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 어느 페미니스트의 질병 관통기
조한진희(반다) 지음 / 동녘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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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몸이 정상적으로 돌아왔구나. 많이 건강해져서 다행이다”

 

 

작년에 통풍을 겪고 난 후에 지인이 건넨 인사였다. 한동안 연락이 뜸해진 사이에 건강해진 내 모습을 보고 축하한 마음에 하는 인사였지만, 나는 그 말이 듣기 거북했다. 지인은 간헐적으로 통증에 시달리는 내 모습이 ‘비정상적’으로 느꼈던가 보다. 물론 몸이 비정상적으로 작동하거나 변하는 상태는 있을 수 있다. 우리는 몸의 비정상적 상태를 질병이나 증상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몸이 그런 상태라고 해서 아픈 사람 자체를 비정상인으로 볼 수 없다.

 

어떤 사람이 ‘정상적인 몸’을 가졌고, ‘정상적인 사람’일까? 또 어떤 몸/사람이 ‘비정상적’인가?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은 어떻게 생기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일단 비정상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결핍’이고, 또 하나는 ‘과잉’이다. 의사들은 이를 모두 ‘건강하지 않은 상태’로 진단한다. 과거에 장애인은 ‘뭔가 결핍되고 온전치 못한 사람’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요즘은 호르몬과 행동의 과잉 상태로 인한 장애가 현대의 정신 의학에서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학교에서 아이가 지나치게 활발하면 대개 부모들은 자식이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ADHD)’가 있는지 의심한다. 대부분 사람은 아픈 사람과 장애인을 불쌍하게 여긴다. 이 불쌍한 사람과 함께 사는 가족의 삶에 ‘불행한’, ‘딱한’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불치병이나 장애가 있는 가족 구성원이 있는 가정은 ‘비정상 가족’으로 낙인찍힌다. 이렇다 보니 아픈 사람과 장애인은 주변 사람들에게 늘 미안해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주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반다’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조한진희도 암 진단을 받은 이후로 ‘아픈 사람’으로서의 자괴감과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을 느끼면서 살아왔다. 그녀는 몇 년 동안 자신을 아프게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병상 일지’ 비슷한 글을 썼다. 드디어 그녀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다. 내가 아파서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세상이 나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만들어서 아팠던 것이라고. 그녀는 자신을 부정적 존재로 만드는 세상 앞에서 쿨하게 한 마디 던진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는 오로지 건강한 몸을 선호하며 이를 ‘정상적인 몸’의 표준으로 본다. 이런 사회 속에 대중 매체는 ‘건강한 몸’을 가진 사람들의 언어를 주목하고, 열심히 그것을 실어 나른다. 다이어트에 성공한 사람들은 “저처럼 운동하면 살을 뺄 수 있어요”라고 말하고,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은 장애인은 “여러분(장애인)도 장애를 극복할 수 있다”면서 확신한다. 그들은 질병과 장애를 극복하면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준다. 그들이 말하는 ‘좋은 일’이란 아프거나 결핍된 ‘비정상인 몸’을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건강해진 ‘정상적인 몸’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는 것이다. 건강한 사람 또는 건강한 장애인을 선호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 건강을 유지하면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정상적인 사람’ 서사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이렇게 되면 아픈 사람과 장애인을 설명할 언어는 사라지게 되고, 그들의 삶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게 된다. ‘정상적인 사람’ 서사에 부합되지 않은, 아픈 사람과 장애인은 ‘불행한 비정상적인 존재’로 남는다.

 

건강하게 사는 것은 분명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건강을 강요하는’ 건강 중심 사회 앞에서 아픈 사람과 장애인의 말과 경험은 언제나 침묵 당할 수밖에 없다. 아픈 사람들은 질병을 부정적으로 보는 주변의 시선에 계속 상처받으며 사는 게 싫어서 장기적인 치료가 동반되는 입원 생활을 선택한다. 그러나 병이 호전되지 않으면 더 나아지지 않은 상황에 무력감을 느낀다. 이런 무력감은 그들을 작아지게 만들고, 또 한 번 아프게 만든다. 위축된 그들은 이 아픔의 원인을 오로지 ‘개인 탓’이라고 여긴다.

 

개인의 잘못된 식습관이나 생활환경으로 인해 몸이 나빠질 수 있고, 질병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건강하지 못한 삶을 무조건 ‘개인의 문제’로만 규정할 수 없다. 질병을 우리 삶을 망가뜨리는 위험 요소로 인식하고, 아픈 사람을 인생의 패배자로 단정하는 건강 중심 사회는 ‘질병의 개인화’를 고착시킨다. 저자는 ‘질병의 개인화’가 아픈 사람에게 건강관리를 소홀히 한 문제의 책임을 묻는다고 지적한다. 건강 중심 사회 속에 사는 아픈 사람은 ‘내가 잘못 살아서’ 아픈 거라는 생각에 자기혐오에 빠지기 쉽다.

 

저자는 ‘잘 아플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평생 아프면서 살아가자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아플 수 있고, 장애인이 될 수 있고, 죽을 수 있다. 이러한 운명을 너무 비관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질병과 장애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야 한다. 즉 질병과 장애를 우리 삶의 일부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아파도, 몸이 좀 불편해도 죄책감을 느낄 이유가 없다.

