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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 사막이 들어온 날
한국화 지음, 김주경 옮김 / 비채 / 2023년 7월
평점 :
'아무도 모른다. 사막이 어떻게 도시로 들어왔는지. 알고 있는 건, 전에는 도시가 사막이 아니었다는 것 뿐이다.'
-도시에 사막이 들어온 날 중에서
사막이 들어온 건 언제 쯤으로 거슬러가야 할까?
이 질문을 던진 화자는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이동 중이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도시를 흐릿하게 뒤덮은 모래 바람 뿐이다.
화자는 아침 나절을 맨 바닥에 가만히 누워서 보내는 동안 별다른 일을 하지 않은 채 시간이 흘러가게 내버려두고 있다.
그곳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오늘도, 내일도, 절대로 일주일의 마지막 저녁 식사를 빅 맥 메뉴로 때우는 그 절망스러운 얼굴들을 더는 보지 않을 참이다.
하루 종일 햄버거 가게 튀김 냄새에 파묻혀 살며 매니저에게 온갖 잔소리를 듣고 있는 화자는 벽시계의 바늘에게까지 부탁 할 정도로 시간의 고통 노동의 고통, 하루의 고단함을 겨우 벼텨 내고 있다.
루오에스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화자가 버스에서 내린 곳은 루오에스((Luoes), 이 도시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화자는 구석 구석을 탐방하기 시작한다.
버스 터미널을 빠져나와 지하철에 올라탄 화자는 역 안에서 검은 봉지를 끌어 앉은 채 승객들과 마주칠 때 마다 공손하게 인사하는 한 남자를 유심히 지켜 보고 있다.
'하루 하루는 오늘처럼 어김없이 찾아오지요. 저는 여러분이 보잘것없는 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모두 훌륭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잘 압니다.'라며 승객들에게 말하는 남자는 뭔가를 보여 주겠다며 품 속에 안고 있던 비닐봉지 속에서 편지 봉투 한 묶음을 꺼낸다.
이 남자가 승객들에게 봉투를 나눠주는 동안 실강이가 벌어지고 역무원까지 나타나 이 남자를 열차에서 끌어낸다.
화자는 그 남자가 비닐봉지에서 떨어뜨린 봉투를 주워 들고 몇 정거장을 지나 내린다.
마침내 루오에스에 도착한 화자는 유리벽으로 단단하게 쌓아 올려진 고층 빌딩이 즐비한 풍경과 마주한다.
고층 빌딩들 사이로 황백색의 하늘 한 점만이 겨우 보인다. 거리 사이로 휩쓸려 들어가는 바람에서 모래 냄새가 난다.
눈이 따끔 거리고 시선이 뿌예진다. 주위 행인 대부분이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착용했다.
낯선 도시 루오에스에서 끼니를 떼우기 위해 맥도날드 매장으로 들어 간 화자는 햄버거 세트 메뉴를 다 먹고 난 후 몇 시간 전 전철에서 주운 봉투를 꺼낸다.
순백의 종이 위에 선명하게 새겨진 발자국이 찍혀 있는 봉투를 바라 보고 있는 화자는 편지를 보낼 사람도 없는데 불구하고 외우고 있는 유일한 주소인 집 주소를 쓰면서 집에 돌아가면 먼저 도착할 이 봉투를 보며 루오에스의 추억을 떠올려 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화자가 목격한 루오에스는 아스팔트, 자동차, 고층 빌딩으로 가득 찬 대규모 도시임에도 모든 게 낯설게 보인다.
그런데 화자가 찾고 있는 사막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사막....
아마도 사막은 이미 이곳에 있는 것 같다.
도시 중심부, 저 소박한 철책 뒤에....
나는 주변의 소란 속으로 구불 거리며 슬며시 사라지는 사막을 응시한다.
자, 이제 사막 위를 걸어가는 화자의 두 발은 모래 속에 푹푹 빠지고 앞으로 나가는 것 조차 힘겨워서 뜨겁게 내리 쬐는 사막 모래 위에 등을 대고 누워 버린다.
