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
최장집 지음 / 폴리테이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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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인간의 가치를 나타내는 것은 노동이라고 한다. 오로지 인간의 노동만이 없는 가치를 새롭게 나타낼 수 있는 하나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은 마르크스만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가치가 증명하는 것은 자신이 사회에서 하나의 필요성이 갖춘 존재로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은 정치적 내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볼 수 있는 점이다. 하지만 문제는 더 이상 그 노동이란 가치로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사회적 표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지난 과거 우리는 민주화를 위한 민주주의 운동을 했다. 하지만 정작 민주화를 이루었다고 생각해도 다른 민주주의는 그대로 소멸하는 점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주인이란 독재가 사라진 대신 그 자리엔 새로운 주인인 자본이 대체되었다. 노예는 평생 노예로 살 수만 없지만 난폭한 주인이 사라진 후에 자기의 몸을 갈기갈기 뜯어먹는 주인이 나타났다. 인간의 정신은 피폐하게 변해가고, 자신의 의지는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바로 그런 모습을 지닌 것이 오늘날의 젊은 청춘들이다.

 

88만원 세대라고 불리는 이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되어가고 있다. 자신의 목소리마저 잃어가고 있다. 정치적 참여권인 선거권도 강제가 아닌 강제로 빼앗기도 있다. 노동이라고 하면 한국에서는 왠지 모르게 낯설고 이질적인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이 모든 사회와 국가조직, 세계의 존립도 노동에서 시작된다. 혁명이 일어나도 반동이 일어나도 독재가 일어나도 민주화가 일어나도 그것 역시 노동에서 비롯된다. 그들의 노동 없이 차도 지나가지 못하고 신문도 인쇄하지 못하며 게다가 식사를 위한 요리조차 할 수 없다.

 

노동이 모든 것에서 시작된다. 자연에서 존재하는 인간에게 문화라는 공간을 주어지기 위해서는 오로지 노동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그 노동을 할 수 없는 존재는 더 이상 사회적 가치를 보여줄 수 없다. 심지어 노동을 해도 그 자가 아주 가난하고 불리한 위치에 있다면 그의 노동은 눈에 보이지 않은 노동이다. 살아있어도 살아있지 못한 것처럼 언제나 자기 인생에 큰 한탄과 세상에 대한 냉소와 회의감으로 가득한 그들은 호모 사케르가 된다. 그들은 큰 소원이다 대단한 포부는 없다.

 

그저 취업하여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사는 것이 목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삼포대라는 시대에 살아간다. 예전에 서거한 노무현 前 대통령도 경포대, 경제를 포기한 대통령이라고 했으나 그 이름과 달리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오히려 국민소득은 2만 달러를 돌파했다. 그런데도 경포대라고 오해와 왜곡이 그를 힘들게 하였고, 한편으로 그렇게 떠들어대지 않아도 그렇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의 삼포대였다. 취업과 결혼, 그리고 출산을 포기한 청춘들의 무리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입지에서 고통 받고 있으며, 절규하고 있다. 카드빚에 시달리며 부채의 늪에 빠져 사채까지 당긴다. 돈을 빌리지 않으려 해도 구원할 방도가 없다. 그저 죽음의 늪에 빠진 채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이렇게 소외된 이들에게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관용과 희망 그리고 인권을 주장할 수 있는가? 왜 우리에게는 자신의 인권을 누릴 권리조차도 제대로 발설할 수 없는 걸까? 길가에서 고된 몸으로 폐지와 고철을 줍는 노인네들, 밥을 굶는 노인과 고아들, 냉대한 눈빛으로 차별을 받는 외국인들, 그리고 옆에 있어도 존재하지 않는 장애인들, 이 모든 자들이 최장집의 눈에 들어오고 그들에 대한 마음을 순수하게 이 책에서 적어간다.

 

인간적 상처를 향하여 직접 보고 그들의 숨결을 담아낸 이 책에는 고고하고 현학적인 철학서적보다 더 훌륭한 가치가 숨어있다. 겉으로 이상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도 소중하나, 그 가치가 왜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동기는 매우 중요하다. 이 세상에 단 1명의 불행한 사람이 있으면 인간은 철학하기를 멈추면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불행한 사람들은 존재하고, 그들은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이웃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때까지 무조건 폭력의 독재만 없으면 해결될 줄 알았으나, 정작 이들에게 시선이 가지 않았다.

 

지난날 민주화 운동은 학생과 그 학생들이 대부분 엘리트계층이란 점에서 노동과 인권운동으로 크게 발달하지 못했다. 게다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는 서로 간의 위치를 차지하여 입장을 유지해야 하나, 발터 벤야민의 말처럼 자본주의국가에서 자유란 자본의 크기에 비례해버렸다. 따라서 노동조차 박탈당한 자들에겐 삶의 생계를 위협당하니 그들에게 더 이상 자유란 없다. 삶이란 이름이 오히려 지옥과 같은 악몽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모든 정치인들은 이구동성으로 경제민주화, 서민안정, 모두가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슬로건은 왜 이리도 내 귀청을 찢어놓는지 모르겠다. 정말 그들이 삶에 대한 울부짖음을 토할 때 외면하고, 때로는 폭력과 억압으로 격리했다. 그런 사람에 대해 최장집은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느낀다. 인간에게 타인에 대한 이해가 사고만으로 판단하는 것과 실제 그 입장을 마주보며 공감하는 것이다.

 

물론 전자의 입장은 학문적인 판단에서 필요하겠지만, 인간이 인간 그 자체를 구하는 것에서는 이성적인 학문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이타적이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합리성을 강조한다. 문제는 점점 합리성이 사회적 격차를 만들고, 그것으로 인해 사회적인 문제가 피드백이 된다. 젊은 청춘들이 꿈을 잃자 이미 노령화가 되고, 출산율이 저하된다. 노인들은 노인이 처한 운명처럼 굶주림, 질병, 가난, 외로움이 허덕이고, 젊은이들은 가난, 절망, 회의, 냉소들로 좌절한다.

 

이것이 계속 쌓이고 쌓이면 우리 사회는 큰 암흑을 형성할지 모른다. 최근에 일어나는 강력범죄와 흉악범들, 그들의 속사정을 알고 보면 저렇게 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 보이나, 계속하여 제2의 제3의 그들이 반복된다.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까? 현실에 아무런 희망도 없이 포기한 그들의 허무함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에는 그들의 사회적 고립을 보여준다. 이들에게 노동이란 삶의 여유와 목적을 찾게 한다. 그러나 그 주어지는 노동도 이들을 괴롭힌다. 하청 업체에 근무한 사람이 10년 동안 7번 회사가 교체된 것도 모르고 비정규직들은 전체 종사자의 반을 넘어가는 수준인데도 오히려 가속화되는 점에서 말이다.

