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의 유령들
자크 데리다 지음, 진태원 옮김 / 이제이북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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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유령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마 그렇게 생각한다. 그 이유는 마르크스라는 인물이 만든 거대한 업적과 그리고 그의 업적에 따라 생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마르크스가 태어나고 죽고 하여도 여전히 마르크스의 이름은 아직도 공방 중에 있다.

차라리 이 서적에서 마르크스가 유령으로 되기 전에 헤겔, 칸트,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인물들은 그렇게까지 구설수로 떠오르지 않는다. 분명 현대 우리 인간사회에서도 철학하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영역은 여전히 미친다. 모든 서양철학사의 근거는 바로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과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렇지만 이들의 철학과 서양에서의 기독교 사상은 다시 새로운 철학을 만들어 중세와 근대로 이어진다. 그런 와중에 칸트와 헤겔이 근대철학 이전 즉 마르크스 이전에 강력한 철학적인 사상가로 떠오르면서 당시 독일과 지금의 세계에서도 여전히 우리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전수한다.

그래도 이것이 유령이란 이름보다 하나의 이념, 사상, 진리, 영혼 등으로 넓게 풀어 본다면 분명 마르크스의 유령이란 이름을 뛰어넘을 수 없을 것이라 본다. 일단 나는 이 책을 보면서 그렇게 이해되지 않는다. 자크 데리다라는 프랑스 철학자에 대해 이름은 이미 예전부터 알았다. 그리고 그가 해체주의로 통해 기존의 플라톤주의적인 서양철학에서 플라톤에게 속된 말로 맞짱을 뜨려던 학자라고 이야기 들었다.

그렇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그가 저술한 서적을 읽어본 것은 없었다. 단지 이래저래 모아 놓은 철학교양서 내지 현대철학안내지도 관련 도서에서 그의 이름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런 나에게 이번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보인 데리다의 느낌은 약간 감지했으나 이 서적의 맨 뒤의 진태원 선생님의 역자후기에서 나온 것을 보고 내 생각은 “지금 세계에서 마르크스의 사상들이 실패한 것처럼 보여도 그의 사상은 결코 무너지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계속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사실 1990년대 대한민국 남북군사경계선 위에 있던 북한과 그 위에 있는 소비에트 연방이 예전의 스탈린주의가 해체되고 소비에트는 과거 소비에트 이전의 러시아라는 국가로 돌아갔다. 단 러시아로 돌아갔다고 하나 러시아 왕국(王國)이 아닌 단지 러시아 공화국(共和國)우로서 말이다.

러시아가 소비에트 연방으로 활동할 때 소비에트 연방은 공산주의라 했으나, 실상은 국가자본주의였다. 단지 미국과 서방국가는 개인적 자본주의라면 소비에트 연방은 국가적인 자본주의였다. 사실 국가 이데올로기가 어찌 되었던가 싶어도 자본 즉 국가를 움직이든 기업은 움직이든 혹은 개인이 움직이든지 자본력은 필요했다.

하지만 소비에트 연방은 무너지고, 소비에트 연방은 올린 스탈린주의 붕괴되고, 스탈린 이전 볼셰비키 혁명의 주동자인 레닌주의가 몰락해버리고, 레닌이 어느 사람이 죽었을 때 지구의 두뇌가 한머리 만큼 줄었든 엥겔스, 그 엥겔스의 영원한 파트너인 마르크스까지 올라가서 무너진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목표로 하던 세상은 “노예 없는 주인”인 세상 즉 모든 사람에게 인권을 주어지는 세상이다. 이상하게도 마르크스가 원한 이념은 그런 것인데, 오히려 평범한 인민들을 억압한 것이다.

그것이 마르크스의 유령들 중에서 선의를 지닌 성령(聖靈)이 아니라 악령(惡靈)이 되어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나 웃기지만 그것은 마르크스가 직접 만들어낸 유령이 아니라 마르크스의 이름을 그러니깐 그를 하나의 유령으로 만들어버렸던 사람들이 만든 악령이었다. 그런 악령으로 인해 마르크스주의는 20세기에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녕 마르크스주의자들은 21세기에도 계속 존재하고, 여전히 마르크스는 우리에게 읽히고 있다. 우리가 여기던 마르크스의 유령들 중에서 악령이라 여긴 부분은 사실 마르크스가 연출하고픈 것들이 아니었다. 마르크스의 이름 다른 사람에 의해 계속 다르게 변모되어 오나 그의 이름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위에도 밝힌 듯이 20세기 후반에 와서 지구세계에서 자본주의를 필두로 한 신자유주의가 승리한 세상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승리한 세상이라도 그것은 인간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질병, 인종차별, 빈곤, 테러, 조작 등의 일들이 신자유주의 국가의 상대국가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라 계속 그 내부에서 일어나는 점이다.

그런 상황들은 본다면 마르크스가 문제를 제기하고 고치려고 했던 그 흔적들 das kapital 즉 자본론(資本論)이 계속 21세기에 나타나 계속 세계 여러 국가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1848년 2월에 엥겔스와 같이 선포한 <공산당 선언> 역시 계속 읽혀진다. 물론 이런 <공산당 선언>은 당시 유럽의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 현상 등을 어느 정도 이해하지 못하면 그저 마르크스가 악령으로 보일 뿐이다.

그런데 당시 유럽사회 즉 독일, 프랑스, 영국 등을 살펴보면 마르크스를 모르는 우리 어느 사람에겐 악령으로 보이겠으나, 사실 마르크스가 당시 서적을 저술할 때에는 그 사회 자체가 유령들의 사회였을 것이다. 인간은 누구에게 천부적인 인권이 있다고 하나 그런 인권은 어디 갔는지 알 수 없으며, 국가경제규모가 발달하면 할수록 국민 대부분이 인간다운 삶보다는 인간보다 못한 삶으로 가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살이에 대해 비관적으로 여길 수 있으며, 거기에 대한 반사적인 욕구로 공상적인 세계를 꿈꿀지도 모른다. 사실 지금이야 당시 마르크스가 원한 세계관은 다소 공상적일지도 모르나, 당시 마르크스가 본 세계에서 과학적이고 행동적인 가치관으로 통해 세상을 바꾸자 하였다.

