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그리다 - 세계 지성들의 빛나는 삶과 죽음
미셸 슈나이더 지음, 이주영 옮김 / 아고라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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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스위프트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불쌍한 늙은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가 가장 자주 했던 말은 이것이었다. "나는 나야...... 나는 나야." 그는 의자에 앉아 쉴 새 없이 그렇게 되뇌곤 했다.-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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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yonder 2012-09-15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신은 왜 거기 있습니까?
당신은 왜 당신입니까?
당신은 왜 없지 않고 있습니까?
 
더러운 철학
김진석 지음 / 개마고원 / 2010년 1월
품절


철학적 가치가 홀로 역사적 변화를 가져오기 힘들 듯이, 기술적 요인이 홀로 역사를 망치는 것은 아니다. 인간 인식에 예속된 대상들을 지배하려는 기술에 서양문명이 크게 의존하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그렇게 영향력이 큰 기술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차원들과의 얽힘 속에서만 비로서 현실적 영향력을 가질 것이다. 한 예로 기술은 산업혁명 이후의 사회에서 끊임없이 갈등을 유발하면서 생산력을 확대하는 괴물 같은 '자본'과 결합되면서 가공할 힘을 발휘한다. 그런데 이 자본의 힘은 부정적인 양상을 띠는 것만은 아니다. 자본주의 발전 속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한 도시 노동자들은 정치적으로 민주주의의 발전에 이바지한다.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개인들의 폭발적인 의식과 갈망은 이제까지 어떤 사회도 만들지 못했던 문제도 양산했지만 동시에 개인들에게 매우 개방적인 상황도 만들었다.-117쪽

과거의 사유체계에 고유한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 개념들을 연구할 수 있고 또 연구해야 하지만, 다른 역사적 문제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그 개념들이 역사적으로 근본적인 문제라고 해석하는 철학적 오류가 사실 철학적 담론에 일반적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도'가 그렇고 '무위'가 그렇고 적지 않은 경우에 '자연'도 그렇다. 서양의 '초월적 신'이 그렇고 '이성'이 그렇듯이.-123쪽

잘 알다시피 생태주의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에 반대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후자가 근대적 산업 생산성의 진보와 발전을 믿는다는 점에서 서구의 근대적 역사관과 동일한 궤적 위에 있기 때문이고, 또 인간에 의해 인간을 위해 자연을 대상화하는 인간중심주의라는 점에서 서구적 인간주의와 비슷한 성향을 띠기 때문이다. 그 이유엔 한편으론 마땅한 근거가 있다. -129쪽

그러나 생태자연주의 혹은 생명자연주의는 생명과 자연을 순수한 조화와 공생의 공간으로만 이해한다는 점에서 근본주의적 성격을 가진다. 그 근본적인 이상주의는 순수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형이상학에 절대적 도덕성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독선적이고 권위적일 수도 있다. 계급적 불평등이 핵심 문제이고 그것을 없애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은 점에서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 단순하고도 독선적이었다면, 생명자연주의는 자연 혹은 생명에 대한 외부적 폭력이 핵심적 재난이고 그것만 해결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는 점에서 전자와 비슷한 꼴을 하고 있다. 왜 역사적 갈등(사회적, 정치적, 신분적, 종교적)과 자연에 대한 갈등이 상호작용 속에서 존재한다고 인정하면 안 될까? 자연에 대한 인간들의 맹목적 남용을 경계하고 조절하는 일이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왜 자연과 생명을 어떠한 상처나 슬픔도 없고 어떠한 허망함과 잔혹함도 없는 조화로운 공간으로 상정해야 하는가?-130쪽

노자의 말들이 형이상학적으로 고도의 이념적 가치를 가졌다는 것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아무리 철학적 사상이나 이념이 초월적이고 이상적이라도, 아니 실제로 그러면 그럴수록, 그것은 오히려 공허하게 사용되거나 위선적으로 남용되기 쉽다. 실제로 노자의 이념들은 오늘날 너무 형이상학적 초월성에 기대는 경향을 보이며, 따라서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문제들이 착종된 영역에서 구체적이고도 실제적 지침으로 사용되기는 매우 어렵다. 서양사상의 꽃들인 플라톤적 이데아나 칸트의 절대적 도덕률에 대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더 나아가 다른 사상과 비교하자면 매우 파격적이고 전복적인 니체의 사상도 그 자체로는 이미 지나간 시대의 철학사상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그것을 구체적인 현재적 주체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이다. 철학사상이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실천적 맥락 속에 들어가 있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140쪽