 

예전에는 나만 우리만 잘 살아보자는 말이 통용되었다고 하나, 이제는 그것이 통하지 않은 사회적 현실에 우리는 직면했다. 그리고 그 현실에 우리가 아닌 우리들의 미래까지 같이 수반되어 간다. 우리는 이 시련을 어떻게 넘어가야 할 것인가? 이들에게 인간으로서 살아갈 권리란 무엇인지 우리는 계속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통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길을 만들어야 한다. 멀고도 험하나 조금씩 한 발 나아가면 상처로 가득한 그들에게 맑은 미소로 세상에 빛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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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 - 대화 루소전집 3
장 자크 루소 지음, 진인혜 옮김 / 책세상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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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대화>를 읽어보면서 나는 이토록 자신 안의 자신을 분리하여 변증법적인 논리와 이성, 경험으로 대화하는 점에서 매우 놀라웠다. 마치 이것은 플라톤이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하여 각각의 사회지도인사와 지식인 그리고 많은 그리스 시민들과 대화한 것보다 더 철저한 대화라고 생각했다. 플라톤의 대화록에서는 상당히 이상론적인 인간상, 즉 인간의 가치와 진리란 idea에 있기에 그 idea란 현실에 존재하지 않은 하나의 이상세계이기에 우리는 그 이상세계에 다다를 수 있는 철학(군주)적 실천이 필요한 것이라면, 루소는 이상이 존재하나 지금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어도 언젠가는 해야 하는 실천적 과제로 삼았다는 점이 특이하다.

 

루소가 왜 그렇게도 3장의 구분으로 자신을 비판하는 대화록을 적었는가? 그것도 자신은 자신이 아닌 자의 자신을 내놓아서 본래의 이름인 “Jean Jacques”에서 Jacques의 'c'자를 제외하여 “Jean Jaques”라고 명명했다. 루소라는 이름이 프랑스인을 만나 장 자크의 약자인 J.J. 이니셜로 대체했다. 그 J.J.는 장 자크의 이니셜이기도 하나, 한편으로 루소라는 본인이기도 하나 아니기도 했다. 어느 한 프랑스 신사 분을 만난 루소는 장 자크라는 인물에 대해 서로간의 판단력과 이성으로서 대조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본래 루소는 프랑스인이 아니라 스위스 제네바에서 태어난 시민이었다. 그는 프랑스인이 아니지만, 어떻게 프랑스인에게 그렇게 큰 영향을 주었을까? 그의 천재적 기질인지 아니면 끊임없는 진보적인 정신력에서 비롯한 것인지도 모르나, 그가 살던 시절은 그에게 철저한 삶이었다. 예전에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잠시 그의 사적인 내용을 들었는데, 그는 프랑스에서 추방되고, 국경을 지나칠 경우 체포령이 동원되고, 심지어 이 서적에서 보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를 외톨이로 만들어버렸다.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는 1772년부터 1776년까지라는 4년이란 시간을 모아 정리한 도서이다. 게다가 이 서적을 저술한 뒤에 1778년까지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이란 도서를 미완으로 남긴 채 서거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1778년으로 실존적 존재로서 끝났으나, 오히려 그 다음해부터는 그의 존재는 실존을 넘어 모든 것을 점화점이 되었다. 1789년 프랑스 파리에서 바스티유감옥이 무너지고, 그 후에 루이16세와 마리 앙투와네트의 목이 단두대 아래 사라졌다.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다. 물론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언급하다시피 일반의지를 강조했지, 전체의지를 강조하지 않았다. 그런 점은 분명히 루소의 일반의지라는 이성과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갈망이었다. 하지만 토크빌의 <앙시앵레짐과 프랑스혁명>에서는 프랑스혁명의 무력적 주축인 파리사람들은 전체주의적인 존재였고, 토크빌이 지적한데로 전체주의적 민주주의였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은 그저 폭력에 의해 하나의 전체주의로 변질되었다. 루소는 그것을 우려했지만, 결국 그래 되었다.

 

로베스피에르가 혁명 이후 공포정치를 하면서 그의 손에 보인 도서는 오직 1권이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사회교과서나 세계사나 또는 정치사에서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프랑스혁명은 피해갈 수 없는 그림자가 되었다. 지금이야 루소라면 당연히 프랑스혁명의 정신적 지주이라는 점과 민주주의, 자유주의, 평등, 인권 등 수많은 미사어구에서 등장하는 주인공이다. 그러나 정작 그 주인공은 그런 세계를 당시 그가 살던 세계에서는 실현이 불가능한 것을 알고 있었다는 점과 오히려 그는 자신의 사상으로 인해 온갖 협박과 음해, 모함, 고독, 허무함으로 가득했다.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에서 루소가 장 자크에 대해 논하면서 어느 프랑스인과 조우한다. 프랑스라는 나라가 지금에서 보면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라는 세계적인 정치, 철학, 문학, 사상, 정신분석학 등 다양한 학문을 발전시켰으나, 루소가 살던 시절의 프랑스는 정말 감정적이고, 폭력적이고, 위험천만한 세계였다. 루소가 자신에게 처한 현실을 통곡하면서 적어내려간 사실 중에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루소가 그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고 악인이란 점이다.

 

그러나 그 악인에게 강도나 살인범과 같은 흉악범조차도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도 루소라는 인물이 매우 위험하기에 다가올 수 없었다는 점이고, 그런다고 일반 프랑스 국민들 역시 루소에게 대하는 태도는 잔혹하기 짝이 없다. 일부로 그를 칭찬하는 척하면서 조롱을 날리는 부분들은 루소 자신에게 하나의 일상이 되었다. 상처를 받았어도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그의 정신은 광기에 젖을 수밖에 없었는가?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를 읽고 나면 왠지 모르게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가 생각난다.

 

광인이라고 하여 모두가 미친 것이 아니라 가끔 일반인들이 생각할 수 없는 사상과 사유를 늘어놓을 수 있는 광인이란 존재다. 루소는 그런 존재에 가깝다. 그가 광인처럼 취급당하고 혹은 바보, 거짓말쟁이, 사기꾼, 위선자로 취급당한 점은 그가 광인이기 때문이다.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를 보면서 루소는 당대 사람들에게 모두에게 외면당한다. 그의 서적은 그가 저술한 것이 아니라는 것부터 시작해, 그의 서적을 왜곡하여 이상한 내용으로 이어지게 했으며, 사실과 무근한 내용이 만년설에서 굴러가는 눈처럼 계속 커져만 갔다.

