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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출판사 리액션 북스Reaktion Books의 '음식과 나라들Food and Nations' 시리즈는 한 권에 한 나라씩 고대부터 현대까지 각 나라의 음식의 역사를 살펴보는 시리즈다.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인도, 베트남, 그리스, 스페인, 러시아,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이렇게 열 권이 나왔는데 이 중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편 세 권만 니케북스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위) 『프랑스의 음식문화사』 원서 표지

(아래) 『프랑스의 음식문화사』 한국판 표지


(위) 『독일의 음식문화사』 원서 표지

(아래) 『독일의 음식문화사』 한국판 표지


(위) 『이탈리아의 음식문화사』 원서 표지

(아래) 『이탈리아의 음식문화사』 한국판 표지

원서를 직접 사 보지는 못하더라도 검색만으로 표지와 본문 미리보기 페이지는 볼 수 있다. 그렇게 원서와 한국판의 표지와 본문 디자인, 편집 스타일을 비교해 보면 흥미롭다. 이 시리즈의 경우 원서 표지는 한 나라의 테마 색(그 나라의 국기를 이루는 색 중 하나로 정한 것 같다)으로 인쇄된 음식 무늬 벽지 위에 테마 색으로 가득 채운 단색 띠를 두르고, 그 위에 음식에 관련된 명화와 책 제목, 부제, 저자 이름을 하얀색 글씨로 얹었다. 한국판 표지도 그 나라의 테마 색 하나를 디자인의 기본으로 삼지만, 국기의 색들과 중심이 되는 오브제 하나만으로 간결하게 구성했다(독일 편은 체크무늬를 중심 오브제의 뒤에 깔았지만, 원작의 벽지 무늬보다 간결하고 푸른색과 하얀색의 대비가 강렬해 눈에 더 잘 띈다). 프랑스 편은 프랑스 국기의 푸른색, 하얀색, 붉은색을, 독일 편은 독일 국기의 검은색(실제 표지와 본문 디자인에서는 검은색에 가까운 흑갈색을 사용했지만)과 노란색, 이탈리아 편은 이탈리아 국기의 초록색, 하얀색, 붉은색을 활용한 것이 눈에 띈다. 한국판의 단순 명쾌한 표지 디자인이 각 나라의 이미지를 더 선명하게 전달해 개인적으로는 한국판 표지를 더 좋아한다.


(위) 『프랑스의 음식문화사』 원서 본문. 모든 글씨가 검은색으로 처리되어 있다.

(아래) 『프랑스의 음식문화사』 한국판 본문. 도판 설명과 각주 텍스트는 푸른색, 각주 표시는 붉은색으로 처리되어 프랑스 삼색기를 연상시킨다.

프랑스 편과 독일 편의 경우 본문에서도 모든 글씨를 검은색으로 처리한 원서와 달리, 한국판은 도판의 설명과 원어 표기, 각주 텍스트를 그 나라의 테마 색과 같은 색 글씨로 처리했다. 프랑스 편에서는 각주를 나타내는 별 표시까지 삼색기의 붉은색으로 처리해 책 전체가 하나의 삼색기처럼 느껴지게 한다. 이렇게 원서와 한국판의 디자인을 비교해 보는 것도 번역서 읽기의 즐거움 중 하나다.

프랑스의 음식문화사-가스트로노미를 향한 외길



'가스트로노미gastronomie'는 보통 '미식'이나 '식도락'으로 번역되지만, 맛있는 음식과 그것을 만드는 요리법, 요리를 먹고 즐기는 방식과 문화, 그에 대한 담론과 학문을 모두 포괄하는 말이다. 이 책에서 500페이지가 넘도록 이야기한 프랑스의 음식문화사는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다. 가스트로노미를 향한 외길.

프랑스도 동물원의 동물들까지 잡아먹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식량난에 시달린 적이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다른 나라들이 '어떻게 하면 굶주리지 않을까'를 고민할 때 '어떻게 하면 더 맛있게 만들어 먹을까'를 고민한 것 같다. 토양이 워낙 비옥한 데다, 중세부터 주식인 빵이 제대로 된 품질로 적정한 가격에 안정적으로 유통될 수 있도록 정부에서 통제해 왔기 때문이다. 음식의 규격과 기준을 구체적이고 명확히 세우는 기준도 그때부터 이어져 와서, 현대에는 원산지 명칭 통제AOC, appellation d'origine contrôlée 제도로 와인과 치즈, 버터 등 프랑스를 대표하는 음식들을 법적으로 보호하고 있다. 자국 내에서 자국 음식을 더 세련되고 뛰어나게 개발하고 보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외국에서도 선망하는 미식으로 만들기 위해 자국 음식에 온갖 서사를 부여하고 유네스코 세계 무형 유산으로 등재시키기까지 했다. 그렇기에 프랑스의 이 장대한 음식문화사를 '가스토로미를 향한 외길'이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 외길을 가기 위해 프랑스인들은 프랑스 중심의 가스트로노미라는 목적에 맞지 않는 것은 버리거나 배척하는 배타적인 면모도 보인다. 저자는 가스트로노미를 향한 집념과 그것을 이루어낸 저력뿐만 아니라, 이런 부정적인 측면도 놓치지 않는다.

