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데몬 코퍼헤드
바버라 킹솔버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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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어디를 펼쳐들어 만나는 문장도 매혹되지 않는 곳이 없는 이 시대 최고의 소설이다. 가슴 아픈 사연이 소년의 경쾌한 시선에 스며든 그 만큼 감동이 굉장히 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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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 입문 - 프랑스어권의 비트겐슈타인 입문 필독서
롤라 유네스 지음, 이영철 옮김 / 21세기문화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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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무수한 책들에 비트겐슈타인이 호명되고 인용 서술되고 있지만, 그 친근한 이름만큼 그의 철학에 대한 이해는 역설적으로 매우 천박한 정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어쩌면 진실한 목소리일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생전 출간된 저술은 논리-철학 논고(이하 논고로 표기함)이 유일하다. 그리고 그의 후기작인 철학적 탐구(이후 탐구로 표기함)는 사후 유고를 정리하여 출간된 책이고, 여타 사후 출간물들 역시 그의 의지와는 다른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논고만 하더라도 어떤 일관된 중심을 향해 서술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짧은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어 비철학도는 물론 철학자들에게도 그리 호락호락한 저술이 아니기에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닌 것이다.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아마도 대중적 담론으로 얽혀들지 못했다는 것이 옳은 판단일 것이다.

 

1918년에 집필이 완료되고 1922년 출간된 논고19297년전 출간된 비트겐슈타인의 책을 케임브리지는 박사학위 수여논문으로 심사한다. 심사위원인 ‘G.E 무어‘B.러셀에게 심사청구자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선생님들이 논리-철학 논고를 결코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압니다.” 전언되는 이 익살극의 한 장면은 논고의 이해가 녹록치 않음을 대변하는 것이리라. 다른 철학자가 말하는 것을 당신이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 이 풍경이 낯익다. 나 자신이 이 근방에 와 본적이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이 비트겐슈타인 입문서는 진의를 파악했다는 확신이 없으면, 그저 문자에 머무르기로 한다. 저자 롤라 유네스는 이러한 정직성을 토대로 비트겐슈타인의 글에 접근하기 쉽게 하는 열쇠들을 주어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글에 몰입하도록 자극한다.

 

서론과 결론을 제외한 총 5장으로 구성하여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와 중기, 후기라는 연대적 설명과 함께 논고를 중심으로 탐구, 소품집, 노트북, 청색 책, 갈색 책, 확실성에 대하여를 비롯한 기타 논문들을 망라하여 윤리와 미학, 수학과 문화에 대한 태도, 자연사적-인류학적 접근, 말기의 인식론에 이르는 광활한 사유지대를 요령있게 소개하고 있다. 1장은 한 순회 철학자의 여정이라 하여 비트겐슈타인의 사적 삶인 전기를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레이 몽크(Ray Monk; 영국 사우스햄턴철학 교수)’비트겐슈타인 평전 (Ludwig Wittgenstein: The Duty of Genius)에 의존한 것이기에 여기에 서술하는 것은 배제키로 한다. 다만 이 철학자의 성자(聖者) 또는 제대로 된 사람이 되려는 희망을 일생 실천하려는 의지로서 전장(1차 대전)으로의 자원입대에서부터 병원 포터, 실험실 조수, 수도원 정원사, 벽지 초등학교 교사로서의 일상들은 이 천재 철학자를 더욱 경이롭게 바라보게 했음을 부언하는 것으로 갈음한다.

 

2장은 논고를 중심으로 한 전기(前期)의 철학을 소개하고 있는데, 아마 이 책의 하이라이트라 할 것이다. 롤라 유네스는 논고자기의 생각들을 신탁이나 일기예보처럼 전한다고 평하며, 자신의 의견을 마치 차르의 칙령인양 표명한다.”고 한 버트란트 러셀의 말을 부가한다. 내게는 논고읽기를 몇 차례 시도하다 그 주장에 대한 논증도 설명도 상상할 수 없어 포기했던 기억이 새롭다. 문장이 난해해서가 아니라 글과 글들로부터 무엇인가 의미를 연결하거나 소기의 목표한 상상에 이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바로 이렇듯 망망대해에 떠있는 듯했던 막막함에서 구제해준다. 논고는 한 마디로 생각에 한계를 그어주는 작업이다. 사유의 한계를 탐구하기 위해 언어의 한계를 탐구하는 것이다. 어쩌면 논고에서 몇가지 중요한 핵심적 사유의 하나는 세계와 사실에 대한 개념의 이해가 될 것 같다. 대상들의 결합인 사태와 사태의 존립을 긍정하는 사실과 부정하는 사실, 이 두 유형의 사실들이 합쳐져 현실을 이루며 전체 현실이 세계라는 이 진술이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기초적 토대임을 확인한다.

 

