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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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의 중심 인물은 열일곱 소년 이며, 마흔다섯 중년이 된 이다. 열일곱 와 열여섯 소녀인 가 만든 도시, 높은 벽과 망루, 오래된 꿈들이 있는 도서관과 그곳에서 일하는 너의 모습, 둘이 쌓아 올린 하나 됨의 믿음이 이루어 낸 것이다. ‘는 네가 있는 곳, 자신의 그림자와 분리되어 도시의 벽 안() 도서관에서 꿈을 읽는 이가 되어 살고 있다. 아마 이것이 이 소설의 관문이자 핵심 설정일 것 같다. 단단히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그리고 그림자를 잃고 사는 사람들’, 드디어 하루키만의 고유한 세계, 소위 하루키 월드라 불리는 세계로 입성한 것일 게다. 그런데 벽과 그림자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작가는 후기(後記)에서 언젠가 적절한 시기가 오면, 1980년 한 문예지에 발표했던 동명의 조금은 긴 단편 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장편으로 송두리째 고쳐 쓸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쓰고(2020~2022) 있다. 이 문장이 이 소설의 감상을 나름 정리하는 데 하나의 단서가 되어 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 세계는 대략 년 여에 걸친 팬데믹으로 단단한 방벽을 세우고 어떠한 해()도 침투할 수 없는 빈틈없이 견고한 폐쇄적 장소를 만드느라 분주했다. 그리고는 이젠 그 심리적 벽마저도 서서히 제거했다. 어쩌면 작가에게 전 인류적 이 사건은 40년 넘은 소설을 마무리할 단서가 되었을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이 작품의 벽으로 싸인 그 견고한 폐쇄적 도시를 하나의 완결된 완전한 영역으로까지 이해한 것은 아니다.

 

칼끝조차 들이밀 틈이 없는 소설 속 도시의 벽은 도시를 대단히 기교적이고 인공적으로 균형을 정묘하게 지켜내고 유지하는 장치로 빈틈없이작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내부의 잔존하는 역병의 씨앗까지 막아내지는 못한다. 묘사되는 도시는 견고하고 자기 완결성을 유지하기 위한 폐쇄성에도 몇몇 약점을 지니고 있는데,  아침저녁으로 출입하는 단각수들의 번식과 도태를 통한 에너지의 균형 유지, 웅덩이라는 심리적 울타리라는 공포심의 이용으로 내부단속과 외부유입의 차단을 위한 폐쇄 시스템 그 자체인 내부 취약성의 불가피함을 드러낸다.

더구나 내부에 잔류하는 마음의 잔향들, 혹은 역병의 씨앗’”이 야기할 두려움을 가라앉히고 소멸시킬 장치로 꿈 읽는 이가 오래된 꿈들을 읽고 그것들의 감정에 공감하며 존재의 안정을 도모토록 하는 역할을 하여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벽의 완전성, 도시의 자기 방호 또는 벽의 견고함은 불확실한 것이다. 어쩌면 하루키 월드로 불리는 다분히 컬트의 성격을 지녔던 폐쇄적 공간은 팬데믹을 경험하며 열린 시스템으로 변화를 겪고 있는 듯 보인다. 결국 자신의 그림자만을 탈출시키고 도시에 남기로 결정한 의 의지와 관계없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도시 밖 세계로 돌아 온 것처럼 철저하게 차단된 폐쇄적인 벽, 도시 안의 그 어떤 존재도 밖으로 되돌아 갈 수 없음에도 그는 벽을 통과해 돌아온 것이다. 이것은 무얼 의미하는 것일까?

 

도시는 불필요하고 해로운 것으로 간주된 본체는 벽 바깥으로 추방하여 그림자들이 안락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그 어떤 틈도 없이 완전히 폐쇄된 완결성의 장소라는 점에서 는 꿈을 읽는 이로 부적합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제아무리 견고한 벽이라도 완전한 것 따윈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벽이라는 안과 밖을 차단하는 폐쇄 장치라는 것이 본래 불확실한 것이라는 의미일까? 사실 우리들 마음이나 도시의 안정과 평화는 항상 위태로웠으며, 어딘가 그 견고함에 대한 결여를 지울 수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자기 완결의 폐쇄 시스템이 작동하는 이상적 지대라는 것이 결코 완전하지 않음을 말하려는 것일까? 그도 아니라면 와 함께하기 위해 마련된 또 다른 세계를 마주함으로써 삶의 가능성으로서 무한한 선택의 열림이 충족되었기 때문일까?  아마 이 모든 답변을 포함하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닫힌 체계로 작동하는 벽과 도시의 불완전성에 대한 은유로서의 이야기와 병행하여 또 하나의 줄기가 집요하게 내 생각을 떠나지 않았는데, 열일곱 소년과 열여섯 소녀가 숙성시킨 사랑의 감각이자 관념이다. 벽돌을 긴밀히 쌓아올린 벽의 도시는 소녀가 들려주고 소년이 받아 적은, 두 사람이 만든 도시이다. 뭐든지 전부, 네 것이 되고 싶어. 너와 하나가 되고 싶어,”라는 열여섯 소녀 의 말처럼 열일곱 소년 의 풋풋한 사랑으로 가없이 충만해 가지만 는 어느 날 와 이 세계로부터 그 어떤 흔적도 없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고립감으로 황폐해진 이 세계에서 너의 본체가 있다고 했던 도시로 존재의 하나 됨에 대한 그 절실함이 를 절로 이끈 것이리라.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현실 세계에 돌아 온 나는 순수하고 절대적 관념으로서 너와의 심적 유대의 상실에 대한 고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나는 너의 존재, 너의 이야기, 너의 모습을 마음에서 떠나보내지 못한다. 열일곱 살 때부터 이십 삼 년에 걸친 기다림, 침묵과 무()만이 흐르는 공허의 시간이 흐르고 마흔 다섯 살 는 출판 유통분야의 일을 떠나 새롭게 전환할 요구를 느낀다. 오랜 직장을 그만두고 전형적 지방 소도시인 후쿠시마 현 Z**마을의 작은 도서관에 관장으로 자리를 잡는다. 단각수와 벽 등 이 소설과 소재에서 무척이나 닮은, 소위 하루키 월드를 연 작품으로 지칭되는 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는 사랑이 없으면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이 있다. 그가 잃어버린 것은 사랑일 것이다. 마을 도서관은  다름 아닌 잃어버린 마음을 받아들이는 특별한 장소 된다. 이 작품을 나와 너의 심적 유대, 사랑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까닭이다.

