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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원리들
토마스 아퀴나스 지음, 김율 옮김 / 철학과현실사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라틴어 대역으로 되어 있고 본문보다 긴 역자해제가 있다. 그러므로 역자 부분과 저자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봄이 좋을 듯 하다.

역자 부분. 번역도 좋고 해제도 좋다. 특히 해제는, 마치 대학 강의실에 앉아 강의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본문의 압축된 서술을 풀어주고, 확장해 주고, 구체적인 예를 들어주고, 저자가 범한 오류나 오해의 여지가 있는 부분들을 바로 잡아주고, 철학적인 또는 신학적 맥락을 환기시켜 주고 등등. 나는 이보다 좋은 해제를 읽어 본 적이 없다.

저자 부분. 실제 저자는 물론 토마스 아퀴나스이지만 내용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해설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굳이 둘의 사상을 변별하여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기 때문에 그냥 아리스토텔레스를 목적어로 이야기를 하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한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인정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나도 그 정도의 아량은 갖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보여준 신선함은 내가 기대했던 것의 최소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나마 마지막 제6장 정도만이 신선했던 것 같다.

본문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자연의 원리들은 곧 생성의 원리들을 말한다. 이는 생성의 가능성을 부정한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반박으로 구상된 것일 테다. 그러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기획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을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의 원리들은 단 하나의 관념, 즉 목적이라는 관념에 기반하고 있다. 이것을 전제하고서야 질료인이나 형상인 등도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바로 이 관념, 즉 자연에는 목적이 있다는 관념은 받아들이기 심히 곤란한 것이다. 우리의 철학자(나의 블로그에서 "우리의"라는 정관사는 스피노자의 것이다)가 에티카에서 거의 이성을 잃다시피 하면서 비판하는 것도 이러한 관념이다. -스피노자는 목적에 대한 관념을 철저히 거부했기 때문에 그의 우주에는 의지가 자리할 곳도 없게 된다.

암튼 상황이 이러하므로 아리스토텔레스와 파르메니데스의 대화를 다음과 같이 그려 볼 수 있겠다.

파르메니데스: 젊은이, 내 비밀 하나 일러 주네만 우주에 목적 따위는 없다네.
아리스토텔레스: 장로님, 무슨 터무니없는 말씀이십니까? 목적이 없다면 생성도 운동도 있을 수 없습니다.
파르메니데스: 내 말이 바로 그것이라네.

전대의 거의 모든 철학자들에게 자연 철학은 하나의 무덤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 철학에서 실족하였다고 그의 철학 전체가 모래 아래로 빠져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와 그의 학파에 대한 탐구는 계속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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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코올과 예술가
알렉상드르 라크루아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02년 11월
평점 :
품절


알코올과 예술가라... 이런 제목의 책에서 새로운 뭔가가 나올 수 있을까? 충분히 의심할 만 하다. 그러나 프롤로그의 첫 몇 페이지를 읽어보면 바로 작가의 통찰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첫 몇 페이지를 읽고나서 책날개에 박혀 있는 작가의 사진을 다시 들여다 보았다. 잘 생기기까지 하였다.

작가는 이 얇고 읽기 쉬운 책에다 굉장한 숙고를 요하는 주제를 담아놓았다. 내가 생각하기에 작가가 근원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현대 사회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는 여러 예술가들의 에피소드는 오히려 부차적인 것이다. 그래서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과 그가 실제로 한 말 사이에 혼란이 빚어지기도 하는 것 같다. 나는 작가가 이런 주제를 이야기하는데 "술과 예술가"라는 테마를 빌려온 것은 상업적 의도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가의 주제에 맞춰(그것이 술이었다면) 예술가들의 에피소드는 작은 테마로만 이용되었어야 했다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이 얇은 책에 대해 굉장히 긴 발췌를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막상 이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니 너무 많은 수렴되지 않은 주제가 떠오른다. 나는 이것을 작가의 악덕 탓이라고 핑계를 대겠다. 작가 자신이 이것 저것을 찔러보기만 한 채 그것들을 하나로 통일시켜 놓지 못하였다. 작가가 그럴 수 있었다면 철학자가 되었을 것이리라.

그래도 굳이 하나의 줄기를 말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아주 거칠게 말하자. 19세기 중엽부터 술과 인간과의 관계가 달라졌다. 1858년에 알코올 중독이라는 표제가 백과사전에 처음 오르게 되었는데 주로 공장 노동자들과 관련된 현상으로 기술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 해 보들레르가 "인공낙원"의 초판을 내었다.