그렇다면 정녕 마르크스는 유령에서 어떤 유령이 되어야 하는가? 분명 데리다가 적은 시점에서는 마르크스의 이념을 따라 세웠다는 국가들은 몰락해가고 있었다. 단지 그들은 정말 마르크스의 이념이 아니라 단지 마르크스의 이름을 빌려 하나의 유령으로 사용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아직까지 마르크스는 사라져가는 유령일까?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공산당 선언>의 서문에 올라가 있는 이 역사적인 2인물 “메테르니히”와 “기조”같은 인물이 현실에서 약자들을 더욱 가혹하게 착취하고 억압하고 있는 이상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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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 가장 오래된 질문들에 대한 가장 최근의 대답들
니컬러스 펀 지음, 최훈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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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가장 오래된 질문들에 대한 가장 최근의 대답들 그건 역시 정말 철학적인 질문만 늘어놓은 아주 무거운 책이다. 겉으로 나는 이 책을 보았을 때 A5 사이즈에 300페이지 분량이라서 과거 그리스철학자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중세로 가면서 스피노자나 데카르트, 그리고 근대로 접어들면서 칸트, 헤겔, 니체, 마르크스 마지막으로 현대사회의 철학자들이 담론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물론 철학에 대한 담론을 제기하나 그 담론범위가 내가 작게만 보고 상식수준보다 이상이라기보다는 거의 철학 그 근본자체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아니 진짜 철학을 한다면 혹은 철학에 대해 생각한다면 반드시 나오고 사유해볼 내용을 아주 어렵게 제시했다. 물론 도서를 만든 저자의 입장에서 어렵게 만들 생각보다는 철학이란 것이 그래 간단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님을 관철시킴으로 오히려 철학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다가간 것이었다.


이 책에서 그런 철학적인 근본을 알아보기 위해 3가지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나는 누구인가?”, 제2부 “나는 무엇을 아는가?”, 제3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고 말이다. 솔직히 이제 철학이란 학문에 접한 나로서는 마치 이것은 이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 도서를 과거 플라톤 시대부터 현대사회의 노암 촘스키까지 이어진 느낌이다.


인간이란 태어나면서 자기 존재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누구이며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라는 점에서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 마지막 역자인 최훈 선생님의 후기를 보면 총 3가지 대분류에 따라 형이상학, 인식론, 윤리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형이상학은 처음 내가 철학이라는 학문을 접할 당시 물리, 윤리, 논리이다. 처음에 고대 철학자들은 이런 부분에서 다방면적으로 연구했다. 가령 철학자들 즉 형이상학자들은 자연과학을 연구하고, 수학을 연구하고, 의학도 연구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매우 다방면적인 학문을 연구했다.


그래도 그것은 인간의 사유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인간이 철학하는 것은 매우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윤리적으로 인간을 대해야 하고, 또한 인간의 어리석음을 일깨우기 위해 물리적인 자연현상을 알아야 했다. 단지 그 시대적인 특성과 인간이 가진 기술과학의 진보차이로 인해 그런 형이상학 범주가 다르게 여긴 것이다.


이제 현대로 오면서 논리분야는 수학이라는 학문으로 인해 그리고 물리는 자연과학이란 학문으로 발달되면서 직접적인 철학이기 보다는 철학의 그 자체보다는 철학의 담론에서 넓혀주고 새롭게 밝혀주는 하나의 길이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분류되고 혹은 서로의 담론을 넓혀주는데도 철학은 여전히 문제가 풀리기 보다는 문제가 다르게 제기된다.


가령 공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기술을 배우기 전에 먼저 기초과학을 배운다. 과학을 배우면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만든 부분보다는 오히려 근대와 현대에서 창시된 지식을 많이 배운다. 오히려 갈릴레이가 지구가 돌아가고 있다는 말처럼 지구가 돈다는 것을 거부한 중세유럽 사회에서 당시 사람들이 옳다고 여기는 가치관을 현재의 공학자들은 부정할 것이다.


이에 반해 철학은 아니다. 오히려 철학은 현대나 근대부터 시작해도 중세로 넘어 고대로 넘어간다. 아니 모든 철학은 고대 그리스의 물줄기에서 시작한다. “현실 속에서 이념”이라는 것을 주장한 마르크스 역시 이에 반박되는 것이 바로 플라톤의 “이념 속에서 현실”이다. 어느 반대되고 또는 변증법적으로 의견이 달라도 그것 역시 반대되어야 하는 의견이 존재해야 가능한 것이다.


철학에서 이런 서로 다른 의견 그리고 당시 사회와 문화가 지금도 다르지만, 그래도 지금에도 계속 다루고 이야기되어 철학은 뿌리를 뽑는다는 것보다는 뿌리 위의 가지를 계속 넓혀가는 것이다. 단지 맺히는 열매가 겉과 속의 맛이 다를 뿐이다. 본질은 인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이다.


오늘날의 철학은 누구의 입에서 떠도는 하나의 일상적인 언어로 사용된다. 그렇지만 막상 진지하게 철학의 의미도 철학 그 자체의 의문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살짝 돌린다. 내가 이 책을 보면서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일반적인 사람들이 바라보는 철학이라는 것이다. 진짜 원론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에 대한 정확한 답보다는 현재 살아있는 아주 덕망 높고, 지혜로우며 누구보다 인간을 생각하는 철학자의 입에서 철학을 듣는 것이다.


