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상관찰학 입문
아카세가와 겐페이.후지모리 데루노부.미나미 신보 지음, 서하나 옮김 / 안그라픽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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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의 눈으로 거리를 관찰한 사람들의 이야기

- 노상관찰학 입문

 


아카세가와 겐페이 외 지음 | 서하나 옮김 [안그라픽스] | (2023)

 




노상관찰학 입문이란 책의 제목을 보았을 때, 일종의 계시를 받은 느낌이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한국의 모더니스트로 알려진 소설가 박태원의 작품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하 구보 씨)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한때 거리 사진에 관심을 두었던 기억 때문이다. 소설 구보 씨에서는 거리에서 관찰하기라는 행위가 고현학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러면서 이 고현학을 모데로노로지오(modernologio)라고 옮기고 있다. 특정한 관점을 가지고 거리에서 사람들의 행동이나 옷차림 등을 관찰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의미로 등장한다. 아니나 다를까, 노상관찰학이라는 이름의 기원이 바로 일본의 20-30년대를 풍미했던 고현학에 있었다.

 


고현학은 지금으로부터 101년 전 일본을 강타했던 간토대지진과 관련이 있다. 한국인으로서 간토대지진은 재일조선인 6600여 명으로 추정되는 희생자를 낳은 사건으로 기억된다. 따라서 고현학이 지진 직후 시작했다는 기록에는 보다 다른 호기심으로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고현학을 시작한 이들도 거리에서 간토대학살에 가담한 것은 아니었을까하는 의구심 때문이다. 하지만 곧바로 그 의구심을 거두어 들였다. 이들은 오히려 폐허가 된 도시와 사람들을 돌보고 이를 재건하는 일에 힘을 모은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14명의 공저자 대부분은 예술분야를 공부한 이들이었다. 대부분 50년대 전후에 출생한 베이비부머 세대였기에, 1923년에 고현학을 시작한 세대와는 대략 한 세대가 차이 한다. 고현학을 보다 일상의 활동으로 가져온 측면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들은 고현학이란 이름 대신, ‘노상관찰이란 표현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노상관찰학 입문에는 대담 형식을 정리한 텍스트와 관찰 기록을 서술한 형식의 글 등 다양한 활동이 담겨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의 글에서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감성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노상관찰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의 유대감과 유머감각이었다. 노상관찰이란 표현대로, 이 활동에 참여하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관찰기록활동을 기본으로 한다. 여기에 때로는 수집활동이 더해지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수집가들과는 거리를 두고자 하는 이유도 재미있다. ‘노상관찰자들이 수집가들과 달리 스스로를 차별화는 지점은 타인의 인정을 구하는 데 관심이 없다는 데 있었다. 수집활동은 기본적으로 소유를 전제로 하는 활동이 많다. 노상관찰들은 이 지점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구분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수집가는 다종의 희귀한 아이템(따라서 대개는 교환가치가 높은 사물들)을 소유할수록 환호를 받고 인정을 받는다. 하지만 노상관찰자들은 이러한 물성을 소유하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이들의 접근 방식은 비물질적이다. 물질을 소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낸 대상들을 알아보고, 분석하고, 역사를 읽어내는 일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시대적 문화적 코드를 사물로부터 읽어내는 작업에 더 가깝다.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대상들 각각이 모두 하나의 문화적 기호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상관찰학방법적으로는 기호론에 가깝다”(33)라고 말하는 것이다. 노상관찰자들에게는 소유가 중요한 활동의 본질은 아닌 것이다.


 

가족 중 누군가가 학창시절부터 평생 맨홀 뚜껑을 관찰하여 기록한다던가, 먹이를 주며 거리의 강아지의 반응을 보거나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강아지똥을 조사한다고 상상해보라. 혹은 해체된 건물의 파편들을 집으로 가져온다던가, 심지어 여고 교복을 관찰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라. 우선 이들이 하는 활동은 집에 아무리 천사 같은 부모 혹은 아내가 있다고 하더라도 환영받기는 매우 어려울 듯하다. 그런데 이들이 각자의 관심사와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지속하는 이런 활동들을 보노라면 나 역시 이들 뒤를 따라가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저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기는 60-70년대이다. 일본의 경제가 급속하게 팽창하는 한편, 전통적인 공동체가 해체되고 공동체가 추구하던 가치로부터 이탈하는 세대가 나오기 시작하던 시대. 새로운 사회를 꿈꾸며 투쟁하던 청년들과 이들의 깊은 좌절이 함께 했던 시대가 아닌가. 저자들은 이제 대부분 70-80대가 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거리에서 호기심과 에너지를 분출하던 청년 시절이 있었음을 생각해본다. 그들은 어쩌면 일본 사회의 경직성과 고독, 그리고 상실감에 대한 반작용으로 거리로 눈길을 돌렸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20년대에 간토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삶을 응시하고 회복을 꿈꾸었던 한 세대 전의 청년들처럼 말이다. 고현학이 이들에게 간토 대지진과 같은 일상의 파괴로부터 자신의 모습을 되찾는 상상력을 동원하는 행위였던 것처럼. 달리 말해, 죽음의 공간으로부터 삶의 공간으로 탈주하고자 한 욕구의 발로는 아니었을까 싶은 것이다.


 

노상관찰활동을 엉뚱하고 쓸모없게 여기는 사람도 많을 테지만, 내게는 무척 흥미롭다. 아니 흥미 이상이다. 한때 거리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담곤 했던 나는 우연히 구성되는 사건들에 무척 흥미를 갖고 지켜보는 편이었다. 자주 가는 장소의 계절 변화를 지켜보는 일, 혹은 주변의 건물들에 생긴 변화들 등을 알아차리면 곧바로 걸음을 멈추고 만다. 어쩌면 나도 언어 문제를 제외한다면, 이 저자들과 만나 무척 엉뚱하고도 흥미로운 대화를 나눌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노상관찰활동이 이루어지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아마 도시에 관한 다큐멘터리 작업의 일환으로 건물이나 거리의 사물을 이미지 기록으로 남기는 활동가들은 많을 것 이다. 이러한 노상관찰자들의 활동이 지속성을 지니게 되고, 이들의 관찰 결과가 일관되게 기록되어 일종의 아카이브로 남겨질 수 있다면, 이 자료들은 특정 시공간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 문명의 코드를 담은 역사 사료로서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사라진 건물의 잔해로부터 이 과정을 목격한 노상관찰자의 개인적인 기억과 기록은 특정 시공간의 맥락을 형성하고 후대에 전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럼 단순한 공간으로서만 남는 것이 아니다. 그 공간은 이 기억과 기록이 더해지며 비로소 역사성을 획득한 장소로서의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지금은 이러한 관찰과 기록의 전통이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는 동안 60-70년대에 청년이었던 저자들은 꾸준히 내게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의 메시지는 우리가 사는 세계를 때로는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가짐으로 삶을 살아가보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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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과거 을유세계문학전집 131
드리스 슈라이비 지음, 정지용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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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출구를 찾아 분투하는 무슬림 흑인 청년의 저항

- 단순한 과거

 


드리스 슈라이비 지음 | 정지용 옮김 [을유문화사] | (2024)

 




모로코 상인의 아들인 드리스 슈라이비의 소설 단순한 과거를 읽었다. 이 소설을 읽은 느낌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내게 미세한 분자들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우연하고 우발적인 촉매제를 첨가하여 이루어지는 격렬한 화학반응을 관람하는 느낌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화자인 드리스는 이슬람군주로 대표되는 굳건한 가부장제도에 균열을 일으키고자 했다. 여기에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유럽의 제국주의 및 인종차별적 역사가 뒤섞여 요동과 교란, 충돌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작가의 이름을 그대로 따온 작중 인물 드리스는 핫지 파트미의 둘째 아들이었다. 드리스가 군주라고 부르는 핫지 파트미는 부유한 상인이다. 그가 식민지 상태인 조국에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 제국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이 시스템을 공고히 하는 데 일조한 결과다. 이 배경에 이미 문제의 씨앗과 모순을 지니고 있었다. 다른 형제들과 달리, 일찍이 군주의 지목을 받은 화자 드리스는 프랑스 학교에서 제국주의의 문화와 지식을 습득하고, 기독교에 접할 수 있었다. 총명했던 드리스는 이슬람 문화의 가부장제가 지닌 억압과 폭력성을 자각하고 이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서구 문명을 동경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내 제국주의의 모순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믿음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경험. 드리스는 이 폭풍과도 같은 내적 갈등을 경험하며 방황한다. 혼돈과 혼란의 과정이 반항으로 분출되어, 반응의 세기는 강렬했다.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다.


