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을 보는 눈 - 왜 통일을 해야 하느냐고 묻는 이들을 위한 통일론 세상을 읽는 눈
이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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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읽어보았던 에티엔 발리바르(파리10대학 교수)의 <정치체에 대한 권리>라는 책을 보면서 세계 정치흐름을 조금 파악한 적이 있었다. 시장자본주의와 국가자본주의(소비에트연방의 추구한 전시공산주의)의 대결에서 결국 시장자본주의의 승리로 결착이 났다. 그 조짐이 보인 것은 독일 베를린 장벽의 허물어진 것에서 볼 수 있다. 스탈린이 동유럽을 점령하면서 서유럽과 동유럽은 자본주의의 경계선상에서 대립하고 있었다.

 

물론 독일이나 프랑스와 같이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나라에서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 자체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들에게 사상이념은 하나의 학문적 영역으로 변모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독일통일 이후 소비에트연방 해체는 상당한 큰 세계적인 여파로 몰려왔다. 이른바 탈(脫)이데올로기라는 명제가 생겼다는 점이다. 세계 흐름에서 국가 간의 대립구도는 냉전 시대의 좌우 이데올로기라는 게 아니라 오히려 탈(脫)이데올로기가 도리어 더 심각한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했다.

 

즉 원시의 신화세계가 계몽이란 억압 속에서 새로운 신화로 태어나서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듯이 스펙타클의 전복은 새로운 스펙타클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런 스펙타클의 전복에서 등장한 것들은 기존 체계에 대한 정치적 이념을 고수하거나 혹은 변모되어도 인간사회에 펼쳐진 정치적 가치관은 오히려 저조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국제사회로 넘어오면서 정치적 극단적 수단인 전쟁이 예전에는 이데올로기 전쟁에서 이제는 경제적 이익에 대한 전략으로 바뀌었다.

 

전쟁이란 한 마디로 과거 유럽에서 신세계를 탐험하듯이 큰 시장과 재원을 확보하는 도구로 사용된 것이다. 무기와 병력은 적을 죽인다는 명제 아래 실재적으로는 자국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바뀐 것이다. 그런 세계적인 흐름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고 물어 본다면 참으로 난감하다. 우리는 남에게 침략을 수도 없이 받으면서 침략하러 가는 것은 별로 사례가 없다. 게다가 이제는 제일 가까운 적대국이 예전에는 같은 편이었는데, 지금은 최악의 존재로 변했다.

 

내가 어릴 적 그러니깐 초등학교에 다닐 시절에 이 노래를 정말 많이 부른 기억이 난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말이다. 심지어 가사에는 꿈에서도 찾아와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할 정도니 통일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통일은 과연 제대로 될 가능성이나 보이는가? 솔직히 말하여 지금 나는 통일에 대해선 반대의 입장이다. 당장 통일이 되면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이질감으로 인해 오히려 혼란은 야기할 뿐이다. 그런다고 통일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런 방법론적인 영역이 문제인 것이다. 통일을 보는 눈에서 과거 북한정치에 대한 전략적 외교업무를 담당하던 이종석 한반도평화포럼 상임이사가 자신이 가진 정보력과 세계 흐름과 앞으로의 문제를 토대로 책을 내었다. 이 책을 보면서 대부분 내가 가진 생각을 이종석 상임이사가 많이 언급했고, 거기에 대한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영역으로 설명했다. 방금 위에서 세계가 탈(脫)이데올로기가 되어 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통용되지 않을 나라는 진짜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극소수다. 특히 북한과 같은 경우 전 세계적으로 무역을 할 수 있는 국가도 정해져 있으며, 고립된 공간 속에서 더욱 자신을 고립하는 독재정치체계를 가지고 있다.

