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합니다 - 정현종 대표시집
정현종 지음 / 찾을모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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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서른 셋에 낸 첫시집 <사물의 꿈>을 제외한 모든 시집을 나는 갖고 있다. 시집뿐만 아니라 몇 권의 시론집과 산문집 또한. 그 시편들과 글들의 대부분을 읽었을 테니까 나는 시인의 팬이면서 애독자라 불려도 좋을 것이다. 그런 시인이 재작년에 환갑을 맞았고, 몇 권의 책이 기념으로 나왔는데, 이 육필시집 또한 그런 연관으로 나온 것이 아닌가 싶다(때문에 이 시집은 말의 좋은 의미에서 장서용이다).

이미 활자를 통해서 한번쯤 읽은 시들이지만, 육필로 읽는 시들은 새로운 감흥을 준다. 나는 정현종 시의 특징이 독특한 호흡, 혹은 걸음걸이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날아가는 듯한 그의 필체는 유난히 그의 걸음걸이가 그렇지 않을까 하는 연상을 갖게 한다.

그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시인은 시집의 첫머리에서 '외출'하여 페테르부르크의 한 소극장에서 '사랑은 나의 권력'이라고 속삭이는 걸로 시집을 마무리한다. 아니 그 말은 시인의 말이 아니라 시인의 사랑이 시인의 귀에 속삭인 말이다. 시인은 그 사랑의 귀에 이렇게 속삭인다. '내 권력이 약해지지 않도록/ 내 권력이 약해지지 않도록'

그런 속삭임도 이 시집에선 모두 걸음걸이로 바뀌어져 있다. 그의 마지막 걸음걸이는 이렇게 읽힌다. '사랑이여/ 우리의 권력이 약해지지 않도록!' 시여, 우리의 막강한 권력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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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학 - 문학 형식 일반론 입문 동문선 현대신서 74
다비드 퐁텐 지음, 이용주 옮김 / 동문선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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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형식 일반론 입문'이란 부제를 달고서 번역된 이 책은 시학의 갈래와 역사에 대한 '콤팩트'한 안내서가 될 수 있으리란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처음 20쪽을 읽고서 책을 덮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번역에 대해서 전혀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시학>이란 제목과 함께 떠올려지는 저작은 당연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다. 그리고 이 <시학>만큼은 우리말로도 몇 종의 번역서가 나와 있다.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들에 대해서 자세하게 지적하고 있는 주석서도 번역돼 있는 형편이다. 따라서 <시학>의 대강을 읽고 이해하는 데 필요한 여건은 갖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퐁텐의 <시학>을 옮긴이는 그러한 여건을 전혀 활용하고 있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더 나은 이해를 선보이고 있지도 않다. 그래서 그가 우리말 <시학>을 읽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다! 더불어 그가 불어로 읽었더라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 근거는 아주 간단하다. <시학>의 핵심을 잘못 옮기고 있는 것. 알다시피, <시학>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시'와는 다소 무관한 일종의 비극론이고 극작법이다(물론 이때의 '비극'도 우리의 이해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전체적인 구상에는 들어있는 희극론은 전해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나 잠시 등장할 뿐) 사실 <시학>은 미완성적인 저작이다. 그런데 이 '비극론'에서 저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의 정수이자 영혼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바로 '플롯'(뮈토스)이다. 이 플롯을 번역자는 시종 '스토리'로 옮기고 있다(18쪽 등). 스토리가 '줄거리'로 번역될 수 있다면, 플롯은 '줄거리 구성'에 해당한다. 즉 전혀 동의어로 쓰여서는 안되는 개념쌍인 것이다.

거기에다 비극의 여섯 가지 요소 중 아마도 '노래'(멜로디)에 해당할 것은 '시편'으로 옮기고 있고, 천병희 역(문예출판사)에서 '장경'(스펙터클)으로 옮겨지고 있는 것을 여기선 '공연'(opsis)이라 옮기고 있다. 장경은 배우들의 분장이나 무대장치를 포괄하는 말로서 요즘의 무대미술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런 무심한 오역들을 대하고 나면, 이후에 잘 이해되는 않는 번역문들에 대해서는 혹시나 오역이 아닐까 무조건 의심하게 된다.(이론서인 탓도 있지만, 사실 이 책은 잘 읽히지 않는다.)

사실 모든 번역이 태생적으로 오역의 위험을 벗어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오역이 정당화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더구나 조금만 성의가 있다면 제대로 번역할 수 있는 부분에서라면 더더욱 그렇다. 동문선에서 나온 번역서들 가운데는 훌륭한 번역도 여러 있지만, 대체적으로 그 수준이 고르지 않다는 인상을 받는데, 불행히도 이 책은 후자에 속한다. 나쁜 번역의 가장 큰 폐해는 책읽기의 괴로움이 아무런 보상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것이 또 책읽은 후의 괴로움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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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 시공아트 18
수지 개블릭 지음, 천수원 옮김 / 시공아트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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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푸줏간에서 한 여인이 좋은 콩팥 두 점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끔찍한 콩팥 두 점을 달라고 요구하고 싶었습니다.'(17쪽) 마그리트의 말이다. 그의 그림들이 감동을 주지는 않지만 우리를 놀라게 하는 이유가 절반은 숨어있지 않을까? 나머지 절반은 장담컨대, 저자인 수지 개블릭이 책임지고 있다.