자, 이제 19세기 중엽 이전과 이후의 술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해 말해보자. 두 가지를 말할 수 있다. 하나는 내면과 외면에 대한 것, 즉 고립과 통합에 대한 것이다. 19세기 중엽 이전에 술은 신과 자연과 공동체와의 일체감을 경험하기 위한 매개였다. 예술가는 그렇게 영감을 얻었고 민중들은 그렇게 고향과의 일치감을 맛보았다. 19세기 중엽 이후가 되자 예술가들과 노동자들은 고립을 인정하고자 술을 마신다. 예술가들은 술과 퇴폐로 부르주아적 도덕에 도전하고 고독을 자초하며 그 속에서 피어난 광기로 작품을 쓴다. 노동자들은 술로써 이미 확립된 고립(즉, 소외된 자아)을 지우려 한다. 즉, 술 마시는 행위로써 그 고립을, 그 패배를 인정한다.

다른 하나는 술은 신이되 어떤 신이냐 하는 것이다. 19세기 중엽 이전의 술은 유기물의 신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발로 빚은 포도주를 마시고 그것에 취한다. 사람들은 술을 마시면 피가 따뜻해지고 몸이 가벼워지고 정신이 고양된다고 말한다. 19세기 중엽 이후의 술은 무기물의 신이다. 사람들은 술의 근원이 연기를 내뿜는 공장인 것을 본다. 그것을 마시면 신체가 마비된다. 돌로 변한다. 무기물이 된다. 사람들은 무기물이 되기 위해 술을 마신다.  -서구 사회에서 이것은 신의 죽음 이후라는 테제로 다루어질 만한 얘기가 될 것이다. 신이 더 이상 영적인 것이 아닌 한 그것은 광물적인 것이 될 터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는 결국 같은 말이다. 그리고 그 배후엔 도시가 있고 산업 사회가 있고 자본주의가 있고 합리주의가 있고 관료주의가 있고 고립된 자아들이 있고 서구 사회의 역동적 역사가 있다. 술을 통해서든, 예술가들의 펜끝을 통해서든 그것들은 그렇게 드러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예를 들어 19세기의 시인들은 부루주아 계급의 위선적 도덕에 도전하기 위해 스스로 위악에 빠져들었다. 유용함의 인간상에 도전하기 위해 스스로 철저하게 무용한 인간이 되었다. 그러면서 부르주아 계급 사람들이 대경실색할 작품들을 만들어 내었다. 그러면 지금도 그런 반항이 가능한가? 당연히 아니다. 고흐도 게바라도 다 상품이다. 시대는 반항을 어떻게 다루는지 그 완벽한 해법을 찾아내었다. 상품으로 다루면 된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우주를 설명할 수 있는 완벽한 체계가 있다. 그러므로 보들레르는 환자로 다루면 된다.

근원적 반항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그 반항의 대상이 부재하거나 편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신성모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현실력 있는 신이 존재해야 한다. 어쨌거나 그런 것들은 지난 세기에 다 사라졌다고들 한다. 어쨌든 좋다. 문제는 지금이고 여기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 시대의 고전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즉, 우리의 문제를 받아안고 그것을 다룰 방법을 찾아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 하자. 여기서부터는 긴 침묵이 이어질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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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최대의 연애사건 - 엘로이즈와 아벨라르의 금단의 사랑
호르스트-에버하르트 리히터 지음, 모명숙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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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로이즈와 아벨라르의 사랑 이야기를 처음 접한 것은 어느 영화를 통해서였다.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본 영화라 제목도 생각나지 않지만 남자의 상해 소식을 전해들은 여자가 "Oh, No!"하며 절규하는 모습은 아직도 인상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나중에 엘로이즈와 아벨라르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그때 그 영화가 그 둘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벨라르.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사람으로 사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통찰에서 삶의 가장 큰 즐거움을 얻는다. 전자로 인해 그는 세상에 오만한 자로 알려졌고 후자로 인해 여러 번 이단으로 몰렸다. 

엘로이즈. 그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18세의 아름다운 여자라는 점 때문이 아니라 그의 대단한 학구열과 학식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수녀원에 서원을 할때 아벨라르와 주고 받은 시가 이교도 로마인의 것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상징적이다. 그는 이교도들의 서적에서 인간의 자유로운 본성을 인정하는 용기와 그것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의 가치를 배웠을 것이다.

