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 18. 한글날이 공휴일이 된 뜻
― 껍데기인 ‘글’과 알맹이인 ‘말’

 


  2013년부터 한글날이 다시 공휴일이 됩니다. 달력을 보면 한글날 빛깔이 빨갛게 물듭니다. 공휴일이 되니 사람들이 한글날을 새롭게 다시 기리려나 궁금한데, 사람들이 기릴 만한 날이라 한다면 공휴일이건 국경일이건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기리리라 느껴요. 기릴 만한 아름다운 날은 중앙정부에서 공휴일이나 휴일이나 국경일로 삼지 않아도 ‘기릴 만한 아름다운 날’입니다.


  한글날은 한글을 기리는 날입니다. 한겨레가 쓰는 ‘말’을 기리는 날이 아닙니다. 한글이라는 글을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을 붙인 임금님을 기리는 날입니다. 그래서, 한글단체에서는 한글날에 세종큰임금 동상 앞으로 가서 꽃을 바칩니다.


  한글날이나 꽃바치기가 뜻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나, 무언가 엉뚱한 데로 잔치와 이야기가 흐르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한글이란 무엇일까요. 한국에서 살아가는 한국사람이 주고받는 말을 담는 그릇이 한글입니다. 우리한테 글이 있는 즐거움과 기쁨을 기리려는 한글날입니다. 그런데, 훈민정음을 처음 만든 때부터 개화기를 지나고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해방 언저리를 지나도록, 이 나라 지식인과 권력자와 공무원은 한글을 업신여겼어요. 모두들 중국글을 빌어 글을 썼지, 한국글로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한국글 아닌 중국글 빌어서 글을 쓰니, 저절로 중국말이 스며듭니다. 중국글로 담는 이야기는 중국말로 이루어집니다. 수많은 한자말이 중국글 빌어쓴 버릇 때문에 스며들었습니다. 이 흐름은 오늘날에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요즈음에는 영어를 마구 쓰는 일을 나무라거나 꾸짖는 사람이 더러 있는데, 한국말을 한국글로 안 담고 영어를 한국글로 담으려 하니 나무라거나 꾸짖습니다. 그러면, 한국말 아닌 중국말을 한국글에 담는 일 또한 나무라거나 꾸짖어야 올바릅니다. 더 나아가, 한국글이 한국글답도록 한국말다운 한국말을 살찌우면서 아낄 때에 아름답지요.


  ‘목백일홍(木百日紅)’이라고 가리키는 나무가 있습니다. 시골에서는 ‘목백일홍’이라고도 ‘백일홍’이라고도 가리키지 않습니다. ‘배롱나무’라 하거나 ‘간지럼나무’라 합니다. 꽃은 따로 ‘배롱꽃’이라 합니다. 글로 놓고 보자면 ‘목백일홍’이나 ‘백일홍’도 한글이에요. 그러나 ‘백일홍’처럼 적는대서 한국말이 되지 않아요. 한국말은 ‘배롱꽃’이고 ‘배롱나무’이며 ‘간지럼나무’입니다.


  ‘목’이라 적어도 한글이지만, 한국말이 아닙니다. ‘나무’라 적고 말할 때에 올바른 한글이면서 아름다운 한국말입니다. ‘대지’라 적으면 한글은 되어도 한국말은 못 되어요. ‘땅’이라 적고 말할 때에 한국말다운 한국말입니다.


  말은 ‘말’이라고 가리켜야 올바른 한국글이면서 한국말입니다. ‘언어’처럼 적으면 껍데기와 무늬는 한글이라 하더라도 올바르지 않은 한국글이고 엉뚱한 중국말이 됩니다.


  박남일 님이 쓴 글로 빚은 그림책 《뜨고 지고》(길벗어린이,2008) 52쪽을 보면, “바람이 잔잔한 날에는 물결이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메밀꽃이 일고.” 같은 글월이 나옵니다. 물결과 너울과 메밀꽃을 이야기하는 대목입니다.


  나는 바다가 가까운 동네에서 태어나 바닷가에서 무척 자주 오래 놀았어요. 어릴 적에 ‘메밀꽃’이라는 낱말을 익히 들었습니다. 그런데, 들판에 피는 메밀꽃 아닌 바다에 일어나난 메밀꽃을 보고 들었어요. 바다와 얽힌 낱말을 살핀다면, ‘물결’이 아름다운 한국말이면서 한국글입니다. ‘파도’는 껍데기만 한글일 뿐 한국말이 아닙니다. ‘바닷가’와 ‘모래밭’이 아름다운 한국말이면서 한국글이에요. ‘해변’과 ‘해안’과 ‘해수욕장’과 ‘모래사장’은 한국말도 아니고 한국글도 아닙니다.


  다시 공휴일이 된 한글날을 기리는 뜻은 훌륭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글이라는 글자에만 눈길을 둘 수 없습니다. 한글이라는 글자에 담는 한국말을 슬기롭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한글이라는 글자에 담을 한국사람 넋과 삶을 사랑스레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알파벳을 빌어서 쓰더라도 겨레말과 나라말 아름답고 튼튼히 지키는 저 아시아 나라와 중남미 나라를 보셔요. 베트남 겨레가 쓰는 베트남말은 베트남말입니다. 브라질과 칠레와 쿠바가 부르는 노래는 브라질 겨레 노래요 칠레 겨레 노래이며 쿠바 겨레 노래예요. 이들은 글이 없고 나라를 빼앗기며 모진 식민지살이를 겪어야 했을 뿐 아니라, 말까지 에스파냐말이나 포르투갈말을 써야 하지만, 이러한 글과 말로도 이녁 겨레와 나라 넋·얼을 알뜰히 보여줍니다.