또한 인과적 필연성의 관념을 거부하고 그 믿음은 미신에 불과함을 역설하는 것이 곧 엄격한 과학의 인식론적 제국을 비판하는 것이라는 점을 새롭게 연결할 수 있게 된다. 인과관계에 대한 이 부정의 배경을 이해하게 된 것도 이 책의 도움이고, 결국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중심 문제인 말해질 수 있는 것과 보일 수 있는 것 사이의 구별, 즉 무릇 생각될 수 있는 것은 표현 될 수 있는 것이고, 때문에 오직 보일 수만 있는 것은 생각될 수 없다(논고 4.16)는 좀처럼 명료성을 얻지 못했던 문장을 비로소 풀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예전에 읽어나가면서 매우 애먹은 부분이었던 사이비 명제에 대한 비트겐슈타인 고유의 이해를 얻게 된 것도 이 책으로부터의 수확이라 해야겠다. 논고는 하나의 이론을 정립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논리적 명료화라는 측면에서 형이상학적 명제들에 있는 모종의 기호들이 아무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이제야 분명하게 형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빈번하게 말하게 되는 동어반복이나 모순들이 이미 명제의 한계적 상황을 나타내는 것이고, 이 말들이 가능성은 갖추고 있으나 뜻은 비어있음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는 것이다. ‘비가 오거나 오지 않는다.’, 이 말은 현실의 그림이 아니고 아무 것도 모사하지 않는다. 결국 이러한 말들은 실제 아무것도 말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언어는 사실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지 사실에 속하지 않는 일체의 것을 표현하는 무력함을 다시금 확인케 한다. 따라서 이 철저한 사실의 철학자에게 도덕적 심미적 가치의 그 어떤 표현도 무의미한 사이비 명제가 된다. 이처럼 가장 깊은 형이상학적 문제들이 실제로는 아무 문제도 아니라고 하며, 결국 철학적 문제들은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해소될 뿐이라 말하며 철학적 종언을 고하기까지 한다.

 

아마도 언어 논리에 대한 명료성의 천착으로 기성의 철학들이 언어 논리의 오해에서 허우적 거리고 있을 뿐이라는 지적은 많은 철학자들을 분노하게 만들었으리라. 특히 틀뢰즈는 이에 대해 강한 비난의 목소리를 냈는데, 그의 저술 A에서 Z까지에서 철학의 암살자라고까지 혐오의 시선을 보낸다. 그 자들 (...) 나에게 그것은 철학적 파국입니다. 그것은 철학 전체의 퇴보입니다. (...) 그것은 매우 슬프게도 비트겐슈타인 사건입니다. (...) 그것은 거대하게 건설된 빈곤입니다. (...) 그들이 승리하면, 철학은 암살될 것입니다. 그들은 철학의 암살자입니다.”

 

들뢰즈가 비트겐슈타인을 읽지 않았으리라는 것이 중론인 듯한데, 비트겐슈타인은 후일 들뢰즈가 하는 내재성의 철학에 대한 철저한 거부 위에 세워진 철학이었기에 그랬을 것이다. 그럼에도 비트겐슈타인은 20세기 철학 발견의 가장 전형적이고 일관성 있는 예시들을 제공했다는 것이고 들뢰즈 또한 이 토대위에 있었음을 알지 못했으리라는 부브레스(Bouveresse)’의 비평은 맹점(盲點) 혹은 소외가 모든 이해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믿음과 신뢰에 대한 문장을 다시금 상기하게 한다지나친 의심은 그 의심을 죽인다. 어떤 사실도 확신하지 않은 사람은 자기의 말뜻도 역시 확신할 수 없다확실성에 관하여(§114)의 회의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은 또한 생각하지 말고 보라는 말의 중대함을 다시금 다지게 한다.

 

한 낱말의 의미는 언어에서의 그것의 쓰임이다. 그리고 때때로 한 낱말의 의미는 그 소지자를 가리킴으로써 설명된다.”  - 탐구, §43

 

논고의 철학이 실재와 충돌하는 방법론적 요구라면 탐구는 삶의 세계라는 거친 대지로 돌아가려는 의지라 구분할 수 있다.  논고가 사태의 존립을 주장하는 하나의 언어놀이였다면 탐구는 언어가 얽혀있는 활동들 전체로서 언어놀이에 대한 철학이라는 것이다. 언어를 말하는 것은 어떤 활동의 일부이며, 삶의 형태의 일부라는 것과 언어적 표현의 의미는 맥락과 비언어적 활동에 의존한다는 것을 부각하려 한 저술이란 것이다.

 

언어를 상상한다는 것은 그것을 맥락 - 활동들, 행동들, 실천들 - 속에서 상상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비트겐슈타인의 본질을 구성하는 정확한 특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에 통한다. 한 낱말의 의미는 언어놀이 내에서 그 낱말의 쓰임에 의존하고 언어놀이는 삶의 형태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탐구에는 독특한 개념어가 등장하는데,가족 유사성이라는 낱말이다. 이를테면 카드놀이, 공 놀이, 장기류 놀이 등등을 무일들은 모두 놀이라 부른다. 이 놀이라는 낱말이 어떤 공통적 본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유사성, 근친성을 지니고 있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이것을 가족 유사성이라 부른다. 결국 생각하지 말고 보라는 말의 반복이다. 표현될 수 없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렇다, 그러니 그저 보라는 것이다.

 

여기서 유명한 문장이 출현한다.   모든 설명은 사라져야 하고, 오직 기술(記述)만이 그 자리에 들어서야 한다. (...) 철학은 우리의 언어 수단에 의해 우리의 지성에 걸린 마법에 맞서는 하나의 투쟁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철학자를 마비시키는 물음들에서 정신을 해방하는 것이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 개념의 본질에 대해 헛된 기획임을 주장하는 즈음에서 철학자들은 발끈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비트겐슈타인에 동의하게 되는데, 언어의 쓰임과 그것에 대한 이해는 공유된 삶의 형태에 공통된 행동과 실천에 의존하고 있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지역 공동체에서부터 여타 소집단들의 사용 언어의 의미는 얼마나 다른가, 또한 그들의 언어가 얼마나 다른 맥락에 의존하고 있는가는 정당간의 자기 말만 쏟아놓는 불통의 TV장면의 예시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한 편에선 능력에 따른 처우가 정의라 하고, 다른 편에서는 소외된 약자에 대한 사회적 가치의 재분배를 정의라 한다. 다른 맥락과 다른 삶에 기초한 동일한 낱말은 서로 다른 뜻을 지닌다.