 

독재적인 정치수단은 어느 국가라도 가지고 있으나, 북한의 경우 겉으로는 공산화라는 슬로건을 걸고 있으나, 일본 대표적 문학평론가 및 사상가인 가라타니 고진의 서적 <근대문학의 종언>을 참고하면 북한은 오히려 공산화라기보다는 그런 슬로건을 내세운 이씨 조선의 연장이라고 했다. 사실 겉으로 그러하나 주체사상에 따른 3대 부자 세습은 독재정치의 정형적 모습이다. 그런다고 하여 우리가 여기에 그저 넋만 잃고 바라볼 수만은 없다.

 

매년 국방군사 예산이 국가예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이산가족 문제와 북한과의 외교마찰이 국내 정치, 경제, 사회에 큰 여파를 미친다. 과거 김일성의 사망에는 라면과 생수 사재기라는 혼란사태를 빚었다. 결국 그 일은 해프닝으로 끝났으나, 약 20년 전의 한국사회에서 그 사건은 매우 큰 충격인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김정일의 사망으로 국내 정치사회가 어지러운 것이 아니었나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이번 일은 조용히 잘 넘어갔다. 그런다고 화약고 앞에 라이터는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켤 수 있기에 방심은 금물이다.

 

그런다고 언제까지 이런 긴장사태를 유지할 수는 없다. 군대생활을 하는 남자라면 누구나 북한과의 외교문제가 발발하면 모두 두려움으로 가득해지고, 그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동안 그들의 가족들은 심한 우울증 및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예전에 북한 잠수함이 강원도에 침투할 때 내가 알던 사람이 그 근방 부대에 근무했다고 한다. 이때 장병들은 모두 유서를 작성하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서 봉투에 동봉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전쟁이란 극단적 행위는 결국 인간의 존엄한 생명과 동시에 재산을 망가뜨리고, 게다가 그 사망자 주변 사람들의 생활까지 파괴해 버린다. 과거 연평해전을 돌아보면 그들의 죽음은 너무 허무하고, 그들의 가족들은 오열에 분노했다. 그들에겐 북한군사정권은 용서할 수 없는 대상이나, 문제는 그런 일들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면 더욱 심각한 일이 될 것이다. 젊은 생명이 사라질 경우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매우 손실이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북한과 조율을 할 것인가? 통일과 한반도 평화란 말은 과거 정부부터 시작된 언어이다. 한반도 안정으로 통해 국민들의 안정된 생활과 외교적으로 안정된 정세로 외국인 투자자가 국내에 투자할 수 있고, 주식이나 자본의 유통도 원활하게 한다. 그런데 그 방법은 어떻게 하냐는 것이다. 북한의 인권은 매우 심각하고, 기아와 질병 역시 심각하다. 여기서 모순이 북한의 인권이 심각한 것은 누구나 인정하고, 주민들이 기아로 고통 받는 것도 안다. 그러면 그런 주민의 인권을 어떻게 개선해 나가는 것이다.

 

사회의 시민단체로 할 수 없고, 적십자사 활동에도 제한이 있다. 언제까지나 중국이나 미국의 외교수단에 밀릴 수 없는 노릇이다. 주민들의 인권을 생각한다면 결국은 주민들의 정치적 통치권을 지닌 북한정부와의 소통만이 유일한 해법이다. 그런데 지금 상황으로 매우 어렵다. 극단적인 양국의 대치와 그 대치로 인해 양국의 국민들마저 서로에 대하여 증오하기 때문이다. 통일을 추구하고 한반도평화를 추구하는데, 그런 슬로건은 대립에 의해서는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을 뿐이다.

 

통일이 제일 불가능한 것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구조도 있겠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문화적 영역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서로 간의 정보와 대화도 없이 그저 대립의 각을 세운다는 것만으로 통일이 오히려 독이 되는 셈이다. 그런다고 전쟁으로 무력통일을 할 경우 국내 영토가 피폐해져 심각한 국가위기를 맞이할 수 있고, 인권문제 역시 최악의 상황으로 갈 수 있다. 아니라면 우리는 1등 국민, 너희들은 2등 국민으로 차별대우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결국 무력적인 대치에서 무력적인 방법을 동원하면 제로섬 게임처럼 답은 없어지는 것이다.