 

는 유령인 전임 관장 고야스와 초월적 만남을 가진다. 인생을 자기 자신, 즉 본체로 실감하지 못하고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토로하는 에게 고야스는 본체와 그림자는 상황에 따라 역할을 맞바꾸기도 하는 것이라며, 그럼으로써 역경을 뛰어넘어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라고, 본체와 그림자의 표리일체를 말하며 를 도서관의 소소한 새로운 생활이 마치 상쾌한 바람이 불고 간 것처럼 물이 흐르듯자신의 몸과 영혼의 일체감을 느끼게 한다. 고야스 또한 사랑했던 자신의 아내와 어린 아들의 죽음이라는 깊은 상실을 지닌 인물이고, 그로부터 나는 삶과 죽음의 세계, 본체와 그림자라는 존재의 실재에 대한 영혼의 깊이를 더해 나간다.

 

휴관일인 월요일이 되면 는 고인이 된 고야스 관장과 그 일가의 묘소를 찾아 반향 없는 물음들과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 놓는다. 그리고는 마을의 역 근처 커피숍에서 30대 여인의 친절한 응대와 함께 한 잔의 커피와 머핀을 먹으며, 둘 만의 유대를 쌓아 나간다. ‘는 열일곱 소년이 했던 사랑의 기운을 느낀다. 바로 잃어버린 마음을 들어주고 기다려주는 공간에서 새로운 사랑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리라.

 

사랑의 이야기는 이렇게 인물을 달리하면서 다시금 이어지는데, 이 사랑은 더욱 확장되어, 도서관에 종일 무섭게 책을 읽어나가는 일종의 서번트 증후군의 소년에 대한 공감으로서의 사랑에 이른다. 아버지의 냉혹함, 어머니의 분별없는 집착, 이 세계에 대한 단절감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찾으려는 아이는 의 벽으로 싸인 도시에 이르는 길을 묻는다. 이윽고 무언가를 강하고 깊게 믿으면 스스로 나아갈 길을 절로 뚜렷하게 찾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처럼 소년은 어느 날 사라져버린다. ‘는 하나의 자립한 도서관이 될 수 있는 궁극의 개인 도서관인 소년이 꿈 읽는 이로서 적절한 존재임을 생각한다. 현실과 상상적 공간을 넘나드는 이 야릇하게 공존하는 세계는 벽 안의 도시에서 두 사람을 만나게 한다.

 

는 꿈을 읽는 이로 도시의 도서관에서 소년의 영혼을 받아들여 오래된 꿈들을 읽어나간다. 소년은 로부터 공감의 지혜를 받아들이고, 나는 소년의 도서관적 능력으로 속도를 높여나가지만, 소년에게 꿈 읽는 자의 역할을 승계하곤 이 세계로 돌아온다. 여기서 어럼풋 도시와 벽 바깥 이 세계의 불가피한 공존을 발견한다. 벽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상대에 따라 견고함을 달리하고 형상을 바꿔나간다.” 벽 안의 도시는 이 세계와 불화하는, 혹은 이 세계에서 자신의 의지 실현이 불가능한 이들에게 가능성의 공간으로 열린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그리고 이 세계 또한 존재들이 사랑을 꿈꾸고 그를 실행하는 감각의 세계로서 또한 가능한 세계로 존재하고 있음을.

 

그래서 의 도시로부터 이 세계로의 귀환은 커피숍 그녀의 불안이 사라지는 그날에 대한 기다림이라는 배려로서의 또 다른 사랑의 완성에 대한 기대를 하게한다. 만일 도시의 벽이 제목처럼 불확실한 것이라면, 그 어떤 높은 벽도 마음의 날갯짓을 막을 수 없다.”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처럼 우리들 마음의 단단한 벽의 그 폐쇄적이고 인위적 장벽을 허물거나 통과할 수 있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치밀하게 쌓아 올린 도시의 벽이란 영혼이 앓는 역병일 뿐이니 말이다.

 

우리들의 마음이나 사회는 모두 그 자체로 굳건하고 완결성을 지향하는 견고한 폐쇄적 체계에 대한 이끌림이 있다. 외부로부터의 그 어떤 유해한 침범을 차단할 수 있는, 그러나 이런 체계는 그 울타리 속 존재들의 자생적 이탈에 대한 불안, 벽의 불완전성에 대한 끊임없는 두려움을 단속해야 한다. 어쩌면 이러한 의미에서 와 이 세계가 쌓아 올린 벽은 불완전성을 이미 배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늘 우리 개인들과 사회는 이러한 벽을 수시로 둘러쌓곤 한다. 전염병으로부터, 나와 다른 이질성의 그 무엇이 들어오는 것을 차단하고, 내부의 순결성을 주장하려 하지만, 그 견고하게 둘러친 인위적 벽의 균형은 항상 그 안정성을 잃기 마련이다. 이것은 우리네 마음속 벽의 존재와 부재는 우리 스스로에 달려있다는 의미로 다가오기도 한다. 불확실한 벽은 그래서 우리에게 돌아 올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심리적 경계로서 유연한 무엇이 되어야 함이기도 할 것이다. 현실과 비현실의 세계를 마구 넘나들며 자신만의 세계를 무한히 확장해 나가는 견고하지만 통과 가능한 삶의 선택지인 열린 도시의 벽으로서. 사랑과 믿음, 잃어버린 마음을 받아들이는 도시로서. 아마 이로써 하루키 월드의 그 닫힌 컬트의 세계는 이 세계에 활짝 열린 또 하나의 가능한 세계가 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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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 스펙트럼
신시아 오직 지음, 오숙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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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이 세계에 일어난 비극적 사건에 있어서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수시로 망각하고 동료 인간을 무심히 타자화(他者化)한다. 그리곤 그 타자들을 마치 인격 없는 비인간의 망령된 기표로 명명하곤 한다. 통계화된 수치로, 생존자로, 증언자라 부르며 자신들과는 다른 존재자로 구분하거나, 거기에 온갖 형용사로 수식하여 신성한 무엇으로 포장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삼기도하며, 관음증적 호기심의 충족 대상으로 하기도 한다. 또한 자신들만은 짐짓 대단한 연민을 지닌 존재라도 되는 양 형식화된 애도의 흉내를 내거나, 높은 도덕성을 과시하는 언어 도구로 이용하기도 한다.

