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내가 어떤 단어의 개념을 생각한 게 있다. 그것은 공간(空簡)의 지박(止泊)이다. 왜 공간에 대한 지박인가? 최근 서울 강남역에서 일어난 아주 슬프고 끔찍하고 아픈 이야기를 우리는 뉴스에서 접했다. 20대 여성이 30대 남성이 휘둘린 흉기에 의해 세상을 떠나야 했다. 아직 20대라면 연애나 취업 혹은 결혼 등등 여러 가지 일들을 선택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살해당한 분은 자신에게 부여된 기회를 박탈되어 억울하게 구천을 헤매게 되었다. 진짜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영혼이 있으면 매우 슬플 것이다. 우선 자신이 죄도 없이 희생당한 점이고, 다른 것은 그 분의 죽음을 자꾸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이다.

 

분명 평범하고 보편적인 가치를 가진 사람들은 그녀의 죽음에 대해 애도와 함께 이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바라봤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두고 후폭풍은 그렇게 만만치 않은 모양이었다. 남성에 대한 혐오와 더불어 이에 대한 반발영역으로 여성에 대한 혐오가 서로 엉겨 붙어 진정한 의미의 추모보단 분노를 넘어 광기의 집착과 공격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그녀의 죽음 억울하고, 어느 사이트에서 내건 군인들의 죽음 슬픈 일이다. 하지만 2가지의 죽음은 서로 다른 개념이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추모하고 생각해야 할 점이다.

 

그녀의 죽음은 우리 사회라는 구조에서 볼 일이고, 군인들의 죽음은 우리나라의 국방군사 지휘 및 무기체계, 그리고 대외 정치외교 관점에서 생각해야 해야 하는 점이다. 단순히 어느 한 개인 여성의 죽음과 다수의 남성군인의 죽음에서 어디가 더 무겁냐고 물어보면 그건 참 애석한 일이다. 어느 누구든 다 소중한 목숨이고, 어느 누구나 그 당사자의 가족과 친구에게 매우 소중한 존재이다. 그러나 만일 어느 것이 사회적으로 더 심각하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전자를 택할 것이다.

 

그 이유는 후자의 죽음은 많은 인명을 희생되었고, 국가적으로 큰 위기감을 불러일으킨 사건이다. 그럼에도 전자에게 선택하는 이유는 군인은 처음부터 국가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고, 그들이 나라를 지키는 이유는 국민들이 적으로부터 다가오는 위기로부터 안전하게 재산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다. 공화주의국가, 대한민국 헌법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한다. 공화주의는 그 나라의 국민이 다른 국가에 의해 목숨과 재산의 피해를 입지 않아야 한다. 결국 우리 사회에 살고 있는 일반 국민들이 안전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사는 것은 곧 헌법으로써의 권리이다.

 

조금 애석한 사실은 군인들의 죽음은 희생에 비해 그들에게 돌아가는 대가는 적절하지 못하다. 매년 자살하는 군인, 사고로 죽는 군인들이 수십 명 내지 수백 명이다. 인권에 대한 개념에서 어느 특정 신분만을 봐서는 안 되고 전 방위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번 강남지하철역 참사에서 왜 이렇게 사회적 이슈가 되었는가? 극우적인 여성혐오 사이트와 극단적으로 남성혐오 사이트의 행동이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금 화제로 떠올랐고, 그들의 행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추모의 의미가 왜곡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이번 추모에서 서울강남을 시작하여 서울 전 지역으로 또 다시 전국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추모에 대한 열기는 나쁘지 않으나, 무엇인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다. 추모 그 자체에 대한 부분이 나쁘지 않다. 오히려 타인에 대한 죽음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슬픔으로 기억해주는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아직까지 사람다운 맛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단지 내가 의문을 제시하는 것은 왜 강남지하철에서 죽은 한 개인의 죽음이 이렇게 큰 이슈로 되었는지 이다.

 

개인적인 이야기이다. 나는 솔직히 이 사회가 마음에 들지 않고, 정부를 신뢰하고 싶은 마음이 거의 바닥에 가깝다. 우리들은 흔히 산업재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고 있다. 산업재해를 당한 사람의 가족과 친구들은 이 사회에 대한 부조리와 정부행정의 공정성에 심각한 회의감을 느낀다. 내 아버지는 안전사고로 인해 산업재해를 당해 부상을 입자, 회사에서 강제로 퇴사시킨 것도 모자라 산업재해로 인한 병원비를 제공하지 않았다. 어느 회사에서는 비정규직으로 들어가 4개월 전후로 내리게 하여 퇴직금을 지불하려 하지 않았고, 어느 회사에서는 퇴직금조차 주지 않았다.

 

내 친구는 원조파견과 하청관리 부실, 안전관리 미흡으로 인해 변을 당해 사망했다. 장례식장에 가서 화장터에서 화장 후 유골단지를 무덤에 묻는 그 순간까지 있었다. 내 친구의 사고는 인터넷 신문기사 올라왔고, 그는 그렇게 세상의 흐름 속에 사라져갔다. 이런 일을 겪은 입장에서 세상을 본다면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는 게 옳은 것인가? 사회적 약자가 되거나 혹은 그 약자의 주변인으로 세상을 본다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러나 우리 사회는 내 친구의 죽음, 혹은 군인의 사고사, 그밖에 죽음에 대해 크게 반응하지 않는다. 왜 그런 것일까?

 

내 억측일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바로 공간적 지박이 인간의 사고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공간이란 우리 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이다. 땅이나 땅에 매겨진 부동산 가격, 사람, 지하에 매설된 상하수도관로 등등이 모두 공간적 존재다. 내가 서울이든 부산이든 그 어디에 살거나 혹은 이동하고 있다고 해도 인간의 공간이란 개념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공간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그 공간이 어디에 속해있는지에 대해서는 구분할 수 있다. 신분에 따라 공간적 지박이 작용한다.

 

군인의 죽음은 군부대 영내나, 혹은 육상의 훈련이나 전투공간에서 이루어진다. 군인의 죽음에서 대부분 군인들은 남성이다. 군인의 죽음은 남성의 죽음과 연결되고, 공장 노동자나 공사장의 노동자 역시 남성들이 많이 차지한다. 요새 군인, 노동자 등과 같은 부류에서도 여성이 많이 등장하고 있으나, 대부분 남성이 많은 인력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일정한 장소, 일정한 직업, 일정한 패턴에서 죽음을 발견한다. 하지만 이번 강남역살인사건을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분명 강남지하철역 화장실이지만, 그 공간적 위치와 그 공간 안의 건축물 용도기능이 작용한 곳이 강남역이었을 뿐이다. 왜인가? 살인을 저지른 자가 여기가 강남지하철역 화장실이기에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이 살인을 저지른 곳이 강남지하철역 화장실이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공간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한 것이 아니다. 그가 어느 공간과 상관없이 불특정 대다수의 여성을 공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했다. 그러나 군인의 사고사나 노동자의 산업재해는 어느 특정장소와 상황이 존재한다. 즉 불특정 대다수가 아니라 특정 다수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강남지하철역 살인사건이 위험한 이유는 특정대상을 지칭한 범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전에 일본에서 살인사건이 있었는데, 미야자키 쓰토무라는 일본인은 어린아이를 납치하여 살인을 저질렀다. 그의 방을 조사하니 그가 가진 롤리타콤플렉스의 위험성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의 범죄는 즉 어린아이라는 대상, 특정대상을 상대로 한 범죄이다. 강남지하철역 사건과 비교하자면, 정신병적인 살인자가 무엇인가 살인대상자에 대한 목적성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아무 이유 없이 그저 길에 보이는 사람에게 흉기를 휘둘러 사망에 이르게 한 것이다. 이런 일은 과거에 있었다. 의정부역에서 칼을 들고 지하철 이용승객을 살해했던 사건이 있었다. 이른바 묻지 마 범죄이다. 그런데 묻지 마 범죄에서 의정부역은 단지 눈에 보이는 사람을 향한 것이다. 무차별적인 공격성향이 일으킨 범죄고, 강남지하철역 살인사건은 무차별적으로 행한 것보다 불특정 대다수 여성을 향한 증오에 의한 범죄다. 즉 살인자가 살해할 대상을 두고 목적성은 없지만, 살해하는 목적성은 가진다는 점이다.

