한번 봐야겠구나.

이 책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음악을 하다 보니 음악도 많이 소개되었단다. 아빠가 처음 들어보는 음악들이 대부분이었어. 아래 세 곡은 제목을 적어 두고, 유튜브로 들어보기도 했단다. 좋은 음악들도 알게 되어 좋았어.

‘Chega de Saudade’

‘Skating In Central Park’.

‘What are you doing the rest of your life’

아참, 아빠가 이 책에 좋은 문구들이 많아서 소개해 준다고 했지? 아빠가 발췌기를 통해 따로 정리한 것이 있는데 거기를 봐도 되긴 하는데 특히 좋은 구절은 여기에도 세 개 정도 소개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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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179)

친구와 연인이 다른 것 같지만 진실한 의미일 때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연인이란 내가 이성을 발견한 타인이었다. 친구란 내가 나 자신을 발견한 타인이었다. 친구는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연인은 이성으로서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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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6)

사랑은 인정이고 긍정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이 죽음에 반항하는 방식이었다. 사랑하고 있을 때, 단지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을 열렬히 실감할 때, 죽음은 단지 침묵에 불과해진다. 하진의 연주가 끝났을 때 들였던 그 의심도 두려움도 없고 외로움마저 없는 침묵. 사랑은 환상이나 감상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것 없이도 사랑은 이미 사랑이었고 절실히 필요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것만으로, 허기를 채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니까. 살아 있다는 걸 실감할 때 죽음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니까. 자식들이 커 간다는 그 실감 속에서 부모들이 다 그런 거지, 한마디로 자신들의 늙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듯. 그 긍정, 인정이 슬프면서도 기쁜 것이듯 사랑도 기쁘고 그래서 슬펐다. 모두, 모든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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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6)

마음이라는 건 세면대 같아요. 거기엔 뭘 붓든 모두 한곳으로 흘러 들어가죠. 우리 자신이라는 그 구멍으로요. 하지만 그 구멍이 이어지는 곳은 결국 하수구, 하수도예요. 썩어 가고 악취를 풍기고 끈적거리고 질척거리는, 토악질 나는 것들밖에 없죠. 거긴 우리한테 묻은 더러운 걸 씻어 내는 데지 우릴 욱여넣어서 더러워지는 데가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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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제가 왜 이별은 싫어하면서 이별 노래는 좋아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책의 끝 문장: 노래는 끝난다.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이 막걸리라면 그걸 그린 자화상은, 그나마 볼 만한, 증류식 소주 같은 거고 역사가 보리로 담근 발효주라면 소설은 그걸 증류한 위스키라고 할 수 있을 테죠. 히치콕이라는 영화감독도 비슷한 말을 했어요. 극(劇)이란 지루한 부분을 오려 낸 인생이다. 영화가 인생을 그대로 옮겨 놓기만 한 거라면 사람들이 왜 그걸 보고 있겠어요? 더럽게 지루한데다 매일 신물나게 보고 겪는 게 그건데요. 저처럼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죠. 창밖의 소리가 아무리 싱그럽고 청량해도 그걸 그대로 옮겨 놓은 건 음악이 아니라는 걸요. 반대로 아무리 비싼 악기로 만들어낸 것이라고 해도 낯설고 기이하기만 한,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감정과 무관한 소리들 역시 음악이 아니죠. 그건 그냥 악기로 만들어 낸 소음일 뿐이니까요. - P8

좋은 사람이란 그 한 사람만 있어도 살 만하다 생각이 드는 사람이죠. 싫은 사람이란 그냥 생각하기도 싫은, 결국엔 우리와 무관한 사람들일 뿐이고요. 제 생각에, 분명한 건 이거예요. 우리는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살 수는 있지만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 잘, 열심히 살 수는 없어요. 그게 우리가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 이유고 그런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싫은 사람에게도 자지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낼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렇게 밑진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싫은 사람을 만나고 겪어 봐야 좋은 사람이 왜 좋고 어떻게 좋은지 알 수 있으니까요. 또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요. 다만 싫은 사람은 대가고 좋은 사람은 목표죠. 좋은 사람, 싫은 사람이란 글자 수만 같을 뿐 사실 그렇게나 다른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 P27