그녀는 마치 '당신이 마그리트에게 알고 싶었던 모든 것, 하지만 차마 옆사람에게 물어보지는 못한 것'에 대해서 답해주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이 마그리트와 그의 철학과 그의 회화에 대해서 폭넒고 깊이있게 쓰고 있다. 그래서 뒷표지에 실린 '확실히 마그리트 연구의 모범이 될 것'이라는 타임스의 서평이 허사만은 아니지 싶다.

의미심장하게도 책의 시작은 '철학과 해석'이다. 사실 재현을 거부하는 그의 그림들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지-개념들의 낯선 병치와 그것이 거두는 효과이다. 이런 사실은 그가 일생동안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걸 알게 되면 아주 자연스레 이해된다.

요컨대 '회화작품에서 그는 거의 천부적인 싫증을 보여 주었으며, 권태, 피로, 혐오감 사이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꾸며냈다'(9쪽) 그에게 회화가 가지는 의미? '그에게 있어서 회화란 정신이 지닌 두세 가지 기본적인 문제들을 끊임없이 변화하는 빛으로 표현하는 효과적인 수단이었고, 존재의 평범함에 대항하는 영원한 반란'(9쪽)이었다.

그는 일생을 두고 자신의 생각(정신)을 그림으로 그렸던 것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그는 화가의 특이한 유형이면서 동시에 철학자의 특이한 유형에 속한다. 넓은 의미에서 초현실주의 계열에 속하면서도 브르통 등과 결별했던 것도 그런 기질상의 차이가 빌미를 제공하지 않았을까 싶다.

저자는 마그리트와 초현실주의 회화의 선구자로 데 키리코와 시인 로트레아몽을 들어 자세히 설명하고 있고, 마그리트의 영향을 받은 팝아트와 마그리트의 관계에 대해서도 요령있게 설명한다.

하지만 그녀가 무엇보다도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는 것은 회화에서의 '재현의 위기'를 주제화하고 있는 마그리트 회화의 특징과 그 전략이다. 그녀는 파이프를 그려놓고 밑에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써놓아 어깃장을 놓는 그의 심보(?)를 아주 유려하게 해설해 보이는 것이다.



마그리트의 전략을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이렇다(138-140쪽) (1)회화에서 단어는 이미지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단어=이미지) (2)회화에서 오브제는 단어나 이미지와 동일하지 않다(오브제≠단어, 이미지) 그리하여 이제 더이상 재현적 회화란 가능하지 않으며 유효하지도 않다.

재현으로부터 해방된 회화는 무한한 가능성과 함께 회화적 불가능성에 직면한다. 무엇을 그린다는 것이 더이상 가능하지도 의미있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가는 무언가를 그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모순으로부터 현대 회화의 희소한 가능성과 과제가 동시에 산출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책은 비단 마그리트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뿐만 아니라 현대 회화를 조망하는 데 있어서도 아주 유익한 지침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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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레딩거의개 2006-10-18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ㅎ 근데 님 전공이 무엇이셧나요?

로쟈 2006-10-18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를 한번만 둘러보시면 전공은 알아맞히실 수 있을 겁니다.^^
 
어떻게 인간적 상황을 벗어날 것인가 - 인간과 종교, 제사, 축제, 전쟁에 대한 소묘
조르주 바타유 지음, 조한경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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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설서에 의하면 바타유 입문서로서 가장 좋은 책은 <에로티즘>이다. 그리고 이 <종교론>(<어떻게 인간적 상황을 벗어날 것인가>의 원제)은 가장 읽기 어려운 책 중의 하나이다. 국내 번역되어 있는 바타유의 책 가운데 가장 얇은 분량이지만, 가장 읽기 힘든 것이다!

그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는 것이 '난해한' 번역이다. 물론 바타유의 원문 자체가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겠지만, 우리말 문장도 잘 안 돼 있는 몇몇 대목에서는 역자의 무신경함을 탓하게 된다.

가령 '존재들이 불분명하게 묻인 세상만이 쓸데없는 세상, 목적없는 세상, 하릴없는 세상, 의미없는 세상이다. 오직 자체로 가치가 있을 뿐이며, 그 외의 것은 아무것도 의미가 없으며, 다른 어떤 것도, 제 3의 것도, 그리고 그 뒤의 어떤 것도 의미가 없는 세상은 오직 그 세상이다.'(38쪽)라는 대목 등은 몇 번을 읽어야 대충 감을 잡을 수가 있다. 바타유가 말하는 바는, (좀 역설적이지만)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세상이란 쓸데없는 세상, 목적없는 세상, 하릴없는 세상, 의미없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목적에 의해서 그 가치가 규정되는 도구적 유용성의 세계와 대척되는 세계를 말한다.