한번 비교를 해보자. 기독교가 먼저 생겼던 나라들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추상적이고도 광신적인 영적 구원주의에서 상당히 벗어나,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사회적 의무와 역할에 관심을 쏟는 편이다. 그에 비교하면 노자와 공자에 대한 김용옥의 해석학은 근본주의적 혹은 광신적 해석학에 가깝다. 그는 노자와 공자가 오늘의 세속적이고도 현실적인 사회에서 어떤 시대적 혹은 반시대적 방식으로 살고 또 살아남을 수 있는가라는 민감한 주제에 주의를 기울이기 보다는, 가히 광신적이라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씀 하나 하나를 선포한다. 성서의 성스러운 말씀을 해석하는 자의 교부의 열정과 표정으로 그는 얼마든지 평범한 말일 수 있는 구절도 신성화한다. 사실 노자와 공자의 말 중에서 꽤 많은 부분은 그 시대 누구나 할 수 있었을 보통의 말이거나 진부한 수준의 말이라고 보는 것이 오히려 솔직한 해석적 태도에 가깝다. 이러한 태도는 단순히 개인적으로 비판한 태도이거나 회의적 태도라기보다는, 과거의 '철학적' 기록을 차분하게 연구할 때 가져야 할 '고고학적'이며 '발생학적' 태도인 것이다. -177쪽

이 땅의 신자들이 다른 어떤 곳의 신자들보다 영성과 구원에 집착하면서도 사회적 의무와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 표리 관계를 이루듯이, 김용옥의 경우에도 고전의 말씀 하나 하나에는 이곳 저곳의 지식을 다 끌어다 붙여놓으며 말씀의 후광을 상징하려고 하면서도, 그것이 사용되는 사회적이며 실천적 맥락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다. -178쪽

'동양' 철학이나 '서양' 철학을 막론하고 오늘날 매우 필요한 기본적인 전제가 있다. 우리는 과거의 텍스트를 해석하고 연구하는 것과 현재와 미래를 위한 사상을 모색하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 다르게 말하면 고전적인 텍스트를 연구하는 학문 연구자가 당연히 현재의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도 전문가적이고 심오한, 그리고 일반인들보다 더 유익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으리라고 여길 필요가 없다. 물론 이런 구분은 상당히 논쟁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인들뿐 아니라 철학교수들도, 과거의 텍스트를 잘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은 오늘의 세계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공공연히 혹은 은연중에 믿기 때문이다. 이 선입견이 "21세기를 위한 노자", "21세기를 위한 공자" 같은 구호뿐 아니라 "철학의 대중화"란 구호의 밑에 깔려 있다. -182쪽

사정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에서도 비슷하다. 제논이나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이 서양사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 단편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런 것이지 사상이 가장 본원적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가상의 사상사를 설정한 후에 근원적 가치를 소급적으로 투사하는 관념적 해석학을 버리자. 그런 해석학은 다시 그 가치가 역사적인 인과관계에 따라 연대순으로 영향을 끼친다고 여기는데, 그런 생각이야말로 유치한 해석학인 것이다. 노자와 공자의 단편은 그 자체로 매우 심오하고 중요해서 자연적으로 전승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후대의 사람들이 그 이름을 빌리고 거기에 기생하고 공생하면서 현재와 전통을 구성했기 때문이다. -1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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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철학
김진석 지음 / 개마고원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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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쓸모 없을 것 같은 지식을 강의하는 고역을 충분히 공감합니다. 하지만 이 책은 그 이상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고민이 세상을 만들어 나간다고 믿습니다(믿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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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 타임 - 파울 파이어아벤트의 철학적 자서전
폴 파이어아벤트 지음, 정병훈 옮김 / 한겨레출판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I'm a little more intelligent than I used to be; I've learned a few tricks, I'm better balanced, emotionally (though this balance still leaves much to be desired); in short, I'm in a much better position to start my life than I was only a decade ago--but I'm at the end of it, give or take a few years. Five years, perhaps, ten years if I'm lucky. That gives me pause. And why? Not because I would like to live forever, and certainly not because of the important books and papers that might remain unwritten, but because I would like to grow old with Grazia, because I would like to love her old and wrinkled face as I am loving her youthful face today, because I would like to support her in her troubles and to rejoice with her in her happy times. These thoughts, which start clamoring for attention whenever I think about the rest of my life, make it clear to me that there are strong inclinations after all, that they are not about abstract things such as solitude or intellectual achievements but about a live human being, and that at long last I have learned what it means to love somebody."