 

‘건강한 삶’이라는 말에 너무 믿지 말자. 건강을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의 배경에는 대중이 불안한 심리 상태에 빠지도록 만드는 교묘한 술수가 숨어 있다. 건강하지 못한 삶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은 심각하지 않은 상태인데도 병원에 자주 들락날락하고, 약을 과다 복용한다. 인간적인 삶에 필요한 최소한의 불안마저 병으로 진단하게 하고, 살면서 자연스럽게 경험하게 되는 몸의 통증이나 내면의 아픔을 죄다 치료 대상으로 몰아넣으면 일상을 더 불안하게 만들 수 있다. 내 몸과 정신이 ‘과연 정상일까“라는 회의감이 들기 시작하면, 그것이 내 감정을 지배하는 어두운 구름이 되지 않도록 말끔히 걷어내자.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은 정확하지 않다. 그리고 누구도 내 몸과 정신을 정상인지 아닌지 함부로 구분할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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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07-12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강 중심 사회, 라는 말을 처음 생각해 봅니다. 돈에 지나치게 큰 가치를 두고 남에게 ˝부자 되세요.˝하고 말하는 것처럼, 건강한 삶만이 좋은 것인 양 ˝건강하세요.˝라고 하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되네요.
저는 개인적으로 건강은 (생활 습관이라는 변수도 중요하겠지만) 타고난다고 봐요. 유전자의 힘이 세다는 것이죠. 누군가는 폐가 약하고 누군가는 간이 약하고 누군가는 우울증에 잘 걸리고... 이런 경향이 있다는 거죠. 그러니 병에 걸렸다고 해서 사람 자체를 탓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cyrus 2019-07-12 15:28   좋아요 0 | URL
유전이 건강에 영향을 준 건 사실이지만, 대부분 사람은 이를 근거로 아픈 사람뿐만 아니라 아픈 사람과 함께 사는 가족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는 말을 합니다. 예를 들어 아기가 몸이 약한 상태로 태어나면, 사람들은 아기가 건강하지 못한 원인을 부모의 건강 상태에서 찾습니다. 이러면 부모는 죄책감을 느끼게 되죠. 아픈 사람들은 결혼과 육아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요. 왜냐하면 자신이 앓고 있는 병이 자식에게 유전되지 않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겨울호랑이 2019-07-12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강한 삶의 기준을 수치화하고 이를 수치화하여 기준에 미치지 못할 경우 여기에 무조건 맞추기를 강요하는 것이 과연 건강을 위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cyrus 2019-07-15 16:44   좋아요 1 | URL
건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많이 사용되는 수치가 몸무게입니다. 몸무게 수를 줄여서 날씬해진 몸은 건강미 넘치는 몸으로 주목받죠. 겉모습만으로 건강한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려워요. 건강해 보이던 사람이 속병을 미처 발견하지 못해서 단명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2019-08-15 1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8-17 08:28   좋아요 0 | URL
네. 출산은 여성이 거쳐야 할 ‘정상적인 행위‘가 아니죠. ^^
 
환장할 우리 가족 - 정상 가족 판타지를 벗어나 '나'와 '너'의 가족을 위하여
홍주현 지음 / 문예출판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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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스마트폰에는 모바일 메신저가 딱 한 개만 깔려 있다. 카카오톡 하나뿐이다. 수시로 울리는 메시지 때문에 환경 설정에 들어가서 알림 기능은 다 꺼놓았지만, 그래도 하루에 백 번 이상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거 같다. 모바일 메신저 애플리케이션을 깔아놓은 이상 숨을 수도, 피할 수도 없다. 단체 카톡방(단톡방)에서 나가면 다시 초대가 온다. 단톡방에 카톡 메시지가 뜨면 잠시 고민을 한다. 읽고 반응을 해주어야 하나, 읽은 척하고 무시해야 하나.

 

모바일 메신저가 우리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좋은 소통의 수단임은 틀림없다. 시대가 변하면서 가족들이 얼굴을 보며 대화할 기회가 점점 줄어드는 게 사실이지만, 같이 소통할 길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가족 단톡방은 가족 신문 구실을 해주어 가족의 결속력을 더 강하게 만든다. 막상 얼굴 보면 잘 나오지 않는 ‘고마워’, ‘사랑해’ 등의 감정 표현을 글로 쓰는 것이 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가족과의 물리적 거리는 멀지만, 단톡방 덕분에 가족 간의 심리적 거리는 무척 가깝다. 거의 매일 단톡방에서 소식을 주고받으니 항상 같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일일이 전화를 걸어 확인하고 안부를 물어야 했던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이 편리해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가족 단톡방도 우리 삶을 피곤하게 만들 때가 있다. 만나서 할 이야기나 전화로 건넬 말을 시도 때도 없이 메시지로 받는다면 오히려 성가신 일이 될 수 있다. 중장년층의 스마트폰 사용이 늘어나면서 ‘카톡 시집살이’를 호소하는 며느리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카톡 시집살이’의 고충을 토로한 며느리들은 시부모나 친척들로부터 일거수일투족 감시당하는 것 같은 기분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사실 대부분 며느리는 시부모의 끊임없는 연락에 대꾸할 말이 별로 없다. 친정 부모 대하듯 말대꾸를 할 수도 없고, 매번 반응을 보이는 것도 피곤한 일이다. 그만큼 친하거나 편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부모들은 세대 차이를 극복하고 가까워지려는 자신들의 노력을 몰라주는 게 섭섭하다고 말한다.

