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감동은 위험하다
이정서 지음 / 새움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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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예술은 가짜다

 

바다 물은 파랗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파란 색깔을 띠지 않는다. 이렇게 감각을 통해 인식하는 현상과 실제 사실이 같지 않은 경우가 많이 있다. 우리는 육체적 감각을 통한 인식의 확실성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즉, 여기서 사물이나 현상의 실재 사실에 대해 육체적 감각과 경험에 기초한 주관적 인식이 객관성과 보편성을 지닐 수 있는가가 문제다. 우리는 감각과 경험을 통해 얻는 지식을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이것을 앎의 개념과 연관시켜 생각하지만, 경험을 통해 인식하는 지식은 실제로는 진실이나 사실에 대해 불확실성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경험은 육체적 감각의 관점에서 해석된 것으로 개인의 주관성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화가나 시인에 의해 표현되는 예술은 감각에 의해 인식되는 현상을 모방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상의 본질인 이데아(idea)와 두 단계나 떨어져 있어 실재를 왜곡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이데아를 모방한 것이 현상이고, 현상에 대한 또 한 번의 모방을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예술은 참다운 실체인 이데아로부터 동떨어져 있어 실재가 아닌 허상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즉, 플라톤에게 예술은 가짜다.

 

 

 

 Scene #2  표절도 가짜다

 

세계 철학자들의 할아버지에, 할아버지에, 그 고조할아버지보다 더 오래된 철학의 조상님 플라톤이 이정서의 소설 『당신들의 감동은 위험하다』를 읽었다면 현상과 본질을 구분하지 못하는 세상에 혀를 끌끌 찼을 것이다. 현상에 대한 또 한 번의 모방을 시도하는, 사이비 같은 예술 안에서 또 다른 사람이 자신의 작품인 것처럼 거의 비슷할 정도로 모방을 시도한다면 무슨 생각이 들까? 플라톤은 예술을 일종의 사이비라고 생각했는데 그 중에 제일 싫어했던 예술가가 바로 시인이었다. 아마도 책 제목처럼 멋진 문학적 수사로 가득 찬 시, 소설을 읽고 감동받는 우리에게 위험하다고 경고했을 것이다. 너희들은 현실의 모방에 모방, 특히 윤리적으로 어긋나고 거짓에 가까운 표절의 예술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감동하고 있었다고.

 

물론 처음에 현상을 모방한 원작자도 플라톤의 비판대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원작자 순수의 창작물을 허락도 없이 자신이 창작한 것처럼 모방하는 것도 이데아의 본질에 맞지 않으며 실재의 현상을 더욱 왜곡하는 것이다. 진짜 실재를 부정하는 대신 거기에 자신이 그 실재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표절이다. 원작의 일부이든 전체이든 원작자의 허락 없이 몰래 모방하는 것은 실재가 아닌 허상에 불과하다. 표절자는 실재가 아닌 허상을 자신이 만든 실재인 것처럼 연기한다. 말 그대로 표절도 가짜다.

 

 

 

 Scene #3  ‘표절’이라 쓰고, ‘인용’이라고 말한다

 

우리 사회는 심심하면 표절 논란이 생긴다. 남이 쓴 논문이나 소설에 일부 문장을 똑같이 따와서 자신이 쓴 문장처럼 사용한다. 표절을 의심받은 사람들은 다들 입을 맞춘 듯 하나같이 이렇게 말한다. 인용했을 뿐이라고. 그런데 놀랍게도 원작자의 동의 없이 인용하거나 ‘인용’이라고 말하기엔 너무나도 민망할 정도로 흡사한 문장이 버젓이 보이는데도 표절을 부정한다. 가방끈 짧은 사람도 보면 표절로 의심할 수밖에 없는데 오히려 가방끈 긴 사람들은 오리발을 내민다. 표절과 인용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말하는 ‘인용’은 글을 좀 쓰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해보는 표현(?)의 방식쯤으로 여긴다. 즉, 학계나 문단이나 글을 쓰는 사람들이 표절의 문제점을 심각하게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표절이 드러나면 재수 없는 것이며 안 걸리면 장땡이다. 일단 절대로 자신의 표절이 타인에게 들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하에 표절자는 원작의 모방을 몰래 시도한다.

 

원작의 악의적 모방을 시도하는 표절 행위 자체도 잘못한 것이지만, 그것을 묵인하고 면죄부를 주는 사회도 더 잘못됐다. 이러니까 우리 사회가 ‘표절 공화국’ 소리를 듣지. 잘못된 표절을 밝혀내는 일이야말로 당연히 정의롭고 옳은 행동이지만, 의외로 표절 문제를 처음 제기하거나 밝혀내려고 꼬치꼬치 캐묻는 사람들은 환영을 받지 못한다. 특히 오랫동안 사회적 명성을 두텁게 유지하고 있는 거물급 인사일수록 표절 논란에서 운 좋게 살아남는다(?). 표절이 증명되면 자신의 명예에 약간 흠집이 생길 뿐,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흠집은 잊히기 마련이다. 오히려 거물급 인사의 표절 행위를 문제 제기한 정의로운 사람이 정의롭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자신의 명예에 심한 흠집이 생긴다. 이렇듯 부당한 표절 행위를 증명하려는 소수의 아웃사이더는 외롭고 쓸쓸하다.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대중이나 아예 진실을 왜곡하기 위해서 눈을 가리는 위선자들로부터 날아오는 비난의 화살을 맞을 각오는 해야 한다. 아마도 이 사람 또한 그랬을 것이다.

 

그는 ‘문단의 게릴라’로 통한다. 혹자는 ‘비평계의 골칫거리’라고도 한다. 하지만 불편부당한 ‘독립적 지식인’으로 인정하는 이도 적지 않다. 문학평론가 이명원. 그는 극단의 평가를 받는다. 2000년에 낸 첫 평론집 『타는 혀』가 발단이다. 교수들에게는 일개 대학원생으로 보이는 사람이 김현 같은 한국 비평계의 거목을 겁 없이 비판한 것이다. 뭐, 일단 여기까지는 괜찮다. 그러나 이명원이라는 이름의 석 자로 인해 학계 전체가 발칵 뒤집혀버린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김윤식 교수의 저작물을 ‘표절’이라고 제기한 것이다.