 

사실 5.18 광주나 제주 4.3사건의 희생자의 추도와 같은 아픈 역사의 환기에 있어서조차 이러한 양상은 여전히 비일비재하게 출현하여 고인과 그 유족들을 모욕하거나, 어설픈 연민에 동참했다는 거짓 위안의 도구가 되어버리곤 한다. 이러한 모습들은 우리 스스로 경계해야할 것들이지만, 어떤 이름으로도 환원할 수 없는 이러한 반역사적 돌발 사건들을 표현한다는 것은 실로 조심스럽고 진중을 요구하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소설이나 여타 글이 이들을 소재로 삼을 때, 자칫 사건을 하나의 지식이나 사회적 방편의 사례를 위한 수단화하여 망각이나 주류사회의 동일성의 관념으로 통일하거나하여 사회 내부의 도덕적 변화 동력을 훼손할 수도 있다. 예술 또는 학문이거나 정책이거나 그 무슨 명분을 앞세우더라도 그것이 대상 사건 관련자들의 인간 조건을 도외시하는 것일 때, 우리는 우리들이 인간성이라 부르는 것에 의심을 초래하게 된다.

 

현존하는 미국 최고의 단편소설 작가로 불리는 신시아 오직’(Cynthia Ozick;1928~ )로사, 두 편의 소설은 홀로코스트의 악행이 저질러지는 공간에 있었던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기에, 장황한 사설을 앞세웠다. 이 소설 속에서 홀로코스트’, ‘희생자’, ‘히틀러’, ‘폭력’, ‘유대인 학살과 같은 단어를 발견할 수 없지만, 등장인물들의 행위와 그들이 마주하고 있던 상황의 간결하고 농축된 언어만으로 그 참담함과 사라진 인간성으로 우리를 이끈다. 거대한 폭력의 힘에 의해 지워지고 숨겨진 것들의 역사화를 둘러싼 그 어떤 상기(想起)도 이 작품을 넘어서지 못할 것 같다.

 


단편 (The shawl)

 

스텔라는 추웠다. 뼛속까지 추웠다. 지옥인가 싶은 추위였다. 그들은 함께 걷고 있었다. 로사는 젖가슴 사이 숄에 둘둘 싸인 마그다를 웅크려 안고 있었다.” -11

 

소설의 첫 문단이다. 세 명의 등장인물이 모두 드러나 있으며, 그들이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짐작이 가능한 문장들이다. 이 소설은 무척 짧다. 이 첫 문단처럼 압축된 언어로 구성된 이 작품은 어지간한 장편소설을 능가하는 이야기와 의미를 품고 있다. 때문에 한 문장 한 문장의 강렬함은 가히 압도적이다. 로사는 아기 마그다의 엄마이고 조카인 스텔라는 열다섯 소녀다. 그들은 사흘 밤낮을 굶주린 채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다. 아기는 로사의 숄을 요람삼아 그 속에서 이미 메마른 젖꼭지를 빨고 있다. 이미 말라버린 로사의 젖꼭지에서는 젖 냄새조차 풍기지 못하고, 죽은화산처럼 싸늘한 구멍 뿐이다.

 

마그다는 이제 숄 모서리를 대신 붙잡고 빨아댄다. 리넨 젖이었다. 마그다에게 숄은 안전한 둥지이고 작은 집이며, 양분인 마법의 숄이 되었다. 로사는 그렇게 아기를 숄에 담아 가슴에 숨긴 채 수용소에 들어간다. 밀집된 지옥같은 수용소는 너무 춥다. 스텔라는 너무 추워 숄을 빼앗아 자신의 몸을 감싼다. 막사 밖 광장 점호 구역으로 뛰어나간 어느 날, 숄을 감싸 벽 뒤에 숨겨 세워두면 소리없이 숄 모퉁이를 빨고 있던 마그다가 점호구역의 햇빛 속에서 몸을 흔들며 움마아--를 부르짖고 있다. 들키면 아이는 죽을 것이다. 로사는 주저하다 막사로 뛰어들어 숄을 찾아내지만 이미 늦었다. 마그다는 누군가의 어깨위에 들려 저 멀리 가고 있다. 이윽고 마그다는 전기 철책위로 던져진다. 로사는 뛰어가 아기를 안아들어야 하지만 그들이 총을 쏠까봐 감히 달려가지 못한다.

 

그녀의 뼈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늑대의 울부짖음을 토해냈다가는 그들이 총을 쏠 테니까, 로사는 마그다의 숄을 쥐고 입에 쑤셔넣는다. 울부짖음을 삼키게 될 때까지. 이 참혹한 광경이 소설이라는 예술적 장치에 의해 아름답기까지 한 것이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 그래, 이 관능적 장면을 단지 이야기의 재미로 소비하는 것을 경계하라는 작가의 경고였는지 모르겠다. 인간의 역사에는 이렇게 인간존엄과 생명윤리가 부정되고 수시로 파괴되곤 했다. 우리들은 이러한 역사를 너무 자주 잊어버린다. 우리 안일한 내부의 이탈을 촉구하는, 그래서 우리 내부를 끊임없이 동요시키는 이야기들을 멈 출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단편 로사

 

의 속편이 랄 수 있겠다. 자신의 아기, 마그다의 죽음에 달려가지 못했던, 어떠한 애도조차 하지 못했던 어머니, 로사는 해방되어 미국으로 조카 스텔라와 건너왔다. 시간적 배경은 30년이 지난 어느 시점인 듯하다. 스텔라가 마흔 아홉이고, 로사의 말로 자신의 나이는 쉰여덟이라는 말로 추정하면 대략 그럴 것이다. 로사는 꾸려가던 가게를 자기 손으로 때려 부수고 가게를 접었다. 그리고는 뉴욕을 떠나 태양에 튀겨져 껍데기처럼 살아가는 노인들이 득실거리는 마이애미의 컴컴한 구멍이나 다름없는 방에서 살고 있다.