 

우리의 몰이해의 한 가지 주된 원천은 우리가 우리의 낱말들의 쓰임을 일목요연하게 보지 못하기 때문(탐구 §122)이라 주장하는 바로 그것일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대중화하는 것에 살아생전 극구 반대한 오스트리아 철학자의 의지에 반해 그 의지를 해독하려는 노력인 이 저술을 비트겐슈타인이 보았다면 아마 안돼!라고 외쳤을 것만 같다. 그럼에도 그의 생략적이고 단편적인 글로 인해 읽기를 포기했던 수많은 대중 독자들에게 목마름을 이 책은 상당부분 가셔준다.   주장하거나 설명하는 것은 정원사의 진흙 투성이 손으로 장미를 더럽히게 될 것이라 생각하는 이 귀족적 미학의 철학자에 다가갈 수 있도록 그 가려진 길을 안내해주는 그야말로 명쾌한 입문서이자 개괄(槪括)서라 할 수 있다. 200쪽 남짓의 작은 책자에 꼭 필요한 주요 내용을 누락없이 밀도 높고 수월하게 이해토록 돕고 있는 몇 안 되는 낭비 없는 책이다. 비트겐슈타인을 읽고자 하는 모든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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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보는 자들의 밤
빅터 라발 지음, 배지은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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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원제인  'The Changeling(바꿔친 아이)'을 대신해  엿보는 자들의 밤이라 한글번역 제목을 한 것은 소설의 제재를 은폐하려는 편집자의 의지와 함께 수많은 익명자들의 엿보는 시선이 있는 오늘의 소셜 네트워크가 지닌 부패성의 부정적 의미를 부각시키려 한 것 같다. 이 작품은 꽤나 다채로운 장르가 어우러진 독특한 구성의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동화와 아기 공양(供養)의 전설, 스마트폰과 컴퓨터 속 사진, 사생활의 고백이 넘쳐나는 소셜 네트워크가 야기하는 공포의 전율이 얽혀 이 세계의 음울한 정경을 풀어낸다.

 

언제부턴가 우리들의 세상은 외벌이로 한 가족의 삶이 지탱되지 않는 세계가 되어 아이의 양육은 하나의 사회적 중대 의제가 되었다. 이야기는 치안이 극도로 불안정한 우간다를 떠나 자본주의 첨병인 도시 뉴욕으로 이주한 여성 릴리안으로 시작된다. 여인은 백인 남성 브라이언을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아들 아폴로를 낳는다. 마냥 행복할 것 같았던 결혼 생활은 4년차에 이르렀을 때 흔적도 없이 떠나버린 브라이언으로 인해 모자에게 불가피한 결핍을 남긴다. 토요일 반나절의 시간은 누구에게도 아이를 맡길 수가 없었던 릴리안은 네 살 박이 아이 아폴로를 집에 홀로 남겨두고 일을 하게 되고, 아이에게 별다른 일이 발생하지 않게 되자 릴리안은 이러한 상태를 지속한다.

 

어느 날 아이는 꿈속을 헤매듯 아버지가 자신을 홀로 두고 떠나버렸다고 호소한다. 그가 자신을 버리고 떠났음에 대한 고통,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한다. 집안에 가득했던 안개와 아버지가 가져다 놓은 상자와 동화책, 그리곤 자신의 손을 놓고 같이 갈 수 없다며 자신을 두고 떠났다고 엄마에게 그 아픈 순간을 말한다. 이것은 성장한 아폴로에게 깊은 상처로 남아 그가 결혼한 에마와의 사이에 낳은 아기 브라이언에 대한 사랑의 과잉의식으로 표출된다.

 

두 흑인이 꾸린 가정, 서적상(書籍商)으로서 불규칙한 아폴로의 수입은 에마의 도서관 사서 일을 멈출 수 없게 한다. 아폴로는 아기를 가슴에 안고 출근하여 도서관 재고정리나 유품 정리 세일 장소를 찾아가 버리듯 내놓은 먼지 수북한 책 더미를 뒤지며 보석같은 책들을 건져내는 일을 지속한다. 그는 아이를 양육하는 아빠로서 자신의 기꺼운 행위에 기쁨을 느끼고, 장소가 바뀌거나 아기의 해맑은 미소를 볼 때마다 연속으로 사진을 찍어 소셜 네트워크에 올린다. 이를 우연히 본 익명의 사람들은 좋아요를 누르며 호응한다.

 

아폴로의 이 행위에는 수천 명의 이방인이 보내는 찬사가 어린 시절 받지 못한 애정을 보상해 줄 것처럼, 박수를 애걸하는 모습이 어렴풋 비친다. 이 궁핍한 행위가 어떠한 상황을 초래할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아폴로는 하루에도 수십 차례 아기를 연사(連寫)로 찍은 사진을 올린다. 소설에는 두 권의 책이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데, 그 하나는 유괴된 아기에 대한 어둡고 슬픈 이야기인 모리스 샌닥이 쓴 동화 잃어버린 동생을 찾아서(작품 속에서는 저 바깥에라는 원제로 번역됨)이고, 다른 하나는 피부색이 가져오는 오래된 편견의 불모성을 말하는하퍼 리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이다.

 

특히 저 바깥에는 반복적으로 아폴로의 의식을 지배하며, 플롯들을 연결하는 핵심적 소재로서 서사의 흐름을 횡단한다. 익명성의 세계, 그것은 다른 말로 엿보는 자들의 감시세계이기도 하다. 아폴로가 찍지 않은 그와 아기의 사진이 에마의 스마트폰에 전송되고, 바닥에 눕혀있는 전송된 아기의 사진은 에마를 불쾌하게 한다.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 온 아폴로에게 에마는 아기 브라이언을 바닥에 눕혀놓은 처사에 불만을 토로하지만 그는 사진의 출처에 대한 의혹을 보내고, 그 메시지를 보자고 한다. 그러나 메시지는 누군가에 의해 지워졌다. 아폴로는 에마의 신경과민을 지적하며 아내의 말에 의심을 보낸다.

