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각자 만의 불을 품고 모였다. 나는 이들의 손에 들려진 불들이 다음 세대를 위한 것임을 믿는다. 신은 알 것이다. 나의 태어나지 않은 딸을 위해 이 자리에 서 있노라고.'

-1970,11.27 빌리지 보이스, 비비언 고닉


1970년 미국 전역을 뜨겁게 달구었던 여성 해방 운동가들의 시위 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갔던 인물은 '빌리지 보이스' 소속 기자 비비언 고닉으로 그녀가 취재한 티그레이스 앳킨슨, 케이트 밀렛,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필리스 체슬러, 엘런 윌리스, 앨릭스 케이츠 슐먼 운동가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가면서 뉴욕 래디컬페미니스트 창설에 불씨를 싹트게 만들었다.




[독자가 내 시선을 그대로 따라 보도록, 허구를 창작하듯 서사를 설정했는데 그렇게 나 자신을 참여적 서술자로 활용하니 독자로 하여금 그날 밤 사건을 겪은 그대로 경험하고 내가 느낀 날 것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게 끔 할 수 있었다. 그 땐 미처 몰랐지만 나는 이미 '일인칭 저널리 즘(독자가 화자의 시선을 그대로 따라 보게 만드는 새로운 논픽션 저널리즘 양식)을 연습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비비언 고닉

1980년대 미디어 홍수의 시대 속에서 비비언 고닉은 날카로운 통찰력과 예리한 비판으로 우파와 좌파 지지층으로 부터 맹 공격을 받았지만 그녀가 개척한 일인칭 비평은 SNS시대의 1인 미디어 체제가 도입 되기 반 세기 전부터 독보적인 서사로 비평계에 새로운 물결을 선도 했다.

1970년대 세상을 뒤흔들며 강렬하게 들끓어 올랐던 페미니즘은 1980년대 부터 와해 되고 느슨해지면서 연대의 공감대가 무너졌고 비비언 고닉은 '이론과 실천의 괴리'사이에서 갈등하며 좌절을 거듭한 끝에 그동안 몸담았던 빌리지 보이스를 떠난다.

그녀는 대학원에 진학하고나서 사회적 공분을 불러 일으키는 공개적이고 비판적인 글쓰기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서서 다른 곳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분야를 찾기 시작한다.


그건 바로 '나'의 이야기를 쓰는 것으로 마흔다섯 살의 딸과 일흔 일곱 살의 어머니가 뉴욕의 거리를 걸으며 대화를 나누는 독특한 형식의 자서전 <사나운 애착>을 쓰기 시작하면서 눈앞의 소재에서 구출되기를 기다리는 귀중한 이야기를 찾아 다니는 진정한 글쟁이로 다시 태어난다.



'사람은 자신의 과거를 발견해야 한다. 나는 이 사실을 인정한다. 이것이 나의 직업이었다. 그래야만 우리의 한계를 알고 연민으로 삶을 견뎌낼 수 있다.'

-비비언 고닉


1990년대 부터 프린래서 작가가 된 비비언 고닉은 회고록과 에세이, 대학 강연과 각종 일간지 서평에 이름을 올렸지만 그녀가 출간 한 책들은 2000년대 들어서 절판을 하고 독자들 사이에서 잊혀진 존재가 된다.

2006년 여성 사회 운동가 타라나 버크가 미국에서도 가장 약자인 소수 인종 여성과 아동들이 성폭력, 언어 폭력,감금, 폭행등의 피해 사실을 함께 공유하고 연대해서 세상을 향해 용기 있는 목소리를 내어 추가 발생 피해자들을 막기 위한 운동 '미투 운동(Me Too Movement)'이 촉발된다.

그리고 지난 반 세기 전 페미니즘 물결의 선봉자들의 목소리를 적극 취재 했던 기자 '비비언 고닉'의 이름이 언론과 출판계에 오르내리기 시작한다.

지난 시절에 출간 되었던 그녀의 책들이 새로운 표지로 출간 되면서 페미니즘과 저널리즘을 강의 하는 강의 시간에 화자 되어 참고 도서로 읽혀지게 되었고 1987년에 발표한 자전적 회고록인 <사나운 애착>이 2015년에 재 출간 되면서 주요 신문의 서평란에 다시 등장하게 된다.

2015년 비비언 고닉의 <사나운 애착>은 미국 문단에서 지난 50년간 출간된 회고록 중에 최고의 회고록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20세기 100대 논픽션 라이브러리에 이름을 올렸다.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뭔가를 소유하는 데 무관심한 인간으로 통한다. 원하는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 같다고들웃는다. 나는 뭐든 이름도 잘 모르겠고 가짜와 진짜, 고급스러운 것과 평범한 것도 한눈에 알아차리지 못한다.]

-비비언 고닉의 '짝 없는 여자와 도시' 중에서


80세에 비로소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비비언 고닉은 영국 가디언지 인터뷰에서 '이젠 더이상 한 달 렌트비와 병원비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며 서서히 주변 지인들이 세상을 떠나거나 요양원에 들어 간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자신에게 남겨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했다.


[얼마 전 한 때는 잘 알았지만 한동안 들춰보지 않았던 책의 사실관계에 대한 질문을 받았는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당연히 몇 장 넘기다 보면 기억나지 않은 그 정보를 금세 찾을 거라 생각했다.]

-비비언 고닉의 <끝나지 않은 일 >중에서


세상 일을 까맣게 잊은 채 손에 책을 들고 있지 않았던 시간이 기억에 없었을 정도로 스스로 태어날 때 부터 책을 읽었다고 생각 했을 정도로 독서광이였던 비비언 고닉은 자신과 함께 나이를 먹어가고 있는 책장 속에 꽂혀진 책들을 정리하면서 그 책들을 다시 읽기 시작한다.


'내 경험으론 인생 초년에 중요했던 책을 다시 읽다 보면 긴 의자에 누워 정신분석을 받는 느낌이 들 때가 꽤 있다.'

-비비언 고닉


지난 시절에 읽은 책들을 하나 씩 다시 읽으면서 사회 경험이 별로 없고 세상 물정을 몰랐던 시기에 어떻게 '빌리지 보이스'에 기사 원고를 투고 했는지, 사회 깊숙이 스며있는 성차별과 어떻게 맞섰는지 날 것의 잔혹하고도 범상하고도 내밀한 비비언 고닉의 독특한 1인칭 자기 고백의 이야기를 들려 준다.

[ 나는 몇 편의 기사를 써낸 공격적인 스타일의 이혼한 서른다섯 살 ‘여자‘가 되어 뉴욕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허세 아래 혼란은 깊었고, 막막함 역시 엄청났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 날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리고 여기서 어떻게 나가지? ]


서른을 앞두고 결혼을 한 비비언 고닉은 1년 만에 이혼하고 뒤 이어 또 한번 결혼 하지만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두 번째 이혼을 한다.


'어느 영문학 교수가 손에 <아들과 연인>을 쥐어 주었을 때 나는 스무 살이었다.'


스무 살에 처음 읽은 D.H로런스의 <아들과 연인>은 이후 15년의 세월이 흘러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 후에 다시 펼쳐 들고 팔십세를 넘기고 나서 세 번째로 펼쳐 든다.


'앞 날을 바라보고 삶을 조망하면 산 채로 매장 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D.H로런스의 <아들과 연인> 중에서


성애 소설인가? 성장 소설인가? 마마보이의 성장기 인가? 라는 의문을 품으며 이 책을 펼쳐 들었을 당시에 비비언 고닉은 두 번째 이혼 절차를 밟고 있었거나, 언론사를 그만두고 떠돌이처럼 기사를 썼거나, 두 번의 이혼으로 어머니와 신경전을 벌이거나 그리고 마침내 어머니 마저 세상을 떠나고 홀로 남겨진다.

그녀가 인생의 매 순간 마다 펼쳐 보았던 D.H로런스의 <아들과 연인>에서 이상적인 삶, 교육받은 삶, 용감한 삶, 더 넓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 그리고 사랑만 추구 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반드시 쟁취해야 하는 목표가 있는 삶이 무엇인지 살아가는 지혜와 통찰에 이르기 까지 50년의 세월이 더 필요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무엇보다 독서는 머릿속 가득한 혼돈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며 순수하고 온전한 안식을 허한다. 이따금, 책 읽기만이 내게 살아갈 용기를 준다는 생각이 든다.'

-비비언 고닉


여든 넷의 고닉이 다시 읽기 시작한 책들은 D.H로런스의 <아들과 연인>,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마그리뜨 뒤라스,엘리자베스 보엔,델모어 슈워츠,나탈리아 긴츠부르크,J.L카, 팻 바커,도리스 레싱,토머스 하디까지 40년 전에 읽었던 책들로 오랜 세월 책장 속에 잠들어서 종이색이 바래지고 활자들까지 희미해진 책들이다.


[갑자기 40여년 전 쯤 내가 그은 게 틀림없는 밑줄이 주의를 붙들더니 다음에는 내가 동그라미 쳐둔 문단이 여백에 나란히 적힌 두 개의 느낌표가 눈에 띄었다. ]


밑줄이 그어진 페이지, 동그라미를 친 구절을 읽어나가던 고닉은 '뻔한 문장에 왜 밑줄을 그었을까? 넌 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거니? 이거 정말 흥미로운 대목인데 ?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면서 마치 고고학자들이 흩어져 있는 파편의 조각을 맞추듯이 새로운 시각으로 자신의 지난 삶과 현재의 삶을 되돌아 본다.

(c) vivian gornik house, lux magazine


그녀가 다시 읽기 시작한 책들은 총 아홉권(미국판에 있는 E.M포스터의 하워즈 엔드 작품에 대한 내용은 한국어판에서 빠짐, 미국판은 총 열권의 책이 언급됨)으로 지극히 사소하지만 개인적인 그녀의 인생에 큰 변화를 불러 일으켰던 책들이지만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은 책들도 있고 개인적으로 유대계 역사나 작가에 관해 큰 흥미가 없거나 배경 지식이 없다면 이 책은 전에 출간 된 책들 보다 그리 큰 감동이나 인상을 주지 못 할지 모른다.


이 책의 맨 첫장에 적혀 있는 작가 노트에서 비비언 고닉은 앞서 출간 된 책들 중에 문장과 문단을 인용 하거나 한 대목을 통쨰로 옮겨다 적어서 자기 표절을 서슴지 않게 했다고 독자들에게 고백한다.

80세를 넘긴 자기 자신이 다시 읽고 썼으니 독자들도 앞서 출간 된 책에서 언급했던 대목을 다시 읽는 것도 꽤 쓸모가 있을 것이라 판단한다며 양해를 구했다.

비비언 고닉이 다시 읽기 시작한 책들 중에서 나의 인생의 책은 딱 한 권으로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다시 읽고 또 읽는 작가, 출간된 모든 작품을 모조리 찾아 읽고 있으며 읽을 때 마다 필 사하며 새기는 작가는 단 한 명이다.


'나 한테 삶을 더 사랑하게 하는 작품들을 자주 써준 작가는 나탈리아 긴츠부르그다.'

