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 선언 - 세계 역사를 바꾼 위대한 선언 돋을새김 푸른책장 시리즈 17
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1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참으로 독특한 인물들이다. 그들은 상당한 엘리트 계층이었다. 우선 마르크스는 당대 독일의 학문열풍으로 일으킨 헤겔 변증법에 대해 상당한 수준을 가지고 있었으며, 거기에다 역사, 문학, 철학까지 두루두루 면모를 가진 지식인이었다. 여기에 엥겔스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가 공장주로 있어서 풍요롭게 지낼 수 있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관찰하게 되면서 부르주아 계급이면서 그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대해 죽는 그날까지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 그 2사람이 만나 만든 공산당선언의 가치는 매우 역사적으로 이례적으로 독특하다고 볼 수 있다. 내가 20년 전후의 마르크스라는 이름은 함부로 거론되면 안되는 인물 중의 하나였다. 당시 중학교 갓 들어온 나에게 공산주의(共産主義)는 무조건 나쁜 사상이었다.

그리고 이른바 공산주의 국가라는 북한은 그야말로 최악의 국가였다. 물론 지금 이 순간 이 책을 보고 후에도 북한은 나에겐 최악의 국가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는 오히려 북한은 마르크스가 주장한 진정한 국가가 아닌 것이다. 거기는 오히려 프롤레타리아 독단적인 정치(政治)라는 미명(美名)아래 오히려 독재가 일어나는 사회다. 

르크스는 노예 없는 주인 세상을 원했다. 독재(獨裁)로 인해 피해보는 것은 언제나 권력을 가지지 못한 약자들이다. 약자를 위해 일어섰다고 정의를 외치는 그들은 어느 순간 약자들을 억압하는 폭군이 되어 버렸다. 그런 형태가 소비에트 연방의 스탈린 정권이었다. 소비에트 연방은 공산주의라고 하나 사실 그것은 하나의 국가자본주의이었다.

스탈린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국가비밀경찰 조직을 설립하고, 그 전에 자신과 같이 활동하다가 반대되는 파들을 숙청했다. 그런 이후로 마르크스가 울부짖던 원래 가치는 상실했다. 이런 실정에서 한국에서 625전쟁이 발발했다. 이 시기에 맞추어 미국에 매카시라는 의원이 미국 정부 내에 공산주의자가 있어서 그들을 정치적인 숙청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런 일련의 행위들이 매카시즘(McCarthyism]으로 발동되었다.

웃기게도 이런 비판의식이 결여한 이데올로기는 먼 곳에 있던 일본과 한국에서 획기적으로 변했다. 그 당시 소비에트 연방과 미국과 연합군의 진영으로 나눈 한국에선 정치적 노선으로 갈등을 일으켰고, 결국 스탈린에 의해 전쟁이 발발했다. 사실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전쟁을 반대했다. 전쟁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모두 프롤레타리아 계급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정의도 아닌 정의로 전쟁의 씨앗이 발발하고, 우리나라 역시 분단과 휴전 중이라는 긴장감 속에 살아간다. 하지만 이런 문제에서 마르크스가 선언한 공산당선언은 별개의 문제였다는 것이다. 사실 제일 진실로 믿음이 깊고 행동력이 강한 사람은 형이상학(철학)에 대한 깊이가 없는 사람이다. 그들은 교조적인 자신들의 자세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 보다는 1가지 틀에 얽매여 2원화적인 대립으로 행동한다.

전에 임마누엘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이란 도서를 보았다. 거기에는 나 역시 조심해야할 내용이나 모든 사람들이 조심해야할 문구가 있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여타의 모든 학문에서는 (전문가가 있겠거니 하고) 조심성 있게 침묵으로 관망하는 사람들도 형이상학[철학]적 문제에 관해서는, 다른 학문에 비해 그들의 무식이 뚜렷이 드러나지 않음을 기화로, 대가인양 지껄이고 대담하게 단정한다."(형이상학서설, IV, 264)

이런 바르지 못한 정보와 왜곡된 내용들이 사람들을 혼란하게 한다. 가령 마르크스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면 먼저 자본(資本)을 봐야 한다. 자본 1권만 보더라도 왜 그런 선언이 나올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알 수 있게 한다. “하루에 14시간 넘게 노동한다. 안전장치 부실로 다치거나 죽어도 제대로 처리를 하지 않는다. 산업안전보건 기준을 어겨 각종 질병에 노출된다. 먹을 것조차도 깨끗한 음식이 아니라 오염된 음식을 사먹는다. 미성년자 그것도 이제 4살 된 아이를 고용해서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부려먹는다. 아동들을 부적절한 관계를 맺게 하여 14세 된 여자애가 엄마가 되고, 그 엄마가 된 소녀의 아이들은 다시 노동을 착취한다.”에서 현대에 살아가는 누구라도 이런 행위에 대해 납득할 수 없다.

아니 납득을 하는 인간이 더욱 이상하고 바르지 못한 존재이다. 그런데 그 당시 19세기 유럽에서는 이런 비정상적인 일들이 당연하게 여긴 것이다. 지나친 고통은 인간의 신체를 노화시키며, 정신적으로 파멸을 일으켜서 대부분은 오래 살지 못한 채 괴롭게 죽어가야만 했다. 이런 세계가 당연하다고 여긴다면 분명 문제가 있다.