저자는 문화사학자이자 불문학 전공자답게 고대부터 현대까지 프랑스 문학, 역사, 문화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펼쳐나간다. 한 챕터 끝마다 '문학 속 음식'이라는 코너를 두어 거기서 프랑스 음식이 묘사된 프랑스 문학의 한 조각을 소개한다. 별도 코너로 사이사이에 문학 이야기를 집어넣었을 뿐만 아니라, 한 챕터는 아예 프랑스 문학 속 음식 이야기에 내어주고 있다. 주석에서도 본문만큼이나 할 이야기가 많았던지, 저자 주인 미주도 꼼꼼하게 읽어봐야 된다. 그런 데다 번역자 또한 불문학 전공자라 프랑스 문학과 문화, 역사에 해박해 각주도 꽤 풍성하다. 각주로도 프랑스 역사와 문화, 문학, 요리에 대한 지식을 꽤 많이 얻어 갈 수 있다. 한국판이 원서에 비해 행간도 여백도 더 넓어서이기도 하겠지만, 그래서 원서는 344페이지였는데 한국어판은 580페이지로 늘어나지 않았나 싶다.

독일의 음식문화사-개성보다는 다양성











프랑스 음식의 역사를 '가스트로노미를 향한 외길'로 요약한다면, 독일 음식의 역사는 어떤 말로 요약할 수 있을까. 독일인인 저자 자신도 어느 한 가지 뚜렷한 특성으로 이야기하기보다는 '복잡성'이라고 말한다. 독일은 유럽 한복판에 위치해 사방에서 다양한 나라, 민족들의 영향을 받아왔고 독일 자체도 근대 이전까지는 수많은 지방 소국들로 갈라져 있었기 때문에 뚜렷한 고유의 개성을 지키기보다는 들어오는 것들을 유연하게 받아들였다. 개성보다는 다양성을 추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서 그리는 독일의 음식문화사는 독일만의 개성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음식 문화가 형성되는 과정이라기보다, 독일이 온갖 시행착오를 거쳐 식량난에서 벗어나고 다른 나라들의 음식을 받아들여 다양하고 풍성한 음식들을 즐길 수 있게 되기까지의 과정이다. 특히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의 식량난과 그에 대한 대처를 다룬 10장은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개인과 정부가 각각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거기서 전쟁이 얼마나 처절한 것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나치 정부를 지지한 것의 대가를 이렇게 혹독하게 겪었는데도, 독일인들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 기간 동안 경제적 사정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고 회상했단다. 작가는 이러한 집단적 착각의 위험성을 분명히 밝힌다. 저자 자신의 조국인 독일이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길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프랑스의 음식문화사』(580페이지)에 비해 분량은 조금 더 많지만(660페이지) 문장은 더 쉽고 경쾌하다. 선사 시대의 식사 장면을 상상하는 1장의 도입부처럼 문학적으로 느껴질 만큼 감성적이고 친근한 부분들도 있다. 프랑스 편과 달리 각주의 대부분은 출처를 표기하는 데 쓰고 있다. 번역자도 프랑스 편에 비해 역자 주석을 많이 달지 않았다. 문학 작품 속 음식 묘사를 별도의 코너로 만든 프랑스 편과 달리, 독일 편에서는 음식 관련 유적이나 지금도 운영되는 역사적인 식당을 소개한다. 프랑스 편에서는 각 챕터 끝에 별도 코너를 놓았는데, 독일 편에서는 본문 중간중간에 넣은 것도 다른 점이다. 저자도 '독일 대표 요리로 내세울 만한 요리는 없다'고 인정해서인지, 프랑스 편이나 이탈리아 편과 달리 해당 국가의 요리 레시피는 하나도 소개하지 않는다.

맛의 제국 이탈리아의 음식문화사-'이탈리아다움'을 찾아서












한국어판에서는 제목의 이탈리아 앞에 "맛의 제국"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화려한 음식 문화를 꽃피웠으며 프랑스인들 못지않게 자국 음식에 자부심이 강한 사람들이 이탈리아인들이고, 서양 요리 중에서도 전 세계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것이 이탈리아 요리다. 그러니 '맛의 제국'이라는 칭호가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해서였을까. 그러나 정작 저자가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이탈리아는 '맛의 제국'보다는 '맛의 연방'에 가깝다.

중앙 집권 국가로서의 성격이 강했던 프랑스에서는 근대 이전부터 정부에서 음식의 규격과 기준을 구체적으로 세우고 음식의 유통 과정을 엄격히 통제했다. 현대에는 국가가 프랑스를 대표하는 음식들을 원산지 명칭 통제 제도 등 법적 제도로 보호하고, 프랑스 음식 문화를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등 자국 음식 문화를 보호하고 홍보하는 데 힘쓰고 있다. 반면 이탈리아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천수백 년이 지나서야 이탈리아라는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었다. 그 전까지는 수많은 지역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각각의 지역이 각각의 나라인 양 문화도 음식도 달랐다.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산업화와 경제 발전이 늦어져 숨 가쁘게 발전을 향해 달려왔다가, 1980년대 말에야 과거의 전통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이 쓰인 시기인 2010년대에도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탈리아 요리'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느냐는 의문이 자주 제기된다고 저자가 말했으니, 생각보다 '이탈리아다운 음식문화'는 그렇게 오래되고 확고한 것은 아닌 듯하다. 미식이라는 확고한 외길로 가는 프랑스의 음식 문화보다는, 사방에서 다양한 영향을 받으며 점점 발전해 가는 독일의 음식 문화와 더 비슷한 성격이다.

그러나 독일과 다른 점은 경제 발전으로 얻은 부를 음식 문화에도 쏟아부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경우 12세기에 들어서 농업이 발전하면서 시장이 형성되고 도시가 번영했다. 그 이후로 전란과 이방 민족의 침입이 잦았고 이탈리아 안의 정치적 분열도 심했지만 도시 국가들은 생산과 교역을 활발히 하면서 부를 쌓았고, 그 부로 예술과 문화에 투자해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웠다. 음식 문화 또한 문화의 한 분야로서 발전했고, 이탈리아는 화려하고 혁신적인 요리의 본거지가 되었다(독일의 경우 남부의 교역을 장악한 귀족들은 이탈리아의 세련된 음식 문화를 모방했고, 북부의 교역을 주도한 한자 동맹은 평등주의적인 조직이었기 때문에 식사를 귀족들처럼 화려하고 세련되게 하지는 않았다고, 『독일의 음식문화사』에서는 설명한다).