 

심지어 그에게 글을 쓸 수 있는 기회조차 빼앗으려고 했다. 그의 집에 있는 잉크가 검은색이 아닌 거의 투명에 가깝게 했으며, 흰 종이에 흰 글씨로 적을 정도로 그에게 집필할 자유마저 박탈한다. 이때까지 그가 해온 업적도 부정하다가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조롱거리로 만들기로 작정했다. 더욱 잔인한 짓은 루소를 매우 싫어한 프랑스 관리가 그의 집 앞에 군악대를 보내어 연주를 하여 마치 위대한 사람에게 군인들의 열병 행사하는 것처럼 보여 루소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프랑스사람들은 그를 궁지로 몰아넣고, 이번에 그가 불쌍하다면 온정을 보낸 척하나 사실은 그가 마치 불쌍하여 거지에게 동정하는 듯이 대했다. 그의 자존심을 깔아뭉개고, 그를 더 이상 도망칠 공간을 만들어주지 못했다. 루소가 체포령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치면서 빚만 늘어나고, 차후에는 자신을 제발 조용히 어디에 가두어 달라고 할 정도였다. 덫이 널린 잔디밭에 토끼 1마리를 몰아넣고 비웃는 사냥꾼처럼 루소는 최악의 상황에 매달린 상태에서 이 글을 적었다.

 

그가 보내온 지난 세월에서 이제 60대의 노인이 되어 도망칠 기력도 없고 항의할 기력도 없는 상태에서 루소에게 남은 것은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고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에게 고할 수밖에 없었다. 루소는 이 서적을 완성 후에 복사본을 나누어주며 그의 억울함을 단 소수의 사람이라도 좋으니 알아달라고 했으나, 그것마저 무산되었다. 그러나 운명의 아이러니인지 역사의 후자에서 루소는 민주자유주의의 선구자로 되었다. 왜 모든 선구자들은 비참한 최후를 가는 것인가? 생각하면 플라톤 역시 그런 피해자 중에 한 명일 것이다. 그가 무척이나 존경한 소크라테스가 이성과 논리를 중시했어도 그리스사회는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에게 독백을 들게 했다.

 

플라톤이 자기 서적에 주인공이 자신보다 소크라테스를 내세우는 것은 아마 그 죽음에 대한 정신적 충격이며, 지성과 논리를 중시하지 않고 idea적 가치를 중시하지 않은 당시 사회에 대한 소원함이 묻어있을 것이다. 그래도 플라톤은 자신에 대해 가장 반대되면서 가장 자신과 동등한 입장이 된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제자가 있었으나, 루소는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한다. 실제 그런 일이 있었던 점으로 루소의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는 플라톤 이상으로 철저한 문장일 수밖에 없다.

 

당장 눈앞의 현실에서 그 고통과 상실감으로 메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 스스로 심판하여 가상의 프랑스인, 그 중에 프랑스인 중에서 신사적인 인물을 내세웠다. 루소가 자신에 대한 반대적 자신의 의견들을 보면, 여태까지 프랑스인들이 루소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그런 이성적 사고와 논리적 사유를 지닌 자조차도 루소에 대해 알아간다는 변증법적 대화에서도 현실의 두려움으로 앞에 나가 루소에 대한 오해와 왜곡을 풀어줄 수 없다는 점을 토로한다.

 

그렇지만 정말 놀라운 사실은 루소라는 인물이 장 자크를 직접 만나고 난 후에 프랑스인에게 말하는 대목이다. 장 자크는 많은 조롱과 협박, 위협, 상실감에 젖어있어도 그것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쉽게 화를 내는 만큼 빨리 잊어버리고, 억지로 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인이기 바란다는 점이다. 얼굴은 주름으로 가득해도 그의 눈매는 어느 젊은이들에게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빛나고 있다는 것이다. 항상 누군가에게 자신의 심정을 나누고 싶었으나 아무도 그렇게 해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마 장 자크가 조금 뒤에 태어나 더 오래 살아 독일 쾨니히베르크에 살던 칸트와 만났다면 좋은 토론상대라도 되었을 테지만, 역사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단지 칸트의 <판단력비판>에서 칸트가 미에 대한 기준의 기준을 정하면서 루소가 사치품보다 가난한 자들에게 선처를 바라는 것에 대해 동의한 점에서 당시 유럽에서 프랑스는 매우 지적이지 못했던 것 같았다. 심지어 루소 스스로가 유럽에서 프랑스는 야만을 유지한 나라로 지정한다. 서적을 읽다보면 <에밀>과 <사회계약론> 등의 서적과 편지에서 루소는 프랑스의 의사를 매우 비판했다.

 

그들은 환자에게 어차피 인간에게 1번의 죽음을 있다는 점을 알리는 것보다는 그 죽음에 대한 공포로 환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는 점이다. 아이에 대한 교육에서 유모에 대한 선정은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중세유럽 사회에서 부인들은 자신의 젖을 아이에게 먹이지 않고, 유모에게 돌보게 했다는 점에서 여성의 가슴이 페미니스트 인문학자의 관점에서 생명의 젖줄보다는 철저하게 가리게 했다는 점이다. 단지 그 가슴을 공개되는 것은 오직 그 부인의 주인인 남편에게만 허락된 점이다.

 

<애밀>이 비단 저런 부분만 지적한 것만 아니고, 루소가 유모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인식만을 비판한 것만은 아니나, 프랑스에서는 남녀노소를 불구하도 모두 자신들의 벽에 갇힌 셈이었다. 그러나 그런 벽에 갇혀있는 프랑스 안에서 갇혀있어야 할 사람은 프랑스인들이 아니라 오직 루소였다. 루소가 비정상인이라는 것이 프랑스의 당시 시대적 현실이다. 그런 오해와 편파적 관점이 루소에게 자신에 대한 변명을 떠나 자신에 대한 비판을 프랑스인들이 아니라 오직 자신만이 가능하다는 실존적인 대화가 이루어진 셈이다.

