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나쁜 여자
권오숙 외 지음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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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책을 고르다 자신이 당한 성폭력을 폭로한 여성에 관한 책을 발견했다. 그 여성이 세상의 온갖 비난을 견뎌내면서 목소리를 내는 모습을 그린 책인 줄 알았는데, 그 여성의 주장이 이러이러한 점에서 논리에 맞지 않으니 거짓임이 분명하다고 단정하는 책이었다. 이 책뿐 아니라 익명의 대중들은 미투 운동에 참여하는 여성들이 먼저 유혹했으면서 남성을 성폭력 가해자로 몰아가는 나쁜 여자라며 2차 가해를 가한다. 이런 '나쁜 여자' 이미지의 역사는 최초의 여성 이브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세계 모든 지역에 뿌리내려 있다. 이 책은 고대의 신화부터 현대의 문화 콘텐츠까지 다양한 매체에 나타난 나쁜 여자들의 모습을 살펴보고, 그러한 나쁜 여자 이미지가 어떻게 탄생하게 됐는지, 어떻게 그 시대의 남성 중심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는지 분석한다. 그런 다음 현대의 콘텐츠들 속 나쁜 여자들을 통해 현대의 나쁜 여자들이 어떻게 이런 낡은 여성관의 대안이 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이 책은 고대의 신화부터 현대의 영화, 웹툰까지 종적으로, 한 시대 안의 다양한 상황과 작품을 살펴보며 횡적으로 수천 년에 걸친 나쁜 여자 이미지를 살펴보고 있다. 열한 명의 학자들이 주제 하나씩을 맡아 소논문을 하나씩 썼다. 소논문의 형식이지만 일반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청소년들이나 일반 성인 독자들이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 썼다. 2022년에 출간된 책이라 최근의 작품들도 분석하거나 예시로 들고 있고 최근의 상황도 이야기하고 있어 독자들에게 더 친숙하게 느껴질 것이다(이것은 시간에 따라 약해질 수밖에 없는 장점이지만, 출간된 시점의 사회와 문화를 반영하고 기록한다고 달리 생각해 봐도 좋을 것이다).

책에 실린 열한 편의 논문을 관통하는 생각은 '나쁜 여자' 이미지에 남성들의 두려움이 투사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직접 낳았기에 자기 자식임이 확실한 여성과 달리, 남성은 여성을 성적으로 통제해야 여성이 낳은 자식이 자기 자신임을 확신할 수 있다. 그렇기에 강한 생식력을 지닌 고대 여신들은 남편을 배신하는 음탕한 악녀로 전락했다. 선한 신의 이름으로 싸워 이겨야 할 구체적인 대상이 있어야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던 기독교 성직자들은 힘없고 약한 여성들을 마녀로 몰아 고문하고 처형했다. 고전 소설에서 가부장제의 근본적인 모순은 해결되지 않은 채 <장화홍련전>의 계모 허씨, <사씨남정기>의 교채란, <심청전>의 뺑덕 어멈처럼 외부에서 들어온 여성들, 가부장제의 규범을 지키지 않은 여성들에게 모든 문제의 책임이 전가된다. 페미니즘 운동이 시작된 지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나쁜 여자'가 모든 문제의 원인이고 자신들이 누리던 것들을 빼앗아 갈 것이라는 두려움은 계속되고 있고, 그 실체 없는 두려움이 문화 콘텐츠들에도 반영되어 여성들을 억압하고 있다.

이런 두려움이 만들어낸 가부장제의 장벽은 여전히 허물 수 없는 것일까? 이 책의 저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남자들의 두려움과 욕망을 반영한 납작한 평면이었던 나쁜 여자 캐릭터들이, 자기 서사를 갖게 되고 점차 자기 목소리를 내며 자신이 처한 상황을 돌파해 가는 데서 희망을 본다. 여전히 가부장제와 남성 중심적 가치관은 공고하고, 최근에 만들어져 더 진전된 여성관을 반영하거나 여성들이 직접 만든 나쁜 여자 캐릭터들도 이 시대의 한계를 넘지 못하곤 한다. 가부장제를 일거에 허물 수는 없지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저자들은 보여준다.