 

살해할 대상의 목적성과 살해의 목적성에서 이번 강남지하철역 살인사건은 사회적 큰 불편한 점을 건들었던 것이다. 만일 범죄자가 눈앞에 보였던 사람이 단지 20대 여성이었을 뿐이라는 우연성이었다면, 사회적 갈등은 증폭되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한국의 젊은 여성을 노리고 싶다는 적대의식에 사로잡혀있기에 문제가 커진 것이다. 그런 의식은 언제 어디서라도 범죄를 일으킬 수 있는 확률이 높은 것이다. 우발적인 범죄는 말 그대로 우발적으로 예상하지 못할 상황이나, 강남지하철역 살인사건을 우발적이지 못한 상황을 만든 비극이다.

 

게다가 강남지하철역은 단순히 공간적 목적성에서 공간의 지박에 의해 저지른 게 아니라 그 이상으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강남지하철역에서 다음은 신도림역으로 혹은 신촌역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공포가 사람들을 자극하고, 추모와 맞지 않은 성적차별로 파생된 혐오가 증폭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분명 여성에 대한 혐오감이 살인자에게 있겠지만, 이 사건을 부당하다고 여기는 자에겐 여성에 대한 혐오감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분명 모순이다. 그런데도 혐오감을 표출하는 이유는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불만을 논리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신경질적으로 해소하고 싶은 욕망에 충실하다.

 

결국 사회적 문제에 대해 논리적인 접근으로 해결하기보단 어떤 특정대상을 공격하여 자신들의 비뚤어진 논조를 정당화시키는 것이다. 인간들의 집단군중적인 폭력적 의식은 자신에게 하나의 정의감이란 허울 좋은 쾌감을 주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게 누군가 맞장구 치주면 그것이 잘못된 가치관이라도 옳은 게 된다. 왜 독일이 나치에 의해 통치되고 잔인한 행위를 보였는가? 그들은 전쟁을 일으키고 살인을 해도 자신들은 죄를 짓는 게 아니라 정의를 집행한다고 여긴다. 집단적 광기가 무서운 이유는 윤리적 가치를 떠나 도덕적 가치란 결국 자신들의 광기로 대체된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의 내러티브(Narrative)라고 나는 생각한다. 서사에서 평화롭거나 혹은 아무 이상 없는(허위와 가식으로 얼룩진 그 사회에는 내부적으로 분명 문제가 있다) 세계 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외부의 적이고, 그들은 자신들이 외부로부터 받은 피해가 정당하지 못함에 따라 폭력적으로 그들을 응징하는 것이 정당하고 곧 그것이 정의라고 믿는다. 할리우드 영화가 가끔 보면 3류 수준밖에 안 되는 이유는 이런 방식을 그대로 학습하기 때문이다. “너 나 건들었어(하지만 이미 현실에서 자신을 건든 쪽을 확실히 간섭하고 있다는 사실은 은폐)? 그럼 너 좀 다시는 못 까불게 조져야겠어.”

 

이런 내러티브 구조는 인간의 오랜 이야기인 신화에서 시작하여 역사에서도 자주 본다. 이런 방식은 영화, 드라마, 만화, 애니메이션 혹은 현실의 상황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상대방이 더 악을 쓰고 저항하면 할수록 자신들이 외치는 정의감이란 허황된 정신은 더 고무된다. 그리고 그것은 또 다른 파장을 일으킨다. 이런 식으로 서로 핑퐁게임을 하다보면 사건은 해결이 아니라 이상한 조류를 타고 낯선 바다에 표류한다. 원래 추모의 의미도 없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생각하자면 이런 죽음을 두고 기억하는 것은 좋으나, 사회적 문제를 두고 공간의 지박에서 벗어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강남역지하철역 지나치다 추모하는 사람이나 그 공간과 멀리 있는 자라도 슬픈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공감해주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산업재해로 죽거나 해고로 인한 노동조합투쟁과정에서 재판에 패소하여 거액의 벌금을 갚을 방법 없어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 군대에서 사고나 의문사 당한 이들에 대한 추모와 아픔은 약한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번 사건을 두고 바로 공간의 지박에 갇힌 한국사회를 생각한 것이다. 무차별적 살해의도가 불특정 대다수 여성을 노리는 것은 분명히 불안하고 무서운 일이다. 하지만 이와 다르게 특정된 공간에서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져가는 이들의 희생 역시 슬프고 무서운 일이다. 조금 크게 보자면 세월호로 희생된 안산 단원고등학교 학생이나, 518에서 학살당한 광주시민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의 희생을 단지 그 공간적 범주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그 이상으로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진정 혐오해야 하는 것은 그저 눈에만 보이는 가시적 요소보단 그렇게 되어버린 과정을 돌이켜보는 것이 중요하다. 반성과 성찰 없는 증오는 아무런 대안과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단지 시간낭비에 타인에게 상처만 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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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6-05-22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인 이야기이다. 나는 솔직히 이 사회가 마음에 들지 않고, 정부를 신뢰하고 싶은 마음이 거의 바닥에 가깝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삼가 친구분의 명복을 빕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5-22 21:45   좋아요 0 | URL
올해 1월1일 장지로 떠나보내면서 참 뜻깊은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친구가 하늘에서 고통없이 잘 지내면 좋겠습니다.
 

길게 적지 않겠습니다. 이런 글 써서 조금 기분은 내키지 않으나, 적겠습니다.(참고로 이 글 내리거나 지우고 싶지 않네요). 보는 분들 제가 문제 있으면 제게 조언해주시면 됩니다. 하지만 제가 억울하게 인신공격 받은 것을 생각하시면 그냥 그렇구나 인정하면 됩니다.


전에 북플 알림에서 "솔직히 글에서 노땅의 향기가 풍기네요. 걍 정암학당의 플라톤 전집을 보시거나 원문이 영어로(이하 덧글이 변경되어 종적을 끝까지 찾지 못했습니다)"


http://blog.aladin.co.kr/775792147/7596040


이 글이 제가 서평으로 작성한  플라톤의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 변론, 크리톤, 파이돈>입니다. 읽으면 아시겠지만, 저는 결코 소크라테스에 대하여 플라톤 전집에 대한 문헌 그 자체를 논하는 게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행동을 기록한 플라톤의 기록을 보면서 후대 그것을 번역한 분의 역자서문과 해석, 그리고 그 분이 독재시설에 아무 것도 하지 않음에 대해 중의주의 내지 혹은 민주주의 자질을 과연 따질 수 있는지를 논했습니다. 그리고 현대사회와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제 개인적인 논평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알옥"이란 분이 덧글을 적어주더군요. 


