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맛이 사는 맛 - 시대의 어른 채현국, 삶이 깊어지는 이야기
채현국.정운현 지음 / 비아북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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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현국 어른의 말씀보다는 정운현 선생의 생각이 더 많다는 느낌이 드네요. 채현국 선생의 육성을 듣고 싶으면 채현국 어른을 세상에 알린 한겨레 인터뷰를 직접 읽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18266.html


책에 있는 육성 몇 마디:


"삶이란 끊임없이 묻고, 배우고, 깨우치는 과정이다. 처음엔 누구도 삶을 알 수 없다. 그저 그렇게 사는 것이 삶이다. 삶이란 삶을 사랑할 줄 알게 되는 과정이다. 다만 그저 아는 게 아니다. 수많은 갈등과 반복, 그 과정에서 피 터지게 싸운 결과, 우리는 삶을 사랑하게 된다. 삶이 때로 공허하고 저주스러운 것은 그만큼 사랑할 가치가 있다는 반증이 된다. 삶을 사랑할 줄 알게 되면 이제 운이 트인다. 단맛이든 쓴맛이든 삶은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실패를 연속하는 것이야말로 행복으로 가는 과정이다." (94페이지)

"적게 쓰고 가난하게 살고 발전이란 소리에 속지 말고, 훨씬 더 소박하게 살라." (69페이지)

"나는 좌우명 같은 것들을 없애려고 노력해왔다. 이유는 하나다. 모두 ‘분칠‘ 같아서다. 지식이라는 것, 뭘 안다는 것 또한 삶을 분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명언이나 좌우명 같은 것들이 삶을 살아가는 데 효과가 있는지 모르겠는데 이런 것들이 결국에는 농약, 화학비료 같은 것이 되고 만다. 사람은 순박하게 살아야 하는데 그런 것들이 소박함, 순박함 같은 것을 모두 날려버린다. 나는 그런 것들을 철저히 거부하며 살아왔다. 내 인생에 교훈이나 좌우명 같은 것은 없다." (97페이지)

"집착은 그 자체로는 절대 끊을 수 없다. 집착하지 말라는 말은 거짓에 불과하다. 끊을 수 있으면 그건 집착이 아니다. 가령 흡연자가 담배를 끊는다고 가정해보자. 금연에 성공하려면 결심을 할 것이 아니라 지금 손에 든 이 담배부터 피우지 말고 다음에 피우자 생각하면 된다. 그러고는 죽은 다음에 피우겠다고 다짐하며 담배 피우고 싶은 생각을 속이면 된다. 집착을 끊으려면 집착하는 그 마음을 속여야 한다. 다시 말해 무엇에 집착하지 않겠다는 마음부터 없애야 한다." (106페이지)

"방황은 곤혹스럽고, 때론 두렵다. 그러나 기피하지 마라. 긍정적으로 마주하라. 자신이 쭈그러들지 않기 위해서다. 시대마다 늘 현안이 있었다. 현재를 살고 있는 자기 시대가 가장 괴로운 법이다. 세상은 늘 좀 삐딱한 사람, 엉뚱한 사람, 골 아픈 사람이 개척해왔다. 젊은이가 약아빠져서는 안 된다. 아무리 어려워도 용기 있는 사람은 나온다. 방황을 겁내지 마라. 방황을 겁내면 늙어서 추해지기 쉽다. 어른들 말을 잘 안 들어도 된다. 어른들의 정의가 다 옳은 것은 아니다." (112페이지)

"하느님이 악마만큼만 부지런하면 악마가 맥을 못 출 텐데. 정말 못된 놈들은 엄청 부지런하다. 돈에 환장한 사람들은 잠도 안 잔다. 잠도 서너 시간밖에 안 자고 가만 앉아 있지도 않는다. 자기 선의(善意)만 믿고 게을러지면 선의도 부서진다. 정말 선의가 있는 사람들은 악마처럼 부지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밖에는 선의를 지킬 일이 없다.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은 사람이 지나가는 방향에 따라 구분될 뿐이다. 길은 하나다. 돈이 생기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자기가 하고 싶은 방법이어야 한다. 단, 임금노예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지금 직업인들은 말만 직업인이지 임금을 받는 노예들인 경우가 많다. 돈에 환장하면 안 된다. 어떻게 해야 자기를 위해 돈에 환장하지 않을 것인지, 우리가 실현해 보여야 할 일 중의 하나다." (125페이지)

"뭘 확실하게 안다는 것, 그것이 바로 고정관념이다. 사람들은 틀린 관념을 고정관념이라고 잘못 알고 있다.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는 말은 내가 미치지 않았다는 전제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강제로 훈련된 생각을 하지 말라. 신념 같은 것도 강조하기 말라. 확신은 곧 고정관념이 돼버려 뭘 자유롭게 말할 수 없게 만든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때론 건방진 생각이 의무일 때가 있다. 또 화를 내는 행동이 의무일 때도 있다." (141페이지)