17세기에 계속되어 온 사회적 갈등, 정치적 분열로 경기가 침체하면서 이탈리아는 음식 문화의 선도자 자리를 잃어버렸고, 그 이후로도 외세의 침입과 지배, 이탈리아 내부의 정치적 갈등,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라는 격변을 겪어야 했다. 20세기에 들어선 시점에도 이탈리아인의 대다수는 농업에 종사할 정도로 산업화가 늦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을 따라잡느라 바빴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안정된 1980년대에는 이탈리아의 전통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고, 각 지역의 다양한 전통과 요리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지역 농가에서 도시 사람들에게 숙소와 식사를 제공하는 농업 관광(아그리투리스모)가 성장하게 되었고, 기업과 공공기관은 유럽연합이 인증하는 원산지 명칭 보호 마크를 획득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탈리아적인 것'을 찾으려는 노력이 뒤늦게 시작된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움직임이 정치적인 이득을 노리는 구호나, 이민자들에 대한 혐오의 무기로 이용되는 것을 염려하면서, 음식이 얼마나 현실을 물리적으로 강하게 체감할 수 있게 하는 통로인지 이야기한다. 그렇기에 음식은 우리가 개인과 공동체, 문화와 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이 책을 쓴 목적이라고 말한다. 사실 이것이 이 시리즈 전체의 목적일 것이다.

이 시리즈에 속한 책들의 공통점은 단순히 그 나라 사람들이 어느 시대에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만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각 시대에 음식이 어떻게 생산되고 유통되고 소비되었는지, 정부는 그것을 어떻게 통제하고 관리했는지, 더 나아가 그러한 과정과 정책이 그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개개인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폭넓게 살펴본다. 음식 하나만으로도 그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환경적 측면까지 모두 볼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으로 실감할 수 있다. 화질 좋은 컬러 도판도 풍부하게 들어 있어 본문에서 설명하는 내용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보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다. 그러니 500~600페이지나 되고 책 무게도 1킬로그램에 가까워 들고 다니기 버거울 정도다. 그만큼 읽을거리는 풍성하다. 이 시리즈의 원서가 출간된 시점과 현재 시점 사이의 시차를 극복해야 하겠지만, 역자 주나 편집자 주로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나머지 일곱 권도 모두 번역 출간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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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라고 하면 수백 년, 수천 년의 역사를 품은 유적지가 떠오른다. 30여 년 동안 스테디셀러로 굳건히 자리 잡고 있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시리즈 때문에 이런 인식이 더 강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 한국 답사기'라는 제목대로, 이 책의 저자가 찾아간 곳은 근대 이전에 조성된 유적이 아니다. 나라에서 문화재로 지정한 곳이 아니라,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평범한 거리 구석구석이다. 저자는 왜 이름난 유적이 아닌 일상적인 장소를 답사하는 걸까?

그곳에 우리, 현대 한국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궁궐이나 석탑, 산성 같은 유적지들은 훌륭한 문화유산이지만, 머나먼 과거의 모습을 전하는 존재다. 또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힘과 영광을 자랑하거나 지키기 위해 만든 경우가 많다. 반면 예전의 행정구역명으로 적혀 있는 표지판이나 문패, '(구 ㅁㅁㅁ)' 같은 식으로 과거의 지명을 또 다른 이름으로 달고 있는 버스 정류장 등 '도시의 화석'은 아주 가까운 과거, 오늘의 우리를 만들어낸 과거를 보여준다. 예를 들면 '수용소'라는 단어가 들어간 지명이 전국 곳곳에 남아 있는데, 이들 지명은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 수용소가 있던 곳의 흔적이다. 나라에서 문화재로 공인한 전자와 그렇지 못한 후자 모두 우리에게 소중한 유산이지만, 정부에서나 평범한 국민들이나 전자만을 기억하고 기린다. 게다가 재개발과 재건축이 끊임없이 진행되는 이 땅에서 불과 2, 30년 전의 건물들도 헐려서 사라진다. 문화재로 인정받지 못했으니 보존될 길도 없다. 그래서 저자는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현대의 유적과 유물을 우선 답사하고 기록하는 것이다.

저자는 몇 년째 이 현대 한국 답사를 계속해 오고 있고, 거기서 직접 확인하거나 새롭게 발견한 것들을 꾸준히 칼럼과 책으로 발표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 답사가 자신 혼자만의 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현대 도시를 답사하는 방법'을 1권의 1부로, 전체의 4분의 1에 달하는 분량으로 다루고 있다. 국가와 지배 집단은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국민을 이끌어 가기 위해, 거기에 유리한 것만 널리 알리고 그렇지 않은 것은 감추거나 없앤다. 그렇기 때문에 답사를 통해 내가 살아가는 나라와 지역을 바라보는 주체적인 관점을 기르는 것이 시민의 의무이자 권리라는 것이다. 독자들이 자신의 활동을 응원하고 동참할 것을 믿기에, 그는 독자들을 '동료 시민'이라 부른다.