 

“어떻게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려 드나? 너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너무 강한 거 아냐?”, “자네가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나 역시 자네를 제도적으로 매장시킬 수밖에 없어.” (219~220쪽)

 

이 사건 때문에 아웃사이더는 스스로 ‘이단’의 십자가를 졌다. 이런 파문으로 대학원 박사과정도 자의반 타의반 중도하차해야만 했다. 학계의 권위주의와 패거리주의의 벽은 개인이 돌파하기엔 높고 두터웠다. 이씨는 스승을 비판한 뒤 자신에게 가해지는 제도적 폭력에 견디지 못해 자신이 다니던 대학원을 자퇴하며 ‘꿇고 사느니 서서 죽겠다’는 도발적인 제목의 자퇴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정서의 소설이 십여 년 전에 있었던 이명원 사건을 소설로 재구성한 것이다. 소설에서는 실명 대신에 ‘이인서’라는 가명을 썼지만, 표절 논란의 당사자인 김윤식 교수는 실명 그대로 나온다. 후학이 선학에게 문제제기를 할 수 없게 만들고, 표절 행위를 묵인하는 권위적인 학계의 몰상식한 모습을 다시 한 번 고발하고 부각시키려는 작가의 비판의식이 돋보인다.

 

 

 

 Scene #4  나의 작품을 만든 건 팔할이 ‘뻥’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단순히 권위만 남은 학계를 비판만 하고 있지 않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혹은 알면서도 모른 척 했던 작가의 표절 논란 그리고 특정 작가의 책을 팔기 위해서 출판사가 주도한 ‘사재기’ 등 은밀하게 감춰진 문학계 전체의 병폐를 은근슬쩍 고발한다.

 

우리가 감동받으면서 읽었던 유명 작가의 시나 소설이 알고 보니 작가를 꿈꾸는 무명의 문과생이 쓴 습작을 그대로 모방했다면? 베스트셀러라는 책 광고 문구에 혹해서 고른 책이 출판사의 사재기로 판매 부수를 올렸다면? 그것은 독자를 기만하고, 모욕하는 것이다. 그리고 순수 창작물이라고 생각했던 작가의 작품은 진짜가 아니라 허상, 말 그대로 ‘뻥’이 된다. 우리는 작가와 출판사가 꾸민 ‘뻥’, 즉 남의 문장을 표절하고, 출판사가 만든 베스트셀러에 현혹되어 감동을 느낀 것이다. 시인이야말로 현실을 모방하는 사기꾼이라고 비아냥거리던 플라톤이 문학의 사기꾼들에게 당하는 독자들을 보면 하늘에서 배꼽 잡아 웃었을 것이다.

 

현실을 모방하는 문학 자체를 문제 삼고 싶지 않다. 플라톤의 입장에서 오늘날의 문학을 ‘뻥’이라고 비판하는 것도 절대로 아니다. 그러나 이미 누군가가 현실을 모방한 문학을 버젓이 자신의 문학이라고 모방하면서 ‘뻥’ 치는 행위야말로 심각한 문제다. 그리고 문학성 떨어지는 문학을 문학성 있는 것처럼 ‘뻥’ 치는 출판계도 마찬가지. 문학가의 표절이나 출판사의 사재기 논란은 잊혀질만하면 뉴스에 나온다. 특히 출판사 사재기 논란은 정부 부처에서도 경고를 줄 정도로 단속과 처벌을 강화했지만, 최근에 모 출판사가 사재기 판정을 받은 사실을 생각한다면 고질적인 병폐가 쉽게 고쳐지지 않을 듯하다. 상황이 이런데 과연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들이 읽는 것은 모두 진실인가. 이래서 그들이 팔할의 뻥으로 만들어 낸 문학의 감동은 위험하다.

 

 

 

 Scene #5  당신이 우습게 보는 대중의 분노도 위험하다

 

이인서 아니 이명원이 본 교수사회는 만신창이가 됐다. 붕괴 일보 직전이다. 거친 풍랑에 휩싸인 난파선과 같다. 들이닥친 수모와 시련은 교수사회 스스로 초래했다. 교수사회는 그 동안 성채였다. 고인 물이 썩듯이 성채는 자기정화력이 약하다. 논문 표절 등 그릇된 관행이 지속됐다. 제어장치가 없어 오히려 분파돼 나갔다. 고전적인 기법인 논문 표절은 도를 넘어섰다. 제자의 논문 훔치기는 일상화가 되다시피 했다.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지식범죄이지만 통제기능은 전무하다. 심지어 대학과 교수가 한통속이 되어 학문적 범죄의 극단에 서 있다.

 

교수사회만 그렇지 않다.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는 글뿐만 아니라 사진 심지어 남의 인생 자체를 그대로 자신의 인생처럼 행동하는 경악스러운 사람도 있으니 ‘표절’이라는 모방에 전혀 죄책감마저 느껴지지 않는 것 같다. 겁 없이 표절과 도용을 행하고, 그것을 눈 감고 모른 척 하는 이 세상에서 과연 플라톤이 찾고자 했던 현실의 실재는 있을까. 진짜도 못 찾을 판에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도 못할 정도로 우리 사회는 정말 만신창이가 됐다.

 

플라톤도 이데아를 찾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현실을 모방하는 사이비인 예술은 죽지 않았고, 시인이라는 직업은 쇠퇴하지 않았다. 예술의 힘이 유지할수록 플라톤의 이데아 찾기가 힘든데 거기에 정당한 ‘모방’이라고 예술을 ‘표절’하는 사기꾼이 늘어나니 천하의 플라톤도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세상은 진짜를 가장한 가짜 문학과 예술이 많다. 그리고 그 가짜에 우리는 너무 쉽게 속아 넘어가 감동받고, 가짜에 현혹되어 진짜를 외면하고 무시할 때도 있다. 참으로 이 세상이 혼란스럽고 머리가 아파온다.

 

그래 맞다. 인생은 어차피 표절이다.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 모두들 누군가를 조금씩 베끼며 살아간다. 티 안 나게 살짝 살짝.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본능이 모방이야말로 창조의 원천이라고 자신의 스승을 반박했으나 안타깝게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했던 그 모방은 지금 표절의 원천이 되고 말았다.

 

모방을 악용하는 이 세상을 완전히 고치기는 힘들 것 같다. 표절 행위를 근절하는 것은 물론이요, 표절로 이루어진 가짜 문학을 구별하는 것도 쉽지 않다. 이명원이 자퇴서에서 인용한 체 게바라의 말처럼 문학을 꿇고 사느니 서서 죽는 건 힘들지라도 진짜처럼 행동하는 가짜에 맞서는 용기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용기마저 우리 스스로 죽인다면 결국 가짜에 속고, 감동받는 우리에게 피해가 고스란히 돌아온다.

 

표절 행위를 용인하고, 우리도 악마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 표절을 한다면 현실을 어지럽게 하는 허상에 맞서는 용기의 힘은 줄어들고, 점점 죽어간다. 또 현실의 실재를 구별하고 찾는 분별력도 떨어진다.