-비비언 고닉


나는 이탈리아 사실주의 문학과 네오리얼리즘 시대와 나온 영화와 예술을 사랑한다.

가부장적인 사회와 지독할 정도로 카톨릭 신앙이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의 폭력이 들불 처럼 일어 났을 때 활발하게 활동했던 작가들 중에서 목숨 걸고 자유를 울부짖었던 남성작가들이 있다.


반면에 피난 도중에 홀로 아이를 낳고 양육하면서 저녁을 준비하는 사이에 먹을 것을 구하고 와서 내일 먹을 양식 걱정을 하지 않게 된 날에 총성 소리가 멎은 날에 배고픔에 칭얼거리는 아이들이 잠든 사이에 틈틈이 조각 조각 파편화 된 글을 쓴 작가 나탈리 긴츠부르그가 있다.












[전쟁이 일어났고 사람들은 수 많은 집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했다. 그래서 지금은 자신의 집에 있어도 예전처럼 편안하거나 안전하다는 기분을 느끼지 않는다. 어떤 상처는 치유되지 않는다.]

-나탈리아 긴츠부르그의 '인간의 자식' 중에서

시칠리아 팔레르모에서 태어나서 세살 무렵부터 토리노에 살았던 나탈리아 레비(결혼전 성)는 토리노 대학 생물학 교수 였던 아버지가 온갖 병균이 창궐한다는 이유로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트리에스테 출신의 유대계 아버지는 완고한 성격으로 첫 번째 결혼에서 낳은 장성한 아이들이 있었고 나탈리아의 어머니는 밀라노 태생의 독실한 카톨릭 집안에서 성장해서 현실성이 전혀 없는 몽상가적인 사람이였다.

어머니에게 개인 교습을 받았던 나탈리아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고 성이 다른 형제들과 어울리지 못한 채 세상과도 단절되어 어른들의 삶을 관찰 하는 고독한 아이였다.


[난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만 썼다. 그래서 시대를 기록한 소설을 기대하는 독자는 공백이 너무 많다고 반박할 수도 있다. 실제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지만 이 책을 소설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나탈리아 긴츠부르그의 '가족어 사전' 중에서


파시즘과 전쟁의 상흔이 사라졌던 시기인 1963년에 발표한 <가족어 사전>은 1930년 이탈리아 토리노의 한 가족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녀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실존 했던 인물이고 나이도 이름도 모두 허구가 아닌 실제 이름을 차용 했다고 소설 맨 앞장 서문을 통해 '기억'에 의지해 문학적 양식으로 쓴 회고록 이라고 밝혔다.


'가족어 사전'의 첫 장을 열면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아버지가 고함쳤다.

'교양 없는 짓 하지 마라.'

우리가 빵을 소스에 적셔 먹으면 이렇게 소리쳤다. '빵으로 접시 닦지 마라! 교양 없는 짓 하지 마라! 추잡스러운 짓 하지 마라!'

-나탈리아 긴츠부르그의 '가족어 사전' 중에서


사회적으로 존경 받고 명망 있는 학자였던 아버지는 무자비 할 정도로 가정에서 독재자로 군림했고 파시즘이 거세 질 수록 가족을 옭아맸다.

학교에 가지 않고 집안에만 있었던 어린 나탈리아는 집안의 공기의 기류를 바꾸며 끝도 없이 치닫는 감정적 폭력으로 몸과 마음이 멍든 가족의 모습을 기록한다.


[아버지의 다른 행동이 다 그렇듯이 중재 역시 폭력적이었다. 아버지는 달라붙어 상대를 두들겨 패고 있는 두 오빠 사이로 뛰어 들어가서 그들의 따귀를 때렸다. ]


나탈리아는 돈은 없지만 놀랍게도 가난하지도 않았던 집에서 벗어나서 겨우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지만 낙제를 하고 이 상처와 굴욕감을 글쓰기로 극복하기 위해 시를 쓰기 시작한다.


첫 단편 소설을 발표하고 나서 러시아 문학을 가르치는 오데사 출신의 유대인 레오네 긴츠부르그를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비로소 그녀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난다.

십대 후반의 나탈리아의 마음을 단 번에 사로잡은 레오네 긴츠부르그는 토리노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가르치며 작가로 활동하다 당국에 의해 반파시스트 운동의 핵심 인물로 지목되어 투옥 된다.

한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서로 미워하고 갈등 했던 형제들은 막내 나탈리아를 보호 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탈출을 도와 주고 나탈리아는 레오네가 감옥에서 출소 한 후 결혼을 한다.

유대인 박해가 극에 달 했을 때 나탈리아는 남편과 함께 두 아이를 데리고 아브루초 지방으로 추방 당하고 온 세상이 얼어 붙어 버린 한 겨울 추위 속에 남편은 비밀 경찰에게 끌려간다.




[내가 말하고 있는 마을에 왔을 때 처음에는 모든 얼굴이 다 똑같아 보였다. 여자들은 부자거나 가난하거나 젊거나 늙거나 생김새가 다 비슷했다. 대부분 이가 없었다]

-나탈리아 긴츠부르그의 '아부르초의 겨울' 중에서


두 아이들과 낯선 곳에 고립된 그녀는 이 시절 집중적으로 글을 쓰면서 언제 어떤 식으로 죽거나 끌려갈지 모른 상황 속에서 삶의 희망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전쟁이 끝나고 남편이 먼저 로마로 돌아가고 나탈리아는 갓 태어난 셋째 아이와 두 아이와 함께 유배지인 아브루초에 남지만 독일군의 침공으로 마을 전체가 폭격을 당한다.

그녀는 이웃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탈출해서 세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이 있는 로마로 돌아 오지만 만난지 28일 만에 남편은 독일 게슈타포에게 끌려가 처형 당한다.


[남편은 우리가 그 마을을 떠난지 몇 달이 채 되지 않아 로마의 레지나 코엘리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고독한 그의 죽음이 가져온 공포에 직면해서 그의 죽음에 앞선 고통 스러운 선택들 앞에서 이것이 지로네 가게에서 오렌지를 사서 눈 속을 산책하던 우리에게 벌어진 일이 맞는지 자문해보곤 한다. 그때 나는 바라는 게 다 충족되고 다양한 경험과 함께 하는 모험들이 가득한 평탄하고 행복한 미래가 찾아오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고 영원히 사라진 지금에서야, 이제야 그것을 알게 되었다.]

-나탈리아 긴츠부르그


자신에게 찾아 온 불행을 담담한 어조로 읊조리듯 이야기하는 나탈리아는 남편을 감옥에 보내 놓고 아이들과 유형지에서 살아가는 동안 비로소 결혼과 육아로 중단했던 글을 쓸 수 있는 시간과 여유가 생겨난다.

남편이 감옥에 투옥 되어 있는 동안 홀로 셋째 아이를 낳은 나탈리아에게 매일 매일 불안한 나날의 연속이였지만 유형지에서 3년 동안의 시간은 그녀를 작가로 살아 갈 수 있게 만든 시간이 되고 남편이 처형 당하고 나서는 행복했던 시절은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

나탈리아아는 세 아이와 함께 로마에서 삶을 다시 시작하며 에이나우디 출판사에서 근무를 시작한다.

이 출판사는 남편이 살아 생전 동료 교수와 함께 토리노에 차렸던 출판사 지사로 나탈리아는 이 출판사에서 유대계 출신의 작가 체사레 파베세, 이탈로 칼비노, 그리고 토리노 출신의 유대계 작가이자 홀로코스트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은 프리모 레비의 책을 출간하며 전후 이탈리아 문학의 황금시기를 맞이 하게 만드는 작품을 출간한다.

어린 시절 영어 개인 교습을 받았던 나탈리아는 뛰어난 영어 실력으로 번역일도 하며 틈틈이 자신의 글을 쓰며 동시대 작가들과 달리 정치적인 주제나, 전쟁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지극히 사소하지만 개인적인 이야기에 집중하며 어떤 문학적 사조에 관여하거나 휩쓸리지 않았다.

1950년에 영문학과 교수인 가브리엘레 발디와 재혼한 나탈리아는 그가 영국의 이탈리아 문화원장으로 근무 할 때 함께 체류하며 개인의 기억에서 벗어나 세상과 사회 그리고 현재의 삶에 대한 글을 쓴다.


1960년에 발표한 에세이 <나의 일>은 비비언 고닉, 리디아 데이비스,엘레나 페란테 , 데버라 리비등 현재 영미 문학계에서 독보적인 창작 활동을 펼치는 작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20대 후반에 들어섰지만 허구만 섞어보려 하면 한 줄도 생동감 있게 안 나오는 마당에 어떻게 위대한 미국 소설을 쓰겠다는 건지 막막하고 깜깜하기만 했다. 그런데 때마침 나탈리아 긴츠부르그의 에세이 '나의 일'을 읽었고 거기서 내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보았다.]

-비비언 고닉


지난 50년동안 가장 뛰어난 회고록으로 평가 받는 비비언 고닉의 '사나운 애착'의 첫 문단은 이런 장면으로 시작한다.


[나는 여덟 살이다. 엄마와 나는 아파트에서 나와 2층 층계참에 서 있다. 옆집 드러커 아줌마가 자기네 집 문을열고 담배를 피우고 있다. 엄마가 우리 집 문을 닫으면서 그 아줌마에게 말한다. ˝거기 서서 뭐해?˝ 아줌마는고갯짓으로 집 안을 가리킨다. ˝저 남자가 하자고 해서.

나 건드리려면 샤워부터 하라고 했지.˝ 나는 ‘저 남자가아줌마의 남편이라는 걸 안다. ‘남자‘는 언제나 남편이다.]

-비비언 고닉의 사나운 애착 중에서


1961년에 출간 된 나탈리아 긴츠부르그의 <저녁의 목소리>라는 작품을 펼치면 이런 장면이 등장한다.


-어머니가 말했다. '목구멍에 덩어리 같은 게 느껴져.'

-어머니가 말했다 ' (저 장군은) 어쩌면 머리숱이 저렇게 많니, 저 나이에!'

그분이 말했다. '개꼴이 얼마나 흉해졌는지 너 봤니?'

그래도 새 의사는 고혈압이 있는 걸 찾아냈지 뭐니? 난 항상 혈압이 낮았는데 항상..'

-나탈리아 긴츠부르그의 '저녁의 목소리' 중에서

이런 진부하면서도 지극히 사소한 대화들이 줄줄이 이어지고 도대체 이 사람들은 뭐지? 왜 이런 쓸데 없는 말을 하지 등등의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가 한 페이지 넘기고 다음 장면 그 다음 장면을 이어서 읽어나가다 보면 전쟁의 한 복판에서 살고 있는 이들의 삶에 스며들어온 살의와 두려움 그리고 전쟁의 무서움 보다 더 끔찍한 굶주림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비비언 고닉은 나탈리아 긴츠부르그의 글을 처음 읽고 두 번째 읽을 때 부터 마치 자신 안에 잠재 된 가능성을 발견하며 스승이 직접 작가의 삶이란 이런 거다. 창작을 하는 건 이런거다라는 걸 시연해 보여 주기라도 한 것처럼 흥분과 전율에 사로잡힌다.


