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사피엔스의 식탁 : 인류가 선택한 9가지 식품 - 인류가 선택한 9가지 식품
문갑순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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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하는 특질은 여러가지가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특질은 바로 먹을거리다. 책은 인간의 먹을거리 변화가 얼마나 진화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고, 사회문화적으로도 인간 역사에 많은 작용을 하였으며 향후 환경에도 미칠 영향을 지적한다. 책은 그렇게 크게 3가지 부분으로 나눌수 있는데 그러다보니 과학책 같기도 사회문화역사책인 것 같기도 환경책인것 같기도 하다.

 가장 중점적으로 다루는 부분은 역시 농경사회 더불어 인간이 선택한 9가지 종류의 먹거리인데 대충 예상한 것도 있었고, 전혀 의외의 것들도 있었다. 책이 선정한 9가지는 우선 [밀, 쌀, 옥수수], 감자, 콩, 소금, 향신료,  설탕, 생선, [커피, 차, 카카오], 바나나이다. 하나씩 책을 따라가며 기존에 먹기만 하던 식품들의 유래와 관련 지식, 세계사적 영향력에 대해 많은 걸 알 수 있었다.

 

1. 밀, 쌀, 옥수수

 밀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경작하는 종으로 전분외에 단백질이 포함되어 물과 반죽하면 글루텐이란 망상조직을 생겨난다. 이걸 통해 우린 밀을 빵이나 국수로 가공해서 먹는다. 밀은 재배가 까다로운 편인데 토양에 질소량이 풍부하고 강수량이 적으며 한랭한 기후에 잘 자란다. 그리고 이러한 기후는 바로 지중해성 기후대다.

 하지만 밀은 파종 대비 수확량이 고작 3배에 불과하며 3대작물중 열량도 가장 낮아 인구부양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유럽지역은 과거부터 가축에 의존하는 경향이 높았으며 낮은 인구밀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20세기들어 새로운 육종법의 개발로 수확량이 크게 늘어난다.

 쌀은 인디카와 자포니카의 두 종이 있으며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작물중 최고다. 거기에 쌀은 기후에 따라 2모작이나 3모작이 가능해 밀과 비교한다면 인구부양력이 무려 3배에 달한다. 쌀의 주산지인 아시아가 땅의 넓이도 있지만 지금까지도 서구와 비교해 높은 인구밀도를 자랑하는 이유다. 쌀 역시 품종개발로 키가 작고 수확량이 많은 품종이 개발되었으며 우리나라의 통일벼도 그중 하나이다. 한때 통일벼는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세계 최대에 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 품종은 맛이 떨어져 수확량이 충분한 지금에는 사라지고 말았다.

 옥수수는 파종 대비 수확량이 무려 80배에 달하며 토질이 안좋아도 잘 자라는 품종이다. 미국에서 옥수수에 주목한 이래로 하이브리드 옥수수가 개발되어 잡종 1세대의 경우 멘델의 유전법칙에 따라 장점만 나타나 수확량이 크게 증대되었다. 하지만 잡종 2세대는 열성형질이 드러나 수확량이 떨어져 잡종 1세대를 생산하는 다국적 기업에 종자를 의존해야하는 단점이 드러난다.

 과거 아즈텍인들은 자신들을 옥수수 인간이라 칭할 정도로 옥수수 사랑이 대단했지만 지금은 전세계 사람들이 스스로를 옥수수 인간으로 칭해야 할 정도로 전세계인들은 옥수수에 의존하고 있다. 수퍼마켓에 분포한 4만 5천여 제품중 무려 25%가 옥수수를 원료로 하고 있을 정도다. 거기에 고기 수요 급증으로 인한 대량 비육을 위해 옥수수는 사료로 사용되고 있으며 옥수수 전분은 소시지나 과자 식품 전반에 사용된다. 가격이 싸고 잘 변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에 과거 설탕을 사용하던 당류도 이성화당의 개발로 고과당 옥수수 시럽으로 대체된지 오래다.

 

2. 감자

감자는 재배적응력이 높고 옥수수 정도의 파종 대비 수확량을 자랑한다. 거기에 조리가 쉽고, 재배 방법이 간편하며 영양성분이 우수하고 한랭한 기후에서도 잘 자란다. 하지만 이런 장점에도 신대륙에서 도입된 감자는 좀처럼 유럽에서 자리잡지 못했다.

 이유는 종교 때문인데 당시 기독교의 영향으로 유럽인들은 신과 가까운 하늘의 음식인 새고기가 과일을 중시하고 땅에서 자라는 것들은 악마의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감자를 가지과 식물로 오인하여 마녀나 미신과 관련한 음식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이런 감자에 주목한 유럽국가는 독일이었다. 프리드리히 대제는 감자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식용조치하였다. 이에 프랑스가, 그리고 다른 나라로 감자는 전파된다. 가장 극적인 나라는 아일랜드였는데 영국의 식민지가 된 아일랜드는 식량수탈로 먹을 것이 없었다. 영국인이 남긴건 유제품류 뿐이었는데 당시 기술로 영국으로 가기전 모두 썩기 때문이었다. 이런 아일랜드에 감자와유제품의 조합은 나쁘지 않았다.

 감자덕에 아일랜드의 인구는 820만까지 늘었으나 감자마름병으로 100만 이상의 아사가 일어났으며 인구는 440만까지 격감한다.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여러 음식이 퍼지는 계기가 되는데 감자도 마찬가지였다. 가난한 도시노동자에게 감자만한 식품이 없었고, 기름이 저렴해지며 감자를 튀겨먹는 풍습이 자리한다. 기존의 생선튀김과 어울려 피쉬앤 칩스가 탄생한 계기다.

 미국의 경우 유럽의 편견과 다르게 감자가 빨리 자리잡았으며 감자는 노동력을 적게 요구해 땅은 넓고 인구는 적은 미국에 매우 안성맞춤이었다. 미국은 감자를 품종개량해 러셀버뱅크종을 개발하는데 이는 분절감자로 튀김에 매우 적합했다. 반면 우리나라에는 감자가 강원도 화전민들의 대체식량으로 들어왔으며 잘 부서지지 않는 점질감자인 수미감자가 다수를 차지한다.

 감자는 이외에도 당면의 재료, 비타민c의 원료, 술주정등 여전히 다방면에서 사랑받는다.

 

3. 콩

농경을 시작한 문화권은 곡류와 더불어 콩류를 같이 재배한다. 이는 콩류가 곡류의 부족한 부분을 잘 보완하기 때문인데 콩류는 단백질이 무려 20%나 분포하고 대두의 경우 40%에 달하기 때문이다. 이는 콩의 뿌리에 자리한 뿌리혹 박테리아 덕에 질소고정으로 콩류가 단백질 형성을 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콩은 지방 역시 20%나 갖고 있어 콩기름으로 활용할 수 있으며 나머지 찌꺼기는 단백질이 풍부한 사료로 적합하다.