이런 문제들은 마르크스가 지적한 것이 아니었다. 가령 칸트의 판단력비판이란 도서는 인간이 느끼고 표현하고 생각하는 미학에 관한 도서에서 빈곤의 문제에 기술했다. 본래 문구는

“나는 인민의 땀을 그처럼 불필요한 것들에 소비하는 권력자들의 허영을 꼭 루소(프랑스의 사상가 및 철학자인 장 자크 루소이며 대표서적으로 사회계약론)와 같은 투로 꾸짖을 수 있다.”에서 번역자 이렇게 주석을 이렇게 달아놓았다. “아마도 ‘굶주린 다수에게는 필수품도 없는데 한 줌의 사람에게는 사치품이 넘친다’는의 끝 대목을 염두에 둔 말 같다. 인간학강의 XXV, 1417"

어떻게 본다면 칸트의 생각에서도 당시 루소의 사상을 판단력비판에 인용하였고, 그 이전에 칸트는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을 저술하였다. 칸트는 교조적이고 회의적인 인간에 대하여 비판하였고, 특히 교조적(敎條的)으로 편협한 사고를 하는 인간의 이성을 비판했다. 하지만 이성의 비판에서 칸트는 논리(論理)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윤리(倫理)였다.

윤리는 제1의 철학이라고 할 정도로 중요하다. 마르크스가 그토록 혁명을 외치던 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생존성이 달려있는 윤리적인 부분이었다. 사실 이런 부분은 현대철학에서도 중시된다. 가령 미국 하버드 대학 철학과 교수이며 공리주의(功利主義) 대가인 존 롤즈의 “정의론”에서는 인간의 인권에 대해 매우 중시했으며, 각 개인에 대한 자유와 사유재산을 중시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의 태생이 같을 수가 없으므로 최소수혜자에 대한 기본보장으로 통해 공리주의적인 면을 강조했다. 다소 공산주의와 공리주의는 다른 곳에 출발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보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인권문제이다. 사실 공산당선언과 마르크스의 자본은 매우 중요한 위치에 올라와있다. 인터내셔널(The Second International)의 조직으로 통해 그들은 인간 기본 권리를 보장했다.

지금에 와서 웃기는 사실이나 우리는 하루 일일 노동 및 근로시간 8시간 정도 규정한다. 그리고 그 이상의 노동에 대해서는 그것에 대한 수당이나 보상이 뒤따른다. 그러나 150년 전에는 그것이 아니었다. 지금 사회에서 이 선언은 어떻게 본다면 당연한 것을 말할지도 모른다. 선언이 일어난 시기에는 정말 목숨이 오고가는 일이었다.

지금 현재 내가 살아가는 현대사회를 돌아보면 마르크스라는 인물은 아직도 막강한 영향을 내리고 있다. 직접적인 마르크스주의자 이외에도 다양한 형태로 학문과 사상, 심지어는 예술과 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까지 그의 사상이 녹아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화가인 파블로 피카소는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로 입체주의 미술을 펼쳤다. 그는 전쟁에서 억압받던 사람들을 보고 그들을 그려 전쟁의 잔혹함을 폭로했고, 또한 가난하고 굶주린 약자를 생각했다. 일본 애니메이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역시 마르크스주의자로 그의 작품인 붉은 돼지는 파시즘에 대한 강력한 반발의사가 들어 있었다.

그렇지만 세계 근현대 역사의 마르크스가 꿈꾸던 공산주의는 사람들에게 허무한 유토피아만 주는 환상이 되었다. 물론 원론은 아니었으나 사람들이 옳지 않은 방향으로 그의 사상을 남용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부 유럽국가에서는 마르크스의 유지를 이어 국가를 보전하고 발전시켰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을 보면서 마르크스의 생각 중에 마음에 정말 드는 문구가 있다. 그것은 “이념 속에서 현실”을 찾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이념”을 찾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원래 동양사상인 유교(儒敎)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유교는 종교적인 기능으로 누구를 믿는 것보다는 어떻게 정치를 잘하는 가를 다루는 사상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성리학의 오류로 인해 백성들은 가렴주구에 시달리고 탐관오리들은 하늘 무서운 것도 모르고 오만 패악만 일삼았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인 다산 정약용은 그런 성리학 안의 틀에서 나라를 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백성을 보고 그 안에서 나라를 다스리려고 했다. 이념은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이었으나 이제는 이념 때문에 오히려 인간을 소외시켜야 했다, 그래서 그런가? 이미지가 매개로 인간사회가 나타나는 이른바 스펙타클의 사회(Society of the Spectacle)이 출현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실천이성비판 - 개정판 대우고전총서 5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 아카넷 / 200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19C 독일이든 프랑스이든 유럽이든, 당시 유럽 사회는 상당히 질풍노도(疾風怒濤)의 시기였다. 왜냐하면 프랑스혁명과 영국 산업혁명 이후 계속되는 산업화와 자본화 그리고 점차 뚜렷하게 나누어지는 빈부 격차로 통해 사회는 매우 혼란스럽게 보였다.

그런 상황에서 많은 사상(思想)과 혁명(革命), 그리고 거기에 알맞은 크나큰 사건들이 일어났다. 그런 중심 사건에 세계 인류의 위대한 사상가이면서도 철학자인 마르크스가 등장했다. 그런 마르크스가 과학적인 사고와 유물론적인 가치관을 내세우기 전에 유럽에는 엄청난 철학자가 있었다.

그것은 헤겔이었다. 헤겔이란 인물은 변증법(辨證法)이 매우 유명한 인물이었고, 그의 변증법적이고 관념적(觀念的)인 철학은 독일 비판철학(批判哲學)을 세운 위대한 철학자 칸트를 이은 인물이었다. 물론 나는 헤겔에 대해 자세히 알진 못한다. 내가 헤겔이란 인물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마르크스가 생존하던 시대에 헤겔의 변증법이 한창 유행했다는 점과 최근에 잠시 읽어본 이중텐의 “미학강의”에서 처음 알았다.

어째든 헤겔이 칸트로부터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는 점과 그의 철학에서 인류사에 가장 큰 업적을 남긴 것은 변증법이었다. 하지만 헤겔은 그런 철학적 업적에서 큰 역할을 한 만큼 칸트의 사고방식을 많이 수용한 것 같았다.

"사람들은 구두 한 켤레를 만들기 위해서도, 비록 누구나 자기 발에 맞는 척도와 손들, 그리고 구두를 만드는 일에 필요한 천부적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구두 만드는 법을 배우고 훈련을 쌓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런데 유독 철학함에 대해서만은 그러한 연구나, 배움 그리고 노고가 필요치 않다고들 말한다."