'답사 방법'이라고 해서 전문적이거나 거창한 것은 아니다. 간판부터 화분, 장독대 같은 일상 풍경의 일부부터 문화주택, 공동주택, 개량 기와집, 아파트 등 우리 주변의 다양한 주택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상업 시설과 공공시설까지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꼼꼼히 살펴보는 것이다. 맞춤법과 글씨체를 통해 그 간판이 만들어진 시대와 지역의 개성을 발견할 수 있고, 자투리 공간에까지 독특한 무늬를 넣은 계단이나 대문, 창틀을 통해 평범한 시민의 예술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재개발로 인해 수년, 수십 년 동안 운영해 온 가게 문을 닫은 사람들이 남긴 폐업 인사에서 그들이 겪은 경제난과 한숨을 읽어낸다. 저자는 이런 평범한 사람들의 흔적, 역사를 사진과 글로 우리에게 전한다. 이들을 이야기할 때의 저자의 시선과 어조는 더없이 따뜻하다.

하지만 우리가 외면했던 역사, 기억하지 않으려는 역사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는 누구보다 단호하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처럼 평범한 사람들도 자기보다 더 취약한 처지에 있는 소수자들에게 가혹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이 그렇게 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성 노동으로 외화 벌이에 일조했지만 '양공주'로 손가락질당했던 미군 위안부 여성들, 한센병 환자 수용 시설 직원들의 손에, 새로 정착해서 살아가려고 한 땅의 주민들에게 살해당한 한센병 환자들,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경제 특수를 누린 한국인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던 베트남 난민들. 동료라 믿었던 남성 노동자들과 남성 지식인들에게도 외면당하고 국가의 폭력을 겪어야 했던 여성 노동자들. 국가가 그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그들을 외면하고 기억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만, 평범한 시민들도 그들을 핍박하고 차별하고 잊어버렸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그런 우리 안의 치부를 잊지 말고 직시하길 요구한다. 가장 약한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권리를 누릴 때 이 나라가 진정한 민주공화국이 되기 때문이다. 저자가 전국을 답사하고 독자들도 현대 한국 곳곳을 답사하길 바라는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자는 자신이 남성이고 지식인이며 자신의 생각을 전할 통로가 있다는 점에서, 자신이 과거의 남성 지식인들이 빠졌던 함정에 빠질 수도 있다고 스스로를 경계한다. 남에게만 엄격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엄격하기에, 잊혀가는 역사, 평범한 사람의 역사, 약한 사람의 역사를 향한 그의 진정성을 믿을 수 있다.

때때로 이런 역사들은 너무 참혹하고 비극적이어서 장엄한 유적, 영광스러운 역사로 눈을 돌리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 역사는 우리 자신의 역사고, 우리가 기억하지 않으면 누구도 대신 기억해 주지 않는다. 현대 한국 답사는 거창한 일이 아니다. 그저 무심코 지나친 것들에 다시 한번 주의를 기울이고 거기에 어떤 역사가 숨어 있는지 좀 더 찾아보고, 생각해 보고 기억하면 된다. 그 작은 발걸음에 『문헌학자의 현대 한국 답사기』는 길잡이가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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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3-27 04: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자의 발걸음이 진정한 역사를 보여주는 것 같네요.

바스티안 2024-03-27 08:33   좋아요 0 | URL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 약한 사람들의 역사야말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라는 저자의 주장에 머리를 맞은 듯했고, 전국을 직접 발로 밟으면서 작은 흔적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저자의 수고에 숙연해지더라고요. 제가 했던 답사들도 유명한 문화유산들을 방문하는 거여서 이런 관점으로는 생각 못 했었어요.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 주변에 남아 있는 흔적들을 무심히 지나치지 말고 더 주의 깊게 바라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거기에 어떤 역사가 남겨져 있을지 모르니까요.

호시우행 2024-03-27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시덕 저자를 기억하려합니다.

바스티안 2024-03-27 18:10   좋아요 0 | URL
따뜻한 문체에서나 독자들을 ‘동료 시민‘으로 부르는 데서나 단체나 국가 이름은 꼭 공식 명칭으로 불러주는 데서나 세심하고 따뜻한 분이라는 게 느껴졌어요. 저도 이분을 기억하려고 해요.
 

 '그대'라는 말은 일상적인 대화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데 대중가요에서는 왜 이렇게 자주 등장할까? '햅쌀'은 '쌀'이라는 명사에 '그해에 난'이라는 뜻의 접두사 '햇-'이 붙어서 만들어진 단어인데, 왜 '햇쌀'이 아니라 '햅쌀'일까? '케첩'이 원래 중국어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일상적인 말들에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우리 삶 속의 이야기들이다. 이 이야기들은 우리가 매일 듣는 노래에도, 매일 먹는 음식에도 숨어 있다. 여기, 일상적인 단어들에서 우리가 몰랐던, 또는 너무나 당연해서 무심코 지나쳤던 삶의 이야기들을 발견하는 책들이 있다. 