남성뿐 아니라 여성 스스로도 자신과 다른 여성을 검열하고 억압하게 하는 나쁜 여자 이미지를 고찰하고, 그것을 떨쳐냄으로써 남성과 여성 모두의 건전한 판단과 여성 스스로의 긍정적 자아의식을 이끌어 낸다는 취지는 긍정적이다. 그리고 그 취지를 풍부한 예시와 명쾌한 설명, 거침없는 비판이 뒷받침해 준다. 하지만 눈에 잘 띄지 않는 표지 디자인과 화질이 떨어지는 흑백 도판이 아쉽다. 인터넷 서점의 판매 지수나 책 제목으로 검색한 결과를 봐도 일반 독자들에게 그렇게 많이 알려진 책은 아닌 것 같다. 표지 디자인을 좀 더 눈에 띄는 것으로, 흑백 도판을 컬러 도판으로 교체하고 더 홍보하면 더 많은 독자들에게 읽힐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이 연구자뿐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도 읽히고 우리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으면 한다고 대표 저자가 말했는데, 그 바람대로 더 많은 독자들에게 읽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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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적 상상력과 문화 - 개정판
정재서 외 지음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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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에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나 그 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 <올림포스 가디언>을 본 덕분에 그리스 로마 신화에 친숙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2010년대부터는 <토르> 등 북유럽 신화를 모티브로 한 슈퍼히어로 영화들이 개봉해 흥행에 성공했다. 이렇게 신화가 최근 몇십 년 동안 각광받는 이유는, 삭막하고 차가운 현대 사회에서 상상력의 원천이 되어주기 때문일 것이다. 신화와 관련된 책도 해마다 출판 시장에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대부분 특정 지역의 신화를 소개하는 책이나 미술, 철학, 심리학 같은 다른 분야에 신화를 한 방울 떨어뜨린 교양서, 일반 독자가 읽기에 너무 어려운 신화 연구서다. 가장 쉬운 책과 가장 어려운 책 사이의 징검다리 역할을 해줄 책을 찾기 어렵다.

이화여대에서 '신화적 상상력과 문화'라는 교양 수업의 교재로 쓰이는 이 책은, 신화 연구서는 아직 너무 어렵지만 단순히 신화라는 이야기 자체보다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알맞다. 여러 종류의 케이크를 한 판에 모아놓은 모둠 케이크처럼, 이 책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세계 여러 지역의 신화를 주제별로 소개하고 있고, 2부는 신화가 문학, 음악, 미술, 영화 등 문화 예술 작품에 미친 영향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3부는 다양한 신화 연구 이론, 분석 방법들을 설명하고 있다. 사실 각각의 부분만 해도 깊이 들어가면 책 한 권을 쓸 수 있을 만큼 많은 이야기가 나오지만, 한 권으로 신화라는 이야기 자체, 신화의 영향을 받은 작품 분석, 신화 관련 이론 세 가지를 모두 소개하려다 보니 아주 깊이 들어가지는 않는다. 중고등학생 정도의 지식을 갖춘 독자라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1부는 세계와 인류의 창조, 영웅의 모험과 귀환, 재앙과 형벌, 변신과 승화 등 전 세계 신화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주제에 따라 각 지역의 신화들을 소개하고 있다. 단순히 각 지역의 신화를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양한 지역의 신화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요소들과 그 의미까지도 설명해 주고 있다. 각 요소들이 상징하는 의미를 하나씩 짚어가다 보면, 고대 인류가 혼돈과 같은 원시 상태에서 문화와 역사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보인다. 신화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고대 인류의 정신과 문화, 역사를 반영하고 있는 유산인 것이다.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그리스 로마 신화뿐만 아니라 게르만 신화, 메소포타미아 신화, 이집트 신화, 인도 신화, 중국 신화, 한국 신화까지 다루고 있어, 그 신화를 낳은 문화권의 역사와 문화까지 살펴볼 수 있다. 한국 신화의 경우 단군 신화 등 일반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문헌 신화뿐만 아니라 무속 신화까지 소개하고 있는데, 다뤄야 할 내용이 워낙 많다 보니 아주 간략하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아쉽다.