 

로사는 과거의 쓰레기로 살아가는 미친 여자 취급을 받는다. 그녀는 최악은 그야말로 최악이니, 그 후로는 최악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 더 많은 최악의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스텔라는 고모인 로사에게 이제 그만 과거를 잊을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삶을 찾아야 한다고. 더 이상 마그다의 강보, 마그다의 수의, 일어버린 아기의 거룩한 향기, 살해당한 아기에 입 맞추고 눈물 흘리는 일을 멈추라고.

 

그러나 로사는 스텔라를 심장이 없는 죽음의 천사, 얼마 전에 벌어졌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치매환자라 부른다. 로사는 이 세계가 진실을 도둑질하고, 거짓말에 보상을 주는 천박하고 혐오스런 곳으로만 보인다. 과거를 모두 두려워하고 예전 존재의 모든 흔적을 모욕으로 아는 스텔라를 동반자로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세계는 로사를 이렇게 묘사한다.

 

감금, 노출, 영양실조로 인한 스트레스가 오랜 기간 지속된 환자이며, 인도주의 맥락에서 수집하는 생존자 데이터이고, 억눌린 활기를 가진 조사 대상자일 뿐이다. 로사는 이에 대해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흥분”, “평범한 무리와 따로 셈해지는 존재, 더구나 한 여성으로 보지 않고 생존자라 부르는 비인간화를 비난한다. 누가 이런 단어를 지어냈을까?, 고통의 목구멍에 붙은 기생충같은 단어를!”

 

로사는 죽은 아기 마그다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그녀만의 애도 방식이지만, 주위 사람들에겐 미친 짓으로 보일 것이다. 마그다에게 보내는 두 편지가 기록되고 있는데, 이 편지는 폴란드 바르샤바 출신의 유대인인 친절한 노신사의 자기와의 화해, 세상과의 화해를 향한 노력과 함께 마그다를 그녀의 세계로부터 떠나보내는 과정으로, 로사가 결코 세계를 비난하기만 하는 인간이 아님을 발견케 한다. 오늘 우리들은 역사의 이성이 무능력한 영역에 대해 알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안주에서 결코 밖을, 가려진 곳을 보려하지 않는다. 한 인간의 순수성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는 것 같다. 로사에게 푹 빠져 읽었다.

 

우월한 위치에 선 방관자적 시선으로 바라보며, 우리들은 빈번하게 터무니없는 언어를 만들어내고, 무례하고 천박한 말들로 존재를 무시하며, 잔인성을 내보이기까지 한다. 신시아 오직의 이 소설들을 지나치게 재미있게 몰입하여 읽었는데, 어쩌면 작가의 예술적 역량의 탁월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겁기만 한 의제를 가볍게 조탁해낸 작가의 솜씨에 빠져든 것은 결단코 무지의 연민 때문은 아니라고 변명하련다. 내겐 새로운 작가의 발견이고 입문이다. 이 대가의 황홀한 픽션들이 거듭 소개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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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죽음 알베르 카뮈 소설 전집 5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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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사가 끝나버리면 생의 갈등도 사라진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의 슬픔을 느끼며그로 인하여 더 많은 사랑을 느낀다.

그렇다, 그것이 아마 행복인지도 모른다

, 우리의 불행을 측은히 여기는 감정 말이다.

- 안과 겉,긍정과 부정의 사이, 책세상, 200912, 개정15, 52


소설 행복한 죽음(La mort heureuse)은 카뮈의 초기작을 대표하는 이방인에 앞서 써진, 작가가 생전에 결코 발표하지 않으려했던 작품이다. 구성의 미숙함과 산만하게 열거된 에피소드들, 한 청년의 방황과 일상의 실체가 그대로 투영된 글이기에 전기적 이해에 귀중한 작품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론 내적 고백에 가까운 이 글은 그대로 묻어두었어야 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도 하다. 살아있는 자들의 그 무한한 호기심이 작가의 사후 10년이 지나 세상으로 나오게 했다. 문학적 자료로서의 가치란 것이 한 인간 존재의 의지보다 과연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아무튼 이 작품은 이러한 상념 속에서 읽게 되었다.

 

모두(冒頭)에 카뮈의 첫 출간작인 에세이 안과 겉의 한 문단을 인용한 것은 이 소설이 1937년 동일한 시기에 쓰여진 글이기도 하거니와, 주제의 동일성 때문이다.  당신의 유일한 의무는 사는 것, 행복해지는 것입니다.”라는 자그뢰스가 메르소에게 전하는 한 문장이 어쩌면 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라는 생각 때문이다. 결국 생의 유일한 의무인 행복을 완수한 죽음, 그것을 명징하게 의식하며 죽음에 이르는 것이 곧 행복한 죽음에 대한 내 조악한 이해가 될 것 같다. 작품은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는데, 각각 자연적인 죽음의식적인 죽음이라는 부제가 달려있고, 읽어나가며 이 제목들이 아주 역설적인 뉘앙스를 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자연적인 죽음은 메르소가 하반신을 잃고 타인의 도움에 의해서만 살아갈 수 있는 자그뢰스란 인물을 살해한 그날의 행위와 그에 이르는 두 인물의 대화와 회상들이다. 삶의 의지와 행복의 의지, 그리고 죽음에 대한 사변적 이야기들을 따라가며 세계와의 합일, 인간들로부터의 해방에 이르는, 추구되는 행복한 죽음의 완성이란 어떤 것일까를 생각해볼 수 있다. 단순하면서도 결코 그렇지만은 않은 삶과 죽음에 대한 고뇌에 사로잡혀있는 인물에서 오히려 나는 카뮈의 현실, 스물다섯 무렵의 프랑스 식민지 지중해 연안 알제의 청년을 생각했다.