압도적인 풍경을 볼 때 풍경과 그 풍경을 보고 있는 아주 작은 자신을 함께 지각하게 되는 것처럼, 침묵과 그 침묵을 드는 내가 거기에 있었다. 이전에 준연이 말했던, 음악이 끝나고 달라진다는 침묵이 바로 이런 것임을 나는 실감할 수 있었다. 무음이 아닌, 음악에 빗질이 된 것처럼 정갈하고 가지런한 고요함. 거긴엔 침묵이 주기 마련인 두려움도 의심도 없었다. 오직 파고들 듯 깊숙이 간직되는 환희만이 있었다. 연주회장에서 우리를 포효하듯 환호하게 하고 열렬히 박수치게 만드는 환희. 어쩌면 우리는 이런 침묵을 듣기 위해 음악을 듣는 건지도 몰랐다. - P67

하진의 말대로 그때는 몰랐다. 어렸기 때문에 모르는 건 많고 아는 건 적었지만, 생각은 늘 반대였다. 다 안다고, 내가 아는 걸 사람들은 모른다고 생각했다. 실상은 사람들이 아는 걸 내가 모르는 것이었는데, 뭔가를 안다는 건 나만 안다고 게 아니라 사람들이 아는 것보다 조금 더 안다는 뜻에 불과한데도. - P127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실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준연이 말했다. 꿈과 이상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라고요. 현실과 반대라거나 동떨어진 거라고들 생각하지만, 꿈이나 이상이 없다면 현실은 점점 더 시궁창이 될 수밖에 없고 또 현실이 온전하지 않으면 꿈이나 이상도 건강할 수가 없잖아요. 가난하고 못살았기 때문에 다들 희석식 소주밖에 마실 게 없었고 그래서 술이라고 하면 그런 소주가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처럼요. 더 나은 건 늘 있어요. 현실에 아직 없기 때문에 꿈이나 이상이라는 망원경으로 볼 수밖에 없을 뿐이죠. - P195

맞아. 배부른 소리야. 하지만 배가 부르니까 해야 하는 소리지. 배가 부르다고 만족할 수 없는 게 우리니까. 인간이란 먹고 살기 위한 존재에 그쳐지지가 않으니까. 우리한텐 좋은 술이 필요해. 좋은 집, 좋은 차, 외식도 하고 드레스도 입어야 돼. 그래야 ‘살았다’가 아니라 ‘살아 있다’고 느낄 수 있으니까, 먹고 살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으로, 인간답게 살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건, 남들보다 더 많이 먹고 마시는 게 아니라 더 좋은 걸 먹고 마실 때니까. 물론 없어도 먹고사는 데아무 지장 없지. 하지만 그것뿐이면 우리가 먹고살기만 하는 존재 같아지는 거야. - P270

이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4번, 흔히 <월광 소나타>라고 하는 곡이에요. 들어 본 적 있어요? 준연이 말하며 비장한 느낌의 셋잇단음표를 연주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유명한 곡이었다. 준연이 나를 보고 말했다. 이건 죽음의 선율이에요. 다가오는 죽음, 피할 수 없는 죽음, 억울하고 비통한 죽음이죠. 제 마음대로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베토벤이 모차르트에게서 빌려 온 선율이에요. 모차르트 오페라에 그렇게 나오거든요. <돈 조반니>에서 기사단장이 살해당할 때 거의 똑 같은 선율이 현악으로 연주되죠. 그리고 베토벤도 이 곡을 쓸 무렵 청력을 상실해 가고 있었어요. 그런 음악가로서 죽음을 의미했죠. 역시나 다가오고 피할 수 없는, 억울하고 비통한 죽으미요. - P293