즉 인간은 언제나 끊임없는 사고와 이성을 위해 계속된 연구, 배움, 노고로 통해 이룩해야 하나, 현실에서의 인간들은 그렇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런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철학적 지식에 대해서는 이미 완성되어 있다고 본 것이다. 참으로 재미있는 사실이다. 이런 문제는 고대 그리스에서의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가 현존하던 시대에도 있었던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헤겔에게 큰 영향을 준 칸트는 어떻게 적어 내려갔을까?

"여타의 모든 학문에서는 (전문가가 있겠거니 하고) 조심성 있게 침묵으로 관망하는 사람들도 형이상학[철학]적 문제에 관해서는, 다른 학문에 비해 그들의 무식이 뚜렷이 드러나지 않음을 기화로, 대가인양 지껄이고 대담하게 단정한다."(형이상학서설, IV, 264)

정말 그렇다. 오히려 무지의 배일에 가려진 사람일수록 자신이 알고 있는 가치관과 사고들이 절대적 가치이며, 진리라고 본다. 그리고 사람들은 칸트나 헤겔처럼 그렇게 자신의 형이상학(철학)에 대해 진지한 공부나 노력 따위는 하지 않는다. 단순히 자신들의 짧은 지식과 알량한 사고로 대가처럼 떠들어댄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어리석은 가치와 사고는 하나의 도그마로 떠오르고, 그렇게 떠오른 오류들은 절대적 진리로 되어 교조주의적인 인간들을 양성시키게 된다.

칸트는 이런 인간의 이성의 오류를 지적하고 올바른 사고로 통해 인간 선험적인 부분을 대해 관념적으로 비판하기 위해 “순수이성비판”을 저술했다. 물론 이런 “순수이성비판”이 나온 직후에 칸트는 인류 최고의 도덕윤리교과서(그것은 다소 많이 어렵다고 하나)인 “실천이성비판”을 저술했다.

실천이성비판을 저술하기 앞서서 먼저 순수이성비판으로 통하여 칸트는 어떤 상황과 관념에 대하여 변증법적인 상황으로 거론했다. 그리고 각각의 사고와 주장을 각각 다른 논리와 사고로 통해 변증법적으로 서술해 나갔다. 그렇다면 이런 관념적인 사고로 통해 우리는 어떻게 현실에 적용해야 함이 옳은가?

그게 바로 실천이성비판이 아닐까 싶다. 나의 짧은 지식과 걸음마 단계의 수준으로 칸트라는 거장을 다 읽고 이해하기란 불가능한 처사다. 하지만 그의 도서를 읽으면서 느낀 것은 분명한 단어의 사용과 의미로 전달하기 보다는 그 단어에 묶인 의미에 대한 접근이었다. 인간은 언제나 혼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다.

항상 생각하고 말을 하며, 말로 통해 타인과 대화로 통해 사회생활도 한다. 또한 몸을 움직이면서 인간 자신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인간이란 자신의 말과 행동 그리고 상황에 따라 2가지 상황에 닥칠 것이다. 어느 1가지 사안이 자신에게 이익 즉 사애(私愛)가 될 것인지 혹은 이타(利他)적으로 되어야 하는 것이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인간의 그런 자기 욕심에 대해 생각하기 보다는 욕심을 절제하고 타인에 대한 인격적인 사고, 즉 윤리적인 사고를 중시했다. 또한 법과 제도에 따른 강제적인 행위로 나타나는 완전한 의무보단 자신의 윤리의식으로 통한 비강제적으로 나타나는 불완전한 의무를 중시했다.

불완전한 의무로서 인간이 다른 인간을 대하는 것은 정말 존경받아야 행동이란 점이다. 그런 점에 대해 이 책의 역자이신 백종현 교수님이 이렇게 설명했다. 어느 버스를 타던 젊은 남학생이 약 30분 동안 서있었는데, 우연히 자리가 나서 앉았는데, 어느 나이가 많은 어르신이 버스에 타서 그 어르신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사례를 보인 것이다.   

사실 그 젊은 사람이 반드시 어르신에게 자리를 양보해야할 절대적인 의무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사람은 어르신에게 자리를 양보하여 자신의 편의를 조금 손해 봐야 하였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윤리적인 행위로 타인에게 편안함을 주었고, 그것은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한 이성적인 판단이었기에 충분히 존경받을 행위다.

실천이성비판은 솔직히 말해 단어와 문구는 어렵지만, 그 단어와 문구 속에 나타난 인간의 행동 그 자체에는 무리가 없었다. “배부르면 배불리 먹고, 추우면 따뜻함을 찾고 싶고, 피로하면 쉬고 싶어 한다.”의 말처럼 그런 부분은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도 똑같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본인의 최소한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타인을 되돌아볼 기회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가끔 이 사회를 되돌아본다면 자신의 모든 부족함이 이미 충족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배고픔과 추위 그리고 안락함을 빼앗는 존재를 볼 수 있다. 그런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타인의 고통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득만 생각하고, 또한 이득은 물질적인 가치로 환원하여 자신의 음흉한 마음을 그대로 나타내는 물질만능주의에 대해 칸트는 비판했다.

실천적인 이성행위는 윤리적 가치가 제일 중요하다는 점이다. 물론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과 남의 이익에서 갈등을 겪게 될 것이다. 또한 어느 일정한 사안을 두고 인간들은 대립하는 경우도 생기고, 또한 자신의 논리적인 자세로 통해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몰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은 논리적인 사고로 통해 이성적으로 해결해야 하나 그 모든 이성 즉 논리에서는 윤리적인 요소가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점이다.