 

저녁 식사 전에 가족이 군주 앞에 모여 대기하는 장면이 기억난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음식을 대령할 준비를 하며 배고픔을 참고 있었다. 일곱 명의 아들은 굶주린 배를 부여잡고, ‘사다리꼴대형을 갖추어 대기하고 있었다. 프랑스 문명에 대한 동경심을 갖게 된 드리스는 집에서 벌어지는 풍경에 환멸을 느끼고 규율에 저항하기로 한다.


 

하미드는 샌들 한 작을 들어서 이를 때려잡았다. 그리고 곧바로 사다리꼴 속으로 되돌아가, 자기 자리에 앉아 공손한 자세를 취했다. 그때 나는 파문당하기로 마음을 먹었다.”(30)

 


화자 드리스가 군주로 대표되는 가부장제와 싸움기로 결심한 순간이다. 이것은 철학자 스피노자가 유대 공동체로부터 파문당한 사건을 떠올리게 했다. 오늘의 네덜란드가 있는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던 유대계 철학자 스피노자도 드리스처럼 지역 사회에서 자수성가한 상인의 아이들이었다. 또한 어린 시절부터 교육에 힘을 쏟은 부모의 영향으로 좋은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종교 지도자 랍비가 되기보다 교조화 된 종교적 관습과 해석을 거부하고 스스로 기존의 질서를 판단했다. 그가 유대 공동체로부터 파문 절차인 헤렘을 선고받기로 각오했을 때의 심정이 바로 드리스의 그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파문이란 공동체로 이름 지어진 기존의 안에서 밖으로 추방되는 것을 의미했다. 스피노자의 경우는 정말 무시무시한 저주의 말까지 들으며 추방되었다고 한다.


 

드리스가 기존의 질서에 대항하고 기꺼이 파문당하기로 결심했을 때, 이는 자신이 발을 딛는 대지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했다. 기존의 것을 부정하고, 한편으로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상징적인 의미에서 아버지를 죽여야만 하는 절차가 남아 있었던 셈이다. 자신의 내부에 일종의 폭탄이 있음을 자각하게 된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이 폭탄을 던져 터트려야 한다는 것도 직감했을 테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계속 살아갈 수 없었을 테니까.

 


본문에는 가는 선이란 표현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가는 선은 무엇을 뜻할까. 선이라고 하면 일단 경계를 떠올려볼 수 있지 않은가. ‘이쪽과 저쪽을 나누는 경계말이다. 소설에는 기존의 전통적인 질서(가부장제도)와 새로운 질서(제국주의)가 뒤섞여 있다. ‘이쪽이라 함은 이 질서의 내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반대로 저쪽에는 프랑스의 표어로 대표되는 자유, 평등, 박애의 이상적인 세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드리스는 아버지 군주와의 격렬한 충돌, 작용과 반작용의 과정에서 이 경계 너머에 또 다른 부조리함이 있음을 간파하게 된다.


 

가는 선은 쉬지 않고 나를 흔들었다. 가는 선은 선명해졌다. 모든 선이 눈앞에서 흐려지면서, 선은 매우 선명하게 보였다. 가는 선이 나에게 말했다. 너는 흑인 남자다. 너는 몇 세대 전부터 백인과 교배해서 만들어진 흑인이다. 너는 지금 선을 넘어가려고 하고 있다. (...) 너는 알라를 전혀 믿지 않으며, 전설을 파헤쳐 분석할 수 있고, 프랑스어로 생각하고, 볼테르를 읽고, 칸트를 찬양한다. 그렇지만 너는, 네가 도달하려는 서양 세계도 어리석음과 추악함이 퍼져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네가 탈출하려는 그 추악함과 어리석음과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지.”(134)


 

선 너머의 세계를 들여다보노라면, 마찬가지로 인간 세계의 모순이 발견된다. 이 세계 가운데 인간이 만든 추악함과 어리석음이 없는 곳이 있을까? 드리스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을 것이 틀림없다. 그동안 그는 서양 세계에 대한 동경을 키워왔고, 서양 문명이 무모하고 어리석은 가부장제를 타파할 수 있는 실마리와 힘을 지녔다고 믿어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산한 군주는 결코 나약하지 않았다. 제도의 모순을 이용하여 다시 부정한 부를 축적하며 재기에 성공한 것이다. 군주로 대표되는 기존의 세계는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질서가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드리스는 자신의 세계를 지키려고 분투한 아버지, ‘군주의 인간적인 면모를 새롭게 발견한다. 남자가 대개 서른이 넘으면, 아버지를 다시 떠올리고 재평가하는 시기가 온다고 한다. 나 역시 그랬다. 성인이 되어 아버지의 나이에 이르면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생각하는 시기가 반드시 한 번은 오기 마련이다. 미숙했던 이전과 달리 일방적으로 비난만 하던 시기를 벗어나, 가장의 입장에서 그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나는 드리스가 상징적인 의미에서 군주 죽이기를 결심했음에도, 여전히 마음 속 한 곳에서는 오랫동안 그를 증오하면서도, 그에게 존경과 찬사를 바치는 것을 멈출 수 없었, 모순적이고 복잡한 심경에 상당히 공감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농장의 여자 하인을 사랑했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군주의 모습에서, 맨발로 농장 일을 하던 군주의 모습에서, 드리스는 부조리한 제도 속에서도 자신의 세계를 지키고자 분투했던 군주의 모습을 알아보게 된다. 드리스는 아버지에 대해 무엇보다 인간적인 연민을 느꼈을 것이라 생각한다. 비로소 아버지의 세계를 조금 더 이해하고, 자신의 닮은 모습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나는 이 장면을 계기로 드리스가 군주에 대한 저항하기를 체념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대신 지금까지 드리스가 거부해왔던 가는 선안의 세계, 원 안의 세계에 기꺼이 머무르며 군주와의 일전을 보다 본격적으로 준비하기로 결심한 것으로 이해한다. 세계는 아직 건재하고, 자신의 욕구대로 세계가 움직일 리가 없음을 깨닫게 된 셈이다. 그러니까 드리스가 아버지의 인간적인 면모와 고통까지 감지하고 발견한 것이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겠다. 그는 훗날의 교전 수칙과 무기를 새롭게 정비하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막내 동생 하마드와 어머니의 죽음이 촉매가 되어 격화된, 군주에 대한 저항과 공격이라는 격렬한 화학반응은 프랑스로 떠나는 장면을 끝으로 훗날을 기약하는 셈이다.