그런데 그 누구보다 인간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철학자라 해도 서로간의 가치관과 의견은 다르다. 서로 다른 의견을 통해 여러 가지 관점으로 인간을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만큼 이 책은 정말 답을 충실하게 제공하는 친절한 서적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을 읽어야 하는 독자 스스로 친절하지 못한 철학의 공간에서 고민해야 한다.


사실 철학은 고민하는 것이 맞다. 왜냐하면 철학은 과학처럼 정확한 지식으로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정확하지 않은 모호한 이야기로 스스로 답을 찾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철학은 어느 문제에 대해 답을 내어주는 학문이 아니라 문제의 답을 찾아 가는 학문이다. 그러니깐 답을 내려주는 공학용 계산기가 아니라 그 문제의 답인 원인인 발달을 찾는 것이다.


그런 점을 생각해 보면 이 책은 1번 보고 2번 봐도 이해하기 어렵다. 아니 그 이상의 책읽기를 시도해도 쉽지 않다. 사실 나는 철학이나 사상에 깊이 들어가지 않았으나 적어도 문화상대주의적인 관점을 지닌다. 인간이 살아가고 다른 인간과 공유점이 되어 생활양식으로 나타나는 그 문화라는 공간은 매우 크고 작은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 때로는 전혀 상반되고 대립되는 형태까지 보인다.


그런 문화라는 공간에서 인간은 모두 다르게 태어나고 자라고 죽어간다. 그래서 어느 일정한 기준에 따라 인간을 정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 그러나 철학은 그 다양함 속에서도 진리라는 단어를 찾아내어 그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물론 그 진리로 100% 맞다고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왜 그렇게 되었는지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또한 그렇게 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이다.


그런 문제로 철학은 시작부터 시작하여 인류가 망하는 그 순간까지 결코 멈추지 않을 굴레의 속박이다. 하지만 그 굴레의 숙박이 없다면 오히려 인간이 더욱 큰 고뇌에 부딪히거나 또는 무절제하고 아수라와 같은 세계에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 철학이란 굴레의 속박이 인간이 가진 오랜 고민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 물론 이 책에서는 그 질문 자체에 대해 듣는 철학자 답이 모두 맞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두 틀린 것은 아니다.


단지 맞다 틀렸다고 하기에는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옳지 않은지? 혹은 그런 선택에서 그것 자체가 옳은지 아니면 옳지 않은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철학은 답이 없는 학문이다. 답이 있다면 이미 인간은 철학적 사유는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나고 자라서 죽어야 하며, 자기 혼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간과 소통해야 한다. 또한 인간은 인간의 소통에서 인간 아닌 존재에서도 사유를 요구하게 된다.


적어도 이 책에서는 그런 사유적으로 살아가야 할 인간에게 답을 준다고 하지 않으나 어떤 사유가 필요한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책을 읽고 계속 고민하여 르네 데카르트의 유명한 말처럼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되지 않을까 한다. 대신 조심할 점은 데카르트가 제시한 합리적인 이원화에 빠지면 안되는다는 것이다. 너무 이원화적인 사고에 빠지면 자기모순과 편견에 철학적인 인간이기 보다는 철학만 말하는 인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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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 입문 - 인간 정신에 대한 혁명적 통찰 돋을새김 푸른책장 시리즈 15
지크문트 프로이트 지음, 최석진 편역 / 돋을새김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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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이성(理性)과 감성(感性)을 가지고 살아가는 동물이다. 하지만 인간 역시 생체적인 조건을 가진 이상 동물이라는 점을 제외할 수 없다. 이렇게 이성과 감성 특히 인간의 가진 사고능력을 중시하는 이성에서 우리 문명의 역사에서는 3가지 위기를 맞이한다. 1번째는 지구가 본래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으나, 사실 중세 유럽에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인간은 곧 신을 모방한 존재이고, 신성함을 부여받은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동설(地動說)이 바른 해답임에도 불구하고 천동설(天動說)에 대한 교회권의 입김에서 천동설의 거부는 결국 당시 유럽사회와 문화권에서는 육체 내지 사회적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운명이었다. 그러나 결국 지구(地球)가 둥글고 태양(太陽)을 돈다는 과학적인 해석으로 통해 인간은 최악의 오류에 부딪힌다.

두 번째 이성적 위기는 인간이란 본래 신에 의해 탄생했으며, 그 신에게 받은 생명으로 육체를 형성했으니 신성하다는 점인데, 여기에 대해 다원이라는 과학자가 인간 역시 주변에 서식하는 동물(動物)이나 식물(植物)처럼 원래는 미개한 생명체이나 시간과 공간의 흐름에 따라 진화(進化)하여 지구상의 최고의 이성적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결국 인간은 신이라는 관념적인 존재가 창조한 것이 아니라 결국 단세포 생물에서 시작한 존재라는 점이다.

또한 인간은 영장류에 포유류이기 때문에 주변에 서식하는 침팬지, 오랑우탄, 고릴라, 원숭이처럼 비슷한 조건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이들과 유전자가 거의 비슷할 정도로 일치한다. 결국 인간은 신의 위대함에서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유인원의 진화로 통해 그리고 그 진화 속에 다양한 종족의 퇴화와 함께 살아남은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인간의 충격에 빠지게 하는 마지막 선언은 인간이란 무의식이라는 세계가 존재하여 그것이 인간 의식과 이성마저 잠식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을 밝혀낸 인물은 바로 인류 역사성 정신분석학을 창시한 지그문트 프로이트라는 사람이다. 게다가 인간은 이성에 따라 순수한 진리와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부의 성적인 욕망과 그 욕망에 대한 억압으로 인해 병적인 증세를 발현한다고 했다. 