 

착한 모방은 또 다른 창조의 원천이 될 수 있다. 혹은 짝퉁이 원조를 넘어서기도 한다. 그것에 비하면 표절은 찌질할 뿐이다. 더욱이 ‘모방’, ‘인용’이라는 이름을 함부로 갖다 대는 변명은 더 찌질해진다. 그러한 구차한 변명을 하는 예술이나 문학이 대중을 가짜 문학에 쉽게 감동받는 어리석은 존재로 본다면 오산이다. 불편한 진실이 끝내 밝혀지는 순간, 대중이 냉소적인 비난을 가득 담아 던지는 돌을 참을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이 우습게 보는 우리의 분노도 위험하다.

 

그러니 김윤식 교수님, 그 때 그 사건이 잊혔을 거라 안심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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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 들어주는 아이 - MBC 느낌표 선정도서, 보급판 사계절 저학년문고 26
고정욱 지음, 백남원 그림 / 사계절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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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11년 전에 ‘느낌표 선정도서’라는 광고 문구를 본 것도 있지만 초등학생 시절 고정욱 작가의 『아주 특별한 우리 형』을 읽은 이후로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나 동화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어딜 가나 사람은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한다고 배운다. 그러나 한편, 흔히 사람들은 자신과 다르거나 낯선 것들에는 지독한 적대감을 드리운다. ‘다름’은 어느새 쉽게 ‘옳지 않음’으로 바뀌어 공동체 안에서 공존하지 못하고 배척당한다.

 

책 표지에 파스텔톤으로 그려진 그림을 통해서 『가방 들어주는 아이』의 내용을 선명히 이해할 수 있다. 아마도 주 독자가 초등학생이 되리라라는 걸 감안했는지 책 표지 왼쪽엔 커다랗게 양쪽 어깨에 가방을 맨 아이가 못 쓰는 양발대신 양손에 목발을 의지한 채 힘겹게 뒤따라오는 장애인 친구를 약간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실쭉하게 쳐다보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2학년이 되는 새 학기 첫날 주인공 문석우는 엄마와 함께 목발을 짚고 교실에 들어온 민영택과 한 반이 되고 첫날부터 다리가 불편한 영택이와 집이 가깝다는 이유로 일 년 동안 영택이의 가방을 대신 들어주는 임무를 맡게 된다.

 

갑작스럽게 주어진 임무에 조금 얼떨떨하면서도 석우는 선생님의 명령이기에 어쩔 수 없이 영택의 가방을 대신 들어주게 되고 그러한 석우에게 미안해하는 영택과 어색한 첫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원치 않지만 매일 등하굣길을 같이 하는 친구가 된다.

 

아이들에게 '찔뚝이'라고 놀림 받는 영택이와 함께 다니게 되면서 찔뚝이 친구라는 말이 듣기 싫고 때로는 하굣길에 축구라도 하며 놀고 싶어도 자신이 맡은 임무 때문에 마음놓고 놀 수도 없게 된 석우는 가방 들어주는 일이 귀찮게 느껴지다가도 얼마 안 있어 주변 사람들에게 몸이 불편한 친구를 도와주는 착한 아이라는 칭찬도 받게 되고 청소를 빠지는 '특권'도 누리면서 점차 친구의 가방을 대신 들어주는 일에 적응해 가기 시작한다.

 

또한 가정 형편이 전보다 어려워져 학용품 살 돈도 제대로 타지 못하는 석우에게 학용품 살 돈을 주시기도 하고 초콜릿 같은 간식도 주시는 영택의 어머니의 배려로 차츰 가방 들어주는 일의 '장점'도 누리게 된다.

 

하지만 석우가 장애인 친구 영택이의 가방을 대신 들어주면서 얻게 된 가장 큰 선물은 진정으로 장애인 친구를 이해하게 되는 일이다. 아무 생각 없이 영택이의 장애에 대해 툭툭 내던지는 사람들의 빈정거림에 대해 대신 분노하기도 하고 반 아이를 거의 다 생일잔치에 초대해도 왠지 장애인이라는 '떨떠름함'때문에 생일잔치에 오지 않는 반 친구들에 대한 서운함을 공유한다.

 

그리고 일 년이 흐르고 3학년이 된 첫 날 석우는 지난 일 년 동안 몸이 불편한 친구를 위해 가방을 들어준 공로로 모범상을 받게 되지만 석우는 차마 그 상을 받을 수가 없다. 바로 모범상을 받게 되는 날 아침 등굣길에 다른 반이 된 영택이의 가방을 들어주려다 주위 아이들이 '가방 들어주는 아이'라는 수군거림으로 인해 슬그머니 영택이네 집 앞을 지나쳤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장애인을 위해 '가방 들어주는 아이'같은 착한 아이가 많아야 한다는 교훈을 일방적으로 심어주려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의 고통 못지않게 1년 동안 장애인을 위해 봉사했으면서도 가끔은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장애인을 모른 척 하고 싶어질 때도 있는 주변인의 고통을 생생하게 다루었다는 데 있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아쉬움과 바람이 있다면 후속작으로서는 장애인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겪어나가는 장애인과 주변인의 에피소드를 담은 내용이 아니라 장애인으로 인해 세상이 더욱 발전하고 변화해가는, 장애인의 의지가 주체가 된 작품을 써 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장애인 면전에서도 장애인에 대해 험한 말을 서슴지 않을 정도로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저급했던 예전에 비해 얼마 전부터는 장애인이라는 말 대신 장애우라는 용어를 사용하자는 운동도 일 정도로 우리의 장애인문화는 성숙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영택이를 '찔뚝이'라고 놀리는 영택이의 반 친구들처럼 우리의 인식 속에는 장애인에 대한 올바른 배려가 정립되어 있지 못한 실정이다. 한 나라가 선진국인지를 알려면 어린이, 노약자, 장애인에게 얼마나 살기 좋은 나라인지 알아보라는 말도 있다.

 

부디 이 소설이 더욱 널리 읽혀진다면 우리나라엔 장애인의 가방을 대신 들어주는 '가방 들어주는 아이들'도 많아질 것이고 우리나라가 장애인에 대해 배려하는 문화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어린 친구들이 『가방 들어주는 아이』를 읽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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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 박태원 단편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15
박태원 지음, 천정환 책임 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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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를 지나는 사람의 발걸음은 보폭을 가늠하기엔 너무 빠르고, 감정을 알 수 없는 무표정한 낯빛들. 어쩌다 눈이 마주친 사람들은 흘낏 내 눈을 의심하는 눈빛을 보낸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어폰을 귀에 꽂았거나 핸드폰에 정신을 쏟고 있는 사람들이다.