 

다소 자기중심적 사고라고 볼 수 있으나, 역사적 사실과 루소의 자서전 성향이 담긴 이 서적을 비교하면 충분히 그의 입장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역사 속에서 큰 전환이 되는 사건을 만든 인물들을 보면 대체로 그 시대에 억압받거나 탄압당하거나 혹은 목숨까지 잃는 경우가 허다하다. 마르크스는 독일에서 영국으로 추방되고, 트로츠키는 러시아에서 멕시코로 추방되어 스탈린에게 살해당한다. 그리고 그 이전의 루소는 프랑스 안에서 아무런 몸짓도 할 수 없이 모든 프랑스인들을 피해 도망치는 존재가 되었다. 그는 살아있는데도 살아있지 못한 호모 사케르란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나 단지 루소를 보면서 우리는 루소의 비참한 현실과 답답한 지식인의 고독만 볼 것인가? 악인이 정말 악인이었는지? 아니면 선인이 선인이었는지? 루소가 장 자크에 대한 대화에서 프랑스인에게 묻는다. 그를 악인이라고 보면 그를 악인이라고 하더라도 그에 대하 악의를 품고 단 혼자인 그를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든 것도 정당한 것인지 말이다. 지금 이 서평을 적는 나라는 인물은 다소 현실에 대한 회의적이고 냉소적인 부분이 있다. 악인은 정말 악인이었기에 악인인가? 아니면 저항조차 못하는 약자를 악인으로 몰고 가는가? 루소가 추구하는 일반의지에서 우리가 가져할 의지란 과연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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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계약론 펭귄클래식 86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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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크빌의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혁명>을 읽으면서 프랑스혁명이 장점보단 그 자체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원인을 나열했다. 그런데 중요한 부분은 장 자크 루소에 대한 부분이 매우 희박했다는 점이다. 프랑스혁명에서 주체자요, 또한 망가뜨리기 시작한 로베스피에르를 생각하자면, 그는 항상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들고 다녔다고 한다. 덕분에 지롱파와 귀족, 왕족들의 목은 단두대 아래 무참히도 몸에서 분리되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프랑스혁명의 촉진제에서 피할 수 없는 숙명을 가졌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분명히 민주주의 사회체계를 지닌 국가에서는 반드시 인용해야할 서적이다. 아마 헌법 내지 각종 법률이 루소,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에서 많은 부분을 가지고 왔다. 삼권분립 내지 자유와 평등, 인권과 자유 시민에 대한 부분에서 말이다. 프랑스혁명이 구한말 조선시대에서 군주제를 해체하는 직접적 요인이 되지 못했지만, 적어도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을 생각하면 피할 수 없다.

 

당시 3·1운동에서 민족주의자, 유학자, 사회주의자, 자유주의자 모두가 모여 선언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진정한 자유라는 것은 위와 같이 보수와 진보만이 아니라 이미 허물어진 구체제의 잔재인 전통의 역사마저 흡수한 것이다. 민족의 자유와 공화국민으로서 가져야 할 권리들은 모두 소유하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거기서 루소의 이론 역시 피하기 어려운 매력일 것이다. 프랑스혁명이 직접 우리에게 역사적인 여파를 전해주지 못해도 우리의 민주주의 사회체계에서 생각해보면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담긴 내용은 분명 민주자유주의사회에서 반드시 새길 필요가 있다.

 

그는 진정한 시민사회를 원했던 것이다. 그의 진정한 시민사회는 모든 것이 멈춘 정지가 아니라, 시민사회에서 그리고 시민사회가 이룩한 국가체계가 살아 움직이는 하나의 생명체로 나아가길 바란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자유가 숨 쉬는 민주주의는 우리가 흔히 바라는 평화롭기만 한 상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반대로 폴란드 왕의 로렌공작이 의회에서 발언했던 “나는 노예의 평화보다는 위험한 자유를 택할 것이다”라는 말은 상당히 깊은 맛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사회계약론> 3부의 ‘민주정치에 관하여’에서 나온 문구였다.

 

루소의 문장을 생각하면 어려운 말로 채워져 있기보다는 간략하면서 논리적인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마 그의 집필능력에서 당시 프랑스를 비롯한 수많은 왕국들이 그의 도서를 불태워 그의 사상을 부정하고, 그가 무슨 일을 벌이지 못하도록 수배령을 내릴 정도이니 루소가 당연히 프랑스혁명에 빚이 지게 했던 이유는 아마 그렇다고 본다. 토크빌이 비록 루소에 대해 언급을 크게 하지 않았으나, 프랑스혁명 이전의 지식인들은 혁명에 대해 준비했다면, 프랑스혁명 실행자들은 도시 노동자나 농민이었다.

 

후자들이 혁명을 이끌어갔다고 인정하더라도 그들에겐 루소란 존재가 과연 큰 존재였을까? 기실 프랑스혁명과 더불어 세계에서 놓칠 수 없는 혁명으로 러시아혁명이 있다. 러시아혁명에서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과 같은 인물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레닌 이전에 많은 혁명가들이 활동했으나, 결정적인 행동으로 본다면 1917년 2월 혁명과 동시에 11월 혁명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 혁명의 자리에 있기까지 레닌은 마르크스와 레닌이란 정신적 지주가 존재했다. 레닌과 많은 볼셰비키들은 마르크스주의였다.

 

물론 아쉽게도 스탈린의 집권 아래 소비에트는 마르크스의 가르침을 비우고, 그들이 절대로 동조해서 안 될 파시스트인 히틀러와 불가침동맹을 맺었다. 그런 점에서 루소와 마르크스는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나, 결국 그들의 가르침은 오래 가지 못한 채 독재자인 나폴레옹과 스탈린에게 전달되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지식인들의 의지보단 대중의 잠재적인 의식에 의해 침식당했다고 보면 되는 것이다. 프랑스혁명에서 당통의 죽음과 러시아혁명의 트로츠키의 추방은 역사의 반증을 드러낸다.

 

그렇다고 우리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멈출 수 없다. 루소는 지상의 완벽한 민주주의는 그리스에서 펼쳐졌다고 하나, 그것은 노예에게 받아온 착취로부터 가능했다. 노예가 그리스시민의 수배에 이르던 그 시절에서 근대로 접어드는 프랑스에서 노예제도는 합리적인 제도가 아니었다. 있어보았자 귀족이나 영주들의 농노정도만 있어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자신들의 노예를 없어진 만큼 자신이 노예가 되어야 했다. 주인이 없는 노예, 즉 자신의 판단력과 이성이 없는 충동에 의해 말이다.

 

생각하면 테르미도르반동 이전까지 로베스피에르와 일부 지식을 가진 자들만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프랑스 시민이 알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루소는 자신의 <사회계약론>에서 주석을 달고 있는 글을 보면 알다시피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난 것은 왕실의 사치도 있었지만, 행정 그 자체의 문제였다. 루소는 넓은 토지에 그만큼 어울리는 인원과 그 지역에 알맞은 직업이나 산업체계가 필요하다 보았다.