2022년에 출간 한 나탈리아 긴츠부르크의 소설 <All Our Yesterdays>의 서문을 21세기 샐린저로 불리는 아일랜드 출신 작가 샐리 루니가 썼다.

그녀는 서문에서 이 작품이 지금까지 읽은 어떤 소설 보다 완벽한 작품, 완벽한 서사로 나탈리아 긴츠부르그가 구사하는 모든 문장이 마치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 하듯, 삶을 엿본듯 표현해서 소름이 끼친다고 솔직한 심경을 드러냈다.

전쟁이 발발하고 가족과 뿔뿔이 흩어지고 형제들과 남편은 감옥에 투옥되고 홀로 아이를 낳는 동안에도 글을 썼던 나탈리아는 글을 쓰는 동안에 상상 할 수 없을 정도로 세상이 쪼개지고 갈라지며 그칠 줄 모를 정도로 폭탄이 쏟아지는 지옥의 시절을 견뎌 냈다.

이런 삶을 견뎌 내며 글을 쓰고 살아 남아 문학역사에 이름을 새긴 작가들이 많고 남편을 잃고 홀로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필사적으로 글을 쓰고 마침내 문학상을 거머쥔 작가들도 있다.

그런데 수 많은 작가들이 나탈리아 긴츠부르그를 글쓰기 스승을 삼고 칭송 하며 여러 번 반복해서 읽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탈리아 중등 과정 교과서에 실리는 <가족어 사전>에 이런 문단이 나온다.


[알베르토는 휴일을 맞아 학교에서 집에 와서 식탁에 앉아 오믈렛을 먹으려 하면 종이 울렸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교장이 방에 들어와 말했다.

'오믈렛은 나이프로 써는 게 아니라고 한 번 더 말해줘야 겠구나!'

그리고 다시 종이 울리면 교장이 사라졌다. 아버지는 이제 스키를 타러 가지 않았다. 나이가 너무 많이 들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늘 그랬다.

'산이라니! 위험천만한 곳이지!' 어머니는 스키를 탈 줄 몰랐고, 실내에만 있었다. 그러나 막상 남편이 스키를 타지 않는다고 하니 아쉬워 했다.]

-나탈리아 긴츠버그의 '가족어 사전' 중에서

과거와 현재가 뒤죽 박죽인 시점 사이로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화가 초현실적이면서도 눈 앞에 모든 인물들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쉬게 묘사 했다.

이런 스타일의 글쓰기는 후대에 모더니즘 적인 기법으로 1994년생 밀리니얼 세대 작가 샐리 루니가 <노멀 피플>에서 차용한 기법 중 하나다.



[나의 일은 글을 쓰는 것이다. 나는 그걸 오래 전 부터 잘 알고 있다. 내 말을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나는 내가 쓸 수 있는 글의 가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아는 건 글을 쓰는 게 내 일이라는 사실이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 편안함을 느끼며 내가 특히 잘 아는 것 같은 본래의 영역 안에서 움직인다. 내가 잘 알고 친숙한 도구들을 사용하는데 그것들이 내 손에 딱 맞는 게 느껴진다. 다른 일을 한다면, 가령 외국어를 공부하거나 역사나 지리나 속기를 배워보려 하거나 대중 앞에서 말을 하거나 뜨개질을 하거나 여행을 떠나려고 한다면 나는 괴로워하며 다른 사람들은 그런 일을 어떻게 하는지 끊임없이 궁금해 했을 것이다.]

-나탈리아 긴츠부르그의 <나의 일> 중에서


비비언 고닉에게 스승 같은 글쓰기 교본이자 너는 작가가 될 수 있다는 에피파니 였던 이 에세이를 나는 안정된 환경을 보장해 주었던 런던을 떠나 북서쪽에 위치한 고풍스러운 중세 시대 건물로 에워 싸인 대학의 도시에서 고군분투 하던 시절에 처음 읽었다.


[우리는 이미 눈물이 말라버린 사람들이다. 우리 부모가 감동했던 것에 우리는 전혀 감동하지 않는다. 모두 사색 하고 공부하고 자신의 삶을 평화롭게 가꾸어나가길 기대했다. 그때는 다른 시대였고 아마 그 나름대로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고뇌의 끈을 끊어버리지 못한다. 그래도 궁극적으로는 인간으로서의 우리 운명에 만족한다.]

-나탈리아 긴츠부르그


그동안 내가 읽은 어떤 작가도 이런 문장을 쓰지 않았고 이런 목소리로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았다.

일상에서 겪은 경험들과 목격한 것들에 대해 이토록 치열한 성찰과 인간 심리에 대해 예리한 관찰력으로 글을 남긴 작가는 나탈리아 긴츠부르그가 유일하다.

최고의 에세이스트, 저널리스트, 독보적인 이야기를 구사하는 작가들로 칭송 받고 있는 비비언 고닉, 리디아 데이비스 ,엘레나 페란테 그리고 데버라 리비의 작품들은 출간 되면 챙겨 읽지만 전 작품을 섭렵하며 수시로 들춰 보지 않는다.


우리는 허구의 이야기가 넘쳐 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유툽이나 OTT에 온갖 이야기가 넘쳐 나고 있고 게임 세상에도 온통 이야기 천지고 예능과 웹툰까지 모든 것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긴츠부르그는 고립된 외톨이 어린 시절부터 피와 폭력의 파시즘 시대에 유형 생활과 전쟁 중 피난 생활 그리고 종전 후 비로소 성인으로 성장한 아이들을 지켜보며 인간이 한 시대를 통과 하며 비로소 어른으로 성장 하는 과정을 글로 엮어 냈다.

나탈리아 긴츠부르그는 이 과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앞에 있는 사람만 바라보는 대신 뒤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기 시작할 때 내 뒤에서 침묵하는 죽은 사람의 존재를 느낄 때 미약 하나마 자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비로소 어른이 된다.]

-나탈리아 긴츠부르그


우리는 언제 어른이 될까?

언제 비로소 이 세상에 어른 같은 삶을 살아 갈 수 있을까?

어른이 되었지만 나는 이 세상에 어떤 권력이나 위세를 행세 하지 못하는 미약한 어른으로 하루 하루 성실하게 일해서 꼬박 꼬박 세금이 털려나가는 유리 지갑을 갖고 있다.

만일 권력을 갖고 있다면 한번 쯤 위세나 가식을 떨며 모순투성이의 나라는 결점을 세상에 숨기게 될지 모른다.

나에게 세상을 향한 권력이 없기 때문에 나는 날마다 새로운 나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내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끊임없이 읽고 쓰고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야기의 끝은 단 하나다.

결국엔 우리 모두 죽는다. 사랑하는 이들, 미워 하는 이들 모두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것이고 이 땅의 행성도 엔트로피가 최대가 되는 열평형 상태에 도달하게 되면 우주 속 먼지가루가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이 모든 것이 사라져서 텅 빈 공 空의 상태가 될 것이다.

그토록 치열하게 요란을 떨 정도로 열심히 오만하게 살았던 생명체들 모두 무無로 존재 하지 않은 상태, 모두가 0의 지점에서 끝이 난다.

이런 진실을 알고 있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듯, 끝이 죽음이 아니라는 듯 살아간다.

바쁘게 하루 하루 일분 일초를 낭비하지 않고 살아도 텅 빈 공 空의 상태는 채워지지도 않고 영원히 사라지지도 않는다.

이 텅 빈 공 空의 상태를 알아차리는 순간 허무와 우울 그리고 모든 것이 헛되어 보이고 커다란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

이런 나약함을 극복하기 위해 다른 이들이 살아 온 모습을 통해 용기와 희망을 얻기도 하고 무언가에 몰두하고 열의를 쏟아 부으며 견디고 극복한다.

1935년생 비비언 고닉은 아흔 살을 앞두고 있다.

그녀는 매일 친구들의 안부를 물으며 하루를 시작하고 쉼없이 걷고 읽고 쓰며 정신과 육체가 온전 할 때 더 열심히 하루를 보내고 있다.

84세부터 지난 시절의 책들을 다시 읽기 시작한 비비언 고닉은 읽는 자는 영원히 늙지 않고 성장한다는 말을 했다.

그녀는 회고록, 사회비평, 심층 심리 탐구와 문학 비평으로 글쓰기 영역을 넓혀 나가며 과거의 기억과 의식을 과감하게 받아들이고 끌어 안으면서 영원히 자신을 탐구하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있다.

롤랑 바르트는 다시 읽기 과정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다시 읽기 과정은 자신의 지난 시절에 고착된 기억과 생각을 되돌아 보고 뜯어 고치고 개혁하는 힘든 과정이다. 기존의 습관을 바꾸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듯이 다시 읽기 과정은 자아를 재 발견하게 되어 다시 읽기 시작하는 순간 부터 인간은 새로 태어나게 된다.'



비비언 고닉은 다시 읽어야 할 책들이 많아서 더 오래 살고 싶다며 세상이 변하고 나이가 들어가는 것에 절대 두려워 하지 말고 읽고 쓰는 통합된 자아를 갖춘 지식인으로 거듭 태어나라는 조언을 했다.

'나는 여전히 대문자 L로 적힌 Life 삶의 압력을 느끼려고 읽는다.'

-비비언 고닉

2024년 1월 부터 대대적으로 책장을 정리하며 곳곳에 쌓아 놓은 책탑에 책들 중 다시 읽고 싶은 책들을 추려 내고 있다.

볼거리가 넘쳐 나는 세상에 다시 읽기에 시간을 할애 하는 것이 좀처럼 쉽지 않다.

드라마 한 편은 빨리 돌려 보고 되감아 보면서 한 시리즈를 하루 몇 시간 만에 정주행 할 수 있지만 장편 소설을 다시 읽는 데는 시간 뿐만 아니라 고도의 집중력과 끈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다시 읽어 나가면서 전에는 이해해 보지 못했던 것들, 인간관계 그리고 이 세상의 한 부분을 이제는 경험하고 체득했기에 또 다른 나의 자아를 들춰 볼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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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4-05-20 22: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끝나지 않은 일>을 조금씩 읽고 있는데 읽으면서 ‘소설 다시 읽기‘에 대해 감명을 받고 있어요.
스콧 님도 다시 읽고 싶은 책을 추려내셨군요. 어떤 책일런지?^^

Life 삶의 압력을 느끼려고 읽는다.
고닉은 참 존경스럽습니다.^^

초란공 2024-05-21 0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비언 고닉에 대해, 나탈리아 긴즈부릌크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되어 반깁고 기쁘네요! 정성이 담긴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요사이 ‘읽기’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있어요. 읽을 수 있는 책은 한계가 있고, 눈은 나빠지고, 집중력과 체력은 바닥나고있어서 더 그렇기도 하구요. ^^;
 
붉은 옷의 어둠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
미쓰다 신조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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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 대전 중에 히로시마 우지나에 있는 육군 선박포병교도대에 소속되었던 '모토로이 하야타'가 승선한 무장선이 부산해협에서 침몰한 뒤 우지나로 돌아 왔을 때 타고 나갈 배가 단 한 척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야타는 남아 있는 연료조차 없어서 고립 된 와중에 어느 날 만주 건국대학에서 함께 공부한 동기 몇 명과 함께 대학 은사를 만나려고 노우미 섬으로 건너간다.