 

가족 단톡방에 초대된다는 것은 가족의 일원이 된다는 뜻이다. 시부모는 새로 가족이 된 며느리가 반갑고 예뻐서 딸을 대하듯이 자꾸만 말 걸고 싶어 한다. 단톡방에 알림이 뜰 때마다 며느리가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가족 단톡방의 역할 중 하나가 ‘집안 행사에 소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부모가 단톡방을 통해 아들과 며느리에게 행사 참여를 통보하면 며느리 입장에선 거절하기 어렵다는 부담을 떠안게 된다. 이럴 때 ‘가족’은 힘든 일이 있을 때 내가 의지할 수 있는 편안한 보루가 아니라, 내 인생의 사소한 것 하나까지 간섭하고 감시하는 불편한 감옥이다.

 

《환장할 우리 가족》은 한국 사회의 ‘가족’이 갖는 폐쇄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정상 가족 판타지’가 가족 구성원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려준다. 결혼 2년 만에 저자의 남편이 암 선고를 받게 되자 저자가 두려워했던 것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그들은 중증 질환을 앓는 남편을 가족을 위협하는 요인으로 인식했고, 저자에게 남편과 이혼하라고 권했다. 저자는 남편의 암 선고를 받은 이후에 겪은 경험을 통해 가족의 의미를 새롭게 돌아본다.

 

우리 사회는 ‘부부와 그 자녀’로 구성된 혈연 중심의 공동체를 ‘정상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혈연 중심의 가족이 아닌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를 ‘가족’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1인 가구, 비혼 인구가 늘어나면서 지난 수백 년간 만들어지고 정착되었던 근대의 정상 가족 개념은 이제 흔들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연스러운(것으로 믿어온)’ 사회의 기본 단위이자 모든 인간이 태어나면서 마주치는 첫 사회 집단인 가족. 이 정상 가족의 관념과 제도가 무너지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 사회는 혼외 결혼을 통한 출산에 관해서 여전히 관대하지 못하다. 입양을 통한 자녀 양육이 드물고, 외국인과 가정을 이룬 사람을 색안경을 쓰고 본다. 이러한 가정들은 한국 사회에서 ‘비정상’ 가족으로 낙인찍혀 차별을 받는다.

 

저자는 ‘나’라는 개인이 사라지고, ‘우리’라는 이름으로 똘똘 뭉친 가족은 한 덩어리로 이루어진 집단이라고 말한다. 이 집단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일심동체’이다. 일심동체가 된 가족 안에 ‘나’와 ‘너’를 구분하는 경계는 사라진다. 결국 ‘나’라는 개인은 가족 집단과 동일시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가족 내에서 개인이 가족이 지향하는 것과 다른 생각을 드러내기가 어려워진다. 또 가족(집단)을 위해 가족 구성원(개인)이 희생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저자는 ‘정상 가족’ 담론에 맞서서 가족을 해체하자고 말하지 않는다. 그녀가 제안하는 것은 개인으로서 ‘나’와 ‘너’의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는 가족의 모습이다. 그러려면 가족이 아니라 ‘정상 가족 판타지’를 해체해야 한다. ‘정상 가족 판타지’를 고수하는 사회일수록 다양한 가족의 형태에 대한 담론을 만들어 갈 수 없다. 그래도 우리 사회에 이미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이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국가가 이들을 인구 감소를 초래하는 ‘비정상 가족’으로 분류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가족을 둘러싼 차별은 사실상 비혼 상황으로 인해 겪는 차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거하는 연인, 동성 연인, 한 부모 가정, 1인 가구도 모두 비혼 상태인데 우리 사회의 복지 정책이나 의료 서비스, 노동 시장의 관행들은 다 ‘정상 가족’ 기준이다.

 

한계에 달한 근대적 정상 가족 제도를 넘어 다양한 개인이 각자의 목소리를 내고 있을 때, 가족은 인간 사이의 가장 친밀한 유대감을 유지하면서 연대할 수 있는 공동체의 모습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비혼이냐 기혼이냐에 따른 구분을 거부하고, 정상 가족이냐 비정상 가족이냐에 따른 차별을 해소하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점은 개인이 ‘나’로서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가족을 구성할 수 있는지 스스로 질문할 수 있고, 그것에 대해 의견을 나눌 수 있는 담론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자신이 원하는 사람과 원하는 방식으로 친밀한 관계를 구성할 수 있는 실천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다양한 사람이 각기 다른 모습의 가족을 이야기하고 그것이 편견 없이 받아들여질 때, 우리 사회는 한층 더 젊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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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0 17: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6-21 15:27   좋아요 0 | URL
페이스북 모바일 어플을 삭제했는데도 네이버 메일에 알람 메시지가 열 개 이상 와요. 메시지 대부분은 저와 상관 없는 내용이에요. 별 이상한 사람들이 친구 추가 요청했는데 그거 확인하라고 하고, 페친이 글과 사진을 등록했으니 한 번 보라고 하고, 메시지가 페이스북에 접속하라고 부추겨요... ^^;;