 

소설에는 그의 현실 경험 속 인물들이 역할을 달리하여 등장하고, 그의 일기와 작가노트에 기록되었던 실제의 역사가 도처에서 허구와 현실을 넘나들며 달리고 있다. 그의 기억, 그의 삶의 실체를 잡아매고 있던 어린 시절, 리옹가()의 하층민들이 거주하는 벨쿠르에서의 지독히 가난한 냄새에 대한 애착, 적어도 자신과 접할 수 있었던 그 너저분하고 인내를 필요로 하는 대결의 슬픔과 회한 속에서 되돌아오는 자신의 발견으로서의 장소에 대한 정경들이 있으며, 프라하 골목길에서 그의 마음속에 잠겨있던 모든 고통의 힘을 깨어나게 했던 냄새의 정체, 식초에 절인 오이가 불러내는 어머니와 둘만이 느꼈던 광대한 기억이 있고, 어머니의 침묵, 그 기이한 어머니의 무관심!에 깃들어있는 세계의 모든 부조리한 단순성의 의미 연결을 발견할 수 있다.


나에게로 올라오는 것은 보다 나은 날들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나 자신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차분하고 원초적인 무관심이다.”라고 메르소는 말한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명철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모든 것은 단순함이라는 명징성임을 확신한다. 그 명징성과 단순성은 사형 받은 자를 가리켜 말할 때,   그는 사회에 대하여 죄 값을 치르려 하고 있다.“는 불분명한 말이 아니라 그의 목이 잘리게 될 것이다.”가 되어야 함이라 말하듯, 그는 세상에는 자기 운명을 똑바로 마주 보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라 말한다.

 

이 문장으로부터 그의 생 혹은 예술가로서의 삶에 대한 치밀한 의지와 계획이 이미 수립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기 운명을 마주 보기를 좋아하는 사람 내 흥미를 끄는 경험은 모든 것이 바라는 대로 되어가는 경험들이거든요.”라고, 의사 베르나르에게 재단해 놓은 운명에 대해서 말하기도 한다. 급기야   한 인간의 문명이란 열정적으로 걸머지는 경우에는 언제나 흥미진진한 법이죠. 한데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 흥미진진한 운명이란 미리 재단해 놓은 운명이죠.”라는 이어지는 문장에서 무언가 훅 하고 명치를 들이미는 당혹감을 느꼈다.

 


메르소가 살해하게 되는 자그뢰스는 메르소가 사귀고 있는 마르트의 한때의 연인이었기에 만나게 된 인물이다. 메르소는 마르트와 영화 관람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메르소는 마르트의 분방한 남자관계에 대해 질투심을 느끼며 망상에 빠진다. 그리고는 불쾌한 망상에서 문득 깨어나 스크린 속에서 자동차가 전복되면서 고요한 가운데 오직 바퀴 하나만이 계속해서 천천히 돌아가고 있는 장면을 바라본다. 고집스럽게 허전하면서 사나운 마음속에서 생긴 수치와 모욕감을 함께 이끌고 돌았다고 심정을 묘사한다. 이 문장을 미리 재단해 놓은 운명과 연결 짓게 되면, 카뮈가 그의 문학적, 정치적 반대진영에 의해 무참한 시련에 놓여있던 고뇌와 불의의 자동차 사고를 왠지 우연한 불운의 사건으로만 보여지지 않게 된다. 자신의 작품 집필 순서나 체계는 물론, 행복함이라는 생의 완수를 끝낸 한 인간의 의지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2부 의식적인 죽음은 자그뢰스의 살해와 관념적인 연결고리는 맺을 수 있을지언정, 긴밀한 연속선상의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그 구성상 그리 매끄럽지만은 않다. 그의(카뮈) 에세이 결혼을 구성하는 제밀라의 바람이나 사막등에서 느껴지던 고독과 운명의 정념들, 대지와 인간에 공통된 어떤 울림들이 소설적 구성으로 재등장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는 제밀라의 바람에서 죽음에 대한 나의 모든 공포는 삶에 대한 질투에서 온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고 쓰고 있다.

 

내팽개쳐진 상태로 고독과 마주 대하고 있자니 불쾌한 감미로움이 입 안에 고였다.”라고 소설의 주인공 메르소가 말하듯, 프라하의 골목길을 걷고, 알제의 언덕 꼭대기에 매달린 듯 있던 세 여학생의 집에서의 일상이나, 슈누아에서 마주하는 고독한 삶에서 길어올리는 것은, 당시 카뮈의 경험 세계와 거의 동일한 모습들이다. 가난과 사랑, 여자와 꽃과 미소에 대한 욕망, 이러한 것들은 그의 성장을 이루는 빈곤의 장소, 즉 가장 혐오스러운 세상과 끊을 수 없는 유대의 긍정이며, 바로 그러한 삶과 자신이 공범자임을 소리쳐 말하는 충동으로 터져 나온다.

 

그는 자그뢰스의 살해에 대한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기뻐 어쩔 줄 모르며, 마침내 자신이 행복을 위해 태어난 인간임을 깨닫기에 이른다. 자기 인생에 대한 정당성의 입증, 메르소는 바다에 뛰어들어 비겁해지지 않은 채 자신과 일 대 일로 자기 육체와 대면하여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죽음을 바라보는 실행에 착수한다. 거기에는 오직 행복과 고독의 끝없는 사막이 있을 뿐이라고 되뇐다. 그리고는 움직이지 않은 세계의 진실로 돌아간다.

 

어쩌면 이 소설은 청년 카뮈가  문학예술 행로의 설계를 마쳤음에 대한 자신을 향한 선언이 아니었을까? 가난과 절망, 자신의 병(결핵)이 지속적으로 방해하는 삶의 방해에 대해 끝없이 반항하는 삶에 대해, 그리고 그 반항을 형성하는 것들이 바로 어머니와 함께했던 어린 시절 벨쿠르의 그 어두운 방에서의 절망적이고 슬픈 기억들에 대한 사랑이고, 여인들과 친구들, 그 주위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이 소설은 이후 발표되는 이방인을 비롯한 그의 소설들이 어떤 단계를, 방향을 내딛게 될 지에 대한 예술적 지표로 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방인의 뫼르소가 보여주는 그 무관심과 단순성이 무얼 의미하는지, 또한 인간 삶의 구체적 실체, 즉 인간적 숨결만을 묵묵히 추구하며, 기한이 정해진 미래라는 부조리는 단지 관념 덩어리로서 반항의 대상이지 추구의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페스트의 리외에 가 닿는다.