​모토로이 하야타가 은사의 집이 있는 노우미 섬에 체류하는 동안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서둘러 우지나로 돌아와 곧바로 폭탄이 투하된 지역을 돌아다니며 구호 활동을 펼치던 중 동료들은 방사선에 피폭 되어 죽었고 그만 살아남게 된다.

일본이 미국에 무조건 항복을 하자 패전과 함께 하이타가 소속된 육군 선박 포병 교도대가 해산한다.


[당연히 너는 앞날을 진지하게 생각하며 고민하고 있을 테지만 그런 일은 혼자 고민해봤자 제대로 된 결론을 내릴 수 없으니까 일단 이리로 놀러와라.]


하야타는 우연 곡절 끝에 도쿄로 올라와 여러 번 전차를 갈아타서 마침내 대학 동창인 가이 신이치와 약속한 우에노 역에 도착하자마자 전쟁 이전과 전혀 다른 세상이 되어버린 모습에 큰 충격을 받는다.

도쿄의 주요 번화가 들은 거듭된 공습으로 초토화 되었고 온갖 물건들을 불법으로 거래하는 거대한 암시장에는 국가의 통제 밖에 있는 이들의 주요 활동 무대가 되었다.

전쟁 전에 노점을 관리했던 조직인 데키야가 도쿄 곳곳에 은밀하게 퍼져 있는 암시장을 관리하는 동안 일본군 징용으로 끌려 온 중국과 조선, 대만 사람들이 패전 후 일본에 남아 장터를 차지 하면서 서로 간의 영역을 다툼이 시작되었다.

전쟁 고아들과 교도소에서 출소한 이들, 거리의 부랑아들이 데키야 조직과 야쿠자 조직에 합류하면서 암시장의 규모는 거대해 졌고 이곳에선 일본의 법이 적용되지 않는 무법의 영역이 되었다.

화물 운반 거룻배 운항일을 하는 집안 출신인 하야타와 데키야 두목의 아들인 신이치는 패전 후 나라를 위해 무언가 해야 한다는 공통된 신념을 갖고 있었다.

하야타는 편입한 대학에서 민속학을 전공하고 국가 재건에 보탬이 되기 위해 탄광촌에 뛰어 들어가서 그곳 탄광 종사자들이 살고 있던 주택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을 해결 하고 심리적 변화를 일으키며 사회에 존재하고 있는 검은 세력의 배후를 쫓겠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그의 친구 신이치는 데키야 조직을 이끄는 아버지를 통해 쇠퇴의 길을 가고 있는 암시장에서 발생하고 있는 괴이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친구 하야타에게 해준다.


'해가 지며 어디선가 빨간 망토를 입은 괴인이 나타나 아이를 유괴해 죽인다.'


마을에 전설 처럼 내려왔던 괴담이 1906년 2월 11일 밤 후쿠이현 사카이군 미쿠니초에 있는 선박 화물 중개상 하시모토 리스케가 운영하는 상점에서 발생한다.

비좁은 미로 같은 붉은 암시장 거리에는 여성들을 뒤쫓는 '붉은 옷'의 정체불명의 괴인이 잔혹한 살인으로 시장 사람들을 공포 속으로 몰아 넣는 무시 무시한 사건이 발생하자 신이치는 이 암시장을 좌지우지 하는 상인 조합의 보스인 삼촌에게 자신의 대학 동창인 친구 하야타를 소개 하며 이들은 괴이한 살인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정체 불명의 '붉은 옷'을 입은 자가 저지르는 살인 사건은 미로처럼 얽혀 있는 곳에 있는 상점들마다 붙어 있는 밀실 공간으로 하야타가 이 사건을 추적하고 쫓기고 미행 당하는 동안 1936년 육군의 친황파 청년 장교들인 일으킨 2.26쿠데타 사건부터 일본이 일으킨 대동아 전쟁부터 전쟁 중 아시아 전역에 퍼져 있는 군부대에 위안소를 설치해 놓고 중국과 한국, 대만의 미성년자 여자 아이들을 끌어다가 몹쓸 짓을 하게 하고 잔혹한 방법으로 죽이거나 버려 버린 20세기 최악의 비극적인 사건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붉은 노을이 진 깊은 밤, 붉은 옷에

쫓겨 도망친 게 어느 날 밤이었나.

가게 계산대의 매상을

데키야에게 넘긴 건 환각이었을까

열 다섯 누나는 어둠이 되어

고향에 보내는 소식도 끊겼네

붉은 노을이 진 깊은 밤, 붉은 옷을

바라 보고 있어요. 바로 뒤에서

일본 땅 어디에도 주소지를 두고 살지 못했던 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던 붉은 미로의 판자촌 기사이치유가장의 밀실에서 발생한 사건은 단순히 희대의 살인마가 저지른 사건이 아니였다.

전쟁을 시작한 일본 땅의 남자들을 위해 한반도와 중국 전역 그리고 아시아 곳곳에서 끌려온 소녀들은 전쟁에 패배하는 날 부터 짐승 같이 죽거나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일본 땅 빈민굴에서 숨어 살며 어둠의 세력이 되고 그 어둠의 세력들은 또 다른 약자들의 피와 땀을 착취하며 살아간다.

작가 미쓰다 신조는 20세기 총과 칼로 무장해서 이웃 국가의 무고한 생명들을 마구 짓밟았던 일본에게 강제로 끌려가서 간신히 죽음의 사선에서 살아 남았지만 돌아갈 집도 가족도 모두 잃어 버린 한국인들과 중국인들 그리고 전쟁 고아들이 일본 땅에서 어떻게 살아갔는지 모토로이 하야타라는 20대 청춘이 붉은 옷을 입고 여자와 아이들을 잔혹하게 죽이는 희대의 살인마를 뒤쫓으면서 근대 암울한 역사의 현장을 생생하게 묘사 했다.


이 책의 맨 마지막 장에는 작가 미쓰다 신조가 참고한 문헌에 대한 기록이 두 장에 걸쳐 적혀 있다.

일본 고전문학 전집 부터 시작한 참고 문헌은 숨겨진 전쟁 기록- 도쿄 암시장- 매매춘의 근현대사- 아무도 모르는 국가 매춘 명령-종전 직후의 일본 교과서에 실려 있지 않은 점령하의 일본- 불타버린 벌판의 암시장- 환락가는 암시장에서 탄생했다. - 0년 도쿄 블랙홀-역의 아이의 싸움 이야기하기 시작한 전쟁고아-중국 전선, 한 일본인 병사의 일기 1937년 8월- 1939년 침략과 가해의 일상 까지 작가는 오랜 기간동안 일본이 동아사이와 한국 땅에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소설적 상상력으로 버무린 허구의 세계가 아닌 진실을 추적하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했다.

일본은 무모하게 전선을 확대 시켜 나가면서 한국인들의 집안에서 쓰는 가제도구는 물론이고 산과 들 그리고 가축과 짐승들까지 모조리 빼앗아서 군수 물자로 썼고 소녀들을 납치하거나 돈을 많이 주는 공장에서 일하게 해준다고 거짓말을 하고 군부대 마다 차려 놓은 위안소로 끌고 갔다.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나 형무소 생활을 하는 죄인들까지 모조리 끌고 간 일본은 아시아 전선에 군수물자를 보내지 않고 한반도 땅에서 빼앗은 금과 은, 구리 그리고 땅 속 깊은 곳에 파묻힌 광물을 모조리 군수 공장으로 보내 무기를 제조하는데 쏟아 부었고 각 전선마다 배치된 군부대들에게는 철저하게 현지에서 조달하라고 명령했다.

총과 칼로 무장한 일본 군인들은 중국 난징 시를 살육의 처형장으로 만들어 버렸고 만주 전역과 대만 본토에는 희귀한 나무와 나비들까지 전부 뽑아버리거나 멸종 시켰고 일본 땅에서 발발한 간토 대지진 당시 일본 민간인들은 한국인들을 잔혹한 방법으로 살해하고 몰살 시켜 버렸다.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의 가죽을 벗겨 먹었던 일본 군인들은 국가의 명령을 받아 인간으로서 도저히 저지를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고 전쟁에서 무조건 승리 하기 위해 일본은 '메스암페타민' 이라는 피로와 졸음을 없애는 마약 성분의 각성제까지 먹여서 반 미치광이 상태로 만들어 살인기계들이 아시아 전역에서 핏물로 물들였다.

패전후 미군에게 항복한 일본은 모종의 거래를 통해 경제적 실익을 차곡 차곡 챙겨서 전쟁 범죄를 저지른 자들에 대한 처벌을 전혀 하지 않은 채 한국 땅에서 발발한 6.25 전쟁으로 경제적 특혜와 군사적 이익을 모조리 쓸어 담아 경제 대국의 자리에 올라서서 자신들이 저질렀던 만행을 역사에서 지우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일본은 자신들의 역사책에서 줄창 미군에게 원폭을 맞고 전쟁 중 도심 곳곳에 폭격과 공습으로 굶주림과 공포에 시달렸던 것만 기록하고 있고 패전 후에도 살아 남은 일왕은 이웃 국가에게 극악의 범죄를 저지른 것에 대한 어떤 사죄를 하지 않고 [통석의 염]이라는 장례식을 거행할 때 치루는 입관 용어를 내뱉고 퇴위했다.

왕이 통치 했던 시절의 아시아 군주 국가에서는 왕이 국가의 모든 시간을 지배한다는 의미로 연호(年號)를 썼지만 20세기 두 차례 전쟁을 겪고 나서 더 이상 연호를 쓰지 않지만 일본은 유일하게 연호를 쓰고 있다.

2019년 10월에 즉위 해서 레이와 시대라 명명한 나루히토 일왕 아키히토는 할아버지·아버지와 달리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

그는 즉위식에서 세계 헌법 준수와 평화라는 지극히 기본적인 외교적 수사 발언을 했다.

2023년 전쟁 피해자 추도식에서 일왕은 “과거를 돌이켜보며 깊은 반성과 함께 앞으로 전쟁의 참화가 재차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을 했고 아직까지 전범들이 묻힌 야스쿠니(靖國)신사는 참배하지 않았다.

작가 미쓰다 신조가 창조한 20세기 청년 하야타는 탄광에서 검은 얼굴의 여우로 불리는 괴기스러운 사건을 해결하고 암시장에 있는 붉은 미로 속 유곽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을 파헤치고 나서 자신이 나아갈 길은 일본 경제를 다시 세우는데 보탬이 되기 위해 해상 보안청 소속의 항로 표식 직원으로 취직해서 어느 섬의 등대지기가 된다.

붉은 옷의 유래는 풍수지리에서 동쪽의 청룡의 청색, 서쪽의 백호의 백색, 남쪽의 주작은 적색 그리고 북쪽의 현무는 흑색이라 명명하고 천상의 북극성은 황색을 상징했다.