 

현재 국제정세에서 미국과 중국이 최고의 강대국으로 자리 잡고 있다. 미국은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최고이고, 중국 역시 많은 인구로 통해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국이 우리와 외교와 무역을 시작하면서 동시에 북한과의 외교를 유지하고 있다. 중국이란 국가가 결국 중간에 북한과 한국을 조율하면서 자국의 이익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중국이란 국가는 겉으로 정치체계가 공산당을 유지한 것처럼 보이나, 실리적으로는 시장경제주의를 충실하게 걷고 있다.

 

게다가 그런 상황에서 동북공정이나 외교문제를 끊임없이 우리 정부와 국민을 도발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반드시 전쟁이란 것은 무력수단이라는 극단적 정치적 수단이 아니라도 충분히 많다는 점이다. 그런다고 하여 여기에 우리가 극단적으로 대처할 경우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갈 수 있고, 그런다고 하여 못 보는 채 외면할 수 없다. 국내에서 자원이 부족하여 원자재 수입으로 통한 재가공 수출이 주된 국가경제구조로서 세계흐름을 충분히 이해하여 거기에 대응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걸림돌이 되면서 가장 전환점이 되는 것은 북한이다. 그런데 우리는 상황이 어떠한가? 단순히 좌우 이데올로기의 프레임에 넘어가서 거기 안에 갇혀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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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신에 목숨을 건 조선의 아웃사이더
노대환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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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아웃사이더란 존재하는 법이다. 아웃사이더가 있기에 우리는 정녕 새롭고 다른 영역에 손을 넓히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왜 아웃사이더란 존재가 그토록 아름답지 못하고 오히려 천대받아야 하는 것일까? 아웃사이더는 현실세계에 발을 맞추어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으로 혹은 더 앞으로 가는 셈이다.

 

가령 유럽사회에서 전위예술이란 아방가르드처럼 전위적으로 앞을 향해 가는 존재라고 볼 수 있을까? 아니면 그렇지 못한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아방가르드는 전위적이고 진취적이기도 하나 진보의 극치와 극좌적인 요소를 보인다. 가령 우리가 아는 예술가 중에서 파블로 피카소란 인물을 보자. 그는 매우 예술적인 인물이다. 너무 예술적이라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존재다.

 

그는 예술이란 삶을 광학적으로 보는 존재고, 그 광학은 너무나도 굴절이 심하여 우리가 볼 수 없는 초현실적 영역에서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초현실적인 영역을 추구했기에 그의 예술은 현실을 잘 반영했다고 보는 것이다. 가령 게로니카라는 전쟁의 비극성을 다룬 작품이나 우는 여자를 보자. 그것이 현실을 그대로 있는 모습만 담기보다는 그 이상적으로 담았다.

 

그렇게 보이는 것이 자연스럽지 못하니 오히려 인간에게 사유를 전달하는 셈이다. 예술이란 그런 사유를 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피카소가 20세기 거장미술가라고 해도 일단 그도 아웃사이더였다. 그도 마르크스주의자였고, 스페인 내전의 아픔도 보고, 내가 살아가는 한국전의 비극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가 원한 것은 인간의 해방이요 인간의 자유다.

 

감옥에서 갇혀 있을 때 간수와 대화를 나눌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는 그냥 감옥에 갇혀 있지만, 사람들은 세상의 감옥에 갇혀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는 역시 아웃사이더였다. 단지 아웃사이더가 어느덧 아웃사이더가 아닌 것처럼 당시 사회에서 매우 소외당한 자들이 혹은 멸시되거나 또는 화근의 대상이 되던 이들이 오늘날 살아가는 우리에게 새로운 인상을 건네준다.