 

앞서 드리스가 대립한 군주와 교사, 친구들은 모두 기존의 질서, 원 안에 머무르던 사람들이었다. 반면 드리스는 이 원 밖의 세계를 동경했고, 안과 밖을 구분하는 을 넘고자 했다. 다만 이때는 아직 미숙한 존재였을 뿐이다. 견고한 제도와 관습이라는 막다른 벽을 만났고, 이를 넘고자 한 일탈은 실패로 돌아갔다. 다시 원 안의 세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19세 흑인 무슬림 소년이, 자신을 가둔 원을 자각하고 탈출구를 찾고자 한 시도를 담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어느 더운 여름밤, 집에서 추방당해 밖을 배회하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그는 오히려 추위를 느꼈다. 제도와 관습 안에서 따뜻함에 길들여진 자신의 모습을, 단독자로서 새롭게 체험하는 장면이었다. 추위를 느끼면서 그는 끊임없이 출구를 찾고자 했다. 드리스는 집에서 추방당한 이 밤의 시간을 스스로 생생히 각인해두었다. 마치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처럼 보이는 그래서 너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이니?”(230)라고 되뇌는 장면은 그가 처한 실존의 무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소설의 제목인 단순한 과거는 문법 용어 단순 과거복합 과거의 용법을 떠올리게 한다. 단순 과거는 과거에 이루어진 행위, 다시 말하면 지금은 그렇지 않은, 혹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은, 과거와의 단절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드리스가 말하는 단순한 과거는 어쩌면 순진했던과거와의 결별인 동시에, 새로운 탄생을 예감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소설의 마지막 대목에서 드리스가 프랑스에 가서, 나 자신을 단련시킬 것이다”(360)라고 다짐하는 대목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프랑스는 그가 단순했던 과거에 자신이 믿던 자유, 평등, 박애가 충만한 세계가 아니라, 여전히 어리석음과 추악함, 부조리가 만연해 있는 세계임을 알고 이 사실을 받아들인다. 대신 바로 자신의 자리에서 훗날 다가올 군주 죽이기의 일전에 대비하기로 하는 것이다. 그동안 스스로 단련하고, 무기를 갖추기로 한 것이다. 화자인 드리스가 기존의 질서에 저항하고 출구를 찾는 과정을 거쳐, 이제 그는 이 모순 속에 머무르며 투쟁하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건 화자가 새로운 차원으로 성숙해짐을 의미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나는 연금술사로서 살았다. 아마도, 몇 년, 20, 60년이 나에게 남아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나는 화학자로 살 것이다.”(360)


 

이 마지막 독백 역시 상징적이다. 이 이야기는 한 소년이 성장하며 훗날 기존의 질서에 균열을 내고자 투사의 역할을 자각하며 눈을 뜨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달리 표현하면, 과거의 연금술사에서 벗어나 화학자되고자 선택하는 과정, 일종의 상전이(phase transition)를 경험하며 새로운 국면에 접어드는 한 청년의 서사로 읽힌다. 드리스가 프랑스에서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 벌써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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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1] "하미드는 샌들 한 짝을 들어서 이를 때려잡았다. 그리고 곧바로 사다리꼴 속으로 되돌아가, 자기 자리에 앉아 공손한 자세를 취했다. 그때 나는 파문당하기로 마음을 먹었다."(30)
- P30

[2] "그가 이번에 나한테 뱉은 침도, 그가 그전까지 뱉었던 침, 주먹질, 발길질, 따귀, 짓밟기 등에 더해질 것이다. 그 목록은 이미 길고, 저울은 기울어지고 있었다. 군주님, 나는 죄인으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37)
- P37

[3] "이 남자는 근본적으로 강하다. 그는 강한 남자를 만드는 두 가지 요소인, 시간과 망각을 결합해서 가지고 있다. 내가 언제나 보아 왔던 그의 모습이 그랬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그를 증오하면서도, 그에게 존경과 찬사를 바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57)
- P57

[4] "나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내 방은 어둠에 젖어 있었다. 나는 빛을 보고 싶지 않았다. (...) 나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있었다. 가는 선, 가는 선, 불면증이 있는 아이가 엄마에게 자장가를 불러 달라고 조르는 것처럼, 나는 너를 불렀다."(77)

"나는 가는 선을 통해서 탈출했다. 그 선은 방 안에 섬광처럼 떨어졌다. 군주여, 당신의 꼭두각시를 보시오."(78)

"잠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긴장하면서, 눈꺼풀을 필사적으로 감았다. 처음에는 거미줄같이 가느다란 실이, 너무나 미세해서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선이 나타났다. 그 선은 글자나 숫자, 또는 끊어진 선이었다. (...) 그리고 마지막에는 달리는 기차의 거대한 아우성 같아졌다."(79)
- P78

[5] "이곳저곳, 거의 모든 사거리마다, 거리의 어둠 속에서 오븐이 붉게 빛나고 있다. 이 도시는, 이 시간이 되면, 떨어진 말똥의 매콤함과 젖은 흙내가 뒤섞여 난다. 곧 가난한 사람들의 향기가 퍼질 것이다. 이 향기는 오래된 옷, 초록색으로 칠해진 오래된 벽, 광장을 뒤덮는 오래된 갈대에서 나온다. 구역에 따라, 이 향기는 속을 뒤집어 놓는 따뜻한 빵과 달콤한 과자의 냄새, 군중의 땀 냄새, 바부슈와 향신료 가게의 곰팡내와 섞일 것이다. 그리고 곳곳에 이 향기가 퍼질 것이다."(92)
- P92

[6] "나는 유대 부족에게 기름통을 붓고, 과거 중세 서사시에 나온 것처럼, 그들이 횃불에 산채로 타서 죽는 것을 구경하는 자들이 더 이상 아니었다. 또 메디나의 대추를 핥고, 화석을 숭배하는 자들도 더 이상 아니었다. 나의 아버지는 로슈 선생님이었고, 나의 형제들은 베라다, 뤼시앵, 치쵸였다. 나의 종교는 반항이었다."(96)
- P96

[7] "개도 공포와 같은 강한 감정을 인식한다고 한다. 분명하게, 나는 폭력이 설사처럼 안에서 터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106)

"이 남자가 갑자기 비굴해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화학 교과서를 떠올렸다. (...) 로슈 선생님이 말했다. ‘너 같이 조용히 있는 사람이 폭력을 부른다. 더운 지방에서 가장 흔한 그림이 만년설을 그린 그림인 것처럼 말이야."(111)
- P111

[8] "나는 눈을 감았다. ‘아무 마라부나 좋습니다. 저는 당신께 애원합니다. 저의 아버지는 파산했습니다. 무엇이라도 해 주세요.’ 나는 눈을 다시 떴다. 가는 선은 쉬지 않고 나를 흔들었다. 가는 선은 선명해졌다. 모든 선이 눈앞에서 흐려지면서, 선은 매우 선명하게 보였다. 가는 선이 나에게 말했다. 너는 흑인 남자다. 너는 몇 세대 전부터 백인과 교배해서 만들어진 흑인이다. 너는 지금 선을 넘어가려고 하고 있다. (...) 너는 알라를 전혀 믿지 않으며, 전설을 파헤쳐 분석할 수 있고, 프랑스어로 생각하고, 볼테르를 읽고, 칸트를 찬양한다. 그렇지만 너는, 네가 도달하려는 서양 세계도 어리석음과 추악함이 퍼져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네가 탈출하려는 그 추악함과 어리석음과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지."(134)
- P134

[9] "어머니는 주먹으로 문을 치고 이마를 찧었다. 어머니가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은 이슬람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어머니가 울부짖는 소리는 끔찍했다."(170)
- P170