아버지가 말했다. 세상만사 다 길이 있는 법이다. 왜냐하면 다들 이렇게 길을, 누가 봐도 아무 쓸 데 없는 길을 뚫어 놓으니까. 이렇게 뚫어야 알뜰살뜰 여기저기서 기름칠해 주는 사람이 생기거든. 시키지 않아도 똥 치워 주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우습지. 크고 빳빳한 기름종이들 살랑살랑 흔들어 주면 다들 혓바닥 내밀 듯 손을 내밀지. 아버지는 나를 봤다. 인간이란 다들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죄 한두 개쯤은 지어 가면서 사는 거다. 어느 자리쯤 올라서면 짓지 않을 도리도 없고, 짓지 않을 이유도 없지. 감당할 수 있으니까. 감당이 되면 죄가 아니니까. 감칠맛이 돌지. 남들 다 하는 거 하면서, 지키라는 거 지켜 가면서 남들 안 볼 때 한번씩 혀를 낼름, 낼름해서 핥아 보는 그맛이 혀에 감겨서 잊히질 않거든. 그럴 때야 사는 거 같으니까, 사는 맛이 그거니까. 남들 못하는 걸 나만 할 때, 남들 모르게 나만 아는 걸 하는, 바로 그때. - P488

무엇을 사는지(購買)가 어떻게 사는지(生活)고 살 수 있는 능력이 살 수 있는 능력이다. 아버지는 톡톡 시가를 떨어 재떨이에 떨어진 재를 시가 끝으로 부쉈다. 그러고는 끄트머리를 세워 내게 보였다. 여기 있는, 요 타고 있는 까만 재, 이게 우리 인간이야. 그 가운데에 빨갛고 뜨거운 불이 세상이지, 불가에서 말하는 아수라. 아버지가 깊게 한 모금을 빨자 빠직거리며 담뱃잎이 타 들어갔다. 가운데가 빨갛게 환해졌다. - P500

사랑의 본연이 그런 것이기 때문에 사랑은 다른 사랑과 비교당하지도 평가당하지도 않았다. 가장 좋은 것, 값비싼 걸 해 주는 게 사랑이 아니니까, 최악을 지워 주고 최악이 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 모든 수고를 다해 마지막까지 같이 있어 주는 것으로 충분하니까, 같이 있어 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게 바로 사랑하는 사람의 의미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일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사람이 된다는 건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 믿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뜻이니까. 그게 늘 하진에게 해 주지 못한 것, 그래서 매번 틀리고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사랑한다면서도 이해하는 만큼만 이해하고, 믿을 수 있는 만큼만 믿으려 했으니까. 그래서 그건 이해도 믿음도 아니었다. 알던 만큼만 아는 건 앎이 아니니까, 모르던 걸 아는 앎이니까. - P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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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장자수업 2 - 밀쳐진 삶을 위한 찬가 강신주의 장자수업 2
강신주 지음 / EBS BOOKS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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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얼마 전에 읽은 <강신주의 장자수업> 1권에 이어서 오늘은 2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줄게. 장자에 관한 책을 읽을수록 늘 느끼는 거지만, 장자는 일반적인 관념을 깨는 그런 사람인 것 같더구나. 보통 동양 철학자 중에 맹자를 혁명가에 어울린다고들 하는데, 장자의 사상 또한 관념과 상식을 깨는 측면에서 봤을 때 혁명가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구나. 1권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누가 쓸모 없음을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겠니. 2권에서도 그렇게 일반적인 상식과 다르게 생각하는데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장자의 사상들이 계속 나온단다. 아빠가 기억력이 안 좋아서 자꾸 잊혀져서 문제지만 말이야

장자의 이야기 속에 장자는 장자로 나오는 언급되는 경우도 있지만, 장주라고 하는 경우도 있단다. 장주는 장자의 본명이야. 장자(莊子)에서 ()’는 공자, 맹자, 노자와 마찬가지로 선생님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란다. 그러니까 장자는 장 선생님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면 돼.

..            

우리가 한 곳에 정신을 팔리면 자신을 잊는 경우가 있단다. 이것은 일상생활에서도 많이 경험할 수 있지. 재미있는 텔레비전을 보거나 게임에 열중하다 보면, 옆에서 부르는 소리를 못 들을 수도 있잖니. 우리가 한 곳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위험한 상황을 인지하지 못 하면 그 위험이 그대로 닥칠 수가 있어. 이런 점을 경계하는 글이 장자의 조릉 이야기에서 나온단다. 그늘에 정신 팔린 매미를 사마귀가 노리고 있고, 매미에 정신 팔린 사마귀를 까치가 노리고 있고, 까치에 정신 팔린 사마귀를 장주가 노리고 있는 상황이란다. 그렇다면 정신 팔린 장주를 노리는 무엇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장주는 이내 정신을 차리게 되는 거지. 역시나 까치를 쫓아 경계선을 넘어 온 자신을 보게 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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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40)