2부는 문학과 음악, 미술, 연극, 영화 작품 중 신화를 모티브로 하거나 신화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각 예술 분야에 신화가 미친 영향을 다 이야기하려면 끝이 없기 때문에 각 분야 중 몇몇 대표적인 작품만 간략하게 소개하고 분석하고 있다. 그래서 '맛보기'의 느낌이 가장 강한 부분이다. 2023년 개정판에서는 2008년 초판에 실려 있던 <와호장룡>과 애니메이션 <헤라클레스>의 분석 대신 애니메이션 <겨울왕국 2>와 영화 <토르>의 분석이 실려 있다. 초판과 개정판 사이 15년 동안의 변화를 반영한 것일 텐데, 이후에 새로운 개정판이 나온다면 또 다른 새로운 작품이 그 자리를 대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대의 흐름에 발 맞춰서 조금씩 책을 보완하려는 노력이 보인다. 특히 <겨울왕국 2>의 분석에서는 애니메이션 속 다섯 정령과 동양 철학의 오행을 연결시킨 것이 신선하게 느껴진다.

신화학 이론과 연구 방법을 설명하는 3부는 이 책에서 가장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부분이다. 그러나 학부생들의 교양 강의 교재이기 때문에 깔끔하고 명쾌하게 각 이론을 정리하고 있다. 전문적인 용어나 개념은 예시를 들면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 엘리아데의 신화학 이론에 담긴 인종주의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등 좀 더 설명해 줬으면 하는 부분도 있지만, 분량의 한계 안에서는 최대한 친절하게 풀어냈다. 시험과 성적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일반 독자라면 더 마음 편히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강의 하나가 이 책 한 권에 담겨 있기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면 교양 강의 하나를 들은 것과 다름없다. 삶이 무미건조해 교양을 쌓고 싶다면, 신화라는 이야기 자체뿐만 아니라 그 이면의 의미, 신화가 여러 분야에 미친 영향까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은 좋은 읽을거리가 되어줄 것이다. 이 책에 간략하게 소개된 내용 중 더 자세히 알고 싶은 것이 있다면, 좀 더 구체적이고 학술적인 책으로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징검다리 삼아 더 풍성하고 깊이 있는 신화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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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숙녀 신사 여러분
유즈키 아사코 지음, 이정민 옮김 / 리드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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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부터 살펴보자. 한국어판 제목 '친애하는 숙녀 신사 여러분'은 흔히 쓰이는 환영 인사말 '신사 숙녀 여러분'을 살짝 비튼 것이다. 일본어 원제는 무엇이었을까? 직역하자면 '내친김에 신사분도(ついでにゼントルマン)'다. 이 제목을 이해하려면 작가 유즈키 아사코의 말을 들어봐야 한다. "'레이디스 앤 젠틀맨(ladies and gentlemen)'은 보통 번역하면 '신사 숙녀 여러분'이죠. 하지만 젠더 갭 지수가 세계 120위인 사회(일본을 가리킴)에서는 '여성 먼저, 그리고 내친김에 남성도'라고 생각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영어 제목도 '신사 뒤에 오는 것에 지쳐서(Tired of Taking a Backseat to Geltlemen)'다. 그러니 한국어판 제목은 원제와 작가의 의도, 영어 제목과 맞아떨어지는 제목이라고 할 수 있다.