2019-06-20 18: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6-21 15:28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대학원에는 저보다 뛰어난 분들이 많아요.. ^^;;

2019-06-21 06: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6-21 15:30   좋아요 0 | URL
맞아요. 평소에 자식을 만나지 않던 부모는 자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보험금을 타내려고 친권을 주장하기도 해요. 이런 부모가 큰 소리 치지 못하게 법을 만들어야 해요.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는 자유인으로 살다 갔다. 실제 삶에서나 문학에서나 그는 자유의 극한 영역을 추구하고 탐문했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2009)

 

 

 

그의 자유로움은 종교적 통념을 넘어섰다고 판단한 그리스 정교회에 의해 파문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의 육신은 죽어서도 그리스 본토에 안식처를 마련할 수 없었다. 크레타 섬에 있는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물론 자유를 갈망하는 정신은 카잔차키스만의 전유물일 수 없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소망이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자유보다는 억압이, 평화보다는 전쟁이나 폭력적 상황이 넘쳐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세상은 성소수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없는 폭력적인 사회다. 특히 동성애자 정체성으로 세상을 살아가던 그/그녀들에게 사회란 폭력이 일상화된 두려움의 대상이다. 퀴어 문화축제는 일 년에 단 하루 성소수자들이 언어와 몸짓, 음악으로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자유와 해방의 장이다. 그런데 동성애를 ‘문란한 성 문화의 일종’으로 보는 비 성소수자(non-sexual minority)들은 퀴어 축제 소식이 수면 위에 올라올 때마다 어김없이 이런 말을 한다. 성소수자를 보지 않는 것도 개인의 자유다.

 

 

 “성소수자가 누구를 좋아하는 것(성소수자가 퀴어 축제에 참가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다. 그러나 그것을 보지 않을 권리도 있고, 이 또한 자유다.”

 

 

이렇게 말하는 비 성소수자는 ‘자유’, ‘권리’라는 단어를 억지로 끌어들여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한다. 성소수자의 성적 지향, 즉 섹슈얼리티(sexuality)는 정체성을 포함한다. 따라서 성 정체성(gender identity) 또한 섹슈얼리티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정체성은 인간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으며 ‘나’라고 호명되는 존재를 설명할 수 있게 만드는 고유한 성질이다. 그러므로 정체성이 무엇인지 스스로 질문하는 과정은 존재 이유를 찾는 행위이자 작업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지 못하거나 사회로부터 박탈된 존재는 온전한 ‘나’, 더 나아가 인간으로 성장하지 못한다. 섹슈얼리티와 정체성은 철저히 분리될 수 없다. 성소수자는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산다는 정체성을 가진 채로 존재하고 있다. 이 세상의 누구에게든 사람의 ‘존재’를 반대하고 차별할 수 있는 권리는 없다. 만약 누군가가 그러한 권리가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그 권리를 부여받을 자격이 있는가? 정체성과 섹슈얼리티는 ‘옳고 그름’의 판단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 아민 말루프 《사람 잡는 정체성》 (이론과실천, 2006)

 

 

 

개인의 정체성은 종교, 인종, 민족뿐 아니라 언어, 생활방식, 신념 등이 어우러져 형성된다. 따라서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정체성을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렵다. 그런데 어떤 사회나 집단에 대한 소속감이 투철한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한쪽의 정체성(사회나 집단의 다수를 차지하는 정체성)을 추구하도록 강요하거나 강제로 편입시킨다. 그런 사람들은 상대편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고, 상대방의 호소와 고통을 느껴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 편’이라는 관점 그리고 ‘우리’라는 이름으로 호명하게 만드는 단일한 정체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콩쿠르상 수상 작가 아민 말루프(Amin Maalouf)는 다중성을 인정하지 않는 정체성을 ‘사람 잡는 정체성’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랍인 출신이지만 기독교인이다. 모국어는 아랍어이지만 프랑스어로 글을 쓴다. 복잡한 정체성을 가진 작가는 자신을 어느 쪽에 더 가깝냐고 묻는 ‘집요한 질문’에 오랫동안 시달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종교, 민족, 인종이라는 틀에 갇힌 고정불변의 정체성이 저지르고 있는 많은 갈등과 비극을 분석한다.

