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푸코 진실의 용기
프레데리크 그로 외 지음, 심세광 외 옮김 / 길(도서출판)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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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셀 푸코하면 내가 떠오르는 것은 프랑스 구조주의 4인방(레비 스트로스, 자크 라캉, 롤랑 바르트)으로 기억된다. 또한 그는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도서에서 후기구조주의 학자로도 나온다. 그런 미셀 푸코가 추구하던 학문적 철학적 부분은 상당히 독특한 것 같았다.

아직까지 나는 미셀 푸코의 원전을 읽기보다는 주변 참고도서로 통해서만 읽어보았다. 그래서인지 정확하게 미셀 푸코의 생각을 글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미셀 푸코를 주변에서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글만 본 것이다. 한 마디로 그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보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수박 겉 핧기 식으로 보고 있는 수준인 것이다.

그러나 단지 내가 아는 미셀 푸코는 우리 인간들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동안 인간 스스로가 미쳐 생각하거나 눈치챌 수 없었던 부분을 주목하여 거기에 대해 비판하고 진단하는 것은 상당히 놀랍다는 생각이다.

미셀 푸코는 자신을 스스로 “나는 현재를 진단하는 의사이다”라고 했다. 철학자가 미래에 대한 예견이나 이상을 내세우기 보다는 지금 이 순간에 대한 문제점을 찾아 무엇이 틀리고 무엇이 어떻게 틀렸는지 알아가는 것이 중요한 척도인가 싶다.

어째든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책의 굵기가 상당히 얇아 미셀 푸코를 연구하던 학자들이 그를 어떻게 여기는지 대해 서술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실제 읽고 보니 상당히 어려웠다. 그의 학문의 성향이 초기에 고고학에서 계보학으로 옮겨간 것과 미셀 푸코가 니체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점으로 사회과학을 연구한 그로서는 니체의 반시대적 고찰을 많이 인용했다는 점이다.

또한 (후기)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영역에서 기존 서양철학의 근간이 된 고대 그리스철학을 거부하기 보다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뿐만 아니라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의 견유학파까지 연구하고 거기에 대해 꼴레주 드 프랑스에서 강의했다는 것이 퍽 인상이 깊었다.

서적 마지막 부분에서 미셀 푸코가 강의한 내용에서 “파르헤지아"에 대해 조금 인상 깊었다. 이 책의 제목이 진실의 용기인만큼 파르헤지아는 <진실의 용기라는 테마는 푸코가 윤리의 장(자기와의 관계를 구조화는 것과 관련된 문제, 즉 자기 자신을 통치하는 방법)을 따로 때어내 규정하려고 시도한 후 정치적 장(타자의 행위의 구조화에 관련된 문제, 즉 타자를 통치하는 방법)을 다시 통과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을 상기하면서 이 테마가 푸코에게 촉발한 관심을 규정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솔직히 말하기, 진실 말하기, 진실의 용기의 테마와 함께 푸코가 자기 자신의 말의 위상과 공적인 지식인으로서의 역할, 그리고 임무의 관건들에데 물음을 던진다는 의미에서 자기 자신의 가장 가까운 지점에 위치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처럼 지식인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스스로 인격을 배양하여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를 윤리적으로 생각해야 할것이며, 특히 이 파르헤지아는 민주주에서 아무것이나 말하기, 모든 것과 그 반대의 것을 말하기로 거대한 권력과 벽에 대해 대항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서적 마지막 부분에는 이 부분이 인상 깊었다.