  세 언어 버전의 제목 모두가 가리키는 것처럼 이 단편집은 확실히 여성의 이야기를 우선시하고 있다. 이 책에 실린 일곱 편의 단편 중 다섯 편이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고 여성의 일상과 꿈, 희망, 그리고 여성들 사이의 연대를 그리고 있다. 이 단편집 속 여성들은 목소리 높여 구호를 외치고 이념에 자기 삶을 바치지 않는다. 그저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고, 힘들 때는 서로 도우면서 삶의 고난들에 맞선다. 나무가 땅 속에 깊이 뿌리를 내려 자신을 지탱하고, 옆에 있는 나무들의 뿌리를 붙잡아 서로를 지탱해 주는 것처럼.

  그렇다고 이 책이 남성들을 아예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의 입장에 서서 그들을 이해하려는 남성, 여성들에게 손을 내밀고 함께 살아가려는 남성이라면 두 팔 벌려 환영한다. 「용사 다케루와 마법 나라의 공주」는 남성, 그것도 여성들에 대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남성이 주인공이지만, 그는 결국 여성들에게 품은 적개심과 오해를 풀고 여성들에게 협력하게 된다. 「서 있으면 시아버지라도 이용해라」 속 주인공의 전 시아버지는 집안일에는 손끝 하나 안 대던 모습에서 변화해, 직장에 나간 주인공 대신 집안일과 육아를 맡으면서 주인공의 진정한 가족이자 우군으로 거듭난다. 「키 작은 아저씨」의 노조에 교수와 「Come Come Kan!」, 「아파트 1층은 카페」의 유명 작가 기쿠치 간은 부와 명성을 모두 가진 기득권 남성이지만 여성들에게 훈계를 늘어놓거나 간섭하지 않는다. 늘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들을 존중하면서 그들에게 꼭 필요한 것을 제공해 준다. 이렇게 삶 속에서 스스로 변화한 덕분에 그들은 여성들과 공존하고 유대할 수 있게 된다.

  작가는 여성이 자기 삶을 스스로 지탱할 수 있는 힘도, 여성들 사이의 끈끈한 연대도, 남성이 진정으로 여성을 이해하고 공존할 수 있게 되는 계기도 모두 성실한 일상에서 나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은 상황에서도 단편들 속의 여성 주인공들은 묵묵히 자기 일을 하고 자신과 가족들을 돌보면서 매일의 일상이 유지되게 한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밥을 먹여주고 낙심한 사람에게는 위로를 해주고 어려운 미션은 힘과 지혜를 모아 함께 해결한다. 아내가 차려주는 밥을 앉아서 받아 먹기만 하던 남자는 집안일과 육아를 하면서 아내와 며느리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고, 며느리에게 진짜 가족이 되어준다. 그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을 지켜주고 그들을 강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일상의 힘이다.

  일곱 편의 단편 속 주인공들은 소설 밖의 우리와 다를 것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이런 일상의 힘을 지닌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외적인 조건이 뛰어나지 않아도 각자의 위엄과 품위를 지니고 있다. 「아기 띠와 불륜 초밥」의 아기 엄마는 고급 초밥집에 육아에 지쳐 초췌한 모습으로 등장해 손님들의 눈총을 사지만, 미식에 대해 누구보다 뛰어난 식견과 당당한 태도로 그곳에 있는 모두를 압도한다. 그 당당한 모습 덕분에 불륜 상대의 재력에 기대던 여성 손님들도 힘과 용기를 얻어, '이런 가게는 당신처럼 누군가에게 육아와 집안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만 즐길 수 있는 곳이냐'고 불륜 상대에게 따지고, 불륜 상대의 고급 자가용이 아니라 자신의 두 발로 집에 돌아간다. 「둔치 호텔에서 만나요」에서 주인공이 외모가 볼품없다고 무시했던 남자는 사실 육아에도 능숙하고 생활력도 강하며, 주인공보다 더 강단 있는 사람이었다.  「키 작은 아저씨」에서 부자들의 재력에 기대어 인생을 바꾸려고 했던 주인공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히 해내고 자신을 모욕하는 부자에게 당당히 맞섬으로써, 자신을 도우려 했던 부자들을 오히려 감화시킨다. 이들의 당당한 모습에서 일상을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작가의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은 다 고맙다'는 문장 하나에서도 작가가 가족을 위해, 다른 이를 위해 수고하는 사람들에게 고마워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 보인다.