타인의 서평에 적는데 우선 "노땅"이라고 표현한 점이 참으로 불쾌하고요. 번역본에서 왜 "영어"를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제 돈을 주어 도서구매 후 읽거나 혹은 도서관의 서적을 대여하여 보든 그건 제 마음입니다. 제가 그렇게 보는 이유는 플라톤 전집을 읽는 게 한글로 되어 있는 게 편하고, 우선 고대 그리스어가 번역되는 분들의 서적을 읽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지 않습니까?


그런대 왠 영어? 성균관대학교 박종현 교수가 플라톤 번역 및 연구가로 유명한데, 제가 그 사람의 언행불일치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의 번역 자체를 마음에 들지 않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미 교체되었지만 교체 이전의 덧글에 대한 답글로 적는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걱정마세요. 존 롤즈 번역자인 황경식 교수님은 더 깝니다. 정암학당 향연을 읽었지마는 개인적으로 천병희선생님이 마음이 가네요. 조언은 감사합니다.


이 덧글에서 제가 "알옥"이란 분에 대해 인신공격이나, 혹은 대놓고 당신의 말을 듣지 않겠다고 한 점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덧글 내용을 바꾸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억울하게 법정에 고발당했다, 당시 정치인들의 음모에 의해서 였다, 박종현 교수에 대한 비판글 여기서 그냥 글 안읽고 내렸습니다. 플라톤 전집을 읽어보았다면 솔직히 소크라테스는 고발당할만 일들을 여럿 했습니다. 특히 초기와 중기 사이의 대화편을 보면 항상 젊은이들과 함께 있었고, 당시 아테나이 사람들에게는 소크라테스나 소피스트들이나 거기서 거기로 보였을텐데.. 초기나 중기 대화편을 보면 소크라테스의 지인들 대표적으로 크리톤등이 소크라테스에게 경고를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플라톤 대화편에 대한 폭넓은 이해도 없는 패션 철학자의 어처구니없는 궤변론이네요.. 참으로 답답합니다

 

어제 저는 이렇게 답변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런 내용을 저에게 처음부터 이야기해 주시면 됩니다. 참고로 저는 철학전공자도 아니고, 철학을 누구에게 배운 것도 아니고 독학했습니다. 패션 철학자의 어처구니 없는 궤변론 맞을지도 모릅니다. 공대 졸업하여 독학하면서 님의 그런 지칭 처음 들어봅니다. 답답하면 그렇게 알려주면 되는 것이지, 처음부터 비꼬는 말투에 대해 님 태도가 바르지 않았다고 봅니다.

소크라테스가 어린 남자에게 인기가 많았다는 점, 그리고 여러모로 성격이 강직한 점은 알고 있습니다. 단지 님만큼 알지 못할 뿐입니다. 내가 아는데 남은 모르는 것이 있을 수 있고, 그것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플라톤에 대한 이해도에 부분에 대하여 님이 저보다 많이 알겠죠. 제가 박종현 교수를 겨냥한 것은 플라톤의 철학을 그래 말하면서 그의 지행일치를 논하면서 막상 본인은? 이런 겁니다. 오늘 518인데 황경식 교수는 그 사건을 두고 ˝사태˝라고 하더군요.

아직도 제글에서 플라톤만 잘 알고 모르는 것을 집중적으로 보시고, 님의 기분이 좋지 못하면 제게 부족한 점을 알려주시고, 그리고 그런 양질의 도서를 소개해주면 되는 겁니다. 이 글이 플라톤만 적어내리고 있다는 가정 아래서요. 만일 그게 아니라면 님은 오리지널 철학과 전공자가 왠지 허접하게 보이는 사람 잡고 궤변론자이니 답답한 인간이라고 말하는 그정도의 사람일 뿐입니다. 님의 덧글은 ˝내가 아는데 넌 왜 몰라˝ 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나요? 


"알옥"님 저는 님이 무얼 하는 분인지 무얼 하고 싶은 것인지 아무 관심 없습니다. 적어도 남의 글에 두고 덧글 적을 때 최소한의 예를 갖추고 적어주는 게 우선이 아닐까요. 저보다 많이 아실 것이고, 만약 전공자라면 철학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윤리학이 아닌가요? 제가 윤리적인 관점에서 해당 대학교수를 비판했습니다. 나머지 서평에 대해 부족하면 그냥 부족하여 보충하면 될 것이지. 왜 저에 대해 인신공격을 하십니까? 솔직히 기분이 불쾌하네요. 저 기분 정말 상해서 이렇게 글 올립니다. 


독재시대 눈치밥 먹거나 대놓고 협력한 자들이 이제 와서 자유주의에서 시민의 권리나 의무 따위 논하는 행동이 더 심각한 궤변론자들이 아닌가요? 제가 천병희 선생님을 고집한 것은 그분은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옥고를 치룬 분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그리스 고전을 즐겁게 볼 수 있도록 노력하는 분입니다. 그래서 정암학당이든 서광사이든 천병희 선생이 좋다고 한 겁니다. 겨우 지방의 공과대학을 나와 어느 순간 궤변론을 주장하는 철학자가 되어 제가 진짜 출세한 것 같네요. 지방 공대생은 플라톤을 읽고 거기에 대해 비판하면 안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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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9 14: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19 14: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19 17: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19 15: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5-19 17:29   좋아요 1 | URL
서재에 가보니 약간 산듯하게 해놓았던데, 저런 말투라 놀라울 따름이죠

곰곰생각하는발 2016-05-19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이렇게 친절하게 대응하시고 그러십니까. 다음에는 조낸 물어뜯으세요.. 딱 보니 노땅 같네. 요즘 애들은 노땅이란 표현 잘 안 씁니다..ㅋㅋㅋㅋ

만화애니비평 2016-05-19 17:29   좋아요 0 | URL
그럴까요.....
꼰대기질이 다분해 보였습니다. 그분..

cyrus 2016-05-19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신공격하는 댓글을 발견하면 무조건 사진 캡처해야 합니다. 작성자가 몰래 댓글 내용을 수정하니까요.

만화애니비평 2016-05-19 17:30   좋아요 0 | URL
저것 신고가능한가요?

cyrus 2016-05-19 18:29   좋아요 0 | URL
이 정도 내용 가지고는 신고 대상이 되지 못할 겁니다. 댓글 작성자가 딴 소리 할 까봐 증거용으로 저장하는 것뿐입니다. 악성 댓글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알라딘 서재지기에게 알려봤자 그냥 대응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짜라투스트라 2016-05-19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당해보니까 많이 배운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가 더 중요하더군요. 많이 배운 것보다 그 배운 걸로 자기 자신을 바꿀 수 있냐가 더 중요한 듯 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5-19 22:27   좋아요 0 | URL
제 서평 목적이 그건데 말이죵

2016-05-19 2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5-19 22:26   좋아요 0 | URL
그게 답인듯 하군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5-19 2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생긴 분인가 봤더니 아프니깐 청춘이다를 좆도 감명깊게 읽었다고... 아, 했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5-19 23:33   좋아요 1 | URL
저도 그걸 본후 너무 감명깊게 충격받아 그냥 그럴려니 합니다...
 