 

도시의 방관자가 되어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며 탐색하는 것. 구보가 오늘의 도시를 걷고 있었더라면 관찰자의 시선을 일상의 또 다른 재미로 즐겼을 것이다. 소설가 구보는 아무런 목적 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나날을 보낸다. 스물여섯 살인데 장가를 가지 않았으며 가족으로는 어머니와 조카, 형수뿐이다. 구보 씨가 부양해야하는 가족이다. 어머니는 아들이 무엇을 하고 돌아다니는지 모른다. 어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또 동경엘 건너가 공부하고 온 아들이, 일자리가 없다는 사실에 믿지 못하지만 별 타박은 하지 않는다.

 

구보는 집을 나와 천변 길을 따라 광교를 향하여 걸어간다. 한낮의 거리에서 격렬한 두통을 느낀 구보는 무조건 전차를 탔다가 1년 전 소개받았던 여성을 우연히 본다. 소개받은 후로 연락을 하지 못하고 바보처럼 지내는 자신을 자학하기도 하다, 조선은행 앞에서 내려 장곡천정으로 향한다.

 

다방에 들어가 가배차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다 일어서서 골동품 가게를 경영하는 친구를 찾아간다. 친구는 방금 나갔다는 점원의 얘기를 듣는다. 할 수 없이 다시 걷는다. 그러다 금전적으로 출세한 친구를 만나 다방으로 끌려간다. 출세한 친구의 옆에는 예쁜 여자가 앉아있었다. 그 여자를 보며 ‘분명 황금과 육체를 바꿨을 것이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다시 조선은행 앞에까지 간 구보는 친구를 만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논하는 등 담화를 나누다가 친구가 급한 약속이 있어 잠시 헤어졌다 다시 만난다. 다시 만난 둘은 대창옥에서 식사를 하고, 과거 연애하였던 여성에 관하여 생각한다.

 

다시 친구와 술집에 간 구보는 술집 여종업원을 보면서 상념에 젖는다. 어느 날, 상복을 입은 여성이 ‘여급 대모집’이라고 적힌 광고를 보다가 자신의 나이를 한탄하며 돌아서던 장면이다. 구보는 생각한다. ‘여기 이 여자들과 그 아낙네 중 누가 더 행복할까?’ 새벽 2시,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차와 술과 여자, 거리의 풍경을 실컷 구경하며 만감이 교차하던 구보는 ‘생활인으로서 좋은 소설을 쓰리라’ 다짐하면서 집으로 향한다.

 

어찌 보면 시시껄렁한 이야기다. 소설 쓰는 청년이 하루 종일 거리를 헤매다 술 마시고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무슨 모더니즘 소설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겠는가 싶다. 하지만 놀라운 점은, 몇몇의 낯선 어휘를 제외하면 이 소설의 배경은 오늘이라고 해도 믿겠다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가까운 과거의 소설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근대의 풍경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다.

 

근대는 온갖 물질문명의 세례 속에서 마치 축복처럼 다가왔었다. 그러나 근대의 메커니즘이 언제나 밝은 면을 지녔던 것만은 아니다. 합리적이고 잘 구획된 인공적인 공간은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고 세련되어 보이지만 불행히도 근대인은 철저히 분할된 공간 속에,그리고 꽉 짜인 시간표 속에 종속된 채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런 까닭에 타인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는 줄어들었고 결국 불신과 불안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어 버린 것이다.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것을 추구하는 근대의 기획은 분명히 신화와 미신이 지배하는 봉건사회로부터 인류를 한 차원 진보하게 만들었다. 무질서하고 지저분하며 음험한 자연세계를 규칙과 질서를 통해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근대 도시로 만들어 낸 것이다.

 

문제는 합리와 효율을 높이고, 보편성을 추구하다 보면 어느 새 각자가 지닌 본래의 고유성을 상실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비단 인간만이 아니다. 공간이나 시간도 모두 그 고유한 특수성을 잃고 보편적인 단위로 환산되고 만다. 근대의 보편적 기획은 자칫 획일화될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고, 그 지점에서 주체와 타자를 이분법적으로 나눠 타자를 소외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나'와 차이를 지닌 사람과는 소통하지 않으려는 편견은 결과적으로 현대인들을 소통 부재의 삶으로 내몰리게 한 것이다.

 

모더니즘은 원래 현실을 추상화한다는 개념에서 나왔다. 리얼리즘 문학은 현실 세계를 재현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면, 모더니즘 문학은 인간의 정서를 중시 여기면서 언어 자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또한 모더니즘은 근대 산업 사회에서의 개인이 느끼는 상실감과 소외감을 드러낸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드러내고자 한 것은 그 당시의 소설가 구보를 통해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철저히 외면당하거나 무기력한 상태로 방관자적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는 개인의 소외 문제라는 것이다.

 

구보 씨는 ‘산책자’가 되어 서울의 거리를 걷고 있다. 전차와 재즈, 최신 유행의 모던 걸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하수구 시설이 되지 않아 똥냄새가 넘쳐나고, 골목 안에는 ‘문맹’의 어머니들이 돈 벌고 들어오는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 아들은 아무리 소설을 써도 돈이 되지 않는다. 한 가족을 벌어먹여 살리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원고료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신문사로, 총독부 청사로 구직활동을 벌여보지만 역부족이다. 그래서 무조건 거리로 나서 보는 것이다.

 

허나 어쩌란 말인가. 돈이 있어야 장가를 가고, 멋있는 여자를 들일 텐데. 이게 소설가 구보 씨의 한탄 섞인 독백이었다. ‘하지만 예쁜 여자는 못 얻어도 좋다. 생활인으로 돌아가 소설을 쓰리라’는 다짐을 잊지 않는다. 그에게 막장드라마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던 것이다. 막장드라마는 자본 앞에 자존심을 던져버린 마스터베이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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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치 - 2013 제37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이재찬 지음 / 민음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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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낙타 한 마리가 나타났다 등에는 혹이 아닌 물주머니가 하나밖에 없는 낙타의 모습이었다 이런 낙타를 남들은 기형 낙타라고 불렀고 어떤 이들은 외등 낙타라고도 했다 낙타는 지금껏 사막을 걸어와 놓고도 도시가 사막이 되어가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모래가 되어버린 눈물을 흘리며 눈을 껌벅였다 수십년간 사막의 모래를 밟으며 낙타로 살았지만 이곳 도시의 모래는 한사코 밟지 말라고 했다 낙타는 도시의 모래에 충혈됐는지 잠이 들어서도 제대로 눈을 감지 못했다 눈을 껌벅일 때마다 눈에서 쇠붙이 소리가 났다 낙타는 잠이 들어서도 쉬지 못했다 사막이 되어버린 도시에는 집도 오아시스도 없다고 했다 자던 낙타가 잠에서 깨더니 어느 교회의 첨탑에 비친 십자가를 보며 북극성이라고 외치며 따라갔다 낙타는 이 도시에서 아직도 신화를 찾고 다녔나 보다 모래 위에 걷던 낙타는 자꾸 걸을 때마다 모래 속으로 빠져들어 가더니 끝내 사라지고 말았다 (중략)

 

 

- 김 산 ‘낙타 한 마리’ 중에서 (『상처 있는 나무는 아름답다』수록)

 

 

 

 

 

 ♣ 버거운 짐을 진 저 낙타 보소

 

 

 

 

 

 

 

송필  「실크로드」 2012년

 

 

여기 천근만근 무거운 돌덩이를 진 낙타가 있다. 우악스러울 정도로 커다란 바윗덩이는 낙타를 짓누를 법도 한데 의외로 낙타는 잘도 버틴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이 조각은 송필의 작품 「실크로드」이다.