장주가 대답했다. “지금까지 나는 드러난 것을 지키며 나 자신을 잊으려 했고, 혼탁한 물을 보며 맑은 연못에 매료되어 있었다. 게다가 나는 선생님으로부터 이미 그 사회에 들어가서는 그곳의 규칙을 따르라고 하신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얼마 전 조릉에서 노닐 때 나는 나 자신을 잊었다. 기이한 까치가 이마를 스치고 날아들었을 때 나는 밤나무 숲에서 노닐며 나의 실제상황을 잊었다. 아니나 다를까, 밤나무 숲을 지키던 사냥터 관리인은 나를 범죄자로 여겼다. 이것이 내가 마음이 편하지 않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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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빠가 얼마 전부터 사진 찍는 것을 꺼려하게 되더구나. 언제 생겼는지 모를 주름과 흰 머리. 낯선 아빠의 모습. 그러면서 떠오르는 젊은 시절의 얼굴. 아빠의 마음을 읽었는지 이 책에서 아빠에게 가르침을 주는구나. 사라진 젊음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는구나. 지나가고 사라진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지금의 삶을 허비하는 것이라고, 젊음은 없어진 것이 아니고, 지금 중년의 삶이 생겨난 것이라고 말이야. 세상에는 없음은 없고, 오직 있음만 있다고생각의 차이로구나.  그 문구를 읽고 나서 가끔씩 셀카를 찍어본단다. , 아직 괜찮군.. 하면서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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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어쨌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긍정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주변에 존재하는 사람이나 사물 혹은 사건들과 제대로 관계할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겁니다. 자신감을 상실한 그는 집 밖으로 나가기를 피할 테니까요.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그래서 타자나 사건과 마주치지 않는다면, 그래서 타자나 사건과 마주치지 않는다면, 그는 새로운 삶을 만들 수 없습니다. 50대 중년은 20대의 젊음에 집착하느라 지금 여기(now & here)’ 50대의 삶을 허비하고 있는 겁니다.<대종사> 편의 현해 이야기가 이 중년에게 힘이 될지도 모릅니다. 세상에는 없는 것은 없고 오직 있음만 있다는 걸 가르쳐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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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에는 늙음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또 있는데 맹손재 이야기에서도 늙음과 죽음을 다루고 있단다. 여기서는 늙음을 젊음의 부재로, 죽음을 삶의 부재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 이야기한단다. 늙음을 젊음의 부재가 아닌 늙음 그 자체로 생각하라고, 유목민님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생활을 하므로 집에 소유와 정착이라는 개념이 없단다. 이곳에서 생활하다가 저곳에서 생활하고젊음과 늙음 또한 마찬가지라는 거야. 잠깐 젊음이라는 집에서 생활하다가 늙음이라는 집에서 생활하는 거지. 죽음 또한 삶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죽음이라는 집이라는 거야. 장자의 말씀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쉽지가 않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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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

젊은 내가 나이고, 사지가 멀쩡한 내가 나이고, 살아 있는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게 바로 장자가 말한 헛된 꿈입니다. 이런 자의식은 늙음을 젊음의 부재로, 불구가 정상의 부재로, 죽음을 삶의 부재로 느끼게 됩니다. 늙음은 늙음으로, 불구는 불구로, 그리고 죽음은 죽음으로 긍정해야 합니다. 물론 젊음을 늙음의 부재로, 정상을 불구의 부재로, 삶을 죽음의 부재로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젊음은 젊음으로, 정상은 정상으로, 삶은 삶으로 긍정해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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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니, 죽기 전에 제자들에게 장자는 자신의 장례식도 유목민처럼 풍장(風葬)으로 지내라고 했단다. 제자들이 까마귀가 선생님을 쪼아먹을까 두렵다 하니, 제자들이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할 말씀을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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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7)

장자가 곧 죽으려 할 때, 제자들은 장례를 후하게 치르려고 했다.