칸트가 이 실천이성에서 보여주는 사고는 즉 인간의 가치관에 대해 그것은 법과 제도보다는 인간 그 자체의 자율적인 의지에 의한 타인의 배려다. 인간의 윤리적 가치라는 것은 곧 자신만의 가치가 아니라 타인의 가치를 통해 실현시킬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칸트가 죽은 뒤에 칸트의 묘비에는 자신이 남긴 말이 돌에 새겨져 인간의 기억이 끝나는 그날까지 기록되었다.

 

그 글은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법칙”이다. 사실 나는 이 문구에서 별이라는 것은 어두운 밤에 밝게 빛나는 존재이다. 그 별이 칸트의 위에 빛나는 것은 어두운 하늘에 작은 별빛들이 곧 어두운 인간 세상을 밝게 비추어주는 희망 즉 자율적인 의지가 되는 것이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도덕법칙이다. 칸트의 마음 속 깊이 있는 도덕법칙은 이 세상을 좀 더 밝고 아름답게 만들고 싶다는 칸트의 진정한 소원일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
최성일 지음 / 책동무 논장 / 2002년 10월
평점 :
절판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을 읽는 순간 나는 순간 일본 인문학자인 기다 켄의 “현대사상지도(現代思想地圖)”가 생각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한권의 사상가 및 사상서도 안내하기 좋은 책자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각 사상가와 더불어 그 사상가에 대한 간단한 소개 그리고 그 사상가가 저술한 도서나 혹은 관련 학문분야까지 간단히 소개했다. 그러나 기다 켄의 현대 사상 지도와 다른 점은 현대 사상 지도에서는 어느 현대철학자의 부류를 한곳에 모아 보았다면, 이 책에서는 각자의 사상가 특징에 맞게끔 나열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대사상이 어떻게 진행되고 학문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한눈에 보기 쉬운 것은 현대사상지도이겠지만, 대신 그가 어떤 책을 적고 무슨 사상으로 개략적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그냥 어느 학파와 사상부류가 나누어져 있고, 누가 있는지 그것에 대한 연계성과 그 시초정도만 나온 것이다.


이에 비해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의 경우에는 어느 특정시대에 존재했거나 혹은 현재 존재하는 사상가를 선정하여 그의 생애와 저술서적, 그리고 번역된 국내도서까지 소개했다. 그러니깐 우리가 알면 좋은 사상가들의 어떤 책들을 볼 수 있는지 알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아무리 우수한 사상가나 철학자, 그리고 과학자라도 그가 무슨 책을 저술했는지 무슨 내용으로 적었는지 정보가 없다면 사상을 접해보는 사람에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에서는 그런 사상가에 대한 정보를 듣고 무슨 책이 좋은지 고민하는 사람에게는 정말 좋은 책일 것이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아무런 정보가 없이 사상서적에 손을 대려는 사람에겐 더욱 난해할 책이 될 것이다.


이 책을 접하는 나의 경우는 이제 사상도서에 대한 입문과정에 들어온 사람이고, 막 이제 근대와 현대사상에 대해 접해본 사람이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이 책은 나에게 상당한 많은 지침이 되어 준다. 또한 이 책에서 사상가들로 등장하는 근현대 철학자나 사상가들 사이에서 주요 철학자로 등장한 인물은 카를 마르크스다.


이 책에서 19C에서 가장 위대하고 현대사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인물은 마르크스라고 한다. 아마 그럴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등장한 사상가들에서 마르크스라는 이름이 결코 사라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현대사회에서 그만큼 사회과학이란 분야와 유물론적인 인간관은 인간의 다양한 사유와 사상을 발달시킨 것이다.


이 책에서 등장한 인물로 내가 알던 사람은 “자크 데리다, 장 보드리야르, 발터 벤야민, 롤랑 바르트, 움베르토 에코, 미셀 푸코, 마빈 해리스, 피에르 부르디외, 줄라이 크리스테바, 노암 촘스키, 가라타니 고진, 끌로드 레비스트로스, 체 게바라”가 있었다. 그 중에서 다소 연관이 있어 보이는 인물로 “버트란드 러셀, 빌헬름 라이히, 미하일 바흐친, 게오르크 루카치, 루히드 비트겐슈타이느 한나 아렌트, 칼 포퍼, 르네 지라르”와 같은 사람이 있었다.


내가 이름을 조금이라도 혹은 실제 읽었던 사람도 있었으나, 전혀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어떻게 본다면 이 책을 읽은 사실은 나로 하여금 내가 봐야할 책들이 계속 늘어나고 또 늘어나서 많은 양의 독서량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았다. 최근 그런 느낌이다. 어느 한권을 보려니 다른 책의 이해 없이 힘들고, 그 책을 잡으면 또 다른 책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책이란 인간의 사유를 담은 매체이다. 그래서 그런지 어느 사상서로 통해 사상가를 만나면 또 다른 사상가가 나오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 모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의론
존 롤즈 지음, 황경식 옮김 / 이학사 / 200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내세우는 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정의(定議)와 정의(正義)이다. 특히 후자의 정의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만남과 충돌, 다툼 등을 겪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듯이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도 없고 혼자서는 어떤 행위를 해도 의미가 없다. 결국 인간 정치적인 동물이므로 어느 특정 사회에 소속되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려 한다.


그런 만큼 인간은 혼자가 아닌 전체적인 사회적인 구조에서 정의를 논한다는 것은 분명 아주 오래된 역사의 이야기다. 하지만 이 정의를 논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쉽지가 않다. 정의는 항상 정의롭게 지켜오기 보다는 정의롭지 못하게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아니 정의는 이 세상에 완벽한 이데아(Idea)로서 도래하지 않았기에 사람들을 정의를 찾아 해매거나 혹은 정의를 외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 정의가 완벽하게 갖추어진 사회인 유토피아라면 굳이 정의를 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곧 인간이란 자신들에게 만족하지 않은 욕망에 따라 정의 역시 그 욕망에 따라 움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욕망이라 하여 모두 같을 수가 없다. 가령 쾌락에서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기 인간이 그 쾌락을 어디에 가치를 두는 것일까에 따라 그 가치는 달라진다.