대한민국 헌법은 민주주의 공화국, 즉 자유주의에 의거한 정치체계다. 이른바 헌정, 헌법정치가 모든 것의 시작이고, 모든 것의 토대다. 정치적 자유주의적인 요소에서 진보는 헌법적 가치가 인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보수적 가치는 헌법 그 자체를 지키는 것이다. 


내가 평소 사람들과 정치이야기를 왠만하면 꺼내기 싫은 이유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까지 아니더라도 한번 앞 부분이라도 읽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헌법전문은 답을 내놓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답을 생각하도록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헌법이 자유주의인 이유는 프랑스대혁명부터 시작한 왕족과 귀족, 성직자 계급에 의해 압제를 받는 시민과 농민, 그밖에 많은 사람들에게 신체적 자유와 인간의 의지를 실행하기 위해서다. 문제는 모든 인간에게 이성이 있지만, 이성적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나 혹은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읽어본 근현대의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자유주의에 대한 철학적 사유에서 본다면 인간은 이성에 근거로 하여 행동하고, 이성의 논리성으로 사회를 움직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성의 논리에서 논리적이란 단어를 사람들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이성의 영역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논리보단 윤리다.


자신의 인간성이나 사회가치관은 마치 도덕적이라 보면서 행동하는 양식은 파시스트적으로 대하는 경우가 다분하다. 윤리는 사회적 함의가 문제가 있어도 거기에 의문을 품는 게 정당하다. 롤즈의 자유주의 철학을 두루 살펴보면 자유주의 사회에서 부조리에 대한 문제를 시민이 나서서 해결해야 하고,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서 인간의 이성으로 사회적 문제를 고치는 것도 중요하나, 그 문제의 원인을 개선하는 것도 중요하다.


자유의 이상이라던지 자유의 가치라는 이름 아래 자유주의를 지키는 것인지 붕괴시키는 것인지 요새 참으로 아리송하다. 철학적 사유가 없는 자유주의란 그저 자유주의의 이름을 겉만 내세우는 파시스트 내지 관료주의 체계의 도구일 뿐이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왜 사회주의를 조지 오웰이 그토록 비판했을까? 


돼지 메이저 영감을 이렇게 유언을 남긴다. 존스의 행동을 따라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자신에게 반항하는 자를 두고 말한다. 존스 같은 놈이라고 말이다. 요새 조광조에 대한 책을 보는데, 연산군 폭정으로 많은 선비들이 화를 입고, 추후 중종반정이 일어난다. 중종이 왕이 되어도 연산군은 사라졌지만, 연산군 같은 공신세력이 남아있었다. 어느 누구를 손가락질 하는 당신이 그 손가락질 하는 사람처럼 된다고 생각하지 않은 일들은 너무 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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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애니메이션과 철학

애니메이션이란 이미지의 세계이다. 이미지로 이루어진 세계이기 때문에 인간이 실재 현존하는 공간을 넘어 새로운 세계를 보여줄 수 있는 세계이다. 우연히 어느 블로거의 글을 보면서 조금 흥미로운 점이 있는데, 철학이란 것이 돈은 안 되어도 왜 필요한지에서 단지 지금은 철학이 대세가 아니라는 글을 보았다. 애니메이션과 철학, 너무 다른 것이라고 볼 수 있는가? 애니메이션에 철학이 없을 수도 없고, 철학만을 위해 만들어진 애니메이션도 존재한다. 철학은 우리 세계 어디에도 존재한다. 단지 우리가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런 사유를 제기하는 이유는 2016년 1/4분기 애니메이션 <무채한의 팬텀월드>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보면서 조금 떠오른 작품은 <바케모노 가타리>이다. 그 이유는 2작품 모두 인간 세상에 과학적으로 존재하기 힘든 존재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바케모노 가타리>는 괴이(怪異)라는 등장시킨다. 아니 정확히 보자면 신이(神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신이란 모든지 숭배되어야 대상도 되나 때로는 내쳐야 할 대상도 된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 신이란 양과 음의 존재성을 띄고 결국 인간의 무의식적 요구에 따라 변형되어 버린다.

 

신화라는 인간이 만든 서사에서 신의 이야기는 결국 인간이 원래서 만든 이야기라는 점이다. <무채한의 팬텀월드>는 그런 점에서 <바케모노 가타리>의 신이(神異)의 요소를 넘어 상상의 세계까지 확장한 것이다. 즉 인간의 세상이 아니라고 여겨지는 공상과학적 요소, 초능력적인 요소까지 등장한다. 거기에 덧붙여 신화의 세계도 등장한다. 이런 비일상적인 세계가 일상의 세계에 등장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낯선 일이라 보겠지만, 사실 낯선 것이어야 말로 우리 세계에 내재된 숨어있는 이야기다. 어찌 보면 잊어버린 이야기라고 볼 수 있고, 다르게 본다면 보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다.

 

2)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마주해야할 세계는 인간의 외연도 존재하나, 내적인 세계 역시 존재한다. <무채한의 팬텀월드>나 <바케모노 가타리>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팬텀과 괴이 현상들은 외부에서 온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 외부는 인간의 내부에서 만들어낸 잉여적인 현상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무채한의 팬텀월드>를 알아간다는 것은 결국 인간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고, 인간이 스스로 탐구하고 사유하는 것이란 철학적 자세가 필요하다. 철학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다들 그렇게 어렵고 따분한 것을 왜 하냐고 한다. 모른다고 해서 삶에 당장 무리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철학을 알면 좋은 점은 어떤 현상에 대해 그 밖의 화제에 대해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생기기 때문이다. <무채한의 팬텀월드>에 등장하는 팬텀들은 물질적인 세계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물질적이지 못한 것들이 물질적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은 세계에 존재하는 이형의 존재, 즉 물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즉 형이상학(形而上學, Meta-physics)적 존재이란 점, 형이상학은 철학에서 고대그리스부터 다루어온 학문이다. 그리스 유명한 철학자로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이란 서적을 저술하고, 그 책은 자연의 세계를 넘어 눈에 보이지 않은 세계를 다룬다.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전혀 말도 안 되는 비논리성도 있지만, 당시 인간에게 보자면 엄청난 학문적 성과다. 눈에 보이지 않은 것이 있기에 인간 역시 눈에 보이지 않은 세계를 가지고 있고, 그것은 영혼의 존재로 승화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인 플라톤, 플라톤의 저서들을 보면 인간이 위대해지면 하데스의 궁에 가게 되면 후세사람들로부터 큰 숭배를 받는다고 한다. 플라톤은 죽었지만, 플라톤은 죽지 않은 상태에서 저승이란 세계를 글로 남긴다. 그가 진짜 저승세계에 갔는지 혹은 가서 무얼 하는지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인간이기에 인간은 철학이 필요한 것이다.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의문을 품게 되기 때문이다. <무채한의 팬텀월드>는 단순히 스토리와 주인공 히로인의 모습을 보고 쉽게 넘어가기 좋은 작품이다. 하지만 내가 아리스토텔레스란 이름을 거론한 것처럼 주인공 하루히코고 서사 내에서 많은 사람들과 이론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소쉬르, 융, 프로이트 등 철학자와 심리학자 이름이 계속 등장한다. 파롤이란 것은 스위스 제네바대학교 언어학자인 소쉬르의 <일반언어학>에서 가져온 개념이다. 언어라는 것은 langue and parole로 나누어지고, 후자 빠롤이란 것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이다. 랑그는 사회적인 개념을 가진 언어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3) 무채한의 팬텀월드에서의 팬텀

빠롤이란 용어가 나온 것은 목소리를 이용하여 팬텀을 퇴치하는 코이토 때문에 나온다. 그녀가 힘을 발휘하기 전에 주문 같은 영창을 외치고, 그에 따라 목소리에서 전해지는 위력은 강력해진다. 소쉬르의 <일반언어학>에서 기호학은 프랑스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에 의해 구조주의로 발달하고, 구조주의는 20세기 중후반 세계적인 학문으로 이어간다. 그래서 <무채한의 팬텀월드>를 보다보면 전문적인 용어나 개념이 등장하기에 아무 생각 없이 스쳐가듯이 바라보면 작품에서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없게 된다.