장자가 말했다. “나는 하늘과 땅을 관곽으로, 해와 달을 한쌍의 옥으로, 별들을 다양한 구슬로, 그리고 만물을 부장품으로 생각하고 있네. 내 장례용품에 어찌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 무엇을 여기에 더 보태려 하는가!”

제자들이 말했다. “저희는 까마귀나 솔개가 선생님을 쪼아 먹을까 두렵기만 합니다.”

장자가 말했다. “땅 위에서는 까마귀와 솔개의 먹이가 되고, 땅 밑에서는 땅강아지와 개미의 먹이가 되는 것이네. 그런데 까마귀와 솔개의 먹이를 빼앗아 땅강아지나 개미에 주려고 허니, 어찌 이렇게도 편파적인가!”  <열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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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 유명한 것 중에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는 이야기가 있단다. 수레가 지나가는데 사마귀가 앞발을 들고 수레를 상대하려고 했다는 이야기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강한 상대에 덤벼드는 무모한 행동을 이 한자성어로 빗대어 말하곤 한단다. 그런데 아빠는 그 거대한 수레의 맞짱 뜨는 사마귀의 용기에도 박수를 한번 보내주고 싶구나. 무모하지만 도전하는 자세, 나쁘지 않다고지은이 강신주는 장자 또한 사마귀였을지 모른다고 이야기하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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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어쩌면 장자도 수레와 맞서던 사마귀였는지도 모릅니다. 폭주하는 전거와 그것이 남긴 바퀴 자국 바깥에 거대한 초원과 우거진 산림이 있다는 걸 아는 순간, 장자는 대붕이 됩니다. 물론 그곳에서도 위험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여유와 당당함으로 충분히 살아낼 수 있는 정도입니다. 국가를 너무 과대평가하지 말고, 폭풍우나 산불 혹은 맹금 정도로 보아야 합니다. 천하로 상징되는 국가 질서쯤은 가볍게 날아 넘어가는 대붕의 길입니다. 바퀴 자국에도 잠시 머물고, 수레 위에도 잠시 머물고, 아니면 끝이 보이지 않는 먼 어딘가에도 머물 수 있는 대붕입니다. 수레에 잠시 날아든 대붕은 타인을 자유롭게 만들 수 없다는 걸 압니다. 그저 자유로운 삶을 보여주며 그들이 자유를 결단하기를 바랄 뿐! 잠시 뒤 대붕은 그 광막한 초원으로 바람만 남긴 채 날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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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서도 여러 달인들의 이야기가 있었는데 2권에서도 <재경 이야기>에 달인 목수 재경이 등장한단다. 악기받침대를 단순히 악기만 잘 받쳐주면 되지만, 재경이 만든 악기받침대는 예술이 되어 악기보다 더 주목을 받는단다. 재경이 이런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나무라는 대상과 재경 사이에 아무런 간섭 없이 하나가 되어 그런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고 하는구나. 사람과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라고 하는구나. 사랑하는 사이라면 둘 사이에 아무 간섭 없이 둘이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야. 이 또한 공감 가는 이야기로구나.

장자가 속세를 떠나 살았다고 하지만, 그를 등용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란다. 초나라 군주가 장자를 등용하려고 한 적이 있어. 장자는 무작정 거절한 것이 아니고, 거북이의 예를 들어 초나라 군주가 다시 제안하지 못하게 했더구나. 거북이가 화려한 비단보에 싸여 화려한 방 안과 진흙탕 속 중에 어디서 살고 싶겠냐고 하면서 말이야. 장자 같은 자유로운 영혼이 어떤 체제에 들어온다면, 병이 생기지 않을까 싶구나. 새는 가두지 않는 법. 더욱이 장자는 엄청나게 큰 대붕이잖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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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