  작가 자신이 육아와 가사 노동에 익숙한지, 모든 단편에서 생활감이 진하게 배어난다. 그러나 어떤 단편도 구질구질하거나 우울하지 않다. 퍽퍽한 현실 속에서도 등장인물들은 씩씩하고 발랄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딱히 더 나아지는 게 없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가족들과 저녁밥을 맛있게 먹고,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즐겁게 놀고, 수유 때문에 거의 2년 동안이나 마시지 못했던 와인을 즐긴다. 그렇게 순간을 즐길 줄 아는 낙천적인 태도에 유머 감각이 더해져 유쾌하게 읽을 수 있다. 악역이라고 할 수 있는 등장인물들은 주인공이나 조력자에게 쉽게 퇴치되거나 풍자의 대상이 된다. 애니메이션에서 매번 복수하겠다고 외치지만 결국 주인공에게 지고 마는 악당들 같아 위험하기보다는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 그들 때문에 괴롭더라도 그게 심각하거나 오래 지속될 위기는 아니기에 견딜 만하다.

  그런 데다 작가는 작품 속 현실에 판타지를 한 스푼 넣는다. 수십 년 전에 죽은 유명한 작가가 멘토가 되어 조언해 주고, 어렸을 때 즐겨 하던 고전 게임 속에 들어가 용사가 되는가 하면, 착하고 이해심 많은 부자들이 후원자가 되어준다. 이러한 판타지는 빵을 폭신폭신하게 만들어주는 이스트처럼 단편들 속 퍽퍽한 현실을 폭신폭신하게 만들고 동화 같은 분위기를 더해준다. 열심히 살아온 등장인물들에게 작가가 내리는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선물이 우리의 마음도 몽실몽실하게 만든다.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다. 「용사 다케루와 마법 나라의 공주」에서 다케루가 겪는 모험은 함께 전철의 여성 전용 칸을 습격하던 남성 동지들을 버리고 여성들을 돕는 계기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공주가 명예 대신 친구가 되는 것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다지만, 다케루는 그 전에도 남성 동지들에게 나름의 유대감을 느끼고 있었다. 다케루가 용사임에도 게임 속 평범한 백성들에게 응원은커녕 닦달만 당하는 상황도, 그가 여성에 대한 오해를 풀고 여성이 겪는 어려움을 이해하게 된 것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어 보인다. 애초에 습격을 주도한 사람이 다케루인데 남성 동지들을 내쫓아 줬다고 여성 전용 칸의 여성 승객들에게 박수와 환호를 받는 것은 개연성이 떨어진다. 소위 '역차별'을 둘러싼 갈등을 깊이 살펴보기보다는 다케루 개인의 갱생과 인간애 회복에 집중하려고 했는데, 정작 중요한 논점은 회피해 다케루가 여성들을 이해하고 연대하게 된 계기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이 단편집의 소설들이 따뜻하고 사랑스럽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소설 밖의 현실은 여전히 쉽지 않지만, 그러한 현실을 씩씩하게 헤치고 나아가는 주인공들은 사랑스럽다. 소설 밖 우리에게는 그들이 누렸던 판타지가 없지만, 그래도 그들의 당당한 태도,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자세는 가질 수 있다. 그렇기에 이 단편집은 산뜻한 화이트와인이나 소박한 가정식처럼 뒤끝이 무겁지 않으면서, 맛보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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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바비즌 - 여성의 독립와 야망, 연대와 해방의 불꽃이 되다
폴리나 브렌 지음, 홍한별 옮김 / 니케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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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1929년 출간된 수필집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에서 여성이 사회적 역량을 발휘하려면 경제적으로 자립해야 하며 자기만의 독립적 공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자기만의 방』이 출간되기 1년 전부터 1981년까지 53년 동안 오직 여성들에게만 자기만의 방을 제공한 여성 전용 호텔이 있었다. 『호텔 바비즌』은 뉴욕에서 여성 전용 숙박 시설로 명성이 높았던 ‘호텔 바비즌’과 그곳에 머물렀던 사람들, 그들을 둘러싼 시대를 망라하는 역사책이다.