 

작품은 어느 연구기관의 사고로 인간의 뇌기능이 변질되고, 뇌의 돌연변이는 인간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은 형이상학적인 존재 팬텀을 등장시킨 것이다. 하루히코가 그려서 소환하던 괴수 역시 형이상학적 존재다. 눈에 존재하지 않은 괴수를 과거 인간이 있다고 여기고, 그것을 이미지로 남겨 후세사람들에게 기록으로 전한 것이다. 팬텀이란 존재는 우리 인간이 알 수 없는 세계고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게끼를 전해준다. 그러나 그 시작은 인간에게 있다. 인간만이 이성을 가지고 미지의 존재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물에 부여된 팬텀은 인간의 오랫동안 정념을 들인 존재가 많다.

 

마이가 처음 나올 때 퇴치한 림보게임에서 전신주는 인간에 의해 탄생되고, 인간의 생활을 위해 사용된 것이다. 결국 팬텀은 스스로 나온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타의에 의해 출현한 존재다. 인간이 그것을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결국 인간의 정신세계가 만든 것이다. <무채한의 팬텀월드>에서 인간의 정신세계를 중시한 것처럼 신화적 요소를 중시하고, 무의식적 세계를 중시한다. <무채한의 팬텀월드>에서 가장 중요한 학자는 융이다. 융은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의 제자이나, 반(反) 프로이트학파를 만든 장본인이다.

 

융은 인간에게 전 지구 내지 혹은 지역적으로 무의식 세계가 공통적인 요소가 있으며, 공통적인 무의식 세계가 바로 신화라고 한다. 그리고 사람이 수면 중에 꾸는 꿈은 개인의 신화이기에 인간은 이성이 있든지 아니면 이성이 없는 수면 중이라면 신화의 세계와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신화의 이야기를 보면 전혀 현실적이지 못하고, 허황된 세계지만, 그곳이야말로 인간의 본연적 세계가 드러나고, 인간이 숨겨놓은 욕망과 원하는 바가 자리 잡은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사유에서 <무채한의 팬텀월드>는 그 마지막 사건을 보면 알 수 있다. 팬텀이란 결국 인간에 의해 결정된 것이란 점을 말이다.

 

4) 에니그마 등장은 무엇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마지막에 등장한 에니그마는 모든 인간의 초능력을 빼앗으려 한다. 자신이 만약 모든 초능력자의 능력을 가지는 순간 절대적인 존재로 되고, 인간에 의해 탄생된 팬텀이 오히려 인간을 지배할 수 있는 혁명 혹은 쿠데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에니그마가 인간에 대한 지배욕구를 품게 된 동기는 그녀에게 가해진 잔인한 생체실험이다. 에니그마는 인간의 비윤리적인 폭력에 악의를 품고 모든 초능력자의 능력을 빼앗으려 한 것이다.에니그마가 흡수한 능력 중에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는 기능도 있었고, 하루히코에게 특수한 능력이 있는 것을 알았기에 하루히코의 능력을 빼앗기 위해 하루히코의 어머니 몸을 조종한다.

 

인간의 정신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가 이제는 역으로 인간의 정신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에니그마는 인간에 의해 나쁜 감정만 받은 것은 아니다. 거짓의 감정과 거짓의 얼굴로 하루히코와 조우했지만, 하루히코에게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어머니로 등장했다. 어머니의 기억과 하루히코에 대한 관계성을 에니그마 알고 있었기에 충분히 하루히코를 속일 수 있었다. 마지막에 하루히코의 반격으로 퇴치되지만, 하루히코의 생활에 대해 나쁘지 않았다는 말을 남긴다.

 

처음부터 팬텀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고, 그 존재의 시작은 아리야식 연구소의 실험에서고, 에니그마의 탄생은 아리야식 연구소의 소정의 목적이다. 자신의 실수와 과오를 반성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가지고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아리야식 연구소에 대해 논하면 다른 블로거(천연마)의 글 내용에 상당히 동의한다. 왜냐하면 아리야식 연구소의 폭발사고는 일본의 핵폭발 사고를 의미한다. 핵이 폭발하면 인간이나 혹은 많은 생명체의 DNA가 변질되어 돌연변이가 생긴다.

 

미국의 만화인 X-MAN이나 혹은 많은 히어로 장르에서 주인공이 특수능력을 가지게 된 동기는 방사능과 같이 인간 유전자를 변질시키는 광선이나 가스 등에 노출된 경우가 많다. 즉 핵 사고는 단순히 폭발력과 열에너지만 무서운 게 아니다. 낙진에 의해 떨어진 방사능은 인체에 머물면 반감기 기간이 수십에서 수백년에 이르게 될 가능성이 있다. 방사능의 유해성은 인간 유전자를 변질시켜 새로운 능력을 가질 수 있다는 공포심을 심어준다. <무채한의 팬텀월드>에서 아리야식 연구소가 하는 짓은 마치 그런 짓을 2번 반복하는 것과 같다.

 

5) 팬텀은 새롭게 등장한 게 아니라 보이지 않은 것이 등장한 것

여기에 인간은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반복하는가? 아니라면 저지해야 하는가? 아리야식 연구소 간부들은 그 원인을 알고도 문제해결을 위한 단서를 주지 않는다. 결국 권력과 지식이란 서로 재생산하는 것으로 이권을 추구하는 담합을 보여준다. 팬텀이란 존재가 중요한 이유는 팬텀이 나와서 인간 세상이 문제가 되는 것도 있지만, 팬텀 그 자체가 인간의 현재 모습을 대변해주기 때문이다. 팬텀이야말로 인간이 그동안 가려오던 모습을 그대로 노출시킨다. 작품의 주인공인 하루히코에게 늘 루루라는 작은 요정 같이 생긴 팬텀이 있다. 아주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자유로운 영혼이지만, 그래도 도저히 싫어할 수 없는 귀여운 캐릭터이다.

 

작품 초반부터 생각했고, 나중에 완전히 밝혀진 것이지만, 루루는 하루히코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다. 하루히코는 평소 독서만 하고, 성실한 성격에 매사 착실하다. 하지만 그런 하루히코는 많은 하루히코 모습 중에 가장 많이 평소에 드러난 것이지 그에게도 은밀한 욕망 내지 어리광 피우고 싶은 무의식적인 욕망이 있다. 루루는 하루히코의 아니마(남성성 안의 여성성)으로 기존 남성성의 하루히코는 절제와 단정이라면 루루는 자유분방함과 나태함이다. 에니그마에게 일부 능력을 빼앗길 때 루루의 성격이 원래가 아닌 하루히코 같은 모습으로 변한다. 그러나 다시 회복할 때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하루히코가 그려낸 루루의 모습은 하루히코가 평소 결핍으로 가득한 욕망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은 남자아이가 어머니에게 어리광을 피우며 사랑받고 싶은 감정을 대체한 것이다. 루루는 하루히코가 어릴 적에 어머니가 사주신 동화책에 나온 캐릭터와 비슷하게 생겼다. 루루의 모습은 그동안 어머니를 그리워하던 하루히코의 욕구불만을 드러난 캐릭터다. 하루히코의 슬픈 어린 시절은 초등학교 시절에 가족과 같이 그네와 시소를 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하루히코가 어린아이로 변할 때 옆에 마이가 있었고, 하루히코가 마이를 따르는 이유는 마이가 다른 여성 캐릭터보다 가슴이 크다는 점이다.