 


소설 도입부의 빠른 속도와 경쾌한 문장은 어둡고 호흡이 긴 문장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두 사람의 불신은 긴장으로 고조되고, 이윽고 거대한 사건이 발생한다. 깜박 졸음에 빠진 사이에 쇠사슬로 꽁꽁 묶인 채 깨어난 아폴로는 끔찍하게 변한 살풍경을 직면한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검은 물체, 그리고 안와골이 부서지는 몽둥이의 타격으로 실신하고 만다. 아기는 죽었다, 그리고 에마는 사라졌다. 이 사건은 연일 뉴스를 장식하고 소셜 네트워크에는 근거없는 이야기들로 들끓는다.

 

이런 일은 흑인 가정에서는 깜짝 놀랄 만큼 흔히 일어나는 일이며,

그들은 지옥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흑인들은요, 그러니 악마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흑인들은 애초부터 나쁜 방식으로 아이를 키우며, 맞벌이 부부라는 것이 모든 재앙의 시작이라는 이야기 등으로 각종 음모론과 함께 일면식도, 아무런 사정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익명의 가면 뒤에 숨어 악의를 뿜어낸다.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는 유품으로 내놓은 어느 집 지하 창고의 케케묵은 상자에서 아폴로가 발견한 핍(트루먼 커포티)을 위한 사인 초판본의 발견과 더불어 이 흔한 피부색에 대한 편견이 지배하는 이 세계의 끔찍함이 소설의 한 축임을 은밀하게 주장하는 듯하다. 그리고 하퍼 리의 초판본은 또 하나의 주요 플롯 연결 소재로 작동하며 사건의 진행을 돕는 역할을 한다. 아무튼 작가 빅터 라발은 이렇게 재치있는 모티프의 활용으로 주제의식의 이해를 위한 길잡이로 독자를 안내한다.

 

자신의 끔찍한 사랑의 대상인 아기 브라이언의 죽음과 아내 에마의 돌연한 사라짐은 분노와 증오에 휩싸이게 한다. 주택 관리인의 발견과 어머니 릴리안의 도움으로 부서진 안와골을 맞춰 회복한 아폴로는 에마를 찾아 죽일 결심을 하게 한다. 도시의 골목길마다 설치된 CCTV, 인터넷 망으로 무수한 익명의 사람들로 무작위하게 연결된 감시망은 에마의 흔적을 찾아내고 은거지로 추정되는 뉴욕 해안가에 흩어진 아홉 개 섬을 지목한다. 한 때 천연두 환자 치료시설로, 그리곤 2차 대전 후에는 참전용사들의 수용시설로 이용되었으나 폐쇄되고 버려져 자연으로 돌아간 사람이 살지 않는 도시 문명과 격리된 노스브러더 섬으로 아폴로를 이끈다. 악의가 도처로 연결된 아이들의 목숨을 빼앗아가는 세계를 피해 여인들과 아이들만이 자신들의 세상을 구성하는 세계다.

 

상륙한 아폴로는 돌연 나타난 여전사들에게 두들겨 맞고, 현대판 아마존의 리더인 칼을 통해 그녀들의 세계를 이해하게 된다. 칼이 아폴로에게 들려주는 라푼젤 동화의 이야기는 환상에 현혹되어 황폐함을 그 자체로 보지 못함으로 인해 벌어지는 오늘의 세계를 가득채운 망상을 일깨운다. 인간세계를 장악한 오래된 마법, 그 주술에서 깨어나야 함을, 아마 아폴로는 이쯤에서 에마에 대한 증오와 자신들의 아기 브라이언의 죽음이 거짓된 환상이었음을, 또한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조차 진실이 은폐된 무엇이었음을 인식했던 것 같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듣는 것을 좋아하는 아폴로는 칼의 신뢰를 얻게되고 공동체의 어린 소녀 게일과 아이의 엄마로부터도 탈취자가 아닌 보호자로서 수용된다. 이야기는 여성 공동체의 이상향으로, 그리고 노르웨이 이주자들의 전설을 누비며 아이의 양육. 오늘의 세계에서 그들을 지켜낸다는 것이 어떤 어려움을 이겨내야 하는 것인지를 줄기차게 비유하고 설득한다.

 

어둠 속 거인, 아이들을 빼앗아 가고 아이를 대체하는 기만으로서의 대용물이 남겨지는 현대판 인신공희(人身供犧)의 환유(換喩)는 인종과 성() 차별의 적절한 도구로 소설의 구성을 풍성하고 다의적 의미로 가득하게 해주는 듯하다. 소설은 마침내 환상적 공간으로 독자를 이끌어대는데, 아이를 공양으로 삼는 거인 트롤의 전설이 현실의 경계와 마주한다. 아이를 지켜내기 위해 어떤 위험한 모험까지 감수하는 여인들, 아폴로의 어머니 릴리안, 아폴로의 아내이자 그들의 아이 브라이언을 지켜내려 한 에마의 고난의 현장을 마주하는 것이다. 소설은 여느 동화책처럼  그 후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사실 이 말이 동화 속 이야기의 이후 이야기들을 말 할 수 없는 이 세계의 부정성을 차단하는 의도이듯, 이 소설 또한 오늘의 세계에 경계(警戒), 그 위협의 요소들이 여전히 극성을 부리고 있다는 현실에 있을 것이다.