론 인간은 자기 자신을 그토록 합리화하였는데, 이제 그것은 단순한 인간들의 착각이라는 점에서 인류의 역사에서는 크나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하나의 가설에서 하나의 학문으로 들어가서 이제는 당연한 사회문화적인 영역에서 인정되었다. 인류를 이성적인 존재라기보다는 하나의 성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동물로 만든 프로이트를 내가 어떻게 알았을까?

일단 내 별명 중에는 조금 특이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만화애니메이션을 좋아하여 만화애니메이션에 대한 리뷰를 적다가 불리게 된 별명이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지만 애니메이션 계의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라는 것이다. 애니메이션이란 장르를 하나의 구조로 여기고 과학적으로 보는 방법(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 소쉬르의 학문을 이은 구조주의)에 내가 본다는 사실이다.

사실 기존에 이미 프로이트 관음적인 면을 살려서 영화보기를 영화읽기로 하여 영화 텍스트를 분석하는 기호학 내지 페미니즘 분석방법은 있었다. 또한 마르크스주의적인 방법에 따라 각종 영화나 문화를 비평하는 학문도 있다. 단지 그것이 전문가의 손에서 놀아난 것이지 그 애니메이션이란 문화에 빠져 향유하는 당사자에겐 커다란 벽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리뷰를 적어보면서 애니메이션 내의 여성캐릭터를 연구하고, 남성캐릭터와 여성캐릭터에 대한 분석을 하기 시작했으며, 거기에다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인 요소까지 생각하면서 보았다. 우연히 도서관에서 집어든 미국 인류학자 에드먼드 리치의 레비 스트로스라는 도서부터일 것이다. 레비 스트로스는 프랑스 구조주의 인류학을 창시한 학자로서 20세기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학자 중의 하나로 꼽힌다.

이 책에서 처음으로 근친혼(近親婚)이라는 것을 알았고, 차후에 문화인류학자인 마빈 해리스의 도서를 보면서 프로이트라는 인물의 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문화인류학(文化人類學) 그리고 여기에 신화학(神話學)이란 분야에 흥미를 가지게 되면서 정신분석학(精神分析學)을 직접적으로 접하기 보다는 간접적으로 접하면서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가족관계를 알게 되었다.

인간의 성적인 욕망은 무의식에서 발동되고 그것은 인간의 이성과 사회와 문명으로 통해 억눌린다. 하지만 이것으로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한 통제와 억압 그리고 욕구불만은 인간에게 다양한 증세를 보이게 한다. 특히 인간의 무의식적인 면을 강하게 나타내는 신화와 그 신화를 가장 잘 소화해 내어 영상으로 보이는 애니메이션에서는 프로이트가 제시한 이론을 탐색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프로이트가 강의한 정신분석입문은 읽어보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 기회가 되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입문과 꿈의 해석을 사서 읽기로 하여 이제 정신분석입문을 한번 책 전체를 읽게 되었다. 이 책을 읽게 되면서 내가 느낀 것은 기존에 내 머릿속에 있는 이론에서 이 책에 서술한 내용과 크게 변동이 없지만, 그것이 어떻게 설명하고 어떻게 풀어 가는지 그리고 환자의 임상상태는 어떠한지는 처음 보았다.

인간이란 늘 자기 자신에게 만족할 수 없다. 그 만족할 수 없는 부분은 성적인 무의식적 욕망 즉 리비도에 의해 발생된다. 단지 그 리비도 에너지를 다른 곳에 사용함으로써 그것을 억제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리비도를 다른 곳으로 전향되더라도 기본적인 리비도의 욕망의 고리를 분쇄할 수 없었다. 그런 인간의 성적 욕망 그리고 그 욕망에 따른 인간 자기 억압과 통제는 다양해지고 복잡해진 현대사회에서 조금 더 담론을 확대하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프로이트가 가진 정신분석입문으로 통해 단순히 볼 것만은 아니다. 이 책에서는 프로이트학파와 반 프로이트학파가 나온다. 우선 여성성과 남성성의 서로 교차한다고 밝히 칼 융이라는 사람으로 시작하는 반 프로이트학파와 추후 프랑스 구조주의에서 정신분석을 새롭게 변모한 자크 라캉에 이르기 다양하게 생각해야 한다. 솔직히 말해 내가 정신분석학이라는 분야가 있다는 것은 자크 라캉에 대해 의문을 가지서 부터이다.

 

이른바 기표와 기의는 일치한다는 소쉬르의 기호학 대신 기표와 기의는 미끄러진다는 자크 라캉의 기호학 연구부분에서 말이다. 물론 아직 읽다가 중간에 잠시 휴식을 취한 자크 라캉 11번째 세미나를 보면서 라캉이란 인물이 얼마나 프로이트를 중시하고, 프로이트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것을 다시 다른 방향으로 물줄기를 틀었다는 점이 독특한 것으로 알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이렇게 프로이트가 추가한 정신분석학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실제 임상실험의 환자를 치료하거나 혹은 영화나 문화 그리고 텍스트에 대한 비평이나 또는 신화학, 문화인류학, 민속학과 같은 학문적인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인간은 인간 본인이 감지할 수 없는 심연의 세계가 있다. 그 심연의 세계가 열리는 것을 부정할 수만은 없다. 또한 인간은 성적인 욕망을 지닌다.