 

여성이 가진 가슴의 크기에서 단순히 성적인 대상이 아니라 가슴이 가지고 있는 여성성, 어린아이가 가장 원하는 어머니의 따뜻한 품인 것처럼, 풍만함 가슴은 모든 인간(남녀 구분 없이)이 가진 원초적인 보금자리다. 물론 마이가 다른 히로인보다 하루히코와 오랫동안 알았던 사이고, 마이가 하루히코를 좋아하는 것도 분명 포함되어 있다(하지만 하루히코의 어머니가 나오는 점에서 하루히코는 어머니에 의한 정신적 안정으로 인해 마이나 다른 여성 캐릭터에게 고백하는 일은 쉽게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6) 팬텀을 이기는 법

이런 요소는 비단 하루히코만이 아니다. 또 다른 히로인인 레이나의 경우를 보면 부유한 명문가정의 아가씨인 그녀는 집이란 공간을 매우 불편하게 여긴다. 부모님이 다정하기보단 다소 엄격하고, 언니가 바이크를 타는 것을 좋아하나 부모님의 반대로 가출하고 만다. 레이나 내의 정신적인 빈곤은 언니의 부재와 부모님의 갈등이 자리 잡았기에 가정문제가 그녀에게 큰 짐이 되었다. 이상한 버스를 타고, 레이나가 원하는 팬텀세계의 부모님은 평소 레이나가 그려오던 환상의 가족이다. 가족문제에서 레이나 그리고 하루히코 역시 그런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문제, 특히 어린 아이거나 청소년들에게 가정문제는 심리적인 박탈감과 동시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것이다.

 

마이 역시 자취를 하면서 가족과 떨어져 있고, 코이토 역시 어린 시절 초능력으로 인해 왕따 당한 기억으로 가족들과 떨어져 살고 있다. 팬텀을 만들어내는 것은 인간의 부족한 마음일지도 모르나, 그런 팬텀을 이겨내야 하는 것도 인간의 마음이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스스로 다듬어가기 어렵다. 인간의 한자어가 人間이다. 사람의 사이가 인간이다. 인간에게 사람이란 존재가 서로 옆에 있어주지 않으면 인간이란 존재에 미치지 못한다. 물론 팬텀은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도 나타난다. 인간은 이성이란 정신적 활동을 하나, 감정과 무의식은 인간이 아니라 동물도 가지고 있다.

 

<무채한의 팬텀월드>을 다시 생각해보자면 인간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그 모든 것들이 소중한 것을 말해주고 싶은 것은 아닐까? 슈뢰딩거의 고양이란 물리학 이론처럼, 단순히 학문적 영역을 떠나 고양이란 생물이 그동안 정들었던 인간과의 추억으로 생긴 것처럼 우리 모두의 마음은 소중한 것이 아닐까 싶다. 처음부터 팬텀은 인간의 마음에서 태어났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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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철혈의 오펀스> 이것은 <건담>인가? 아닌가?

개인적으로 <건담>이란 작품을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개인적인 취향이 메카 장르 보단 일상물이나 개그 쪽을 더 선호한다. 그런다고 해도 전쟁물이나 로봇이 나오는 메카 장르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메카가 나온다는 것은 전쟁이 필수적으로 따라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류의 문명에서 전쟁은 인간의 역사에서 결코 빠지지 않은 영원한 이야기들이다. 최초의 문학과 서사라고 불리는 신화, 그것도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그리스신화에서 처음 알게 되는 인물은 제우스와 그의 가족일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신화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시인 호메로스의 의해 만들어진 <일리아스>이다. 트로이전쟁에서 영웅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대결에서 신인 아테네와 아폴론의 손짓이 전사들의 운명을 가른다.

 

<일리아스>의 거대한 분량의 서사시(詩)가 신화이면서도 전쟁을 노래하는 비극이기도 하고 영웅을 찬양하기 찬미가이기도 한다. 영웅의 등장은 언제나 위기와 갈등의 최고조에 등장하고, 그의 활약은 거대한 세력 안에서 이루어져 하나의 역사와 신화를 창조한다. 이렇게 거대한 세계와 이념 안에서 인간들의 운명을 노래하고, 거기서 등장하는 영웅의 활약을 노래하는 것이 그리스신화의 비극 시들이다. 영웅의 죽음은 자기 수명을 누리지 못하고, 불의의 사고로 인해 죽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그들은 가장 아름다운 모습일 때 가장 강한 모습일 때의 자신을 남기고 떠난다.

 

이런 점을 <건담>에 비유하는 이유는 사실 건담이 미래공상 세계에서 일어나는 전쟁이기에 SF 장르이기도 하나, 고대 그리스신화와 비교하여 그 기본적 명제는 크게 변한 것이 없다. <퍼스트건담>부터 주인공 파일럿은 우연의 사건으로 건담 프레임에 탑승하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장을 누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아무로 레이의 같은 경우는 살기 위해 건담에 탑승했다면, <역습의 샤아>에서는 지구를 지키기 위해 탑승한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전투 병기에 탑승했던지 그가 움직이는 의지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보단 자신이 원하지 않은 거대한 조류에 의해 움직인다.

 

<건담>이란 작품은 이른바 거대서사(巨大敍事, Master Narrative)라는 틀을 가지게 된 것이다. <건담>이란 작품은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대표적인 거대서사의 작품이다. 관념적인 이념 안에 인간은 자신의 우월성에 도취하여 타인을 지배하고자 하는 집단주의가 전쟁의 시초가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많은 <건담> 시리즈에서 그런 요소를 지닌 것과 아닌 것도 있다. 더블Z 같은 경우 자신의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오로지 건담 프레임에 탑승하는 조종사도 있듯이, 각자가 원하는 목표와 방향성이란 무한대이다. 그렇지만, <건담>은 조종사가 자의든 타의든 그 거대한 물결을 따라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대부분 조종사는 아직 나이가 어린 청소년이다.

 

<Thunder Bolt>의 경우 장교로 임관한 조종사가 나오나, 사실 그가 파일럿으로 활약해도 결국은 거대한 이데올로기(지구연방군과 지온군의 대립)에서 빛을 내는 장기말 같은 인물이다. 이런 점에서 2016년 1분기에 종료된 <철혈의 오펀스>는 기존 <건담>과는 상당히 이질감이 보일 수 있는 작품이다. 그 작품은 거대서사라는 거대한 틀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거대서사라는 거대한 틀을 부수기 위해 진행되는 작품이다. 그런다고 거대한 서사 밖이나 그것을 다른 세계에서 일어난 사소한 작은 이야기(小敍事, Small Narrative)는 아니다.