 

기관사없는 기차를 모든 사람이 운전하는 꼴이 된 페이스 북의 페이지들, 이들은 어떤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인터넷에 글을 포스팅한다는 건 현관문을 열어놓고 아무나 우리 집에 들어오십사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라는 문장도 있다. 걸쇠 없는 창문이며 문 없는 집으로의 낯선 자들의 초대와 같은 무수한 익명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SNS에 무심코 올리는 사진과 사생활의 기록들. 그리곤 아이의 양육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드는 소비 경제사회가 부추기는 이기적 욕망들, 여전히 곤란을 겪는 여성에게 지워지는 양육의 경사진 부과, 각종 차별이 지닌 불모성들이 얽혀 만들어내는 이 세계의 부패성은 삶의 조건을 더욱 어둡고 두렵게 한다.

 

어쩌면 이 소설은 이러한 현실 공포의 실체를 마주토록하기 위해 저 어두운 지하 동굴 속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슴 저미는 진실을 볼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 것 같다. 아이를 지켜내는 것은 곧 인류를 지켜내는 것일 게다. 이제 이 과업은 두 남녀의 몫으로 방관하기에는 이 세계가 어제와 너무도 많이 달라져 있다. 사회 공동체이자 국가 공동체가 더욱 직접적으로 양육의 몫을 나누어져야 하는 세계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인간을 쓴 흑인작가 랠프 앨리슨의 문제의식과 평이한 문체로 고도의 내용을 다루고, 현실과 비현실 세계를 막힘없이 이동하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하나로 합친다면 바로 빅터 라발이라 했던 앤서니 도어의 말은 이 작품을 말하는데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해설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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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원 삼대
황석영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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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일제 식민 치하의 항일 운동은 사회주의 강령에 의존해야 했는가?


이 작품과 관련하여 조금은 뜬금없는 그러나 관련성은 부정할 수 없는 한국사회의 부패이야기로 시작해야겠다. 미국의 뉴(new)아이비리그 25개 대학의 하나로 정치분야의 석학과 주요 정치리더를 배출하는 콜 게이트대학 정치학 교수인 마이클 존스턴(Michael Johnston)’은 그의 유명저술인 Syndromes of corruption(부패의 증후군)에서 한국의 독특한 부패를 지적하고 있다.

 

한국 부패 유형은 매우 흥미롭다. 엘리트 카르텔 유형이다. 많이 배운 놈들이 조직적으로 뭉쳐, 국민을 등쳐먹는다.“ 라고.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 지적이 한국사회의 부패 근인을 모두 아우르는 분석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상당부분 적확한 통찰임을 부인하기 어려운 발언이다. 이방인이 쓴 이 아픈 지적으로 소설의 감상을 시작하는 이유는 이제 국민의 대다수가 노동자인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 그 노동자들의 삶의 뿌리를 차근히 들춰보는 100여년의 서사 속에서 똬리를 틀고 앉게 되는 그 부정한 부패의 기원을 보게 되는 까닭이다.

 

우리는 아주 빈번하게 새로이 선출된 권력들이 부패와의 싸움을 주요 정책으로 내걸었지만 흐지부지 되고 만 것을 알고 있다. 마이클 존스턴 교수가 지적하듯 부패가 단지 어느 특정 시기에 발생한 일시적이거나 국부(局部)적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유별나게 파렴치한 부패양상인 배운 놈들이 조직적으로 뭉쳐 국민을 등쳐먹는’, 다시 말해 매우 구조적이고 오랜 시간의 네트워크로 다져진 부패 형상이기에 몇 년에 걸친 특단의 조치로 해결될 것이 아니라는 점이기에 그렇다.

 

바로 지금 한국민들이 체감하는 경제성장 저하, 정치적 불안정, 사회적 불신의 심화와 국제사회에서의 부정적 이미지 증가로 인한 외국인 투자 감소와 경제 손실 유발과 같은 심각한 영향의 근본 원인이 바로 이 고질적으로 고착된 기형적 부패 양상인 엘리트형 카르텔의 심화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장기적으로 국가의 건강성과 안정성에 결정적 타격을 가하기에 단순하고 일시적인 법률적 처단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 그 문제가 있다. 즉 국가적 우선 과제로 다루어져야 하는 것이지 여러 정책 과제의 여느 하나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만큼 한국사회는 조직적이고 구조적으로 썩어있다는 말이다.

 

 

소설 철도원 삼대- 일제 유산으로서의 한국사회의 부패 고리

 

"혹한의 겨울밤에도 저 굴뚝 아래 아파트와 건물 빌딩들의 빛나는 창문들과 

강변 도로 위를 끊임없이 흘러가는 매끈하고 날렵한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물결을 볼 때마다 세상은 언제나 그냥 무심하다는 걸 실감한다."  -412쪽


소설은 분할매각을 통해 회사를 해외에 팔아버리고는 시침 뚝 떼고 공장을 폐쇄시킨 상황에서 노동자들을 해고한 파렴치한 자본가를 향해 부당한 해고와 복직을 요구하는 한 노동자의 45미터 굴뚝 위의 농성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 농성은 사백일하고도 열흘 만에 자본가와 기만적인 타협을 이루어내고 내려오는 것으로 끝나지만, 말뿐인 복직으로 돌아 온 공장 현장에는 아무런 기계설비도 없는 텅 빈 장소이다. 해고 노동자들의 외로운 투쟁의 결과는 아무것도 없는 버려짐인 것이다.