남방 불교에서 아축여래는 청색, 아미타여래는 백색, 보생여래는 적색인 붉은 색, 불공성취여래는 흑색 그리고 대일 여래는 황색으로 다섯 여래를 오색 으로 대응 시킨다.

티베트에서 시작되어 중국 대흥선사에서 자리 잡은 남방 불교의 한 종파인 밀교를 한국의 혜초스님이 일본 땅에 전파 해서 일본인들의 민간 신앙과 뒤섞여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금빛으로 빛나는 네명의 보살을 거느리고 일체의 재물과 보배를 맡고 있는 붉은 색의 보생여래는 중생들의 평등한 삶을 관장 해서 교화하고 구제하는 역할을 한다.

작가 미쓰다 신조는 <붉은 옷의 어둠>이라는 책에서 일본 땅에서 가장 미천한 존재들을 잔혹하게 죽이는 살인마에게 붉은 색 옷을 입혀 놓았다.

아이가 태어나면 탯줄을 보관하는 포 항아리와 검붉은 옷 그리고 붉은 홀겹 옷의 한자에 모두 옷의衣라는 한자가 들어가고 검붉은 옷 색을 의미하는 자赭 한자에 붉을 적赤 한자가 들어가고 홀겹의 옷도 붉다.

이 셋을 합치면 혁의赭衣,즉, 죄인이 입는 <붉은 옷>이라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작가 미쓰다 신조는 이 책에 등장하는 희대의 살인마에게 붉은 색 옷을 입혔고 그 붉은 색 옷을 입은 살인마 죄인은 지난 시절 일본이 대동아 전선에서 아시아인들에게 저지른 범죄 행위에 대한 형벌을 의미한다.

단순히 밀실 미스터리라 생각하고 이 책을 집어 들고 읽다 보면 청년 하야타가 추적하는 붉은 미로 속 밀실 사건의 붉은 옷을 입은 살인마에게 희생된 불행한 시대의 한국인들의 처참한 모습을 마주하게 되고 얼마나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인들 손에 희생 당했는지 미약하게나마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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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주기적으로 책의 날이 있는 달이면 독서 인구층은 점점 줄어 들고 있고 1년에 책 한 권 안 읽는 비율이 50퍼센트를 넘어섰다는 발표를 하고 있다.

종이책, 전자책에 모두 포함해서 2024년은 역대 최저치를 찍었다.

세계적으로 독서 인구층이 점점 줄어 들고 있는 추세 속에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구 소멸과 독서 인구 소멸의 최상위 단계로 진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매달 베스트 상위를 차지 하고 있는 책들 상당수는 사는 것과 살아가는 것에 대한 책들로 작년 부터 시작된 쇼펜하우어 철학 열풍은 2024년 상반기 까지 이어지고 있다.











200년전 금수저 집안 출신의 깐깐한 독신남으로 살다 세상을 떠난 쇼펜하우어가 남긴 명언들이 2024년을 살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욕망)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능력)을 분별하는 자기 인식이 행복의 전제 조건이다.]

- 쇼펜하우어


태어 날 때부터 극한의 경쟁의 세상으로 내던져 지는 한국 사회에서 영어 유치원 열풍, 수학 영재, 의대 입시반, 각종 자격 시험을 향해 줄곧 달려서 부모 세대보다 더 많은 교육비를 쏟아 부어서 사회로 나오는 순간 도살 될 차례를 기다리는 소떼, 돼지떼들 같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육체적 고통의 크기 만큼 견디기 힘든 건 정신적 고통으로 일상에서 일과 가정, 사회에서 소소한 행복과 기쁨을 느끼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쇼펜하우어는 애초에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질없다는 말을 남겼다.

따라서 인간적 동물의 삶이 비인간적인 동물의 삶보다 더 낫지도 않아서 결국 삶은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한 동물이 다른 동물을 잡아 먹을 때 그 동물들 각각 느끼는 바를 비교해보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만일 들판을 뛰어다니는 '나'라는 소가 저 멀리 지켜 보고 있는 도살자에게 선택 당하는 운명이라면 오늘 마음껏 발에 밟히는 데로 풀을 실컷 뜯어 먹어 버릴 것이다.라는

운명을 깨닫게 되는 순간. 현실의 안락함, 평안함, 명예, 부귀 심지어 어제 주문한 물건들에 대한 어떤 집착이나 아쉬움 조차 남아 있지 않는다.

어차피 지구 상 모든 생명체들은 언젠가는 이 땅에서 사라져 버릴 운명이다.

이런 운명을 알고 있음에도 오늘은 좋지 않아도 내일은 더 좋아 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온갖 어려움, 힘듦을 견딜 수 밖에 없다.

그러나 200년 전 쇼펜하우어는 이에 대해 이런 말로 일침을 가한다.


'오늘은 좋지 않고, 내일은 더 나빠질 것이다.

그리고 최악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그럴 것이다.'


현재 세상 돌아가는 상황과 지구촌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련의 전쟁과 재난, 고통의 문제들이 내일 그리고 내년까지도 더 나아질 것 같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늘도 일하고 걱정하고 고통에 시달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다 하루를 마감하기 전 단 몇 시간 동안 스마트 폰과 영상물, 이런 저런 소문과 뉴스 덩어리들의 조각글을 읽다 잠이 든다.

우리가 소망 하는 건 그다지 대단하지 않다.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의-식-주를 걱정 없이 해결 하기만 하면 된다.

의-식-주만 해결 된다면 대단한 행복을 맛보지 않아도 그럭 저럭 세상에 살아 갈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쇼펜하우어는 이런 일침을 가한다.


[삶을 그렇게 보는 시각에 익숙해지면 당신은 자신의 기대를 적당히 조절 할 것이며 모든 불쾌한 사건들을 이례적이거나 규칙을 벗어난 일로 보기를 그칠 것이다.

아니, 당신은 우리 각자가 고유의 특수한 방식으로 존재의 죗값을 치르는 세계에서 모든 것이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대로 그러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전 세계 거의 모든 종교의 공통된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이웃에게 관용을 베풀고 힘듦과 고통을 인내하고 서로 존중하며 사랑하라.'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는 순간 부터 평등하지도 공평하지도 않은 세상에 떨어진다.


그렇다면 산다는 건 무엇일까? 생명을 유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지막 순간까지 참을 수 없는 고통의 상황에서 죽음을 맞이하기 보다 좀 더 편안하게 조금은 덜 고통스럽게 죽기 위해서 오늘을 희생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출발선에 서는 순간 부터 지속적으로 내리막길을 가는 것이다. 행복하게 꿈꾸는 유년기를 지나 모든 것이 새로운 불만으로 가득 찬 청소년기를 지나 고생과 고난으로 가득 찬 성인기를 지나면 모두 다 비참한 노년을 맞이 하며 온갖 잔병과 괴로움들이 한꺼번에 몸 밖으로 나오게 된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어느 누구에게나 똑같이 찾아 오지 않는다 해도 세상의 시작과 끝의 종착지는 단 하나의 고통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적 분석은 기본적으로 옳은 말이다.


고통- 현재의 삶의 덧없음-확정된 죽음의 시간


이 모든 것이 삶의 의미를 방해하고 의미 있는 죽음을 방해 하고 있다면 애초에 태어나지도 말아야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살아야 하나?

우리는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보여지는 나의 몸은 만져 볼 수 있고 어디에도 비춰지지만 내 안에 있는 마음, 정신의 세계는 볼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나는 느낄 수 있다.

오늘 내가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감정을 품었으며 무엇에 화가 났고 무엇에 기뻐 했는지 자각 할 수 있지만 딱 여기까지다.

나의 앎은 여기서 끝이 나고 죽기 전까지도 어쩌면 내가 누구인지 모른 상태로 끝이 나버릴 것이다.

'과거의 행복에 매달리지 말고 미래에 행복을 미루지 마라.'


2024년의 달력이 4장이 넘어 갔다.

앞선 시간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미래의 시간들이 이전의 시간보다 좀 더 많이 주어지지도 않을 것이고 무한하게 펼쳐지지도 않는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서 없고 오지 않는 미래를 걱정하기에 현재의 내 코가 석자다.

무심코 틀어 놓은 화면에 익숙한 얼굴들이 나온다.

물론 그들은 나를 모르지만 나는 그들의 생활과 취미 그리고 어디로 여행을 가서 촬영했는지 알고 있다.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예능 프로그램을 시즌 별로 방송 하고 있다.

화면 속 스타들의 삶은 너무 쉽게 재밌게 유익하게 살아가고 있고 주변 사람들과 두루 두루 원만하게 행복하고 다정한 사이로 지내고 있다.

재미로 하는 게임과 시합에서만 경쟁 하는 것 처럼 보이는 이들의 삶은 몇 편의 프로그램에서 먹고-놀고-여행하고- 그리고 몇 시간 수다를 떨며 살아가는 것 자체가 즐거운 예능 프로그램이다.

사는 동안 평범한 것들로 부터 행복과 기쁨,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 채 타인의 모습을 통해 대리 만족을 하면 할 수록 살아가는 것 자체가 불행하다고 느끼게 된다.

삶은 우리가 바라는 걸 전부 주지 않는다.

욕망을 버리고 체념하며 모든 걸 받아들여야 한다 해도 마음의 상태는 쉽게 떨쳐 버리거나 지워 버릴 수 없다.

따라서 마음의 상태를 온전하게 유지 하려면 예술, 철학 그리고 음악을 통해 분노를 가라 앉히고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보며 나와 다른 타인의 시선과 관점을 분석해 볼 수 있다.

여기 한 시인이 쓴 아이스크림의 황제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아이스크림의 황제  

월리스 스티븐스(1879~1955)


큰 시가 마는 사람을 불러

근육질인 사람으로, 그리고 휘젓게 해

부엌의 컵 속 색정적인 응유(凝乳)를 말이야.

처자들은 늘 입던 옷 그대로

꾸물거리게 내버려 둬, 소년들에게는

꽃을 지난 달 신문에 말아서 가져오라고 하고.

있는 것이 보이는 것의 피날레가 되도록 해.

유일한 황제는 아이스크림의 황제니까.

유리 손잡이가 세 개 빠진

전나무 경대에서 꺼내, 그 시트 말이야

한때 그녀가 공작비둘기 수놓았던 그것을 펼쳐서

그녀의 얼굴을 덮도록 해.

딱딱한 발이 삐져나온다면 그건

그녀가 얼마나 싸늘하고 또 묵묵한지를 보여주는 것이지.

램프의 빛줄기를 잘 고정 시켜 놓도록.

유일한 황제는 아이스크림의 황제니까.

* 시집 <하모니엄>(Harmonium, 1923) 중에서


이 시의 배경은 죽은 자를 기리고 추모하는 '장례식' 자리다

한 방에는 아이스크림 같은 달콤한 환락이 있고 다른 방에는 시신이 안치 되어 있다.

아이스크림을 향한 욕망은 식욕을 향한 욕망이고 싸늘한 시신은 죽음으로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 삶과 죽음에 대해 할 수 있는 전부다.

동물적 삶은 존재하는 최선의 것이고 죽음 보다 더 낫다.