아벨라르는 엘로이즈를 보고 반했을 것이다. 그는 외모와 학식과 언변과, 명성으로 인한 권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실패없이 엘로이즈를 유혹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는 착각하는 부류의 사람이 아닌지라 그것은 분명한 사실로 드러난다. 그러한 과정의 한 정점에서 엘로이즈는 임신을 한다.

가문의 불명예에 직면하여 엘로이즈의 친척들은 둘의 결혼을 강요하는데 이때 엘로이즈는 결혼을 극구 반대한다. 엘로이즈가 결혼에 반대한 이유는, 역설적이지만 그들의 사랑을 지켜내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남자들은 잘 깨닫지 못하는 여자들의 본능의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엘로이즈는 아벨라르가 결혼하여 가정에 묶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며 그래서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또, 둘의 결합으로 인한 결과로 둘의 사회적 지위가 하락한다면 둘의 결합은 파멸을 의미할 뿐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실제로 결혼은 아벨라르의 경력에 대단한 장애가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아이까지 있는 상태에서 결혼도 하지 않고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엘로이즈는 차라리 아벨라르의 정부, 창녀가 되겠다고 했다. 즉, 둘의 사랑과 아벨라르의 장래를 위해 어떠한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일반인들의 시선이나 사회적 굴욕 따위는 단호히 무시하겠다는 것이다.

친척들의 강요와 아벨라르의 동의로 둘은 비밀 결혼을 하지만 엘로이즈가 친척들과 계속 불화를 빚자 아벨라르는 엘로이즈를 친척집에서 데리고 나와 수녀원에서 서원을 받게 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분노에 이성을 잃은 엘로이즈의 친척들은 아벨라르가 자는 방에 침입하여 그의 자지를 잘라내는 잔인한 방식으로 복수를 한다.

이것으로 당대 최고의 학자로 명성이 자자하던 아벨라르는 깊이 모를 바닥으로 추락한다. 그는 수사가 되는 것으로 그 운명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엘로이즈와 연락을 단절하는데 그것은 10년간 지속된다. 10년 후 엘로이즈가 곤경에 처했을 때 도움을 주기 위해 둘은 재회하지만 철저히 공적인 관계로 일관했던 듯 싶다.

그로부터 또 몇 년후 엘로이즈는 아벨라르가 쓴, 서간 형식의 자서전을 입수한다. 물론 그 안에는 엘로이즈와 관계된 고백도 들어 있었다. 엘로이즈는 바로 아벨라르에게 편지를 내어 아벨라르의 무정함을 탓하는 원망의 말들을 쏟아낸다. 당시 수녀원장이었던 엘로이즈는 아벨라르를 거침없이 "유일한 님"이라고 부르지만 아벨라르는 그 호칭 앞에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을 덧붙일 것을 권고한다. -신 안에서. 아마 이것이 관계를 가능케 하는 유일한 방식, 즉 그 관계에 영원성을 부여하는 유일한 방식일 것이다...

십수년 묵은 감정을 털어낸 후 엘로이즈는 아벨라르의 권고를 따른다. 그리고 자신에게 아벨라르를 영원케 한다. 즉, 아벨라르에게 수녀원의 규칙을 제정해 줄 것과 예배할 때 사용할 성가를 작사, 작곡해 줄 것을 부탁한다. 아벨라르는 그렇게 한다.

엘로이즈는 추상 따위에 집착하는 종족이 아니다. 그는 사회의 치욕스러운 시선도 무시할 수 있었고, 하느님의 존재도 무시할 수 있었다. 사회도, 국가도, 신도, 도덕도 다 추상이다. 그는 구체적인 존재만 믿었다. 그래서 그는 아벨라르의 사적인 음성을 들어야 했고 그의 손의 피부를 만져야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음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되자 다소 추상적인 방식에 만족하기로 한다. 즉, 아벨라르가 정해 준 규칙 안에서 살며, 그가 만들어 준 성가 안에서 하루를 살고 일년을 사는 방식으로. 아벨라르가 죽어도 그는 엘로이즈의 삶 안에 구체적으로, 아주 세세하게 함께 할 터이다.

