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례탑 1 - 고독한 영웅의 시간 여행기 , 완전판
노미영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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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살례탑은 최후의 반전과 반전을 기다리는 극적인 플롯을 담은 작품이다. 여기서 살례탑은 몽골군 장수 이름 중의 하나인 살례타이라는 사람이다. 배경은 고려시대로 하여 우리나라가 몽골군 즉 원나라와 전쟁을 펼치면서 일어나는 일들로 통해 역사적인 상황과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하나의 역사극적인 만화로 제작하였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소년은 사실 집안에서 가족과의 관계가 좋지 않다. 부모님은 건재하시나 자신을 친아들처럼 여기기 보다는 마치 남처럼 대하는 어른이었다. 그래서 주인공 소년은 거기에 대해 매우 비뚤어진 마음을 가지게 된다. 어느날 소년은 수영장에 친구들과 놀러가면서 풀장에 수영하던 중에 이상한 귀신에게 발을 붙잡혀 자신도 모르는 낯선 세계로 공간이동을 하게 된다.

분명 자신이 사는 곳은 자기집이다. 게다가 부모님의 얼굴은 같다. 그런데 자신의 복장과 집안 모습. 그리고 주변 상황이 매우 다른 것이 아닌가? 소년은 자신이 처음엔 이상한 곳으로 와서 정신이 이상해진 것처럼 여겼으나 이제 자신이 현실세계가 아닌 과거로 타임워프한 것을 깨달고는 이제부터 벌어진 비극에 자신의 전생과 현생의 갈림길에 놓이게 된다.

소년은 사실 당시 그 고려시대에서는 살아있던 존재가 아니었다. 어느날 불의의 병으로 인해 의식을 잃은채 계속 잠만 든 병에 걸린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현대사회에서 고려시대에 그 소년이 그 자리에 누워있는 사람의 의식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그 소년이 눈을 뜨고 의식을 찾아 혼란해 하고 있을 때 고려와 몽골군의 전쟁이 일어난 때였다.

소년이 눈을 뜨고 자신의 원래세계에 있던 아버지와 똑같이 생긴 아버지는 사실 고려국의 용감하고 덕이 많은 대장군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아버지는 몽골군과 싸우면서 무참하게 살해당해 목까지 참수되어 고려의 비참함을 상기시키다. 게다가 어머니도 살해당했다. 게다가 소년을 풀장에서 발을 잡은 귀신은 소년이 살아가고 있는 고려시대에서는 자신의 가족이었다. 그녀도 역시 의식 불명이었으나 소년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무참히 몽골군에게 죽을때 그녀는 몽골군에게 겁탈을 당한다.

소년은 이런 몽골군에 대한 비인간적인 행동에 분노하여 몽골군과 싸운다. 이 소년은 이 시대로 넘어오기 전에 검도를 하던 사람이라 그 검도실력으로 적군을 죽여나가고 최후에 그 몽굴군 장수 중에서 가장 잔인하고 강력한 살례탑을 만난다. 그런데 이 살례탑이 상당히 잔인한 사람이라 자신의 부모님들을 이렇게 무참하게 살해당한 것도 다 살례탑의 폭력적인 행위었다. 소년은 마지막으로 살례탑과 마주하면서 깜짝 놀라게 된다. 왜냐하면 살례탑이 자신과 똑같이 생겼다는 것이다. 소년은 살례탑이 자신의 원래 전생임을 느끼고 과거의 업보다 다시 환생한 현대사회에서 다시 돌아온 것을 깨달게 된다.

그리고 자신은 살례탑을 유인하여 살례탑에게 목을 베이고, 살례탑은 고려의병장인 김경손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소년은 다시 눈을 뜨니 원래의 현실로 돌아와있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냉정하고 쌀쌀맞은 부모님이 왠일로 친절하게 변해 있었다.

그리고 모든 문제를 해결한 소년에게 한가지 아쉬움이 뒤따랐다. 당시 소년이 몽골군과 싸울때 몽골국의 공주와 비극의 사랑에 빠진 것이다. 다른 것은 모두 해결되어 가족과의 화해라는 제의적인 문제도 해결했다. 그러나 소년이 구해주고 소년을 구해주던 몽골공주와의 재회는 현대사회에서 이룰수 없게 되었다.