[10] "그리스인과 러시아인의 성자들이시여, 나는 당신들에게 간청했습니다. 당신들은 소원을 이루어주시고는, 저의 막냇동생을 빼앗아 갔습니다...... 유대인과 타타르인의 성자들이시여, 사람들은 당신들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당연하지요. 그러니 저 문을 열어 주세요...... 당신들이 원하신다면, 저는 유대인이 되고, 당신들이 원하신다면, 저는 타타르인이 되고, 개새끼, 쓰레기, 개똥이라도 되겠습니다. 제발 저 문을 열어주세요!" (171)
- P171

[11] "저를 입으로 불어서 한 줌의 연기로 날려 버릴 것인가요? 저는 천일야화를 더 이상 믿지 않습니다. 저는 말씀드립니다. 제 조건은, 당신이 신정 통치를 부성애로 바꾸는 것입니다.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가족이 필요합니다. 또, 관용과 자유도 필요합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저의 교육을 위해서는 쿠란 학교까지만 보내셨어야 했습니다."(208)
- P208

[12] "나는 떠났다. 크고, 꼿꼿하고, 삐쩍 말랐었다. 그게 전부였다. 두 가지 오해였고ㅛ, 두 개의 탈출구였다. 나는 저주받았고, 저주받은 사람이라고 느꼈다. 나는 독특했다. 좋은 옷을 입었고, 소화 기관은 비었고, 땀구멍에서는 향기로운 기름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반쯤은 야성적, 반쯤은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문을 박차고 나와, 사막과 같은 길과 밤 안으로 들어갔다. 우연히 세 번째 행인을 붙잡았다. 나는 추웠다."(229)
- P229

[13] "나는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지만, 식물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만 하는 모든 존재를 사디스트라고 부른다. 또, 나는 자신의 다른 능력, 경향, 가능성을 모두 희생시키면서, 자신을 특수하게 만드는 모든 존재를 사디스트라고 부른다. 나는 둘 다였다. 나는 내 안에 증오를 축적하는 것에 만족했다. 그리고 이것은, 예를 들자면, 나의 다른 모든 능력을 희생시키고, 유럽식 교육 덕분에 발전한 나의 지식의 도움을 받았다. 이것이 두 번째 단계였다. 이 역시 나는 무시했다. 나는 문학을 통해서 성장하지 않았다."(259)
- P259

[14] "저의 친구 중에 레몽 로슈라는 이름을 가진 늙다리가 있습니다. 그가 어제저녁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프랑스인은 너희 아랍인을 문명화하는 중이야. 고통스럽고, 기만적이고, 아무런 즐거움도 없는 일이지. 왜냐하면 만일에 정말로 너희가 우리와 동등하게 된다면, 내가 너에게 묻겠는데, 우리는 누구와 비교해서, 아니면 무엇과 비교해서 문명화되었다고 할 수 있겠니?"(271)
- P271

[15] ""나는 저 여자를 사랑했다." 이번에는 낮게 중얼거렸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거기에 내 입술을 힘껏 비볐다. 나는 갑자기 그가 나와 닮았다고 느꼈다. 그는 고통을 느꼈고, 그 고통속에서, 그는 더 진실하고, 더 완벽하고, 더 인간적이었다."(307)
- P307

[16] "아버지는 속이고 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느꼈습니다. 과인이라고 부르지 않으면서 군주의 권위를 포기하고, 저에게 술을 따라 주고, 속내를 이야기하고, 현재의 문제를 함께 이야기했죠. 아버지는 속이고 있습니다. 원을 그리고, 그 안에 저를 가두었습니다. 저도 가두게 내버려두었죠. (...) 이런! 돌대가리를 연기하고 싶었던 고집덩어리인 것이었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신격화가 남았습니다. 그 차 사건을 바로잡은 놀라운 능력 말이죠. 저는 원 밖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332)
- P332

[17] "나는 생각했다. 무대 위에서 예술가는 박수를 받거나, 아니면 야유를 받는다. 핵심은 예술가는 완전한 무관심을 불러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354)
- P354

[18] "나는 내가 지나온 과거에서 단 1그램도 놓치지 않았다. 나의 과거가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단순했다. 나는 게임을 했고, 내가 이겼다. 나는 반항했다. 나는 궁핍했고, 궁핍한 자의 반항이었다. 궁핍할 때 사람들은 반항하지 않는다. 프랑스 총영사관조차도 건드릴 수 없는 봉건 영주들 앞에서, 그리고 또 무관심한 사람들 앞에서, 나는 궁핍하고, 천하고, 탈렙이라도 짓밟아 버릴 수 있는 지푸라기에 불과했다."(358)
- P358

[19] "프랑스에 가서, 나 자신을 단련시킬 것이다. 사람들은 앞다퉈 나에게 체념하고 사는 낡은 삶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했다. 그렇지만, 이제 나는 사회개혁, 노동조합, 사회복지, 파업, 테러리즘과 관련된 사상의 더미 속에서, 그 무엇이라도 흡수할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연금술사로서 살았다. 아마도, 몇 년, 20년, 60년이 나에게 남아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나는 화학자로 살 것이다."(360)
- P360

[20] "군주, 당신에게 작별 인사는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곧 봅시다!"(360)
- P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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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래희망은, 귀여운 할머니 (5주년 에디션, 확장판, 양장) - 우리도 그렇게 만났잖니
하정 지음 / 좋은여름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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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할머니' 5주년 에디션과 인연들

- 장래 희망은, 귀여운 할머니

 


하정 지음 [좋은여름] | (2024)




 

이 책이 처음 나온 지 벌써 5주년이라고 한다. 무려 90여 페이지가 추가된 빨간색 양장 에디션이 다시 나왔다. 초판이 나왔을 때 책에 담긴 사연을 무척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책 만드는 분께 소프트 커버와 양장본의 제작 방식이 또 다르다는 말을 듣고, 신기하기도하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냥 소프트커버용으로 만든 파일 그대로 양장본 제작에 사용하는 줄 알았던 나는, 책 한 권을 만드는 데 필요한 손길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즈음 ''이란 물건이 만들어주는 사람들과의 인연에 대해 생각해보곤 한다. 물론 이건 대개 독자에게 해당될 것이다. 작가로서는 사람과의 인연이 책으로 이어진다. 이 책 장래희망은, 귀여운 할머니가 그렇다. 그것도 이 우주에서 아주 희귀한 확률 속에서 서로를 알아본다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인연이 죽 이어지고 있다. 이번에 나온 귀여운 할머니’ 5주년 에디션은 이 인연이 아름답게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동안 저자는 이 인연을 어떻게 돌보고 가꾸어왔을지 내심 궁금하다.


 

초판과 5주년 기념 에디션 모두 작은 독립서점에서 구입한 것은 묘한 우연이자 인연이다. 책방과의 인연, 그리고 책방지기와의 인연이 이 책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책이 나를 알아본 것이라 하겠다. 책 속의 인연이 내게도 살짝 닿아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건 분명 책이 마련해준 인연이다.


 

요즈음 도시의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아파트의 벽이 얇아 이웃집 방귀 소리나 전화벨 소리를 생생히 들을 수 있기도 하다. 반면 이웃과 진심어린, 때론 시기어린 대화라도 나눌 기회가 드물다. 이런 팍팍하고 단절되어가는 도시 생활 속에서 '귀여운 할머니' 이야기는 독자에게 새로운 상상력을 불어넣어 준다. 우리에게는 이미 서로 이어지고자 하는 연대의 유전자가 있음을 일깨워준다. 이 책을 펼칠 때마다 발견하는 것은, 우리가 그동안 잊고 있거나 잃어가고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내 장래희망은... 그러니까, 귀여운 할머니와 매일 만나는 것이다.