 

작가는 커다란 짐을 이고 사막을 종단하는 낙타처럼 현대인도 무거운 돌덩이를 짊어지고, 삶을 어렵사리 영위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송필은 “때론 우리의 삶이 화려하고 빛나 보이지만, 진실이란 삶에 있어서 더없이 가혹하다”고 토로했다. 감당키 어려울 정도로 버거운 짐을 지고 번뇌하는 현대인을 위로하기 위해 작가는 이 묵직한 조각을 만들었다.

 

사막 극한의 환경을 나름 적응하는 낙타도 지치면 죽기 마련이다. 그래서일까. 낙타들 중에는 사막의 열악한 환경 탓인지 간혹 비정한 낙타들이 있다고 한다. 이런 낙타들은 새끼를 낳고도 돌보지 않는다. 새끼가 굶주려 죽게 생겼는데도 젖은 물론이고 발로 차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한다. 어미에게 버림받은 새끼 낙타는 결국 불쌍하게도 죽고 만다.

 

 

 

 

 

 

이재찬의 소설 『펀치』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초반에도 ‘낙타’가 등장한다. 내신 5등급인 고등학교 3학년생 ‘나’, 방인영은 사막 한가운데서 낙타 한 마리 타고 건너고 있다. 모래 먼지는 오늘따라 나의 눈앞을 가리고, 매섭기만 하다. ‘미래를 꿈꾸라고 하면서 미래를 닫아 버린, 멍청한 어른들’의 잔소리처럼 낙타와 나의 숨통을 막히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낙타가 지쳐 보인다. ‘멍청한 어른들’의 말에 지쳐버린 나의 슬픈 족속이여. 너는 이승환의 노랫말에 나오는 ‘붉은 낙타’와 같다. 퍼렇게 온통 다 멍이 든 억지스런 온갖 기대와 뒤틀려진 희망들을 품고 살았지만 혼돈과 질주로만 가득한 터질듯한 머릿속은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넓은 사막에는 오직 낙타와 ‘나’만 있을 뿐이다. 아무런 목적 없이 모래벌판을 걷다가 언젠가는 작열하는 햇빛 속으로 사리지고 말겠지.

 

 

 

 ♣ ‘꽃다운’ 나이는 없다

 

올해도 수능시험이 끝나기 무섭게 두 젊음이 세상을 등졌다. 언제나 그러했듯, 각종 언론들은 ‘꽃다운’ 나이의 두 입시생이 입시경쟁의 살벌한 시스템 속에서 피해자가 되었노라고 떠들어댔다.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도 수능에 비관하여 투신으로 생을 마감해 버린 두 소녀에 대한 애도를 아끼지 않았다. 아! 우리의 아이들이 꽃다운 나이에 이렇게 죽어가도 되는 것일까, 안타까워하면서. 오늘 수능 시험 등급컷과 채점 점수가 공개됐다. 또 다른 경쟁이 시작되었다. 자신의 수능 등급에 크게 실망하는 수험생들의 곡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증. 정말 그 아이들의 나이는 ‘꽃다운’ 나이인가? 초등학교, 아니 유아 시절부터 서서히 살인적인 교육열의 ‘매트릭스’에 갇혀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을 피 말라 가는 입시 경쟁으로 보내야 하는 그 아이들의 나이가 정말 꽃다운 시절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입시전쟁이라는 잔인한 홍역을 치르고 그네들이 안착하게 되는 대학이라는 곳은 또 어떠한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한 1년 정도 자유 아닌 자유를 만끽하고 나면 청춘이니 낭만이니 하는 말은 곧 사치에 불과하다는 현실인식에 압도되어, 그 ‘꽃다운’ 나이라 일컬어지는 시절의 젊음들은 고시촌으로, 영어 학원으로, 서둘러 달려간다.

 

그뿐이랴. 소위 명문대라 일컬어지는 곳에 진입하지 못한 젊음들은 평생 천형처럼 붙어 다닐 ‘비명문대생’이라는 딱지 때문에 극심한 열패감에 허덕일 것이다. 그네들의 대부분은 일찌감치 자기 분수를 깨닫고 ‘낮은 데로 임할’ 것이며, 그런 삶의 길을 거부한 젊음들은 또다시 살벌한 입시전쟁터로 자신의 몸을 던질 것이다. 그중 몇몇은 뒤늦은 ‘승전보’를 알리며 명문대생이라는 훈장을 달고 움츠렸던 어깨를 펴겠지만, 나머지들은 또다시 패배의식만을 가득 안은 채 제자리로 돌아와야 할 것이고, 그렇게 다시 돌아온 캠퍼스에서도 그들은 그저 조용히 고개 숙이고 다니며 ‘돌아온 탕자’라는 자의식에 괴로워해야 할 것이다.

 

이런 황량한 사막의 한가운데 서 있는 그들에게서, 어른들은 도대체 무슨 꽃이 피기를 기대하는 것일까. 이 나라의 아이들은 다만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사막을 건너서 허상으로만 존재하는 신기루를 향해야 하는 낙타의 운명을 강요받았을 뿐이다.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날 운명은 애초에 있지도 않았는데, 그런 그들을 향해 어른들은 무슨 낯으로 ‘꽃다운 나이’라 일컫는 것일까.

 

『펀치』에 등장하는 고등학교 3학년 주인공 방인영의 모습을 보면 ‘꽃다운 나이’라는 멋진 표현에 어울리지 않는다. 아니, 자격이 없다고 봐야 한다.  방인영은 자본주의 계급 사회의 논리를 폐부 깊숙이 체득하고 있다. 5등급은 내신 성적과 모의고사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머리에서 외모까지 5등급은 영원히 따라다닐 꼬리표다. 그녀는 멍청한 어른들’의 한국 사회를 매우 직설적으로 공격하고 비꼰다. 그리고 예민한 감성은 쌓일수록 극단적인 감정으로 변하고, 무시무시한 펀치 한 방 날릴 준비를 한다.