 콩은 한민족과 관련이 깊은데 콩의 원산지가 한반도 북부와 만주지역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각종문헌도 콩을 처음으로 활용하여 발효시킨 민족이 한민족임을 말해준다. 콩은 영양가가 매우 높지만 단백질 소화저하 혈청용해, 소화불량등의 부작용도 있는데 발효는 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 또한 콩을 발효하면 콩단백질이 분해되어 글루탐산을 형성해 매력적인 갈색과 풍미가 더해져 음식맛을 드높인다.

 콩은 중국남부에서 동남아시아로 전해졌는데 이들은 콩간장에 캐러맬화한 야자당과 향신료 혹은 어장을 첨가하여 걸쭉하게 만들었고 이를 케첩이라 불렀다. 이것이 유럽에 전해져 유럽인들이 자신들이 활용가능한 버섯이나 토마토를 활용하여 나름의 소스를 만들어 토마토 케첩이 된 것이다.

 농업을 산업화하는데 천부적인 미국은 콩을 주목했다. 대규모 콩 가공공장을 설립하는데 이들은 콩 전체를 섭최하는 아시아와는 달리 콩에서 기름을 생산하고 잔류물을 사료로 사용하는 공정을 택했다. 또한 잡초가 많이 자라는 콩밭의 제초제로 라운드 업을 개발했고, 라운드 업에 견디는 유전자 조작 콩을 개발하기에 이른다.

 

4. 소금

수렵시절 인류는 육식을 통해 소금을 자연히 얻었지만 농경시 시작되며 소금의 확보는 필수적이 되었다. 실제로 세계 문명의 산지 근처에는 강과 더불어 소금산지가 있음을 이를 잘 증명한다.

나트륨은 고등동물의 세포 외액에 존재하고 칼륨이 내액에 존재한다. 이들간의 농도차로 신경세포의 전기신호가 전달되며 영양소흡수에도 관여한다. 나트륨이 부족하면 신경전달은 물론 영양전달이 안되고 근육을 움직일 수 없단 의미다.

 반면 움직임이 없는 식물을 나트륨이 필요없어 그 함량이 낮다. 인간이 소금을 찾아 헤메게 된 이유다. 과거 로마에서는 병사에게 급료로 소금을 지급했는데 소금을 뜻하는 살에서 샐러리란 용어가 파생한다.

 소금은 매우 귀했기에 국가의 번영과 관련했다. 5세기 아틸라의 훈족의 사육을 피해 베네치아에 지라잡은 이탈리아 인들은 도시의 소금을 이용해 번영한다. 지중해 연안은 겉보기에만 좋은 절벽이 가득해 소금생산에 매우 불리했다. 베네치아는 소금을 통한 무역으로 1000년가까이 번영한다.

 아시아에서는 중국이 국가차원에서 소금을 전매한다. 5세기까진 소금전매가 국가수입의 무려 80-90%였고, 청대에는 25%였다. 중국이 소금전매제를 폐지한건 최근인 2014년에 이르러서였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소금 수요는 커졌는데 중세 유럽의 주요 식량이 청어와 대구가 되면서 염장을 위해 소금수요는 더욱 커졌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화학이 발달하며 소금은 그 활용도가 더욱 커졌지만 통조림의 등장과 냉동 냉장 기술의 발달, 건강에 대한 염려로 그 수요가 크게 줄어들게 된다.

 

5. 생선

인류는 수렵채집기부터 육식을 시작했는데 가장 안전한 육식은 아무래도 생선이었다. 인간의 뇌에는 다른 동물과는 다르게 불포화지방산이 많은데 이는 인간이 오래도록 해산물을 섭취한 증거로 받아들여지기도한다.

 유럽이 기독교화되자 교황청은 교인들에게 엄격한 금육 금식을 요구하였는데 이는 예수의 고행과 관련한다. 금육기간은 연간 무려 251일일까지 늘어났는데 예외로 생선은 허용되었다. 물고기는 예수의 이름과 비슷하고 성경에 여러차례 등장하는등 긍정적 이미지가 많았기 때문이다.

 생선 수요에 비해 잡는 기술은 떨어져 초기에는 강과 양식업이 중시되었다. 여러 물고기를 양식했는데 특히 물밖에서 무려 6일이나 생존하는 뱀장어가 중시되었다. 하지만 결국 늘어나는 수요로 바다를 향하게 된 유럽인들은 청어를 잡기 시작한다. 청어는 떼로 몰려다녀 그야말로 대박 생선이었다.

 하지만 청어는 기름기가 많아 쉽게 부패하여 소금이 많이 필요했는데 네덜란드에서는 이 청어를 빠르게 가공하는 방법이 개발되어 네덜란드는 청어를 통해 막대한 부를 얻고 이를 통해 금융업, 목재업 분야로 진출하며 스페인에게 청어무역이 봉쇄당하자 향후 향신료를 찾아 눈을 돌린다.

 청어 이후 유럽인이 주목한 생선은 대구다. 크기가 무려 1m에 달하고 무게도 100kg에 달하여 식량가치가 높은 대구는 흰살생선에 단백질이 많아 영양가가 높았다. 거기에 유순하여 상대적으로 잡기가 쉬웠는데 이 큰 대구에 먼저 도전한 것은 바이킹이었다. 이들은 북유럽과 그린란드 아이슬란드에 대구 가공공장을 세웠다.

 다음은 스페인의 바스크인으로 천일제염이 많은 자신들의 지역 특성을 이용해 오래도록 대구어업으로 번영한다. 바스키인의 어장은 오랜 비밀이었는데 영국인들이 이 곳이 뉴펀들랜드 지역임을 알아내고 이로 인해 이 지역으로의 이주가 시작된다. 미국에는 대구어장을 통해 보스턴이 설립되고 뉴잉글랜드 인들은 좋은 대구는 유럽으로 판매하고 질이 나쁜 대구는 카리브해의 노예용으로 판매한다. 대구 판매로 카리브해에서 당밀을 수입하고 이를 통해 노예무역을 하는 삼각무역이 이루어져 번영하나 미국의 독립후 노예제가 폐지되어 수요가 급감하자 북미 대구어업을 큰 타격을 받는다. 하지만 이들은 거대하게 성장하는 미국 내수시장의 성장으로 산업자본가화하는데 성공한다.

 

6.향신료

인류는 고귀한 향으로 인해 향신료를 신에게 봉헌물로 사용하곤 했다. 또다른 용도는 병의 치료였으며 다른 하나는 음식의 부패를 막고 산미를 증가시키는 것이었다.

 십자군 원정으로 유럽은 향신료의 존재를 알게되고 대량으로 유립하게 된다. 당시 유럽인은 양질의 고기는 귀족이 하품을 일반 농민이 소비하였는데 일반 농민은 대개 훈제나 염장고기를 먹고, 부패가 심해 이를 견디기 어려웠다. 하지만 향신료는 부패취를 감추고 맛을 증가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향신료는 가격이 매우 비쌌으며 소금 무역으로 자본을 축척한 베네치아가 콘스탄티노플을 대상으로 향신료 무역을 한다. 베네치아가 공급한 향신료는 유럽 전체 공급량의 80%에 달했다.