  한국사람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제대로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겉보기로만 한글인 글이 아닌, 알맹이가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말을 옳게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낱말만 예쁘장한 토박이말이 아니라, 낱말과 낱말을 엮는 글월(문장)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한국말을 깨달아야 합니다.


  껍데기는 한글이라지만, 일본 말투와 번역 말투가 어지럽게 섞인 글을 쓴다면, 이러한 글은 ‘겉보기 한글’이지만 ‘속보기 한국말’이 될 수 없어요. 껍데기 한글날을 기리는 데에서 그칠 노릇이 아니라, 아름다운 알맹이가 될 한국말을 살찌우고 북돋우면서 사랑하고 즐기는 길로 나아갈 노릇입니다. 이를테면, 한글로 ‘오마이뉴스·프레시안’이나 ‘네이버·다음’처럼 적으면 겉보기로는 한글이지만, 속알맹이로는 한국말이 아니에요. 이들 이름은 모두 ‘ohmynews·pressian’에다가 ‘naver·daum’이라는 외국말이에요. 무늬만 한글로 적어서 보여준대서 한글날을 기리는 뜻이 아닙니다. 마음을 올곧게 추슬러서 아름답게 다스려야 한글날을 기리는 참뜻이 됩니다. 생각을 하고, 생각을 키우며, 생각을 넓힐 때에 비로소 한글날을 한글날답게 아끼면서 노래할 수 있습니다.


  세종큰임금이 한글(훈민정음)을 빚어서 퍼뜨린 일은 틀림없이 훌륭합니다. 그러나, 세종큰임금이 왜 한글을 빚어서 퍼뜨릴 수 있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바로, 이 나라 시골마다 흙을 만지며 일구던 수수하고 투박한 여느 사람들이 여느 시골살이를 지키고 가꾸고 살찌우면서 시골말을 아름답게 돌보았기에, 한글(훈민정음)을 빚을 수 있었고, 이 한글에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한국말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토박이말이란 바로 시골말입니다. 토박이말은 시골사람이 시골마을에서 흙을 만지고 숲을 가꾸며 들을 노래하던 삶이 담긴 말입니다. 그래서, 요즈음 도시문명사회가 된 모습에서 한겨레 토박이말을 아무리 되찾거나 되살리려고 해도 사람들이 제대로 못 쓰거나 잘 몰라요. 도시에서는 흙을 안 만지고 숲과 들을 아끼거나 보살피지 못하니까요. 앞으로 도시에서도 텃밭을 일구고, 도시 한복판에도 숲을 마련해서, 도시사람 스스로 밭과 숲을 노래하며 햇볕과 바람과 비와 눈과 꽃과 풀과 나무와 흙을 사랑할 수 있다면, 시나브로 한글과 한국말 모두 넉넉하고 푸르게 되살아나리라 생각합니다. 4대강사업과 한미자유무역협정과 국가보안법과 막개발과 핵발전소 모진 바람이 휘몰아치는 사회에서 한글과 한국말은 살아나지 못합니다. 입시지옥과 재테크와 자동차와 고속도로와 경제성장율에 목을 매다는 나라에서 한글과 한국말은 숨조차 쉬지 못합니다.


  삶길을 열어야 말길이 열립니다. 말길을 열어야 마음길과 생각길을 엽니다. 2013년 한글날을 발판으로 삼아 앞으로는 겉치레와 무늬와 껍데기에서만 그치는 ‘한글날 잔치’가 아닌, 속살과 알맹이와 참모습을 가꾸며 살찌우는 ‘한국말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빕니다. 4346.10.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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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20. 어머니가 가르치는 말
― ‘어머니젖’ 먹고 ‘어머니말’ 쓴다

 


  온누리 모든 아이들은 어머니와 아버지 사랑을 고루 받으며 태어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이를 몸속에 열 달 품으며 돌보지 못해요. 오직 어머니가 아이를 몸속에 열 달 품으며 돌봅니다. 그러나, 어머니 몸속에 안겨 새근새근 잠들며 자라는 아이는 모든 말을 듣습니다. 어머니 몸속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주고받는 말을 듣습니다. 아주 조그마한 크기요 숨결인 채 어머니 몸속에서 귀를 쫑긋 기울입니다. ‘나(몸속 숨결)’를 낳으려는 두 사람은 어떠한 사랑을 나누며 얼마나 즐겁고 사이좋게 지내는가를 살핍니다.


  아이를 밴 어머니가 먹는 밥은 몸속에서 자라는 숨결이 먹는 밥입니다. 아이를 밴 어머니가 마시는 바람은 몸속에서 자라는 숨결이 마시는 바람입니다. 아이를 밴 어머니가 바라보는 모습은 몸속에서 자라는 숨결이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예부터, 아이를 밴 어버이는 아무 데에서나 살지 않게끔 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들으며, 가장 아름다운 밥을 먹도록 이끌었습니다. 공장 굴뚝이 무시무시하거나, 자동차 물결이 어지럽거나, 흙땅 없이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덮인 데에서 몸속 숨결을 돌보도록 하던 옛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이를 병원에서 함부로 낳지도 않았어요. 숲이 싱그러이 마을을 보듬는 시골자락 조그마한 집에서 아이를 낳도록 한 옛사람입니다.