 

메르소는 말한다. 어떠한 정열이 온통 나를 흥분케 할 것인지 잘 알고 있어요. [...] 지금은 행동하는 것, 사랑하는 것, 괴로워하는 것, 그게 바로 산다는 겁니다. 투명해지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한에서만 그것은 산다는 것을 의미하지요.”라고, 아마 이때 이미 반항 상태라는 삶의 여정을 출발하기로 결정했던 것 같다. 카뮈의 문학 세계를 거니는데 이 작품으로부터 예상치 못했던 이해의 토대를 얻게 되었다.

 

한 친구가 그에게 무심한 어조로 별 뜻 없이 말을 했기 때문에 자살한 것이다.

그처럼 세계의 깊은 의미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를 언제나 감동시키는 것은 이 세계의 단순함이다.”

- 안과 겉책세상, 200912, 개정15, 60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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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 이 소설을 단순 명쾌하게 읽는 법?

 

삶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해요. 그런데 사람들은 참고 견디는 이 여덟 시간의 사무실 근무가 그걸 못하게 막아요. 메르소는 격한 어조로 말했다.” -58


다만 행복해지려면 시간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돈을 버느라 삶을 허비해요. 돈으로 시간을 벌어야 하는데 말예요. 바로 이게 내 관심을 끌었던 유일한 문제였습니다.” - 61, 자그뢰스가 메르소에게 하는 말

 

아마 메르소와 자그뢰스가 나눈 위의 두 대화 문장에 소설의 주제가 모두 담겨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단순화가 될까? 메르소는 행복을 위해서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자그뢰스의 지적에 따라 그를 살해함으로써 자그뢰스가 모아 둔 돈 200만 프랑을 지니게 된다


"그 이튿날, 메르소는 자그뢰스를 죽이고 집으로 돌아와 오후 내내 잠을 잤다." -74

 

메르소는 존재적 무용함인 여덟 시간의 노동으로부터 해방되고, 이후 중부 유럽의 여행과 알제로부터 떨어진 교외지역인 슈누아에서 고독이라는 시간을 만끽한다. 바다에서의 수영, 태양과 꽃과 여자들, 완벽한 시간의 누림, 인생의 유일한 의무인 행복의 완성, 삶의 완성을 이룬 자의 죽음은 행복한 죽음이다? 라는 것.

 

사실 이러한 도식적인 해석으로 읽게 되면 물론 단순 명쾌함이 있지만, 과연 이 소설을 제목에 매여 읽을 필요가 있을까싶다. 오히려 이 작품은 가난한 청년이 자신의 삶과 세계와의 불화를 해결하기 위한 내적 투쟁의 이야기로 읽을 때 더 풍부한 의미들로 살아 날 것 같다. 작가의 문학 여정이 시발점에 놓이기까지의 탐색, 그의 삶에 대한 의지와 문학적 청사진, 작가 경험의 실체와 그것의 문학적 연결 고리들을 읽어나가는 재미가 훨씬 쏠쏠한 소설이 되지 않을까? 특히 이방인의 뫼르소와 비교하며 읽는 재미는 또 다른 독서의 즐거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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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류시화 지음 / 수오서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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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누군가를 원한다. [...]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위해 내 말을 들은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 들었다. 모든 만남의 궁극적인 의미는 조언이나 설교가 아니라 포옹이다. 포옹이 필요한 사람에게 강의를 해서는 안 된다".   - 120쪽에서

  

머릿속에는 온갖 지식을 담고 있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거나 실천하고, 삶의 실천적 의지나 지혜로 실행하는 데에는 미숙하거나 좀처럼 삶의 일상으로 끌어오지 못하는 것이 실상이다. 더구나 좌절과 절망의 고통이나 상실의 슬픔, 이유를 딱히 규명하기 어려운 공허나 우울감에 휩싸일 때면 이성의 작동이 멈추기 일쑤이다. 결코 앎이 삶의 지혜로 전용되지 않는 순간들이 얼마나 많던가? 그럴 때면 내 마음을 마음껏 토로하고 그것을 묵묵히 공감하며 들어줄 누군가가 그리워지고, 또한 따뜻한 포옹이 간절해진다.

 


이 책에 손이 가 닿은 것은 누군가의 감정의 영역에서 공유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였을 것이다.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쩔쩔매는 막다른 길에 서있는 듯한 답답함과 이젠 그만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도주의 심정에 사로잡혀 있었던 까닭이다. 책은 마치 누군가의 목소리를 내내 말없이 경청해주고 있는 듯, 시인과 그의 경험 속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지막하게 흐르며 슬퍼하는 다른 영혼을 토닥인다.

 

우리들은 다른 인간 존재에 대해 얼마나 섣불리 예단하고, 마치 다 안다는 듯 자신이 겪은 사례를 빌어 일반화하고, 공허한 말을 건네곤 하는가. 시인은 상처는 저마다의 고유한 경험이며, 영혼의 일이기에 모두 다른 이름으로 불러 주어야 함을 안다. 섣부른 아픔의 일반화된 말의 진부함이 아닌, “그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이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도록 거기 함께 있어주는 일로서 곁에 누군가의 따뜻한 체온이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나는 시인의 지적처럼  "하나의 모습으로만 굳어져 다른 모습들을 나로부터 제외시켜버린 에고의 고집과 자아집착" 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시인이 인용하여 전달하는 13세기 수피파 시인 잘랄루딘 루미의 시 구절은 이처럼 삶의 바깥쪽에 머물러 있는지도 모른 채 꽃이 피어나지 않는 이유를 외부 세계에서 찾으려 한 내게 빛과 같은 깨우침이 되었다.

 

단단한 봄이 어떻게

정원을 만드는가.

흙이 되라, 부서져라.

그러면 그대의 부서진 가슴에서

수많은 야생화가 피어날 것이다.

.....[後略]......