 반면 포르투갈은 직접 향신료 산지를 노렸다. 이들은 다우전투의 승리로 인도양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정향과 육두구의 산지를 발견하고 실론섬의 계피도 차지한다. 포르투갈은 이로 번영하고 베네치아는 쇠퇴하나 곧 네덜란드가 등장한다. 이들은 포르투갈의 산지를 하나씩 빼았았다. 또한 포르투갈과는 달리 유통루트 차단을 넘어선 생산지 차단 관리에 들어간다. 이는플랜테이션 농업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비밀은 없다고 세월이 훌러 다른 나라에 향신료가 유출되기 시작하며 충분한 공급이 이루어져 향신료의 시대는 종말을 고한다. 과학의 발달로 약리효과도 사라지고 음식 본연의 맛을 중시하게 되었으며 합성향신료도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7. 설탕

단맛에 대한 인간의 갈망한 상당한데 설탕이 없던 과거 북아프리카와 중동은 대추야자, 아시아에서는 엿기름, 그리스는 포도와 무화과가 감미료 역할을 해왔다.

 설탕은 사탕수수나 사탕무에 다량 존재하며 결정화가 쉽고 맛이 상쾌하다. 설탕은 7세기 이후 이슬람 세력이 확대함에 따라 지중해 전역으로 설탕정제술과 사탕수수가 퍼져나간다. 설탕 제조 방법은 강한 노동을 요구해 초기부터 노예노동이 시작되었다.

 사탕수수는 베어지자마자 옮겨져 수액의 추출과 가열이 시작되었는데 수액이 마르면 설탕의 수확과 결정이 좋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사탕수수는 크고 무거워 옮기는데도 어려움이 많았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서부를 강탈하고 노예공급을 시작하였는데 베냉지역에서 노예를 공급하다가 고갈되자 콩고지역으로 거기도 고갈되자 앙골라와 아프리카 전역으로 이루어지는 식이었다. 설탕재배는 콜럼버스에 의해 카리브해로 도입되었고, 지력 소모가 심해 섬을 자갈밭화하였다. 처음에는 자메이카, 다음은 아이티, 다음은 쿠바로 이동한다.

 유럽지역에서는 차마시는 문화가 퍼져나가며 설탕소비량이 급증한다. 홍차, 커피, 카카오등에 설탕이 사용되었으며 18세기 후반 영국이 서인도제도에서 벌어들인 설탕 관련 수입은 다른나라에서의 교역수입을 능가할 정도였다. 이처럼 유럽 각국에서는 설탕자본을 통해 거대자본이 등장하고 이들이 산업자본으로 변모하였다.

 이를 위해 18-19세기 동안 무려 1000만 가까운 아프리카 노예가 수입되었고, 이들은 이동과정에서 지그재그로 누워 서로의 토사와 용변, 땀으로 뒤범벅되어 죽어나갔다. 이동과정에서 20%가 사망했다. 설탕플랜테이션은 매우 가혹하여 3년이내에 50%의 노예가 사망했다. 흡착롤러에 손과 온몸이 들어가기 일쑤여서 흡착롤러 곁엔 항상 도끼가 있었다. 이들 노예들은 영굯산 면직물과 염장대구 옥수수로 연명했다.

 유럽에서는 계몽주의와 더불어 노예해방운동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 프랑스혁명의 여파로 아이티가 프랑스러부터 독립을 시도한다. 성공하나 프랑스는 아이티에 대량의 배상을 요구했고, 프랑스와의 무역금지, 그리고 다른 유럽 국가들의 무역 봉쇄로 아이티를 탄생과 더불어 최빈국으로 전락한다. 미국은 노예제가 폐지되자 루이지애나의 설탕농업을 하와이로 이식하는데 노동력이 부족하자 쿨리라고 불리는 인도계약노동자를 도입한다.

 이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불만을 제기하자 다음은 중국, 그리고 다음은 일본, 그리고 다음은 한국, 포르투갈, 필리핀 노동자순이었다.

 한편 유럽에서는 나폴레옹의 전쟁으로 대륙이 봉쇄되자 사탕무에서 설탕을 정제하는 방법이 개발된다. 이를 통해 카리브해의 설탕농업은 붕괴하고 향후 아스파탐과 이성화당등의 개발로 설탕 농업은 사양화한다.

 

8. 차, 커피, 카카오

 신대륙에 도착하기전 전 유럽은 그야말로 술에 취해 살았다. 16세기 스웨덴인은 지금의 40배의 맥주를 마셨고, 영국은 1인당 하루 무려 3리터의 맥주를 마셨다. 이는 당시 염장음식이 많아 갈증이 심했고, 깨끗한 식수를 구하기 어려웠으며 힘든 현실의 도피처 역할을 술이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대륙 도착이후 17세기 부터 커피와 차, 코코아가 이를 대체하기 시작한다. 커피는 예멘지역에서 재배되며 오스만 제국이 이를 통제했다. 초기엔 이슬람과 기독교 모두 악마의 음료로 배척했으나 점차 퍼져나가며 빈에서는 비엔나 커피가 영국에서는 커피하우스가 등장한다.

 영국의 커피하우스는 정치 비판과 학술의 장소가 되었으며 여기서 증권사나 은행, 보험사등의 근대적 기관이 탄생하기도 한다.

 차는 육로와 해로 양자로 퍼졌는데 육로에서는 차로 발음되고 해양에서는 푸젠어로 티로 알려진다. 영국은 쌀쌀한 날씨로 홍차에 우유와 설탕을 넣은 차가 인기가 좋았다. 중국과의 차무역에서 적자가 누적되자 영국은 인도에 심은 아편으로 이를 상쇄하였고, 이는 아편전쟁으로 이어진다.

 영국은 꾸준히 인도에 차를 이식하여 아삼지방에서 차나무를 재배하나 맛이 얼싸해 인기가 없었다. 그러다 중국의 차산지와 유사한 히말라야 인근의 다르즐링에서 차나무 재배에 성공하여 중국의 차 독점이 깨어진다.

 초기 미국인은 영국인들의 차습관을 모방하나 영국과의 갈등이 심해지고 보스턴 차사건으로 이어지자 홍차를 버리고 커피를 선택한다. 아메리카노의 시작이다.

 카카오는 다 익은 열매를 발효시키면 갈색으로 변하는데 이것을 건조한게 카카오 콩이고 볶아서 분말로 만든게 카카오페이스트며 여기서 카카오 버터를 제거한게 카카오 음료이고 카카오 버터와 설탕 우유를 첨가해 굳힌게 초콜릿이다.

 산업혁명시기 코코아 음료가 영국에서 인기가 드높았는데 카카오버터로 인해 맛이 기름지고 껄끄러웠다. 네덜란드인 콘라드 반 호템이 카카오 버터를 제거한 탈지카카오를 개발해 인기가 좋았으며 브리스틀의 프라이가 카카오버터를 곧힌 판형 초콜릿을 개발한다.