  맹자 어머니가 아니더라도, 아이가 바르고 깨끗하며 아름다운 터전에서 슬기롭게 배우기를 바라는 어머니라면, 아무 곳에서나 보금자리를 마련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바르게 살 만한 마을을 찾고, 더없이 깨끗하게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며 바람을 들이킬 자리를 찾습니다. 어버이가 느끼기에 가장 아름답다 싶은 곳에 오순도순 지낼 만한 보금자리를 일구어요.


  오늘날에는 이 같은 ‘보금자리’를 가꾸려 하기보다는, 아이가 커서 대학입시를 앞두고 ‘서울에 있는 이름난 대학교’에 척척 붙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한 ‘학군’을 찾는 흐름입니다. 이 또한 아이를 생각하는 모습이라면 아이를 생각하는 모습이 되겠으나, 어버이와 아이는 날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먹으며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살짝 궁금해요. 어버이와 아이는 즐거움과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볼까요? 더 낫다 하는 학군을 찾는 어버이는 이녁과 아이 모두한테 안 즐겁고 안 아름다우며 안 사랑스러운 삶으로 뒷걸음질 하는 셈 아닐까요?

 

  성평등이 많이 이루어진 요즈음이라 하지만, 요즈음에도 집일을 나누어 맡는 아버지가 몹시 드뭅니다. 아기가 태어난 뒤, 어머니와 함께 육아휴직을 해서 갓난쟁이를 함께 돌보려는 아버지란 아주 드뭅니다. 집식구 먹여살릴 돈을 더 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아버지는 있되, 갓난쟁이가 ‘어머니 손길과 사랑’뿐 아니라 ‘아버지 손길과 사랑’을 나란히 받으면서 자랄 적에 싱그럽고 튼튼하며 아름다이 자라는 줄 살피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어머니 혼자 낳을 수 없는 아이이듯, 어머니 혼자 돌보거나 키울 수 없는 아이입니다.

 

  지난날에는 가부장제도 굳세게 있는 바람에, 퍽 오래도록 ‘아이키우기’를 어머니가 도맡았습니다. 곰곰이 돌이키면, 옛조선이나 고구려나 백제 적에는 어머니 혼자 아이를 키우지 않았으리라 생각해요. 고려 적까지도 어머니 혼자 아이를 키우지 않았으리라 느껴요. 조선으로 넘어오며 사내는 부엌에 얼씬조차 못하게 하며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가르치는 모든 몫을 어머니가 맡았지 싶어요. 아이가 커서 글을 익힐 무렵이면 아버지가 나서서 무언가 가르치기도 했을 테지만, 갓난쟁이 적부터 열 살 언저리까지 오직 어머니 혼자 아이를 돌보며 ‘말을 가르친’ 우리 사회였으리라 느낍니다.


  그러면, 지난날 어머니는 어떤 삶을 누리며 아이한테 말을 가르치고 삶을 보여주었을까요. 다 함께 생각해 봐요. 지난날에는 가시내가 서당에 다니기 몹시 어려웠고, 양반 집안이라 하더라도 가시내한테 섣불리 글을 안 가르쳤어요. 한문은 더더구나 안 가르쳤지요. 양반 집안이나 임금 집안이나 사대부 집안이 아닌, 흙을 일구는 여느 집안에서는 어머니뿐 아니라 아버지도 한문을 몰랐습니다. 고구려나 고려나 조선 적에는 ‘흙을 일구는 사람(농사꾼)’이 99%는 되었으리라 생각해요. 다시 말하자면, 거의 모든 사람이 ‘한문은 모르는 채’ 살았고, 거의 모든 한겨레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이어온 겨레말(한국말, 우리 말)만 쓰면서 살림을 꾸리고 마을을 일구었습니다. 양반 집안이라 하더라도, 어머니가 아이를 도맡아 돌볼 적에는 한문이 아닌 겨레말로 돌보며 ‘말을 가르쳤’겠지요.


  지식인이나 임금님 가운데 한글(훈민정음)로 책을 써서 널리 남긴 이는 매우 드물지만, 겨레말이 사라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어온 밑뿌리는 바로 여기에 있어요. ‘글로 남은 한글 책’은 거의 찾아볼 수 없더라도, 모든 사람들 머리와 마음과 몸에는 ‘기나긴 나날 한겨레가 이은 말삶’이 배었어요.


  부엌일을 하고 밭일을 하며 논일을 하는 어머니가 아이한테 말을 가르칩니다. 장작을 패고 군불을 때며 길쌈과 물레질과 베틀질과 바느질을 하는 어머니가 아이한테 말을 가르칩니다. 빨래를 하고 다리미질을 하며 방아질과 절구질을 하는 어머니가 아이한테 말을 가르칩니다. 비질을 하고 걸레질을 하며 온갖 집안 손질 다 하는 어머니가 아이한테 말을 가르칩니다.


  하루 내내 새벽부터 밤까지 쉴 겨를 없이 일을 하는 어머니가 아이한테 말을 가르칩니다. 어머니는 늘 일에 치이며 허리 펼 틈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에 시달리는 어머니들 누구나 언제나 노래를 부릅니다. 이른바 ‘일노래(노동요)’입니다. 저녁에 바느질을 하는 동안 아이들을 무릎맡에 누이고는 조곤조곤 ‘이야기(옛이야기, 전래동화)’를 들려줍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 또한 바로 이런 어머니들 노래와 이야기를 듣고 들으면서 자란 어머니가 낳은 숨결입니다.