<강도 있는 선동의 용기, 만인이 알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진실들이나 만인이 반복하지만 그 누구도 체험시키려고 노력하지 않는 진실들을 자신의 행위를 통해 백일하에 드러내는 용기, 단절, 거부, 고발의 용기이다.> 또한 이것으로 <선을 추구하고 악을 피해 가는 도덕을 기초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실을 따르고 거짓을 고발하는 윤리를 요청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철학자의 도덕이 아니라 참여 지식인의 윤리이다.>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타인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으로 다수가 모여들어 하나의 거대한 교조적인 진리를 내세운다. 하지만 그 타인에 대한 비판은 과연 그 비판대상이 옳고 그른가보다는 자신들이 거대한 틀로 변모하여 하나의 선악을 이원화시키는 방법이다. 그것은 진실로 용기 있는 정의가 아니라 비겁한 행동일지 모른다. 남에게 모든 책임을 운운하며 자신을 몰래 뒤로 빠지는 사람들과 그런 사람들 앞에서 위대한 군왕처럼 행동하는 위선적인 지식인들은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있는 모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셀 푸코가 행동하는 양심에서 과연 나는 얼마나 그를 따라갈 수 있을까 의문이다. 그것은 내 자신이 아직 수양이 부족하다는 점과 미셀 푸코라는 위대한 철학자 앞에 작은 잡초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있어서 아닐까 하지만, 그래도 내가 지켜야할 가치와 윤리에 대해 다시금 돌아보는 것은 맞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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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책세상 니체전집 2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이진우 옮김 / 책세상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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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글들은 무척이나 흥미롭다. 그는 예전에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의 글은 1세기가 지나야 안다”라고 말이다. 그의 말대로 그는 정작 그의 사상들은 1세기가 지나 엄청난 현대철학의 기반이 되었다.

기본적으로 프랑스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 독일의 프랑크푸르트학파 등등 니체의 사상은 얼마나 많은 현대철학자들에게 큰 강줄기로 되었을까? 가끔 니체의 이런 부분들을 생각하면 정말 놀랠 수밖에 없다.

그런 그의 사상서적을 읽어보는 것은 아직 읽어보지 않았던 현대철학자들의 사고들을 사전에 한번 점검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좋은 기회였던 것 같다. 전에 같은 책에 담겨진 “비극의 탄생”에서는 고대 그리스 비극의 디오니소스적인 면을 강조했다면 또한 거기에 담겨진 리하트르 바그너에 대한 업적을 기렸다면 반사회적 고찰에서는 이런 모습과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우선 “비극의 탄생”에서는 열렬하고 강인한 비극에 대한 니체의 환호성을 볼 수 있다면 “반사회적 고찰”에서는 니체의 당시 독일사회에 대한 아주 냉철하고 통렬한 비판이었다. 그 비판의식은 이 책이 나온 지가 140년 정도 되어도 나에게 큰 영감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반시대적 고찰에서 니체는 우리 현대사회에서 통하는 사회적 문화적 인식적인 문제를 여지없이 적어내려 갔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는 영국의 위대한 사상가인 존 스튜어트 밀은 이른바 공리주의 및 자유민주주의를 열렬하게 연구한 학자로서 그의 사상은 국가 시민사회에 대해 기술했다면, 니체는 국가 시민사회가 아닌 대중사회를 적어 내려갔다. 오늘날의 대부분 민주주의 국가라는 체계에서 국민이 주권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그들의 주권적인 주인의식보다는 이른바 군중심리로서 보여 큰 오류를 낳고 있다.

이런 점을 나도 솔직히 크게 유감을 표명하고 있다. 그런 거대한 군중심리가 남의 희생과 남의 타격을 아파하기 보다는 그들에게 오히려 하나의 권위나 상징 혹은 이득이 된다는 잔인무도한 인간심리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한 니체는 인간들이 가지고 있다는 이른바 교양에 대해 날카롭게 비난했다. 오늘날의 교양은 무엇인가? 흔히들 사람들은 무식하거나 예절이 없거나 혹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교양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래 말하는 인간들이 정작 하는 태도는 값비싼 옷과 치장, 그리고 가끔 열리는 문화공간들에 대한 이용은 그들이 마치 교양인 것처럼 여긴다.

하지만 니체는 그런 인간들을 교양인이 아니라 교양인 것처럼 행동하는 속물로 여겼다. 속물은 무엇인가? 이른바 마치 자기는 그런 현대적인 감각과 최신에 나온 모든 것을 알고 남들 혹은 대부분에게 인정받음으로 교양인이라고 하는 이른바 위선적인 자세이다. 이들은 정말 뛰어난 존재나 혹은 그 이상의 존재들이 나오면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이상하게 여긴다.