 당시 유럽에서는 스위스의 약제사 네슬레가 개발한 밀크초콜롯이 인가기 좋았고, 미국의 허시는 자신만의 밀크 초콜릿을 미국에서 개발한다. 그는 아몬드가 들어간 초콜릿과 허쉬 키세스를 개발한다. 포레스트 마스는 아버지와 더불어 초코바 밀키웨이를 개발했으며 스니커즈를 만든다. 후에 아버지의 회사를 물려받아 허쉬의 윌레엄머리와 합작하여 만든 초콜릿이 M&M이다.

 카카오는 비극을 낳았는데 카카오 주산지인 아프리카 서부 지역의 나라가 독립하여 가나가 된다. 가나의 대통령은 아프리카 카카오 카르텔을 구성하여 이익을 챙기고자 했으나 허쉬와 다른 기업의 사재기에 밀려 실패한다. 이들의 가격 후려치기에 원주민들은 열대우림을 파괴하여 카카오 경작지를 늘려나가나 가뭄과 화재로 가나의 카카오는 붕괴한다. 카카오는 이웃나라인 코트디부아르로 이동하는데 역시 원가후려치기에 이나라는 아동노예무역으로 원가절감에 대응한다.

 최근 이런 사태를 유발한 이 기업들에 철퇴가 내려지고 자정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9.바나나

마지막은 의외로 바나나다. 바나나는 우리에겐 과일이나 동아프리카와 열대지역 주민 4억명에겐 쌀과 같은 주식이다. 바나나는 보존성이 없어 냉장기술이나 포장법등 식품 유통기술의 발달에 기여한다.

 미국의 프레스턴이 최초로 바나나 기업인 UFC를 만들고 이것이 지금의 치키타이며 바카로는 Dole을 설립한다. 바나나는 주로 중남미에서 생산되었는데 이들 기업이 이를 독점하고 1920년대에 농민들이 자신들의 적은 대가에 분개해 분쟁이 일어난다. 미국 정부는 이들 기업과 더불어 노동자 파업을 잔혹하게 진압하였고, 1940-1950년대 콜롬비아에서만 무려 18만의 농민이 희생된다.

 과테말라에서는 ufc에 대항하여 아르벤스 대통령이 당선되나 미국과 이들 기업에 의해서 추방된다. 한편 이런 행태에 대한 세계적 비난과 미국내에서의 비판적 여론으로 미국 법무부는 태도를 바꾸어 이들 기업을 독점법으로 제재한다. 그 결과 UFC는 중남미에서는 철도사용권을 그리고 미국내에서는 수퍼 독점권을 잃는다. 그 사이 미국인의 입맛도 다변화하여 바나나의 수요가 급감해 이들 기업은 사양세를걷는다.

 바나나는 씨앗이 없는 품종으로 그 유전형질이 모두같다. 과거 그로미셸종이 사용되었으나 병으로 절멸하고 현재는 개번디시 종이 주 품종이다. 이 품종 역시 파나마 병에 취약하여 아직 병이 진행되고 있어 위험한 상태다.

 바나나에 의존하는 4억명의 사람들에게 큰 위기인 셈이다. 거기에 바나나는 아기에겐 이유식 그리고 이가 약한 노인도 먹을 수 있는 영양가 높은 과일이어서 고령화 시대에 적합한 작물이다. 우리가 바나나에 신경을 써야하는 또다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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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허영선 지음 / 서해문집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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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라면 내가 어렸을 적, 좀 살림이 나아진 우리나라 신혼부부들이 신혼여행을 가던 곳. 그리고 값싸고 맛있는 귤이 마구 나는 곳, 하루방의 땅. 북한과 대비되어 남한에서 가장 높은 한라산과 백록담이 있는 곳이었다. 최근엔 제주가 유네스코 자연문화 유산에 등재되었고, 올레길도 유명해지고 제주자치도의 정책으로 중국인들의 부동산투자가 몰려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는등 여러모로 과거보다 느낌이 향상된 곳이다. 이젠 뭍사람들도 제주도에 한번 가서 살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모기업은 본사를 십년정도 전에 제주로 옮기기도 했다.

 과거 교과서에서 여순사건과 함께 또 하나의 반란으로 배웠던 것이 제주 4.3이다. 이 두사건은 마치 샌드위치 같다.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사건이기도 했고, 한국전쟁과 일제강점기에서의 해방이라는 굵직한 사건 사이에 일어났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또한 광주민주화운동이나 4.19혁명등의 굵직한 민주화운동에 비해 가치나 피해에 대한 인식도 희박한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은 제주4.3이 국가기념일로 인정된 2014년에 발행되었다. 인정받은 시기가 자못 의외인데(박통의 시기가 아닌가!) 인정은 했어도 제대로 된 지원은 없어서인지 제주일대에서 발굴중이던 4.3의 희생자 발굴은 국가 예산 지원이 중단되 10년째 소득이 없었다고 한다.(정권이 제대로 돌아온 지금에야 다시 재개, 그리고 대통령은 노통에 이어 다시금 4.3에 대해 국가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책 내용으로 돌아오면 4.3의 진행은 이렇다. 주지하다시피 해방정국에서 한국을 담당한 맥아더와 하지 중장은 남한을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점령한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한국에는 이미 일본으로부터 많은 실권을 넘겨받은 건국준비위원회가 있었는데 처음 미군정은 이들과 협력한다. 하지만 공산주의와의 대결이 본격화하면서 건준은 점차 친일파를 기반으로한 우파에 힘을 실어주는 미군정에 의해 차츰 무력화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배운 사람들의 입장에서였고,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일반 인민들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오로지 먹고 사는 것과 다시는 힘든 외세의 침입따윈 없었으면 하는 것, 그리고 우리민족의 자주 국가를 다시 세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1947년 제주도에선 이 인민들의 바램과 정반대의 일이 일어난다. 당시 남한에서는 일본이나 해외에서 돌아온 동포들로 인해 인구가 전체적으로 급증했다. 반면 흉년으로 공급은 준데 비해 인구가 늘어 수요는 많아져 남한 전역에서의 전체적인 식량난이 일어나게 되는데 미군정은 이에 제주도에서 식량의 공출을 실행한 것이다. 제주라고 식량 사정이 좋을리는 없었고, 일본에서 돌아온 사람은 제주역시 많았기에 집단 반발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제주사람들의 눈엔 미국의 공출 역시 지긋지긋한 일본의 공출과 비슷하네 느껴졌을 것이다. 거기에 남한 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한다는 이야기까지 돌자 47년 3월 1일을 맞이하여 제주 사람들은 이에 항의하는 집회를 연다.

 하지만 시국이 시국인지라 허가 까지 미리 받은 이 시위에 관은 과잉대응하였고, 마치 광주의 일처럼 한 아이가 경찰의 말에 밟혀죽는 사고가 발생한다. 사고에 대한 해당 경찰의 대응은 마치 뺑소니범과 같아서 격분한 제주사람들이 경찰을 공격하고, 다른 경찰들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시작해 주민 6명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고 만다.