그러나 이[시국사범 수배자들을 숨겨준 일]를 두고 나를 민주화운동 인사라고 부르는 것은 민망해서 듣고 있기가 어렵다. 나는 한 번도 시위나 집회에 나간 적이 없고 다른 사람들처럼 대의를 위해 나를 희생하며 감옥에 가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저 내가 못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짐을 갖고 있었고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일들로 그들을 조금이나마 도왔을 뿐이었다. 그 시절엔 너도 나도 그렇게 서로를 보듬고 위했다. 내가 한 일은 다른 여러 사람들이 한 일들에 비하면 훌륭한 축에도 못 낀다. (171페이지, 책의 마지막 부분, 작은 자서전 중에서)

그저 나는 친구들이 좋아서, 사람 만나는 것이 좋아서 마음이 가는 대로 했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가 내게 도움을 받았다고 하면 손사래를 친다. 난 누군가를 도운 적이 없다. 도움이란 남의 일을 할 때 쓰는 말이다. 난 그저 내 몫의, 내 일을 했다. 설령 다른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나까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될 일이다. 왜냐하면 그건 내가 썩는 길이기 때문이다. 내 일인데 남을 위해 했다고 하면 위선이 된다. (214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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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현실 너머 편 (반양장) - 철학, 과학, 예술, 종교, 신비 편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2
채사장 지음 / 한빛비즈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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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을 행복한 삶, 불행한 삶, 이도 저도 아닌 삶으로 설명할 수 있나요? 어느 정도는요. 이 책은 그런 시도입니다. 그 이상을 바라면 안됩니다. 그래도 삶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사는 것 보다는 낫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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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yonder 2015-04-05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가지 분명한 오류: 파동과 파장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
 
세상은 왜 존재하는가 - 역사를 관통하고 지식의 근원을 통찰하는 궁극의 수수께끼
짐 홀트 지음, 우진하 옮김 / 21세기북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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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Quick Proof That There Must Be Something Rather Than Nothing, for Modern People Who Lead Busy Lives 부분

 

세상에 무가 존재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아무런 법칙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법칙도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 법칙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허용될 것이다. 모든 것이 허용된다면, 무는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무가 존재한다면, 무는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무는 그 자체를 용납할 수 없다.

 

그러므로 무엇인가가 존재해야 한다. 증명 끝.

 

이 번역을 어떻게 이해하라고요... 원래 작가의 의도는 이렇게 말을 잘못 사용하면 엉뚱한 증명도 있을 수 있다는 내용이에요. 번역하기 어렵다는 건 알지만 도저히 이해불가능이네요. 원문을 보세요.

 

Suppose there were nothing. Then there would be no laws; for laws, after all, are something. If there were no laws, then everything would be permitted. If everything were permitted, then nothing would be forbidden. So if there were nothing, nothing would be forbidden. Thus nothing is self-forbidding.

 

Therefore, there must be something. QED.

 

'모든 것이 허용된다면, 무는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문제네요. 'If everything were permitted, then nothing would be forbidden.' 이 얘기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면, 금지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라는 얘기입니다. 'nothing'을 '무'로 사용하다가 여기서는 '~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는 뜻으로 썼습니다. 영어로는 똑같은 nothing이지만요. 여기서 논리적 비약이 일어났고 저자도 본문에서 오류라고 지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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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yonder 2013-09-01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 것도 없다고 하자. 그러면 법칙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법칙도 결국 어떤 것이니까. 법칙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될 것이다. 모든 것이 허용된다면, 금지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아무 것도 없다면, 금지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따라서 '무'는 자기부정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무언가 있어야 한다. 증명 끝?

이건 어떤가요? 번역은, 철학책 번역은 정말 어렵습니다. TT

blueyonder 2014-03-20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지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와 '[아무 것도 없다]는 '무'가 금지된다(허용되지 않는다)'는 분명 다른 말이지요. 하지만 영어에서 'Nothing would be forbidden'은 둘 다 될 수 있습니다.

blueyonder 2014-12-03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생각해 보니 우리 말은 영어에서 일어나는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더 좋은 언어네요!
 
철학의 위안 - 불안한 존재들을 위하여
알랭 드 보통 지음, 정명진 옮김 / 청미래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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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3.5개. 보통이 해석하는 소크라테스, 에피쿠로스, 세네카, 몽테뉴, 쇼펜하우어, 니체의 철학. ˝인문학 분야에서 저자의 책임은 과학에 버금가는 정확도에 있지 않고 인류에게 행복과 건강을 주는 데에 있다˝는 그의 말을 실천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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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위안 - 불안한 존재들을 위하여
알랭 드 보통 지음, 정명진 옮김 / 청미래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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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철학자들은 인간이 육체를 정복할 수 있고, 또 육체적이고 열정적인 자아에 결코 휩쓸려서는 안 된다고 암시했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가장 고매한 열망을 품도록 자극하는 고귀한 충고이다. 하지만 그 충고를 완벽하게 따르기란 불가능하며, 오히려 반대의 결과를 초래한다.