'이봐요. 일어나요. 여기서 잠들면 안 돼요.!'
누군가 화자를 깨우고 눈을 뜬 화자는 주변을 둘러 본다.
아침이다. 차갑고 축축한 모래가 느껴진다.
삽을 든 노동자들이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도시에 사막이 들어 온 날
총 8편이 담긴 단편집에는 20여페이지가 채 넘지 않는 스토리에 기승전결이 뚜렷한 서사 구조도 없고 성별 구분도 없고 이야기의 화자가 어디 출신인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조차 명확하지 않다.
이 책을 집어든 건 순수한 호기심으로 미술을 전공한 이가 어느 날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프랑스어로 글을 쓴 작품이였기 때문이다.
'이 글들은 2015년부터 파리 제 8대학교 문예창작과에 재학 중이던 때 쓰였다.
그 이후 퇴고를 거쳐 2020년에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한국화
이 책이 프랑스에 출간 되자 마자 간결한 문체로 풍부한 이미지를 그려내 폭넓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설'이라는 평단과 언론의 극찬을 받았다.
이 평가는 사실로 이 책 속의 담긴 이야기들은 서울의 영문 표기를 거꾸로 배열한 이름의 도시를 그린 소설 〈루오에스〉를 비롯해 그로테스크한 장면이 이어지는 상상의 세계를 이름도, 성별도, 삶의 목적과 이유도 상실한 채 도시를 표류 하는 유령과도 같은 이들의 모습으로 그렸다.
이 이야기를 2023년 대한민국의 어느 도시 한 부분에 대입 시켜도 좋을 만큼 바닥을 나뒹구는 술병들과 여기저기 피어 있는 곰팡이. 폐허나 다름없는 집에서 깨어난 당신은 오늘도 주인 없는 빈 방에서 잠들어 버린 도시인들의 외롭고 고독한 모습을 담았다.
'나는 어떤 역에도 내리지 않는다. 종착역에 도착해도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열차가 다시 반대 방향으로 떠나기를 기다린다.
-방화광 중에서
8편의 단편을 모국어인 한국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쓴 작가 한국화는 파리 제8대학교에 다니면서 6년 만에 이 소설을 썼다.
작가는 프랑스 문화비평 잡지 <디아크리틱> 인터뷰에서 “모국어의 제약을 벗어나 더 유연한 사고가 가능한 중립적인 영역이 필요했다”라고 밝혔다.
이 단편집은 프랑스에서 출판 된 그해 일본어로도 번역이 되어 출간 되었다.
작가는 현재 프랑스를 떠나 독일 베를린에 거주 하며 황정은 작가의 <백의 그림자>를 프랑스어로 번역 했고 에두아르 르베의 <자살>을 한국어로 번역하며 프랑스어를 한국어로 한국어를 프랑스어로 번역하며 자신의 작품을 창작하는 일을 병행 하고 있다.
'나는 일주일에 여러 번 어학원에도 다녔다. 이 나라의 언어를 특별히 더 잘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학생 신분을 유지하면 별 어려움 없이 체류 허가증을 취득할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 눈송이 중에서
나는 이 책을 한국어 번역본으로 읽는 동안 작가가 서술하고 묘사한 문장을 프랑스어로 어떻게 썼을지 머릿 속에서 단어 하나 하나를 떠올렸다.
'당신은 눈을 뜬다. 혹은 눈을 뜬다고 믿는다.'
작가는 새 하얀 백지 세상 속에서 두 가지 언어를 넘나들며 붓을 든 화가처럼 상상의 세계 속에 고립된 불투명한 자아들 이 시대의 우리 모두의 모습을 그려 넣고 있을지 모른다.
'나는 이 하얀 세계 속에서 마치 드디어 내 집에 온 것 같은 편안함을 느낀다.
이곳과 저곳 사이 , 낮과 밤 사이, 오늘과 내일 사이에 어떤 경계도 없는 곳에서'
-청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