 격분한 제주 사람들은 그해 3월 10일 민관총파업에 돌입한다. 하지만 끝까지 협상을 모르는 정부는 대규모 경찰병력을 뭍에서 파견하고 제주도지사까지 강경파로 바꾼다. 긴장이 완화되지 않은 체로 해는 1948년으로 넘어갔으며 심지어 취조를 받던 학생들이 경찰에 의해 고문치사하는 사건

이 발생한다. 이를 계기로 마침내 제주 남로당을 중심으로 4.3일 무장봉기가 발생한다.

 초기 전투가 빈발했지만 제9연대장 김익렬과 무장대 지위관 김달삼의 노력으로 평화 협상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불과 닷새만에 오라리에서 방화사건이 일어나면서 전투는 재개된다. 48년은 이승만정권에 의한 남한 단독정부를 구성하는 시기로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였는데 제주는 4.3사건으로 국회의원 선거가 이루어지지 못하게 된다.(그래서 애초 200명으로 계획했던 우리나라 제헌국회는 198명으로 시작한다) 때문에 미국과 이승만은 제주 사건에 민감하고 강경하게 반응하게 된다.

 전투 재개후, 파견된 지휘관 송요찬은 초법적인 지시를 내리는데 제주 해안선 5km 이상 지역에 통행금지를 내리고 이를 어길시 이유불문하고 총살에 처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무장대가 산간을 근거지로 했기 때문인데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제주에는 많은 중산간 마을이 있었다. 그리고 이 명령은 중산간지역을 기반으로 수많은 학살이 일어나는 근원이 되고 많다. 제주민들 역시 이 명령에 따르기 어려웠는데 가축이나 논밭등 생업이 있는 마을을 떠나기 어려운 면도 있었고, 명령을 따랐음에도 학살당하는 경우가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군경에는 친일 부역자가 많아서였는지 그들의 학살과정은 일제의 그것과 유사했으면 상당히 잔혹했다. 비교적 젊은 나이의 남자면 위험인자로 간주하여 학살하였고, 마을이나 집에 남자가 없으면 무장대에 합류한 것으로 간주해 집안 사람들을 학살했다. 끌고간 이들은 무장대에 협력한 사람으로 간주해 사라진 가족의 행방이나 무장대에 협력한 사람을 말할때까지 잔혹하게 고문했다. 이 고문에 죽어나가거나 불구가 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고문에 못이겨 아무 이름이나 말한 경우도 많았다.

 중산간 사람들은 내려가지도 올라가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굴에 숨기 시작했다. 굴에 숨은 사람들은 토벌대에 발각될까 깊이 숨었다. 아이의 울음소리를 막다가 아이가 질식사하기도 했고, 토벌대가 굴을 찾아내면 더 깊이 들어갔다 길을 잃어 죽기도 했다. 토벌대는 사람들이 나오도록 굴에 불을 피웠고, 사람들은 질식사하거나 나와서 학살당했다. 학살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아, 학살당한 시체사이에서 나온 한살 배기 아이의 다리를 잡고 현무암덩어리에 패대기 치기도 했으며 임산부를 죽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끔찍한 학살은 49년이 되어서야 잦아들기 시작했고, 국회의원 두명이 선출되면서 끝을 보게 된다. 하지만 살아남은 수많은 사람들은 엄청난 육체적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관련자로 지목된 사람은 한국전쟁 동란중 관리대상으로 다시 학살되었다. 학살기간중 상당수가 기껏 탈출했던 일본으로 다시 밀항하였는데 학살의 정도가 어느정도였는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관련자로 연좌되거나 찍힌 제주청년들이 살기위해 한국전쟁 기간 중 그 어느지역보다 자원입대 성향이 강했다는 것이다. 이도저도 아닌바에 강제로 한쪽으로 찍혀 학살당하기보단 차라리 군인이 되는 것이 가족과 자신에게 더욱 안전한 것임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유명한 관광지인 한라산은 48년이후 금산조치 되었다가 6년후인 54년에야 다시 입산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4.3은 이승만이 쫓겨난 1960년에야 다시 회자되었다가 박정희와 군사정권에 의해 1987년이 후까지 기나긴 침묵을 맡게 된다. 물론 몇몇 사람들이 일본에서 책을 내고, 용기있게 소설을 내기도 했다.(그 대가로 안기부에 끌려가 잔혹한 고문을 당했다) 이와 같은 책은 그 분들의 소산일 것이다.

 책 말미에는 제주4.3과 관련한 제주관광루트가 나온다. 아름다운 제주를 방문하여 이런 루트로 관광해보는 것오 아픈 역사를 잊지 않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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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멸의 조선사 - 지배 권력에 맞선 백성의 열 가지 얼굴 지배와 저항으로 보는 조선사 2
조윤민 지음 / 글항아리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오래전 이미 역사학계에서는 위대한 인물이나 왕들이 아닌 일반 사람들의 역사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역사를 움직이고 사실상 중요한 것은 이들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아직도 역사는 주요 인물들이나 고관대작 중심으로 다루어질 뿐 일반백성들에 대한 연구와 시선을 적은 편이다. 아직 시선이 완전히 전환되지 않은 측면도 있고, 고관대작들에 비해 백성에 관한 기록은 사실 매우 미미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 모멸의 조선사는 조선시대 백성들의 삶을 다룬 책이다. 요약하면 고난함과 계속되는 수탈, 나름의 저항이라 할수 있겠다.

 책을 통해 나의 조상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조선일반 백성들의 삶의 고난함을 느낄수 있었고 더불어 단순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조선백성들의 여러 직업을 느껴볼수 있었다. 이런 것들이 이 책의 장점이다.

 조선하면 백성의 직업으로 농민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이 책은 그 이에도 상인과 수공업자, 광산업자, 광대, 백정, 노비, 도시노동자, 어부, 기생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조선이 농업에 근간한 나라인 만큼 농민이 가장 먼저 등장한다. 양반층은 자신들 이외에 모든 직업을 멸시했지만 그래도 농업경제이고 그것이 자신들의 세력 기반인지라 농업인을 천하의 근본이라 칭하며 우대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말뿐 자신들의 세력 기반이니 농민은 착취와 수탈의 제1대상에 불과했다.

 양인인 농민은 본래 법적으로는 자신이 토지를 보유했을 시에는 토지세인 전세와 각종 역, 그리고 공납을 부담했다. 하지만 조선 중후기로 갈수록 양반층의 토지겸병이 시작되면서 병작농으로 대부분 전락한다. 병작농은 대개 자신의 수확물의 절반을 바치고, 토지세는 양반이 내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조선 후기 농업생산량이 증대하면서 노동의 가치가 하락하자, 위치가 크게 하락한다.