이들은 자신들의 사고와 일치하지 않은 교양이지 않은 것으로 취급해 버린다. 특히 니체가 살던 시절은 독일이 프랑스와 전쟁하여 승리한 때이며, 이때 아주 유명한 왈츠음악가 슈트라우스가 활약하던 시절인 모양이었다. 니체는 슈트라우스와 같은 시대에 살아 그가 마치 대단한 영웅으로 활동하는 것을 무척이나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마치 독일이 승리하여 모든 것에 우월함을 가져 어리석은 인간들이 거기에 흠뻑 취해 아무런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없는 점에서 말이다. 독일 군중들은 아마 슈트라우스의 활약으로 많은 시대적 반응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니체는 그런 슈트라우스와 독일 군중들에 대해 어리석고 획일적이며 인간의식에 대해 비판했다.

니체의 반시대적 고찰 2번째 편을 보면 그런 면이 잘 나온다. <그래서 세상은 “지리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의라는 미덕은 너무나 드물게 존재하고, 더 드물게 인식되며, 거의 죽도록 미움을 받는다. 그에 반해 거짓 미덕의 무리들은 어느 시대에나 존경을 받았고 화려하게 행진했다. 실제로는 단지 소수만이 진리에 봉사한다. 왜냐하면 단지 소수만이 정의로워지려는 순수한 의지를 가졌고, 그중 또 극소수만이 정의로울 수 있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정의롭겠다는 의지만 가졌다고 충분한 것은 아니다.>

아마 니체는 이런 진리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보았다. 모두 일방적인 생각 단순한 생각 게다가 본서에서는 국가는 철학을 두려워한다고 했다. 국가에서는 오로지 진정한 철학자만이 아니라 나라에 봉사할 철학자를 원했고, 그런 철학자들은 자신들이 마치 위대한 인간인양 위선을 떨고 국가와 협력하여 사람들을 속인다고 했다.

사실 새로운 생각과 사상은 기존 국가체계에서는 위협적인 존재라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국가체계는 이미 완성된 하나의 조직이나 새로운 반항적인 존재로 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기존 부패한 국가체계는 언제나 선량하고 위대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들을 두려워했다.

우선 그리스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는 그의 올바른 가치관과 정당한 사고로 통해 세상의 어리석음을 탐방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척이나 무지하다고 생각되어 각계의 명사를 찾아 그에게 진리를 얻고자 했으나 모두 소크라테스에게 진리를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오만이라는 옷을 벗겨 버렸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에게 미움을 받아 독배를 받고 죽음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는 죽음이란 그 고통스러운 앞에서도 오히려 죽음은 철학자가 가장 가까이 해야 할 이상적인 세계라는 것을 옆 사람들에게 당당히 밝혀 두고 그는 독배를 들이킨다. 그 후에 그의 제자인 플라톤 역시 그의 진정한 학문적인 면 때문에 수모를 당한다. 물론 니체는 소크라테스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공격을 날리지만 둘 다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자라는 점을 보자면 얼마나 철학자가 국가에서는 아주 위험한 인물인가?

사실 니체의 글을 읽어보면 니체는 분명 반국가적이면서 반사회적인 면이 강하다. 그는 국가를 아주 나쁜 것으로 보았다. “차라투스트라 이렇게 말했다”에서는 국가는 인간을 억압하는 하나의 나쁜 도구로 본 것이다. 게다가 그 국가와 결탁한 교조적인 교회와 대중들을 선동하는 저널니스트 등은 니체가 살아가야 할 세상에서 반드시 없어져야 할 존재로 보았다.

하지만 재밌는 사실은 니체가 사상적인 스승으로 여긴 쇼펜하우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할 심각한 염세주의자라고 비판했다. 그런 점에서 반사회적 고찰 3번째 부분에서 보인 니체의 태도를 보자면 상당히 괴리감을 느낄 정도로 난해한 반응을 느꼈다.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교육자로서 보았으며, 그의 학문으로 통해 당대 독일사회를 강렬하게 비판했고, 그런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적인 태도를 매우 화려한 문체로서 적어 내려간다. 니체가 살던 교양인들에 대한 비판, 영리주의자에 대한 비판 그리고 인간 오류에 대한 비판 등등 말이다.