  현대 물질문명 사회라 하는 2000년대예요. 인터넷과 컴퓨터가 발돋움한 요즈음이에요. 수많은 기계가 있고, 텔레비전과 손전화가 춤추어요. 더 새로운 물질과 문명은 겨레말(한국말)로 나타내거나 가리키지 않아요. 거의 다 영어로 가리키거나 한자말로 옮겨요. 초등학교에서도 영어를 가르치고,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까지 영어노래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갓 태어난 아기는 언제나 어머니한테서 가장 맑고 아름다우며 따사로운 말을 듣습니다. “사랑해. 너를 사랑해.” 어쩌면, 갓난쟁이한테 “아이 러브 유.” 하고 말할 분이 있을는지 모르나, 어머니들 누구나 아이 볼을 어루만지며 “사랑해.“ 하고 말합니다. ‘맘마’와 ‘엄마’라는 말을 들려줍니다. 가장 쉽고 정갈하며 재미난 겨레말을 하나씩 둘씩 알려줍니다. 아이들은 밥, 옷, 집, 아버지, 동무, 동생, 오빠, 누나, 하늘, 물, 숟가락, 그릇, 마루, 흙, 풀, 나무, 꽃, 바람, 낮, 밤, 아침, 저녁, 노래, 얼굴, 손, 발, ……과 같이 가장 밑바탕이 되는 겨레말을 차근차근 어머니한테서 물려받습니다. 이 말들이 바탕이 되어 아이들은 말문을 트고 마음문을 열며 생각문을 펼칩니다. 어느 나라 어느 겨레에서나 똑같아요. 온누리에서 가장 아름답게 말을 살찌우며 북돋우는 책은 바로 ‘어머니’입니다. 4346.10.3.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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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10. 작은 집, 작은 아이
― 생각을 키워 빛내는 말

 


  여섯 살 큰아이 긴치마를 한 벌 사려고 읍내로 마실을 갑니다. 어여쁜 옷과 신을 알뜰히 갖춘 옷집으로 갑니다. 큰아이는 알록달록 빛나는 옷보다 하얀 바탕에 꽃무늬 깃든 긴치마를 좋아합니다. 한 벌 골라서 장만합니다. 옷집 일꾼은 비닐가방에 옷을 담아서 줍니다. 비닐가방에는 ‘little house’라는 이름이 적힙니다.


  어른 옷을 파는 곳이든 아이 옷을 파는 곳이든, 한국말로 이름을 지어서 붙인 데가 매우 드뭅니다. 으레 영어로 이름을 짓고, 아예 알파벳으로 이름을 적습니다. 더 돌아보면, 양말 만드는 회사도, 신발 만드는 회사도 거의 영어 이름이요 알파벳 이름입니다. 한국말로 이름을 지어 한글로 이름을 적는 데가 퍽 드물어요.


  새 긴치마를 얻어 빙글빙글 웃는 큰아이가 손에 쥔 ‘little house’라는 이름을 곰곰이 생각합니다. 한국말로는 “작은 집”입니다. 옷 만드는 회사에서는 “작은 집”처럼 수수하고 쉽게 이름을 붙일 수 있었어요. “작은 마을”이라든지 “작은 아이”라든지 “작은 마음”이라든지 “작은 사랑”이라든지 “작은 누리”라든지 “작은 햇살”이라든지 “작은 나무”와 같은 이름도 좋아요. 이렇게 한국말로 수수하게 이름을 지어서 붙인 자그마한 회사가 틀림없이 몇 군데 있으리라 생각해요. 이를테면, “작은 빵집”이나 “작은 밥집”이나 “작은 신집”이나 “작은 (구멍)가게”라는 이름 쓰는 데가 한 군데쯤은 있지 않을까요.


  천종호 님이 쓴 《아니야, 우리가 미안하다》(우리학교,2013)라는 책 281쪽을 보면 “철수가 이곳에서 쉼과 회복을 얻고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시간들이 되기를”과 같은 글월이 나와요. 글쓴이는 “쉼과 회복(回復)”을 말하는데, 요즈음 떠도는 말로 하자면 ‘힐링(healing)’이겠지요. ‘힐링’이란 “마음 치유(治癒)”를 뜻해요. ‘치유’는 다시 “치료(治療)”를 뜻하고, ‘치료’는 “아픈 데를 낫게 함”을 뜻해요. 처음부터 영어만 쓴다면 그냥 ‘힐링’일 텐데, 이 영어를 쓰기 앞서 ‘치료’나 ‘치유’라는 한자말이 여러모로 쓰였어요. 그리고 이 한자말을 쓰기 앞서는 “아픈 마음을 낫게 하는 일”이란 ‘쉼/쉬기’였으니 ‘쉰다’고 했고, ‘마음씻기’나 ‘마음씻이’ 같은 말을 썼어요.


  예부터 한겨레는 ‘씻김굿’을 했고 ‘호미씻이’나 ‘책씻이’를 했습니다. 이 같은 삶을 헤아리면 ‘마음씻이’뿐 아니라 ‘넋씻이’라든지 ‘아픔씻이’ 같은 새 낱말 얻을 수 있어요. ‘상처씻이’나 ‘생채기씻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슬픔씻이’나 ‘눈물씻이’를 떠올릴 만하고, ‘몸씻이’도 떠올려 봅니다. 우리가 누리는 삶을 돌아보며 이러한 삶을 잘 드러낼 낱말을 떠올립니다. 아플 때에는 어떻게 아픈가를 헤아리면서, 이 아픔을 어떻게 가시도록 하는가를 살핍니다. 곰곰이 헤아리고 찬찬히 살피면서 가장 알맞으며 따사로운 낱말을 떠올립니다.