 

상대방의 정체성을 거부하거나 박탈하는 것을 자유와 권리라는 이름으로 행사하는 태도는 ‘고상하게 포장한 권위주의’다. 비 성소수자는 성소수자를 바라볼 때 과도한 의미를 부과하는 것을 경계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숨겨야 하는 그들이 얼마나 큰 고통에 시달려왔을 지를 헤아려야 한다. 이번 달 29일 토요일, 대구에서 열한 번째 퀴어 축제가 진행된다. 매년 퀴어 축제가 열리는 날이면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축제를 막기 위해 거리를 행진한다. 퀴어 축제에 참여하는 성소수자들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축제의 장에 들어오는 순간, 그들 모두 ‘자유’가 된다. 단 하루만 자유를 마음껏 누리려고 하는데 두려울 게 뭐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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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5 0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6-05 15:17   좋아요 1 | URL
토니 쿠시너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봐서 인터넷에 검색해봤어요. 검색 결과를 확인하다가 쿠시너의 <미국의 천사들>의 퀴어링에 대한 연구 논문을 발견했어요. ***님 덕분에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
 

 

 

19세기 후반에 더욱 치열해진 유럽의 제국주의 경쟁은 고삐 풀린 말처럼 과도한 민족주의 대결로 치닫고 있었다.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광휘를 더욱 찬란하게 드러내려고 했고, 독일은 제국주의 후발주자로서 게르만족의 자존심을 걸고 영국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유럽 국가들은 ‘땅따먹기 시대’에서 나름대로 민족의 자존심을 세우든지 혹은 지키기 위해서 얽히고설킨 관계를 유지했다.

 

 

 

 

 

 

 

 

 

 

 

 

 

 

 

 

 

 

 

* [품절] 찰머스 존슨 《제국의 슬픔》 (삼우반, 2004)

* 강준만 《미국사 산책 4: ‘프런티어’의 재발견》 (인물과사상사, 2010)

 

 

 

미국이라고 이러한 흐름에서 비켜나 있지는 않았다. 줄여서 ‘미제’라고 불리는 미국 제국주의(American imperialism)의 기원은 1898년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미국 제국주의의 역사를 다룬 《제국의 슬픔(The Sorrows of Empire)의 저자이자 외교정책 전문가인 찰머스 존슨(Chalmers Johnson)은 미국이 제국주의의 날개를 달고, 본격적으로 군국주의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 시기를 ‘미국-스페인 전쟁’이 일어난 1898년이라고 말한다.

 

1898년 스페인의 식민지인 쿠바의 아바나 항구에서 미국 전함이 폭발하는 사고가 일어난다. 자체 조사 결과 석탄 창고에서 일어난 자연 발화가 사고 원인이라고 밝혀졌지만, 미국 내에서는 전쟁 열기가 고조되고 마침내 스페인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 그 결과 미국은 손쉽게 전쟁에 승리하고, 그해 12월 10일에 쿠바는 스페인 통치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미국은 전쟁에 승리한 대가로 쿠바의 내정에 간섭한다. 그리고 필리핀, 괌, 푸에르토리코를 스페인으로부터 넘겨받게 된다. 이를 계기로 국제무대에서 미국의 지위는 급상승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은 강대국으로 거듭났고, 냉전 분위기가 고조되던 시기 동안에는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에 맞선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제국주의적 속성을 감춘다.

 

 

 

 

 

 

 

 

쿠바의 관타나모 만(Guantanamo Bay)에 미 해군이 운영하고 있는 기지와 수용소가 있다. ‘캠프 델타(Capm Delta)’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관타나모 수용소는 쿠바의 역사적 아픔과 비운을 상징한다. 쿠바는 3년 동안 세 번의 독립전쟁을 치렀고, 제3차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독립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과의 전쟁에 승리한 미국이 개입하게 되고, 쿠바로선 더 강력한 외세의 등장 앞에 힘을 쓰지 못한다. 결국 관타나모를 미 해군기지로 할양하고 사실상 미국의 내정 간섭을 받아들인다. 1903년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정부는 이 기지를 임차(賃借)로 사용하는 대가로 매년 2천 개의 금화(4,085달러)를 쿠바 정부 앞으로 보낸다. 이어 1934년에 영구임차 계약을 체결하면서 관타나모 수용소는 가장 오래된 미군의 해외기지가 됐다. 1959년 독재 정권을 혁명으로 무너뜨리고 총리에 오른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는 미국에 수용소 철수를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은 쌍방이 합의해야만 계약을 해지할 수 있는 영구임차 계약 조항을 들어 철수를 거부했다. 카스트로 정부는 기지 주변에 지뢰를 매설하고 순찰을 강화하는 등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고, 1964년에는 기지에 대한 물 공급을 중단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 해군은 임차료 4천여 달러를 내면서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

 

 

 

 

 

 

 

 

 

 

 

 

 

 

 

 

 

 

* [레드스타킹 16번째 책] 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필로소픽, 2018)

 

 

 

2003년부터 관타나모 수용소에 이슬람 무장세력 알카에다(Al Qaeda)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포로들이 수감되어 왔다. 미국이 사법권과 관할권을 행사하는 해외 군사기지 중 주둔국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 입맛대로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관타나모다. 부시(George W. Bush) 정부는 이곳을 ‘테러리스트 영구수용시설’로 만들어 수용소에 갇힌 포로들에게 ‘무기한 구금(Indefinite detention)’ 처분을 내렸다. (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필자가 쓴 글 『무한정의, 무기한 구금』을 참고하길 바란다)

 

2009년에 대통령으로 취임한 버락 오바마(Barack Obama)는 대선후보 시절에 내건 관타나모 수용소를 폐쇄하는 공약을 실행한다. 그는 일 년 안에 수용소를 폐쇄하는 행정 명령을 발령했지만 실패했다. 그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는 취임 전부터 ‘나쁜 녀석들(bad dudes)’을 가둘 수 있는 관타나모 수용소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2018년에 폭탄 테러를 모의한 혐의를 받은 사우디아라비아인 1명이 관타나모 수용소로 이감되었다. 그를 포함해서 수용소에 있는 수감자는 총 40명이다.