하지만 프랑스에선 농민들에게 지나친 세금과 황폐화되어가는 농촌이 있었다. 귀족과 귀족처럼 되어버린 부르주아는 권력을 공익이 아닌 사익에 투자하고 루소가 지적한 “좋지 않은 정부에서는 이 평등이 허울뿐이며 눈속임에 불과하다. 이를테면 그 평등은 가난한 자는 계속해서 가난 속에서 살게 하고 부자는 계속해서 침탈하게 하는데 이용될 뿐이다. 실제로, 법은 언제나 가진 자들에게 유익하고 못 가진 자들에게는 해롭기만 하다. 따라서 사회 상태는 인간들 모두가 어느 정도씩 갖고, 그들 가운데 누구도 지나치게 많이 갖지 않는 한 유익하다”

 

이 문구는 어떻게 보면 우리 사회의 모습과 닮아 있다. 약 250년 전에 적어 내려간 이 한권이 도서가 루소에겐 보편적 현상이고, 이런 모순을 타파하는 것이 일반의지로 연결되어야 할 점이다. 루소는 정치적 관점을 매우 잘 보았던 것 같다. 정치적 참여인 선거로 통해 대표되는 자와 그 대표를 뽑아내는 주권자의 비율이 늘어나면 날수록 주권자에게 돌아오는 권리나 혜택은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사실 토크빌의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혁명>에서 프랑스 왕정의 실수는 바로 지역자치기구의 저지이다.

 

지역자치기구를 중앙집권화하기 위해 많은 금액을 투여하고, 게다가 지사들을 임명하여 지역마다 통치하게 하여 행정력의 왜곡과 모순만 남겼다. 결국 지역사회는 그만큼 피폐하게 변해가고, 지역사회에서 자체적으로 처리하던 문제들은 중앙정부가 해결해야 하나 그 인원과 물자, 행정력은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루소는 바로 이 시민들의 정치적 참여에서 주권자로서 행정력을 행사하는 자로 하여금 감사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시민들이 직접 대표를 뽑고도 그들과 같이 시민사회를 만들어 도시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좁은 국가는 불가능하고, 땅의 규모나 국가적 체계가 클수록 필요했다. 즉 지방자치 기능은 토크빌이 주장하는 점과 많은 유사성이 있다는 점이다. 주권자 만 명에 대표자 1인과 주권자 10만 명에서 대표자 1인에서 주권자들이 후자로 가면 갈수록 대표자에 대한 접근성이 떨이지게 되며, 그 대표자는 10만 명에 대한 권력을 소지하게 되어 그만큼 공권력을 커지게 되는 점에서 민주주의사회에서 권력의 집중화는 바로 최악이란 사실을 알리는 것과 같다.

 

그것을 반하여 시민들로 하여금 피해를 주는 자에 대해 혹은 기타 범죄를 저지른 자에 대해 루소는 그들을 시민이 아니라고 한다. 시민이란 존재는 서로 간의 계약으로 통해 이루어진 하나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회계약을 하였기에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인권을 주장할 수 있으며, 그것에 대한 의무를 자발적으로 수행하여야 한다. 문제는 그 자발성의 여지에서 우리는 로마와 같이 시민들의 정치적 참여권을 주어야 하는 점이다. 로마시민들은 전쟁이 발발하면 스스로 칼과 창을 들고 전장을 향하여 달려간다.

 

시민들만 전쟁에 참전이 가능했기에 로마후기로 가면 시민들의 인구가 많이 줄어드는 문제가 생겼다. 하지만 시민들이란 존재들은 공화정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스스럼없이 대변하는 존재다. 가끔 우리는 민주주의국가에서 민주주의 역시 공화주의라는 공공선을 추구하는 것일까? 아니면 전제군주를 위한 참두제로 가고 있는 것일까? 라는 의문도 들기도 한다. 2012년 대통령 선거가 있다고 한다면 대통령과 그 밖의 조직 그리고 지식인들과 사회적 지각이 있다는 사람은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반드시 읽어봐야 생각한다.

 

오늘날 민주주의사회와 보편적 국민들의 정치권에서 루소의 영향은 막대하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체계에서 루소가 주장한 바는 무엇이며, 그것으로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볼 것인가? 물론 프랑스혁명의 자기이성적이라고 여기는 반이성적 행위는 폭력을 합리화하였다. 하지만 그 이전의 바스티유감옥과 같은 상징적인 구체제의 폭력 역시 합리화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결코 프랑스혁명이 부정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루소의 사상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나,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그가 행한 행동은 우리가 분명히 인정하고 배워야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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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사상 지도 - 마르크스에서 지제크까지, 눈으로 그려 보는 현대 철학
대안연구공동체 기획 / 부키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우선 나는 <20세기 사상지도>가 나온 점에서 상당한 기대감을 가졌다. 그 이유는 이때까지 국내에서 발간하는 사상철학 관련 도서 중에는 체계적인 구조로서 소개해주는 도서들이 턱 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철학의 역사 내지 개론 혹은 어느 철학자에 대한 연구나 그 철학자의 번역본은 꾸준히 나와도 어느 철학사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이나 혹은 구성원에 대한 전반적인 맥을 잡아 정리한 사례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물론 내가 제대로 읽지 않았거나 혹은 모르고 지나칠 수 있겠으나, 그나마 근현대 철학자 중심으로 철학, 미학, 사상으로 정리한 도서로는 진중권 교수의 현대미학 도서인 <숭고와 시뮬라크르>, 최근 한국 철학계에 급부상한 이택광 교수의 <인문좌파를 위한 가이드>, 연구모임 사회비판과 대안에서 공저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이란 도서였다. 그 전이나 혹은 최근까지 우리는 외국에서 수입한 도서를 번역한 점에서 최근 국내에도 학파의 체계나 혹은 사상의 연결성으로 통해 계보적인 구조를 결집하여 전반적인 흐름을 볼 수 있도록 한 점은 매우 긍정적인 부분이다.

 

 

예전에 구조주의에서 대표적인 인물로 소개한 서적인 우치다 타츠루의 <푸코, 바르트, 레비 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나 사단 마럽의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기다 겐 외 여러 일본학자들이 만든 <현대사상지도> 등을 읽으면서 우리나라 역시 이런 하나의 체계성을 가지고 집중적인 학자들에 대한 소개와 그 학자들에 대한 도서소개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가졌다.

 

 

물론 작고하신 최성일 선생님의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라는 서적도 있지만, 하나의 체계성을 지니기보다는 개인적 판단아래 선택했다는 점에서 학자들의 연계성이 약하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21세기 사상지도>는 국내 여러 학자들이 모여 집필했다는 점이고, 최근 번역 말고도 해외 지식인이 올 때마다 자리에 참석하거나 또는 자체적으로 강의나 세미나를 열어 한국의 인문에 많은 공헌을 하시는 진태원 교수의 집필했다는 점에서 기대가 되었다. 예전에 자크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과 에티엔 발리바르의 <정치체에 대한 권리>를 읽으면서 진태원 교수의 존재를 알았고, 최근에 여러 철학 내지 인문사회도서를 꾸준히 번역하신 점에서 <21세기 사상지도>의 발간이 기대될 수밖에 없었다.