장자가 복수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초나라 왕은 두 사람의 대부(大夫)를 먼저 보내 그에게 말을 전했다. ‘국가 안의 모든 일을 선생에게 맡기고자 합니다!’ 장자는 낚싯대를 쥐고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초나라에 죽은 지 이미 3000년이나 된 신령한 거북이 있는데, 왕이 이것을 상자에 넣고 비단보에 싸서 묘당(廟堂) 안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고 내가 들었습니다. 이 거북은 죽어서 뼈를 남겨 귀하게 되기를 원했을까요, 아니면 차라리 살아서 진흙탕 속에서 꼬리를 끌며 다니기를 원했을까요?’ 두 사람의 대부는 말했다. ‘차라리 살아서 진흙탕 속에서 꼬리를 끌며 다니기를 원했을 테지요.’ 장자가 말했다. ‘그만 돌아가시오! 나는 앞으로도 진흙탕 속에서 꼬리를 끌며 다닐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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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에 나오는 또 유명한 한자성어 중에 조삼모사(朝三暮四)가 있단다. 원숭이들에게 주는 도토리를 아침에 3, 저녁에 4개를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이 화를 나면서 난리를 쳤고, 그래서 아침에 4, 저녁에 3개를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이 군말 없이 좋다고 했다는 일화를 통해 보통 우둔한 사람을 빗대어 하는 말이란다. 그런데 지은이 강신주 님은 2000년 넘게 사람들이 조삼모사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하시더구나. 이 일화는 주인이 원숭이들을 사랑해서 부족해진 식량에 대한 배분에 대한 고민이 담긴 이야기라고 했어. 주인의 마음대로 음식을 배분하는 것이 아니고 원숭이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배분 방식을 결정하는 것이라고, 상대방 또는 아랫사람과 어떻게 소통하는지, 소통의 방식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말이야. 그렇다면 앞으로 조삼모사라는 한자성어는 소통을 잘 하는 사람에게 써야 하나? 먼저 이 이야기를 잘 설명해서 상대방이 기분상하지 않겠구나.

….

아빠가 생각하기에 <장자>의 이야기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호접몽(胡蝶夢)’이라고 하는 나비의 꿈이 아닌가 싶구나. 나비의 꿈을 꾸고 나서, 문득 혹시 지금의 이 생활이 나비가 꾸고 있는 꿈은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야. 오래 전에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 어쩌면 그것이 사실일 수도 있고 말이야. 우리의 삶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많으니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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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

옛날 장주는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나는 나비였고 스스로 유쾌하고 기분이 좋았기에 자신이 장주라는 걸 알지도 못했다. 갑자기 깨어나니 분명히 장주였다.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아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반드시 구분이 있다. 이것을 타자와 함께 변화한다.(物化)’고 말한다.     <제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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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장자 이야기에 대해서 해보았는데, 장자 이야기의 핵심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자유란다. 자유라는 것이 지금의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떠나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누군가에는 테두리 안에 머물고 있는 것도 자유란다. 사실 아빠도 머무는 자유가 더 좋긴 하구나. 그래도 가끔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도 있고 말이야. 유목민처럼 머물고 싶을 때 머물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나는 그런 자유가 진정한 자유라고 지은이 강신주 님이 말씀하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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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366)

떠날 수 있는 힘! 장자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자유의 소중한 의미입니다. 국가에서도, 회사에서도, 가정에서도, 심지어 우리 자신의 삶에서마저 우리는 떠날 수 있습니다. 떠나면 불행할 것 같고, 떠나면 살지 못할 것 같고, 떠나면 외로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떠나본 적 없는 불행한 영혼들의 착각입니다. 떠나서 행복할 수 있고, 떠나서 살 수 있고, 떠나서 새로운 누군가와 든든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강박적으로 떠나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떠날 수도 있지만 머무는 것도 진정한 자유의 또 다른 의미니까요. 그래서 자유인의 머물기는 가치가 있는 겁니다. 억지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머물고 싶어서 머무는 것이니까요. 자유롭게 떠나고 자유롭게 머뭅니다. 그래서 자유인의 거동은 여러모로 유목민과 유사합니다. 유목민이 어딘가를 떠났다면 그는 그곳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그가 어느 곳에 머물고 있다면 그곳의 풀들이, 바람들이, 물들이, 구름들이, 그리고 석양의 장관이 그를 행복하게 했기 때문일 겁니다. 자신이 삶의 주인일 수 있는 곳, 자신에게 충만한 삶의 뿌듯함을 안겨주는 곳에서 자유인은 머물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체의 불만과 투정도 없이 그냥 쿨하게 떠나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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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장자수업 끝.