1920년대 초 유성기 음반으로 유행가가 발매되기 시작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우리 대중가요의 역사는 한 세기에 가깝다. 한 세기에 가까운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삶과 사랑, 시대의 단면들은 크게 달라졌고, 그에 따라 대중가요에서 쓰이는 말들도 달라지게 되었다. 이것을 뒤집어보면, 대중가요에서 쓰이는 말들의 변화를 통해 한 세기 동안 우리 대중가요를 듣고 부르던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도 살펴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저자는 음반으로 발매된 최초의 대중가요라고 알려진 <희망가>가 나온 1923년 이후 조사 작업이 이루어진 2016년까지 나온 26000여 곡의 가사를 분석했다.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가사 속에 특정한 단어들이 나타나는 빈도를 알아보고, 전체 말뭉치(언어 연구를 위해 컴퓨터가 읽고 처리할 수 있는 형태로 가공한 언어 자료)에서 그 단어들이 나타나는 빈도와 비교해 보았다. 왜 이 단어가 특히 노래 속에 자주 등장하는지, 일상에서보다 노래에서 자주 쓰이는지 분석해 보면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나온다. '그대'와 '당신'은 일상생활에서 잘 쓰이지 않지만 노래에서는 자주 등장하는데, 1990년대 이후로 점점 줄어들고 그 대신 '너'라는 2인칭대명사가 점점 더 많이 쓰이고 있다. '손위의 남자 형제'가 아닌 '연인'이라는 의미의 '오빠'는 2000년대에나 처음 등장한다. 술이 등장하는 노래 가사에는 '한 잔'이라는 단어가 따라 들어갈 때가 많다. 왜 그럴까? 이유를 알아보면서 우리는 노래 속에 담긴 우리 삶의 모습과, 그 모습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노래의 언어』의 저자가 『노래의 언어』를 쓰기 2년 전에 냈던 책이다. 『노래의 언어』가 가사 속 단어들의 빈도라는 수학적 통계를 활용한 반면, 『우리 음식의 언어』에서는 우리 음식을 가리키는 단어들과 그 어원을 언어학적으로 파헤친다. 하지만 노래 속 단어들이든 음식을 가리키는 단어들이든 그 안에 담긴 우리 일상의 단면들을 살펴보고, 그 일상이 어떻게 달라져 왔는지 살펴보고 있으니 『우리 음식의 언어』는 『노래의 언어』로 이어지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우리 음식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밥에서부터 시작해서 빵, 국수, 국, 채소, 고기 반찬, 생선 반찬, 후식까지 우리 음식을 종류별로 나눈 뒤 그 안에 속하는 음식들의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우리 음식을 가리키는 말들과 관련된 언어학적인 지식도 흥미롭지만, 음식 자체와 그 음식을 먹는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지식까지 얻을 수 있어 더 흥미롭다. 중간 중간에 저자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우리 음식의 언어를 더 쉽고 재미있게 설명한다.



  세 책 중 가장 나중에 읽었지만 사실은 가장 먼저 출간된 책이다. 『우리 음식의 언어』의 저자 한성우 교수는 『우리 음식의 언어』를 쓰면서 『음식의 언어』를 알게 되었고, 동업자에게 경외와 감사의 마음을 느끼면서도 그 동안 연구해 온 것을 빨리 결과물로 엮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직접 읽어보니 한성우 교수가 자극을 받았을 만하다. 다른 대륙에 있는 나라에 가려면 몇 개월씩 길고 지루한 항해를 해야 했던 그 옛날에도 음식과 그것을 가리키는 언어는 우리의 생각보다 더 멀리, 더 넓게 퍼져나가며 각각의 나라에 맞는 형태로 다양하게 변형되었다. 저자 댄 주래프스키는 케첩, 피시 앤 칩스, 칠면조, 마카롱 등 우리 주변의 음식이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느 나라들을 거쳐 지금의 모습과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흥미 있게 풀어낸다. 그 이야기 속에 음식의 세계 문화사가 담겨 있다.


  너무나 흔한 음식이지만 오래된 세계사를 품고 있는 음식이 케첩이다. 케첩은 원래 동남아시아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해 중국 푸젠성으로 이어진 생선 소스에서 유래했고, '케첩'이라는 명칭도 그 소스를 가리키는 푸젠성 방언에서 온 말이다('케'는 정확한 한자를 찾지 못했지만 '첩'은 한자 '즙(汁)'의 푸젠성 방언, 광둥어 발음이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중국 상인들과 무역을 하던 영국 선원들은 이국적이고 자극적인 소스 케첩을 좋아하게 되었고, 케첩은 영국에 수입되면서 조리법이 여러 가지로 변형되었다. 그러면서 주 재료인 생선이 빠지고 버섯, 호두, 토마토 등 원래 부 재료였던 것들이 주 재료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 중에서도 토마토가 케첩의 대표적인 재료가 되었고, 미국의 케첩 제조 회사들이 설탕과 식초를 더 많이 넣어 케첩의 저장성을 높이면서 토마토 케첩은 지금과 같이 새콤달콤한 맛이 되었다. 이렇게 케첩 하나만 들여다봐도 세계 경제와 무역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저자는 음식과 그것을 가리키는 언어와 관련된 문화사뿐만 아니라, 심리학과 음운학을 통해서도 음식의 언어를 들여다본다. 고급 레스토랑은 자신들이 내는 음식이 진짜 재료를 쓴 좋은 음식이라고 사람들이 믿을 것을 알기에, 메뉴에서 구구절절 설명을 하지 않는다. 반면 중간 가격대의 식당들은 손님들에게 자신들이 내온 음식이 진짜라는 확신을 주고 싶어서 '진짜'라는 것을 강조하고 맛있다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 온갖 수식어를 붙인다. 바삭바삭함이 생명인 크래커의 제품명들에는 삐죽삐죽한 느낌을 주는 자음인 T와 D가 많이 들어가지만, 풍부하고 부드러운 맛을 강조해야 하는 아이스크림의 제품명들에는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자음 L과 M이 많이 들어간다. 과거의 역사뿐만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음식과 그에 관련된 언어를 다양한 학문들로 풀어내고 있으니, 단순히 '문화사'가 아니라 '인문학'이라고 할 만하다.


  다만 한국 독자로서는 한국 음식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쉬울 수 있다. 아랍의 알코올 증류법에서 기원한 각 나라의 토산 증류주들은 '땀'이라는 뜻의 아랍어 '아라크'에서 유래한 이름들을 갖고 있다. 이 책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우리의 전통 증류식 소주는 고려시대 원나라에서 들어와 '아라길주'라고 불렸고, 지금도 전통 소주 제품들 중 '아락'이라는 말이 제품명에 들어간 것들이 여럿 있다. 여기서 우리나라의 소주도 저 멀리 아랍 지역에서 기원해 온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 개발된 발효된 콩 반죽이 일본의 미소 된장의 선조라는 것을 언급하는데, 그 중간에 있을 한국 된장은 왜 언급도 되지 않는지. 내가 한성우 교수고 『우리 음식의 언어』를 쓰기 전 이 책을 봤다면 우리 음식과 그에 관련된 언어만 집중해서 살펴보는 책을 쓰고 싶다는 자극을 받았을 것이다.