 

 

책을 열어보는 순간 대부분은 근현대철학이 그렇듯이 비록 지금 나나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두 21세기에 존재하고 있다고 해도, 아직 20세기의 영역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으며, 그 20세기에 명성을 날린 철학자 역시 19세기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후설과 같은 현상학자들은 관념이나 인식이란 형이상학적인 영역에 크게 기여한 자로서 그에게 큰 영향을 준 철학자는 임마누엘 칸트였다. 칸트는 19세기가 아니라 18세기 인물에 더 가깝다. 최근 근대철학조차도 칸트의 영향력이 막대한 점으로 본다면 칸트의 철학은 철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물론 니체는 칸트를 비웃었고, 마르크스는 칸트의 논리적 분별력을 수용한 점에서 조금 다른 식으로 나가고 있었으나, 그래도 칸트의 사상은 형이상학이란 관념철학에서 지울 수 없는 존재임은 분명하다. 어째든 이런 20세기 사상에서 <20세기 사상지도>에서는 4명의 철학자를 거론한다. 그들은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니체, 지그문트 프로이트, 페르디낭 드 소쉬르였다. 그런 점에서 이 책 1장에서 4명의 사회학자, 철학자, 정신분석학자, 언어학자의 소개에서 (후기)구조주의로 넘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이 책에서는 레비 스트로스, 자크 라캉, 미셀 푸코, 삐에르 부르디외, 자크 데리다와 같은 프랑스 철학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었다. 비트겐슈타인이나, 후설, 배르그송 등과 같은 인식과 관념에서 메를로퐁티, 리오타르, 벤야민 등과 같이 문화적 영역에서 노동과 여가를 다룬 학자, 하이데거, 베버, 사르트르, 네그리 등과 같은 자아와 주체 그리고 사회를 다루는 학자까지 다루었다. 마지막은 욕망과 윤리의 이중적인 영역에서 라캉, 레비나스, 들뢰즈, 지젝 등과 같은 학자를 소개했다. 이 책에서는 (후기)구조주의, 프랑크푸르트학파, 독일관념철학으로 분리하기보다는 국경과 학파보다는 그 학자들이 추구하는 사상적 영역으로 정리하여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어느 학문에서의 1가지 테마를 설정하여 거기에 해당되는 철학자들의 담론과 그 철학자의 생애와 추구하던 가치 그리고 그 철학자들의 서적을 소개한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사상가들의 도서들이다. 보통 외국에서 번역한 도서를 보면 국내에서 찾기가 어렵거나 혹은 번역상의 문제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특히 프로이트로 다시 돌아가자고 주장하면서도 다시 새롭게 자신의 이론을 정립한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과 같은 경우를 보면 그의 도서인 에크리를 읽어야 한다고 한다.

 

 

문제는 라캉의 에크리를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 이해하기가 난해해지며, 에크리라는 도서는 읽히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도서란 점이다. 물론 국내에서 불어에 대한 번역이 난제로 겪는 것은 사실이나, 라캉은 불어권조차도 어려운 도서였다. 대신 라캉과 헤겔을 오가는 슬라보에 지젝에 의해 란 도서가 나올 정도이니 라캉의 도서는 정말 어려운 도서는 사실이다. 이 책에서 소개한 <자크 라캉 세미나 11번째 :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을 처음 접할 때는 읽기는 포기했고,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과 <정신분석입문>을 읽은 후에야 겨우 페이지를 넘길 수 있었다.

 

 

물론 다 읽어본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략적인 무엇을 의미하는지 약간의 이해만 가능했다. 그런 문제가 보인만큼 이 책에선 라캉에 대한 연구서적을 소개하는데, 해외 누가 저술하여 국내 어느 번역자에 의해 번역되고 출판사는 어디까지인지 소개한 점이다. 다른 사상가들까지 소개한 점에서 국내 인문학도나 혹은 인문학에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좋은 지침도서라는 점이다. 그 철학자 아무리 유명한들 우리는 그 철학자의 서적이 무엇이 나오고, 어떤 번역이 좋은지가 제대로 알 수 없다.

 

 

대부분 원전의 번역이 제대로 되지 않은 도서를 읽게 되면 그 의미를 전도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의 추천할만한 페이지는 1장부터 5장까지 각 장에 해당되는 사상가들이 등장하면 그 사상가가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는지가 소개되어 있다. 19세기 사상가들로부터 대부분 시작하는 점에서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소쉬르가 있는 것은 당연하나, 중간에 러셀, 프레게가 있으며, 자신도 4명의 사상가에게 받으면서 다른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준 인물로 레비 스트로스, 하이데거, 베리그송, 후설 등과 같은 인물이 있었다.

 

 

사상은 단절되기보단 후세들에 의해 새롭게 발전하거나 정립 혹은 다르게 해석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볼 때 <20세기 사상가>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가는 아마 마르크스인 것 같았다. <20세기 사상지도>라고 표지에 적으면서 부제로 -마르크스에서 지제크까지, 눈으로 그려보는 현대철학-이란 점에서 마르크스는 2장~5장까지 모두 등장한 유일한 사상가다. 사실 니체와 베르그송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질 들뢰즈도 그의 말년 마르크스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하고 싶다고 한다.

 

나도 평소 생각하고 있으나 세계적인 철학에서 마르크스의 영향은 21세기에도 유효한 점이다. 물론 니체와 프로이트 그리고 소쉬르도 마찬가지이나 마르크스는 21세기 세계경제위기에서 새롭게 대안 중에 하나라고 세계지식인들 여길 정도로 강한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때까지 플라톤주의에 의해 관념이 현실이 만들어내는 것보다 현실이 관념을 만들어가는 반플라톤적인 요소를 마르크스가 추구했기 때문이다. 물론 신의 죽음을 선포한 니체나 인간의 이성보다 무의식의 장을 열어놓은 프로이트의 기존 서구사회의 반론적인 행위는 20세기에 큰 영향을 주었고, 그것이 옳음이란 점을 부여하는 것은 세계 1차, 2차 대전으로 충분히 보았다.

 

 

생각해보면 대부분 <20세기 사상지도>에 등장한 사상가들은 2차 세계대전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으며, 특히 하이데거와 같은 나치와 협력한 점과 들뢰즈는 2차 대전으로 가족을 잃은 점, 메를로퐁티와 사르트르는 프랑스가 나치에 의해 점령당할 때 레지스탕스에서 활약하고, 튜링이란 과학자는 2차 대전에 암호해독으로 영국에 큰 도움을 준 점으로 보면 2차 대전은 피할 수 없는 20세기의 지난 얼굴이다. 얼마 전 작고한 영국 캠브리지 대학의 에릭 홉스봄이란 역사학자는 20세기를 <극단의 시대>이라고 한다면 21세기는 <폭력의 시대>이라고 한다.