따라서 평범한 삶이 가장 비범한 삶이니 죽는 것 보다 오늘 하루 만이라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앞서 세상을 떠난 나의 조부들은 자손들 앞에 이런 말을 남겼다.


'하려고 했지만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이 가장 후회스럽다. 매 순간 열심히 살아라. 너의 앞에 있는 시간들을 소중히 여겨라.'

나의 할아버지는 자신의 생을 90세로 정해 놓고 아버지 처럼 100세를 앞두고 세상을 떠날 줄 아셨다.

할아버지는 사회에서 완전히 은퇴 하신 후 남은 생애 해야 할 목록을 작성 하셨지만 그 목록에 적힌 것들을 시도조차 해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모두에게 갑작스러운 죽음이였다.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사셨던 분이여서 은퇴 이후의 삶은 장미빛으로만 빛날 줄 알았다.

하지만 매 순간 매초 단위로 어느 누구 보다 바쁘게 사셨던 할아버지는 진정으로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한 것에는 등한 시 하셨다.

가끔 할아버지가 남기고 가신 책들을 펼쳐보면 이토록 치열하게 살아서 그 자리까지 올라가셨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마지막 순간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보다 더한 고통을 겪고 가셨을까라는 슬픔에 잠긴다.











반지의 제왕 톨킨은 이런 말을 남겼다.

'두 차례 세계 전쟁을 겪는 동안 이 세상은 신도 없고 날개 달린 천사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신도 없는 세상에 괴물만 살지 않는다.

이토록 불완전하고 부조리한 세상에서 인간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것 지극히 평범한 것 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소설 속 영웅처럼 살 수도 없고 날개 달려서 비상하는 이카루스도 될 수 없다. '

-톨킨


누구나 한 번쯤은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랬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 한 번 태어나는 이상 어떻게서든 살아가야 하고 그렇게 견뎌 내는 것 만으로도 그리 잘못된 인생이라 할 수 없다.

우리는 사는 동안 늙음, 죽음을 인지 하지 못한다.

항상 이 사실을 인지 하고 있더라도 24시간 내내 늙고 죽는 문제에만 매달릴 수 만은 없다.

그러니 지상의 모든 평범하고 사소한 것에 의미를 두고 사는 게 힘들고 지치고 허무하더라도 살아가는 동안 일말의 행복과 기쁨, 희망을 찾기 위해 시간이 나는 데로 보고 느끼고 즐기고 맛보며 살아야 한다.

‘아이스크림은 달콤하다. 그러나 아이스크림은 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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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yonder 2024-04-27 13: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쇼펜하우어에서 시작해서 아이스크림까지 해주신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평범 속에서, 주변에서, 지금 행복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깁니다.

scott 2024-04-27 18:49   좋아요 1 | URL
오늘 날씨는 정말 아이스크림을 먹어야 할 정도로 바깥은 벌써 뜨거운 여름 햇살이 가득 !ㅎㅎ
어쨌든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통해 이세상 그나마 살맛 나는 것 같습니다 ^^

꼬마요정 2024-04-27 14: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평범한 삶이 가장 비범한 삶이다.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아이스크림은 달콤하니 녹기 전에 먹을 수 있는 부분은 후딱 먹어야겠어요. 그렇게 때론 달콤하게 때론 눅진하고 끈적하게 살아가는 게 삶인가 봅니다.

scott 2024-04-27 18:51   좋아요 1 | URL
서울은 오늘 29도!
뜨거워서 충격 받을 정도로 이런 뜨거운 4월이 낯설어서 올 여름 큰일 났습니다 ㅋㅋㅋ

진한 커피에 아이스크림 퐁당 빠뜨린 걸로 오늘 하루 행복!
요정님은 사랑 냥이들과 행복한 삶을 ^^

꼬마요정 2024-04-28 12:43   좋아요 1 | URL
서울은 정말 덥네요ㅜㅜ 큰일이에요ㅜㅜ 게다가 이번에 비도 많이 올 거라고 하던데… ㅠㅠㅠㅠㅠ 진한 커피에 아이스크림 퐁당!! 이거슨 진리죠 ㅎㅎㅎㅎ 스콧 님도 즐겁고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새파랑 2024-04-27 16: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독서 인구가 줄어들긴 하지만 스콧님 같은 분이 만명분의 독서를 대신 하고 있어서 오늘도 출판계는 돌아가는거 같습니다~!!

내일이 오늘보다 좋을건 없을거 같긴 하지만 내일이 기대되긴 합니다. 또 무슨 일이 있을지 ㅋ
아이스크림은 달콤하고 녹지만, 녹으면 다른 아이스크림을 사면 될거 같습니다~!!

2024-04-27 1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호시우행 2024-04-28 06: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글입니다.

scott 2024-04-29 18:0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거짓과 정전
오가와 사토시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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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SF장르물의 거의 모든 상을 휩쓸고 있는 작가 오가와 사토시는 1986년생으로 도쿄 대학에서 이과로 진학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교양 학부로 옮기고 대학원에서 문화 연구를 전공했다.

박사과정 시절에 쓴 작품 <유트로니카의 이면>이 일본 장르 문학 출판사 하야카와가 주최 하는 SF 콘테스트에서 대상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소설계로 뛰어들었다.

오가와 사토시는 약 2년에 한 번 주기로 장편과 단편을 발표하는 동안 요시카와 에이지상과 일본 SF대상, 야마모토 슈고로상을 수상했고 야마다후타로상을 받고 나서 마침내 <지도와 주먹>으로 나오키상까지 거머쥐었다.

2015년 부터 2022년까지 약 6년에 걸쳐 이 많은 상을 수상한 작가는 일본 내에서도 오가와 사토시가 유일무일한 기록을 세웠을 정도로 그의 작품 팬층은 굉장히 탄탄해서 출판 즉시 주요 문학상과 서점대상 후보로 줄줄이 올라간다.

가장 최근에 출간한 <너의 퀴즈>로 일본 추리 작가 협회상까지 수상해서 SF물과 미스테리, 역사물까지 거의 모든 장르 분야의 상을 휩쓸었다.


2022년 나오키 상과 야마다 후타로 상까지 2관왕 수상작인 <지도와 주먹> 만주 땅으로 건너간 일본인 통역사와 만주 철도망을 러시아까지 확대 하려는 차르 정부에게 고급 정보를 넘겨 주기 위해서 파견된 러시아 국교회 소속 신부 그리고 삼촌에게 속아서 만주로 오게 된 손오공과 중국 동쪽 지방의 봉촌이라는 곳에서 온 <이가진>까지 지도에도 없는 어느 섬을 무대로 러일 전쟁 전야 부터 시작에서 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까지 50년의 세월 동안 흔적 없이 사라져서 역사에도 기록되지 않는 곳에서 펼쳐지는 지략과 살육의 전쟁을 다룬 SF 공상 역사 소설이다.

역사를 뒤흔들었던 특정 사건과 몇몇 인물들이 이런 선택과 상황에 처해 있었다면 역사는 이런 식으로 흘러 가서 현 시대는 지금과는 달라져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한 SF 공상 역사물인 <지도와 주먹> 작품에 앞서 출간된 SF미스터리 단편집 <거짓과 정전>은 2022년 대망의 나오키 상을 수상한 작품의 시놉시스 같은 작품이 있다.


[1844년 1월 9일 오전 10시 30분. 지금부터 워딩턴 공장 습격에 관련한 맨체스터 특별 순회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단편 <거짓과 정전>의 첫 장면은 사회주의 혁명과 마르크스 주의 핵심 사상을 응집 시켜서 공산주의 시대를 낳게 한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영국 맨체스터 순회 법원 재판석 피고인 자리에 앉아 있다.

이 재판에 변호인 측 증인으로 나선 인물은 쿡 앤드 휘트스톤식 전신 기사인 새뮤얼 스톡스로 정전의 수호자인 앵커로서 법정 증인석에 앉아 있다.

독일 에르멘 앤드 엥겔스 방적공장의 경영자 프리드리히 엥겔스 시니어의 아들이자 방직공장의 후계자인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재판석에서 이런 변호를 시작한다.


[저는 이 법정에서 유럽에 존재하는 흉악한 인간이 아일랜드인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만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고자 합니다. 이미 아일랜드인 수십 명이 순회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 받은 바 있지만 독일인인 치고가 저지른 죄는 그저 날뛴 것 뿐인 아일랜드인들보다 더 악질적입니다. 피고인은 폭동을 빌미로 사업 경쟁 상대의 공장을 파괴함으로써 엥겔스 공장의 가치를 상대적으로 올리려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 공방이 오고 가고 나서 마지막 증인 발언 시간에 정전에서 기사 스톡스가 자리에서 일어 났다.

그는 지금 증인석 자리에 서있는 스톡스는 정전의 수호자의 중계자에게 메시지를 받고 나서 모종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사 년 전 부터 기다리고 준비 해 왔다.

이 정전기사는 지난 육백 년에 세월에 걸쳐 활동하면서 1884년 1월 마침내 영국 맨체스터 법원 재판석에서 '역사 전쟁'을 종결 시키는 작업에 돌입하기 시작한다.

반 세기의 시간이 흘러 미국과 소련 스파이들이 모스크바 한 가운데서 주요 연락책과 긴밀하게 연결해서 서로 치열한 첩보전을 펼치고 있던 중 한 소련인 과학자 안톤 페트로프가 미국 CIA에게 포섭된다. 그는 자신이 갖고 있는 최신 기술을 넘기려고 하던 중 굉장히 놀라운 사실을 우연한 계기로 발견하게 된다.


'우르마노프형 정전 가속기로 전자를 고압 방출하면 특정 조건 아래 전자가 사차원 공간을 통과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 원리는 전자를 임의의 과거 일시, 장소로 방출할 수 있고 기술을 활용하면 초광속으로 과거와 통신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이론이 나온다.

안톤 페트로프는 직접 시현을 해보는데 전자를 이용해서 지난 시절에 살아있던 아버지와 메시지를 주고 받기도 하던 중 미래에서 온 메시지를 받게 되자 그는 마침내 자신과 비밀리에 접촉 중인 CIA요원 화이트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기기 작동을 두루 살피며 시험 해 보는 동안 소련 과학자 페트로프의 주변 인물들이 KGB비밀요원들에 의해 체포되어 소식조차 알지 못한 상태가 되고 서서히 포위망이 페트로프로 집중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이 백년의 세월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영국 맨체스터 법정에 피고인으로 서있는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선고형을 확 뒤집어 버릴 수 있다면 현 세상에 공산주의라는 사상도 국가도 전멸하게 될까?


[역사는 때로 중대한 양자 택일을 강요 당한다. 전쟁인가, 비전쟁인가, 폭력인가, 비폭력인가, 정직인가, 거짓인가, 대통령이 아니어도 황제가 아니어도 판단을 그르칠 때가 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에게 무죄 판결을 내린 판사는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 엥겔스가 실제로 유배형에 상당 하는 행동을 했는지 아닌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진실이 무엇이든 그는 유배형을 받았어야 했다. 그는 마르크스를 수정하지 말았어야 했다]


오가와 사토시의 가상의 SF역사물의 시작은 만약에 이 인물이 이런 선택을 했다면, 만약에 이 장소에 이런 사람이 살게 되었다면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나오키 수상작 <지도와 주먹>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君は満洲という白紙の地図に、夢を書きこむ

너는 만주라는 백지 지도에 꿈을 써넣는다.