이 글을 적는 나 역시 남성이란 동물적인 심리로 여성에 대한 성적인 욕망을 가지는 것은 분명하다. 누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남자는 15초마다 야한 생각을 할 수 있다. 정말 15초까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남성이란 성적인 욕망 리비도에 분명히 무의식적으로 지배받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보인 성적 욕망은 다소 환상적인 세계로 비추어진다. 그것은 가상과 현실의 벽을 느낄 수 없는 아니 초월한 하이퍼 리얼리티한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인간의 성적욕망은 더욱 더 가속화되나 오히려 억압될 수 있다. 그런 욕망과 환상 또한 복잡다양한 세계에서 정신분석을 도입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 내면에 갇힌 굴레를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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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Ⅲ―2 - 완결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15
칼 마르크스 지음, 강신준 옮김 / 길(도서출판)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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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3-2권까지 읽어 보았다. 자본 1-1권부터 시작하여 1-2권, 그리고 2권과 3-1권. 정말 마르크스 자본을 읽는 동안에 왜 이 책이 유명한 서적인지 왜 마르크스가 현대에서도 사회학, 경제학, 철학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로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많은 내용을 혼자서 (물론 마르크스 사후에는 엥겔스의 작은 원고추가분이 있었으나) 저술했다는 자체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한글로 번역하여 도서를 찍어낸 것을 페이지로 계산해도 총 3,000페이지가 넘는다. 이 위대한 업적에서 마르크스는 자본(資本)을 미완(未完)의 도서로 남기며 저 세상으로 갔다. 물론 마르크스의 자본은 마르크스의 죽음과 함께 멈추었지만, 그 이후의 자본은 멈추지 않았다. 세계 많은 학자들이 마르크스의 자본을 두고 계속 연구하고 논문을 내었다.

마르크스의 자본이 그의 손에서 나온지가 이제 130년 전후이다. 그러나 그 많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마르크스의 자본은 많은 사람들 손에 잡히고 또 많은 사람들의 눈에서 읽힌다. 이런 책이 계속되어 우리 인류 역사 속에서 전승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마르크스가 주장하여 만들고 하던 인권이 아직도 뭔가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마르크스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언제나 약자의 편에 있었다. 그는 분명히 좋은 머리와 우수한 언변으로 괜찮은 직장에 들어가서 충분히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던 수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조국에서 다른 나라로 망명 살이를 해야만 했고, 자기가 사랑하던 가족이 있었지만, 지독한 가난으로 치료도 못했으며, 최후에는 고질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10명 남짓한 주변 사람만 모였다. 그러나 그의 장례식의 묘지에서는 10명의 사람만 모였으나 이제는 그 10명과 비교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마르크스를 기리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왜 그토록 자본을 쓰고 싶었을까? 마지막 3-2권을 읽기 전까지 물론 마르크스에 대한 자료와 1848년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외치던 공산당 선언이 주요한 쟁점이었다. 물론 이 때의 마르크스는 자본을 집필하지 않았다. 당시 마르크스는 현실에서 모진 노동과 사람답게 살아가지 못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옹호하기 위해 이런 인권 선언문을 외쳤다.

만약 20년 전후의 한국에서는 이런 선언문을 읽는 것이 금지되어 있겠으나, 그것은 정말 금지된 선언문이 아니라 정녕 우리 인간의 가치인 생존을 위한 선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상당히 위험하고 모험적인 일이었다. 대다수의 가난한 자들은 언제나 생계수단으로 인해 자신의 삶에 속박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는 정말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본다면 자본은 이런 불합리하고 정의라는 것은 단순히 지배 이데올로기를 합리화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은 그 시절에 진실로 그 사회의 단면을 아주 냉정하게 그리고 비판적으로 보고 하는 것이 마르크스의 자본이었던 것 같았다.

자본주의 체계라는 것은 프랑스 혁명 이후 부르주아 계급의 정치적·사회적 지배하는 계기도 있었으나, 거기에 아울러 인간의 힘에만 의존했던 수공업에서 이제는 대규모의 기계 산업으로 변모하면서 인간의 노동력은 대규모 자본에 의해 움직이는 산업에 하나의 부속품으로 되어 버린 것을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서술하게 되었다.

자본 3-2권이 내 손에 들어오기까지 그런 진행을 하나하나 정리하다가 가장 중요한 자본이 어떻게 경제적으로 사회를 혼란하게 하는지도 나온다. 3-2권에서는 3-1권에 중간부분 시작하는데, 우선 화폐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소유하고 지불하고 언제나도 상업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지폐나 금전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머릿속에 관념적으로 존재하는 숫자를 하나의 종이서약서로도 나타낼 수 있는 어음을 소개했다.

어음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거의 전무하다. 단지 현찰 대신 은행에서 발행한 유가증권이며 그것이 실제 현존하는 화폐가 아니어도 불구하고 화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 어음 발행에서 실제 상업적으로 상품을 처분할 수 없거나 혹은 이미 과잉으로 자본이 시장에 들어가 있는데도, 어음 내지 혹은 다양한 자본들이 계속 유입된다는 점이다.

한편 실제 은행에 보관된 금액에 비해 은행에서 발행한 화폐나 증권들은 더 많다는 것이다. 자기 자본보다 더 많은 부채가 생겨서 시장의 과잉 자본유입으로 인플레이션과 같은 문제나 혹은 자본가들이 이윤을 더 많이 챙기기 위해 생산물을 늘리지만, 결국 시장에서는 공급과 수요의 균형에서 수요의 감소로 인하여 재고가 엄청나게 쌓인다.

그렇다면 자본가들 중에서 산업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순수자본이 아닌 대출받은 자본으로 운영한다면 분명 타격을 입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로 인해 공장이 문을 닫게 되면 그 밑의 노동자 역시 급료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경제적인 문제가 발생되면 그것이 여러 가지로 사회적인 문제를 야기 시킨다. 가령 어느 큰 공장 하나가 문을 닫게 되면 거기에 근무하는 노동자뿐만 아니라 그 공장에 자본을 (사실 그 자본마저도 다른 누군가에게 대여 받았으나) 대여해준 자본가, 그 공장의 주요 생산물의 원자재를 공급하는 사람, 그 공장에서 물건을 받아 운송 및 판매하는 중간 및 소규모 상인까지 말이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자본 3-2권을 본다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위험한 욕망이란 이름을 아주 냉철하게 분석한 것이었다. 분명 산업체에서는 생산물을 늘리고 잉여 생산품을 올려 이윤을 추구하겠지만, 이런 행위에 따른 과다한 자본투하와 계속되는 경쟁으로 결국 자본가 자신이 파산하게 되어 버린다.