철학자와 예술가의 관계도 재미있다, “학문은 예술가의 광학으로 바라보지만, 예술은 삶의 광학으로 바라본다.” 아마 학문과 예술이 삶이라는 진실한 부분보다는 가식과 허위와 속물로 이루어져 거기에 대한 니체는 많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아마 이런 것에 대한 비판의식이 염세주의자인 쇼펜하우어로 통해 나타남에 따라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자신의 스승으로 보았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런 염세주의적인 태도는 현실에 대한 회피와 어둠만 강조하지 빛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보았다. 그래서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로 통해 자신이 직접 어리석은 군중에게 가서 뜻을 전파하고 그 뜻이 끝나면 자신은 떠남을 강조했다. 어느 서적에서는 니체주의자들은 니체주의가 되면 안된다고 했다. 처음에 이해하지 못했으나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로 통해 그것을 이야기한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진리를 전파한 후에 그 사람 1명 1명에게 하나의 진리가 생겨 각자의 양심과 의지로서 살아가길 바란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인간들은 다양한 정보매체로 통해 자신의 솔직한 눈으로 세상을 보기보단 여전히 달콤하고 자극적인 것을 원한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초월하고 자연 그 자체 즉 인간 그 자체의 순수함으로 가는 초인 영원회귀사상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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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식인 지도
김상환 외 엮음 / 산처럼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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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있으면서 조금 재미나는 일인지 아니면 다소 걱정되는 일인지 조금 상황을 결정내리기 어려운 사건이 터졌다. 그것은 전 세계의 이목을 끄는 테러리스트 우두머리인 오사마 빈 라덴이 미군의 방아쇠 아래 그 이름을 현재인이 아니라 과거인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오사마 빈 라덴하면 생각하는 일이 바로 911 테러인데, 막상 그 테러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너무 이래저래 다른 내용이 나오므로 단순히 한가지 판단기준이나 혹은 근거에 모든 것을 맡기기에는 조금 섣부른 점들이 많다. 그런데 이 오사마 빈 라덴이 사망 직후 어느 유명한 학자가 도발적인 말을 날렸다.

 

그 인물은 바로 미국 최고의 양심적인 지식인이오, 세계 언어학자의 권위와 학식을 날리는 MIT대학교의 노암 촘스키 교수였다. 사실 테러리즘은 별로 나도 좋다고 생각하지 않으나, 이 노암 촘스키의 서적을 보면 재미나는 일들을 약간 계보학 적으로 파고 들어간다. 우리가 아는 현실과 그 현실을 만들어낸 과정이 그렇게 제대로 되었는가 이다.

 

솔직히 노암 촘스키 서적 중에서 “불량 국가”란 서적을 보면 우리가 약간 흠칫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건 우리나라 과거 일본에 의해 강제로 통치 받을 시절, 우리 선조들은 자국 독립을 위해 일본군과 싸웠다는 점이다. 그때 아주 명성을 날리던 독립군과 광복군, 혹은 그들이 활약한 전공은 우리 국민들에게는 하나의 영웅적인 상징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그 영웅적인 인물들이 당시 일본은 그렇다 치더라도 세계 국가세계에서는 하나의 테러리스트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 정치외교에서 정의적인 면은 어느 국가 자체의 존립의 정당성이 아니라 그 국가들 속에서 얼마나 힘의 논리로서 이끌어 가는 것이 하나의 정의였다. 참고로 우리나라 국방부에서는 국군의 기원을 독립 활동했던 선열에게 그 근본을 두고 있는데, 당시로서 그 국군의 선봉들이 세계에서는 테러리스트일 뿐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도 하나의 주권을 가진 것도 군사, 외교, 경제적인 힘의 논리가 뒷받침한다. 사실 국가에서 군사력이 없다면 그것은 국가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을사조약에서 대한제국의 군부대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미 주권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어째든 너무 이런 내용으로 글을 적어 책의 본문과 크게 어긋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나, 사실 이 노암 촘스키이란 인물을 본 서적의 제1부 1편에 소개한 이상 화려하게 적을 수 없는 노릇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 세계 지식인 지도에서는 세계 최고의 언어학자인 노암 촘스키를 필두로 하여 다양한 지식인들을 소개한다. 책의 내용으로 보자면 21세기 이후에 생존하는 지식인이므로 20세기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인다. 20세기 세계 학문적인 부분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당연히 프랑스다. 프랑스 끌로드 레비 스트로스를 필두로 하여 자크 라캉, 롤랑 바르트, 루이 알튀세르, 미셀 푸코 등 다양한 구조주의 학자들이 활약했으며, 이후 프랑스에서는 자크 데리다, 장 보드리야르, 삐에르 부르디외 등 다양한 후기구조주의 학자들이 활동을 했다.