  김영희 님이 쓴 《엄마를 졸업하다》(샘터,2012)라는 책을 봅니다. 236쪽에서 “책이 없을 때는 읽었던 것을 읽고 또 읽으며 되새김질 독서를 했다.” 같은 글월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재독(再讀)’이나 ‘삼독(三讀)’처럼 말하는 분도 있으나, 손쉽게 “또 읽다”라 말하면 돼요. “다시 읽다”나 “거듭 읽다”라 말해도 되고, “되새김질 읽기”라 말해도 되지요. 빨래를 하거나 도자기를 구울 적에 ‘애벌’과 ‘두벌’이라고 말해요. 책읽기에서도 이 낱말을 받아들여 ‘애벌읽기’와 ‘두벌읽기’와 ‘세벌읽기’처럼 쓸 수 있습니다. 한글 자판에 두벌식과 세벌식 있잖아요. 생각을 더 이으면 ‘애벌찾기·두벌찾기’, ‘애벌듣기·두벌듣기’, ‘애벌사랑·두벌사랑’, ‘애벌밥·두벌밥’, ‘애벌놀이·두벌놀이’처럼 차츰차츰 쓰임새를 넓힐 만합니다.


  어느 말이든 스스로 쓰면서 익숙해요. 즐겁게 쓰는 말이 즐겁게 녹아들어요. 사랑스럽게 듣고 쓰는 말은 사랑스럽게 젖어듭니다. 기쁘게 나누는 말은 기쁘게 다가오지요.


  생각을 키울 때에 빛나는 말입니다. 생각을 키우면서 빛내는 말입니다. 어린나무 한 그루를 심어 꾸준히 돌보면 우람하게 자라 좋은 그늘을 드리우고 예쁜 꽃을 피우며 맛난 열매 베풀어요. 작은 씨앗 한 톨을 심어 천천히 아끼면 곧 싹이 트고 줄기가 오르며 고운 빛 베풀어요. 나무를 심듯 생각을 키워 말을 빛냅니다. 씨앗을 심듯 생각을 북돋아 말을 가꾸어요.


  아이들 옷 만드는 회사를 비롯해서, 아이들 책 만드는 회사에서는 “작은 집”이나 “작은 사랑” 같은 이름 아리땁게 쓸 만합니다. “큰 집”이나 “큰 사랑” 같은 이름을 써도 아름답습니다. “작은 아이 큰 마음”이라든지 “작은 사랑 큰 웃음” 같은 이름을 써 볼 수 있어요. 이름을 띄어서 적을 수 있고, 이름을 붙여서 “큰마음 작은아이”라든지 “큰사랑 작은꿈”처럼 적을 수 있어요. 즐겁게 부를 이름을 즐겁게 지을 때에 빛나고, 기쁘게 나눌 이름을 기쁘게 붙일 때에 환합니다. 조그마한 이름 하나에도 우주가 깃든다고 할 테니, 이름 몇 글자는 무척 값있고 뜻있어요.


  그러고 보면, 예부터 한겨레는 냇물이 작으면 ‘작은내’라 했고, 냇물이 크면 ‘큰내’라 했어요. 골짜기나 멧골이 깊거나 크면 ‘큰골’이라 했고, 작다 싶으면 ‘작은골’이라 했습니다. 또 ‘고을’을 줄여 ‘골’이라고도 하고, ‘마을’을 줄여 ‘말’이라고도 했기에, ‘큰골’과 ‘큰말’ 같은 땅이름도 있습니다. ‘한터’나 ‘한밭’이나 ‘한벌’ 같은 땅이름에서 ‘한’도 ‘크다’를 뜻해요.


  우리 집 작은 아이들을 바라봅니다. 작은 아이들은 작은 손을 놀려 작은 연필을 쥐고는 작은 공책에 작은 글씨로 작은 이야기를 차근차근 적습니다. 작은 아이는 작은 눈망울로 작은 사랑을 밝힙니다. 어른과 어린이가 나란히 서면 어린이 키는 작아요. 크기가 작으니 작다고 합니다만, 둘은 똑같은 숨결이요 삶입니다. 어른 둘이 나란히 설 적에 키가 작은 사람 있을 텐데, 둘 모두 똑같이 아름다운 목숨이며 사랑이에요. 땅덩이 큰 나라이든 작은 나라이든 모두 아름다운 삶터예요. 굳이 ‘작은숲’이나 ‘작은누리’처럼 이름을 붙인다면, 스스로 다소곳하게 서며 이웃을 살며시 높이는 한결 깊은 넋과 사랑을 보여주는 셈이 되리라 느껴요. 4346.7.2.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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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14. 마음을 사로잡는 빛깔
― 어른이 아이한테 물려주는 말

 


  지난해에 못 본 꽃을 올해에 구경합니다. 그러께에 못 본 꽃을 올해에 새롭게 구경합니다. 이제껏 못 본 꽃을 올해에 비로소 구경합니다. 그러나, 그동안 죽 보기는 보았지만, 이름을 몰라서 못 알아챈 꽃이 있습니다. 여태 으레 스치기는 했으나, 눈여겨보지 않아서 못 보았다고 생각하는 꽃이 있습니다.