 

결국 이 소설은 농성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농성자인 이진오라는 인물의 증조부에서 조부와 아버지, 그리고 그 자신으로 이어지는 이 땅 노동자의 역사를 쫓는 것이고, 그 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을 에워싼 참혹하기만 했던 시대적 상황이란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오늘에까지 싸워야하는 권력의 실체란 것이 어떻게 변천했는지를 개관하는 것이 될 것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일제의 지독하고 줄기찬 식민지민에 대한 차별과 탄압, 그칠 줄 모르는 폭력과 죽음 앞에서 그들이 무얼 할 수 있었으며, 그 무엇을 행동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보도록 한다.

 

본질은 이러한 것일 게다. 국가의 정체성은 물론 역사마저 부정하는 이 땅의 엘리트형 카르텔이라 지칭되는 기득권 집단은 식민 치하에서 독립 운동을 펼쳤던 민족해방 투사들을 빨갱이라며 그 의로움을 부정하고 나라를 팔아먹거나 자기 이익만을 위해 동족을 배반하고 적극적으로 일제 부역자 노릇을 하던 자들을 애국자라 옹호하는 기괴한 짓들을 벌이고 있다. 작가의 말에서 언급되듯 조선의 항일운동은 너무도 당연하게 사회주의가 기본 이념의 출발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해방 이후 생존권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은 이러한 연속선상에서 손쉽게 빨갱이로 매도되곤 했으며, 전쟁이후에는 또 냉전체제라는 지정학적 상황을 이용하여 노동 운동은 다시금 빨갱이 짓거리가 되었다. 결국 노동자가 인간다운 삶의 조건을 요구하게 되면 곧 빨갱이 짓이요, 종북 세력이라는 괴이한 낙인을 찍어 권력과 결탁된 자본은 수월한 부패욕구를 지속할 수 있었음을 추적할 수 있게 된다. 제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도 조선인은 철도공작창의 최하위 작업자를 벗어날 수 없었던 시절 이진오의 증조부인 이백만은 성실성이라는 저항없는 순응성으로 고원(雇員)이라는 뜨내기 직을 이어나간다. 아내 주안댁은 남편 이백만의 생활비도 안 되는 임금을 보충하기 위해 시장을 누비며 억척스럽게 살림을 꾸려나가지만 급작스럽게 생을 마감한다.(소설은 먹은 것이 체해 죽은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아마 심장마비였을 것이다.)

 


이백만은 슬하에 아들 일철(一鐵, 한쇠)과 이철(二鐵, 두쇠)을 두고, 일철은 철도원양성소를 졸업하여 일본인이 독식하던 기관사가 되는 어려운 길을 걷는다. 이철은 아버지 이백만과 같이 철도공작소의 말단 공원(工員)이 되지만 노동쟁의에 가담했다는 이류로 해고되어 방직공장 임시기술직으로 들어가 자본에 의해 저질러지는 노동착취와 차별적 대우에 조직적인 항거를 위한 노동자 조직을 일궈 나간다. 식민치하의 노동자들의 단결은 제국주의 일본의 자본 이익에 반하는 행위였으니 그 낌새만으로도 잔악한 탄압의 대상이었다. 이때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그 어떤 세력도 식민지 조선인들의 곤궁한 삶의 형편을 위해 대변자로 나서지 않았다. 노동자들의 계급투쟁과 평등한 노동처우의 요구는 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 이념과 그들의 지원이 유일한 돌파구였다. 따라서 일제 식민지하의 조선인 노동자들의 불가피하게 지하화된 조직은 공산주의 강령에 의존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한일합병 직후, 잠재적인 앞잡이(부역자 무리)로 본다면 그 숫자는 수십만이 

될 것이다.  한쪽에서는 가산과 가족까지 버리고 목숨을 바쳐 일제와 싸우는 이들이 있는가하면 적의 앞잡이가 되어 몇 푼의 생활비와 권력을 탐하는

 자들이 그렇게나 많았던 것이다.”    -306

 

이쯤에서 오늘날의 한국사회에 특이한 부패 유형인 엘리트 카르텔의 발원이 목격되기 시작하는데, 바로 친일 부역자 무리다. 돼지 도살로 살아가던 최달영이란 인물의 일제순사 밀정으로의 변신과 후일 고등계 형사가 되고, 해방 후 용산 경찰서장이 되어 동족에게 폭력을 거침없이 겨누고 죽음으로 몰아댔던 그 비열한 세력들이 이 땅의 주요 정치경제세력이 되는 과정이다. 일본 순사들보다 더욱 극악하게 조선인을 못살게 굴던 인간, 식민 기간 내내 노동자들 조직을 괴멸시키고, 수많은 노동자들을 각종 고문으로 절명시키고, 그 가족을 파멸시키는데 주도적인 성과를 이뤄낸다. 일제의 개(走狗)가 되어 가치를 입증함으로써 일본의 정식 고등계 수사과장에 올라 불의한 부와 권력을 쌓아올린다.

 

해방된 조선의 통치자는 일제에서 미군정으로 점령군의 이름만 바뀌었으니 조선의 독립이란 말은 사실 공허한 얘기에 가깝다. 미군정은 고스란히 일제의 관료시스템과 관료들을 그대로 인수했다. 이에 조력한 인물이 바로 이 나라 최초의 탄핵 대통령이 되어 쫓기듯 권좌에서 내려온 썩어빠진 이승만이란 인간이다. 다시 말해 해방 후 이 땅의 정치 경제 세력은 친일부역자들이 그대로 - 동족을 착취하고 죽여 쌓은 부정한 지위와 재산을 - 이어가게 되는 부조리함이다. 이이철은 야마시타(최달영)에 잡혀 고문으로 망가진 몸을 이기지 못하고 수감된 감옥에서 사망한다.