 

그런데 그 유명한 학자들도 천운을 다해 이미 과거로 가고 새로운 지식인이 등장하고, 그들 역시 세계의 변화에 따라 다시 새로운 면들을 발견하고 기존에 있던 가치를 재조명한다. 그 지식인 중에서는 나에게 글을 알려주는 문학도에 의하면 슬라보예 지젝이 가장 핵심적으로 조명되는 지식인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조금 재미있는 점은 슬라보예 지젝에 대해 그렇게 나는 공부하고 서적에 기울리지 않았으나, 그가 슬로베니아인으로 과거 사회주의 몰락을 경험하고 프랑스에 넘어가고 정신분석학을 연마하고 이른바 20세기 최고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을 이은 사회학자로 이름을 날린 것이다. 어느 서적에 의하면 그는 슬로베니아 라캉 학파로 통하며, 헤겔의 변증법적인 요소까지 마스터하여 무궁무진한 담론을 나오게 한다는 점이다.

 

아직까지 라캉도 그렇다 치더라도 헤겔의 변증법까지 들어가지 않은 나로서는 딱히 뭐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없다. 단지 최근 지식인 사이에서는 철학적인 요소에 정신분석학적인 요소를 첨가하여 사회적인 현상을 분석하고 인간의 유형을 알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흥미롭다. 물론 자크 라캉의 학파를 유지하면서 라캉의 사위로 정신분석학자로 활약하는 자크 알렌 밀레에 대한 소개도 있다. 집에 아직 덜 읽은 라캉의 11번째 세미나 서적을 엮은이다.

 

어째든 이렇게 다양한 담론과 학문 그리고 사상들을 연구하고 담론하는 인물에 대해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다. 그 분야는 다양하다. 정치, 윤리, 사상, 경제, 사이버, 예술, 건축, 정신분석, 환경, 에너지, 여성, 음악, 엔지니어, 의학, 사이보그, 나노과학, 미래 등등 이때까지 어지러운 20세기를 맞이하고 앞으로 21세기를 맞이한 인류가 쌓인 것들과 쌓아 가야할 이야기를 짤막하게 세계를 대표하는 지식인의 이야기와 그 세계 지식인을 바라보는 한국 지식인이 적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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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니체의 사상과 철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대서사시 고전으로 미래를 읽는다 7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사순옥 옮김 / 홍신문화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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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빌헴름 니체하면 딱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바로 그것은 "신은 죽었다"이다. 신이라는 절대불가침적인 존재를 죽었다니 다소 아이러니 하면서도 조금 묘한 기분의 말이다. 게다가 니체는 자신의 아버지가 교회목사였다. 독실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가 신이라는 존재를 죽었다니 상당한 반전을 불러 일으키는 어구이다.

 

하지만 그가 있었던 그 신이란 존재를 죽었다고 말하는 이유를 조금 다른 서적에서 본다면 이해가 간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문화인류학을 가르치던 "마빈 해리스" 교수(2001년 작고하심)의 <문화의 수수께끼>를 읽어보면 왜 신을 죽었는가에 대해 알 수 있다.

 

단순히 니체가 '신은 죽었다'로 해서 '니체도 죽었다'라고 하는 것은 그 말하는 본인조차도 언제가는 죽어버리는 나약한 인간이므로 그 신이 왜 죽어야 했는지 이유를 알아야 한다. 니체가 신을 죽인 까닭을 문화인류학자의 서적을 참고해 보면 조금 감이 온다. 그것은 바로 마녀사냥이라는 무서운 광기의 향연이었다.

 

<문화의 수수께끼>에서는 이런 서양역사 중에서 십자군 원정이나 다른 문화에서 보는 신에 대한 관점을 적어내려 가고 있다. 특히 로마의 고문서로 통해 본 신의 존재는 조금 우리가 아는 신의 존재와 다르다. 문제는 그 신이 왜 죽어 버려야 했는지 우리로 하여금 절실히 알게 해주는 것이다.