 노동의 가치가 줄어 소작농들끼리 대지주의 토지 경작권을 갖고 경쟁하는 위치에 까지 놓이게 된것이다. 그러다보니 지주의 몫이었던 토지세는 물론이유 내년의 종자까지 병작농의 부담이 되니 일년농사의 소출중 자신의 몫은 겨우 20%정도에 불과하게 되었다. 

 거기에 수시로 이런 저런 명목으로 역에 동원되어 농사시기를 놓치기 일쑤였으며 주변 농민이 도망이라도 치면 자신에게 그 몫이 전가되기도 했다. 역의 부담은 나날이 커져 조선후기에 이르르면 일부 농민들은 남자아이를 낳는 것을 꺼리기 까지 했다고 한다.

 조선후기 이앙법과 이모작이 성행하면서 농민층은 크게 변화한다. 조선의 세력들은 이앙법이 비교적 일찍 개발되었음에도 법적으로 금지시켰는데 이는 물이 확보되지 않을 경우 농사를 망칠 위험성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금지에도 이앙법은 급속히 퍼졌는데 노동력이 크게 절감되고 생산력은 커서 각종 수탈에도 그럭저럭 먹고 살만큼의 식량을 확보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세금의 대상은 쌀뿐이었으므로 이모작을 통한 보리는 온전히 농민의 몫이 되는 점도 중요한 동인이었다.

 이앙법으로 노동력이 절감되자 토지에서 쫓겨나거나 상황이 악화되는 농민이 크게 많아졌으며 일부 농민은 부농으로 성장하여 양반층을 위협하기도 하였다.

 상인의 삶도 기막히다. 이들은 양반층에 의해 천시받았으며 상업자체가 조선초기부터 권력에 의해 강하게 틍제받았다. 이는 농업경제에 기반한 양반층이 상업의 지나친 성장이 강한 사회변혁을 이끌고 와 자신들의 기반을 흔들 것을 우려해서였다. 때문에 시장은 원천적으로 금지였으며 도성내 육의전을 운영하는 시전상인들만 상업이 가능했다. 이들 시전상인은 이런 독점의 대가로 왕가나 주요 관료들의 행사의 인력 및 운영물품을 대야했고, 이를 충원하기 위해 매점매석을 일삼고 물가를 조절하여 백성의 삶을 고달프게 했다.

 농업생산력과 화폐경제의 발달로 조선후기 들이 사상의 세력이 강해졌다. 이들이 시전상인들과 경쟁하기 시작했고, 도성주위엔 상설시장이 그리고 지방에는 5일장이 정례화된다. 하지만 이들 사상역시 시전상인의 위치를 그저 대물림한 것에 불과해 사회를 변혁하는 세력이나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킬 상업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한다. 그져 중앙의 관료들에게 줄을 대어 불공정한 비리를 저지르거나 매점매석으로 백성을 삶을 어지럽힐 뿐이었다.

 중앙에 의지하고 불공정 거래로 이미 경재력이 없었던 사상들은 개화기 외국 상품과 외국 자본에 거의 대응하지 못하고 사라진다. 자생력이 없었던 것이다.

 다음은 백정이다. 백정은 본디 고려시대만 해도 백성을 이르는 말이었다. 그것을 세종때 차별을 없애고자 이들을 백정이라 칭하면서 백정은 차별의 용어로 변모하고 본디 백정이란 말은 백성으로 대체된다. 이들은 조선의 유랑민이었다. 정착농업경제국가에서 유랑민은 위정자들이 보기에 불안한 존재였다. 여러 반란 세력에 쉽게 가담할수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수탈에서 자유로울수 있었다. 조선은 이들에게 토지를 제공하거나 역을 면해주는 조건으로 정착시키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차별은 전혀사라지지 않았는데 여기에는 이들이 북방민족출신이 다수라는 점이 한몫한다. 이른바 오랑캐 취급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일반백성들중 사정에 따라 백정으로 편입되는 경우도 적지 않아 그렇게만 볼수 없는 점도 있었다. 이들에 대한 차별은 복식와 일상에서의 의례에서도 엄청났는데 남자 백성의 경우 항상 패랭이를 써야했고, 혼인한 여자는 쪽빗을 사용하지 못하고 머리를 둥글게 올려 말아야했다. 특히 패랭이는 양인의 경우 상을 치룰때만 죄인이라는 명목으로 쓰는 것이라 그 차별적 의미가 더욱 엄청났다. 백정은 일반 양인의 아이에게까지 존대어를 써야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일반 양인남성들이 백정아녀자를 성적으로 희롱했다는 점이다. 백정의 아녀자를 올라타 말이나 소취급을 하는 놀이였는데 일제시기 까지 이어져, 법적으로 차별이 금지된 당시에 자녀의 운동회에 참가했던 백정계급의 어머니가 딸이 보는 눈앞에서 그 일을 당하고 자살했다는 장면이 책에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광대다. 광대는 한때 조선시대에 4만명에 이를 정도로 수가 엄청났는데 이는 조선의 억불정책에 기인한다. 상당수의 승려가 절에서 쫓겨나면서 유랑인이 되고 광대집단에 합류한 것이다. 또한 많은 농민들이 지주에 토지를 잃고 유랑민이 되면서 합류하기도 하였다. 광대들은 주로 왕실이나 양반가문의 행사, 그리고 과거 급제 행사에 출연했다. 광대들은 조선후기에 수가 많아지는데 그 시기 들어 이전보다 과거 횟수가 매우 많아졌고, 지방에 시장들이 많아 짐에 따라 광대가 할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책 조선의 모멸사를 보면 일정한 패턴이 느껴진다. 조선 초기 공고했던 신분제가 법을 만들고 이끌어나간 양반층의 이익도모에 의해 무너져감에 따라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조선후기 들어 농업생산력 발달에 따른 농민의 분화 및 유랑민화, 그리고 상업의 발달로 시장과 상품에 대한 수요가 커진 것도 한몫한다. 이에 따라 백성들의 직업과 그 양상은 매우 다양해졌지만 수탈과 착취는 오히려 강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일부 농민이나 상업계층은 양반의 권력을 흔들어 놓을 만큼 성장하기도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을 착취해온 시스템에 감히 도전할 의사나 안목을 갖지 못한다. 때문에 오히려 새로운 계층으로 사회를 변혁해나가기 보다는 기존 양반층에 돈으로 기대거나 합류하여 자신과 같은 백성들을 괴롭히는 세력으로 남게된다. 이래서 조선이 망한 것이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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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도리 2018-03-01 12: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읽었던 책이네요...급 관심 가요...