 

형 일철은 조선인이 차지하기 어려운 기관사라는 자리를 성취하지만 항일 운동을 위해 공산주의 노동자 조직을 위해 투쟁하던 동생의 행동을 암묵적으로 지지한다. 해방 후 일철은 노동운동의 주요 인사가 되어 참여하지만, 이름을 바꾸고 경찰서장이 된 최영(야마시타)은 기세등등하게 나타나 노동운동 조직은 빨갱이 짓이니 조심하라고 협박한다. 일철은 일제의 주구였다가 다시금 미군정 경찰의 개에게 쫓긴다. 붙잡히면 개처럼 죽을 것이다. 그는 미국에 의해 분단된 38선을 넘어 북으로 탈출하고, 북쪽의 기관사 양성교육자로 살아간다. 이제 일철의 아들 이지산은 아비를 찾아 할아버지 이백만과 어머니 신금이를 떠나 북으로 떠나 아버지로부터 기관사의 교육을 받지만 전쟁 기간 물자배송을 하다 포로가 된다. 한쪽 다리가 잘려 나간 불구의 몸을 하고 어머니 신금이가 있는 영등포 고향집으로 찾아든다. 발전소 굴뚝에 올라 고공농성을 하는 이진오는 그렇게 살아 돌아온 이지산의 아들로 태어나게 된다.


 온 세상은 우리의 편이 아니며 겨우 한발짝씩

아주 느리게 변할 뿐이라는 것을 누구나 잘 알게 되었다.” -408

 

일제 때부터 전쟁까지 겪으면서 우리 집 남자들 모두가 노동자였거든. 이라고 세기가 지난 21세기 오늘에도 여전히 변하지 않고 똑같은 한국사회를 말하는 이진오의 기억은 한국사회의 부패와 맞닿는다. 이 부패는 역사적 부정과 불의에 대한 국민적 정리를 하지 못한 실패의 되새김이며, 이의 여아한 정리만이 외부의 시선이 지적하는 한국사회의 기형적 부패의 고리를 끊는 시작이 될 것이다. 일제의 유산을 물려받은 민족배반의 세력들이 여전히 이 땅의 지배권력자로 군림하며 역사를 부정하고 친일을 미화하는 불의한 시간에 우리들은 서있다. 일제와 해방후 국가 행정권력을 쥔 친일집단은 노조파괴와 노동운동가 개인에 대한 테러를 정치적 목표로 하여 자신들의 이익과 권력을 확대하는 데 몰두한 세력들이다, 이들이 곧 오늘의 엘리트 카르텔이라는 국민을 등쳐먹는 세계에서 찾기 힘든 희한한 부패 형상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그의 1989년 방북에서 영등포가 고향인 북한의 한 노인과의 대화로부터였다고 구상하게 된 연유를 밝히고 있다. 대동강변에서 들려주던 철도 기관수였던 노인의 월북과 군수물자를 수송하다 돌아오지 않은 아들의 이야기는 이렇게 거장의 30년에 걸친 집필의 노고로 독자의 눈앞에 놓였다. 그리고 그 강렬한 서사는 이 땅의 백여 년에 걸친 핍박받는 노동자들의 삶의 노정을 거쳐 그 뿌리를 드러내 여실하게 이 사회의 실체를 보여준다.

 

이것은 오늘 기묘하게 신자유주의의 자본탐욕과 일제부역자들과 그 후손들의 역사부정과 맞물려 괴물스런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작품의 초판이 출간된 2020년에서 4년이 흐른 2024, 소설 속 이야기를 더욱 현실적 문제로 극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환경으로 변하였다. 한국인의 삶의 역사에서 일제부역자의 민족 배신행위를 망각하는 것은 국가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짓거리고, 또한 인간 존엄성에 대한 부인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고공농성을 하는 노동자가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의 세상에서 노동자 삶의 조건은 결코 달라진 것이 없다는 말이 될 것이다. 아주 느리지만 이 변화의 속도를 조금은 빨리할 방법이 있을 것이다.

 

 

※ 우리 한국민의 역사적 정서를 대표하는 문학거장, 황석영 작가의 부커상 수상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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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나는 사랑에 목말라하고 있는가 보다. 계절이 바뀌는 까닭일까? 부쩍 사람의 마음이 그립다. 그러다보니 읽는 책들의 글마다 마음, 손길, 친구, 선한 영향력, 동고와 같은 단어들에 시선이 붙들려 꼼짝하지 않곤 한다. "모든 참되고 순수한 사랑은 동고(同苦)이고 동고가 아닌 모든 사랑은 사욕이다." 라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4의지로서의 세계에 대한 제 2고찰의 한 문장이 그 시작점이 될 것 같다.

 

예스런 동고(同苦)’라는 단어를 말하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의 사유로부터 우리 인간의 모든 고민과 고통을 읽는다. 그가 말하는 의지(wille;意志)란 인간의 욕망에 따라 통제, 지향할 수 없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그것 자체로 존재하게 하는 힘을 의미한다. 때문에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목적 없는 충동인 이 의지를 인간은 다만 오감으로 직관하여 파악할 뿐인 표상으로서 이해할 수 있을 밖에 없다.

 

이 목적 없는 움직임인 의지를 이해하지 못함으로 인해 야기되는 인간의 모든 번민과 고통은 바로 타자인 개체가 바로 의 의지의 표상에 불과함을 인식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착각이라는 것을 수시로 망각하곤 한다. 타자인 실재와 내 의지의 표상과의 불가피한 간극, 그로부터 출현하는 서로 다른 의지들의 충돌로 갈등하고 적대한다.