 

그 거대한 세력과 이념에 대항하는 다른 방식의 거대서사로 이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철혈의 오펀스>에서 건담 프레임을 탑승하는 미카는 어떤 이념이나 사상, 그리고 뚜렷한 목적의식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아니다. 오히려 살인기계처럼 철화단 리더 올가의 명령이나 의지에 무조건적으로 따른다. 단지 자기들이 있어야 할 곳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건담>의 작품세계를 본다면 관념적인 요소, 즉 상위기관이나 국가적 대립, 세력 간의 갈등권력자들의 이기심들이 인간을 운명의 시험장에 보낸다면 <철혈의 오펀스>는 거기에 휘말리는 인간들이 저항하는 이야기다.

 

2. 마주침의 철학

전에 어느 사이트에서 <건담> 그리고 <케이온>에 대한 글을 보다, 조금 놀란 적이 있었다. 그때 등장한 철학자와 그의 이론을 최근에 내가 독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출처 말고 다른 곳에서 그 글이 나올 때는 많이 웃었다. 그 사상가가 어떤 사람인지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채 글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 철학자의 이름은 루이 알튀세르, 프랑스 파리고등사범학교 출신이면서도 거기서 철학을 교육했던 사람이다. 20세기 철학과 사상은 1차 세계대전 이후로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을 중심으로 발전하다 나치정권 이후 2차 세계대전을 지나면서 프랑스로 바뀌었다.

 

21세기 철학이나 사상, 심지어 문화나 예술에서 프랑스가 최고로 된 것은 전쟁과 많은 연관이 있다. <건담>을 알려면 우선 전쟁의 비극을 알아야 할 것이다. 전쟁에서 인간은 계몽주의(프랑스대혁명 정신)적 가치관인 자유, 평등, 박애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품는다. 인간의 의지보단 인간이 가진 무의식적인 세계, 그리고 현재 살아가는 경제적, 환경적, 물질적 조건들이 어떤 식으로 정치나 사회적인 영향을 주는 것을 여기게 되었다. 19~20세기는 그야말로 전쟁과 혁명이 유럽을 휩쓸고 지나갔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는 자국의 국민과 식민지의 원주민들을 착취했고, 전쟁은 많은 물자와 인명을 소모하게 만들었다.

 

전쟁에 의해 혁명이 일어난 유명한 사례로 1917년 2월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 그리고 같은 해 10월에 일어난 볼셰비키혁명이다. 러시아 소비에트가 차르체제와 케렌스키 정권 붕괴 후 최초로 사회주의국가 설립 선언을 했다. 당시 혁명가들은 대부분 마르크스주의자였고, 소비에트연방은 마르크스의 실험이 최초로 시행될 수 있었던 나라였다. 시행된 게 아니라 시행될 수 있다는 말은 마르크스주의는 유물론적인 조건, 즉 물질적으로 하부에서 일어난 조건에 의해 상부의 체계가 움직이는 것이다. 그런 소비에트가 독재정치로 바뀌었고, 스탈린의 독재는 많은 이들을 충격을 몰아갔다.

 

문제는 소비에트연방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만들어서 그들의 나라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21세기 독일과 영국, 프랑스 등과 같은 나라에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이 계속 활동하고 있고, 독일정부 같은 경우 마르크스의 도서가 유네스코 세계인류 문화유산에 등재됨과 동시에 마르크스의 저서들을 정리하고 있다. 20세기 프랑스에도 마르크스주의자는 여전히 많았고, 우리가 그토록 저주하는 그들 중에서 우리가 가장 찬양하는 천재화가 피카소도 있다. 문제는 소비에트연방의 행보 때문에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모순에 빠졌고, 이때 새롭게 이론을 전개한 사람이 루이 알튀세르이다.

 

그의 저서 중에 <철학에 대하여>에서 기존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유물론이 아니라 관념론이 되었고, 여기에 다시 새로운 유물론적인 가치관(아니면 본래의 마르크스주의)을 대립시켜 새로운 방향을 나오게 한다는 우발적인 유물론을 이야기한 것이다. 이 이론을 그대로 <건담>과 <철혈의 오펀스>로 대치하면 어떤 상황이 발생할까? <철혈의 오펀스>에서 철화단은 어떤 철학이나 사상 그리고 이상에 대한 집착은 없다. 단지 그들이 시작하고 끝을 내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삶에 대한 의지이다. 철학과 사상, 그리고 인간의 사유는 바로 여기서부터 자유와 평등적 가치관이 시작된다.

 




3. 갈라르호른의 모순

갈라르호른은 지구방위와 우주평화를 핑계로 아주 오랫동안 많은 권력과 이권을 누리고 있었다. 갈라르호른에게도 건담프레임이 존재했고, 아리아식이 본래 철화단의 소년병이 아니라 갈라르호른의 기술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들이 건담을 이야기할 때는 지구평화가 위기에 빠지고, 사람들이 고통 받을 때 등장하는 공포의 기체라고 말한다. 갈라르호른은 건담에 의해 만들어진 기관이고, 역사를 가진 무장집단이다. 그런데 <철혈의 오펀스>에서 오히려 그들은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여 인간이 가져야 할 기본 명제를 망각했다. 화성을 침공할 때 소년병들이 무참하게 죽은 점, 권력 투쟁, 쿠델리아의 지구 행에서 보인 행위들은 테러에 가까운 만행이었다.

 

화성 인근에 위치한 갈라르호른 조종사가 지구에 왔을 때, 지구 조종사들은 화성 조종사가 지구출생이 아니란 점에서 집단적으로 괴롭히는 장면도 나온다. 갈라르호른의 역사가 오히려 갈라르호른이 시작했던 이상을 반대로 가게 되었고, 여기서부터 마주침이 발생된다. 지구의 평화라는 이념, 안위라는 슬로건은 오히려 평화를 파괴하고 자유와 인권을 박탈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지구 근처에 위치한 인공 콜로니에서 노동자들은 쿠델리아와 철화단을 보고 그들이 자신들의 혁명을 위해 도우러 온 조력자로 착각하는 부분이 있다. 그들이 그런 무장봉기를 하려고 했던 이유는 태어날 때부터 자라고, 죽을 때까지 자신들은 여전히 같은 장소에 있어야 하고, 그 장소는 인간적 대우를 받을 수 없는 모순으로 가득했다.

 

이때 이들의 봉기를 뒤에서 조종하고, 오히려 이들을 반국가세력 내지 테러조직으로 내몰게 만들어 모조리 몰살당하는 비극을 보여준다. 결국 <철혈의 오펀스>는 거대한 세력 간의 다툼이란 거대서사의 일반적인 흐름을 벗어나 거대한 세력에 대항하는 약자들의 몸부림으로 이어진 것이다. 어떤 전쟁이나 혁명, 큰 사건이 일어날 때 그것은 운명적으로 일어나는 것보단 본래부터 일어날 수 있던 에너지가 잠재되었을 뿐이고, 그런 사건들이 일어나기 위한 도화선의 심지에 불이 붙지 않았을 뿐이다.