 

교회에 헌신적이며 딸의 인생을 제 뜻대로 끌어가고자 다그치는 엄마, 돈 있고 권력 있는 자들을 위해 법조문을 연구하고 세 치 혀를 놀리는 아버지, 학생들을 공부하는 기계로 여기는 학교 모두가 못마땅하다. 참다못해 들고일어난다. 조금 과격한 방식이다. 부모를 죽여서 자유와 독립을 얻기로 한 것이다. 방인영에게 ‘살인’은 단순히 부모에 대한 무시무시한 증오를 풀기 위한 감정의 배출이 아니다. ‘멍청한 어른들’이 만들고 강요하는 사회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잘못된 비상구다. 영원히 닫힐 줄 알았던 비상구를 열게 만든 열쇠가 바로 부모에게 향하는 흉기였다. 그녀는 이러한 사회가 낙인 찍어주는 무능력한 ‘탕자’가 되길 두려웠고, 원치 않았던 것이다.

 

 

 

 ♣ 죄 없는 자, 그녀에게 돌을 던져라

 

독일 극작가 발터 하젠클레퍼의 『아들』이라는 희곡에 보면 의사인 아버지는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헌신한다. 저축해 놓은 돈조차 없으면서 비싼 과외수업을 시켰다. 하지만 웬걸. 대학입시에 실패해 재수를 거듭하며 아들은 빗나간다. 어느 날 아들은 심하게 대든다. “아버지가 바라는 권력과 재력을 다 가질 수 있는 직업을 강요하지 말라!”고. 그리곤 아버지 가슴에 권총을 겨눈다.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숨진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살인'과 '가족'이라는 단어 사이의 거리가 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정반대로 나타나고 있다. 가족 간 살인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가족이기 때문'이다. 가정은 사랑의 공동체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상처를 많이 주고 갈등을 일으킬 소지가 많은 집단이다. 이러한 집단 환경에 길들일수록 마음의 상처는 사회에 나가서도 쉽게 치유할 수 없다. 고통을 그대로 안고 간다. 이것을 치유하지 못해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의 생명이나 피해 같은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 ‘돈’, ‘성적’, 그리고 경쟁을 강요하는, 인간성 없는 황량한 사막 같은 사회에서 비정한 젊은 낙타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지겨운 것을 참으며 사는 사람을 낙타에 비유했다. 등짐을 가득 지고 메마른 사막을 지나는 낙타처럼 부담과 의무에 매여 사는 비주체적 인간을 일컫기 위해서다. 니체는 낙타를 경멸하면서 사자처럼 살라고 했다. 부모든 신이든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명령에 따라 사는 인간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와 창발성에 따라 사자처럼 살라고 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아이들을 낙타로 키우면서 사자처럼 살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늠름하고 올바른 사자가 아닌 애정에 굶주린 난폭한 사자로 키우고 있다. 언젠가는 그 사자는 자신을 키운 부모를 향해 날카로운 엄니와 송곳을 내밀지도 모른다.

 

방인영은 자유로운 ‘붉은 낙타’가 되지 못했다. 냉소와 증오로 가득 찬 사자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죄에 반성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천연덕스럽게 평상시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노래에 듣기만 할 뿐이다. 그녀의 삶을 위로해줄 위안거리는 오직 에이미의 음악만이 유일하다.

 

그녀의 살인은 용납할 수 없는 범죄지만, 자신의 자유를 억압하는 부모를 쓰러뜨리는 사자가 되었어도 그녀를 용서하거나, 따뜻한 손길을 건네줄 사람은 없었다. 음악이 흘러나오는 이어폰을 꽂은 채 그녀는 스스로 세상과 단절할 것이다.

 

우리는 이 소설의 결말을 어떻게 봐야 할까? 이 소설을 심사한 박상원 소설가의 말처럼 ‘잘 썼다’라고 표현해서 독자의 감성 앞에 휘두르는 예리한 문장을 칭찬해줘야 할까? 아니면, 독기 서린 젊은 살인자에게 돌을 던져야 하는 걸까?

 

이재찬의 소설을 읽고 난 뒤에 어떻게든 생각하는 건 독자의 자유다. 그러나 방인영에게 돌을 던질 준비는 하지 말자. 뭐, 이 소설을 읽고 벌써 돌을 던질 준비를 하고 있다고? 잠시 손에 쥐고 있는 돌을 내려놓고 곰곰이 생각해보라. 그 다음에 성서 속 유명한 구절을 떠올려 보라. 죄 없는 자는 그녀에게 돌을 던져라.

 

우리는 방인영에게 돌을 던질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린 낙타를 사자로 키우게 만들도록 성공을 강요하고, 경쟁을 부추긴 ‘멍청한 어른들’이니까. 또 방인영의 살인 동기와 과정을 두 눈 똑똑히 지켜봤다. 그녀의 분노를 키우게 만든 일차적인 원인에다가 살인 방조죄 추가. 우리는 작가 특유의 속도감 있는 이야기 전개에 푹 빠져 있다 보면 어느새 그녀의 공범자가 되어 있다.

 

시간이 서서히 흘러가면 어른들은 망각이라는 편리한 장치 덕을 톡톡히 보며 또다시 이 살벌한 ‘계급투쟁’ 전선에서 자신의 자식만은 승자가 되기를 은근히 고대할 것이다. 이 땅의 어른들이 다람쥐 쳇바퀴처럼 돌고 도는 이러한 절망적인 행태에 어떠한 실질적인 변화의 노력도 기울이지 않으면서 그저 1년에 몇 번씩 악어의 눈물이나 흘릴 생각이라면, 이제 그 아이들에게 ‘꽃다운’이라는 수식어는 붙여주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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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3-11-27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젯밤에 한글공부 하다가 욱 해서 아이참! 이건 좀 알아야지! 소리를 버럭 질러서 딸아이의 커다란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게 한 범인으로서 정말 이 글을 읽고 부끄럽기 그지 없네요.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에 겨우 한글을 뗐지만 그래도 부족한 것 하나 없었는데- 사이러스님 글 읽고 반성 또 반성. 오늘은 즐겁게 한글공부를 해야겠습니다.