 

 

지난 세계 대전으로 피로 물들은 20세기는 그야말로 폭력과 살인으로 무장한 시기였다면 21세기는 새롭게 밝은 미래로 갈 수 있을까 하나, 토크빌이 지적한데로 전체주의적 민주주의에 주인 없는 노예들이 주인이 되어버린 시기에 우리 사회를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인문학의 향기는 선택의 갈래보다는 우리가 추구해야할 가치관이라고 볼 수 있다. 아직 그런 담론조차도 부족한 우리사회에서 그것에 대한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물결을 전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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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의 역사 - 현대 프랑스 철학총서 11
미셸 푸꼬 지음 / 인간사랑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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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의 역사를 읽는 동안 나는 무슨 생각이 들었냐면 정말 광기라는 것이 광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그 광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어디까지 봐야 하는가? 설사 그 광기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 자체로 광인으로 분류되어 하나의 감시와 처벌이란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본다.

 

아니 사실은 본래 이 서적의 초반부터 파스칼의 재미있는 문구가 나온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광기에 걸려 있다. 따라서 미치지 않았다는 것은 아마도 미쳤다는 것의 또 다른 형태일 것이다” 그 뒤에 불세출의 문학소설가인 도스토예프스키의 작가일기에서 발췌한 문구인 “인간은 자신의 이웃을 감금함으로써 자신의 건전성을 확인하는 것은 아니다.”

 

서문에 적힌 내용을 보는 것만으로 인간은 광기가 이미 존재하는 것이고, 그 존재의 여부가 광기의 유무라는 외향적 요소가 반드시 광기의 유무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과 인간이 스스로의 이성적인 판단력이 자기 자신으로 하여금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배제로 통해 스스로 생산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광기의 역사라는 이름만큼 분명 여기에 광기에 미친 자들이 나온다.

 

문제는 그 광기라는 기준이 참으로 모호하다. 19세기에 들어와 인간의 무의식 세계를 열어놓은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이전의 정신적 증세라는 자체가 모두 광기라는 점에서 뭔가 의문스런 기분이 아니 들 수 없었다. 특히나 파리 시민 중에 100명 중 1명은 광인으로서 수용소에 갇혀야 한다는 점과 10만 명도 안 되는 도시에 3만 명이 넘는 주민들이 수용소에 나누어 수용된 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점인가?

 

문득 예전에 피카소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피카소가 죄를 지어 - 물론 진실로서 그가 윤리적인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권력에 의해 죄를 부여 받은 - 감옥에 갇힌 적이 있었다. 그때 친구가 면회를 오면서 피카소의 감옥에 갇힌 것에 대해 걱정을 했지만, 오히려 피카소는 친구를 더욱 걱정했다. 왜냐하면 감옥은 감옥 그 자체로서의 물리적 공간으로 존재하나, 피카소가 걱정한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 그 자체가 감옥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감옥이란 물리적 도구가 존재하기에 세상이란 감옥을 갇혀 살아도 인간은 자신이 감옥에서 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물리적 감옥이 하나의 신화로서 자신의 탈(脫)감옥 했다는 관념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광기의 역사에서 본다면 광기에 빠진 인간이 미쳤는가? 아니면 광기에 빠지지 않은 인간이 미쳤는가? 아니라면 모두인가? 광인의 존재를 생각하면 데카르트 합리주의 관념과 기독교의 이분법적인 결합하지 않을 시에는 그들은 매우 특별했다. 물론 이 책은 프랑스 중심이기에 가끔 독일과 영국의 이야기만 나온다. 하지만 동양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우리라고 해서 광인의 존재가 격리된 것은 아니다. 흔히 한국은 샤머니즘이란 초월적 영역에 대한 존재성을 믿는 종교 관념이 있다. 그런 샤머니즘에 필수적인 존재가 바로 샤먼, 무당이다. 무당 중에서 우리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기의 힘을 보여준다. 오이를 떨어뜨리면 바로 두 동강 나는 칼날 위에 그것도 맨발로 미친 듯이 춤을 추는 그들의 모습에서 광기라는 것이 단순히 격리와 야유에서 해결될 문제를 지나 하나의 신성성과 공포심을 내리는 주술적인 행위를 보여준다.

 

광기를 지닌 광인은 아마 저런 무당처럼 우리가 도저히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나 환상의 세계, 혹은 존재의 대상조차 형언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공간과 시간을 마주보는 독특한 존재다. 그런다고 그런 광기의 신성함을 가진 그들이라고 하여 일상적 생활에서 남들과 다른 것은 아니다. 보통 사람처럼 밥도 먹고 말도 하고 심지어 취미생활까지 즐긴다. 그러나 광기의 영역에서는 다른 모습이 된다. 광기란 인간의 합리적 세계에서 비합리의 세계로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나, 다시 비합리 내에서 합리적인 답이 나올 때도 있다.

 

무척이나 신화적인 세계이다. 왜냐하면 신화의 세계는 비합리적인 조건에서 등장인물들이 합리적 행위를 해야 하며, 그 대가에서 다시 비합리적 위기나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 인물로는 간부 클리타임네스트라가 그녀의 간부(姦夫) 아이기스토스와 계획하여 남편인 아가멤논을 살해한다. 그 살해동기 역시 비합리적인 상황이다. 아가멤논이 트로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항해 도중 바다의 재앙에 발목이 잡힌다.

 

그 재앙에 대한 해결방안은 아가멤논의 딸을 희생하는 것이다. 비합리적인 조건에서 아가멤논이 합리적 방법은 결국 그의 딸을 죽이는 방법이다. 대신 그것에 대한 인과관계에서 아내에게 살해당한다. 아가메논이 죽게 되자, 그의 딸인 엘렉트라는 자신의 남동생인 오레스테스와 계획하여 자신의 어머니와 그녀의 간부를 살해하게 만든다. 남동생 오레스테스는 어린 시절에 엘렉트라에게 지극정성으로 키워진 사람이다. 어머니는 클리타임네스트라이나, 어머니 못지않게 누나인 엘렉트라에게 사랑을 받아온 사람이다.

 

그는 아버지의 원수와 누나의 사주로서 살해를 저지르나, 아무리 어머니의 죄가 깊더라도 그는 여신들의 화를 사게 되어 미쳐 날뛰게 된다. 광인이 아닌 자가 광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토록 광기에 젖은 인간은 현실과 신화의 세계에서 접할 기회는 많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광기의 존재들은 신화로서 가치가 높으나, 탈(脫)신화가 되어버린 근현대에서는 신화의 세계는 미지와 미개의 존재로 남겨진다. 대신 계몽이란 새로운 억압이 신화로 되어 기존의 신화의 광인들을 모두 현실의 공간에서 제거하려고 한다.