한편 아벨라르의 삶은 결코 안정을 몰랐다. 그는 끊임없이 불화를 일으켰고 질시의 대상이 되었다. 급기야 베르나르가 그를 이단으로 고발하여 공의회에서 유죄 판결을 받는다. 아벨라르는 로마의 교황을 찾아가 직접 해명하려 하였으나 가는 도중 지쳐 클뤼니 수도원에 머물다 그곳에서 죽는다.

그 클뤼니의 수도원장 페트루스가 전설을 완성한다. 그는 두 번이나 이단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아벨라르를 자신의 수도원에 머물게 한다. 그는 젊은 시절 미모와 학식이 대단했던 엘로이즈를 흠모했었다고 엘로이즈 수녀원장에게 고백한다. 그리고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뜻을 존중하여 아벨라르의 시신을 일반인들의 눈을 피해 몰래 엘로이즈의 수녀원으로 운구해 준다.

엘로이즈가 죽었을 때 그는 당연히 아벨라르의 옆에 묻힌다. 여러 번 이장이 있었지만 둘은 늘 함께 였으며 오늘날에도 둘은 나란히 누워 있다고 한다. -이러한 물질적 흔적들은 영원과 아무 상관도 없다. 그것들은 전적으로 우연의 것이기 때문이다. 엘로이즈와 아벨라르는 둘의 사랑을 영원하게 할 여러 결단들을 내렸다. 영원은 그 결단들 안에 있다.

여기서 다른 두 사람의 이야기를 첨가하자. 하나는 클뤼니의 수도원장 페트루스이다. 그가 아벨라르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둘의 사상의 친근성을 보여준다. 페트루스는 아랍의 신학서와 성서들을 번역하게 했다. 그는 무력이 아닌 이성으로, 지혜로, 사랑으로 이교도들을 무찌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는 십자군 전쟁에 반대했다. 아벨라르와 완전한 동조를 보이는 부분이다.

(물론, 사람들의 의견이란 이성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성에 의해 설득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둘의 사상은 이상주의적이다. 그러나 역사는 이상주의를 현실화하는 것으로 진행되어야 할 터이다.)

다른 한 사람은 내가 아래 중세사상사 포스팅에서 언급한 베르나르이다. 그는 이성보다는 내면적 성찰을 더 중요시했다. 자신의 약함, 자신의 죄를 먼저 성찰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꼬치꼬치 캐고 따지는 아벨라르를 빌미를 잡아 이단으로 고발했다. 그와 공개 토론을 벌이게 되자 두려워 그것을 피하기 위해 공작했다. 십자군 전쟁을 적극 옹호했다.

너 자신을 먼저 알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지배 세력의 철저한 종인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성을 억압하는 자와 사람들을 전쟁에 끌어들이는 자는 거의 언제나 동일하다.

이성은 억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극복되는 것이다. 폭력을 이길 수 있는 것은 그보다 큰 폭력이 아니다. 베르나르가 아벨라르의 이성주의를 비판하고 싶었다면 그렇게 하면 되었다. 그러나 베르나르는 그럴 실력도 없었고 용기도 없었다. 그래서 폭력의 힘을 빌어 그것을 억누르려 하였다. 이런 식의 행동은 그가 완전히 틀렸음을 눈꼽만큼의 오차도 없이 보여준다. 그가 아무리 감미로운 문장들로 채워진 책의 저자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제 아래에 아벨라르가 엘로이즈를 위해 적어준 기도문을 인용하는 것으로 맺을까 한다. 엘로이즈는 이 글을 읽고 영원에서의 맺어짐을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법당의 향내든, 성당의 높은 천정이든, 공명되어 울리는 성가든, 한 조각의 기도문이든 우리를 성스러움의 경험으로 이끄는 계기들이 있다.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경험들. 아래의 기도문도 그런 경험으로 나를 이끈다.