PS,

책의 첫 문장: 내가 누군가 귀가 밝다고 말한 것은 그가 특정한 저것의 소리를 듣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가 스스로 듣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책의 끝 문장: 개골개골!


불교에서 인간은 부처를 숭배해야 하지만 동시에 인간도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칙적으로 부처의 눈으로 보아야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눈으로 볼 수도 있다는 가르침, 종교로서는 정말 개운치 않은 종교가 불교입니다. 분명한 것은, 승려들에게 복이 있으려면 중생들은 부처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면, 중생들이 사찰을 찾아 시주할 일도 없을 테니까요.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되면 붕괴되는 종교! 탄생할 때부터 그 내부에 시한폭탄을 장착했던 종교! 그것이 불교입니다. 시한폭탄의 초침이 돌아가고 있다는 긴박감 때문인지, 종교성과 함께하는 불교의 인문성은 더 극적인 데가 있습니다. - P15

공수가 선을 그리면 양각기와 곱자에 부합했고, 그의 손가락은 사물에 따라 변할 뿐 마음으로 헤아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영재(靈臺)는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만 막혀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발을 잊는 것은 신발에 딱 맞은 것이고, 허리를 잊는 것은 허리띠에 딱 맞는 것이다. 앎에서 옳고 그름을 잊는 것은 마음에 딱 맞는 것이고, 내면의 변화도 없고 외부 사람의 말을 따르지 않는 것은 마주친 사태에 딱 맞는 것이다. 처음으로 딱 맞았지만 일찍이 딱 맞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느끼는 것은 딱 맞음의 잊음에 딱 맞는 것이다. <달생> - P85

장자에게 ‘허(虛)’, ‘상(喪)’, 혹은 ‘망(忘)’ 등은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세 개념은 모두 마음을 대상으로 합니다. 마음을 비우고, 마음을 잃어버리고, 마음을 잊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불교를 제외하고 동서양 사유의 전통과는 어딘가 이질적인 주장입니다. - P87

예(羿)는 아주 작은 표적이라도 활로 맞추는 데 능숙했지만, 사람들이 자기를 찬양하지 않도록 하는 데는 서툴렀다. 성인은 ‘자연적인 것(天)’에 능숙했지만, ‘인위적인 것(人)’에는 서툴다. 자연적인 것에도 능숙하고 인위적인 것에도 잘 대처하는 것은 오직 ‘완전한 인간(全人)’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오직 벌레만이 벌레일 수 있고, 오직 벌레여야 자연적일 수 있다. 완전한 인간은 자연적인 것을 싫어한다. 사람들이 자신을 자연적이라고 여기는 것도 싫어하는데, ‘나는 자연적인가? 아니면 인위적인가?’라는 의문에 대해서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경상초> - P203

젊은 내가 나이고, 사지가 멀쩡한 내가 나이고, 살아 있는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게 바로 장자가 말한 헛된 꿈입니다. 이런 자의식은 늙음을 젊음의 부재로, 불구가 정상의 부재로, 죽음을 삶의 부재로 느끼게 됩니다. 늙음은 늙음으로, 불구는 불구로, 그리고 죽음은 죽음으로 긍정해야 합니다. 물론 젊음을 늙음의 부재로, 정상을 불구의 부재로, 삶을 죽음의 부재로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젊음은 젊음으로, 정상은 정상으로, 삶은 삶으로 긍정해야 하니까요. - P229

<제물론>편 여희 이야기에서 장자는 "단지 크게 깨어날 때만, 우리는 큰 꿈을 꾸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20여 년 동안 지속되었던 장자꿈에 대한 최종 보고서를 마무리하는 날, 애틋함과 아련함이 교차하는 작은 느낌마저 상쾌한 바람으로 씻어보는 날입니다. 안녕! 장자! "지금까지 나는 장자가 된 꿈을 꾸었다. 자유롭게 당당한 장자였고 스스로 유쾌하고 기분이 좋았기에 자신이 나라는 걸 알지도 못했다. 갑자기 깨어나니 분명히 나였다. 내가 장자가 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장자가 내가 된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와 장자 사이에는 반드시 구분이 있다. 이것을 ‘타자와 함께 변화한다’고 말한다." - P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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