바타유가 말하는 인간적 상황이란, 도구적 유용성에 포획된 상황이다. 그것을 그는 사물의 세계라 말하고, 현실적 질서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세계/질서는 그 자체로는 수단적이며 무의미하다. 인간은 그것을 벗어나서 내재적 신성(=연속성의 세계)에 합류하고자 하며, 그 합류의 방식들을 바타유는 종교적인 것으로 지칭한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제사(희생)와 축제이다. 제사와 축제는 '미래를 염려하는 생산의 반대명제이며, 오직 순간에만 관심을 갖는 소모이다.'(63쪽) 마르셀 모스에게 빚지고 있는 이 '소모'는 소비와 대조되는 개념이다. 그것은 생산에 복무하지 않는 무자비한 탕진을 뜻한다.

바타유가 보기에 (고대인들과 비교하여) 근대인들의 불행은 그 소모가 더이상 미덕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것이 책의 2부인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전쟁(군사적 질서)라든가 산업의 증대(자본의 축적)이라는 것은 '관리되는 소모' 즉 가짜 소모라는 지적이다. 그리하여 '결국 현실의 원칙이 내밀성의 원칙을 눌러 이긴 것'(119쪽)이 근대 사회이다. 이러한 그의 진단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바타유는 이 책을 '인생을 가장 멀리까지 밀고 가볼 필요성이 있는 체험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바치고 있다(그런 의미에서 그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생각나게 한다). 그럴 필요성을 아직도 자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남아 있는지? 아니면 우리는 점차 이 사물적 세계, 현실적 질서에 순응하며 쥐죽은 듯이 살고 있는지 책장을 덮으며 궁금해진다. 오 겡끼 데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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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창비시선 203
허수경 지음 / 창비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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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의 두번째 시집을 읽은 지 햇수로 10년이 돼 간다. 그 사이에 그녀는 꽤나 '오래된' 시를 쓰고 있었던 걸 알았다. 시집 얘기가 아니다. 독일 유학을 떠나 선사고고학을 공부하고 현재는 동방문헌학 박사과정에 있으면서 여기저기 발굴답사도 다니고 하는 것이 그녀의 지난 10년 세월이었던 듯한데, 그게 시적이라는 거다.

그런 '시적 행적'에 비하면 시집에 실린 시들은 마치 말더듬이의 시들처럼 빈약하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흩날리는 풍경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대 이하다. 시인의 말대로, '시를 쓰고 싶어하는 간절한 마음'은 읽히지만, 마음과 시는 안타깝게도 종류가 다른 걸 어쩌겠나.

가장 좋은 시는 역시나 <바닷가>이다. 리뷰들을 통해 눈에 익혀 두었던 시였지만, 더 좋은 걸 찾을 수 없었다. 사랑하는 손과 눈, 혀, 그리고 아마도 마음까지 '아는 사람' 집에 다 두고 왔음을 노래하는 이 시는 어지간한 마음까지 눈물 글썽이게 만든다.

글썽이고 싶네 검게 반짝이고 싶었네
그러나 아는 사람 집에 다, 다,
두고 왔네

해서 서두의 불만은 다소 누그러진다. 그대의 시는 더 오래 되었나니, 마음까지 다 두고 간 시인에게 '반짝이는' 시들을 요구하는 건 잔인한 일이지 싶어서이다. 게다가 '나의 고아들은 따스한 물이불을 덮고 잠이 들 것이다'(57쪽)는 걸 보면, 안쓰럽기도 하고. 그래서 발문을 쓴 신경숙의 말대로, 우리는 시인이 여전히 '시로 가는 길'에 서성이고 있다는 걸 확인하는 선에서 이번 시집의 의의를 찾아야 할 듯하다. 이 시집을 '현실의 시간을 넘어서는 오래된 시간 혹은 그 모국어의 공간을 향해 띄우는 간절한 편지'(이광호)로 읽고자 하는 한 평론가의 말에도 고개를 끄덕여주면서. 간절한 편지의 문체를 탓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시집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따로 있는데, 그건 신경숙이 쓴 발문이다. 신씨와 허씨의 대면기와 봉별기가 거기엔 간곡하게 들어가 있다. 둘이 한바탕 싸우고 시래깃국을 먹으며 화해한 얘기를 읽다가 괜히 눈물이 핑돌기도 했다(아, 시래깃국이여!). 바라건대, '토끼 고기' 같은 거 말고, 손맛 좋다는 시인의 시래깃국 같은 시들을, 다음에는 꼭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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