"오, 하느님, 당신은 인류 창조를 시작할 때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혼인성사를 제정하셨으며, 몸소 처녀의 몸을 통해 인간이 되시고 첫 번째 기적을 혼인잔치에서 베푸시어 혼인을 영예롭게 하셨습니다. 당신은 무절제하고 나약한 저에게도 일찍이 혼인을 치유 방법으로 허여하셨습니다. 당신의 여종이 드리는 청을 물리치지 마소서. 저와 제가 사랑하는 이가 지은 죄를 대신하여, 거룩하신 당신 앞에 겸허한 마음으로 청합니다. 오, 대자대비하신 분, 자비 그 자체이신 하느님, 용서하소서.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크고 많다 할지라도 용서하소서. 그리하여 수없이 많은 우리의 잘못에 비해 당신의 자비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것을 보여주소서...
오 주여, 당신은 스스로 원하시는 시기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우리를 합치기도 하셨고 떼어놓기도 하셨습니다. 주여, 이제는 자비로 당신이 시작하신 바를 큰 자비로 완성해 주소서! 당신이 이 세상에서 잠시 동안 서로 떼어놓은 자들을 천상에서 당신과 함께 영원히 하나가 되게 하소서. 당신은 우리의 소망, 우리의 분신, 우리의 그리움, 우리의 위안이기 때문입니다. 오 주여,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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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사상사
클라우스 리젠후버 지음, 이용주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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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중세를 암흑 시대로 생각하는 사람이 중세의 사상사를 쓰지는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중세를 암흑 시대로 생각하는 사람이 중세의 사상을 다룬 책을 찾아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나는 스피노자에 대한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이 책을 펼쳐 들었다. 스피노자가 자신의 사상을 기술하기 위해 중세의 어휘와 개념과 방법들을 차용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 그 이상일 것이다. 그 이상일 수 밖에 없으므로.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러한 짐작에 무게를 더하게 되었다.

이 책은 독일 출신의 수도사가 쓴 것이다. 굳이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책에서 풍겨나오는 정서적 분위기를 강조하고 싶어서이다. 중세 사상사를 기술하는 방법으로 주지주의적인 것과 주의주의적인 것이 있다면 이 책은 다분히 후자를 택하고 있다. 그래서 중세 사상을 특징짓는다고들 하는, 그 보편논쟁 같은 것은 이 책에서 크게 다루어 지지 않는다. 철학적, 신학적으로 중세라는 쌍봉 낙타의 혹 하나씩을 차지한다고 할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의 비중은, 이 책에서만큼은 상당히 적다.

특정 인물을 도드라지게 하는 대신 이 책은 사상과 문화와 역사의 전체적인 흐름을 조망해 준다. 사상적으로는 주지주의와 주의주의 사이의 긴장을 인정하면서 가능한 균형 있게 둘을 소개해 준다. 사실 주의주의적인 사상이 사상사 속에서 주목을 끄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나도 그런 사상에는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재미나 감동의 대부분은 저자가 애정을 갖고 소개해 준 주의주의적인 인물들에게 받은 것이었다.

예를 들면 초기 기독교 시대에 사막에서 신과 대면하며 청빈하게 살아가는 흰수염의 성인들을 보며, 저자는 평심한 척 기술했지만,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종교적 성인과 철학적 성인(예컨대 스피노자)을 비교하는 것은 철학적 성인에게 참 안된 일인 것이다. -그러나 사막의 성인의 시대는 아주 먼 옛날의 일이다. 기독교가 작았고 순수했고 교리적으로 단순했던 시절. 모든 것이 그렇듯 그랬던 시절은 아련한 아름다움으로, 하얀 신비로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눈을 뜨면 바로 현실이다.

또 하나 예를 들자면 아벨라르두스의 사상적 적이라 할 수 있는 베르나르두스에 대한 길고 세심한 소개이다. 엘로이즈와의 로맨스로 나는 아벨라르두스의 사상을 알기도 전부터 그의 팬이 되었었다. 그런데 저자가 소개한 베르나르두스의 사상은, 내가 보기엔 100 퍼센트 아벨라르두스에 대한 반박으로 구성된 것이었다. 이에 더하여 사악한 저자는 둘 중 한 사람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두 말할 나위없이 베르나르두스일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만들었다.

이리하여 유일신 사상이나 인격신 사상 등, 우상에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해 왔던 관념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보자. 비트겐쉬타인의 말대로 우리의 시대는 비스마르크마저도 대체할 수 있는 시대다. 사람들에게 이런 소외의 감정, 잉여의 감정은 대단히 깊은 타격을 준다. 철학적으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이걸 병이라 하자. 그러면 현대 사회는 이 병을 치유할 방법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 전망이라도 가지고 있는가? 내가 아는 한 그런 건 없다. 우리 앞에 그런 병을 치료해 준다고 간판을 내건 병원은 없다.

이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면서 베르나르두스의 다음과 같은 귀절을 읽어 보자.

"그때에 인간은, 첫째 자기 자신을 위해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둘째 신이 자기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위해 신을 사랑하고..." 