 

그들이 하고자한 행동과 그들이 주창한 말들이 오늘날 우리가 보아도 상식을 뛰어넘은 하나의 신념을 보이기 때문이다. 신념이란 아름답다고 생각하나, 그 신념을 지키는 것은 곧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책 제목처럼 조선의 아웃사이더인 만큼 당시 조선시대라는 특성에서 아웃사이더는 매우 위험하다. 대부분 인물을 보자면 조선시대에 글을 기본적으로 보고 적을 수 있는 양반신분들이다. 혹은 서자 정도로 나온다. 그들에게 주어진 삶이 왜 그리도 비참한가?

 

오늘날 한국에서 본다면 매우 보수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보수는 정치적 영역의 보수가 아니라 전통적인 문화의 보수이다. 착각을 배제하기 위해 제사를 지내고, 가부장제를 중시하는 그런 조선시대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보수로 본다면 지금의 보수적인 정치영역과는 무관한 영역이다. 차라리 전통주의적인 인물이라면 납득할 수 있겠다. 그런 점에서 조선시대의 시대상을 보자.

 

봉건적 군주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조선은 사농공상이다. 선비, 농민, 장인, 장사꾼들이 4가지 계급으로 이루어진 사회다. 조선의 사대부 즉 선비들은 막강한 권력을 가졌다. 그들은 유학 그중에 주자학이란 성리학으로 통해 너무 형이상학적인 영역에서 정치를 실현했다. 가령 여기 주인공 중에서 윤휴라는 인물을 보자. 개인적으로 조선왕조 내에서 탁월한 임금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광해군과 정조로 뽑겠다.

 

태종과 세종에서 태종의 피바람으로 세종을 변하게 왕권을 실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이란 달랐다. 그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인해 조선영토가 전쟁터로 변한 것을 아버지 선조를 대신하여 복구시켰고, 게다가 명이 지고 청이 떠오르고 있음을 파악하여 중립적인 실리외교로 통해 전쟁을 피하려고 했다. 전쟁이 닥치면 제일 먼저 피해가는 자들은 당연히 백성이다. 그 백성의 고통을 짊어지게 하는 것은 군자로서 도리가 아니며, 공자의 정치철학에서 가장 피해야 할 점이다.

 

그러나 문제는 오히려 당시 양반들은 자기들의 정치적 헤게모니에 대해 집착하는 바람에 광해군을 억지로 폐위하는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청과의 전쟁으로 임금이 외국장수에게 수치를 받도록 했다. 그 후에 그렇게 만들었던 강경론자들이 결국 청에 머리 숙여 조선이 망하는 그 순간까지 감투에 의지했다. 정치란 권력에 향한 의지인가? 조선이란 국가는 그렇다. 힘도 없으면서 명분과 체면만 살리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도 나 몰라라 한 시기였다. 그런 시대에 아웃사이더로 낙인찍히면 그야말로 출세와 생명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아웃사이더들은 그런 사회에서 자기 목소리만을 지키고 살아가고 있었다. 때로는 변화하는 세상에 유동하여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변화해야 했는데, 변화하지 않아 도태했고, 때로는 최전방 저격수로 천주학을 비판했던 김치진이란 인물이 도리어 역적 같은 존재로 변모되었다. 그들은 그 당시 묻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 한 권에서는 매우 매력 있는 인물로 변했다. 안타깝게도 이 책은 여성들은 없고 오로지 남성만 있다. 조선시대가 사대부사회도 있지만, 남성우월주의가 뿌리 깊은 세상이기에 매우 보수적인 것이다. 그래도 남자들은 바보 같은 남자들을 좋아한다. 바보들은 이기심이 없고, 배신을 하지 않는 점이다.