 

한 가지로 딱딱하게 굳어버린 돌밭에서 그 무엇이 태어날 수 있겠는가, 부서져야 한다. 산산이 부서져 수많은 야생화들이 피어날 수 있는 흙이 되어야 함을. 이렇게 한 가지에 붙들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도 삶의 시간은 덧없이 흘러간다. 마치 삶의 시간이 무한하다는 듯 메여있었으니 기쁨도 사랑도 잊어버린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삶의 기쁨은 이곳에서의 나의 머묾이 유한하다는 지각에서 시작된다. [...]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86)”  유한성과 결여가 바로 지금의 실존에 풍요한 감각을 준다는 이 뻔한 지혜가 잊고 있었던 생의 감각을 일깨워주었다. 어쩌면 이 책의 많은 번뜩이는 지혜의 문장들은 새로워서 라기보다는 정말 우리네 감정의 정곡 언저리를 생생하게 들춰내어 그 바닥의 정서가 체험할 수 있는 영혼에 길을 비추어주기에 고마운 생의 선물이 되어주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 책 속에서 요즘 거듭 마주하게 되는 유사한 문장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시인은 인도북부 마나리에서 출발해 라다크의 라는 소도시에 이르는 여정에서 가졌던 축복의 순간을 말하고 있다. 시인은 아찔한 4,000미터 고산지대 로탕패스(시체가 쌓인 고개라는 뜻)를 지나 5,300미터 타그랑라의 황량한 어디쯤 차를 멈추고 고개를 처 들었을 때, 존재가 무한히 확장되는 느낌,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 너무 놀라 넋을 잃은 한 인간의 형용할 수 없는 환희를 전하고 있다. 내가 열리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시인은 이때 명백한 이것을 여태 보지 못하고 살았음에 후회와 다행의 감정을 오간다. 그래 나를 위한 로드무비를 찍는 여정에 나서 보아야 할 테다. 내 안에 있는지도 몰랐던 그 어떤 힘에 대한 믿음을 위해서.

 

자신에 대한 절망 없이는 자신에 대한 사랑도 없다. 결함은 아름다움으로 가는 통로이다. (204)이 세계 혹은 자아와의 불화로 고통 받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은 기꺼이 그 고통을 단지 생각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실존적 문제로 경청해주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인형을 잃어버린 한 소녀의 영혼을 돕기 위해 허구의 생생한 편지를 지어냈던 카프카의 작고 조용한 도움처럼, 이 책은 슬퍼하는 영혼들에 따뜻한 손을 내밀어 온기를 전해준다. 절벽으로 밀어줘서 날 수 있었다는 시인이 절실하게 갈구하던 그 어느 날의 기록에서 조금은 더 시간을 보냈다.

 

아마 내가 회피하는 것이며, 또한 반드시 처절하게 나를 밀어 넣어야 할 진실이기에 그러했을 것이다. 시인의 시 구절처럼 다친 새처럼 웅크린모든 이에게 시인은 이 책을 통해 손을 잡아주기 위해 그의 손을 내민다. 금 가고 무시당해 숨겨진 자아를 지닌 무수히 많은 이들에 기쁨을 위한 손을 내밀어준다. 그래 인생극장 특별석으로 초대하는 42편의 산문에서 우리는 진정한 인생의 길을 찾기 위해 자주 길을 잃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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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고대 시인의 문장으로 시작된 은유의 정신사가 이 책에 이르게 했다. 배를 난파시키는 사나운 바람이라는 인간 시련의 상징적 은유는 18세기 프랑스인에 와서 양면적 성격으로 변화했다.

 

인간의 정념이란 그 얼마나 불행을 가져오는 걸까요! [...] 그것은 배의 돛을 

부풀리는 바람이네. 돛은 때로는 배를 가라앉히기도 하지만 돛이 없으면 배는 

나아갈 수 없다, [...] 만물이 다 위험하지만 그것은 모두 필연에 바탕하고 있네.

- 18隱者에서

 

호기심이 이끈 독서는 인간 삶의 행복과 불행을 마치 예정된 조화인 듯 주장하는 이야기를 만나게 했다. 사실 이에 대한 시시비비는 사유의 저편으로 몰아내고 이야기 그 자체에 빠져들어 보기로 작정하고 읽었다. 19편 이야기의 연작으로 구성된 이 동화적 작품은 볼테르 자신의 삶의 곡절들과 절대 분리 불가능한 것만 같다. 작품 전체에 흐르는 이야기는 그가 욕망하는 사랑의 기원이 담긴 것 같고, 바로 이 사랑의 성취를 향해 겪어야 했던 불운과 행운의 거듭되는 반전의 사건들 속에서 삶의 동력, 인간 삶의 원천들을 보여주려 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작품의 제목인 자디그(Zadig)는 아라비아어로 진실을 뜻하고, 히브리어로는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모양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자디그 또한 고대 바빌론의 유복한 가문의 고결한 청년으로 성장한 현자이며, 당시 철학에 거슬러 1년은 3654분의 1일이며, 태양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확신하는 인물이다. 18세기 과학적 이성을 대표하는 계몽주의 사상가인 볼테르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분신일 것이다.

 

출처동서문화사 刊, 캉디드,미크로메가스,자디그, 426쪽에서


또한 소설 속 자디그의 궁정 생활에서 서로 사랑하게 되는 모압다르 왕의 왕비인 아스타르테는 그를 살해하려는 귀족세력으로부터 볼테르를 보호해주었던 샤틀레 후작부인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세상의 몰이해와 소외로 고통을 겪던 볼테르를 알아주었던 이 지성의 존재에 대해 바치는 사랑의 서사로 읽을 수도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경쾌한 작품은 가벼움 속에 번뜩이는 삶의 지혜들로 결코 진지함을 잃지 않으며 이야기 속으로 독자를 빨아들인다.