호텔 바비즌이 문을 열었던 1920년대는 미국이 1차 세계대전의 전쟁 특수로 경제적 번영을 누렸던 호황기였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많은 여성들이 일하기 위해 대도시로 몰려왔다. 도시로 나간 딸이 여성 전용 호텔에서 묵는다고 하면 부모들은 안심했고, 도시로 온 여성 본인도 여성 전용 호텔에서는 안전한 자기만의 방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 수요 때문에 대도시에는 여성 전용 호텔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호텔 바비즌도 그중 하나였다. 시대적 상황이 변화하면서 다른 여성 전용 호텔들은 하나둘 문을 닫았지만, 호텔 바비즌은 50여 년 동안이나 여성 전용 호텔로 건재했다.

어떻게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여성 전용 숙박 시설로 존재할 수 있었을까? 호텔 바비즌은 젊고 매력적인 여성들이 머무는 공간이라는 이미지 때문이었다. 젊은 여성들은 독립을 향한 열망과 더 빛나는 존재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뉴욕으로 올라와 바비즌에 머물렀다. 배우 그레이스 켈리부터 타이태닉호 사고 생존자이자 여성 참정권 운동가인 몰리 브라운, 작가 실비아 플라스까지 한 시대를 빛낸 유명 여성 인사들이 한때 바비즌에서 살았다. 결국 이름을 널리 알리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각자의 꿈을 품고 뉴욕으로 왔던 수많은 여성들도 바비즌에 머물렀다. 저자는 투숙객 한 명 한 명의 일상부터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 시대적 상황까지, 미시사와 거시사를 넘나들며 20세기 미국 여성들의 역사를 재구성한다.

이 책은 바비즌에 도착해서 프런트 데스크를 통과해 자기 방에 들어가는 젊은 여성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그 뒤로 각자 다른 야망을 품었지만 같은 희망을 품은 여성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누군가의 딸이나 아내, 어머니로 머무는 것보다 더 나은 삶이 이곳에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다. 비서학교의 학생들부터 모델, 배우, 여성 잡지의 객원 편집자들까지 호텔 바비즌에 머물렀던 여성들은 각자의 분야에 자리 잡는 것을 넘어서 더 큰 명성과 성공을 얻기 위해 분투한다. 각자 분투하는 것을 넘어서, 고민을 들어주고, 성공을 축하하고, 실패를 위로하며 연대한다. 감정적인 연대를 넘어서서 일자리를 찾아주거나 함께 사업체를 세우며 실질적으로 힘을 더해준다. 부제 그대로 호텔 바비즌에서 일어났던 ‘여성의 독립과 야망, 연대와 해방’의 드라마가 독자들의 눈앞에 다시 펼쳐진다.

그러나 저자는 호텔 바비즌에 머물렀던 여성들의 희망만을 그리지 않는다. 희망만을 이야기하기에는 그녀들을 둘러싼 현실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경제 대공황 시기(1929년~1939년)에는 여성들이 남성 가장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며 눈총을 받았고, 1950년대에는 전쟁터에서 돌아온 백인 남성들이 권력을 휘두르면서 결국 여성의 종착지는 가정이라고 압박했다. 여성들의 평균 혼인 연령은 낮아졌고, 여성들 자신도 결혼이 안정적인 삶을 보장하는 길이라 믿었다. 바비즌의 투숙객 중에도 바비즌에 머물면서 자기 일을 하는 시기를 단지 결혼생활 전의 과도기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자신의 삶에서 가장 빛나던 시기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결혼하고 나서 다시 가정에 얽매이고 야망이 꺾인 투숙객들의 후일담은 독자들을 슬프게 한다. 저자는 그렇게 시대의 구속과 한계에 부딪히고 좌절해야 했던 여성들을 기리는 데 한 챕터를 할애한다. 이 챕터에서 그녀들을 향한 저자의 깊은 애정과 슬픔이 느껴진다.