가령 부당하게 남의 나라 및 지역에 침범하여 죄 없는 인간들을 납치하여 자신의 영토에서 농사를 짓도록 강요하는 노예소유주들은 정당한 욕망이 아니다. 하지만 친구나 가족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것을 보고 몸을 날려 대신 희생하는 것은 고귀한 가치가 있다. 이것 역시 쾌락이 없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자신은 희생되더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무사하게 해줄 수 있다는 쾌락이 있는 것이다. 가령 어머니들이 자신의 아이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희생하는 것 역시 자신의 아이가 살아남길 바라는 욕망일 것이다. 단지 그 욕망의 가치는 이루어 말할 수 없는 아름답고 고귀하다는 점이다.


그렇듯이 이 사회에서 인간들은 갖은 욕망을 가지고 살아간다.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기 위해 의식주(衣食住)라는 기본적인 생존인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의식주 영역이 만족하지 못하다. 누구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고 누구는 행복하지 않은 환경에서 태어난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탄생에서 누구를 원망하고 나쁘다고 할 수 없다. 단지 그 태어남의 시초에서 그 자체만으로 누구를 억압할 권리는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 누구에게도 자신이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야할 의무와 권리가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런 기본적인 자세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단지 태생적인 부분에서 모든 것을 결정지어 버리는 일들이 흔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인간관이 등장하는데, 이런 문제가 과연 정의로운지 다룬 것이다. 물론 유리한 태생과 유리하지 않은 태생에서 다소 그 개인에게 주어지는 경제적·사회적인 차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 차로 인해 당사자들에게 모든 것을 결정지어 버리는 행위는 바르지 않다는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건강하다고 해서 행복하다고 하지 않았다. 인간의 행복을 느끼는 것은 인간 본인이 어느 사회적인 모임에서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쳐 그 사회구성원들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아마 인간은 정치적 혹은 사회적인 동물이 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단지 지역적, 인종적, 문화적, 정치적인 차이로 인해 그런 기회를 박탈한다면 그것은 분명 정의롭지 못한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펼칠 기회를 상실하여 평생 자신과 자신의 후예까지도 현재 자신의 위치 이상으로 올라가지 못한다면 희망을 얻을 수 없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존 롤즈의 정의론(正義論)에서는 그런 사회적인 정의에 대해 심도(深度) 있게 다룬 것이다. 물론 1번 독서함에 있어서 모든 것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거기에 책의 수준이 매우 높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벤담, 존 스튜어트 밀, 마르크스, 프로이트 등과 같은 다양한 학문적 영역을 같이 참조하지 않으면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인간에 대한 정의를 논하므로 정의론에서는 다양한 주제와 안건으로 통해 정의에 대해 논한다. 나는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윤리(倫理)라는 것이다. 형이상학(形而上學)적 영역에서 논리, 윤리, 물리 중에서 가장 높게 인정하는 게 윤리이다. 윤리는 모든 인간의 기본이 되어야 필수적인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윤리라는 것은 나를 위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 즉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어야 한다. 그 중에서 다른 사람이어도 나하고 직접적인 관계가 성사가 되면 안될 것이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처럼 자신의 이웃을 사랑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진정 이타심이란 나와 관계없는 제3자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 제3자는 누구로 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최소수혜자이란 점이다. 최소수혜자는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매우 약한 위치에 놓인 사람으로서 우리 사회에서 본다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부류이다. 진정한 사회적 정의를 놓고 본다면 이것은 조금 깊이 생각해 볼 문제이다. 이들은 경제적·사회적인 불충족으로 자신들의 인생에 아무런 희망을 느끼지 못하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입장으로 여러 가지 정치적·문화적인 기회를 놓치게 되거나 특히 이들의 2세들은 교육에 대한 기회를 박탈하게 된다면 그것은 정의롭다고 여길 수 없는 것이다. 인간에겐 인간으로서 사회적·문화적으로 공평하게 누릴 평등한 자유가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질적인 부분에서 같이 즐기는 것까지는 분명 잘 못된 것이나, 그 사람들이 사회에서 살아감에 있어서 아무런 불이익을 당하면 안되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만약 이런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한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라 부정의한 사회이다. 부정의한 사회가 되면 결국 누군가는 그만큼의 피해를 가져갈 수밖에 없다. 오로지 부정의는 더 크고 무거운 부정의를 막기 위해 존재해야하는 필요악적인 부분이다. 부정의 그 자체가 하나의 당위성을 지니게 된다면 그 사회는 결코 행복하지 않은 사회다.


문제는 이런 부정의에 논함에 있어서 당하는 주체가 언제나 사회적·경제적인 약자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육(敎育)의 기회, 문화(文化)의 기회, 정치(政治)의 기회가 매우 적어지기 때문이다. 배우지 못함에 따라 올바른 판단력을 상실하고, 배우지 못함에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으며, 올바른 판단과 문화의 향유를 느낄 수 없다면 인간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좋은 활동을 할 수 없다.


분명 이런 문제는 심각할 수 있다. 존 롤즈는 경제 자유주의 체계에서의 개인의 재산영역을 인정하나 거기에 맞추어 그런 재산영역에 해당되지 못한 개인들에게도 충분한 사회적인 혜택을 누려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공리주의(功利主義)적인 부분으로 넘어온다면 이런 최소수혜자의 입장을 같이 고려하여 이들에게 행복이 갈 수 있는 최대 행복을 추구함이다.


그런데 이런 공리주의에 논함에 있어서 공리라는 것은 모두에게 이익이 가는 것인데, 사람들은 그런 이익에 대해 잘못 판단하는 부분이 매우 많다. 대부분 사람들은 공리주의에 대해 생각한다면 어느 이익을 대해 어느 소수에 대해 배제함으로 그 이익을 만들어 보는 것이 공리주의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건 공리주의가 아니라 집단이기주의(集團利己主義)이고 또한 자신 이익을 합리화하는 것이다.