 

중세 교회는 정말 광기의 시절이었다. 이 마녀사냥의 공포는 당시 군중심리를 이용한 부패한 왕권과 교권의 폭력이었다. 당시 마녀사냥으로 몰리면 갖은 고문과 심문으로 사랑을 희생시키는데, 그 내용을 보면 너무 끔찍하다. 튀어나온 눈알, 팔에서 떨어져 나간 손목, 다리에서 잘라진 발들, 바닥은 온통 피와 피로 고여 있어도 계속 죽음은 계속된 점이 말이다.

 

당시 수십만명의 죄없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부도덕과 권력의 비양심으로 희생되었다. 그 덕분으로 어려운 중세유럽국가 권력층은 공포정치로 통해 대중들을 억압하여 통제하고, 종교는 하나의 인간구원이 아닌 인간통제 수단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군중들의 눈앞에서 화형되는 자기 이웃을 바라보며 사악한 미소를 짓었으나 언제가 그 사악한 미소를 받을지도 모르는 운명이었다.

 

니체는 왜 그렇게도 신을 죽이고 싶었을까? 그리고 그 신을 따르는 자들도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는 자들까지도 멀리하려고 했을까? 이런 내용을 다루고 있는 서적이 바로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다. 그런 군중의식에 대한 비판과 그 대중들의 귀와 논을 속이는 저널리스트나 종교지도자들을 비판했다.

 

그들은 정말 대중들을 위해서일까? 니체 역시 독일인이기 때문에 다소 칸트가 지적한 교조적인 의식을 가진 무지한 사람에 대한 분노의 비판이 보였다. 그 분노는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고, 니체가 도달하고픈 초인 영원회귀사상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니체는 신은 어느 주체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 그 자체로 신성이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신은 죽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사실 그 신이라는 존재가 신으로 모셔지지 않아도 신은 되었다. 그러나 그 신을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따른다고 해서 사람들은 신이 되는 게 아니다. 그래서 짜라투스트라는 자신의 말에 기울이되 자기를 멀리하고 따라오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그는 광신도의 맹목적인 존재가 되기를 거부한 것이다. 하지만 니체가 짜라투스트라로 본 대중들은 한 마리의 당나귀와 같았다. 그들은 어리석었으나 그들의 어리석음을 몰랐으며, 이 어리석은 존재를 그냥 그대로 방치하여 그들의 삶에 거밋줄을 치어 기생하는 타란튤라인 성직자처럼 되기 싫었다.

 

이웃을 사랑함에도 그 자기만의 이웃만을 사랑하는 것을 거부하라고 했으며,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지 않으므로 그래서 인간은 평등해져야 하는게 아닐까? 모든 인간은 같지 못하므로 꼽추와 대화할 때는 꼽추처럼 대하는 것이 말하는 것이다. 그런 군중의 부도덕함과 당시 지자들의 욕심과 허영심에 뼈저리게 실망한 니체로서는 그런 모든 것을 뛰어넘어 하나의 인간성을 찾으려 했던 것은 아닐까?

 

사실 니체의 서적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만 아나, 그가 도덕의 계보나 많은 서적으로 통해 계보학적인 면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후에 가면 군중심리와 대중들의 눈속임은 프랑스 (후기)구조주의 학자 미셀 푸코로 이어진다. 미셀 푸코 역시 미디어로 통해 대중들을 속이는 권력을 비판했다. 지금은 미디어가 군중심리를 자극하면 당시로는 신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여 사리사욕을 챙기거나 허황된 유토피아 및 폭력적인 궤변가들이 선동했을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 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솔직히 1번 읽고 이해한다는 것은 어렵다. 단지 니체가 주장한 초인은 모든 것을 뛰어넘어 자신의 새로운 세계에 가는 영원회귀사상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 심지어 이 글을 적는 나라는 인간도 그런 초인으로 가기에는 벅차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초인이 아니더라도 오늘날 우리가 어떤 생각으로 어떤 행동을 해야함에서 조금 생각하게 하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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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비판 2 대우고전총서 20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 아카넷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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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 1, 2권을 다 본 현재로서 다 이해하고 납득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런 점에서 조금 내 자신에 대한 지적 능력이나 이해수준이 낮음이 아쉬우나 그나마 모두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지 전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 것은 아니다.