 

부시 정부는 ‘아프가니스탄 여성 해방’을 강조하면서 아프가니스탄 공습에 대한 국제적 비난을 잠재우려고 했다. 트럼프는 미국을 위협하는 ‘나쁜 녀석들’ 때문에 관타나모 수용소를 폐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두 사람은 미국을 위협하는 악의 세력에 맞서 싸우는 ‘정의의 사도’가 되려고 했다.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 대다수는 대외정책에서 강경한 입장을 드러내는 네오콘(neocons)이다. ‘백인 우월주의’, ‘미국 제일주의’를 내세우는 네오콘은 국제문제에서 군사력을 불사하는 미국의 적극적 개입을 옹호한다. 그들은 평화를 위협하는 악의 무리를 혼쭐내는 세계무대의 주인공과 같은 미국을 원하며, 그 역할이 ‘미국 백인의 의무이자 사명’으로 생각한다. 인도 출신의 탈식민주의 학자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Spivak)은 세계 평화를 위해 군사력을 동원하면서 봉사하려는 미국의 행보를 “백인 남성이 갈색 피부의 남성으로부터 갈색 피부의 여성을 구원하려는 광경”이라고 비유해서 표현했다[주1].

 

 

 

 

 

 

 

 

 

 

 

 

 

 

 

 

 

 

* 강준만 《교양영어사전》 (인물과사상사, 2012)

 

 

 

네오콘이 원하는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는 유럽인들이 ‘백인의 짐(The White Man’s Burden)을 노래 부르기 시작했던 1898년의 상황과 유사하다. ‘백인의 짐’은 영국의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Rudyard Kipling)이 1899년에 쓴 시의 제목이다.

 

 

 

Take up the White man’s burden --

Send forth the best ye breed --

Go bind your sons to exile

To serve your captives’ need;

To wait in heavy harness

On fluttered folk and wild --

Your new-caught, sullen peoples,

Half devil and half child.

 

 

백인의 짐을 져라.

너희가 낳은 가장 뛰어난 자식들을 보내라.

너희의 자식에게 유랑의 설움을 맛보게 하라.

너희가 정복한 사람들의 요구에 봉사하기 위해

육중한 마구를 차려입으라.

네 불만투성이 표정의 갓 잡아들인 포로들,

반은 악마요, 반은 아이인 자들에게. [주2]

 

 

(『백인의 짐: 미국과 필리핀 제도』 중에서)

 

 

 

이 시는 인종에 대한 편견과 백인 우월주의로 가득하다. ‘반은 악마요, 반은 아이인 자들’은 비 서구인을 의미한다. 『백인의 짐』은 19세기 말 제국주의자들의 정서를 아주 정확하게 반영한 문학작품이다. 이 시의 부제는 ‘미국과 필리핀 제도’이다. 키플링은 이 시를 발표하여 스페인과의 전쟁에 승리한 미국을 찬양했고,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옹호했다. ‘백인의 짐’은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이 아시아 · 아프리카로 식민지를 확대해 나갈 때도 식민 지배의 명분으로 이용됐다. 문명으로 발전한 서구 선진국이 비 문명사회인 아시아 · 아프리카 지역을 점령해 개화시키는 것은 ‘백인의 의무’라는 논리다. 이러한 논리는 개발도상국에 경제적 지원을 약속하는 미국의 행보와 맞물려 있다.

 

 

 

 

 

 

 

 

 

 

 

 

 

 

 

 

 

 

 

* 윌리엄 이스털리 《세계의 절반 구하기》 (미지북스, 2011)

 

 

 

개발경제학의 권위자인 윌리엄 이스털리(William Easterly)는 빈곤 국가나 개발도상국을 돕는 서구의 원조 방식을 비판하기 위해 키플링의 시 제목을 붙여서 책을 썼다. 이 책은 국내에 ‘세계의 절반 구하기’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저자는 서구의 막대한 원조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원조를 받은 국가들이 빈곤의 터널을 탈출하지 못하는 현실에 주목한다. 그리고 국제 원조가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계획가’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온 계획가는 선의를 갖고 빈곤국 원조를 주장하며 거시적인 ‘계획’에 따라 막대한 자금을 마련한다. 하지만 계획가는 빈곤국을 도우려는 ‘선한 의지’만 있을 뿐 실제로 빈곤국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빈곤국의 실정에 관심도 없는 상태에서 돈을 쏟아 부으면, 손해를 보는 쪽은 빈곤국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필요한 것을 계획가에게 설명하지 못하고, 계획가의 원조가 실패해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저자는 서구의 국제원조 방식이 ‘백인의 의무’를 강조한 제국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백인의 짐’을 짊어진 채 세계무대를 누빈 미국은 늘 항상 이런 모습이었다. 타자나 다른 나라의 상황이 민주주의에 적합한지 아닌지 판단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들을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력’ 또는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불한당’으로 규정하여 무력으로 그들을 제압하겠다고 나선다. 그런데 누가 미국에 그런 권한을 준 것일까. 미국식 적군 감별에 당하고 싶지 않은 국가는 미국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미국의 영웅 놀이’에 호응한다. 장기 집권을 노리는 일본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집단적 자위권 법안’을 통과시킨 다음, 일본을 ‘동아시아의 미국’으로 만들려고 한다. 요즘 일본은 미국에게 다가가 적극적으로 애정 공세를 펼치고 있다. 일본도 ‘백인의 짐’의 유사품인 ‘일본인의 짐’을 짊어진 과거의 화려했던 시절이 그리운가 보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미개한 아시아’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침략하고, 더 나아가 중국까지 넘보면서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한 일본 제국의 행보는 ‘팍스 아메리카나’를 꿈꾸기 시작한 1898년의 미국의 모습과 정확히 겹친다. 좋든 나쁘든 역사는 반복된다.