 

우리 인간 모두는 의지의 현상체에 불과한 것을, 의지에 어쩔 수 없이 좌우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인 것을 이해하게 된다면 우린 서로 애틋하게 바라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람의 성정을 뜻하는 '동고(同苦)'야말로 모든 참되고 순수한 사랑의 유일한 동기라 말할 수 있는 것일 게다. 모든 존재가 의지의 맹목성에 좌우되기에 고통에 시달린다는 것을 인식할 줄 아는 삶의 의지에 대한 통찰이 아무렴 요구되는 즈음이다. 사실 안다고 해결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각성하고 의지로부터 자유, 의지의 부정으로 나아가는 평정의 길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치열한 자기 성찰의 길은 가까우면서 한없이 멀게만 느껴지기도 한다,

 

이제 얼추 나이든 세대에 속하게 되면서 내 삶에서 친구나 신의(信義)의 자리에 고작 메마른 성()이나 자리를 차지하고, 게다가 우정은 동성애라는 의심의 눈초리로까지 변질되어 우정이 발 딛을 공간이 극히 협소해졌음을 느끼게 된다. 사람간의 유대를 점점 상실해가는 지금, 내 주변의 공동체는 부쩍 약화되어가고, 동고의 연민은 극단적으로 희소해졌음을 체감한다. 18세기 실학자 이덕무는 청장관전서63권에 이렇게 쓰고 있다.

 

"마음에 드는 계절에,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나,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에 드는 글을 읽으면, 이보다 더한 즐거움이 없다. 하지만 이런 기회가 얼마나 드문지! 일생을 통틀어 몇 번이나 올까?"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지성과 사랑, 아름다움과 윤리가 함께 어우러진 벗과의 이 드문 교류를 '최상의 즐거움'이라 말했다. 오랜 굶주림으로 팔 만한 물건이라곤 맹자일곱 권이 전부였던 청장관은 이를 팔아 밥을 실컷 먹고 희희낙락하여 벗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을 찾아가 자랑한다. 이 말을 들은 영재(冷齋, 유득공)또한 굶주리고 있던 터라 좌씨전을 팔아 술을 사다 함께 마시며 이렇게 맹자와 좌구명을 칭송한다. "맹자가 친히 밥을 지어 나를 먹이고, 좌구명이 손수 술을 따라 나에게 권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소.(간본아정유고6)"

 

찾아 온 벗을 대접할 길 없는 가난했던 영재의 마음이나, 책을 팔아 밥을 먹었다는 거짓없는 삶의 얘기를 들려주는 청장관의 스스럼없는 대화가 그들이 아끼는 책의 이야기와 어울려 삶과 우정이라는 그 소소한 일상의 진의를 엿보게 해준다. 이것이 동고이고 사랑이 아니라면 그 무엇을 사랑이라 할까?

 

중국 공푸전옌 영화사 부사장이자 신시대 여성을 대표하는 후이구냥(輝姑孃)은 의기소침해진 우리들이 결코 혼자가 아니라고 말하며, 세상은 몰래 당신을 응원하고 있다.”고 사방팔방 온통 장벽으로 막힌 듯 어떤 돌파구도 찾지 못해 좌절과 체념으로 포기와 죽음같은 나락으로 떨어진 우리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준다. 우리들이 미처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곳에서 응원하고 부축하고 기도해주는 누군가가 반드시 있다는 믿음의 존재함을 강조한다.

 

그것은 어느 날 무심히 내민 손길이나 신경 쓰지도 않던 평범한 말 한마디가 우리의 영혼을 두들기고 구원의 한줄기 빛이 되어 용기와 희망의 언어가 되어준다는 것이다. 세상은 어쩌면 전혀 기대치 않는 때에 우리에게 온기를 보내고, 고통스런 인생을 바꿀 용기를 주어 그 자신을 증명하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라는 개체를 중심으로 세계를 생각하고 자신의 구현된 의지만을 긍정하려 할 때 얼마나 무시무시한 오류, 오판을 저지르는가? 내 외로움은 어디선가 응원하고 있을 또 다른 의지의 이해로 위안을 받는다. 고작 표상에 붙들려 갈구하는 이 척박한 외로움에 대한 소박한 이해가 나의 걸음에 용기를 불어넣는다.

 

불현 듯 "추론이라는 것은 대부분 우리가 믿고 있는대로 계속 믿기 위한 논리를 찾는 과정일 뿐이다."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한없이 우호적인 환경 속에서도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생각으로 바꾸기는 사실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아마 나는 서로 다른 의지의 소산인 그 분개하는 마음을 알기에 오히려 내 마음을 걸어 잠그기 일쑤였던 것 같다. 아마 내 믿음이라는 자존감을 형성하는 근본 축의 훼손을 방어하기 위한 무의식적 행동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인간관계에 대한 힌트를 제공한다. 이를 반대로 투영하는 것이다. 타인의 자존감을 존중해주어 그의 믿음이 훼손당했다고 생각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동고일 것이다. 상대의 의견을 진심으로 인정하는 것, 공감이라는 우호적 존중은 곧 친근감으로 돌아오고 그럼으로써 상대가 자신의 의견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와 관대함으로 이어지고, 급기야 자신의 추론을 변경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낸다는 것. 우리 인간의 신념이란 수많은 약점을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다, 이를 인정한다면 우리들은 서로 동류(同類)에 대한 연민을 바탕으로 한 관계를 마련해 낼 수 있지 않을까?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듯, 사랑을 찾기 위한 내 인식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선한 영향력을 주고 우정을 쌓는데 인간의 생래적 취약점을 어루만지는 능력을 갖는 것이 당연히 그 시작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들은 분명 나만 모르는 비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조금은 어제보다 나은 세상이 펼쳐지기를 기대해 본다. 서로의 마음이 부둥켜안고 어루만져주는 그런 동고의 세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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