 

4. 철화단의 운명

철화단은 운명에 의해 쇠사슬로 묶여진 사람들이다. 태어날 때부터 가난함과 배고픔에 시달렸고,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빠져 나온 자들도 많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란 오로지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비정한 세계다. 갈라르호른의 침공에서 우연히 얻은 건담 발바토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건담은 위기에 빠진 세계를 구원하는 공포의 병기이다. 하지만 건담 발바토스 프레임은 갈라르호른이 가지고 있던 기체보다 성능이 뒤쳐진(제작년도가 상당히 오래된) 기체이다. 갈라르호른이 가지고 있는 다른 건담 프레임보다 더 건담의 원초적 요건을 갖춘 셈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우주의 쥐새끼들로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다. 이때 바로 쿠델리아가 등장하고, 쿠델리아는 부유한 집안의 아가씨로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어중간한 정보에서 쿠델리아는 지금의 현실을 바꾸자는 이상이 생긴다. 쿠델리아가 세상을 바꾸고 싶은 이유, 그녀가 혁명의 소녀가 되어야 했던 점은 그녀가 철화단의 소년병이 아니었기에 가능했다. 소년병들은 자신의 살 길을 원했지만, 그 길을 어떻게 찾아가야할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몰랐다. 오로지 올가의 명령에 따르고, 올가는 자신들의 고용주 쿠델리아의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

 

철화단을 결국 현실에서 갖은 박해와 억압을 당하는 피지배계층이고, 쿠델리아는 자신이 원래 지배계층임에도 불구하고, 아래로 향하는 이상주의자인 것이다. 그녀가 가진 이상은 분명 인간의 윤리적 가치로 본다면 옳은 것은 분명하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쿠델리아의 아버지는 자신을 갈라르호른에게 팔아넘기려 했고, 친구라고 믿었던 후미탄은 자신을 이용하려고 했던 자의 첩자였다. 몇 번이나 죽음의 위기를 맞이했고, 그녀는 자신이 몰랐던 잔혹한 현실, 슬픔과 고통 그리고 분노의 눈물을 흘리면서 진정한 의미로써 철보다 더 강한 마음을 가진 혁명의 소녀로 탄생한다.

 

그녀는 화성에 사는 사람만이 아니라 지구와 지구 밖의 다른 콜로니의 사람까지 비참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수많은 목숨이 자신에게 맡겨지고, 자신은 절망의 고통이란 이름을 가슴에 품고 희망의 씨앗이 되어야 했다. <건담>에서 쿠델리아의 영향으로 전투 장면보단 그녀의 발언과 정치적 행위에 상당한 시간에 할애되었다. 또한 쿠델리아와 철화단의 움직임이 단순히 그들만의 의지뿐만 아니라 뒤에서 이권을 노리는 자들 역시 움직이고 있었다. 갈라르호른은 부패했고, 그들은 세계 정치와 경제 이권에 많은 부분을 간섭했다. 갈라르호른의 배제는 단순히 인간불평등을 해소하는 길만이 아니라 시장경제에서 은밀히 움직이는 ‘보이지 않았던 손’까지도 움직인다.

 

어떤 큰 사건들은 누군가의 의지가 포함되어 있으나, 그것을 움직이게 되는 계기는 잠재된 에너지와 토대가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쿠델리아의 지구잠입은 어느 마카나이의 정치적 이익, 상회들의 경영이익, 갈라르호른의 부패, 화성인들과 사회적 약자의 분노가 충만한 상태가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도착한 것이다. 물론 쿠델리아가 움직이는 것 역시 그 임계점의 도달에서 본 잔혹한 현실을 각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대한 세계에 그녀는 뛰어들었고, 그곳에서 사투를 벌였던 것이다.

 

갈라르호른 입장에서 쿠델리아는 지구평화를 방해하고, 세계를 혼란으로 빠뜨리려고 하는 최악의 인물이고, 그들은 쿠델리아의 철화단, 심지어 무장봉기(무기를 일부러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을 보내주고, 거기에 때맞추어 토벌했던)를 하던 노동자까지 평화를 파괴하는 대상으로 봤다. 평화라는 것은 누군가의 입장, 누군가의 권력, 누군가의 이익에 의해 판도가 바뀐다. 만약 쿠델리아가 뒤에서 방송회선을 제대로 구하지 못했다면 쿠델리아와 철화단은 완벽한 테러리스트로 몰릴 뻔했다. 이미 갈라르호른은 언론까지 장악한 점에서 부패의 깊이가 매우 심각했다.

 

5. 탈 이데올로기의 이데올로기인 철화단과 쿠델리아

철화단의 소년병들은 대부분 어릴 때부터 제대로 된 생활을 하지 못한 고아와 노예였다. 그들은 폭력과 억압에 의해 강제로 노역과 전투를 해야 했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오직 현재 목숨을 바라보고 산다. 그들에게 내일이란 미래란 있을까? 인간에게 미래와 내일 그리고 희망이란 단어가 존재하지 않으면 살아도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다. <철혈의 오펀스> 후반으로 갈수록 철화단은 마치 광기에 젖은 짐승처럼 전장을 누빈다. 아직 사춘기도 들어가지 못한 어린 소년이 무기를 잡고, 적을 향하여 투쟁한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이때까지 자신들은 인간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단지 도구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나는 노예의 평화보다는 위험한 자유를 택할 것이다.”라는 명제는 생물학적인 인간이 아니라 사회적인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선택에서 어떤 이상이나 이념에 구애되지 않았다. 단지 나는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것이다. 1기 엔딩곡 ‘오펀스의 눈물’을 보면 매우 슬픈 멜로디와 반주가 들린다. 평화로운 넓은 들판에 건담 발바토스가 철화단 멤버들과 평화롭게 앉아있다. 살상병기가 평화의 상징이란 말은 참으로 아이러니다. 그러나 억압받는 자들이 자신들의 살 곳을 찾기 위해서는 현실의 부조리와 투쟁할 수밖에 없는 충돌이 일어난다.

 

갈라르호른이 말하는 질서와 평화라는 이데올리기, 갈라르호른의 모든 것을 거부하는 철화단, 그래서 철화단은 탈 이데올로기적인 모습으로 갈라르호른과 충돌한다. 문제는 여기서 쿠델리아는 탈 이데올로기화된 철화단의 이데올로기로 된다. 쿠델리아의 연설은 철화단이 현실에서 겪는 고통만 아니라 그 이상의 모든 것을 대변해준다. 철화단이 갈라르호른을 거부하여 저항해도 결국은 자신들이 살아간 사회라는 커뮤니티가 필요하다. 그 커뮤니티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길, 이상과 이념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 길은 너무 쉽지 않고 많은 것을 희생해야 했다.

 

<철혈의 오펀스> 오프닝에서 쿠델리아가 심각하게 망가진 건담 발바토스의 모습을 보고 있다. 1기 마지막에서 건담 발바토스는 자신의 부하를 견디지 못해 심하게 파손되고, 조종사 미카는 눈 하나를 잃고 팔 하나가 정상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그들이 철화단이란 이름으로 영원히 꽃이 지지 않은 강한 철이 되어야 했던 이유는 오직 그 길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탈 이데올리기의 한계점은 저항의 시작이 되나, 한 번 튀어나간 이상 다시 선로를 찾지 못하면 증오의 광기로 얼룩져 결국 마지막에 파멸하고 만다. 부조리한 거대서사에 대항하나, 결국 자신들 역시 거대서사라는 사회로 들어오게 된다. 단지 그곳에서 갈라르호른처럼 부패하지 않고, 계속 그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은 갈라르호른처럼 자신만의 역사에 갇히지 않은 채 자신들의 처음 모습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인간 스스로의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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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6-03-29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언제나 이런 책들 읽어보게 될지...
열심히 노력해 보겠습니다. ^^

만화애니비평 2016-03-30 09:12   좋아요 0 | URL
저 때문에 북다이제스터님, 북 과식이 되겠습니다!!!! 어허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