책 속의 여성들이 시대의 한계에 부딪혔다면, 저자는 호텔 바비즌 자체의 한계에 부딪힌다. 호텔 바비즌은 여성 운동 단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상업 시설이었기 때문에, ‘젊고 매력적인 백인 중산층 여성’을 주 고객으로 삼고 그중에서도 성공한 유명인사들로 호텔을 홍보했다. 그러니 이 책에서 다루는 여성 중 대부분이 젊은 백인 중산층 여성일 수밖에 없다. 그 한계를 넘기 위해 저자는 젊지 않거나 백인이 아니거나 가난한 투숙객들의 삶도 적은 분량으로나마 다루고 있다. 여성지 『마드무아젤』의 객원 편집자 공모전 지원자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스펙을 지니고도 흑인이라는 이유로 선발되지 못할 뻔했고, 선발되고 나서도 미묘한 차별을 겪어야 했던 바버라 체이스의 사례를 통해 미국 역사 속에서 지워진 비백인 여성의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호텔의 이름을 빛낸 유명 투숙객들과 달리 혼자 쓸쓸히 방 안에서 자살한 투숙객들과, 어떤 성취도 이루지 못하고 노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구석의 작은 객실에 머무는 투숙객들은 호텔 바비즌의 그림자를 보여준다.

희망도 야망도 잃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간 투숙객들처럼 호텔 바비즌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쇠락했다. 새로운 여성 운동은 여성을 격리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했고, ‘여성 전용’은 낡은 개념이 되어 1981년부터 남성 투숙객을 받기 시작했다. 2000년대에 들어 바비즌은 콘도미니엄으로 재개장했지만 바비즌이 상징했던 한 시대는 분명히 끝났다. 호텔 바비즌은 지금 ‘여성 전용 숙박 시설’로서의 정체성을 잃었고, 가장 빛나던 시기에도 (주로) 백인 여성에게만 자기만의 방을 내어주었다는 한계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여성들이 자기만의 방을 갖고 그곳에서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주도할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여전히 여성들에게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기에, 호텔 바비즌은 여성이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의 좋은 선례로 기억되고 후대의 여성들에게 영감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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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영원의 시계방 초월 2
김희선 지음 / 허블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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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극작가 로드 설링은 “SF(Science Fiction)는 믿기 힘들지만 가능한 것을 그리며, 사이언스 판타지(Science Fantasy)는 믿기 힘들면서 불가능한 것을 그린다”고 정의했다. 그런 점에서 김희선의 SF 단편집 『빛과 영원의 시계방』은 사이언스 픽션보다는 사이언스 판타지에 가깝다. ‘과학 기술이 발전하면 미래에는 저런 일도 일어날 수 있겠지’라고 넘어갈 수 있는 이야기들도 있지만, 불가능하면서도 믿기 힘든, 아니,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이 본문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다.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현실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지루하고 답답하고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견고하기 때문에 우리가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의 등장인물들은 견고하게만 보였던 현실에 난 균열을 발견한다. 그 균열을 추적하다 보면 발밑을 단단하게 받치고 있던 현실 자체가 뒤집힌다. 비로소 알게 된 진실은 모르는 게 더 나았겠다 싶을 정도로 충격적이고 경악스럽다. 내가 단편 속 주인공들이라면 내가 잘못 본 거라고 무시해 버리거나 잊어버리고 현상 유지만 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어느 게 진실인지 확인해 보고 싶은 호기심에 손을 뻗어볼 것이다. 이런 공포와 매혹이 책 전반을 지배한다. 가가린이나 월명사처럼 유명한 실존 인물, 독재 정권 시절을 힘겹게 살아가야 했던 평범한 사람들 같은 현실적인 요소들은, 이 기묘한 이야기들에 현실감을 부여한다. 그래서 ‘뭐 어차피 다 지어낸 이야기인데’ 하고 안전한 현실로 돌아오려는 독자들의 발목을 붙잡는다.