과거와 현재의 업보와 미련 그리고 거기에 대한 복수와 한풀이를 살례탑이란 만화에서 보여주었다. 하지만 소년은 타인의 한을 자신의 희생으로 하여금 승화했지만, 자신 속의 있는 한은 그대로 거기에 나두고 왔다. 인간이 가진 한이란 무엇일까? 그것이 설령 몇백년 전 그 누군가라도 혹은 자신의 무의식 속에 각인된 옛날 기억이라도 남아있는 미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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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자매 이야기 1
카즈토 이즈미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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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빈곤자매 이야기 쉽게 풀어쓰면 가난한 자매의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어느 소외된 계층을 관찰하고 살펴보는 잔잔하면서 슬픈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일본 어느 마을에 사는 2자매의 일상을 다룬 것으로 별 보잘 것 없이는 사람들이나 알고보면 그들은 우리의 이웃이고 친구들이고 세상에 그런 사람들은 수없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단지 만화애니메이션이란 가상의 이야기이지만 그 속에는 세상에 돌아가는 이야기들이 얼마든지 넘치고 넘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빈곤자매는 그런 이야기 속에서 이 사회에서 아무런 힘이 없는 사람들을 다룬다.

이미 어린나이에 부모님 없이 소녀가장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하는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배달일을하고 배달일을 마치면 집에 와서 밥만들고 도시락을 싸는 언니, 그리고 그 언니를 우산삼아 보호받는 어린 여동생, 우리는 부모없이 지내는 소녀 혹은 소년가장들의 슬픈 이야기들을 여기서 그대로 느낄 수 있다.

특히 비가 오면 지붕에서 빗물이 스며들어올 정도로 누추한 집이나, 언니는 배달로 벌은 돈으로도 한달 월세조차 맞추기가 어렵다. 그리고 하루 세번 식사조차도 쌀과 반찬으로 인해 고민한다. 우리는 밥 한번 먹고 말고의 차이는 그저 선택이나 이들에겐 생존이 달려 있었다.

요새 이 작품이 갑자기 생각나는 이유가 뭘까? 만화애니메이션을 대해 사람들은 흔히 세상과 동떨어진 것이라 하지만 사실 그러할까? 최근 뉴스에서 급식을 계속 제공하는가 마는가, 대학교 등록금과 수업료가 올라가니 마니, 공공물가가 오르니 마니라는 뉴스를 계속 접한다.

물론 시대가 흐르면 그것에 맞추어가야 하는 것이 인간이나 문제는 세상 모든 사람이 맞추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구는 그렇게 경제적 부담율이 올라가도 별 걱정없이 살아갈 사람도 있으나 누구는 전기세나 수도세가 조금이라도 올라가면 무서운 듯이 떠는 사람도 있다.

이 가난하고 소외된 2자매도 그런 세상의 각박하고 삭막한 현실 속에 하루하루를 힘겹게 보내고 있다. 하루 벌어 꼬박꼬박 돈은 받지 못하면 언제 집에서 내치거나 밥도 못먹는 최악의 상황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는 이 작품으로 통해 세상에 일어나는 어떤 일들을 봐야 하는 것일까?

최근 뉴스에 보니 한달에 75만원 용역하시는 아주머니와 할머니들, 게다가 1끼 식사비가 300원이나 400원 그런 분들이 전국에 수십만명이고 그렇게 같이 살아가는 가족이 수십만명에 수백만명이 이를 것이다. 가난은 죄가 아니나 가난으로 인해 죄인처럼 살아가야 하는 굴레, 왠지 이 작품의 2소녀의 이야기가 간절하게 느끼는 것은 무얼까?

그런다고 모든 것이 삭막하다 해서 따듯한 온정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렇게 안타깝게 서로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우리의 자화상이 슬픈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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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방진 천사 1
히로유키 니시모리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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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방진 천사는 개인적으로 내가 매우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다. 작가명은 니시모리 히데유키 초기작품으로 "오늘부터 우리는"라는 것으로 다소 코믹적인 요소에 학원물로 지금도 계속 꾸준히 작가활동을 보이고 있다.

니시모리 히데유키 작가 작품 대부분 보면 주로 고등학생이 주인공이란 사실과 그 주인공들이 주로 싸우는 일들이 나온다는 점이다. 물론 그런 부분에 대해 다소 폭력적인 면이 부각되지 않을 수가 없으나 건방진 천사로 넘어오면서 폭력적인 상황이 연출되더라도 그 자체가 나쁘게 될 수만은 없다. 