또 하나, 서울대 나온 전 애인이 제가 서울대 출신이 아니란 걸 알고 입을 삐죽거리며 공부 안 하고 날라리처럼 놀았구만- 하여 미친년처럼 게거품 물며 정신교육 좀 받아야겠노라고 지랄 떨었던 기억도. 근데 사이러스님 최근 알라딘에서 읽은 리뷰 중에 가히 으뜸인걸요. 서울 언제 오세요? 술 한잔 해요.

cyrus 2013-11-27 20:26   좋아요 0 | URL
한글은 가르치려고 하기보다는 자주 대화를 해보면 저절로 늘지 않을까요? 물론 가르칠 땐 확실히 가르쳐야죠. 제가 미혼이라서 잘 모르지만, 어렸을 때 울엄니도 한글이든 무슨 공부든 무조건 혼내면서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쳤던 기억이 나서.. 너무 심하게 다그치는 교육은 별로라고 생각해요. 아이에게는 상처받고, 엄마 입장에서는 홧병 생기고.. ㅎㅎㅎ 12월에 서울 갈 일이 생겼어요. 이번에 진짜 얼굴 봐요. 조만간 연락할께요 ^_^

수이 2013-11-27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화 안 내고 한글공부했어 ㅋㅋㅋ 스파르타식 나도 싫다 했는데 내 성향은 스파르타식인가봐 ㅠㅠ 12월에 봐! 이번엔 꼭 미리 연락하구 ㅋㅋ
 
광장 / 구운몽 최인훈 전집 1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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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굴욕?

 

문학작품이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나 시대적 상황과 연관돼 독자들에게 오랫동안 기억되고 꾸준히 읽혀지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 사건 안에 담겨 있는 '시대정신', 즉 당시 사람들이 추구했던 가치와 고뇌를 온전하고 명료하게 표현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특히 최인훈의 『광장』과 작품 속 주인공 이명훈이 분단시대에서 4.19혁명으로 나타난 역사적 전환기의 민족의 사상과 고뇌를 상징한다면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는 급격한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몰락해가는 도시 빈민들의 삶을 통해 70년대 경제성장의 사회상의 폐해를 고발했다. 두 작품의 공통점이 있다면 소설에서 묘사되고 있는 시대적 상황의 단면들이 발표된 지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난쏘공』이 출간 30년 만에 통산 100만 부의 판매 기록이 세웠을 때 작가 조세희는 '현재 철거민의 삶은 30년 전이나 똑같다'고 말하면서 '30년 전에 나온 내 소설이 지금까지도 오랫동안 읽혀진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냉담한 소감을 밟혔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회로부터 소외받아야만 했던 '난장이의 꿈'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이다. 『광장』도 마찬가지다. 작가 최인훈은 여러 차례 개작 끝에 탄생된 수정본을 출간하게 된 이유를 『광장』의 역사적 시대의 산물이며 좀 더 문학성을 보강하여 후대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명준이 바다에 투신한 지 42년이 지난 지금도 분단의 대립은 여전하다.

 

최인훈의 『광장』도 문학 교과서에 많이 수록되고 지금까지도 수정본으로 나올 정도로  전후 한국 문학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세희의 『난쏘공』에 비하면 대중의 인지도는 조금 낮은 편이다. 철거민 또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상이 조명되는 사회적 이슈가 거론될 때면 항상 연관되어 따라 언급되는 게 바로 조세희의『난쏘공』이다. 그런데 지금도 '분단국가'인데도 '분단 문학'의 인기는 그리 많지 않다. 5, 60년대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뚜렷했던 사회상을 그려냈기에 오늘날 읽기에는 너무 케케묵은 소설이라는 인식 탓일까?  4.19 혁명이 일어나기 시작되는 시점에서 나온게『광장』인데 4.19 혁명을 기념하는 날에도 잘 언급되지 않는 정도면 문학적 평가에 비하면 상당히 굴욕적이다.『광장』은 수십년 전에 출간된 책치고는 50만 부를 넘을 정도로 스테디셀러라고 말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판매 기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수능 세대를 거쳤던 기성 세대들이나 현재 수능 시험을 앞두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광장』은 역대 수능시험 지문 출제 작품이면서 모의고사에 심심찮게 만나게 되는 소설로만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그저 문학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다. 문학 시간에『광장』을 배웠던 사람들 중에서 텍스트 전체를 한 번이라도 끝까지 읽어본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지 궁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젊은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광장'과 '밀실'의 사회

 

한반도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서로 경쟁하고 투쟁하는 세계적인 공간으로서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불행하게도 지금도 갈등의 기억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된 이데올로기 갈등은 해방 이후에 미국과 소련이 개입하면서 더욱 심화되었는데 이러한 체제 갈등과 경쟁 속에서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자율성을 크게 훼손하기에 이른다. 이데올로기를 통해 기존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흐름이나 반대로 이데올로기를 통해 또 다른 세계를 지향하던 세력이나 개인에게 폭력적으로 다가왔던 것에는 큰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시대적 상황이 팽배하고 있었던 1960년, 때마침 이데올로기의 싸움에 지쳐버린 이명준이 등장하는 『광장』이 탄생하게 되었다.『광장』이 나올 수 있있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도 한몫했다. 소설은 4.19 혁명으로 드러난 의식의 전환과 시대정신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4.19 혁명은 사회적으로 민주주의의 가치를 확산시킴과 아울러 민족 통일의 염원을 각인시켰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기존의 정치세력들은 갑자기 폭발한 민중들의 자유의 에네르기를 제대로 추스르지 못했고 그 혼란을 틈타 군사독재가 등장함으로써 자유로운 사회의 탄생에 대한 민중들의 갈망은 끝내 '미완'으로 남아야만했다.

 

'자유'가 없는 사회에는 오직 '억압'과 '복종'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명준은 남한과 북한 어디에도 진정한 인간의 삶을 충족시켜줄 수 없다는 인식하에 제3국을 선택하지만, 끝내 바다에서 자살하고 만다. 이명준은 '광장' 과 '밀실'로 구분되는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만들어 낸 희생양이다. '광장'은 사회 구성원들이 공동의 이념을 추구하면서 바람직한 사회 건설을 위해 토론하고 실천하는 공적 공간이다. 반면, '밀실'은 개인이 삶의 행복을 추구하고 사랑을 나누며 자신의 역량을 키워나갈 수 있는 사적 공간이다.

 

아버지의 월북 이력이 문제가 되는 바람에 남한 사회는 이명준을 빨갱이로 몰아붙였고, 그는 이를 계기로 남한의 개인주의적이고 폐쇄된 밀실의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월북하기에 이른다. 그의 마음 속에는 '밀실' 속에서 사적 이익만을 탐닉하는 퇴락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 의식과,그와 동시에 '광장', 다시 말해 공동체를 지향하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묘한 동경도 존재했다. 그러나 이명준의 눈에 비친 북한 사회는 활기차고 정의로운 공동체적인 '광장'이 아니라 명령과 복종만이 남아서 개인의 자율성이 크게 훼손되는 사회였다. 심지어 '사랑'마저도 허용되지 않은 통제사회였던 것이다. 이명준의 눈에 비친 남한과 북한은 모두 불구적인 사회다. 그가 원하는 사회의 모습은 바람직한 광장이 건재하되 밀실이 존중되는 것이다. 결국 개인과 사회의 조화, 이념과 행복이 공존을 이루는 사회이다. 그런데 이명준은 남과 북 어디에서도 자신이 바라는 진정한 사회를 발견하지 못했다.