 

 

 

 

[주1] 주디스 버틀러, 『폭력, 애도, 정치』, 《위태로운 삶》, 75쪽, 필로소픽, 2018.

 

[주2] 번역문은 《교양영어사전》의 「white man’s burden」 항목과 나무위키의 ‘백인의 의무’ 항목을 참조해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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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9-06-03 1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흠 서로 적대적인 쿠바에 미군의 관타나모 기지가 있나 했더니 저런 이유기 있었군요.카스트로도 강제적으로 미국을 쫒아내고 싶었겠지만 그랬다간 오히려 미군의 침공을 받을수 있으니 별수없이 그냥 놔둔것 갔네요.역시 힘이 없으면 안되는가 봅니다ㅜ.ㅜ

cyrus 2019-06-03 16:41   좋아요 1 | URL
쿠바 입장에서는 골치 아픈 일이죠. 만약에 외부인이 내 집의 방 한 개를 차지하면서 “쌍방 계약 파기할 때까지 계속 여기 살 거야”라고 말하고, 그 방에 나와 무관한 다른 외부인들을 들어온다고 생각해보세요. 정말 최악입니다... ^^;;
 

 

 

 

 

2001년 9월 11일, 미국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뉴욕과 워싱턴에서 동시다발 테러가 일어났다. 조지 W. 부시(George W. Bush) 미국 대통령은 “우리는 지금 전쟁 중”이라면서 테러와의 전면전을 선포했다. 도널드 럼즈펠드(Donald Rumsfeld) 국방부 장관은 사전경고 없이 군사적 응징을 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 강준만 《미국사 산책 15: ‘9·11 테러 시대’의 미국》 (인물과사상사, 2010)

 

 

 

 

부시 행정부는 전쟁 돌입에 앞서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에 최후통첩을 전달했다. 9·11 테러의 주모자이자 과격 이슬람 테러단체인 알카에다(Al Qaeda)의 지도자인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의 인도를 요구하는 한편 탈레반 정권과 연대 가능한 이슬람국가나 외부세력을 차단하기 위한 총체적인 외교전을 펼쳤다. 그러나 탈레반은 미국의 요구를 거절했다.

 

 

 “고귀한 독수리(Noble Eagle)가 나라를 지키고 무한정의(Infinite Justice)가 테러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 것.”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면서 미국이 공식 발표한 군사 작전명은 ‘무한정의’이었다. 부시 행정부는 아프가니스탄이 빈 라덴 신병 인도를 사실상 거부함에 따라 걸프 지역 인근에 항공모함과 전투기들을 배치하면서 이 같은 작전명을 붙였다. 독수리는 미국을 상징하는 국장(國章) 중의 하나이다. ‘무한정의’ 작전은 1998년 빈 라덴의 테러리스트 훈련캠프 공습 작전이었던 ‘무한접근(Infinite Reach)’ 작전의 맥락을 잇고 있다. 당시 클린턴(Clinton) 정부는 크루즈 미사일을 이용해 빈 라덴의 기지를 공격했으나 빈 라덴을 체포하는 데 실패했다. 부시 행정부는 ‘무한’이라는 단어가 있는 작전명을 내세우면서 장기전을 감수하더라도 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기필코 빈 라덴을 체포하여 테러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내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러나 미 국방부는 이슬람권 국가의 정서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작전명을 ‘항구적 자유(enduring freedom)’로 변경했다.

 

 

 

 

 

 

 

 

 

 

 

 

 

 

 

 

 

 

 

* [레드스타킹 16번째 책] 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필로소픽, 2018)

 

 

 

 

아프가니스탄 공습 이후 미군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생포된 탈레반 및 알카에다 포로들을 쿠바의 관타나모 만(Guantanamo Bay)에 있는 해군기지 수용소로 이송했다. 그러나 미국 행정부와 국방부는 수용소에 이송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포로(prisoners)’로 규정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들을 ‘포로’가 아닌 ‘테러를 일으킨 범죄자’로 간주하면 군사 법정에 세우는 데 용이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관타나모 수용소에 구금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전쟁 포로 및 전쟁 난민을 보호하는 ‘제네바 협약(Geneva Conventions)’에 명시된 권리를 받지 못한다. 관타나모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법의 적용을 받지 못한 채 무기한으로 구금 상태(Indefinite detention)로 지내야한다.