그런 비윤리적인 태도임에도 불구하고 집단이기주의가 항상 발현하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인간이 자기 욕망에 따라 살아가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동물은 자신의 욕구가 만족하면 그것으로 멈추지만, 인간의 욕구는 한시적이지 못한 상시적으로 변하는 욕망이라는 점이다. 그런 욕망이 다수의 인간으로 구성된 논리로 이루어지면 이른바 자기 합리화가 시작되는 점이다.


인간이 이익에 연연하면 서로 다른 가치를 가지거나 생활권 내지 사고를 가진 인간이라도 모두 같은 뜻을 이루게 된다. 그런 대다수의 구성원이 모이면 그것은 하나의 정의로 변하게 되고, 거기서 반대되는 쪽이 소수의 약자일 경우 그대로 배제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들의 이익을 위한 논리는 하나의 정의로 변하여 결국 정의가 아닌 부정의로서 정의를 실천(實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자유 경제주의에서 타인의 자유를 박탈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얻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슬픈 사실은 이런 타인을 자유를 박탈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는 부류는 자신들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역으로 그 소수약자들이 거세게 반항하면 다수결의 원칙으로 배제하려고 한다. 사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것도 공리주의를 논한다면 소수약자를 배제함에서 그 사회는 이미 정의롭지 못한 사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공리주의적인 정의는 자신의 이익에 치중하길 보다는 타인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이타심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부당한 부정의에 대해 대항하고 비판하는 것은 정의로운 가치를 실현하는 국민이다. 특히나 존 롤즈의 정의론에서 만약 어떤 국가의 법과 제도가 정의롭지 못하거나 혹은 잘못된 것이라면 국민이 이에 대해 양심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부정의한 법과 제도 그리고 사회에 대해 비판하려면 그 비판하는 당사자들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선택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국가는 이런 국민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문제를 서로 해결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국가조직에서 권력과 부를 가진 소수자가 자신과 자신의 이해관계에 해당되는 사람을 위해서 국민의 의지를 무시하게 될 경우 그것은 충분히 정의롭지 못한 것이다.


이 책에서는 존 스튜어트 밀의 의견이 중간에 간간히 보인다. 존 스튜어트 밀은 정치에서 군중보다는 일부 시민들의 정치를 선택했다. 물론 지금 국민직선제로 뽑는 정치가들 역시 소수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정치를 임하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우수한 두뇌와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사람인만큼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도덕심과 윤리의식이다. 만약 이들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충분한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그 사회는 많은 진통을 겪게 된다는 점이다.


정치라는 것은 무릇 나라를 다스리고,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 국민들이 모두 평등한 상황이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국민들은 정치적·사상적·종교적 등 다양한 자유를 누릴 자유가 있다. 자유와 평등은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가져야 할 의무와 권리이다. 그러나 자유와 평등은 자신 혼자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자유와 평등이 존재하는 것은 인간사회가 존재하지 않은 이상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자유와 평등을 위한 올바른 정의는 무엇일까? 존 롤즈는 평생 정의에 대해 연구하고 깊이 고찰해 왔다. 그것은 바로 상대방 입장을 이해해주고 알아주는 이타심과 윤리의식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본 Ⅰ-2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12
칼 마르크스 지음, 강신준 옮김 / 길(도서출판) / 200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르크스 자본을 읽게 된 동기는 정말 많은 것 같다. 예전에 사회학 도서나 혹은 인문학 도서에서 마르크스에 관련된 내용이 정말 많았다. 삐에르 브르디외의 “구분짓기” 상권을 보다가 지금 잠시 대기 상태인데, 거기서 나온 것은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따른 문화적인 수준과 그리고 그 차이를 설명하는데, 보면서 느낀 것은 미셀 푸코라는 니체를 따라 계보적인 학문을 연구한 것을 알아야 했고, 또 하나는 사회구조적인 분석이란 점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내용을 알아야 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그가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점과 그가 외치던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되어 간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도 마르크스의 이론이 필요했다. 그리고 내가 각종 만화애니메이션 및 코스프레 문화비평을 적을 때 많은 논문과 서적을 인용하거나 참고했는데, 이때 만화애니메이션 관련도서에서도 마르크스의 영향은 피할 수 없었다.

그것은 독일(서독 당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문화에 대한 이론적인 부분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내용이 나온 부분은 1998년 한국만화애니메이션학회에서 투고된 논문을 모아 정리한 “일본 애니메이션의 분석과 비판”이란 서적인데, 여기서 처음으로 프랑크푸르트학파에 대한 내용을 알았다.

<'문화산업'이라는 용어는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 논의되기 시작한 일종의 '이데올로기 조정기능'의 개념이다. 산업혁명 이후 갑자기 등장하게 된 신흥자본가들이 기계를 움직이기 위한 노동력과 반복적인 작업을 분업화하였고, 거기에는 발생되는 비인간화의 노동문제를 잠재우기 위해 고급문화에 국한되었던 문화라는 유형을 대중문화로 전환, 확대시키면서 문화는 대중적이고 상품적인 개념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결국 초기에 등장한 문화산업의 개념은 통제적인 이데올로기를 양사하기 위한 문화산업화의 매커니즘이었고, 연구자들은 그러한 개념을 통해 사회적 권력과 자본이 양산시키는 문화담론의 이데올로기를 분석하여 왔던 것이다.>

이들의 학문에 기초가 되었던 학문적 선도자는 프랑스 구조주의처럼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지그문트 프로이트, 그리고 카를 마르크스였다. 사실 현대사상88이란 서적에서도 문화연구나 비평에서 마르크스의 역할은 엄청난 것은 분명했다. 영국의 문화연구를 전문적으로 하는 학문단체도 결국 마르크스의 과학적인 사고가 엄청난 기여한 것이 분명했다. 일단 마르크스의 도서는 사회과학 도서라고 하는데, 과학에서 물리학 같은 자연과학은 전형적인 과학이고, 마르크스의 자본과 같은 것은 비전형적인 과학이라고 한다.