각자 온전한 존재로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 하나쯤은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함께하는 일상이 하나의 즐거운 의식(ritual)으로 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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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1-17 14: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 15년 전만해도 누구네가 이사 오면 시루떡 한 팩씩 돌리기도 했는데 그런게 없어졌어요. 그때 넙죽 받아 먹지만 말고 답례도 하고 그럴 걸 그랬나 싶기도 하고. ㅋ
얼마전 양장본이 재활용이 안된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양장본을 포기하고 살아야하나 싶기도 하고. 출판사도 고민이 많겠어요.
세상에 모든 여자들이 귀여운 할머니가 되면 좋겠는데 울엄마 보면...ㅎㅎ

초란공 2024-01-17 23:25   좋아요 1 | URL
아 그렇네요. 떡돌리고 음식 오고가고 했는데요. 층간/세대 간 소음이 심해서 예민해지긴 쉬운것 같고요. ˝어제 밤에 전화벨 소리 너무 크더군요˝이렇게 말할 수도 없고 말이죠.

양장본 재활용 문제도 있군요. 저는 편집 방식이 양장본하고 소프트커버용하고 완전히 다르다는 내용만 들었거든요. 그리고 귀여운 할머니는 앞으로 많아져야 할텐데 말입니다^^
 
소설처럼 문지 스펙트럼
다니엘 페낙 지음, 이정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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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뛰며 읽을 독자의 권리

- 소설처럼

 


다니엘 페나크 지음 | 이정임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3, 2)

 




소설처럼는 모로코 카사블랑카 출신의 작가 다니엘 페나크의 독서론을 담은 유쾌한 에세이다. 목차를 보다가 책의 후반부에서 침해할 수 없는 독자의 권리’ 10가지를 말하는 글들을 보고 흥미가 생겼다. 10가지 권리 가운데 건너뛰며 읽을 권리를 말하는 글에서 페나크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아이들이 모비 딕을 읽고 싶은데 멜빌이 고래 사냥의 장비며 기술을 한도 끝도 없이 장황하게 늘어놓는 바람에 번번이 도중하차할 수밖에 없다면, 읽기를 포기하느니 차라리 그 대목을 건너뛰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나머지 내용들이야 어찌 되었든 겅중겅중 건너뛰며 열심히 에이하브 선장을 쫓아다니고 볼 일이다. 에이하브 선장에 죽기 살기로 흰 고래를 쫓아다녔듯 말이다!”(199)


 

일반적으로 소설은 앞에서부터 차근차근 읽으라고 말한다. 이야기에는 이어지는 흐름이 있고, 주로 초반에 제시되는 인물이나 장소 혹은 환경과 관련한 배경정보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조언은 특히 소설의 경우, 수긍할만하다. 어느 정도 이 말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모비 딕처럼 포경선이 바다로 나간 후의 사건들이 무한히 옆으로 무한히 확장되는 듯 보이는 이야기일 경우 참 곤란해진다. 고래 분류에 대한 이야기며, 고래 해체 과정을 모두가(내게는 흥미롭지만) 흥미로워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페나크의 불평대로 중간에 책을 덮느니, 그가 제시하는 조언처럼 지루한 부분을 넘기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착실하게 읽도록교육받은 독자일수록 중간을 건너뛰고 읽기란 쉽지 않다. 소설을 읽는 내내 기분이 찜찜한 것이다.


 

이를 예상한 듯, 저자는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까지 교과서적으로 완독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로워질 것을 말한다. 소설까지도 말이다. 이 제안에 용기를 내어, 나 역시 책의 앞부분을 대부분 건너뛰어 곧바로 건너뛰며 읽을 권리란 글부터 읽어본다.

 


저자에 따르면, 원래 이것이 어린 시절부터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같은 소설을 읽어온 방식이었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원래 읽기란, ‘소설처럼읽는 방식이 아니었을까...


 

한 가지 더. 이 읽기 방식에서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저자가 주로 염두에 두고 있는 어린 독자의 경우, 건너 뛸 부분을 아이들 스스로 결정할 것! 바로 이점이다. 어쩌면 이 읽기 방식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른들의 잣대로 형편없이 잘리고, 훼손되고, 쪼그라들고, 말라비틀어진 몰골이 되었다가, 종국에는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답시고 빈약하기 짝이 없는 언어로 다시 쓰이는 참담한 지경”(200)에 이른 책을 아이들 손에 쥐어주지 말 것! 어린 독자들에게는 그들 스스로 책을 고르고, 건너뛰고 상상할 권리가 있다! 이것 또한 어린 독자를 하나의 인격으로 인정하는 일 아닐까.




 

[1] "만약 아이들이 《모비 딕》을 읽고 싶은데 멜빌이 고래 사냥의 장비며 기술을 한도 끝도 없이 장황하게 늘어놓는 바람에 번번이 도중하차할 수밖에 없다면, 읽기를 포기하느니 차라리 그 대목을 건너뛰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나머지 내용들이야 어찌 되었든 겅중겅중 건너뛰며 열심히 에이하브 선장을 쫓아다니고 볼 일이다. 에이하브 선장에 죽기 살기로 흰 고래를 쫓아다녔듯 말이다!"(199)
- P199

[2] "《모비 딕》이나 《레미제라블》이 졸지에 150페이지짜리로 줄어들어 형편없이 잘리고, 훼손되고, 쪼그라들고, 말라비틀어진 몰골이 되었다가, 종국에는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답시고 빈약하기 짝이 없는 언어로 다시 쓰이는 참담한 지경에 이를테니 말이다! 그건 마치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열두어 살 먹은 아이가 보기에는 지나치게 복잡하다는 이유로 누군가가 다시 그려보겠다고 덤비는 격이다."(200)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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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4-01-16 2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충분히 공감하는 부분이지만 건너뛰며 읽기가 생각처럼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벌써 형성된 습관일수도 있고,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찜짐한 감정이 솟아나죠. 그래도 포기하거나 억지로 투덜대며 읽느니 과감히 건너뛰어 볼 맘이 생기네요.

초란공 2024-01-16 21:41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말씀하신대로 익숙해진 습관에서 보다 자유로워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읽어도 좋다는 작가가 있어서 안심이 되기도 합니다! ㅋㅋ
 

























하루키 작품, ‘마음의 눈으로 읽기


고양이를 버리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비채] | (2020)

 




소설 같은 문학작품에서 작가가 만들어 낸 인물들은 작가의 분신일 수 있지만 작가는 아니다. 작가가 바라본 자신의 모습뿐만 아니라 그가 경험하고 파악했던 인물들이 새롭게(때론 복잡하게 얽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설 속 인물이 하는 말과 행동을 작가와 동일시하는 일은 오히려 작품을 이해하기에 앞서 작품 자체에 대한 왜곡된 인상을 독자가 만들어나갈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작품 속에서 작가의 모습을 무심코 발견하기도 한다.

 

최근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역시 텍스트 속에서 작가의 모습을 조금씩 발견하게 된다. 이제 기억은 가물가물하여 신빙성 있는 비교는 불가능하지만, 대학 시절에 하루키 열풍은 지금보다 훨씬 더 대단했던 것 같다. 책을 어지간히 읽지 않았던 나도 대학 시절에 읽은 몇 권’(분명히 5권도 안될 것이다)의 책 중에 상실의 시대(언젠가 노르웨이의 숲으로 제목이 바뀌었다)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나의 부실한 독서 실태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반대로 하루키 열풍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 개인적인지표다. 수많은 하루키 매니아들의 유대감 어린 대화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던 시절에 유일하게 읽어낸 책이 바로 상실의 시대였다. 물론 독서에 익숙하지 않은 초보 독자들에게 두꺼운 책읽기가 고역인 것처럼, 나도 이 책을 읽다가 번번이 의식을 상실했다. 아마 책읽기가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이 고충에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당시에 내게 문학이란 장르의 유일한 효용은, 숙면을 위한 것으로 한정되었다. 상실의 시대는 적당히 두꺼웠고, 더 크고 두터운 전공도서 위에 받치고 책상에서 베개로 삼기에 나쁘지 않았으니까. 이제 20여 년이 지나 온라인 서점의 서재에서 놀며 조금씩 읽다보니 다시 하루키와 만나게 된 셈이다.




