  올해 오월 우리 집 꽃밭에서 피어나는 노란붓꽃 바라봅니다. 마을 곳곳에는 오월 첫머리부터 붓꽃이 피었으나, 우리 집 꽃밭에서는 오월 저물 무렵 드디어 붓꽃이 핍니다. 우리 집 동백나무도 마을 동백나무보다 보름쯤 늦게 꽃송이 환해요. 볕이 살짝 적게 드니까 꽃도 살짝 늦구나 싶은데, 마을 다른 나무와 풀이 꽃을 일찍 피우면 그만큼 꽃이 일찍 집니다. 우리 집 나무와 풀이 꽃을 늦게 피우면, 그만큼 더 오래 한결 느긋하게 꽃을 누려요.


  아이들과 이웃마을로 자전거 타고 나들이를 가다가, 어느 빈집 앞에서 우뚝 섭니다. 아이들 모두 자전거에서 내리라 하고는 빈집으로 씩씩하게 걸어갑니다. 왜냐하면, 이 빈집에는 창포가 무리지어 자라거든요. 집은 빈 지 열 해 가까이 되었다는데, 예전 살던 사람이 심어서 가꾼 창포는 열 해 가까이 스스로 씩씩하게 피고 지면서 씨앗을 맺어요. 우리 식구는 지난해와 그러께 이 빈집에서 창포씨 얻어서 곳곳에 뿌리기만 했지, 아직 창포꽃은 못 보았습니다. 드디어 오늘, 처음으로 창포꽃 노란 송이송이 잔치마당 마주합니다.


  한참 노란창초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우리 집 노란붓꽃하고 서로 많이 닮았구나 싶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마주하며 우리 집 꽃하고 견주니, 붓꽃과 창포가 어떻게 다른 줄 알겠습니다. 사진으로만 살필 때에는 알 수 없는 느낌을 두 눈으로 바라보고 두 손으로 살살 어루만지면서 헤아립니다.


  우리 집 여섯 살짜리 큰아이는 충청도 음성에서 살아가는 할머니하고 언젠가 꽃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할머니는 어떤 꽃 좋아해요?” “나? 나는 노란 꽃. 벼리는?” “벼리는 빨간 꽃.” 이날 뒤로 여섯 살짜리 큰아이는 길을 가며 노란 꽃을 볼 때마다 말합니다. “아버지, 저기 봐요. 할머니가 좋아하는 노란 꽃이다. 그치?” “아버지, 저기요. 벼리가 좋아하는 빨간 꽃 있네.”


  네 식구 함께 시골마을에서 살아가며 날마다 새롭게 생각합니다. 시골에서 살아가기 앞서까지 시골들과 시골숲에서 어떤 꽃과 풀이 피고 지며 시들다가 새롭게 피어나는가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책 많이 읽고 도감 많이 살피며 이야기 많이 들었대서 알 수 없어요. 몸으로 살아내지 않으면 안다고 할 수 없어요.


  봄부터 여름과 가을 지나 겨울을 나며 가만히 꽃을 생각합니다. 시골들과 시골숲에서 스스로 나고 지는 꽃을 물끄러미 바라보면, ‘노란 꽃’이 매우 많아요. 거의 다 노란 꽃이라 할 만해요. 숲에서 나고 지는 나무꽃 말끄러미 쳐다보면, 나무꽃은 ‘푸른 꽃’이 아주 많아요. 이를테면, 느티나무 느티꽃은 오롯이 풀빛입니다. 초피나무 초피꽃도 옹글게 풀빛이에요. 사철나무도 뽕나무도 꽃송이는 풀빛입니다. 투박하고 못생겼다 하는 모과나무 모과열매인데, 모과꽃은 옅게 볼그스름합니다. 분홍이라 말하기에는 분홍하고는 좀 다른 모과꽃빛인데, 옅은 볼그스름한 빛이라는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리지 싶어요. 살구꽃과 배꽃과 능금꽃과 복숭아꽃도 그래요. 이 꽃들 바라보며 빛깔말 섣불리 못 씁니다. 앵두꽃과 딸기꽃과 탱자꽃과 찔레꽃을 바라볼 적에도 그렇지요. 앵두꽃 빛깔은 ‘앵두꽃빛’ 아니고는 나타내지 못하겠어요. 찔레꽃 빛깔을 그냥 ‘흰빛’이라 하기에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아요. ‘찔레꽃빛’이 가장 걸맞아요.


  배우 김남주 님이 쓴 《김남주의 집》(그책,2010)이라는 책을 읽다가 215쪽에서 “요즘에는 옐로, 레드, 오렌지 등 다양한 원색의 페이턴트 소재는 물론이고” 같은 글월을 만납니다. 책을 살짝 덮습니다. 눈을 조용히 감습니다. 김남주 님은 이녁 아이들 낳아서 돌보는 자리에서도 “옐로, 레드, 오렌지” 같은 빛깔말 살그마니 이야기하겠지요. 김남주 님네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옐로, 레드, 오렌지” 같은 낱말을 익숙하게 들을 뿐 아니라, 입으로도 말하겠지요.


  우리 집 아이들이 시골 아이라서 ‘노란 꽃’을 말하지 않습니다. 아이들 할머니가 시골에서 나고 자란 분이라서 ‘빨간 꽃’을 말하지 않아요. 노란 꽃송이 아름다우니까 ‘노란 꽃’이라 말합니다. 빨간 꽃송이 어여쁘니까 ‘빨간 꽃’이라 말해요. 나는 찔레꽃이 하얗게 빛나기에 ‘하얀 꽃’이라 말하지만, 하얗다는 낱말만으로는 모자라다 여겨 ‘찔레꽃빛’을 생각합니다. 딸기꽃도 하얀 꽃송이로 빛나는데, 딸기꽃이랑 찔레꽃을 나란히 바라보면 두 흰꽃은 사뭇 다른 흰빛이기에 딸기꽃한테는 ‘딸기꽃빛’이라는 이름을 붙여 봅니다.