  그러니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어떤 진실이 드러날지 두려우면서도 궁금해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소설을 읽게 된다. 그런데 책 속 단편들 중 대부분이 뭔가 더 일어날 것 같은 데서 끝난다. 누군가 ‘쌀 한 바가지를 쏟았는데 다 냉장고 밑으로 들어가 버린 것 같은 느낌’이라고 이 책을 평했는데, 그 표현이 딱 맞는다고 느꼈다. 진실의 전모를 밝히지 않아 더 많은 상상과 공포, 신비감을 불러일으키지만 그 뒤로 이야기를 더 풀어갔으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장편으로 발전시키면 좋지 않을까 싶은 단편들도 있다. 이야기 자체는 흥미롭게 전개되지만, 정작 발단 부분에서 멈춘 느낌이라 호불호는 갈릴 것 같다.


  이런 아쉬움 때문인지 각 단편들을 연결해 보게 된다. 각기 다른 곳에 실렸던 단편들을 다시 모은 단편집이라, 각 단편들이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현실, 우리의 정체성이 우리가 믿고 있는 것만큼이나 확고한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는 작가의 태도는 모든 단편을 관통한다. 그런 데다 같은 등장인물(로 보이는 인물)이 화자로 등장하거나 소재가 겹치거나 비슷한 상황이 일어나는 단편들이 있으니, 책 속 단편들 모두가 작가가 만든 거대한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아예 연작으로 만들거나 연결 고리를 조금만 더 넣었어도 흥미롭지 않았을까 한다. 몇몇 단편들의 공통된 화자인 ‘민간조사관(외국에서는 사립 탐정이라고 한다)’을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를 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 작가가 그렇게 못다 푼 이야기를 마저 풀어주지 않는다 해도, 각 단편에서 미처 다 풀리지 않은 이야기들은 ‘공간 서점’ 밑바닥에 숨은 진실처럼 책 속 어딘가에 숨어 자기 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P. S. 1. 「꿈의 귀환」에서 가가린과 몰로디노프가 서로의 이름에 부칭을 붙여서 부르는데, 러시아인들의 언어 습관을 정확히 반영한 것이다. 러시아인의 이름과 성 사이에는 누구의 아들/딸임을 나타내는 호칭인 ‘부칭(父稱)’이 붙는데, 아버지의 이름이 ‘알렉산드르’인 남자는 ‘알렉산드로비치’, 여자는 ‘알렉산드로브나’, 아버지의 이름이 ‘니콜라이’인 남자는 ‘니콜라예비치’, 여자는 ‘니콜라예브나’인 식이다. 서로 예의를 차려야 하는 사이인 사람이나 자기보다 높은 사람을 대할 때, 상대방의 이름에 부칭을 붙여 상대방을 부른다(예: 유리 알렉세예비치, 소피아 세묘노브나). 가가린과 몰로디노프는 피실험자와 실험자로서 공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처럼 부칭을 붙여서 상대방을 부르는 것이 맞다. 예전에 한 미국 작가의 단편에서 소련 정보요원이 상관을 부를 때 부칭을 붙이지 않는 것을 보고 몰입이 깨졌으니, 이런 디테일을 신경 쓰는 편이 좋다.

그런데 「오리진」에서 『고백록』의 저자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라고 하는데, 『고백록』의 저자는 고대 로마의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다. 저자가 혼동한 것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명백히 틀린 정보를 적은 것인지 모르겠다.


P. S. 2. 뒤표지에 실린 각 단편의 한 줄 소개에 스포일러가 있다. 뒤표지는 본문을 읽은 다음에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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