 

다시 최근에 읽은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으로 돌아가 보자. 1부에서 10대 후반의 소년이었던 화자는 이제 2부에서 40대의 중년이 되었다. 주로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펼쳐진다. 생활인으로 평범한 나날들을 살아가는데, 도쿄에서 후쿠시마현의 작은 마을 도서관장이 된다는 것이 조금 독특할 뿐이다. 화자는 신임 도서관장이 된 후 월요일마다 전임 도서관장이었던 고야스 씨의 무덤을 방문한다. 이것은 화자가 하나의 의식처럼 되풀이하여 지키는 일정이 되었다. 실제로 만나보지도 못한 한 사람의 존재를 기억하는 일이었다.


 

어느 날 화자는 고야스 씨의 무덤 앞에서 까닭 없이 눈물을 흘린다. 자신이 흘리는 눈물에서 뜨거운 온기를 느끼는 장면이 나온다. 이 대목이 내게는 꽤나 인상적이었다. 다만 이 마음을 언어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중 고양이를 버리다를 읽다가 이 장면에서 받은 감정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았다. 화자가 눈물을 흘리고 그 온기를 느꼈던 것은, 바로 한 인간의 소멸된 역사에 대한 애도 행위였으리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의지와 무관하게 우연히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 그 앞에 놓인 격한 삶의 파고를 헤쳐 나갔을 인생을 기억하는 인간적인행위였다. 스스로 뜨거운 온기를 유지하며 분투했을 한 존재와의 연결됨을 자각하는 것, 그리고 그의 소멸을 애도하는, 뒤에 남은 자의 존중어린 감정이었을 테다. 적어도 내겐 그렇게 느껴졌다. 그러니 이제 눈물도 혈액과 마찬가지로 온기를 지닌 몸에서 짜낸 것이다.”(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430) 라는 문장은 내게 보다 생생하게 피부로 느껴졌던 것이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는,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꿈을 읽기 위해 눈에 상처를 감수한 화자를 돌봐주는 노인이 나온다. 그 노인이 고백하듯 내민 한 마디 나는 과거에 군인이었네.”(97)가 기억났다. 뜬금없어 보이는 노인의 말은 곧바로 작가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했다. 아버지의 충격적인 말이 각인되었을 어린 하루키의 마음 속에 전쟁을 경험했던 남자의 이미지는 아무런 맥락없이 등장하지는 않았을 테다. 작가의 아버지가 학살이 자행된 공간에 파견되었던 부대의 병사였다는 사실. 작가의 아버지에겐 오랜 트라우마로 남았음이 분명한 사실이, 작가에게는 오래도록 진실에 대한 두려움으로 남았던 모양이다. 결국 소설 속의 노인은 작가 아버지의 모습으로도 읽혔다.


 

그러면 이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노인이 한 말 가운데 한 가지 단서를 더 찾아볼 수 있다. “구덩이에 던져 넣고 유채기름을 뿌리고 불을 붙이지. 오후에는 도시 어디서나 그 연기를 볼 수 있어. 그게 매일 이어진다네.”(121) 하루키의 소설에서 슬쩍슬쩍 지나가는 이런 문장들이 아무런 의미 없이 사용된 것이라 생각되지는 않는다. 이 문장은 분명히 작가가 지니고 있던 학살-아버지와 관련 있는 난징학살-에 대한 기억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 무고한 희생자의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은 다른 문학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루마니아 출생의 유대인이었던 시인 파울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에서 무고한 희생자들(유대인들)을 태운 연기가 하늘로 치솟는 이미지가 등장한다. 이 시는 그의 첫 시집 양귀비와 기억에 수록된 시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공중에선 비좁지 않게 눕는다

(...)

그가 허리춤의 권총을 잡는다 그가 총을 휘두른다 그의 눈은 파랗다

더 깊이 삽을 박아라 너희들 너희 다른 사람들은 계속 무도곡을 연주하라

(...)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가 외친다 더 달콤하게 죽음을 연주하라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가 외친다 더 어둡게 바이올린을 켜라 그러면 너희는 연기가 되어 공중으로 오른다.

(...)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 (시집 죽음의 푸가중 시 죽음의 푸가, 41, 전영애 옮김, 민음사, 2011)


 















여기서 푸른 눈에 금발의 마르가레테는 허구적 개념인 '순수한 아리안족'을 상징한다. 반면 재가 된 머리카락의 줄라미트혹은 회색 빛 머리카락을 한 줄라미트는 유대인을 나타낸다. 시의 마지막 두 행은 최근에 출간된 홀로코스트 문학작품 (신시아 오직 지음)의 첫 페이지에도 수록되어 있다. 이 시에는 가해자와 희생자가 대비되고 있다. 희생자는 소각되어 연기가 되어 공중 무덤으로 올라간다는 이미지가 또렷하다. 하루키가 이 시 혹은 연기의 이미지에 영향을 받았음직한 대목은 또 다른 작품에서 발견된다. 홋타 요시에의 시간(1955)이란 소설에서다. 여기에서 이 연기의 이미지가 다시 나타난다. 이 소설 역시 난징대학살을 중심테마로 삼는데, 독자로서 놀라웠던 점은 가해국 일본의 작가가 희생국의 장교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썼기 때문이다.


 

시체 두 구를 숯으로 해서 우주가 데워지고 있다. 아지랑이처럼 사람의 피와 기름이 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의 난징을 상징하는 듯이.”(홋타 요시에,시간, 74)




 

















 하루키는 아버지의 역사를 조사하면서, 난징과 관련한 문헌을 보았을 것 같다. 이 소설 역시 말이다. 그러면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무력하게 죽어갔던 단각수들을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에 죽어간 희생자들을 1차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여기엔 하루키가 표현하듯이 무의미하게 죽어간 일본 병사들뿐만 아니라 전쟁과 집단의 광기에 희생된 민간인들과 관련이 있을 것이란 추정도 가능하다. 그러면 이 단각수들은 양을 쫓는 모험에서 등장하는 양들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 아래로 강요된 폭력에 휘둘리고 희생된 양들의 운명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혹은 적어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또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화자가 도서관의 소녀와 함께 도시 주변부에 있는 거대한 웅덩이를 보러 가는 대목이 나온다. 이 장면에서 소녀가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람들 말에 따르면 옛날에 여기에다 이교도나 전쟁 포로를 던져 넣었다고 해요. 벽이 생기기 전 시대에.”(145) 스쳐가듯 던져진 이 문장에서 나는 하루키가 계승한 아버지의 트라우마의 흔적을 발견한다. 나는 일본인으로서 하루키의 정신에 남은 응어리의 기억이 조금 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자국 내에서 발생한 간토대학살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도 해본다. 하루키 소설에 등장하는 웅덩이 혹은 구덩이는 난징대학살이든, 간토대학살이든 무모한 전체주의의 폭력에 스러져간 희생자들을 처리한 장소가 된다. 이 장소는 이제 망각을 위한 장소, 애도가 금지당한 장소로도 이해해볼 수 있지 않은가. 그 자체로 전체주의 폭압을 암시하는 대상으로 볼 수도 있겠다.