마르크스의 도서인 자본을 읽다보면 그가 허황된 이상을 주지시키려 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의 문제와 거기에 대한 원인 분석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자본은 상당한 과학적이고 분별력을 갖춘 도서이다. 그의 도서인 자본을 읽어보면서 내가 이 자본을 읽기 전에 한국사회 및 세계사회 경제적인 흐름에 대한 고민을 이미 150년 전에 완성되었다는 사실에 나는 소름끼칠 정도로 무서웠다.

그것은 노동력의 착취문제, 임금문제이었다. 특히 임금문제에 대해 마르크스의 지적할 때 그의 사료에 적힌 기록들은 참으로 잔혹했다. 문제는 국민 대부분이 열심히 노동을 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에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다. 하루에 일을 아침 6시에 시작하여 밤 10시까지 일요일 제외한 늘상 무리한 노동해도 가난은 벗어날 수 없다. 게다가 어떤 경우에는 휴일에도 노동의 피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도 가난은 되풀이되고 국민들은 각종 질병과 빈곤에 시달린다.

이들은 늘 일을 하고 늘 검소하게 산다. 그런데도 대규모 자본가들과 일부 몰지각한 종교인들은 국민들에게 검소한 생활을 요구한다. 그들을 가난하게 함으로써 부지런하게 된다는 말도 안되는 논리에서 비논리적인 사고방식에 기가 막혔다. 사실 노동을 하는데 있어서 충분한 휴식과 음식이 보장되어야 하는데, 그런 주급으로 1일 필수영양소를 채울 수 없었으며, 게다가 음식점에서 파는 것도 자본가들이 소유하여 평소 시세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받아 폭리를 취한다는 점이다.

만약 노동자들이 그들의 음식과 생활필수품, 그리고 좁고 더럽고 사람이 살기 비적당한 집을 구매하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것은 자본가의 일을 따서 생활을 영위하려면 자본가가 억지로 만든 집에서 살아 그들의 음식을 사줘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자본주의 이전에 농경사회에서 농민들은 충분히 자급자족이 가능하나 이제 이것이 불가능해졌다. 농지는 대지주에서 자본가들에 의해 수탈되고, 수탈당한 농지는 이제 목축지로 변경되어 주민들을 모두 영주나 귀족의 대지에서 물러가게 했다.

집을 잃고 농지 잃은 농민은 다시 공업도시의 프롤레타리아 노동자로 전환되어 기존 도시 빈민과 경쟁하게 되고, 이것은 다시 임금삭감과 무리한 노동조건을 요구해버린다. 오늘날에도 이런 말이 있다. 직장에서 일을 하다가 비윤리적인 횡포에 반항하면 “너 아니더라도 사람 많다”라는 폭력적인 언사를 날린다. 그런 말투가 오늘날에도 그러하면 당시는 오죽하겠는가? 그래도 먹고살기 위해서는 일을 할 수 밖에 없다.

지나친 일로 육체는 병이 들어 쉽게 늙어 죽어버리고, 정신은 피폐해져서 더 이상의 감수성이나 이성능력을 지니지 못한다. 내가 가장 놀란 부분은 바로 이런 노동의 착취에서 자본가들의 횡포가 어디까지 이르게 되어 어떤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가령 당시 노동자들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노동력을 창출할 수 있는 어린아이를 생산해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어린아이들이 태어나면 벌써 10대 성장기에 충분한 영양소를 공급해주지 못할 망정 공장이나 농장의 노예 아닌 노예로 부려먹었다.

성인 1명이 하는 일을 아이 4명으로 하면 충분히 급료 대체 가능하므로, 성인남성을 극도의 노동력을 요구하는 철로 설치 및 탄광으로 보냈다. 그런데 차후 탄광에도 여자와 어린아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아이들의 노동력 착취는 그들이 어린 나이라는 점에서 저항할 수 없는 점과 부모들이 아이들을 보호하기 보다는 아이들로 통해 아이들의 급료까지 착복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 아이들이 고아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이런 아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마음의 양식 대신 폭력과 무지의 양식으로 성장함에 따라 그들은 다시 이런 비정상적인 윤리관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이런 부분이 가장 심각했던 것은 빼앗긴 토지에 차지농업가가 잉여생산물을 얻기 위해 다시 재하수인을 고용한 이야기편이다. 차지농업가가 집단원을 고용하고 그 집단원의 마스터 성인남자를 잘 섭외해서 그가 착취를 더 활성화하기를 만드는 것이다. 집단원의 마스터는 자신의 그룹에 주로 아이들과 여자들로 구성하는데, 자본력에서 대지주인 ☞ 차지농업가 ☞ 집단원 마스터로 이어지므로 집단원 마스터는 상위 자본가들에게 금전을 주고 난뒤에 자신의 것도 가져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아이들을 탄압했겠는가?
 

게다가 아이들에게 저속한 것을 일찍 가르치게 하여 그들에게 서로 난교(亂攪)하도록 하여 여자아이들이 14세 정도가 되어 벌써 임신하게 만들었다. 아이 아버지는 분명 그 집단원의 어느 소년일 것이다. 14세에 아이를 가졌고 게다가 어린 시절 사랑이나 윤리관을 배우지 못했으므로 얼마나 이기심으로 뭉쳤을까? 여자아이가 낳은 아기는 그대로 그 집단원에서 일할 노동력으로 받아들인다. 여기는 만4세부터 일을 시킨다고 하니 악순환은 끊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가 발생한 원인은 바로 올바른 경제활동이 할 수 있게 하는 임금체계의 문제, 그리고 노동자로 하여금 안전과 건강을 배려하는 산업안전문제가 정말 열악하다는 점 이외에 생각할 수 없다. 지나친 노동도 문제나 작업여건이 좋지 않아 코를 막지 못하면 기절할 듯한 작업장과 그들의 자택이 노동자들을 병들게 만든다. 각종 전염병이 걸려 어느 전염병 환자가 발생했는데, 그를 격리치료하기 보다는 그저 같은 집안에 식구들과 머물게 됨으로써 전염병의 확산은 비극적인 결말을 낳는다.