이 순수이성 비판 2권에서 내가 생각이 드는 것은 인간이 가진 이성의 한계와 그 한계를 느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칸트가 살던 시절은 코페니쿠스의 지구 자전설이 인정받던 시절이다. 물론 이 자전설이 인정되기 전에는 인간은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천동설이었다.

이런 과학적인 발전이 인간이 가진 고정관념 내지 편견을 지우고 하나의 과학적인 근거와 논리적인 이성으로 통해 자기들이 알고있는 한계를 비판하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자고 하는 것이 칸트의 주요 골자이기도 하다.

그런다고 새로운 시대가 오더라도 인간은 그런 시기적인 흐름에 따라 뭔가 변해 가야 하겠지만 한편으로 변하면 안되는 것이 있다. 칸트는 이런 점을 잘 집어낸듯한 느낌이 온다. 당시 사람들은 정확한 내용이나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보다는 자신이 알기 쉽고 모두가 편한 것만 찾기를 원했다.

가령 어느 한가지 사고에 대해 그것을 제대로 알아가기 보다는 모두 자신이 편한 식으로 해석하려고 했고, 이것은 하나의 교조적인 태도로 변했다. 단지 억지스러운 법칙으로 이성의 판단오류가 하나의 정당성을 인정함을 칸트는 비판하려고 했던 것이다 .

사람들 그러니깐 평범한 대중들은 어떤 사물이나 진리에 대해 좀 더 상세하고 논리적으로 대하기 보다는 그저 자신만의 궤변을 늘여 놓는다. 그것은 그들은 자신들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모르는 것을 억지로 감추기 위해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정말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만약 그것에 대해 모르거나 혹은 자신이 가진 사고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할 경우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틀렸는지 다시금 생각하고,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제대로 숙지하여 자신의 비논리적인 오류판단을 비판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오류를 다시 오류로서 대하므로 그런 순수이성비판적 태도를 가질 수 없으므로 더욱 더 비논리로 대할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알고 있는 내용은 자기가 말하는 궤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이야기하는 내용이 맞는지 혹은 틀렸는지 대해 자기 스스로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스스로 비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런 무지함을 비판하고 어느 일정한 진리를 통해 정립과 반정립으로 통해 변증법적으로 대하여 우리가 가진 일방적인 사고와 혹은 거기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동시에 비판하여 올바른 사고를 유도하기 원했다. 솔직히 이런 부분은 칸트가 죽은지 200년이 넘은 이 현대사회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자신만의 입장과 자신만의 논리 타자와 그 이외의 상황과 정황 그리고 반대되는 논리까지 모두 무시하고 자신만의 논리로만 이야기하려 한다. 어떻게 보자면 그것은 상대방을 이해하고 또는 자신을 이해시켜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없는 주장과 반박만 성립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다.

그리고 이런 논리적인 부분에서 칸트는 기본적으로 이성은 자기를 위한 합리적인 수단이기 보다는 인간을 위한 하나의 사고방식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이 책 마지막 부분에 가면 칸트의 올바른 이성은 결국 인간을 대함에 있어 윤리적으로 사용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순수이성비판 2권이 아닌 1권에서 이런 비슷한 말투를 본 것 같았다. 윤리와 논리는 일치하지 않는다. 사실 주변을 보더라도 논리적인 인간이 윤리적이지 못할 경우가 많고, 윤리적인 인간이 논리적이지 못할 경우가 많다. 하지만 논리와 윤리 중에서 만약 우리가 택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책에서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을 함은 자기의 비논리적인 오류판단에 대해 올바르게 생각하고자 함인데, 그 비판적인 태도는 결국 인간이 인간 스스로 오류로 빠져 스스로 기만하거나 혹은 타인에게 올바르지 못한 행위를 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아닐까? 칸트는 논리적인 사고를 하는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 올바른 행동을 하기 위함이고, 그 올바른 행동은 윤리적인 인간이 되어야 함은 아닐까? 어째든 그냥 1번 읽고 이해하기 서적이나 칸트가 주장하고픈 인간의 이성은 인간 자신 스스로 비판하고 사고하여 올바른 행위를 하기 위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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