  내게 교정교열 일을 가르쳐 주셨던 선생님은 하루에 국어사전 몇 페이지만 읽어봐도 다양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분의 말처럼 언어에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쌓아온 다양한 분야의 다채로운 지식과 지혜가 녹아 있다. 이 세 권의 책을 통해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들에 어떤 역사와 문화, 지식들이 녹아 있는지 살펴본다면,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좀 더 이해하고 지식을 쌓아가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언어학, #언어, #인문학, #음식, #노래, #대중가요, #문화사, #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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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려 왔을 때 부모님이 '내 자식이 빨갱이라니'라고 한탄하실까 봐, 부모님이 보시지 않는 곳에 책을 두었다. 지금 정부 편을 들었다고 '얘가 좌파가 다 됐네'라고 말씀하시던 분들이니. 그분들에게 공산주의는 나라를 망치고 세상을 무너뜨리는 몹쓸 것일 뿐, 구체적으로 어떤 사상인지는 알지 못하신다. 나도 진보 성향이라면서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두루뭉술하게 알고 있을 뿐이고, 『공산당 선언』을 그때까지도 읽어보지 않았었다. 너무 늦었지만 한때 세상을 뒤흔들었던 이 고전을 직접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에 책을 펼쳤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라는 그 유명한 첫 구절을 지나 바로 다음 문단에 『공산당 선언』을 썼을 때가 아니라 지금의 이야기인가 싶은 부분이 나와 놀랐다. 


"정권을 잡은 반대파들에게서 공산주의적이라고 비난받지 않은 야당이 어디 있으며, 좀 더 진보적인 반대파나 반동적인 적수들에게 공산주의라는 낙인을 찍으며 비난하지 않는 야당이 어디 있겠는가?" p. 15.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후로 정권을 잡은 반대파들에게서 공산주의적이라고 비난받지 않은 야당이, 좀 더 진보적인 반대파에게 공산주의라는 낙인을 찍으며 비난하지 않은 야당이 있었던가. 반대파에게 '빨갱이'라는 비난을 퍼부은 정치 세력들은 자신들이 비난하는 반대파가 실제로 어떤 정치적 노선을 지니고 있는지는 상관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다. 저자들이 마치 먼 나라의 미래까지 들여다본 듯해 오싹하기까지 했다.


  페이지를 넘기니 지금의 이야기인가 싶은 이야기들이 더 많이 나온다. 자본주의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마냥 해맑던 내가 어른이 되고 스스로 생계를 꾸리게 되면서 느낀 자본주의의 비정함은, 백여 년 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을 썼을 때의 현실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부르주아들)은...인간과 인간 사이에 적나라한 이해관계, 무정한 현금 지불 외에 다른 어떤 끈도 남겨두지 않았다. 그들은 신앙심에서 우러나오는 경건한 광신, 기사의 열광, 속물적 애상의 성스러운 전율을 이기적 타산이라는 얼음같이 차가운 물 속에 익사시켰다. 부르주아지는 개인의 존엄을 교환 가치로 용해시켰고, 문서로 확인되고 정당하게 획득된 수많은 자유들을 단 하나의 비양심적인 상업 자유로 대체했다. 간단히 말해 그들은 종교적, 정치적 환상들로 은폐된 착취를 공공연하고 파렴치하며 직접적이고 무미건조한 착취로 바꿔 놓았다.

  부르주아지는 이제까지 존경받으며 경외의 대상이었던 모든 직업에서 그 신성한 후광을 걷어내 버렸다. 부르주아지는 의사, 법률가, 성직자, 시인, 학자 등을 자신들에게서 돈을 받는 임금 노동자로 바꿔놓았다. 