"나는 이전보다 조금 더 현명해졌다. 몇 가지 삶의 기교를 배웠고 정서적으로 좀 더 잘 균형 잡혀 있다. 이 균형이란 게 여전히 욕망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지만, 간단히 말해서, 10년 전보다 내 인생을 시작하는데 더 좋은 위치에 있다. 내 생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몇 년을 더 살든지 덜 살든지 할 것이다. 운이 좋다면 5년, 아니면 10년을 더 얻을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잠깐의 짬을 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것은 내가 영원히 살고 싶기 때문이 아니다. 아직 완성하지 못한 중요한 책이나 논문을 마무리하기 위한 것은 더욱 아니다. 그것은 그라지아와 더불어 늙어가고 싶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녀의 늙고 주름 잡힌 얼굴을 그녀의 젊은 얼굴을 사랑하듯이 사랑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녀를 뒷받침해주고, 그녀가 행복할 때는 그 기쁨을 나누고 싶다. 이러한 생각들은 내가 나 자신의 남은 인생을 생각할 때마나 언제나 나에게 주의하라고 외치는 것이었지만, 그 덕분에 분명해진 것이 있다. 그것은 결국 내가 어떤 강한 성향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고독이나 지적인 성취와 같은 추상적인 사물에 관한 것이 아니고 살아 있는 인간에 관한 것이며, 이제야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291페이지)

 

아름다운 글이... 왜 아마존에서는 별 다섯인데 한국에서는 이렇게 아무런 관심도 못 받는지 알 것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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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yonder 2012-04-24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예전보다 더 똑똑해졌다. 인생 사는 법도 어느 정도 터득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감정적으로도 더 균형이 잡혀 있다. 간단히 말해서, 겨우 십 년 전과 비교해도 나는 인생 살기에 훨씬 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 끝에 와 있다. 몇 년의 차이가 있을지 모른다. 아마 5년, 운이 좋으면 10년일 것이다. 이런 생각은 나를 먹먹하게 한다. 왜일까? 영원히 살고 싶기 때문도 아니고, 중요한 책이나 논문을 더 쓰고 싶기 때문도 분명히 아니다. 그것은 그라지아와 함께 늙어 가고 싶기 때문이다. 오늘 그녀의 젊은 얼굴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녀의 늙고 주름진 얼굴을 사랑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녀가 아파할 때 위로해 주고 기뻐할 때 같이 기뻐하고 싶기 때문이다. 남은 생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뇌리를 울리는 이러한 생각은 내게 확신을 준다. 결국 인간에게는 고독이나 지적 성취와 같은 추상적인 것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을 향한 강렬한 경향이 있음을. 그리고 이제야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를 깨달았음을.

2016-06-29 14: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ueyonder 2016-08-18 14:49   좋아요 0 | URL
네, 이 책도 다시 나올 때는 번역을 좀 더 손 봤으면 좋겠습니다. 파이어아벤트는 매우 매력적인 철학자입니다.
 
킬링 타임 - 파울 파이어아벤트의 철학적 자서전
폴 파이어아벤트 지음, 정병훈 옮김 / 한겨레출판 / 2009년 4월
절판


우리 주위에는 참으로 많은 위험한 철학이 도사리고 있다. 어째서 그것들이 위험하다는 말인가? 그것들은 우리의 판단을 마비시키는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합리주의도 독단적이거나 비관적이거나에 상관없이 예외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더 위험하다. 그것의 산물인 내적 정합성, 그것의 원리가 가진 외관상의 합당성, 개개인을 편견에서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약속, 과학의 성공, 이 모든 것은 합리주의의 가장 중요한 성과로 생각되었고, 합리주의에 대하여 거의 초인간적인 권위를 부여했다. -167쪽

포퍼는 이들 요소를 충분히 사용했을 뿐 아니라 거기에 자신만의 마비성이 강한 요인을 덧붙였다. 바로 단순성이다. 자신의 원리를 단순하고 직설적인 방법으로 설명하는 정합성을 갖춘 철학이 도대체 왜 잘못인가? 그것은 철학이 현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말로, 그것은 과학철학의 경우에서 보면 과학적 실천과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철학은 그 자체만으로 즐길 수 있는 음악과 다른 것이다. 그것은 혼란으로부터 우리를 인도해야 하고 변화를 위한 청사진도 제공해야 한다. 포퍼는 그러한 안내나 지도는 단순하고 정합적이며 '합리적'이어야 하고, 그외의 다른 어떤 것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는 그는 그 이전의 철학자 크라프트와 라이헨바흐, 허셜과 마찬가지로, 과학의 실천과 과학적 탁월성의 기준 사이를 구분하고, 인식론은 오직 후자만을 다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계(과학의 세계와 일반적인 지식의 세계)가 그 지도에 들어맞아야 하는 것이지 그 반대의 경우가 되어서는 안 된다. -167쪽