자본가의 자본이 없다는 것은 결국 그 자본가 역시 노동자로 전략하게 되어 버린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에 의해 노동자가 착취당하고 희생당하는 것을 지적했으나, 어떻게 생각하자면 부르주아 계급에서도 즉 산업자본가의 파산 역시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과 그리고 거기에 대한 문제와 경로 그리고 제도적으로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를 보았다.

또한 그런 자본주의 세계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세계를 보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원초적인 착취에 대해 보았다. 지대에 대한 부분에서는 어느 일정한 시세를 가진 토지에서 일정량의 곡식이 나오더라도 그 양이 어느 시세의 최소생산 토지보다 더 많은 생산물이 나온다면 그것은 지대를 운영하는 차지농에 의해 수탈된다는 점이다.

본래의 토지소유자에겐 일정양의 금액 부분만 제공하고, 그리고 이 일정한 토지에 농노로 통해 생산되면 일정 부분의 인건비만 제공하고 나머지는 자신의 이득으로 가는 점이다. 물론 지대의 운영에서 그가 받은 이익은 토지의 우량함과 농노의 노동에 의해서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그런 수익을 남길 수 있는 것은 적어도 노동이라는 매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노동은 불변적인 상태에 있는 (인공적인)자연물을 생산물로 변화하는 능력이 있다.

그러니깐 그 만큼의 수익에서 노동력만큼의 대가를 주기 보다는 일반적인 시세에 준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정당하다고 하기에는 틀리다. 자본 3-2권 앞의 책들을 읽다보면 자본가들은 노동자나 농노에게 주는 임금에서 시간제도 있었지만, 이에 반해 성과제도 있었다는 점이다. 성과제는 일정양이나 혹은 할당량을 채우게 되면 그만큼의 임금이 나오는 임금지급방식이다.

만약 일정한 노동량을 채우고 시간을 만족했으나 성과부분이 부족하면 임금삭감하거나 과다노동(가령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을 하여도 주어진 양에 미치지 못해 임금을 삭감하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을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고찰했으며, 그런 문제로 노동자의 수명단축, 질병으로 인한 장애현상, 어린아이들에 대한 착취를 고발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왜 발생하는가에 대해 깊숙하게 들어 가보면 그런 이유가 존재할 만 것을 생각하는 것이 자본 3-2권이다. 우선 자본가는 산업자본가와 화폐자본가로 있는데, 문제는 산업자본가는 자신의 순수자본이 아닌 화폐대여로 통해 자본을 얻어 그 자본에 대한 이윤을 남겨 자신의 자본으로 재생산하거나 그 자본대여를 한 화폐자본가에게 자신이 대여 받은 자본의 일정 비율을 다시 반납하는 것이다.

게다가 자본대여에서 100만 파운드를 대여 받았는데, 은행이나 혹은 합법적인 금융기관에서 원금에 대한 이자율이 5~10% 사이라면 모르겠지만, 합법적인 금융이 아닌 비합법적이고 폭력적인 고리대금업자에게는 100% 전후의 터문 없는 이자로서 대여 받아야 했다. 따라서 이런 비윤리적인 상업행위를 하는 고리대금업자는 산업자본가뿐만 아니라 가난에 허덕이는 노동자까지 고리대금의 늪으로 끌고 갔으며, 이들은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킴으로서 부를 축적해갔다.

이런 비정상적인 경제 활동하는 부류는 아직까지 이 현대사회에도 존재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자본은 마르크스가 집필 당시 현대이겠지만, 내가 보는 마르크스의 자본은 근대사회다. 그러나 그런 근대사회의 이야기와 담론들이 아직도 현대에서 존재하고, 설사 마르크스의 자본에서도 그런 부분은 고대에도 있었다고 한다. 인간의 탐욕은 정말인지도 끝이 없는 굴레 인 듯하다.

그런 굴레는 자꾸 사회에 부익부 빈익빈을 증가시킨다. 그런 문제는 현대사회에서 불평등 내지 거기에 의한 각종 사회적 문제가 일어난다. 하지만 당시 근대사회나 그 이전의 중세 고대 역시 마찬가지다. 국민들이 가난하게 되거나 혹은 노예가 된다면 자유농민 내지 자유시민이 감소하여 국가에 대한 각종 의무사항을 수행할 수 없다. 가령 노예인 자들은 국가방위인 군역에 동원될 수 없고, 가난한자들은 국가에 세금을 낼 수 없다. 또한 자본이 계속 한 곳에 축적됨에 따라 당시 국가재정이 어려워짐에 따라 어느 특정 부류의 자본을 빌려야 할 경우도 있었다.

그만큼 국민의 가난함, 그리고 그 국민의 대부분인 농노와 노동자의 가난은 결국 국가의 존립 자체에도 큰 악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비단 유럽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조선 중후기로 들어서면서 농민들의 세금은 과다해지는데, 이에 반해 중간에서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관리들은 부정축재를 하여 자신이 거두어들인 세금보다 더 적게 국고에 출납했다.