 

그러나 늘 그들의 마지막은 비참하다. 바보 같이 사는 것은 곧 자신의 앞날을 한치 앞을 볼 수 없음과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보가 낭만적이고 끌리는 이유는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없는 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별 것 없는 존재일 수 있으나 평생 찾을 수 없는 그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자기만의 신념이요 철학이다. 단지 남의 눈치나 보고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보는 위대하고도 어리석은 도전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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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붕괴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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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공학과 출신으로서 환경문제에 대한 기사나 이야기가 나오면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이미 사전에 일어나서 문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그전부터 종종 했던 일들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굵직한 문제나 예전부터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던 일들은 계속 부딪히게 된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주변 사람과 토론해보아도 결국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우려한 일들로 연결되어 버린다.

 

그래서인지 대부분 환경을 연구하거나 공부하는 사람들 사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회의적 내지 절망적이라고 볼 수 있다. 회의적이란 것은 그 문제가 일어날 것을 미리 예견했지만 아무런 조치도 없이 그저 그대로 보는 것에서 느끼는 감정이기도 하고, 절망적이란 말은 그 일이 발생하여 절망이기보다는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고자 하는 환경이란 미래에서 희망이란 단어가 과연 존재하는가?

 

항상 그것을 고민할 수밖에 없으나 현실에서 원점에서 맴돌 수 없기에 자기모순이란 덫에 빠지고 만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개인적 환경인으로서는 판단할 수 있으나 개인적인 환경인으로서는 그것을 조절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진실로 그것을 막아낼 수 없는 개인적 능력이 아닌 정치적인 역량에서 말이다. 환경문제를 왜 그렇게 중요할까?

 

우리들은 항상 환경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환경 중요하지!” 혹은 “환경 그게 뭐가 중요해”라고 말이다. 웃기게도 그런 말투를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아닌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전반적인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투다. 한 사람이 그런 말을 할 리가 있나 하지만, 사실이다. 왜냐면 자기 이익 앞에서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 환경이고, 자기 이익과 무관하면 환경만큼 소중한 것이 없다.

 

만약 오늘 당신의 집에 갔는데, 집 앞에 도로공사 중이다. 도로공사를 하면 대개 굴삭기나 덤프트럭과 같은 중장비들이 오고간다. 중장비가 오고가면 소음진동이 기본이고, 디젤연료를 다량으로 소비하므로 고온고열의 매연이 나온다. 만약 날씨가 더운 여름이라면 상당한 불쾌지수로 환산된다. 왜냐하면 대부분 여름철에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은 이상 창문을 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창문 너머로 매연의 악취와 더위의 가스를 느낀다면 기분이 좋을까? 본인은 그렇게 느끼겠지만, 주변 사람들과는 무관하다. 기껏 해보았자 차량이동 시에 도로가 협소함에 따른 짜증나는 기분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그 금방에 있어야 하는 사람으로서는 불쾌하기 짝이 없다. 그러면 누구는 환경 중요하지! 누구는 환경 그게 무슨 대수이냐고 말하는 것은 당연지사가 아닐까?

 

이런 사소한 건들도 그러한데, 만약 환경적인 요소가 단순히 도시화된 요소가 아닌 자연적인 대상이라면 어떨까? 인간은 90일 앞에만 본다는 이 책의 본문처럼 그건 사실인 것 같다. 특히 환경공학과를 나와 환경영향평가 업무를 하는 입장에서 보면 나도 어리석으나 왜 인간들은 이토록 어리석은가라는 한탄을 내뱉게 한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문명의 붕괴>를 읽다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학부시절에 각각 여러 교수님에게 강의 받던 대기환경, 수질환경, 토양지하수, 환경위생학, 생태학, 폐기물처리 등등을 말이다. 그것은 각기 다른 과목으로 배우나 결론은 한 지점에서 맞춘다. 그리고 그 지점은 인간의 위기이다. 왜냐고? 당신이라면 탈황장치도 없이 뿜어 오르는 공장매연을 즐겁게 마실 수 있는가? 당신은 분뇨와 공장폐수가 충분히 섞인 강물을 식수로 삼을 수 있는가? 당신이라면 기름으로 노출된 곳에 소풍이나 갈 수 있는가? 당신은 새조차도 울지 않은 쓰레기가 넘쳐대는 공원에 산책이라도 갈 용기라도 있는가?