  아이들한테 물려주고픈 말을 헤아리면서 ‘노랑, 빨강, 살구빛’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에 앞서 어른인 나 스스로 노란 빛깔 보면서 ‘노랗다’ 하고 말합니다. 살구빛이로구나 싶어 ‘살구빛’이라 말합니다. 파란 빛깔 볼 적에는 ‘파랗다’ 하고 말하며, ‘쪽빛’이라고도 말하며, 때로는 ‘현호색빛’이라고도 말합니다. 어느 날에는 ‘짙은하늘빛’이라고도 말합니다. 하늘빛은 낮과 밤이 달라 ‘낮하늘빛’과 ‘밤하늘빛’이 다르지요. 검정도 그냥 ‘검정’이라 말할 때하고 ‘밤하늘빛’이라 말할 때에는 다릅니다. ‘까마중 열매빛’이라 말할 때에도 또 달라요. 어느 때에는 ‘그림자빛’이라 말할 수 있어요.


  삶이 생각을 빚습니다. 생각은 다시 삶을 빚습니다. 삶이 생각을 빛냅니다. 생각은 새삼스레 삶을 빛냅니다. 삶이 흐르면서 말이 하나둘 태어납니다. 생각을 북돋우면서 말을 하나둘 낳습니다.


  ‘예쁜이’라는 낱말은 예쁜 사람 가리키고 마주하면서 저절로 태어납니다. ‘고운이’라는 낱말은 고운 사람 만나고 사귀면서 시나브로 태어납니다. 누군가는 ‘멋진이’ 되고 누군가는 ‘사랑이’ 됩니다. 누군가는 ‘착한이’ 되며 누군가는 ‘꿈이’ 됩니다. 누군가는 ‘바른이’ 될 테고 누군가는 ‘믿음이’ 되겠지요. 4346.5.25.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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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13. 꽃말과 사랑말
― 삶과 마음을 가꾸는 말

 


  제비꽃 모습을 잘 보여주는 책 《특징으로 보는 한반도 제비꽃》(지성사,2013) 을 읽다가 33쪽에서 “운동회 날에는 달리기, 오자미 놀이, 기마전 같은 단체 경기에서” 같은 대목을 봅니다. 책을 가만히 덮고 생각에 잠깁니다. 책을 쓴 분은 ‘오자미’라고 적는데, 나는 어릴 적에 ‘오재미’라고 말했어요. 1982∼1987년에 아직 국민학교라는 이름 쓰던 학교를 다니는 동안, 교사와 둘레 어른은 으레 ‘오재미’라 했어요. 그무렵에는 ‘오재미·오제미·오자미’ 같은 낱말이 사투리처럼 조금씩 달리 쓰는 말인 듯 잘못 듣고 잘못 배웠습니다.


  학교에서 ‘오재미’를 마련해서 하나씩 가져오라 할 때마다 ‘천으로 주머니를 만들고, 속에 콩이나 쌀을 넣으라’ 했어요. 천주머니에 콩을 넣으면 ‘콩주머니’인 셈입니다. 모래를 넣으면 ‘모래주머니’ 되고, 쌀을 넣으면 ‘쌀주머니’ 돼요. 지난날에는 먹고살기 어렵던 가난한 집들 많아, 천주머니에 콩이나 쌀을 못 넣기 일쑤였어요. 동무들은 학교 운동장 한쪽을 파서 모래를 담고는 교실에서 바느질을 해서 모래주머니를 내놓곤 했어요.


  콩이나 쌀 아닌 모래 넣은 주머니를 내면, 교사들은 아주 싫어했어요. 모래 담은 천주머니는 몇 번 던지면 가는 모래가 술술 빠져나오며 못 쓰게 되었거든요.


  그나저나, ‘오재미’이든 ‘오제미’이든 ‘오자미’이든 모두 일본말이에요. 일본에서는 콩을 넣은 주머니를 던지며 노는 ‘お手玉(오테다마)’가 있다고 해요. 이 ‘오테다마’가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말꼴이 살짝 바뀌었어요. 국어사전을 살피면 ‘오자미’라 쓰지 말고 ‘놀이주머니’로 고쳐쓰라 나와요. 그런데, 정작 국어사전 올림말로 ‘놀이주머니’도 없고 ‘콩주머니’도 없어요. 올바로 고쳐쓸 한국말을 외려 안 싣고, 일본말만 실은 국어사전이에요.


  사람들 말씀씀이를 살펴봅니다. 아직도 ‘리어카’나 ‘바께쓰’나 ‘오라이’ 같은 일본말 아무렇지 않게 쓰는 사람 퍽 많아요. ‘손수레’나 ‘양동이’나 ‘좋아’ 같은 한국말을 써야 알맞고 바르며 고운 줄 못 깨닫는 분 꽤 많아요. 때로는 한국말이 맛이 안 난다 여기며 일본말을 쓰기도 해요. 한국말 ‘병따개’로는 병을 따는 맛이 안 나고, ‘오프너’ 같은 영어를 써야 비로소 병을 따는 맛이 난다 말하는 사람이 있어요. 공사장에서 일할 적에는 ‘막일’ 아닌 ‘노가다’라는 일본말을 써야 제대로 일하는 줄 여기곤 해요.