단편 <거짓과 정전> 역시 작가가 백지의 종이 위에 공산주의는 만유인력처럼 특정 인물(뉴턴)이 없었어도 존재했을까? 아니면 <올리버 트위스트>처럼 특정 인물(찰스 디킨스)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까?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만일 뉴턴이 없었더라도 만유인력은 발견됐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유인력은 이미 케플러 같은 앞선 과학자들이 이룬 성과의 마지막 한 조각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찰스 디킨스가 없었다면 <올리버 트위스트>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불후한 성장 서사가 없었기에 당대 영국 땅에서 어떤 작가도 어린 고아 어린이가 어른들의 불법적인 행위와 노동에 착취 당하는 이야기를 쓴 적이 없었다.

따라서 찰스 디킨스의 존재 자체가 <올리버 트위스트> 작품과 같은 의미이기에 ‘역사적 필연성’은 존재 할 수 없다.

그렇다면 헤겔의 사상을 계승한 무신론 철학자 마르크스와 산업혁명 이후 영국의 노동운동에 정통했던 엥겔스 이 두 인물이 서로 만나지 않았다면 공산주의는 탄생 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공장에서 일어난 폭동에 연루돼 재판을 받고 있는 엥겔스의 모습에서 시작해 냉전 시대 미국과 소련의 치열했던 냉전시대까지 조망한 <거짓과 정전>에는 역사에서 공산주의를 없애려는 사람과 지키려는 사람 그리고 현대 역사를 변형 시키려는 사람과 전송 수단 통신 기기인 ‘정전’을 고수하려는 사람이 서로 대립하며 시간 여행이라는 SF적인 발상으로 마지막 장까지 긴박감을 향해 종횡무진 질주하는 SF 역사 스파이 스릴러 물이다.

장편으로 늘려 써도 좋을 만큼 재치 넘치는 설정과 기발한 전개, 여러 상황들이 역사적 시간대별로 절묘하게 들어 맞아 움직인다.

능숙한 조련사처럼 작가 오가와 사토시는 군더더기 없는 묘사와 인물들끼리 주고 받는 대사 그리고 복잡한 과학 구조 원리와 기술적인 관계를 특정 상황에 대비 시켜 독자들로 하여금 이런 상황이 발생 할 수도 있구나 라고 수긍 시킬 정도로 치밀할 정도로 논리적이다.

2019년에 발표한 SF미스터리 단편집 <거짓과 정전>은 출간 즉시 나오키상 후보작으로 뽑혔고 수록된 단편 <마술사>는 중국 최대 SF어워드인 은하상에서 은상을 수상하며 국제적인 작가가 되었다.

이 단편집에 수록된 또 다른 단편들은 다음과 같다.


-한 줄기 빛

-시간의 문

-무지카 문다나

-마지막 불량배

<마술사>와 <거짓과 정전> 두 단편을 제외하고 나머지 단편들은 기발한 설정이나 놀라운 결말로 치닫는 작품들은 아닌 그저 작가가 여분의 시간에 아이디어 구상처럼 쓴 것 처럼 밋밋한 맛이 느껴지지만 문장과 전개 방식은 뛰어나서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읽게되고 뒷맛도 개운하다.

나는 매해 미국에서 출간 되는 《Asimov’s》나 《FSF(The Magazine of Fantasy and Science Fiction)》 같은 기나긴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잡지를 정기적으로 읽고 있고 로커스상,필립 케이 딕 상,네뷸러와 휴고상 수상작들은 최신작품 부터 지난 시절 수상 작품들까지 전부 섭렵해서 읽었다.

특히 전 세계 SF작가들이 출간하는 단편들 중 한 해동안 출판된 SF 단편 작품들 가운데 수작들만 모은 SFnal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편집자 조너선 스트라한이 발행하는 잡지)의 최근 출판된 것까지 모조리 찾아 읽었다.

일본 문학상 작품 중에 꾸준히 읽는 수상작들은 아쿠타가와와 나오키,일본 추리협회 대상 그리고 가끔씩 요시카와 에이지와 야마모토 슈고로 상을 수상한 작품들은 문고본으로 출간 되기 전 단행본부터 구입해서 읽고 있다.

일본은 최근 십 여년 동안 주요 문학상 작품 후보에 오른 작품 중에서 수상작들 대부분이 역사물이 대세로 메이지 시대 말기의 청춘 미스터리, 신기술을 차용한 미래 사회를 펼쳐 보이는 본격 미스터리,러 일 전쟁, 2차 세계 대전의 어느 유럽 도시,환상과 괴물이 날 뛰어다니는 미래의 가상 도시, 인구 소멸로 인간이 사라진 도시,이상 기후 변화로 강과 바다가 범람해서 지하에서 살게 되는 사람들, 1945년 종전 직전 미스터리한 살인 사건이 발생하는 오사카 어느 마을,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 소 전쟁터에 나서 소련 여성 스나이퍼 부대까지 현 시대가 아닌 지난 세기와 미래 시대를 넘나드는 대 서사 SF역사 공상 소설물들이 거의 모든 상을 수상하며 베스트 순위에 올라와 있다.


오가와 사토시는 자신의 소설 원칙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SF의 재미는 지금의 현실에서는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 또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자명하다고 생각되는 가치관이 붕괴되는 듯한 감각을 맛보는 데 있습니다.'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하는 마술을 선보이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은 <마술사 >단편에서 아버지에게 마법을 가르친 스승 맥스 월턴은 '마술사가 해선 안 되는 일 세 가지'를 반드시 잊지 말라고 당부 했다.


-마술을 선보이기 전에 설명해선 안된다.

-같은 마술을 반복해선 안된다.

-트릭을 밝혀선 안된다.


나 역시 단편 <마술사>의 마술 스승 맥스 월턴 처럼 오가와 사토시의 <거짓과 정전>에 담겨진 모든 단편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2015년 이후 부터 활동한 오가와 사토시에게 일본의 메이저급 작가들은 입을 모아 '천재'라며 매번 발표하는 작품마다 달려들어 가장 먼저 읽겠다고 아우성 치고 있다.

오가와 사토시는 소설가로 데뷔하기 전에 열렬한 책벌레로 주변 사람들 중에 자신만큼 책을 읽은 사람이 없다고 자부 할 정도로 독서광 중에 광인이였다.

그는 대학원 박사 과정 중에 여분에 남은 시간 동안 소설을 끄적이다가 일단 시작했으니 어떻게 해서든 마무리를 짖자 라고 결심하고 고치고 쓰기를 반복했다.

그는 독자들이 이런 작품을 좋아 하겠구나, 지금 시대에 이런 작품이 잘 팔리고 읽혀 지는 구나를 전혀 염두 해 두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생각하고 상상한 이야기를 파고 들어 쓰고 고치는 동안 스스로 재미가 붙어야 작품을 완성하는 성향으로 한 번 쓰기 시작하면 손바닥에 구멍이 생길 정도로 집요하게 달려들어 시대 상황과 자료를 철저하게 조사하고 쓰고 또 쓰기를 반복한다.

나오키 상을 수상한 <지도와 주먹>을 읽은 심사 위원들이 모두 제자리에 일어나서 기립 박수를 칠 때 그는 이 정도 열심히 썼는데 라는 자신감까지 갖고 있을 정도로 스스로 다져나간 창작 주먹이 단단하다.

그럼에도 매번 한 작품을 탈고 할 때마다 영혼의 밑바닥부터 창작의 샘까지 바싹 말라버려서 다음 작품을 집필할 때면 맨 땅에서 헤딩 하듯 맨 주먹으로 처음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의 정신 상태로 회귀하는 작가다.


[모모야마는 문화를 사랑했다. 영화도, 소설도, 음악도, 패션도, 미술도 모두 좋았다. 자신은 어째서 문화를 사랑하나. 모모야마는 ‘불필요해서’라고 생각했다. 문화가 없다고 굶어 죽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런 ‘불필요한 것’이 자신들의 생활에 색채를 부여하고 있었다.]

-오가와 사토시의 '무지카 문다나' 중에서


오가와 사토시의 <기억과 정전>은 2024년 상반기 내가 읽은 작품 중에서 지나온 시간의 흐름과 앞으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금 내가 여기’에 존재한다는 감각을, 일깨워준 작품이다.

우리 모두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사고의 발상과 시간 여행이 주는 즐거운 감각을 일깨워 준 오가와 사토시의 단편집 <거짓과 정전> 2014년 한계도 경계도 없이 폭발하는 상상력을 꼭 맛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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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4-04-22 15: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단한 작가로군요 젊기도 하고 @_@;;; 작가도 작가지만 scott님 존경합니다. 뱅글뱅글 @_@;;;;

scott 2024-04-22 17:3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문나잇님 행복한 저녁시간 보내세요
뱅글뱅글 @_@

희선 2024-04-23 0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소설이라는 것도 없어도 되는 거군요 그래도 있어서 다행입니다 사람이 그저 살기만 하면 재미가 없을 테니... 이건 언제나 그러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러니 음악 미술 여러 가지가 나타났겠지요


희선
 
정의가 잠든 사이에
스테이시 에이브럼스 지음, 권도희 옮김 / 비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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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악마가 인간에게 행한 가장 큰 속임수 입니다.! 악마는 우리 스스로가 운명을 조종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들었지만,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건 종말밖에 없어요. 사당을 짓기 위해 자연의 법칙을 파괴하는 것은 악마의 짓입니다. 이제 그런 짓은 그만둬야 합니다.!]


6월 18일 일요일 오후

대법관 하위드 윈은 어느 대학 졸업식장에서 연설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밤 11시 47분 뇌사 상태에 빠져버린다.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주말 동안 대법원장 하위드 윈에게 어떤 일이 발생한 걸까?

미국 대법원은 회기마다 청문회를 열어 법령을 제정하는데 10월의 첫 번째 월요일이면 윈 대법관과 동료 법관들은 딱한 사정을 가진 자들과 그들을 대리하는 변호사들에게 관용을 구할 시간을 분배해주고 심의를 시작한다.

통상적으로 법률 원칙에 어긋나지 않게 6월 마지막 날 밤 자정이 되면 무죄이든 유죄이든 결과가 나오고 전통에 따라 그들은 마지막 주에 가장 중요한 사안들을 분배하고 판결을 내린다.

사안에 따라 판결이 7월로 넘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대법관 윈의 재임 기간 동안에는 절대로 그 기간 까지 넘긴 적 없이 6월 30일 날까지 모든 것이 결판 나고 마무리 된다.

대법관이 쓰러지기 전인 밤 11시, 그의 방에 들어간 간병인은 약병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걸 발견하고 급히 의료진에게 연락을 한다.


[그녀에게 전해 ...해답을 구하려면 동쪽에서 찾아보라고, 강을 봐야 해. 그 사이에 있는 광장으로 가야해. 라스커, 바우어 날 용서해]라는 말을 남기고 혼수 상태에 빠진다.