한 동안 나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고색창연한 전통적인 이론들이 '인식적으로는 무의미함'을 보여줌으로써 그것을 조롱하는 일은 매우 재미있었다. 반증 가능성이라는 마법의 지팡이를 높이 쳐들어 존중할 만한 과학이론을 비판하는 일은 더욱 신나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중요하지만 결코 명백하지 않은 가정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나는 '합리적' 기준이, 어떤 예외도 인정하지 않을 만큼 엄격하게 적용된다면,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고, 받아들이며, 칭송하고 있는 과학들과 마찬가지로 유동성 있고, 풍요롭고, 고무적이며, 기술적으로 효과적인 실천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가정했다. 그러나 그 가정은 틀린 것이었다. 반증 가능성의 원리에 따라 이미 결정된 대로만 실천하고 어떤 핑계도 허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는 과학을 송두리째 없애버릴 것이다. -168쪽

지금에야 나는 이 '아나키즘'이라는 말 속에 수사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음을 확신한다. 과학의 세계를 포함해서 세계는 복잡하고 분산된 실제이기 때문에, 이론과 단순한 규칙으로는 포착할 수 없다. 심지어 나는 학생으로서 철학자들의 지적인 종양을 흉내 내고 있었던 것이다. 과학적 성취에 대한 토론이 '명료화하려는' 시도로 방해받을 때, 나는 인내심을 잃어버렸다. 거기서 명료화는 어떤 파격 논리의 형태로 번역하는 것을 의미했다. "당신들은 중세 학자와 닮았다", "그들은 어떤 문장이 라틴어로 번역되지 않으면 어떤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라며 나는 반대했다. 내 의심은 논리에 대한 조회가 명료화를 위한 것만이 아니고, 과학적 문제를 피하기 위해 이용되면서 더 커졌다. 철학자들은 그들의 원리와 실재하는 세계 사이의 거리가 분명해질수록 "우리는 논리적 논점을 세우고 있다"라고 말할 것이다.-249쪽

한편 실재reality의 문제는 항상 나를 특별히 매혹하는 힘이 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그들이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가? 왜 그들은 사건 이면의 놀라운 것을 찾는가? 왜 그들은 이 놀라움이 합쳐져서 전체 세계를 구성한다고 믿는가? 그리고 가장 희한한 일이지만 왜 그들은 이 감추어진 세계가 그들이 출발하는 세계보다 더 견고하고 더 믿을 만하며 더 실제적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가? 놀라운 일에 대한 추구는 당연한 것이고 결국 처음의 것과 나중의 것이 다른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왜 모든 현상이 우리를 기만하며(데모크리토스가 주장한 대로) "진리는 심연 속에 감춰져 있다"고 가정하는가?-282쪽

많은 사람은 자신과 그 자신의 환경 사이에 거리를 둔다. 하나의 전체로서 서양문명은 인간을 '개인'으로 변화시킨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나로 남고 너는 너로 남는다. 방탄유리와 같이 서로 교류하는 당사자들이 각기 자신만의 존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들의 감정과 행동에 한계를 부여한다.-292쪽

나는 실재에 관한 책을 한 권 쓰겠다고 그라지아에게 약속한 적이 있다. 그것은 매우 천천히 모양새를 갖추어갔다. 책의 제목은 잠정적으로 <풍요로움의 정복Conquest of Abundance>이다. 그 책은 전문가들과 보통 사람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고, 그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풍요로움을 어떻게 줄여가는지, 또 그들의 행동 결과는 무엇인지 보여주려는 의도에서 시작한 것이다. 주로 추상(특히 수학적이고 물리적인 개념)의 역할과 그것이 수반하는 안정성과 '객관성'에 관한 연구다. 그것은 그러한 추상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통상적인 말하는 방식과 삶의 방식에 따라 어떻게 뒷받침되는지, 또 그러한 추상이 논증과(또는) 실제적인 압력의 결과로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다룬다. -306쪽

내가 <방법에의 도전>을 쓰게 된 동기는 철학적인 우매화나 '진리', '실재', '객관성'과 같은 추상적 개념의 횡포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사람들의 비전과 이 세계 가운데 존재하는 방식을 협소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민주', '전통', '상대적 진리' 등과 같은 정도의 엄밀성을 가진 개념을 도입하는 것으로 끝내고 말았다... 자신의 아이디어를 설명하려는 충동, 그것도 단순하거나 이야기 속에서가 아니라 '체계적 설명'이라는 방법으로 그렇게 하려는 충동이 너무 강했다.
... 일반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간결한 스타일로 글을 쓴다는 것은 깊이가 없다는 것과는 다르다. 나는 동료 시민들에게 무엇인가를 전하고자 하는 모든 작가에게 철학에서 한 걸음 물러나라고 강권한다. 혹은 적어도 남을 우매하게 만드는 데리다와 같은 사람에게 겁먹고 영향을 받는 일을 중단하고, 그 대신에 쇼펜하우어나 칸트의 유명한 글을 읽으라고 권한다.-3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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