 

집안과 재산까지 고루 갖춘 청년 자디그는 바빌론 최고의 결혼 상대자로 역시 최고의 미인인 세미르와 약혼하여 결혼을 준비하던 중 이에 앙심을 품은 경쟁자 오르칸의 습격을 받는다. 세미르를 지키기 위해 결투하여 약혼녀를 빼앗기지는 않지만 눈에 상처를 입는다. 자디그는 한 쪽 눈을 치유할 수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자 세미르는 애꾸눈 사내는 역겹다며 바로 오르칸과 결혼하곤 자디그를 멸시한다. 자디그는 명문 귀족과 재산을 지닌 종족들에 회의를 느끼고 심성 고운 평민인 아조라와 결혼한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신의 정숙을 드러내놓고 과시하며 그 천박성에 자디그는 친구 카도르의 도움을 받아 시험에 들게 하여 그녀의 역겨운 위선을 스스로 이해토록 돌려준다. 아마 당대 프랑스 궁정사회 귀족들의 문란이 얼마나 기만에 싸여있는지의 비난이었을 것이다.

 

코믹한 이야기들을 이처럼 펼쳐내며, 당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버무려낸다. 그리곤 틈틈이 계몽주의 이성의 요소들인 세계의 현상과 대상들의 특성 연구에 몰두하는 자디그를 보여주며, 그의 이성적 지성이 수시로 광적인 멍청이들에 의해 위협받는 현실을 그려낸다. 그의 예리한 지성은 오히려 마법이라며 화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고발을 받기도 하고, 터무니없는 율법 논쟁을 종결짓자 신성 모독죄로 몰리기도 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에서 오늘의 독자인 우리들은 그네들의 역사적 사실을 조망할 수 있기에 당대에 발생했던 사건들에 대한 볼테르의 비판적 견해로서 읽을 수 있게 된다. 1726년 볼테르를 바스티유에 감금하게 된 명문귀족이었던 발리에 드 로앙(소설에서는 오르칸으로 등장)의 사주를 받은 자들로부터 살해의 위기에 처했던 일, 볼테르를 궁정에서 몰아내는데 안달했던 궁정 권세가 부아예(Boyer)는 글자의 순서만 바꾸어 대주교 예보르(Yebor)로 등장하여 어리석음을 뽐낸다. 지나치게 박식해도 위험에 빠지고, 그래서 입을 닫으면 그것을 문제 삼아 위협하는 세상, 자디그는 외친다.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행복한 자로 불린다는 이유 때문에 시기와 질투로 파멸에 몰리고, 진실이 뜻하지 않게 입증되어 불행은 행운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은 누군가의 행운이 오래 머무는 것을 참아내지 못한다. 행불행은 엎치락뒤치락하며 그것은 어떤 인과관계도 없는 섭리, 신적 질서의 조화로 향한다. 이성의 문제를 가진 것만으로 만족했다.”는 자디그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인간 개체의 운명의 증언에 있어서 섭리라는 숙명성으로 치닫는 것은 아무래도 시대적 사유의 한계처럼 여겨진다.

 

궁정 장관이 된 자디그는 왕비를 사랑하게 되고, 왕비는 왕의 앞에서 무심코 자디그를 빈번하게 칭송하게 된다. 자디그는 친구 카도르에게 이러한 마음을 토로하는데, 친구는 현명하게 자디그를 경고한다. 사랑이란 도저히 감출 수 없는 징후가 있는 법이거든, 자디그, 내가 이렇게 자네의 심정을 읽었는데 왕께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힐 만한 심정을 자네의 마음에서 발견하지 못했을지 생각해 보게. (8질투) ,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이성이 사라지고 존재하지 않는다.

 

이 경고의 말처럼 왕은 자기 눈으로 본 모든 것을 믿었고, 보지 않은 모든 것을 상상하기 시작한다. 이제 의혹은 확신으로 바뀌어나가고, 자디그를 살해하고 왕비를 독살한 준비를 끝낸다. 사랑과 의심, 그리고 증오가 폭발하는 이 이야기는 여느 멜로드라마의 재미를 훌쩍 넘긴다. 왕비가 총애하던 난쟁이 시종의 사전 암시 덕택에 두 사람은 각자 도피의 여정을 떠난다. 이 여정에서 겪는 고초들은 지역마다의 문화와 관습적 차이, 경제적 불균형과 분배에 대한 문제로, 그리고 당시 사제의 신학과 같은 망상에서 생겨난 속임수에 대한 지탄을 통해 과학적 이성에 대한 신념을 이야기의 저변에 도도히 흐르게 한다.

 

이윽고 소설은 사드의 유명한 소설, 쥐스틴, 또는 미덕의 불행에서 유명하게 된 선을 낳지 않는 악은 없다.”고 인용된 원천의 문장으로 이어진다. 이 세계의 모든 현상들에 그 어떤 인과성이란 없다는 것, 인간에게 악으로 보이는 것도 전체 질서 속에선 선의 원천이 된다는 생각, 예정조화설, 섭리 또는 운명에 도달한다. 설사 이것이 세계 원리라 해서, 인간이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아마 볼테르는 여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인간 세계는 엄연히 악행이 있어 타자들을 궁지에 처박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분배는 왜곡되어 극단적인 괴리와 갈등으로 사회적 분열을 만들어내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악인은 몇 안 되는 정의로운 인간에게 시련을 부여하는 데 보탬이 되고 있으니 악을 신의 섭리처럼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면 아마 인간 세상은 벌써 종말을 고하지 않았을까? 어쨌든 이 이야기는 시련과 행운을 오가며, 라이프니츠의 인과성 없는 개체들을 조화로 이끄는 거대한 힘에 대한 삶의 일화를 제시한다. 내겐 볼테르가 이러한 당대의 사변적 성찰을 내세워 자신의 사랑에 대한 기대를 전하려했다는 의혹만이 더욱 짙어졌다. 그래서 소설이겠지만 말이다.

 

바람, 폭풍우가 우리를 난파시키는 악이지만 그것에 의해 우리는 삶의 추진력을 얻는다. 동의하면서도 온전히 수긍할 수만은 없는 반항심이 생긴다. 왜 바다여야만 하는 것인가? 우리는 정녕 바다위에 둥둥 떠다니는 배에 승선한 존재일까? 우리에게 단단한 대지는 더 이상 없다는 생각이 옳은 것일까? 아무튼 나는 요즘 이 모순, 부조리의 불가능한 이해를 이해하려는 부질없는 짓거리를 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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