 

 올해 첫 날 일본 본토(혼슈 도야마현)에서 진도 7.4의 큰 지진이 발생했다. 사망자가 벌써 220명이 넘었다고 한다. 나는 안타까운 희생자와 이재민에 관한 뉴스기사를 보면서, 동시에 간토대학살을 떠올려보았다. 일본군과 관계 기관에서 퍼뜨린 유언비어로 현재까지도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 조선인 및 중국인과 일본인 희생자가 발생했던 사건이다. 조선인 희생자 수만 6600여명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겠지만, 어떤 입장에서 조사하느냐에 따라 그 숫자가 크게 다르다. 중요한 건 여전히 정확한 수가 공식적으로 집계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더 놀라운 건,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어떤 정부도, 일본에 간토대학살에 대한 정식 조사를 공식적으로 요청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이 사건은 현재진행형인 동시에 본격적으로 조사가 시작되지도 않은 셈이다. 사건 발생 100년이 넘었는데도 말이다. 아직까지 희생자에 대한 애도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았다는 말이다. 하루키의 소설을 읽어가면서, 그리고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면서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이다. 정리하면, 하루키 아버지의 개인사는 난징대학살이라는 세계사적인 사건 속에 엮어 있었고, 이것이 작가 하루키의 어린 시절에 큰 사건이자 오랜 기억의 응어리로 계승되고 있음을 염두에 두며 읽어갈 수 있다. 40여년 동안에나 작가의 마음 속 풍경을 차지했을 이 기억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그는 고민을 거듭했을법하다. 일흔이 넘은 시점에 다시 묵혀둔 글을 다듬어 3부로 구성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세상에 내놓았다. 작가의 이러한 문제의식과 더불어 그의 작품을 감상해볼 수 있다.


 

고양이를 버리다를 읽으며 확인할 수 있는 점은, 하루키가 자신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돌아보는 작가라는 점이다. 앞에서 인용한 51페이지의 문장은 이렇게 이어진다.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고, 또 역사라는 것도 그렇다. 본질은 계승이라는 행위 또는 의식(儀式) 속에 있다. 그 내용이 아무리 불쾌하고 외면하고 싶은 것이라 해도,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역사의 의미가 어디에 있겠는가?”(51)


 

작가 자신의 존재는 이 우연속에서 결정된 하나의 현실일 뿐이라 얘기한다. 세상에 던져진 이상, 이를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밖에없다고.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를 선택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루키의 아버지는 당대에 교토 제국대학 문학부에 입학한 수재였고, 미래에 대한 부푼 꿈을 꾸었던 엘리트 청년이었으리라. 다만 20세에 국가에 의해 징집되고 학살의 현장에 가야만 했던 개인의 역사를, 후손인 하루키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달리 어떤 선택이 존재할 수 있을까. 훗날 하루키는 관계가 멀어진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다만 하루키에게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란 인간이 이후의 삶에서 할 수 있는 선택에 관한 것이었을 테다. 하루키의 아버지는 평생 매일 아침마다 전쟁에서 희생된 이들을 위한 기도와 독경을 하며 애도했다. 마찬가지로 하루키에게 문학 행위는 인간 존재에 대한 연민과 애도를 보내는 행위였으리라 생각되는 지점이다. 그러니까 일부 독자들이 말하듯 하루키 작품을 단순히 가벼운 작품이라 규정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작품을 대하는 진정성에서 나온다고 본다.


 

이런 맥락에서 하루키의 문학세계를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생각해보다가, 최근 감상한 장욱진 화백의 그림과 작업들이 떠올랐다. 이 두 사람이 무슨 관계냐고? 내겐 아주 중요한 연결지점이 있다. 장욱진 화백은 평생 반복해서 그린 대상이 몇 가지 있다. (까치), , 강아지, 나무, 여인과 아이 혹은 가족 등등이다. 하루키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우물과 웅덩이, 단각수, 고양이, 코끼리나 거북, , 소녀(혹은 소녀와의 관계), 노인 등등 작품에 반복해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도 평생에 걸쳐 내놓은 작품들에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장욱진 화백의 작품에서 형식적 진정성을 찾고자 시도했던 단순한 그림, 단순한 사람 장욱진(이하 장욱진)에 주목해보자. 저자 정영목이 장욱진의 작품 이해에 시도했던 감상 태도를 하루키에게 적용해볼 수는 없을까. 하루키와 장욱진 모두 평생에 걸쳐 사용했던 라이트모티프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들의 작품들을 작가 내면의 마음 풍경을 그려낸 것으로 이해해볼 수 있겠다고 여긴다.


 

반복되는 시각적 상징들은 작가의 관념적인 마음 풍경을 전달하기 위한 의미로 작동할 뿐, 그림을 설명하거나 상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장욱진, 71)


 















다시 말하면, 하루키의 작품을 읽을 때에도 심리적인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겠다는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장욱진이 극히 제한적인 사물 혹은 대상에 관심을 보였다든지, 그 관심의 대상들이 동어반복적인 조형 이미지로 일생 내내 작품에 반영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작품을 사회심리적인 정신분석의 영역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장욱진, 144)


 

이처럼 장욱진 화백의 작품을 분석하고 작품 자체의 가치를 발견해보고자 했던 저자의 접근 방식 혹은 관점을 하루키의 작품에도 적용해본다. 화백의 작품 대신 하루키의 작품을 대치해도 잘 들어맞는다는 인상을 준다. 그가 청년시절부터 엄청난 독서를 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프로이트의 책도 상당히 읽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의 많은 작품에서 이 등장하는 것 역시 프로이트나 융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란 심증을 더해본다. 여기에 하루키의 작품에 흐르는 태도에는 반복계승이라는 표현도 눈에 띈다. 이건 장욱진 작품을 분석하는 방식을 하루키에도 적용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된다.

 


장욱진은 그리고자 하는 자신의 욕구와 행위를 형식의 문제가 아닌, 자연과 삶 그리고 작가와 작품의 관계에 걸쳐 있는 일종의 진실을 추구하는 문제로 보았다. 또한 조형으로서의 압축과 변화하지 않는 반복의 조형은 자신의 정직함을 나타내는 표상인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같은 스타일을 반복한다는 것은 이미 조형 이전의 문제인 것이다.”(단순한 그림, 단순한 사람 장욱진, 47)

 


어떤가? 나는 이 접근방식이 하루키의 작품 감상에도 어느 정도 적용될 수 있다고 여긴다. 장욱진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반복의 조형은 하루키에서 반복되는 대상(이를테면 단각수)이 갖게 된 독특한 맥락과 연결지어 볼 수 있지 않은가. 물론 여기에서는 문화적 혹은 관습적으로 적용되는 단각수의 상징성을 그대로 적용하기는 힘들 것이다. 또 장욱진 화백의 책 강가의 아틀리에에서도 언급되지만, 화가 자신에게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자아의 발견’, ‘자기에 대한 사고방식을 개발하고 발현시키는 일이었다. 장욱진 화백은 자꾸 반복할수록 그림이 좋은 거예요라고도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반복되는 테마에서 독자들은 진부함을 지적하기 전에, 하루키 작품의 진정성을 먼저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는다. 또 정영목 교수가 그림 속 대상은 작가의 분신이라 보아야 한다”(장욱진, 161)라고 언급했던 것처럼, 하루키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최소한 몇몇 인물들) 역시 작가가 규정해 놓은 자신의 다른 모습들로 볼 수 있겠다. 이 말은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김응교 교수가 그의 저서 일본적 마음에서 언급한 내용으로 확인되는 점이다. 하루키의 첫 작품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나 두 번째 작품 1973년의 핀볼, 그리고 세 번째 작품 양을 쫓는 모험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소설 쓰는 쥐나 제이스바의 J 역시 작가 하루키의 또 다른 자아상이라는 언급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100페이지가 되지 않는 하루키의 고양이를 버리다를 읽다가 이야기가 길어졌다. 우연히 20여년 만에 하루키 문학을 다시 접하게 되었는데, 하루키와 그의 작품이 정말로 궁금해졌다. 작가의 아버지에 대한 고백이 담긴 이 책과 작가의 최근 작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를 읽고, 이어서 작가의 초기 작품 세 편(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을 읽고 비교하며 반복되는 주제들도 찾아보았다. 이 반복이란 키워드에서 장욱진 화백의 작품 감상에 대한 방법론을 하루키의 작품 감상에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마추어 독자의 읽기 놀이로 보아주시면 될 것 같다. 내게는 하루키의 작품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 기회가 된 독서 경험이었다. 아직 어설픈 독자이긴 하지만, 작가 하루키가 평생 구축한 문학 세계라는 성에 들어가기 위한 열쇠가 될 만한 단서들을 생각해보았다. 이 단서를 설명하는 키워드로 나는 마음의 눈이란 표현에 주목한다.