다음날 아침 6월 19일 월요일, 대법관의 서기 에이버리 킨은 대법관 윈이 쓰러지기 직전에 자신을 법적 후견인으로 지명했다는 통보를 받고 의문의 혼수 상태에 빠진 대법관 윈을 둘러싼 배후를 조사하기 시작한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졸업식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윈 대법관님한테 무슨 일이 생긴건가?'


대법관이 혼수상태에 빠지자 대통령 측에선 혼수상태인 대법관은 앞서 합의된 내용에 서명 할 수도 없고 법적 후견인 비서에게 대신 투표 할 수 있는 권한을 줄 수 없다고 판단하고 후견인 비서에게 사임하라는 압박을 가한다.

하지만 이런 불의의 상황은 역사적 사례로도 없었고 미국 헌법 3조에 의하면 질병으로 인해 그 직위를 거두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혼수 상태에 빠진 대법관은 스스로 사임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법원에서 이름도 자리도 없애 버리지 못한다.

2년 만에 대통령이 심장마비로 급사 하자 당시 부통령이였던 스토크스가 곧바로 대통령직을 넘겨 받았지만 연이어 터지는 주가 폭락과 마다가스카르에서 발생한 인질 구조 작전 실패, 마이크가 켜진 상태로 사적인 대화가 언론으로 흘러나가 버린 사건들 때문에 지지율이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설상 가상으로 그동안 어떤 불협화음을 보이지 않았던 동맹국 인도가 배짱을 부리며 무역 협상 테이블에 나오지 않고 있다.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는 군사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는 스토크스 대통령측은 이 사실이 대법원측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정황을 포착한다.

그렇다면 대법관 윈이 자신의 서기인 에이버리를 법적 후견인으로 내세워 서명하게 만든 서류는 무엇일까?

컴퓨터에 저장된 파일 어디에도 어떤 증거를 찾지 못하고 자료들, 사건 기록부들 전부 찾아 봐도 대법관이 에이버리에게 위임한 중요한 문서의 서류함을 찾지 못한다.


-체스다이너모

-아니는 강에 있다.

-뒤마는 아니를 찾아라.

-광장에서


체스 경기를 즐겨 했던 대법관은 체스판 기호물에 암호 같은 알파벳을 표기 해 두었다.

상원 법안 의결을 바로 코 앞에 둔 백악관은 대법관 서기 에이버리를 법원 출임금지 상태로 만들어 놓자 그녀는 경찰과 FBI들의 감시 아래서 손과 발이 묶여 버린다.

에이버리는 자신의 머릿 속에 체스판을 띄워 놓고 기형물을 움직이며 각종 이권이 걸려있는 거대한 로비스트 단체와 국가의 중대한 기밀 사항이 들어 있는 특허권 분쟁, 외국 기업 강제 인수 합병 문제들의 뒤엉켜버린 실타래를 풀고 대법관에게 협박과 위협을 가한 이들을 찾기 시작한다.


-염색체 연구는 비밀리에 행해졌고, 티그리스로스트에 의해 부인 되었다.

-혈통을 대상으로 하는 유전자 연구의 무기화.

-미국 재무부에서 사전 승인 없이 히게이아에 수억 달러의 자금을 지급 했다.

-윌 밴스 소령은 CBIRF에 배정된 생화학자다.

-아프가니스탄, 인도, 쉽게 손이 닿는 세계에서 가장 큰 이슬람교도들의 나라

-사라진 과학자, 사라진 예산 분석가, 죽은 간병인, 살해 시도

-외아들을 살리기 위한 필사적인 대법관....


자금이 연방 계좌에서 빠져 나갔다는 증거를 찾아 낸 에이버리는 추적 결과 그 돈이 국토 안보부 소속의 과학 기술 부서에서 나왔다는 정황을 포착해낸다.

일련의 증거와 정황의 퍼즐을 맟춰보니 국가의 법률과 국제 조약에 위배되는 연구에 참여한 이들이 전부 미국 달러를 사용한 사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렇다면 과연 미국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고 어디까지 개입했는가?

히게이아가 이 기술을 상용화 시킨다면 잘못된 염색체 변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누구라도 죽일 수 있는 생물 유전자적 바이러스를 만들 수 있게 된다.

호의와 어리석음의 나라 미국 땅.

정의는 어느 세계에서나 있지만 미국 땅 어디에서도 더 이상 찾기 힘들게 되었다.

염색체 연구 기금,실험 영상과 그밖에 돈의 출처까지 알아낸 서기 에이버리는 반 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증거를 들고 미국 백악관의 문 앞에 설 수 있을까?


6월 27일 화요일

원고: 미 연방 대법원 배석판사 하워드 제퍼슨 윈

피고: 미 합중국


혼수 상태인 대법관의 법적 후견인 에이버리는 고소장을 접수하고 다음날 오전 10시 3분 재판장에 원고 자리에 선다.


대통령의 몰락...

백악관의 대량학살...


언론에서 여러 시나리오들이 흘러 나오기 시작하고 보수 방송에선 에이버리가 변호사 자격증을 잃고 법조계에서 추방될 것인지 아닌지를 놓고 토론이 벌어진다.

에이버리는 윈 대법관의 침대 옆에 서서 그의 손을 붙잡는다.


'정의는 다른 조각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그 세상이 만나는 곳'에서...



<정의가 잠든 사이에>를 쓴 작가 스테이시 에이브럼스는 예일대 법대를 졸업한 변호사로 조지아주 하원의원과 소수당 대표를 역임했고 2018년 조지아주 역사상 가장 많은 표를 얻어 민주당 주지사 후보가 되었다.

그녀는 셀리나 몽고메리라는 필명으로 로맨스 소설을 썼을 정도로 필력을 이미 출판계에서 검증 받은 프로 작가 이면서 미국 주요 정당의 주지사 후보에 오른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으로 미국 정치판에서 '공정한 싸움', '공정한 수', '남부 경제 발전 프로젝트'를 설립해서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정하게 의결권에 헌신하며 국가와 국제 문제그리고 시민 사회문제를 폭넓게 다루는 뛰어난 정치인이다.

위스콘신 주(州) 미시시피에서 조선소 노동자로 일하는 부모님 아래서 성장한 스테이시는 노동자 계층 부모님이 국가에서 보조 받은 생활비로 생계를 꾸리는 걸 지켜 보면서 공공 서비스와 시민 참여의 중요성에 일찌감치 눈을 떴다.

아버지가 거리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노숙자에게 코트를 벗어주는 모습을 보고 자란 스테이시는 교육열이 높은 부모님의 지원으로 좋은 학군에 공부하며 흑인계 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졸업생 대표 연설을 한다.

그녀는 명문대학에 입학하고 2학년에 올라갔을 무렵에 LA 흑인 폭동의 불을 붙이게 된 ‘로드니 킹 사건’(Rodney King riots)으로 에이브럼스는 TV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해 당시 조지아주 애틀랜타 첫 흑인 시장이었던 메이너드 잭슨에게 "당신은 (흑인을 대표하는) 젊은 시장이면서도, 젊은이들을 위해 충분히 일을 하고 있지 않다"고 맹비난을 퍼부어 댔다.

이후 스테이시는 예일대학교 로스쿨로 진학해 변호사 자격증을 따며 한 법률사무소에서 세무사로 활동하던 중 2002년 29세의 나이로 애틀랜타 변호사로 취직해 정부 관련 업무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주 정부의 비효율적으로 운영 되고 있는 비과세 구조, 헬스케어, 공공 부문 재정 등을 주도 면밀하게 조사하고 분석하기 시작한다.

2006년 조지아주 하원 의원에 당선된 스테이시 에이브럼스는 미국 흑인 역사상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 여성 하원의원이 되고 주먹구구식으로 공공 운영비를 책정하고 있었던 공화당의원들에게 계산기를 들고 직접 보는 앞에서 계산을 하며 주민들의 세금이 어떻게 빠져 나가는 지 정확한 수치로 맞섰다.

그녀는 때로는 공화당의 눈속임을 향해 돌직구를 날리면서도 정부 개혁을 위해서 공화당과도 협력하며 범죄 개혁에 힘을 합쳤고 1% 저금리 대출 프로그램인 ‘희망(hope) 장학금 제도’를 만들어서 저소득층에게 교육의 문을 열어주었다.

스테이시 에이브럼스는 ‘조지아 역사상 가장 많이 세금 인상을 막아낸 인물’로 전통적으로 민주당이 강세를 보이지 않았던 조지아 주에서 숨어 있는 표를 발굴하기 위해 유권자를 찾아 다니며 투표를 독려 해서 기울어진 정치 지형을 바로 잡는데 앞장섰다.

미국 땅에서는 1965년 흑인의 투표권을 보장하는 투표권법(Voting Rights Act)이 통과되어 남부 지역에서 흑인 유권자에 대한 차별적인 투표 제한 조치가 금지됐는데도 불구하고, 공공연하게 또는 암암리에 흑인의 투표를 방해하며 투표를 하지 못하도록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행태와 사회적 분위기가 뿌리 깊게 박혀 있는 곳이다.

2018년 공화당과 민주당을 통틀어 아프리카계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주지사 후보로 지명된 스테이시 에이브럼스는 선거에서 떨어졌고 2022년 재도전에도 실패 했지만 미국 정치계에 흑인 여성 최초로 목소리를 내며 기울어진 미국의 정치 풍토를 바로 잡아나가는데 앞장 서고 있다.


2021년에 발표한 <정의가 잠든 사이에>는 스테이시 에이브럼스가 의정활동을 하며 주지사 선거에 도전 했던 지난 12년 동안 쓰고 또 쓰고 그리고 고치기를 반복한 끝에 완성했다.

이 작품의 출발은 판사 테리사 윈 로즈버러와 나눈 대화에서 시작되었고 소설적 상상력과 생생한 경험을 버무려서 최대한 현실에 가깝게 법원과 대법원 그리고 서기들의 움직임과 역할을 현실감 넘치게 펼쳐 보였다.

그녀는 모든 의정 활동과 지역 사회 발전과 방향을 논의하고 토론 하고 각 공공기관과 기타 시설 방문과 연설이 끝마치고 늦은 시간 노트북을 켜고 이 소설을 썼다.

그녀는 <정의가 잠든 사이에>를 쓰는 동안 미국 사회를 향해 질문을 던지며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자료를 찾고 자문을 구하며 소설 같은 현실이 담긴 미국 사법권과 백악관 그리고 나라 밖의 움직임을 담아 냈다.

소설적 결말은 해피 엔딩이지만 현재 미국과 우리 나라 앞에 놓여진 현실은 절대로 낙관적인 상황도 아니고 해피 엔딩으로 향하지도 않을 것이다.

미국의 정치계, 법조계 모두 막강한 불법 자금을 세탁하며 세를 불리는 이권 세력들 손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성실하게 하루 하루 살아가며 세금을 꼬박 꼬박 내고 있는 시민들은 이들의 상세한 내막을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극단의 양극화·불평등그리고 계층의 갈등만 점점 커져 가고 있다.

이 땅에는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것이 정의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정의가 잠들어 버린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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