어떤 인간도 정착할 수 없는 높기만 한 철학의 산봉우리들이 그리고 우리의 관습과 힘을 넘어선 곳에 있는 규율들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 <수상록> III
[인간이] 자신과는 엄청나게 다른 존재의 기준에 맞추어서 자신의 의무를 정하는 것은 그다지 현명하지 않다. - <수상록> III -176쪽

인간의 지혜라는 것에 담긴 지적 우둔함을 간파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놀랄 만한 이야깃거리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인간의 지적 능력을 위대한 수준으로 끌어올렸던 그런 중요한 인물들에게서조차 엄청난 오류를 발견할 때, 우리는 인간에 대해서, 인간의 감각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의 이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 <수상록> II-196쪽

... 그들이 단어의 기원에 관한 책을 쓰고 보편적인 명제를 발견한 것은 명백한 업적이었다. 그런데 그런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 철학적 논리에 대해서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사람들보다 결코 더 행복하지도 않았고, 약간은 더 불행하기까지 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몽테뉴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바로의 삶을 떠올리면서 한 가지 의문을 품었다.

바로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박학다식이 정작 그들 자신들에게는 어떤 소용이 있었던가? 그것이 그들을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게 했던가? 그것이 평범한 짐꾼에게 일어났던 불행을 덜어주었는가? 논리학이 그들의 통풍(痛風)에 위안이 되었던가......? - <수상록> II
-206쪽

그 두 사람이 그렇게 박식하면서도 무척 불행했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몽테뉴는 지식을 두 개의 범주로, 즉 학문(learning)과 지혜(wisdom)로 구분했다. 학문의 범주에는 논리학과 어원학, 문법, 라틴어와 그리스어가 들어갔다. 그리고 지혜의 범주에는 그보다 훨씬 더 폭넓고 이해하기 어렵고, 보다 가치 있는 지식의 종류를 넣었는데, 여기에는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도록 이를테면 사람들이 행복하게 도덕적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해당되었다. -206쪽

전문적인 교수진과 교장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콜레주 드 기옌이 안고 있던 문제는 학문을 전달하는 데는 뛰어났지만, 지혜를 전파하는 데는 완전히 실패했다는 점이었다. 바로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개인적인 삶을 망쳐놓았던 잘못이 이번에는 제도적 차원에서 되풀이되었던 것이다.

나는 기꺼이 교육의 부조리라는 주제로 돌아가겠다. 우리의 교육 목적은 우리를 행복하고 현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무엇인가를 집어넣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목적이라면 성공한 셈이다. 교육은 우리에게 미덕을 추구하고 지혜를 포용하도록 가르치지 않았다. 그것은 단어의 기원이나 어원 같은 것들을 우리의 뇌에 각인시켰다....... - <수상록> II-207쪽

... 몽테뉴의 지식체계에서는, 한 권의 책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삶에서 유익하고 타당한가 하는 점이다. 플라톤이 쓴 내용이나 에피쿠로스가 뜻한 바를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은, 그들의 말이 정말 흥미롭고 지금 당장 우리의 고민이나 외로움을 달래는 데에 도움이 되는지를 판단하는 것보다 가치가 덜한 일이다. 인문학 분야에서 저자의 책임은 과학에 버금가는 정확도에 있니 않고 인류에게 행복과 건강을 주는 데에 있다. 몽테뉴는 그런 관점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짜증스러운 반응을 나타냈다.-216쪽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룬 성취의 스케일 자체가 우리에게 문제투성이의 유산을 물려주었다. 우리에게 이로운 존재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똑똑한 저자들이 있다. 지나치게 말을 많이 한 나머지 그런 저자들은 최종 결론까지 내려준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천재성은 후계자들로 하여금 창조적인 작업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불경(不敬)을 저지를 용기를 가지지 못하게 한다. 역설적이게도,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를 가장 존경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자신처럼 행동하지 못하도록 막았는지도 모른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단지 자신보다 앞서 축적되었던 지식의 상당 부분에 대해서 회의함으로써, 말하자면 플라톤이나 헤라클라이토스를 읽기를 거부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들의 취약한 부분에 대해서 비평을 가함으로써 위대한 인물의 반열에 올랐으면서도 말이다. 진정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신에 입각하여 행동한다는 것은, 몽테뉴가 깨달았던 반면에 피사의 그 남자는 깨닫지 못했는데, 어쩌면 가장 성공한 권위자들과도 어느 정도 지적 결별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220쪽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이라고 해서 다 나쁜 것은 아니다.-3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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