그리고 계속 부족한 국고를 보충하기 위해 이런 방법으로 계속 농민을 수탈했다. 누군가 이런 자본이 되어야 하는 화폐를 어디서 누출 시키면 결국 그 화폐 즉 세금을 제공하는 사람들은 생존의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게다가 조선 말기에는 관리들은 군역에 대해 직접 농민들에게 군역하기 보다는 군역면제를 위한 군포를 내기를 원했다. 농민이 실시하는 군역 그 자체에는 자신들의 이익은 생기지 않았고, 단순히 농민들이 내는 군포세로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방법이나 수단 그리고 시대나 사회적 상황은 다르다. 그러나 누군가 계속 가난하게 되어 삶을 제대로 영위하기가 힘들다는 점은 분명히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어긋난 사회적인 구조를 알아내고 그런 구조에서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에 대한 탐색은 그 사회의 오류뿐만 아니라 그 자체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저술한 자본은 당시 유럽사회의 자본주의에 대한 그 자체를 알아내려 했던 것이고, 결국 그것이 어떻게 노동자를 착취했는가에 대한 하나의 체계를 밝혀낸 것이다.

마르크스가 죽은지가 130년이 되어 간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유령은 아직도 세상을 떠돌고 있다. 그가 유령이라 함은 정말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악령으로써의 유령이 아니라 마르크스라는 인물이 죽었는데도, 그가 미치는 영향이 아직도 크다는 점이다. 그가 생각하고 주장한 이야기는 후세 많은 철학자, 사회학자, 인문학자, 경제학자의 담론 속에서 꽃을 피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직도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한 채 절망의 고통에서 울부짖고 있어서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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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Ⅲ-1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14
칼 마르크스 지음, 강신준 옮김 / 길(도서출판)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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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자본 1-1, 1-2. 그리고 2권에 대해 읽어보면 자본에 대한 근본을 찾아내고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착취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리고 각종 자본주의적 병폐로 통해 노동자들이 얼마나 착취당하고 어떻게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지 대해 기술하였다.

마르크스의 필력을 본다면 그가 가진 마음이란 가히 나라는 사람이 측정하기 어려웠다. 약하고 고통 받는 약자에게 한없는 관심과 검토를 하였으며, 그들을 착취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아주 꼼꼼하게 비판하였다.

그의 비판에서는 속물근성으로 가득 찬 경제학자까지 비웃었다. 논리도 없고 현실파악을 하지 못한 채 그저 자신들의 유토피아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자본주의 사회에서 마르크스는 단순히 그런 문제까지 보았을까?

그것은 빙산의 일각에 부분이었다. 그는 정말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현상뿐만 아니라 그 사회 말고도 정치, 외교부분까지 고려하여 자본을 서술하였다. 특히나 국내시장경제만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 세계시장까지 고려하였고, 여기에 세계시장으로 통해 기존 자본주의가 단순히 자본주의의 새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등장에 대한 필연성까지 기술했다.

가장 인상이 남는 부분은 자본주의 사회가 도래하기 전의 왕권이 사회를 지배하는 봉건사회에서 부터이다. 부르주아 계급이 처음에는 지식과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왕권과 귀족사회의 통제로 인해 정치적인 권력을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중세유럽 이후부터 각 국가에서는 국가 발전을 위해 무역거래와 식민지개발에 무단한 힘을 기울였다.

이때 부르주아 계급들은 권력과의 관계를 맺어 꾸준히 자신들의 부를 축척해갔다. 하지만 그 축척이 어느 순간에 도달해도 그들의 삶에는 변화 없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은 루이왕정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회를 이룩했는데, 문제는 그 사회가 기존의 왕권이 있었던 봉건사회에서 계급으로 정치력을 가늠하게 했다면 이제는 재산력으로 구분하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과 특히 산업혁명으로 통한 자본주의 가속화는 왕정시대의 지배계층 자리를 왕족과 귀족에 대신하여 부르주아 계급이 등급되었다. 문제는 유럽사회에서 왕족, 귀족, 그리고 부패한 성직자에게 가장 착취를 당하던 농노와 노동자들은 새로운 사회가 온다고 해서 형편이 나아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으로 더 불리하게 되었다.

기계의 빠른 진화가 높은 생산력으로 통해 수공업으로 통한 적은 물량의 생산품을 대량으로 생산하여 많은 노동자가 일자리에서 해고당했으며, 자본의 축척을 새로운 자본을 낳기 위해 대규모 자본가들은 토지를 합리적으로 수탈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자영농의 숫자는 급속히 줄어드는 반면 소작농들은 여전히 착취당했다. 게다가 자영농의 감소는 농촌의 일자리 부족으로 도시로 흘러들어가고, 이들은 다시 도시에 살고 있던 기존 노동자 즉 프롤레타리아와 경쟁관계로 놓인다.

이런 복잡 다양한 사회적인 현상들은 이미 오래전 유럽에서 큰 혼란을 야기하였고, 이런 지적들이 한국에서도 계속 이어져 왔다. 물론 사회적으로 역사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본다면 이런 문제는 필연적인 문제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문제에 대한 현실적 무관심은 노동 및 근로로 통해 생계수단을 찾아가는 사람들에겐 치명적인 점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이런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약자에 위치한 노동자를 고찰하고 그들이 그렇게 전략하게 되게 하는 사회적 구조를 자본이란 서적에 담은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반드시 현실에서 고통 받고 있는 프롤레타리아에 관심을 두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본2에서는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이외에도 사업을 하고 자신의 공장을 꾸려가는 자본가에 대해서도 고찰했기 때문이다.

기존의 어느 사람이 자본가로서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시장경제와 회사운영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그런 경제적 사회적인 구조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보다는 단순히 일반론적인 세견에 의존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이런 자본의 운영에 대해 깊이 통찰하였으며, 자본가의 자본이 어떻게 하면 소모되는지도 기술했다.