이 작품 주인공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내용이나 가치가 그렇게 허무하게 넘어갈 내용이 아니라는 점이다. 건방진 천사에서 이 건방지다는 천사는 바로 아마츠카 메구미라는 고등학생이다. 그녀는 아주 완별한 외모와 두뇌, 게다가 마음씨도 매우 강하다. 게다가 메구미는 집이 부자라서 어느 그 누구라도 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완벽한 여고생에게는 다른 누구에게 털어놓지 못할 고민이 있다. 바로 자신이 원래 남자인데, 나쁜 마법사의 주문으로 인해 자기가 여자가 된 것과 그 여자가 된 사실은 자신과 자신의 친구인 미키만이 알고 있다는 것이다.

 완벽한 여자의 모습인 메구미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여자로 취급하는 것을 싫고 남자로 인정해달라는 사실이 매우 바보처럼 보이나, 사실 이것은 자신의 정체성과 사회적인 갈등까지 연결될 수 있다고 본다.

 건방진 천사에서는 사회적인 통속이 잘 보인다. 여자아이는 무조건 이러야 해! 여자는 이렇게 하면 안되라는 대사나 상황이 묘사된다. 특히 메구미의 친구인 미키가 자신의 의지가 아닌 집안사정으로 원하지 않은 결혼을 강요받을 때는 일본이란 사회가 아직까지 여성에 대한 권력적인 부분을 은근히 제시한다.

 그렇게 사회적인 권력의 희생자가 되버린 미키는 행복 대신 살아있는 인형으로 살아갈 운명에서 메구미와 메구미 친구들의 작전으로 그 결혼식은 무산되고 미키는 다시 학교로 돌아간다. 하지만 여전히 미키를 노리는 상대 남자는 계속 미키를 납치 하려하고 미키의 친구들을 위협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 메구미와 메구미의 친구들 사이에서 진짜 강한 것이 무엇인지 진짜 남자는 무엇인지 우리에게 슬그머니 질문을 유도한다. 메구미에게는 4명의 남자친구들이 생긴다. 바보같은 소가, 어리숙한 이치로, 변태같은 야스다. 무사같은 코바야시이다.

 어느 누구를 봐도 남자같은 사람이다. 소가는 바보같아서 남자다우며, 이치로는 너무 평범하여 남자다우며, 야스다는 뭔가 변태적인 부분에서 남자다우며, 코바야시는 신사적이면서도 강한 마음을 가져서 남자답다. 어느 누구도 남자라고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메구미는 자신이 남자라는 생각으로 같이 우정과 모험을 나눈다.

 그러면서 자신에 대한 존재감과 정체성을 찾아가는 일종의 성장물인 트렌스 섹슈얼(TS) 작품인 것이다. 그러면서 친구는 과연 무엇인가? 진정한 우정은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에게 질문한다. 이 작품 최종장에 가면 메구미는 본래 여자이고, 고등학교 시절에 만난 소가는 어린 시절에 만났던 사람이다.

 메구미는 어린 시절 개구쟁이였으나 자신이 여자라는 점에서 또래 남자아이들부터 무시당하는 것이 매우 싫어했다. 그래서 자신에게 시비거는 남자아이들을 모조리 혼내주었다. 어느날 메구미는 남자아이가 아닌 어른들에게도 창피주는 바람에 큰 봉변을 당한다. 그 나쁜 어른들이 건물 옥상에서 유리파편을 메구미에게 던진 것이다.

이때 메구미에게 혼난 남자아이 중의 하나인 소가가 메구미를 보호하며 유리파편을 막아준다. 대신 소가는 얼굴에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심한 출혈로 병원에 실려간다. 이때 소가가 메구미에게 이야기한 한마디로 인해 메구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굴욕을 당한다. 그리고 자신이 남자가 되지 못한 점을 분하게 생각했고, 그때 마술사를 만나 자신이 여자지만 남자가 되었다는 최면에 걸린 것이다.