  부르주아지는 가족 관계 위에 드리워졌던 감동적이고 감상적인 베일을 찢고 그것을 순전한 금전 관계로 전환시켰다." -p. 18~19.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인간과 인간 관계의 본질을 변질시키는지 문학적인 문장들로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들의 자본주의 비판 중에서도 '개인의 존엄을 교환 가치로 용해시켰다'는 말이 특히 뼈저리게 와 닿는다. 나 자신이 잘 팔리지 않는 상품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면접 때마다 나의 상품 가치를 열심히 이야기하지만 면접관은 나보다 상품 가치가 더 높아 보이는 지원자를 선택한다. 그때마다 다시는 팔리지 않아 아무 데도 쓰이지 못한 채 영영 한구석으로 밀려나서 잊힐까 두렵다. 운이 좋아 내 노동력을 사는 사람이 나타나도, 나보다 더 적게 받고 더 빨리, 더 많이 일하며 불평하지 않는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까 걱정한다.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데 나 자신이 존엄하다고 주장해도 누가 그걸 믿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 모두는 교환 가치에 따라 거래되는 상품이 되었으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이해관계, 금전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저자들은 자본주의가 인간들과 그들 사이의 관계를 변질시킬 뿐만 아니라 스스로 붕괴할 가능성을 품고 있어 더욱 위험하다는 것을 폭로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스스로가 만들어낸 거대한 생산력을 주체하지 못하는 자본주의를 '자신이 주문을 외워 불러낸 괴물의 힘을 제어하지 못하는 마법사'에 비유한다. 상품의 생산과 소비의 균형이 깨지는 경제 공황은 사회 전체를 위기와 혼란에 빠뜨린다. 결국 자본주의는 몰락하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승리할 것이라는 그들의 예언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때때로 찾아오는 경제 공황은 자본주의를 대신할 새로운 경제 체제가 필요하지 않은지 의문을 품게 한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발전해 온 과정을 설명한 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부르주아들이 공산주의에 쏟는 비난들을 하나하나 반박한다. 부르주아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사적 소유를 폐지하려는 데 경악하지만, 90퍼센트의 사람들이 사적 소유를 할 수 없게 만든 것은 바로 부르주아들이라고. 사적 소유가 폐지되면 모든 노동이 중단되고 세상에는 게으름이 만연할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따지자면 노동하지 않으면서 얻기만 하는 부르주아 사회는 진작에 끝장났어야 했다고. 공산주의자들이 부인 공유제를 도입하려는 게 아니냐는 질문에는, 부인을 생산 도구로만 보기에 생산 도구를 공유하자는 주장을 부인 공유제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냐고 반박한다. 그러면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여성을 희롱하고 결혼을 했어도 부정을 저지르면서, 공산주의자들이 부도덕하다고 분개하는 부르주아들의 위선을 폭로한다. 정작 공산주의자들은 부인들이 단순히 생산 도구로만 여겨지는 지금의 상황을 타파하려고 하고 있다. 부르주아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신성한 가족 관계를 무너뜨린다고 하지만, 부모가 아이들을 착취하도록 방치하고 아이들을 노동 도구로 이용하는 것은 그들이다. 이렇게 부르주아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퍼붓는 비난을 뒤집어 당시 현실의 모순을 폭로하고 비판하고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철저히 현실에 입각해 사상을 펼쳐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병폐를 근본적으로 없애기 위해 그들이 선택한 해결책은 기존 사회의 질서를 철저하게 파괴하는 것이다.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프롤레타리아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 이들이 이야기하는 조치들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전체주의가 아닌 민주주의를 지향했지만, 그들이 제시한 정책들 중에는 전체주의로 흘러갈 위험이 있는 것들(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노동 강제, 국가의 수중에 운송 제도 집중 등)이 있다. 실제로 이후에 세워진 공산주의 국가들 중 말로만 공산주의이지 실제로는 전체주의가 되어버린 국가들도 많다. 


  하지만 고율의 누진세, 모든 아동의 무상 공공 교육, 모든 아동의 공장 노동 폐지 등 이들의 대안 중 지금의 우리 사회에도 영향을 미치거나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것들도 있다. 여성들을 아이를 생산하고 양육하는 도구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려는 태도에서도 페미니즘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생각하는 공산주의의 이상향은 모든 사람들의 뜻을 일치시키는 획일화된 사회가 아니라,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의 연대였다. 그곳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를 자유롭게 발전시켜, 사회 전체의 발전을 이끌어낸다. 


『공산당 선언』의 예언은 실현되지 않았고 지금의 세계에서는 너무나 낡아버렸다. 하지만 스스로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거대한 괴물이 되어버린 자본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정신, 가족 제도, 사회 질서 등 기존의 틀에 사람들을 가두려기보다는 그들이 실질적으로 인간답게, 자유롭게 살게 하기 위해 싸우려 했던 투쟁 정신은 아직도 생생하고, 앞으로도 영원히 낡지 않을 것이다. 



『공산당 선언』을 읽기 전 영국의 만화가 마틴 로슨이 그린 만화 버전 『공산당 선언』을 미리 읽어 보았다. 내가 읽은 책세상판 『공산당 선언』이 독일어 원문을 번역한 반면, 이 만화 버전은 영어판을 번역한 것이다. 하지만 엥겔스가 직접 감수한 1888년 영어판을 번역한 것이라니, 번역의 신뢰도는 그렇게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처음 『공산당 선언』을 읽은 나와 달리, 로슨은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 시기에 『공산당 선언』을 처음 읽었다. 열여섯 살짜리 소년의 눈에 『공산당 선언』은 얇지만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를 포괄하며 엄청난 권능을 지닌 책이었다. 그는 이때 받은 강렬한 인상을 수십 년 뒤 만화로 그려냈다. 


마틴 로슨의 만화 버전 『공산당 선언』에서 타이프라이터와 변기가 합쳐진 모습의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을 착취해 이윤을 얻어낸다. 종교조차 자본주의 앞에 힘을 잃은 현실을, 자본주의 앞에서 달아나는 성직자들로 묘사했다.


 페이지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지옥도가 넘실댄다. 타이프라이터 머리를 단 변기로 묘사되는 자본주의는 말 그대로 노동자들을 갈아내고 쥐어짜며 이윤을 얻어낸다. 노동자들은 아예 팔다리가 방직기의 나무 틀로 변해 버려 인간 기계가 되어버렸다. 강물은 노동자들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지옥도를 누비면서 자본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들이 하는 모든 대사는 『공산당 선언』에서 발췌한 것이다. 출판사에서는 대사 곳곳에 주석을 꼼꼼히 넣었다. 글자가 워낙 작아 대충 읽다가는 주석 표시를 놓칠 수 있다.


부르주아들 앞에서 스탠딩 코미디 쇼를 하는 마르크스는 온갖 야유와 아우성 속에서도 꿋꿋하게 부르주아들의 위선을 비판한다.