2018-03-13 09: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닷슈 2018-03-13 10:14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예나 지금이나 권력은 피지배층을 최대한 짜내기만합니다 나름괜찮았다던 세종이나 영정조시기도 근본적으론같았습니다
 
이덕일의 당당 한국사 -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한국사 베스트 25장면
이덕일 지음 / 아라미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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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인물과 전쟁, 문화재, 과학문화유산을 모두 합쳐 25개로 선정해 쓴 책이다. 어렵지 않고 쉬워서 학생들도 읽을 만하며 역사에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이 보기에도 좋아보인다. 역사의 조예가 있으신 분이라면 쉽고 빠르게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인물편의 이정기와 흑치상지편이 좀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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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 - 용, 사무라이를 꺾다 1928~1945
권성욱 지음 / 미지북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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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은 중국이 일본과 2차대전에 자신들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운 전쟁이다. 하지만 만주사변과 상하이 사변, 그리고 본격적인 전쟁이 38년에 시작했기에 오히려 조금더 다른 전쟁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이 전쟁은 보이지 않는 전쟁이기도 하다. 2차대전에 유럽에서의 전쟁이 주로 유명하고, 아시아에서는 미국과 일본과의 전쟁만이 알려져 있지만 중일전쟁 역시 그에 못지 않은 영향력과 한 축을 담당했다는 것이 이 책의 골자다.

 책은 엄청 두껍다. 이 많은 일본군과 중국군의 주요 지휘관들과 전쟁의 개관과 뒷배경을 모두 파악하고 서술하느라 저자가 엄청난 고생을 했음을 짐작할수 있다. 쓸데없는 내용을 지리하게 써놨나 싶기도 했는데 읽어보니 마땅히 빠뜨릴 만한 것도 없다. 물론 상세히 쓰시기는 했다. 읽으며 3가지 정도를 얻은 것 같다. 좀처럼 익숙치 않은 중국의 주요 성의 위치와 도시 등의 지리적 감각, 무능하고 부패하여 항일전쟁은 물론 국공내전에서도 참패한 장개석 국민당 정권에 대한 재인식, 중일전쟁의 2차대전에서의 영향력이다.

 중국 신해혁명으로 청왕조가 무너지고 기대했던 위안스카이와 그가 이끄는 북양군의 이탈로 국민정부는 곧 내전에 돌입한다. 난징정부는 세력을 규합해 북양정권과의 전쟁을 시작한다. 위안스카이는 반란으로 황제자리에 오르지만 시대착오적 행각을 일삼아서 지지기반을 빠르게 잃어갔고, 곧 죽는다. 중국은 역사상 늘 그렇듯 중앙정부가 무너지면 곧바로 지방군벌들이 날뛰는데 위안스카이가 죽은 당시가 그러했다. 이들은 중국 북경을 놓고 다투었는데 당시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낸 지휘관 장제스는 돋보였다. 장제스는 만주의 군벌은 장쭤린을 전쟁에서 이겼는데 당시 만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일본은 장쭤린이 친일적 성향을 보이지 않자 그가 탄 열차를 폭파하여 암살한다. 일본은 우두머리가 없는 무주공산을 노린 셈인데 그의 아들 장쉐량이 의외로 만주의 지배권을 빠르게 장악하며 이는 실패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 장쉐량은 두고두고 장제스의 발목을 잡는다.

 만주는 당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한반도를 장악한 일본은 이를 호시탐탐노리고 있었다. 일본은 늘 그렇듯 트집을 잡아 기습 공격하였고 장쉐량의 동북군은 지리멸령하게 무너진다. 물론 동북군의 수가 일본군을 압도하여 충분한 반격과 재정비의 기회가 있었지만 일본이 만주 전체를 노리는게 아니라 무언가를 원한다고만 생각했던 장쉐량은 본격적인 반격을 주저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 그의 주력은 화북의 북경일대를 장제스와 다른군벌에게서 방어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으므로 전력이 분산되 있었다. 결국 뒤늦게 장쉐량은 일본의 침략의도를 알았지만 때는 늦으리였다. 만주를 손쉽게 장악한 일본은 푸이를 압세워 만주국을 세운다.

 일본의 야욕은 끝이 없어 만주국의 점령이후에도 화북지방을 계속도발하고 마침내는 상하이 사변까지 일으킨다. 당시 상하이에는 주요 열강의 조계가 있어 일본으로서는 상당히 무모한 도발이었지만 일본은 이를 강행한다. 책에서도 주로 지적하지만 당시 일본은 군부를 행정부가 통제하지 못하는 형태로 일본의 2차대전과 중일전쟁의 많은 도발에는 현장지휘관들의 무모한 야심과 독선에 의한 것이 많았다. 상하이 사변에서 국민당정부는 좀 소극적이었는데 공산당과의 전쟁, 그리고 일본과의 전면전이 벌어질 경우 수도 난징에 대한 방어 등 복잡한 상황이었다. 결국 장제스는 중앙군을 투입하지만 상황은 어려웠고, 일본과 타협한다. 장제스는 많은 비난을 받지만 당분간 일본과의 전쟁을 억제하면서 안을 정비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상하이 사변 이후 장제스는 늘 말썽이던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하고, 지방군벌들을 복속시키는등 자신의 정권을 강화해나간다. 만주사변과 상하이 사변에서 알수 있듯 당시 중국군의 전력은 형편없었으므로 독일과의 교류를 통해 군사협력을 없고 군대를 강화시켜나갔다. 독일은 당시 주요 자원들에 대한 해외의존이 필요했는데 영국 프랑스에 견제당하는 상황에서 중국은 주요 자원수입원이 되어주었다.

 시간이 흘러 1937년 일본은 본격적인 중일전쟁을 시작한다. 만류하는 일본내 정치인도 있었으나 일본 군벌에 의해 암살되거나 실각하기 일쑤였다. 천황과 일본의 정치권은 무모한 일본 관동군의 행태에 패망까지 질질 끌려다니기만 했다. 관동군은 만주국에 주둔하는 군대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산해관의 동쪽에 있다하여 관동군이라고 한다.

 일본군은 장쉐량이 지키던 북경과 텐진지역을 손쉽게 점령해나갔으며 화북 지역 전역을 점령해나간다. 중국은 아직 준비가 덜 되었으며 아직도 각 성의 지방군벌들은 자신의 전력을 소모시키지 않기 위해 전쟁에 소극적이었다. 게다가 장제스의 중앙군과 지방군은 원래 세력이 달라 군복이 다른 경우도 많았고, 수장이 다르다보니 지휘계통의 문제 언어의 문제, 무장정도의 차이등 병력만 많았지 전투에 지장이 되는 문제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명령에 의해 자리를 지켜야 할 부대가 마음대로 퇴각하여 측면이나 후방을 돌파당하기 일쑤였고, 지방군벌들은 싸우려는 의지도 부족했다.

 상당히 빠른 시간에 중국은 화북일대를 상실했으며 수도 난징이 점령당해 그 악명높은 난징대학살이 일어난다. 난징을 상실한 국민정부는 수도를 우한에서 충칭을 옮겼지만 일본군은 우한일대에도 대대적인 공세를 취해 점령한다. 거기에 중국의 동남해안 일대 도시를 점령하여 철광석은 풍부하지만 그외에 많은 물자를 헤외에 의존하던 국민당 정부의 숨통을 조여나간다. 하지만 매번 중국군은 영토를 상실해나가면서도 끈질기게 저항하여 일본군에도 적잖은 피해를 주고 있었으며 현장지휘관들의 독선과 무능, 중국군을 얕보는 경향, 병참등의 문제로 일본군의 피로도 만만치 않게 누적되어 간다.