 

『광장』은 우리에게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이명준의 행적과 심리적 자의식을 통해 작가는 남과 북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와 사회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이명준은 나름의 방식으로 남북의 현실에 적응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현실에 순응하지도, 현실을 무작정 거부하지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속한 사회와 현실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에게는 친일파가 해방 후 고위직에 오르고 타락과 부조리, 방종에 가득 찬 '남한 사회'나 경색된 이데올로기, 허위, 부자유가 만연한 '북한 사회' 모두 환멸의 대상일 뿐이다. 모두 진정한 인간 삶을 충족시키기 어려운데, 그것은 애당초 남과 북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모두 사회 성원들의 자생적인 욕구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무, 앉으시오."

명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 동무는 어느 쪽으로 가겠소?"

 "중립국." 

그들은 서로 쳐다본다. 앉으라고 하던 장교가, 윗몸을 테이블 위로 바싹 내밀면서, 말한다.

 "동무, 중립국도, 마찬가지 자본주의 나라요. 굶주림과 범죄가 우글대는 낯선 곳에 가서 어쩌자는 거요?"

 "중립국."

 "다시 한 번 생각하시오. 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결정이란 말요. 자랑스러운 권리를 왜 포기하는 거요?"

 "중립국."

 

 

 (p 196)

 

 

이명준이 포로수용소에서 나누는 인상적인 이 대화에는 민족의 현실에 대한 작가의 고뇌, 나아가 우리 민족의 고뇌가 응축돼 있다. 이명준이 선택한 '중립국'은 현실에 존재하는 어떤 나라가 아니라, 남과 북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대립항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밀실'과 '공간'이 공존하지 않는 한국 사회

 

 

 

 

 

'밀실'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광장'으로 나서려고 하는 자와

'밀실'에서 탈출하여 새로운 '광장'을 만들려다가 고초를 겪었던 자.

 

 

 

독일의 사회학자 하버마스는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 개념으로 '공론장'을 주장했다. 공론장은 개인들이 모여 권력의 간섭이나 제약없이 이성적인 비판과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 국가 권력의 방향을 논의하는 공간이다. 공론장의 엄청난 힘은 현대 민주주의 혁명의 동력이 되었다.

 

"인간은 광장에 나서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인간은 밀실로 물러서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동물이다.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에게는 저마다의 밀실과 광장이 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는 밀실보다 광장에서 존재감을 찾는다. 광장은 열린 공간이자 보다 적극적인 소통의 창구다. 개인과 개인이 모여 여론을 형성하고 다양성을 교감하며 통일성을 지향한다. 우리나라 사회는 "광장을 열어라"라는 저항의 외침과 "무조건 열 수는 없다"라는 거부의 몸짓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중이다. 한쪽은 자신을 진보라 부르고, 다른 한쪽은 보수로 이름 붙인다. 국민을 위한 정치는 실종되었고, 대화와 타협은 사라졌다. 정부의 얼굴이 여러 번 바뀌어도 철 지난 이데올로기 대립과 그에 대한 불신만 반복되고 있다. 이 땅에 진정한 진보와 보수가 있는지 의문만 커질 뿐이다.

 

60년 전의 이명준이 지금 우리나라의 모습을 본다면 심정이 어떠했을까?  '밀실'의 암흑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오직 '광장'으로 나서려고 하는 자 그리고 '밀실'에서 탈출하여 새로운 '광장'을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고초를 겪어야만했던 자가 같은 땅덩어리 내에서 살고 있는 게 지금 우리나라 사회의 현주소다. 이데올로기의 종말을 고한 지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 사회가 구 냉전시대를 지배했던 이데올로기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일한 분단 국가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낡은 이분법적 영향력이 유지되는 사회는 결국 사회구성원 간의 갈등의 골만 깊어질 뿐이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젋은 세대들은 이명준처럼 이데올로기로 인한 극단적인 죽음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진정한 삶의 행복을 스스로 찾지 못한 채 정치적 무관심에 빠져 무기력하게 살아갈지도 모른다.  '밀실'에서 나와 '광장'에서 공론의 장을 형성하고 소통하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에 깊게 패인 극단적 단절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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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9-03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루스님! 저도 학교 독후감 숙제 때문에 <광장> 읽어야 하는데...
전에 조금 읽어봤더니 살인적으로 어렵더군요. 그땐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그랬고, 지금은 읽을 수 있겠죠.. 히

cyrus 2012-09-04 16:30   좋아요 0 | URL
<광장>은 중고등학생이 읽어야 할 필수 소설이에요. 저도 고등학생 때 문학시간에 처음
접했을 때 좀 어려웠어요. 아무래도 작품 중간 곳곳에 비유가 많이 있고요, 게다가 교과서에
수록된 작품은 소설 텍스트 전체의 일부에 지나지 않아서 처음부터 안 읽으면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이런 작품은 한 번만 읽어서 끝나는게 아니라 생각날 때마다
다시 읽어두면 좋아요, 저는 이번에 세 번째로 읽게 되었어요. 참고로 <광장>은 여러 번 개정판으로
나왔는데 각 판마다 내용이 조금씩 달라요. 참고하세요 ^^

아이리시스 2012-09-04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구운몽]이 왜 저기 있는지 한참 생각한 1인.......... 중립국! 중립국! 중립국! 중립국을 외치던 명준의 메아리가 오래 남아서 이후로 오랫동안 <광장>의 여운이 가시질 않았어요.

명준은 결국 중립국으로 갔을까요?
한국사회는 왜 진정한 공론의 장과 이분법적인 잣대 겨누기를 멈추지 않는 걸까요?

cyrus 2012-09-04 16:35   좋아요 0 | URL
<광장>하면 같이 수록된 단짝 <구운몽>이 빠질 수 없죠 ^^;; 저도 소설 중에서 제일 기억나는
장면이에요, 고등학생 때 문학 시간에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느꼈던 그 때 감정이 아직도
기억나요. 인물의 심정을 가장 간결하면서도 뚜렷하게 표현한 문장이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명준은 자살을 선택함으로써 갈등이 없는 또 다른 세상을 추구하고 싶었을거에요.
소설을 읽는 독자들마다 명준의 죽음이 옳다, 잘못했다라고 해석의 차이가 있겠지만요.
아무튼 명준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에요. 이념 대립의 사회적 상황과 명준의 개인적 상황
(남과 북에 사랑했던 여인의 부재)을 맞물려 돌아본다면 명준의 죽음은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생각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