 


관찰할 대상을 정확하게 재현해내는 것이 아닌, 마음의 눈으로 관찰한 대상을 독창적인 형식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서구 모더니즘의 기본 개념을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글이다.”(장욱진, 49)


 

결국 하루키의 작품 역시 심리적인 관점에서, ‘마음의 눈으로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감상을 그의 작품을 읽으며 떠올려보았다. 흥미로운 건 이 마음의 눈이란 표현이 최근에 등장한 표현은 아닌 듯하다는 점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도 이 표현이 나온다.

 


햄릿: 내 아버지 - 아버님을 본 것 같아.

호레이쇼: 오 어디서요, 왕자님?

햄릿: 마음의 눈으로, 호레이쇼.

[햄릿, 김정환 옮김, 아침이슬, 25]


 

장욱진 화백의 작업 세계와 작품 감상에 대한 접근법을 기계적으로 하루키의 작품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을테지만, 하나의 방법으로서 참고할 수 있겠다. 다만 작품 속에 반복되는 대상에 대해 일대일 대응물을 찾듯이 그 상징성을 하나하나 캐물어야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대신 이를 반복하는 작가-하루키의 진정성을 알아보자는 것이다. 그가 전하고자 하는 마음의 풍경을 들여다보자는 제안인 것이다. 한번쯤 독자는 아버지를 발견한 햄릿의 마음의 눈으로 하루키의 작품에도 접근해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림: 가오 옌)






[책 속으로]


[1] "왜 그 고양이는 해변에 갖다 버려야 했을까? 왜 나는 그 일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을까? 그건 - 고양이가 우리보다 빨리 집으로 돌아왔다는 사실과 더불어 - 지금도 하나의 수수께끼다."(16)

[2] "아버지가 왜 번듯한 불단이 아니라, 그렇게 조그만 유리 케이스 앞에서 매일 아침 독경을 했을까? 그것도 나는 알 수 없는 일 중 하나다. 그러나 아무튼, 그 일은 아버지에게는 하루의 시작을 뜻하는 중요한 습관이었다."(17)

[3] "어린 시절에 한 번, 그에게 물은 적이 있다. 누구를 위해서 독경을 하는 것이냐고. 그는 말했다. 전쟁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서라고. 전쟁에서 죽은 동료 병사와 당시에는 적이었던 중국인들을 위해서라고. 아버지는 그 이상은 설명하지 않았고, 나도 그 이상은 질문하지 않았다."(18)

[4] "중국 병사는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소란을 피우지도 않고, 그저 눈을 감고 조용히 거기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참수되었다. 실로 훌륭한 태도였다, 하고 아버지는 말했다. 참수된 중국 병사에 대한 경의를 - 병사이며 중인 그의 혼에 - 크나큰 응어리가 되어 남아 있었던 것은 분명한 듯하다."(49)

[5] "이 시기에 중국 대륙에서는, 초년병이나 보충병을 살인 행위에 길들이기 위해 포로로 잡은 중국 병사를 죽이라고 명령하는 일이 흔했던 것 같다. 요시다 유타가 쓴 《일본군 병사》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후지다 시게루는 1938년 말부터 1939년에 걸쳐 기병 제28연대장으로서, 연대 장교 전원에게 ‘병사를 전장에 적응케 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살인이다. 즉 담력을 시험하는 것이다. 이에는 포로를 사용하면 된다. 4월에 초년병이 보충될 예정이니, 최대한 빨리 기회를 만들어 초년병을 전장에 적응케 하고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에는 총살보다 척살이 효과적이다‘하고 훈시했다고 회상했다."(50)

[6] "어쨌거나 아버지의 그 회상은, 군도로 인간을 내려치는 잔인한 광경은, 말할 필요도 없이 내 어린 마음에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하나의 정격으로, 더 나아가 하나의 의사 체험으로. 달리 말하면, 아버지의 마음을 오래 짓누르고 있던 것을 - 현대 용어로 하면 트라우마 - 아들인 내가 부분적으로 계승한 셈이 되리라.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고, 또 역사라는 것도 그렇다. 본질은 ‘계승’이라는 행위 또는 의식(儀式) 속에 있다. 그 내용이 아무리 불쾌하고 외면하고 싶은 것이라 해도,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역사의 의미가 어디에 있겠는가?"(51)

[7] "나는 손을 움직여 실제로 문장을 쓰는 것을 통해서만 사고할 수 있는 인간이기에(태생이 추상적, 관념적으로 사색하는 것에 서툴다) 이렇게 기억을 더듬고, 과거를 조망하고, 그걸 눈에 보이는 언어로, 소리 내어 읽을 수 있는 문장으로 환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문장을 쓰면 쓸수록 그리고 그걸 되읽으면 되읽을수록 나 자신이 투명해지는 듯한 신비로운 감각에 휩싸이게 된다."(88)

[8] "나는 툇마루에 앉아 소나무를 올려다보면서 자주 상상했다. 조그만 손톱을 세우고 온 힘을 다해 소나무에 들러붙은 채 죽어서 말라비틀어져간 조그맣고 하얀 새끼 고양이를. 그것은 내 어린 시절의, 고양이에 얽힌 또 하나의 인상적인 추억이다. 그리고 그 추억은 아직 어린 내게 생생한 교훈을 남겨주었다. ‘내려가기는 올라가기보다 훨씬 어렵다’ 하는 것이다. 보다 일반화하면 이렇게 된다 - 결과는 원인을 꿀꺽 삼켜 무력화한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는 고양이를 죽이고, 어떤 경우에는 사람도 죽인다."(92)

[9] "내가 이 개인적인 글에서 가장 말하고 싶었던 것은 딱 한 가지뿐이다. (...) 나는 한 평범한 인간의, 한 평범한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차분하게 그 사실을 파헤쳐 가면 갈수록 실은 그것이 하나의 우연한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점차 명확해진다. 우리는 결국, 어쩌다 우연으로 생겨난 하나의 사실을 유일무이한 사실로 간주하며 살아있을 뿐이 아닐까."(92)

[10] "바꿔 말하면 우리는 광활한 대지를 향해 내리는 방대한 빗방울의, 이름 없는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고유하기는 하지만, 교환 가능한 한 방울이다. 그러나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 빗물 한 방울의 역사가 있고, 그걸 계승해간다는 한 방울로서의 책무가 있다. 우리는 그걸 잊어서는 안 되리라."(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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