 작품 마지막 마법의 최면이 깨어지고 메구미는 다시 예전의 기억을 찾지만, 그 부분이 약간 재미있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남녀 사이에서 왕자가 공주에게 키스를 하여 마법이 풀린다면 여기서는 공주가 왕자(왕자가 아닌 일반 건달이지만)에게 키스하여 마법이 풀린다. 기존에 있던 수동적인 여자아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능동적인 여자아이로 묘사된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메구미와 메구미의 남자친구 4명이 펼치는 남자다움에서 최종승자는 메구미가 된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남성 안에 완벽한 여성성인 아니마와 여성 안에 완벽한 남성성인 아니무스에서 메구미는 과연 어떤 존재일까? 겉으로는 여자지만 그 메구미는 세상 어떤 남자보다 더 남자다운 사람인 점은 분명하다는 사실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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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발리에 1
우부카타 토우 지음 / 북박스(랜덤하우스중앙)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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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처음에 슈발리에라는 작품을 잘 몰랐습니다. 단지 예전에 프랑스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있다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제가 아는 분이 이번 서코에서 슈발리에를 한다고 하길래 한번 날잡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았습니다. 슈발리에라는 작품은 루이 15세의 배경으로 프랑스 전제왕권이 한참 무릇익을 시절에 있었던 가상의 사건입니다. 그런 점에서 역사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보면서 저는 감상해 보았습니다.

우선 슈발리에 서사구조에서 주인공 데온 드 보몽은 자신이 그렇게도 사랑하고 존경하는 누나가 시체가 되어 강가에 떠내려옵니다. 게다가 그 시체는 수은으로 중독되어 더 이상 부패하지 못해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누나에 대한 강한 사랑을 가진 데온은 누나의 죽음과 그리고 뒤에 가려진 배후와 음모를 밝혀내기 위해 다른 동료들과 같이 러시아, 독일, 영국을 돌아다니면 모험을 합니다.

작품 구조상 비극 플롯이 많이 들어간 작품이라 죽음, 배신, 이별, 추격, 도망, 쟁취 등등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가장 갈등감과 분노, 슬픔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작품을 보면서 그런 극적으로 가장 심하게 느낀 부분은 바로 배신입니다. 배신이 참 무섭죠. 자신이 믿고 있던 인간에 배신을 당하는 만큼 슬프고 화가나고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롭기 때문입니다.

그런 배신과 음모, 죽음, 이별의 모든 기점은 바로 이 루이 15세가 살아가던 프랑스 전제정권입니다. 나라는 이미 왕족과 귀족의 횡포로 국민들은 배고프고 춥고 분노와 절망으로 살아가고 그에 반해 국민들을 억압하는 진정한 폭도는 잘먹고 잘자고 항상 부족한 것을 느끼지 못한채 살아갑니다. 보통 나라에서 정치적으로 불안하면 상대국가하고 전쟁이나 혹은 외교정치군사적인 마찰을 많이 빚어낸다고 합니다.

국민을 그렇게 상대적인 존재로부터 위협을 받게금 하여 자신들의 정치권력 정당화를 내세우기 때문이죠. 그런 점에서 루이 15세이 정치수단은 결코 바르지 않았습니다. 조금 스포일러적인 느낌은 강하지만 데온의 누나인 리아는 작품 내에서 억울하게 삶을 마감하는데, 그 삶을 마감하게 만든 사람은 다른 국가나 프랑스 반역세력이 아닌 리아가 충성했던 임금 루이 15세입니다. 루이 15세의 욕심과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권력자에 의해 억울하게 심장에 차가운 비수같은 칼에 찔리고 맙니다.

그 원인이 되는 사유는 이름하여 왕가의 시라는 비밀에 쌓인 도서입니다. 이 애니메이션에서는 시인이라는 인물이 나타나어 시를 외우면 그것이 하나의 마력주문으로 통해 상대방을 제압을 합니다. 여기서는 말로서 하는 시가 왜 중요할까요?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는 이렇게 적어놓았다고 합니다. "시는 인간에게 역사보다 철학적이다"라고요. 이 의미는 역사는 이미 지나가 개인의 이야기라면 시는 허구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야기로 지금 살아가는 인간에게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개연성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차후에 왕가의 시는 데몽의 동료인 로빈에 의해 민중의 시로 바뀌고 민중의 시는 1769년 프랑스혁명으로 이어집니다. 개인적으로 1968년 5월 프랑스에 일어난 68혁명에도 많은 감동받은 적이 있어서 그런 점에서 슈발리에가 나름 작품의 전달요소는 좋았다고 봅니다. 과거 묶은 썩은 정치를 물리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것으로 말이죠. 로빈이란 존재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청소년이고 새싹이기 때문이죠. 프랑스 혁명이 최종결론이고 프랑스의 새 미래를 그린 것이 슈발리에의 최종 목표이나 그래도 작품 내의 주인공은 데온과 리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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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만화비평의 선구자들 만화규장각지식총서 4
김성훈 지음 / 부천만화정보센터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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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글을 적고 있는 본인은 만화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오타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화애니메이션이란 문화를 그렇게 낮게 보는 것이 아니라 조금 다른 시점과 관점에서 보자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본인은 만화애니메이션도 영화, 연극, 문학소설과 동일하게 작품적인 가치를 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기존에 만화애니메이션을 본다는 것은 마치 봐서는 안될 것을 본다는 부정적인 관점보다는 만화애니메이션이라도 얼마든지 그 텍스트를 분석하면 명작 영화나 소설 못지 않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던 나에게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부분을 한국에서 오래전부터 예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놀라우면서 감격하게 되었다. 한국 만화 100년사에서 만화라는 것은 그저 애들이나 청소년들에게 공부방해하거나 혹은 어른들의 킬링타임용으로 사용되는 저급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소개해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본인이 만화애니메이션에 대한 비평공부를 하면서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시는 한창완교수님에 대한 존재에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며, 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애니메이션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시는 만화평론가 박인하 교수님도 있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현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 일부만 알고 있었지 그 시초와 과정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부청만화정보센터에서 구입한 한국 만화비평의 선구자에서는 본인이 알지 못하는 많은 만화비평가분들이 소개되어 있지 않은가?