 

전혀 없다. 그런데 그 범인들은 누군지 아는가? 바로 나와 당신들이다. 내 자신만 아닌 다른 타인도 조금씩 그렇게 한다는 믿음으로 자신의 결점은 가린다. 인간이란 원래 그런 존재인 듯하다. 단체 속에서 언제나 정의나 진리를 군중심리로 먹혀 들어가기 때문이다. 환경문제에서 당연히 원칙적으로 장기적인 안목을 두고 말해도 군중에겐 통하지 않을 경우가 허다하다. 왜냐하면 집단적 이기주의는 합리적 이성도 마비시킨다. 물론 합리 역시 좋지 않다.

 

합리(合理)는 때로는 합리(合利)라는 이름으로 위장되기 때문이다. 물론 한자어나 영어철자에선 다르나 한국어에서는 발음을 대조하면 딱 어울린다. 말장난처럼 보이나 사실이다. 이때까지 우리는 이런 식으로 우리 인생과 미래의 인생을 갉아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명의 붕괴를 읽다보면 다소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 그게 당연하지 그런데 왜 사람들은 바보처럼 당하고 마느냐?

 

그것은 인간들이 욕심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물론 욕심이면 다행이다. 욕심은 채우면 그만이나 욕망은 만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장 눈앞의 이익 때문에 숲의 나무를 베고, 물가의 고기를 모두 잡고, 기름과 광산을 모조리 뽑고 사라지는 술수로 결국 그 지역의 주민뿐만 아니라 그 국가와 사회마저 좀을 먹는다. 문제는 그곳에서 끝날 문제가 아니라 범세계적인 문제로 향한다. 가령 독극물질은 중금속과 PCB와 같은 물질들이 발생하는 장소가 아니라 북극의 생물과 거기서 살아가는 원주민들에게 높게 나온다면 당신은 이해 가겠는가?

 

이해가지 않을 것이나 우리나라의 봄철을 상기해보자? 봄이면 항상 황사가 불어 눈과 코를 괴롭히고, 그것도 모자라 건물과 차량을 더럽힌다. 이전에는 그렇게 심하지 않았는데, 입자가 굵어지고, 심지어 입자 안에 중금속과 독성물질까지 보너스로 달려온다. 왜 그런가? 황하라는 대하천은 우리 영토와 엄청나게 멀리 이격되었는데도 그렇다. 결국 세계의 특급 독극물이 북극으로 간다는 것이 이상치 않다. 예전에 일본의 쓰나미로 인해 밀려나간 콘크리트 구조물이 미국 해안가에 등장했다.

 

수 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것들인데도 가고 있다. 환경오염이 그렇게 단순하게 보이는가? 문제는 그런 환경오염이 국제사회의 문제와 분쟁을 넘어 우리의 앞날을 흐리게 한다. 왜냐고 물어본다면 이 책에 나온 이스터섬이나 그린란드, 그리고 바이킹들의 운명을 보라. 당시는 우리가 살던 때보다 자연환경 자원이 풍부하고 오염이 덜 되었다. 그런데도 망해서 모두 사라졌다. 그 당시 역시 환경오염이 있었다. 나무를 보이는 데로 베어 쓰고, 풀은 모두 양이나 염소가 뜯어먹었다.

 

토양이 가벼운 곳에는 바람과 강우로 토양이 씻겨 내려가고, 토지는 황폐화되고 양분도 없어 식물이 자라지 못해 양과 염소 모두 죽었다. 나무도 없어서 강우 시 저장한 공간도 없고 나무열매도 없다. 결국 남은 것은 굶어죽기를 기다리는가? 아니면 서로 카니발리즘이란 죽음의 축제에 향연의 기회를 누릴 것인가? 먼 바다로 가서 도중에 죽을 건가? 자살할 것인지에서 다소 여러 가지 선택권은 있으나 모두 죽는다는 답 외엔 존재하지 않는다.