 

 

 

 

 

 

 

 

 

 

 

 

 

 

 

 

 

 

 

 

* 미셸 푸코 《안전, 영토, 인구: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7~78년》 (난장, 2011)

* 강미라 《푸코의 안전, 영토, 인구 읽기》 (세창미디어, 2013)

* 미셸 푸코, 콜린 고든, 파스콸레 파스퀴노 외 《푸코 효과》 (난장, 2014)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무기한 구금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관타나모 수용소에 기한 없이 갇혀 지내야 하는 수감자들의 실상을 고발한다. 그녀는 관타나모 수용소 안에서 일어나는 인권 침해 문제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수용소 구금자를 무기한으로 억류하도록 결정하는 국가 주권의 실체를 지적한다. 버틀러는 이 ‘국가 주권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제시한 ‘통치성(governmetality)이라는 개념을 참고한다. 1970년대 말 푸코는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푸코 사후에 강의록이 출간되었고, ‘통치성’을 설명한 내용이 담긴 강의록은 《안전, 영토, 인구》라는 제목이 붙여졌다)에서 처음으로 ‘통치성’을 언급한다. 푸코가 생각한 ‘통치’는 ‘품행을 유지하도록 만드는 활동의 형태’이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적합한 품행으로 처신하고 행동하도록 이끄는 기술이나 절차, 자격 등을 ‘통치성’이라 할 수 있다. 푸코는 왕권과 법을 통해 사회질서를 통제하던 16~17세기와 달리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전통적인 권력과 구분되는 ‘통치성’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보았다. 통치성은 국민 전체를 ‘인구’라는 이름으로 관리(통제)하는 동시에 건강, 안전, 복지 등을 보장받으려는 개인의 자유로운 행동을 유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푸코가 보기에, 통치성은 단순히 국가 권력자의 권위가 아니라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지식이나 기술이다. 따라서 통치성을 분석할 때 통치의 주체가 되는 권력이나 기관이 누구이며 이들이 사용하는 지식이나 기술의 형태를 어떻게 이루어지고, 그 통치의 효과가 어떤지 등을 파악해야 한다.

 

버틀러는 ‘통치성’ 개념을 활용해 관타나모 수용소 수감자들을 군사 재판으로 세우려는 미국의 정책을 낱낱이 해부한다. 그리고 그녀는 법적 영역 밖에서 수감자들의 운명(‘무기한 구금’)을 결정하는 행정부 관료들의 역할을 ‘초법적 행정 권력’이 작동된 통치성으로 보고 있다. 국가로부터 주권을 위임받은 미국 행정부 관료들은 국가를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권위를 확장하고, 국제 협약을 무시하면서 수감자들을 무기한으로 감금시킨다.

 

버틀러의 책 《위태로운 삶》에 수록된 두 번째 글 『폭력, 애도, 정치』와 세 번째 글 『무기한 구금』은 ‘미국’이라는 국가가 생존할 수 있게 하는 통치성의 실체와 일상생활에 침투한 통치성의 부정적인 효과들을 보여준다. 부시 행정부는 ‘무한정의’를 위해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면서 국민들에게 테러를 일으킬 수 있는 위험분자들을 경계하라고 주문했다. 테러 경계령은 테러에 대한 공포심을 부추겼고, 미국인들은 ‘자기방어’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테러와 무관한 무슬림들을 경계하고 차별했다. 부시 행정부의 ‘통치성’은 미국인들에게 제대로 먹혀들었다. 9·11 테러 이후의 미국인들은 인구를 관리하는 권력에 종속되는 동시에 스스로 안전을 지키려는 주체가 되었다. 아마도 그들은 타자를 위태롭게 만든 행위를 ‘정의’를 위한 일이라고 자위할 것이다. 테러에 희생된 무슬림들은 애도를 받아야 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 관타나모 수용소에 갇힌 무슬림들은 합법적인 절차를 받을 수 있는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한 채 이도 저도 아닌 ‘무기한 수감자’로 살아간다. 그들에게 ‘항구적 자유’는 없다. 이렇듯 미국 관료들이 생각하는 ‘무한’과 ‘무기한’의 공통점은 타자를 인간답지 살지 못하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언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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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1 1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6-01 15:49   좋아요 0 | URL
저는 ‘무한 리필’이 가능한 식당에 가면, 제가 가져온 음식은 무조건 다 먹어요. 예전에는 ‘무한’이라는 말이 좋게 느껴졌어요. 그런데 이 말을 누가, 어떤 상황에 쓰느냐에 따라 부정적인 의미가 될 수 있는 것 같아요.

요즘 9.11 테러와 관련된 글을 읽게 되니까 2001년 이후의 미국과 국내외 상황을 톺아보고 싶어지네요. 테러 이후에 미국과 이슬람권 국가 간의 냉전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군산복합체가 급성장했어요. 거기에 관련된 세력이 네오콘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