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태/보편교양
이제는 해프닝이 된 민원 전화를 돌아봤다. 그때 아버님이랑 대화를 잘해서 다행이라고, 어떻게 말씀드렸던 건지를 물었다. "컨설턴트 선생님이 아버지께 전화드렸어요. 마르크스 전혀 문제없고 고전읽기 수업도 괜찮다고. 아버지도 좀 물어보고 전화를하시지." - P18
은재가 가방에서 네모난 상자를 꺼내어 곽에게 건넸다. 소수의 수집가들을 위해 공들여 만든 양장본처럼 섬세하면서도 단단한 상자였다. 가름끈을 연상시키는 리본 장식 아래에 백화점에서 몇 번 지나쳤던 고급 파티스리의 이름이 각인돼 있었다. 은재는 별건 아니지만 성의로 받아달라고, 또 찾아뵙겠다며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떠났다. 곽은 빈 교실에서 상자를 열었다. 작고 예쁜, 틀림없이 달콤할 것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동봉된 카드에는 고교 생활중 선생님의 고전읽기 수업이 가장 즐거웠다고 깨끗한 필체로 쓰여 있었다. - P138
창밖에서 "하나, 둘"이라거나 "한번 더"처럼 한 무리의 학생들이 단체 사진을 찍는 소리가 들렸다. 곽은 상자 속에 있던 피낭시에, 혹은 다쿠아즈나 비스코티일 수도 있는, 유럽 어느 언어로된 이름이 분명한 디저트를 하나 입에 넣었다. 역시 달콤했다. 경박한 단맛이 아니라 깊이가 있고 구조가 있는, 하지만 묘사해보려고 하면 이미 여운만 남기고 사라져서 어쩐지 조금 외로워지는달콤함. 사람을 전혀 파괴하지 않고도 패배시킬 수 있는 달콤함. - P139
곽은 한 발 물러나 조금 전 정리한 책장을 봤다. 벽면을 가득채운 동서고금의 명저들. 유서 깊은 출판사가 기획하고 석학들이 감수한 지식교양 총서와 세계문학전집. 하나하나는 알맞게 배치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조화롭지 않아 보이기도 했다. 그 불만족을 해석할 언어를 구성할 수 없었다. 넘친 자리가 있었고 빈 자리가 있었다. 고전의 의미를 제한적으로만 설정하고 동시대 지식사회의 논의를 반영하지 못한 게 문제일 듯도 했다. - P139
*작가의 말 중에서 .... 그때도 지금도 언젠가도, 여기도 저기도 어디에도 존재하는 무엇을 향한 갈증은 근원적인 것일까. 나는 자주 그갈증을 신자가 아니라 소비자로서 채우려고 시도한다. 가톨릭교회가 천 년 넘게 세계 최대의 이념 공동체로 존속했다면 오늘날자본주의는 이념을 초월한 자연이다. 그러나 이 넓은 세계의 어느 낯선 구석에서 지친 몸을 맡기고 보편성을 감각하고 싶을 때, 내게 허락된 공간이 스타벅스일 뿐이라면 초라하다. 힐튼이나 메리어트라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보편은 그 이상의 무엇이라는 예감 또는 기대가 있다. 그 무엇이 꼭 시스티나성당의 벽화나 아야소피아의 첨탑은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식탁 위의 촛불, 골목에내놓은 의자, 숨을 불어넣어 연주하는 악기・・・・・・ - P142
보편적이라는 말을 ‘평범하고 뻔하다‘는 맥락에서 쓰기도 한다. 2008년에 발표된 브로콜리너마저의 정규 1집 표제곡 <보편적인 노래>는, 한때는 내밀하고 특별하다 믿었지만 이제는 속절없이 퇴색된 기억에 대한 송가다. 플라스틱 장미 귀걸이, 견과류를 뺀 샐러드, 안양역 앞 닭볶음탕집이나 유리 상자 속 북극곰 같은 세목들도 시간과 거리를 두고 보면 비슷비슷한 심상으로 마모된다. 나에게는 하나뿐인 하루, 하나뿐인 삶이 저이나 그이도 겪었던 반복적인 패턴의 재현일 뿐이라 생각하면 쓸쓸하다. 사람은 종종 보편성에서 도망쳐 개별성을 인지해야 하는 동물인 듯하다. - P142
김지연/반려빚
정현은 다 때려치우고 싶다거나 죽고 싶다가도 그래도 저건 다갚고 죽어야지......라는 생각을 했다. 죽으면 어차피 다 끝인데 그걸 왜 굳이 다 갚으려는 건지 스스로가 이해 안 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정현은 빚진 것 없이 깨끗하게 죽고 싶었다. 자신의 부채를 언제나 부모에게 떠넘기고 싶지도 않았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상속 포기를 하면 그만이겠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가족들이 자신의 속사정을 낱낱이 알게 되는 것이 싫었다. 늘 저거 어디 가서 사람 구실은 하고 살려나, 걱정하는 가족들에게 변변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그동안 갖은 노력을 다 했는데 빚이 일억 육천이나 있다는 사실을 들켜서는 안 됐다. 다른 가족들보다 장수를 하든가 빚을 다 갚든가 둘 중 하나는 해야만 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태어난 죄로 과로하며 살고 있으니 장수는 이미 물건너간 것 같고 살아 있는 동안 빚을 다 갚는 수밖에 없었다. - P206
빚이야말로 정현이 잘 돌보고 보살펴 임종에 이르는 순간까지 지켜봐야 할 그 무엇이었다. 빚 역시 앞으로 수년간은 정현의 옆자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고, 정현이 죽었나 살았나 그 누구보다도 두 눈 부릅뜨고 계속 지켜볼 것이다. 빚이야말로 정현의 반려였다.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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