한국 문학비평가의 대가인 故 김현 선생님으로 필두로 하여 본인이 제일 좋아하는 한창완 교수님과 여성주의 만화비평가이신 백정숙 선생까지 존재하였다. 만화비평가들이 이렇게 많이 존재하는지도 몰랐으며 그분들이 얼마나 꾸준히 열심히 노력하고 활동하는지도 몰랐던 점에서 새삼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본인이 중학교 시절에 "반갑다 논리야(1992), 논리야 고맙다(1993), 논리야 놀자(1994)" 연속 3편 시리즈를 내시던 위기철 선생님도 만화비평가라는 사실이다. 이제야 본인은 만화애니메이션에 대해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만화애니메이션은 결코 유치하거나 저속한 것만은 아니다라고.

단지 그 유치하고 저속하게 만든 것은 만화애니메이션이 아니라 그렇게 만들어버리는 사람들과 사회적인식이라는 점이다. 특히 제일 기억나는 대목은 한국 최초 만화비평의 창을 여신 김현 선생님의 명언이다. "만화는 대중 예술이 아니라 대중들의 예술"이란 것이다. 만화는 일반 글에 비해 정보전달력이 빠르고 쉬우며 모두가 이해하기 편리하게 되어 있다.

특히 만화는 미술이나 회화쪽으로 많은 연관이 깊은데, 본래 근현대에 도래하기 전에 많은 대중들은 글을 읽을 줄 몰랐다. 그래서 글을 읽을지도 쓸수도 없으니 그들이 남길 수 있는 언어적 수단은 오로지 그림이었다. 말을 할 수 있어도 말은 기록될 수 있는 녹음장치가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거나 존재하더라도 쉽게 대중들에게 보급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회화적인 기법이 많이 들어간 만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하기 좋은 하나의 매체이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의 한국이야 문맹의 해결이 잘 되어 있지만, 당시 자기 이름 석자조차도 쓰기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만화의 가치가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점이다.

그리고 만화는 그 표현력의 한계성이 없으므로 우리가 마음속으로 품은 생각이나 욕구를 얼마든지 그려낼 수 있다. 그렇게 그려진 작품은 대중들의 이야기와 생각을 그대로 내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독재정권과 언론탄압, 문화정책들은 만화산업에 부정적인 여파를 미쳤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시절이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의 암울한 만화문화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은 바르지 않다. 만화를 제대로 보고 살피고 이해함으로서 우리가 갖는 값어치를 얻으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바로 만화와 만화처럼 인식되는 애니메이션을 하나의 예술문화 범주로 넣는 것이 타당한 것이 아닐까?

예술과 철학의 나라인 프랑스에서 만화는 제9의 예술이고 영화(애니메이션은)는 제7의 예술이다. 우리 사회에서 그토록 멸시하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철학과 예술의 나라인 프랑스에서 하나의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그 안에 철학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부분을 인지할 만큼의 비평문화가 발달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만화애니메이션 문화의 올바른 정착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단순히 만화애니메이션을 많이 본다고 해서 그런 문화적인 부분이 성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만화애니메이션을 올바르게 보고 판단할 수 있는 역량을 성장하게 해야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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