  부르주아들의 비난에 반박하는 내용은, 어느 클럽에서 스탠딩 코미디쇼를 하는 마르크스와 그에게 야유를 보내는 부르주아들로 각색했다. 이 만화에서 가장 박진감 있는 부분이다. 마르크스는 자기 앞에서 아우성치는 부르주아들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열변을 토한다. 부르주아들이 아내를 단순한 생산 도구로 간주한다는 부분에서는 공장의 기계가 되어 말 그대로 아이를 생산하는 여성들의 모습이 나온다. 그 위 컷에서는 아이들이 상품처럼 가득 실린 상자가 그려져 있고, 그 상자에는 '애새끼 제조 회사'라고 적혀 있다. 부르주아들의 성적 타락과 위선을 비판하는 다음 장면에서는 프롤레타리아 여성이 부르주아에게 성추행당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신랄한 비판은 거리낌 없이 세상의 추악함을 그려내는 그림체 덕분에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공산당 선언』은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는 강력한 마지막 구절로 마무리되고, 로슨은 그 구절과 함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처럼 노동자들을 이끄는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그려넣는다. 대단원의 마지막 장면으로 어울리는 모습이지만, 로슨의 만화는 이 장면으로 끝나지 않는다. 만화는『공산당 선언』이후의 모습까지 묘사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동상은 세월의 풍파를 겪어 녹아버렸고 공산주의는 무너졌다. 자본주의는 머리만 PC로 바꿔 단 채 노동자들을 페이스북으로 현혹시킨다. 거리에는 '유령이 떠돌고 있다'는 『공산당 선언』의 첫 구절이 낡은 스피커에서 희미하게 들려온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누군가는 그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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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난생 처음 한 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클래식 음악에 관심 있어?

B: <베토벤 바이러스할 때 잠깐 클래식에 빠졌었는데 지금은 그때만큼 좋아하지 않아사실 클래식 음악이어서가 아니라 이 시리즈 자체를 좋아해서 읽게 됐어. ‘난생 처음 한 번’ 공부한다는 제목을 줄여서 난처한’ 시리즈라고 부르는 인문 교양서인데너무 얕지도 너무 어렵지도 않아서 좋아해.

H: 난 좀 더 어려운 책들을 좋아하긴 하지만 이 책에도 호기심이 생기네.




H: 글씨가 두 가지 색으로 인쇄되어 있는 게 특이해.

B: 가상의 청자와 저자 사이의 대화 형식으로 되어 있거든그래서 독자는 청자에게 이입해서 저자에게 직접 클래식 강의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대사 색깔이 서로 다르니까 청자와 저자의 대사를 구분하기도 쉽고두 사람이 대화하고 있다는 느낌도 더 강해지고.



H: 그러네그런데 페이지 중간 중간에 있는 스피커 표시랑 QR 코드는 뭐야?

B: 포털사이트 QR 코드 검색이나 QR 코드 인식기 어플로 이 QR 코드를 인식하면그 QR 코드에 해당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페이지로 연결돼스피커 표시 아래에 숫자 보이지?



B: 시리즈 공식 사이트가 있어서음악 듣기 게시판에 가면 숫자 차례대로 스피커 표시가 되어 있는 음악들을 들을 수 있어.

H: 음악에 대한 책이니까 책을 읽으면서 음악을 직접 듣게 한다니괜찮은 아이디어네종이로 인쇄된 책을 QR 코드로 온라인 콘텐츠와 연결한다는 발상도 기발하고.



B: 사실 QR 코드로 음악 링크를 연결해서 직접 음악을 듣게 할 수 있게 한 건 이 책이 처음이 아냐몇 년 전에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클래식 노트』 라는 책에서 이미 시도했었어.

H: 기발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시리즈를 만든 사람들이 처음 생각해낸 건 아니었구나.

B: 이 책이 후발주자이긴 한데음원 링크 관리에서는 『클래식 노트』보다 낫다고 생각해『클래식 노트』는 유튜브에 있는 영상 링크를 활용하다 보니그 영상이 저작권 문제 때문에 삭제되면 음악을 들을 수 없거든그래서 지금은 연결되지 않는 링크가 꽤 많아그런데 난처한’ 클래식 수업 시리즈는 음원 링크가 모두 나오는지 관리하고 있더라고일단 내가 읽었을 때는 모든 음원 링크가 제대로 나왔어.

H: 이런 새로운 시도들도 좋지만 제일 중요한 건 내용이잖아내실이 있는 책이야?

B: 여기 악보 보이지곡의 특징이 어떤지 악보에 표시해서 보여주면서 그 부분만 음원으로 들을 수 있어코드 개념만 약간 아는 나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친절하게 하나하나 떠 먹여줘.

H: 음악에 대한 책이니까 음악을 제대로 다루는 게 좋네음악가들 신변잡기만 늘어놓는 게 아니라.


B: 음악가들의 개인사나 시대적 배경도 나오긴 하는데흥미를 끌기 위해서 넣은 내용이 아니어서 좋아그 음악가와 작품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내용들이야시대적 배경도 자세히 설명해 주니 역사 공부도 같이 하는 기분이 들어.

H: 음악 자체와 배경지식의 밸런스를 잘 잡고 있구나그런 점에서 괜찮은 음악책이네그런데 책 분량이 그렇게 많지 않아 보여글씨는 크고 여백은 많은데 책은 얇아.

B: 나도 그 점이 아쉬워이 책의 전 시리즈인 『난생 처음 한 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시리즈에 비하면 한 권 한 권의 분량이 절반 정도밖에 안 돼더 깊이 들어가고 내용이 더 풍성했으면 좋았을 텐데재미있는 책인데 분량이 적으니까맛있는 음식을 조금밖에 먹을 수 없는 것처럼 감질나나처럼 분량이 적은 게 아쉬웠는지 전편의 깊이는 어디로?’라고 쓴 단평도 있더라.

H: 이 정도 분량이 적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랑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야 하니까하지만 나도 다음 권들 분량은 좀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쪽이야다음 권들에선 좀 더 깊이 들어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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