나의 존재를 감싸안는 절대 안정의 느낌을, 절대적이며 유일하며 정서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인격신 이외의 무엇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러나 이러한 물음은 다소간 형식적이며 다소간 과장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인간이란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에 집착하는 도시에 사는 종족이다. 인격신에 대한 개념을 받아들이라는 것은 무리한 조언이다. 우리가 우리의 존재를 지지해 줄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인격신일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스피노자에게로 난 여러 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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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ly 2013-08-28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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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의 상상력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지영래 옮김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08년 7월
평점 :
일시품절


나도 그랬지만 이 책을 서가에서 뽑아든 사람들의 생각은 대충 비슷할 것 같다. 즉, 이 책이 사르뜨르의 대작인 "존재와 무"에 대한 입문이 되어 줄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상상력"은 실증적 인간학에 대한 비판으로 일관하는 책이고 "존재와 무"는, 내 기억에 "현상학적 존재론에 대한 시론"이라는 부제목을 달고 있기 때문이다. 사르뜨르는 이미지에 관한 이론을 실증적 인간학 또는 실증적 심리학의 가장 약한 고리로 보고 "상상력"에서 이를 집중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생각된다. 현상학적 인간학, 또는 현상학적 심리학, 또는 현상학적 존재론을 대안으로 부각시킬 좋은 기회로 여겼던 것 같다.

역자가 강조하는 것처럼 이 책은 어렵다. 쉬운 철학책이란 형용모순이기도 하지만 이 책엔 독서에 부담을 주는 실질적인 요인들이 적잖이 놓여 있다. 라이프니츠, 베르그송, 알랭, 훗설 등 생소한 철학자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주로 프랑스에서 활약한 낯선 심리학자들이 대거 등장하는데 사르뜨르는 독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이 매우 응축된 필치로 이들을 난도질한다.

이 책을 읽다보면 사르뜨르가 프랑스 출신 작가라는 점을 의식하게 하는 특징, 즉 때묻은 순수함이라 할만한 그런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사르뜨르의 문체는 매우 명쾌하고 투명해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 순수함, 명쾌함, 투명함은 과장된 것이고 과장된 만큼 엉큼함이 느껴진다. 뒤에 뭔가를 숨겨 놓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느낌은 다루는 주제의 난해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서술상의 특성에 관한 것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예를 들면 사르뜨르는 논설하는 항목의 주제를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 지금 논설하는 것이 긍정하는 것인지 부정하는 것인지, 그것이 남의 주장을 요약하는 것인지 비판하는 것인지 불투명하다. 쇼펜하우어가 최대한의 성의를 기울여 오해를 방지하려 했다면 사르뜨르는 오해되는 상황을 즐기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물론 바보 골라내기 게임일 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언제고 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상상력"의 서론은 가장 평이하고 명쾌해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가장 불투명하고 혼란스러운 부분이 바로 여기다. 사르뜨르는 사람들이 종잇장에 대해 떠올리는 이미지를 종잇장 그 자체와 동일시한다고 비판한다. 이런 주장은 혼란스럽다. 우리가 종잇장에 대한 이미지와 동등하게 여기는 것은 그 종잇장에 대한 어떤 표상일지언정 종잇장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사르뜨르는 회색 벽지를 바라보는 나에게 아까 보았던 그 종잇장이 다시 나타난다고만 서술하고는 입을 딱 다문다. 일부러 입을 꽉 다문 모양이 눈에 선하게 보일 정도여서 나는 웃음을 참아야만 한다. "상상력" 전편을 읽으면 사르뜨르가 왜 이런 식으로 서술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더불어 그 서술의도 속에 고의로 독자를 혼란에 빠뜨리려는 약은 계산이 숨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내게는 이런 혼란스러움이 상당한 정신적 고통이었다는 것을 말해두겠다.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이미지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어떤 대상에 대한 고정된 관념, 그 대상하면 떠오르는 어떤 것, 그 대상에 대한 기억, 그 대상에 대한 캐리컬처, 과거에 그 대상에 대해 지각한 것을 되가져 온 것, 그러나 좀 약해진 지각, 내게 어떤 관념을 떠오르게 하는 것 그러니까 어떤 기호, 공상적인 존재에 대해서라면 이런 저런 표상들을 섞어 조합한 것 등등... 아마 대체로 이러한 것들일 것이다. 이것을 일단 이미지에 대한 자연주의적 태도라고 말해 두자. 사르뜨르가 "상상력"의 전편을 통해 비판하는 것이 바로 이미지에 대한 이런 자연주의적인 태도이다.