지금이야 이 정도로 노동시키면 분명 문제가 발생한다. 그런다고 이런 비인간적인 처사 수준까지 아니더라도 여전히 노동문제, 임금문제, 재해문제는 잔존되어 있다. 임금문제와 근로조건에서 노동자는 생활영위에 합당함과 그리고 건강에 위험하지 않을 정도의 조건을 주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도 정말 이건 아니다! 라는 사고와 임금문제가 터진다. 그들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으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든 사회적인 구조에서 낙담하며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최근 물가가 급속도로 올라가며 생필품의 상승은 곧바로 노동자의 생계마져 위협한다. 그런데 조금 다른 점은 과거에는 단순히 육체적인 노동을 하던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에서 일어난다면 지금은 반드시 노동력을 동원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에서만 일어난 것만은 아니다. 
 

또한 나는 이책을 보며 아동착취 부분에서 조금 지금과 다른 모습에 대해 생각한다. 당시 노동자의 어린 아이들은 모두 공장이나 탄광, 농지에서 격한 노동을 했다면 지금은 미성년자 고용문제가 매우 시끄러운 시대다. 그런데 당시 마르크스가 보던 시절에 아이들은 학교에 의무적인 조건이 전제되지 않았으나 지금은 의무조건으로 달린다. 최근 등록금문제로 많이 시끄러운 한국사회에서 나는 왜 이런 문제가 필연적으로 생기지 않을 수가 없을까 라고 고민한다.

최근 산업계 특히 중소기업의 공장에서는 인력에 허덕이고, 사람들은 거기를 가지 않으려 한다. 높은 학력을 가짐으로써 우수한 직업을 갖고 좋은 환경에서 높은 급료를 받기를 원한다. 그러면 어디 좋은 곳에는 사람들이 몰리고 나쁜 곳에는 몰리지 않아 인원배치 균형에서  문제가 발생된다. 흔히 한국에서 공고를 가거나 혹은 공장에서 일을 하면 인간다운 인간대접을 해주지 않는다.

이것이 한국사회의 고학력 문제, 그리고 대학생들의 증가와 등록금의 문제다. 만약 공업시설에서 좋은 근로조건과 임금문제, 안전문제를 해결했다면 반드시 대학에 안가도 살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지적한 고정자본 이상으로 잉여생산물을 만들어 가치를 높여 자본가들에게 지나친 착복을 한다면 문제가 계속 유지될 것이다. 공장 노동자들의 업무가 여전히 3D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그 3D에 대한 적당한 보상체계와 근로조건만 제시하면 되는데, 그것이 어렵다.

한국은 다른 나라처럼 자원이 풍부하지 못하다. 오로지 인적 자원으로 수출입 무역이 관로이다. 그렇다면 무역을 하게 된다면 그 무역선 안에 들어있는 물건을 만드는 사람들이 얼마나 잘 관리하여 적절하게 운영해야하는 것이다. 그들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망가지게 된다면 우리는 당장은 몰라도 앞으로 살아갈 수단을 상실할 수 있는 위험에 봉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나라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체되는 부분이나, 여전히 한국은 신생아의 비율이 적어지고 노인이 증가하는 기형적인 인구비율을 가지고 있다. 결국 노동자들이 생산한 물건을 다른 노동자에게 판매해야 하는데, 그 노동자의 영구적인 지속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시장경제에서 소비자들이 늘어야지 기업이 생존하는 것인데 내수적인 자국민들이 줄어드는 것은 결국 국내시장 규모 축소로 이어진다.

한국사회에서 아이들을 많이 낳자는 말귀가 나오는데, 나는 정말 어리석은 구호라고 생각한다. 아이 1명당 들어가는 금전과 그들을 키우기 위한 부모의 노고는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한국이 과거시대보다 생활의 수준을 올라갔으나 오히려 아이들의 생산력은 떨어진다. 그것을 본다면 정말 생활의 질이 올라갔는가? 물질적인 부분은 증대해도 그 물질에 상응하는 정신적, 사회적 부분은 증가했는가? 
 

전에 출장가면서 옆에 직장상사와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 지역 아파트단지가 있는데, 이쪽 아파트는 공무원아파트라 평수가 작고, 이쪽 아파트는 잘 사는 집이라 평수가 넓다고 한다. 어느날 학교에서 선생하던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에게 친구를 데리고 오라고 했는데, 넓은 평수 아파트 아이들이 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 이유는 넓은 평수를 지닌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의 부모들이 공무원 아파트에 사는 아이와 친구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알고보면 다 같은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식으로 사람을 구분짓었던 것이다!

마르크스의 자본과 밀접한 내용은 아니라도 자본은 윤리적인 가치와 양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 결국 아이들의 인식까지 지배한다. 이것이 한국 어느 도시지역에 위치한 10여년 전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하고 서울경기지방은 어떠하랴? 인간이 인간적인 존엄성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경제적 상황에 좌우되니 인간이 윤리적이기 보다는 개인주의를 넘어 이기주의로 넘어간다. 마르크스의 자본 1-2를 읽으면서 그가 제기한 자본의 본질을 보면서 과연 그는 무엇을 중시하고 있는가? 결국 인간의 존엄성이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려고 하는데, 그것이 안된다는 점은 분명 문제가 있다. 돈이란 인간의 생활을 편리하게 유용하게 살기 위해 탄생했지만, 결국 돈이란 화폐가 인간을 매체할 수 있는 조건이 될 때 나는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불평등을 생기게 되고, 그 불평등을 만드는 것은 가진자 중에서 양심과 윤리의식을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 자에 의해 엇갈린다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