 

특히 기독교적 이분법에서 이성의 존재가 아닌 자들은 모두 배척당해야 했다. 과거에는 광인들은 타국이나 다른 지역으로 추방되거나 또는 배를 태워 보내지게 되었으나, 이제는 추방이 아닌 수감이 되었다. 그들은 이제 동적인 존재로서 살아있는 자가 아니라 수용이란 감옥소에서 정적인 존재로 되어야 했고, 죽음 내지 혹은 이성을 지니지 못한 아이로서 살아야 했다.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서 광인들은 아직 어른이 아닌 자들이고, 그 이유는 언어로서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관리자들은 어른들이고 합리적 이성으로 언어를 내리므로 이른바 상하관계가 형성되는 점이다.

 

분명 광인들은 진짜 미쳤더라도 그 정신병적인 기질이 오히려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다. 그들은 꿈과 환상 너머로 우리가 볼 수 없던 세계를 볼 수 있었다. 우리 일반인들이 보는 꿈과 환상은 그 자체로 가상으로 여길지 모르나, 광인들에겐 그 자체가 현실적인 시야였다. 그것이어야 말로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고,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가끔 사이비 종교지도자 내지 혹은 진짜 위대한 종교지도자의 차이는 그런 볼 수 있는 세계에 대한 수준과 전달력, 그리고 그 시대적 배경이 중요한 것 같다.

 

이런 말을 하면 상당히 도발적인 발언일지도 모르나, 위대한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를 보자. 당시 그리스 신전에서 사람들이 신탁을 듣기 위해 가는데, 그들의 질문 중에서 자신들이 사는 세상에서 누가 제일 현명한 사람인가라는 질문에서 소크라테스라고 답변을 들었다. 신탁 자체가 비합리적 세계이나 사람들은 그것을 합리적 응답으로 받아들였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산파술로서 자신이 가장 어리석다고 말하면서도 모든 소피스트들의 두려움이 되었다. 자신의 무지를 알기 위해 만나는 사람마다 대화를 나누면서 오히려 소크라테스를 만난 자들이 더욱 무지한 사실이 탄로 난 것이다.

 

그런 그가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와 덕망이 생기고, 게다가 소피스트와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권위에 큰 방해가 되자, 소크라테스를 신을 모욕하고 나쁜 소리를 하는 불순분자로 몰아 결국 그의 손에 독배를 주게 하여 스스로 자살하게 만들었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당시 살던 신을 부정하지 않았으나, 당시 권력자들은 그가 신을 모욕했다고 한다. 그가 가진 지혜는 보통 사람 이상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소크라테스 역시 광인일지도 모른다. 지혜를 가진 광인, 그러나 존재하면 안 되기에 추방과 죽음으로 최후를 마친 광인으로 말이다.

 

그러나 점차 그런 광인들은 어느 순간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아야 하고, 보이지 않아야 하기에 어두운 공간으로 들어간다. 광기에 젖은 그들은 오히려 광기를 내뿜을 수 없기에 격렬한 반발과 동물적 본능으로 저항한다. 게다가 이제는 평범한 부류이나 걸인, 부랑자, 죄인들까지 이들의 영역에 합치게 한다. 광인이 과거에는 진리를 찾는 자나 구경거리로 되던 자에서 감시와 처벌에서 보조도구로 되어버린다. 사회적인 문제가 있으면 거기에 해당되는 자들이 개인적인 책임보다는 그들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매도하기 좋기 때문이다.

 

덕분에 광인과 같이 갇힌 자들은 모두 공포와 불안 속에 괴로워한다. 광인들의 알 수 없는 행동과 언어, 게다가 초월적인 육체능력은 두려움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광인들은 일반 사람들의 뇌와 다르다는 점은 이 책에서 밝히는데, 조증을 앓는 광인은 몸에 열기로 인해 추은 겨울에도 이불 하나 걸치지 않아도 되었으며, 추운 눈밭에서 몸을 뒹굴기도 한다. 또한 광인들 중에선 강력한 철쇄를 발과 손에 묶어두는데, 그들의 힘이 워낙 세기에 잘못 구속하면 거기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광인들의 통제라는 명목까지는 좋으나, 이들에게 결코 이 방법들은 근본적 해결이 되지 않았다. 단적인 예로서 광인 중에서 정신병을 가진 것을 부정하게 되면, 오히려 그들은 그 부정에 대해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자기들의 주장을 강력히 내세운다. 이들의 증세와 비슷한 무리들을 서로 자신과 같은 자아로 보게 하자 모두 정신병에서 나와 일반생활로 갔다고 한다. 결국 광인과 그 광인이 가진 정신병을 생각해보면 근본적 해결이 있으면 충분히 고칠 수 있는 점과 그들이 원래부터 광인일 수 있으나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런 문제에서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대해 연구함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인간이 이성의 언어만이 언어가 아니라 인간이 이성의 영역을 지나 무의식적 발언에서 그것 역시 하나의 언어라는 구조적인 조건으로 많은 정신질환자들을 치료했다. 무의식의 언어를 의식의 언어로 전이하기 위해서는 결국 외압이 아니라 환자 스스로가 벗어나오도록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식화하기 전에 실시하던 치료방법은 너무 비과학적이라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에겐 정신병자와 광인의 치료가 중요했을까? 아니면 이들의 존재로 통해 사회적 통합과 질서체계를 유지하려 했을까?

 

이 책에서는 광기의 역사만큼 광기에 대한 내용으로 진행되나, 그동안 미셀 푸코가 저술한 감시와 처벌처럼 감옥의 역사도 나온다. 광인들에 대해 감시와 처벌이 이루어진 부분도 있으나, 일반사람들에 대한 국가적 권력의 횡포가 나온다. 부의 수거에서 새로운 부가 생산되어야 하는데, 배분관계에서 노동자와 농민에게 충분히 가지 않자, 그들은 빈민 내지 부랑자가 되었고, 그들을 광인수용소에 보내고, 다시 거기서 노동을 하게 한다. 물론 그 대가비용은 매우 저렴하고, 그 이익배분도 매우 부당하다.

 

그런데 그 문제는 그 빈민들에게 닥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노동착취와 임금저하로 통해 그들이 생산한 상품들의 가격이 매우 저렴하다는 점이다. 덕분에 시장경제는 무너지게 되어 다시 빈민재생산이란 하나의 모순적인 구조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광기에 빠진 것은 과연 누구? 라는 의문처럼 파스칼의 문구는 여전히 유효한 셈이다. 왜냐하면 분명 미친 사람은 존재하나 미치지 않은 사람까지 미치게 만드는 세상을 여전하다. 광기의 역사는 계속 진행 중이다. 푸코는 19세기까지를 이 책에서 언급했지 20세기를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행적에서 감옥을 다니면서 인권운동을 한 점에서 20세기에 마감한 푸코의 개인적 역사에서 여전히 계보학적인 그의 관점은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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