사르뜨르가 자연주의적인 태도를 비판하는 이유는 간단히 말할 수 있다. 예컨대, 자연주의적인 태도에 기반해서는 이미지와, 현존하는 대상에서 비롯된 실재 감각을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앞 단락의 이미지에 대한 관념들을 다시 살펴 보라. 이미지가 현존하는 실재 감각들, 또는 지각된 것들, 또는 표상들과 본질적으로 구별되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르뜨르는 우리가 현재 부재하는 어떤 것을 떠올리는 순간(즉, 상상하는 순간), 그것이 실재 감각과 다른 어떤 것이라는 점을 바로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르뜨르의 말이 옳다. 우리가 켄타우르스를 상상하면서 그것을 현존하는 어떤 대상의 실재 감각과 혼동하는 경우는 없다. 그러므로 자연주의적 태도는 지각이나 상상에 대한 우리의 순수 경험을 제대로 드러내 주지 못한다.

그러면서 사르뜨르는 자연주의적 태도가 기반하고 있는 실증적 인간학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비판을 시작한다. 요점은 간단하다. 실증적 인간학은 모든 것을 사물로 환원시켜 버려서 자기의식을 고유한 특성으로 하는 인간 의식의 자리를 박탈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데카르트로부터 시작하는 철학사와 흄 이후의 심리학사, 그리고 사르뜨르와 인접한 세대의 베르그송까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그러나 나는 다 필요없다고 말하겠다. 그냥 "상상력"의 서론만 다시 살펴 보면 된다고 말하겠다. 사르뜨르가 독자가 일찍 알아채지 못하도록 일부러 불투명하게 해놓은 부분을 투명하게 복원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겠다.

서론에서 사르뜨르는 흰 종잇장을 바라보는 경험을 서술한다. 그 경험 속에서 흰 종잇장은 흰색이며 네모난 형태며...  등등일 것이다. 그런데 그 순수 경험 속에 그것이 어떤 사물에 대한 모사본인지, 아니면 사물 그 자체인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 의문들을 배제하는 것, 그것이 훗설의 괄호치기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르뜨르는 마치 표상과 사물 그 자체가 동일한 것인냥 서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건전한 정신을 갖고 있던 나는 맥락 없이 들이닥친 현상학적 순수 경험의 실험에 당황하여 정신적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제 나는 흰 종잇장에서 고개를 돌려 회색 벽지를 바라본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까 보았던 흰 종잇장이 내게 다시 나타난다. 사르뜨르는 이렇게만 서술하고 말지만 그것은 내게 나타난 것이 아니다. 내가 떠올린 것이다. 내가 상상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의 상상하는 행위 속에서, 그 지향적 행위 속에서 종잇장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상상하는 한 내가 상상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을 지각과 구별할 수 있다. -이것이 전부다!

이미지에 대해서 우리는 두가지 접근을 할 수 있다. 하나는 그것을 상상된 결과물이라는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이럴 경우 이미지는, 그것이 부재하는 대상에 대한 것임에도 일반적인 지각 표상과 구별하기 힘들다. 다른 하나는 이미지를 상상하는 행위 자체로 보는 것. 이럴 경우 이미지는 상상하는 행위 속에서 일반적인 지각 표상과 분명히 구분된다. 그리고 이미지를 어떤 내용물로 봤을 때의 여러 난점들, 예컨대 상상의 대상은 도대체 어디에 존재하는 것인가... 등등의 문제들을 해소할 수 있다.

따로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전자의 방식이 사르뜨르가 비판해마지 않는 자연주의적, 실증적 접근방식이고 후자의 방식이 사르뜨르가 계속 발전시켜 볼 야심을 갖고 있는 현상학적 방법이다. -사르뜨르적 방법의 성과는 후속 작업들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이고 나는 그것들을 나의 TOREAD 목록에 넣어두고 있다.

그러면 사르뜨르가 현상학적 인간학으로 실증적 인간학을 대체하려고 그토록 애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물론 의식의 자리를 되찾아 주려는 것이다. 그러면 왜 그토록 사르뜨르에게 의식이 문제가 되는가? 의식의 본질은 곧 자유이기 때문이다. 사르뜨르의 전기 철학의 핵심 테마가 여기 이렇게 등장한다.