  《특징으로 보는 한반도 제비꽃》을 더 읽습니다. 115쪽에 “제비꽃 종류도 대부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이른 봄에 꽃이 피는 이른바 조춘早春 식물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이른 봄에 꽃이 피는”이라 말하다가 “조춘早春 식물”이라 말합니다. 쉽고 알맞게 “이른 봄에 꽃이 피는”이라 적었으면 이대로 글을 마무리지어 “이른 봄에 꽃이 핀다”라든지 “이른 봄에 꽃이 피는 특징이 있다”처럼 하면 되지요. 애써 ‘조춘’이라는 어려운 한자말 끌어들이고서, 다시 한자로 ‘早春’처럼 붙여야 하지 않아요. 오히려 이렇게 붙이니 말이 어렵고, 뜻이 뒤죽박죽 섞여요.


  학문을 하며 쓰는 낱말로 ‘조춘 식물’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런데, 이 글월을 헤아리면, 학문을 할 적에도 ‘이른봄 식물’이나 ‘이른봄꽃’처럼 쉽게 새 낱말 빚을 만해요. 더 생각해 보면, 한자말로만 ‘조춘’이라 한 낱말 쓸 노릇 아니라, 한국말로도 ‘이른봄·이른여름·이른가을·이른겨울’처럼 쓸 수 있어요. 국어사전에는 ‘첫봄·첫여름·첫가을·첫겨울’ 같은 낱말 실려요. ‘조춘·조하·조추·조동’처럼 알쏭달쏭한 한자말은 안 써도 즐겁습니다. 아니, ‘조하’나 ‘조동’이라는 낱말이 무엇인지 알 사람은 아주 적어요.


  제비꽃은 이른 봄에 핍니다. 곧, ‘이른봄꽃’입니다. 찔레꽃은 늦은 봄에 핍니다. 곧, ‘늦봄꽃’입니다. 모과꽃이나 탱자꽃이나 붓꽃은 한창 무르익은 봄에 핍니다. 곧, ‘한봄꽃’이에요. 감꽃은 봄이 저물고 여름이 다가올 무렵에 피니, ‘이른여름꽃’ 또는 ‘첫여름꽃’이 됩니다. 바야흐로 가을이나 겨울 다가올 적에 피는 꽃은 ‘가을꽃’과 ‘겨울꽃’ 될 텐데, 철을 더 헤아려 ‘늦가을꽃’이나 ‘첫겨울꽃’ 같은 낱말 새삼스레 빚을 수 있습니다.


  눈은 겨울에 내려 ‘겨울눈’인데 봄까지 내리면 ‘봄눈’입니다. 여기에서 조금 더 가르면 ‘일월눈’이나 ‘이월눈’, 그리고 ‘삼월눈’과 ‘사월눈’처럼 쓸 수 있습니다. 바람을 두고 ‘오월바람’과 ‘유월바람’이라 쓸 수 있어요. 하늘을 놓고 ‘칠월하늘’과 ‘팔월하늘’이라 쓸 수 있고, 비를 가리켜 ‘구월비’와 ‘시월비’라 쓸 수 있어요.


  하루하루 흐르는 삶을 바라보며 말 한 마디 짓습니다. 삶을 즐겁게 바라보면서 말을 즐겁게 짓습니다. 즐거운 삶에서 즐거운 말 샘솟는 동안, 내 마음에도 즐거움 샘솟고, 즐거움으로 가득한 마음으로 이웃과 동무를 사귀면서, 시나브로 사랑씨앗 한 톨 맺습니다. 내 마음에도 사랑씨앗을 한 톨 심고, 이웃 마음에도 사랑씨앗을 한 톨 심습니다. 알맞고 바르며 아름다운 말로 생각을 가다듬고 삶을 빛내는 사이, 어느덧 내 꿈과 사랑도 알맞고 바를 뿐 아니라 아름답게 거듭납니다.


  꽃을 생각하니 꽃다운 말이 됩니다. 사랑을 생각하니 사랑스러운 말이 됩니다. 웃음을 생각하니 웃음 넘치는 말이 됩니다. 기쁨을 생각하니 기쁨 가득한 말이 됩니다. 삶을 가꾸듯 말을 가꿉니다. 삶을 가꾸듯 말을 가꾸면서 마음을 나란히 가꿉니다. 말을 가꾸면서 삶을 가꿉니다. 말을 가꾸는 몸가짐으로 마음을 함께 가꿉니다. 말과 마음을 가꾸면서 저절로 삶을 가꾸고 사랑을 가꿉니다.


  꽃내음 나누려는 마음일 때에는, 내 마음 담아서 나타내는 말마디에 꽃내음 찬찬히 묻어납니다. 사랑빛 함께하려는 생각일 때에는, 내 사랑 드러내려는 말마디에 사랑스러운 빛줄기 곱다시 드리웁니다. 전문가나 학자가 ‘오자미’라는 낱말 파헤쳐 고쳐쓰라 일컫기 앞서, 아이들과 살아가는 여느 어버이와 교사 스스로 고운 넋 담는 고운 말 쓰면서 고운 삶 되기를 빕니다. 학문하는 사람이 전문으로 쓰는 낱말에도 따사롭고 살가우며 넉넉한 숨결 북돋우는 마음 깃들 수 있기를 빕니다. 4346.5.21.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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