 2차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동남아시아로 눈을 돌린다. 자원을 외존하던 미국과의 교류가 끊어졌고 국 영토가 드넓었지만 정작 일본이 필요로 하는 석유와 고무등의 자원은 동남아에 풍부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우선 중국 최남단의 하이난 섬을 점령하는데 이로 인해 열강들을 일본에 긴장하고 견제하기 시작한다. 늘 그렇듯 기습으로 일본은 아시아 주요국과 섬들을 손쉽게 점령해나간다. 주요 아시아 식민지에 주둔한 유럽군대들은 당시 본국이 독일과의 전쟁으로 힘을 쓸수 없었고, 군대의 상당수도 식민지인으로 구성되어 이렇다할 전투력이 없는 상태였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령사이에 끼어 완충지로 독립을 유지하던 태국은 일본군이 다가오자 그들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수용하여 간신히 독립을 유지한다. 일본군의 통행과 철도 및 공항건설 시설이용등 적잖은 주권침해였다. 이로 인해 태국에서 버마를 연결하는 죽음의 철도가 일본에 의해 완공되었으며 우기에 시작한 공사로 공사기간중 현지인 7천명이 사망한다.

 해안과 동남아를 통한 자원루트가 막히기 시작하자 중국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일본은 미국 진주만을 기습하면서 주요 열강의 지원을 기대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장제스는 오랜 고립에서 희망을 찾고자 했지만 연합군에게 중국은 상당히 부차적인 장소에 불과했으며 미국역시 침공은 일본에게서 받고 공세는 독일에 취하는 자세를 보인다. 더군다나 섬멸직전의 상황에서 일본과의 전쟁으로 국공합작을 한 공산군은 일본과의 전면전을 피하고 일본군의 세력이 닿지 않는 화북일대에서 자신들의 근거지를 널혀나가 장제스를 더욱 골치아프게 했다.

 당시 미국이 파견한 미군 지휘관은 스틸월이었는데 버마에 파견된 그는 일본군에 버마를 잃고 이를 탈환하기 위해 노력중이었다. 스틸웰은 미국의 협력을 대가로 장제스에 정예군을 요청하고 전력이 모자란 장제스는 이에 응한다. 하지만 스틸웰의 무능으로 버마는 일본에 점령되고 장제스는 정예병의 상당수를 잃는다. 일본군은 화남에서도 대공세를 이어 3차례나 방어하였던 창사와 형양비행장, 동남아 주용 교역의 창구인 난닝을 차례로 잃어가며 영토가 반으로 쪼개진다.

 이처럼 1944년까지만 해도 중국의 상황은 매우 어려웠지만 연합국의 전세는 극도로 전환되어 43년에는 이탈리아가 항복하여 독일에 선전포고 하고 독일 역시 항복한다. 독일의 항복에는 미국의 가세도 있지만 소련과의 동부전선이 무너진게 큰 역할을 하였는데 소련은 2차 대전중 일본 관동군의 시베리아 침입을 우려해 독일과의 서부전선에 계속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무려 70만의 극동군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과의 전쟁교착으로 일본 관동권의 전력이 투입되자 스탈린은 일본의 침공이 없을 것으로 확신하고 과감하게 극동권을 서부전전에 투입하여 전황을 뒤집을수 있었다.

 결국 독일이 항복하고 일본은 손쉽게 점령한 섬과 아시아 여러나라들을 빠르게 잃어갔다. 특히 섬하나하나를 지키고자 병력을 분산하였는데 이로인해 병참의 문제와 함께 각 군대가 손쉽게 각개격파당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결국 핵 두발로 일본은 항복한다.

 문제는 이로 인해 발생하는데 아직도 중국내에는 무려 300만에 달하는 일본군과 일본인이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 일본군 세력을 무장해제하고 사용하는데 국민당과 공산군은 치열하게 경쟁한다. 공산군은 화북 세력을 기반으로 빠르게 만주와 화북지역을 장악하였는데 이는 소련군이 전쟁 말미에 빠르게 만주지역을 장악했기데 가능했다. 이로 인해 공산군은 장제스와 일국을 양자강을 경계로 이분하자는 주장까지 할수 있는 위치에 이르게 되었다.

 결국 전쟁이 끝나자마자 국공내전이 발생하였으며 일본과의 오랜 침략으로 전력에 큰 손실을 입은 국민당 군은 각지에서 대패한다. 거기에 장제스는 일본과의 항전과정에서 전략적 외교를 통해 시간을 벌고자 일본과의 여러 협상에서 저자세를 보이곤 했는데 그것이 발목이 되어 민심을 많이 상실한 상태였으며 일본군의 무장해제 과정과 각 지역의 탈환과정에서 각 지휘관들의 부패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결국 중국은 공산화 되었고 장제스 정권은 타이완으로 탈출한다. 중일전쟁중 국민당 정권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지원을 인색했던 미국은 아시아에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국공내전은 여러 부작용을 갖고 왔다. 우선 독일처럼 연합군은 일본은 분할점령할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동과 북쪽 지역을 소련과 중국이 점령하고 나머지 지역을 영국과 일본이 점령하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맥아더의 강력한 반대와 국공내전으로 무산되고 분할점령은 엉뚱하게도 한반도가 당하게 된다. 거기에 일본과의 배상협상에서 일본측은 승전국인 중국에 막대한 피해 배상을 각오하였지만 타이완으로 쫓겨난 장제스는 국제사회에서 빠르게 인정받기 위해 손쉽게 포기하였으며 공산당 역시 고립을 우려해 이를 빠르게 포기하였다. 친일 부역자에 대한 처리도 국공내전으로 어려웠다. 당장의 전쟁으로 이들을 심판하기 어려웠고, 전쟁에 활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의 경우처럼 이들의 사회중심지위에 올라 호령하는 일은 없었다.

 중국내의 일본인들의 운명도 기구했다. 소련에 점령당한 만주지역의 100만가량의 일본군과 일본인들은 약탈과 강간 살해의 대상이었으며 시베리아로 끌려가 상당기간 노역에 동원되었다. 중국내에 300만 정도의 일본인은 100만가량이 본국으로 송환되었지만 나머지는 국공전쟁에 동원되기 도 하고 어려 가지 이유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전쟁의 대가를 가혹하게 치른 셈이었다.

 이처럼 중일전쟁은 2차세계대전에 미친 영향력, 그리고 공산당의 세력확산의 기회로 향후 중국이 공산화되는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세계사적으로 상당히 의미있는 전쟁이었다. 한반도에도 상당히 영향을 미쳤음에도 이런 중요한 전쟁이 잘 다루어지지 않고 잊혀져 있는 것이 무척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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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18-06-09 2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읽고 있는데 책 재밌네요.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