노동수단이 기계나 선박 등의 불변자본만이 아닌 움직이는 인간이 만드는 살아있는 노동만으로 자본주의 사회를 평가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런 점을 더하여 자본 3-1은 이런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욱 더 넓은 시야로서 통찰한다. 오히려 이 책에서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가 그 자체가 착취당하는 존재로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것은 자본이란 것은 혼자 가만히 있거나 부동한 자세로 있다면 결코 자본은 자기를 재생산할 수 없다. 따라서 자본가는 자신의 자본을 늘리기 위해서는 그 자본을 운영하고 시장경제에 투입해야 한다. 그런데 자본가라고 하여 모두가 공장시스템이나 혹은 시장경제에 대하여 잘 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노동생산을 기능하는 곳에서 움직이는 산업자본가와 그 산업자본가에게 자신의 자본을 대여하는 화폐자본가가 있다.

화폐자본가는 자신의 자본을 산업자본가에게 대여함으로 산업자본가가 창출한 이윤에 대해 자신이 대여해준 자본 일부분을 이자로 받아 자본을 축적한다. 따라서 자본가라고 하여 모두가 자본가라고 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실제 우리 현대사회에서도 어느 사업을 진행하려고 하나 거기에 대한 기초자본이 필요하다.

그렇게 자본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은 자신이 소요한 자본, 즉 경제적 활동을 도모할 수 있는 화폐를 보유해야 하나, 그 액수가 충분치 못한다면 다른 누군가에게 대여 받아야 한다. 그래서 생긴 것은 돈을 보관하고 빌릴 수 있는 은행이다. 물론 은행이란 합법적인 금융기관이 아닌 고리대금업자도 있다. 고리대금업자들은 자신의 돈을 타인에게 양도해주어 사회적으로 (혹은 비공식적으로) 정해놓은 이윤율을 청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이윤을 청구하여 자신의 부를 축적한다.

어째든 금융기관의 활동은 가속화되는 자본주의에서 더욱 가속화하게 되는 요인이 된다. 그것은 상품의 생산이 계속 대량화되자, 각종 업체들이 경쟁이 붙어서 가격할인을 제시하고 가격할인으로 통해 그들의 원래 자본을 회수하려면 생산의 순환횟수를 늘리거나 그 기간을 단축해야 한다.

그러나 더 많은 금액회수를 위해서는 많은 생산품을 내놓아야 했고, 거기에 따라 공장설비의 확충 및 노동자의 근로시간 및 강도가 더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는 시장의 상품과다 확장으로 상품은 계속 늘어만 가는데, 오히려 수요는 뒤받쳐주지 못하게 되어 경제상황이 악화된다.

따라서 과대 지출된 금액은 환수되지 못하고 계속 소비됨에 따라 공황이라는 경제적 여파가 찾아오기도 한다. 이런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카르텔을 형성하기도 하나 마르크스는 이런 가속화되어 가는 자본주의 경제에 대해 언젠가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을 이미 예언한 것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어음이라는 것을 분석하여 금융시장에서 자본가들에게 당장의 자본인 화폐가 없더라도 그 자본가의 신용에 따라 은행에서 돈을 인출 받아 활동할 수 있는데, 위와 같은 문제와 자본의 회수가 늦음에 따라 자본가 스스로 몰락하는 경우도 지적했다. 이런 부분은 우리 사회에서 기업이 자금난에 시달리거나 대금청구 결재의 연기 및 지연에 따라 기업의 운영에 큰 타격을 주는 것을 목격한다. 

물론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은 입장에서 그런 복잡한 과정을 이해하고 나열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지적한 문제는 브레이크 없이 달리는 자본주의 경제체계는 결국 프롤레타리아라는 계급의 노동착취문제만을 지적한 것이 아니라 그 자본주의에서 자본을 통용하는 자본가 역시 스스로 몰락하게 되는 것을 지적했다.

그런 문제가 실제로 19세기 유럽에서 발생했고, 현재까지 이어온 역사적으로 그러하다. 자본의 무절제한 투자와 소비 그리고 경쟁은 어느 순간 국가경제 큰 중추역할을 하는 국가은행 및 민간은행에 타격을 입힌다. 자본의 심각한 유출은 은행잔고를 비게 하여 은행대출 이자율을 상승시키고. 이것은 자본의 동결로 인해 시장경제에 자본이 유통되지 않는다. 따라서 공황이라는 사회적 문제가 발발된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은행자본에서 눈여겨 본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귀금속의 보유다. 귀금속의 하나인 금과 은, 특히 금의 경우에는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화폐이다. 만약 대외무역으로 통해 경제활동을 하는 상인이라면 분명 그 타국의 화폐는 중요한 것이다. 가령 우리나라의 경우 미국의 달러나 일본의 엔화가 매우 소중한 외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폐는 그 나라의 경제상황이나 자국의 상황에 따라 가치가 다르게 된다.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화폐가치가 하락할 경우 오로지 변동 없이 그 가치를 상실하지 않은 것이 금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금 1㎏이 1억원이라고 하자. 그런데 일본에서는 우리나라 돈 1억원에 대해 800만엔을 유지한다고 하자. 그런데 어느날 일본 엔화가 가치가 하락하여 800만엔이 한국에서 5천만원으로 유통된다고 보자. 그런 순간 당초의 1억엔으로 가치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엔화가 아니라 금이라는 점이다.

마르크스는 이런 점을 이미 간파했다. 금의 보유는 그 나라의 자본의 현황을 나타낸다는 점이다. 어느 국가에서 지독한 가뭄으로 다른 국가로부터 식량을 수입했는데, 그 수입대금의 자국의 화폐가 아닌 금이었다. 대신 금의 손실은 그 나라의 자본보유에 치명적인 여파를 끼쳤다. 마르크스가 보는 자본주의 사회란 단순히 우리가 그동안 오해하고 있던 편견으로만 판단하면 안된다는 점을 자본 3-1에서 확실히 깨닫게 해준다. 그러나 이런 자본의 유통과정에서 생기는 경제적 불황은 결국 최소생계수단으로 살아가는 프롤레타리아에게 치명적인 인자로 작용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임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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