이상이 "상상력"에 대한 나의 과격한 요약이 되겠다. 그러나 당연한 얘기겠지만 본질적인 훼손 없이는 어떠한 요약도 가능하지 않다. 여기서 잠깐 본질적인 것에 대해 말해 두기로 하자. "상상력"이란 책에서 본질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더 쉽게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해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예로 들어보자. 이 책의 본질적인 부분은 어디인가? 세계는 의지와 표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인가? 그러면 제목의 몇 단어로 쇼펜하우어의 주저는 명쾌하게 요약된다. 그러나 이렇게 요약될 수 있는 것은 전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철학서에 있어서는 특히 그렇다.

그러면 어떤 부분이 본질적인 부분인가? 쇼펜하우어의 이념이, 즉 세계는 의지와 표상으로 되어 있다는 이념이 문제들과 부딪히고, 그 해결을 모색하고, 그 와중에 새로운 문제를 야기하고, 저자가 고의로든 미처 의식하지 못해서든 결과적으로 문제들을 은폐하고 피해가고 한 자취들, 그리고 운동의 과정에서 풍족해졌거나 홀쭉해진 이념들, 그런 것들의 총체가, 특히 철학서에 있어서는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 마디로 말해서 철학서에 있어서 요약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 전체에 대한 나의 변명은 위의 요약이라고 해놓은 것은 나의 해석이라는 것이 되겠다.

내가 이렇게 강조하는 것은 나의 요약, 역자가 해놓은 요약, 역자가 이 책은 어려우니 급한 사람은 서론과 결론만 읽어도 무방하다고 조언한 것 따위는 싹 무시하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이다. 이 책에서 느낄 수 있는 재미를 왜 포기해야 하는가? 그것을 요구할 권리는 책의 저자에게도 없는 데 말이다.

이 책은 재미있다. 별안간 존재론적 사변으로 시작하더니 정색을 한 채 문제의식을 발설하고 이어 전 세대의 심리학사로 뛰어들어가 사변적 개념이 당대의 사회 정치 종교적 환경과 어떻게 엮이는 지를 논설한다. 나는 그 부분을 쓰면서 사르뜨르가 분명히 킥킥대고 있었다고 장담한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사르뜨르의 주적은 실증적 심리학자들과 그들에게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형이상학자들인데, 당시 보수적 지배 계급의 주적도 사르뜨르의 주적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사르뜨르가 데카르트부터 흄까지 싸그리 잡아 비판하는 것과 똑같이 당시 지배 계급의 지식인들은 이들을 무신론이라, 유물론이라 비판하며 잡아 죽일 기회를 엿보고 그들의 책을 금서로 하려 하였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보수파 지식인들은 정당했고 그들의 예언적 통찰은 옳았다. 사르뜨르가 "상상력"이란 작은 책에서 한 일이 바로 그들의 주장이 옳았음을 논증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면 사르뜨르는? 사르뜨르 역시 지배 계급의 지식인과 같은 노선에 서 있는 것인가?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전기 사르뜨르는 좌파들로부터 부르조아 철학자라는 비판을 들어야 했으며, 결국 사르뜨르는 "존재와 무"에서 개진된 철학을 포기해야 했던 것이다. 재미있지 않은가?

또 하나 이 책에서 인상 깊은 것은 사르뜨르가 자신의 철학을 설립하기 위한 선행 작업으로 허다한 실증 과학 문헌들을 읽어 냈다는 것이다(필요한 부분만 읽었겠지?). 실증적 태도를 거부하는 철학자의 실증적 학구 태도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문헌들의 대부분은 사르뜨르가 속해 있는 전통의 것이었으며 그 전통의 언어로 되어 있었다. 사르뜨르 역시 그러한 전통과 상황이 만들어낸 도전에 반응하는 방식으로 철학을 하였다. 다시 말하면 사르뜨르는 자신의 실존 안에서 철학을 하였다는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철학을 하는 데 있어 이외의 방법은 없다. 자신의 고유한 문제 설정 없이는 방법이 가능하지 않고 방법이 없이는 철학이 가능하지 않다. 가능하다면 원숭이가 잘 하는 흉내짓뿐이겠지... -"상상력"에서 사르뜨르가 보여준 열정과 패기에 감염되었는지 순간 이런 증세가 나타났다. 양해를... 여기까지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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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 2011-06-05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재미있는 서평 잘 보았습니다. 저도 한번 봐야겠네요

weekly 2011-06-06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보셨다니 저도 기분이 좋네요. 즐거운 연휴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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