 

당시 그들의 죽음이 그러하다. 굶어서 추워서 병들어서 그 밖의 비참한 죽임들에서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우리랑 관계없냐는 이야기에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더 조심해야할 일이다. 앞으로 자원은 고갈되고, 자연환경은 파괴가 진행되어 사막화가 심각해지고 있다. 먹을 물은 줄어들고 지하수마저 오염되고, 지구온난화로 얼음의 물이 사라진다. 오늘 당장 한시적으로 관계없어서 그저 그러니 하나, 처해지면 어떤 위기가 올까?

 

우리나라도 그런 비슷한 일들이 없지 않아 발생했다. 수목을 베어 토양침식이 일어나고, 억지로 외래종이 와서 생태계 파괴가 도래하고, 해수면 상승으로 해일피해가 해안 쪽에서 조금 심해지고, 어획구역이 조금 변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지 아니면 90일만 생각하는 동물인지 계속 누락되고 있다. 문명의 붕괴를 읽다보면 지금 우리가 처해진 상황이 좋지 않다.

 

물론 그 외의 환경오염에 대한 책들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의 위기는 위기라고 여기지 못할 때 다가올 경우 더 큰 타격이 된다. 문명의 붕괴에서 사라져간 문명들이 위기라는 것을 처음부터 각오했을까? 그 각오를 했고 하지 않았더라도 그것에 순응했더라면 죽지 않았을 것이나 죽음의 문명을 다루니 이미 결과는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문명의 붕괴는 그런 과거로부터 시작해서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도 말한다.

 

붕괴라는 것이 내일 당장 오지 않는다고 하나, 문명의 이기로 통해 피해본 소수약자들은 상당히 있었다. 당장 내일아침의 이익만 쫓다가는 그런 것 자체도 못할 멀지 않은 미래가 올 것이다. 이미 미국에선 그런 문제가 있었다. 광산이나 벌목으로 돈 좀 잡아보려다 오히려 복구비용으로 애를 먹고, 심지어 그 문제를 주민에게 돌려 주민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누가 문제란 말인가? 당장의 문명의 붕괴는 일어나지 않으나 소소한 곳에서 일어나고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조금씩 붕괴되어 모를 뿐이다. 어제와 다른 오늘인지 어제와 같은 오늘인지는 누구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좋은지는 각자의 문제지만 말이다.

 

ps 참고로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라는 책을 먼저 읽었으나 이 책을 알게 된 동기는 故노무현 대통령의 <진보의 미래>에서 찾았는데, 진보라는 것은 언제나 현실을 제대로 확인하고 그것을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무조건 전복만 생각하는 것이 진보도 아니고, 그런다고 하여 고칠 생각도 없이 멈추는 보수들은 보수도 아닌 것 같다. 전통이란 단순히 그대로 머물러서 전통이 아니라 조금씩 같이 세상을 보면서 변해가는 것도 전통이다. 인간들이 천년만년 사는 것도 아닌데, 눈앞의 이익만 보거나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는 순간 우리도 모아이석상이 있는 이스터섬처럼 그대로 사라지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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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서재
이채윤 지음 / 푸른영토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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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을 읽게 되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책 한권을 읽음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을 해야 한다고 말이다. 보통 책 한권을 읽게 되면 그것으로 만족하느냐 마느냐 차이가 있겠으나 단순히 인기소설이나 유행하는 자서전은 제외하면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다. 보통 인문학 도서나 혹은 고전소설을 읽게 되면 분명히 그 책을 읽음으로서 다른 책들을 계속 이어가야 흐름이 연결되기 때문이다. 가령 닥터 지바고란 소설과 영화가 있다고 치자, 그 작품은 지금이야 명작이 되어버린 고전 소설과 영화다. 하지만 그 작품을 알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역사와 사건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1917년 러시아혁명과 러시아내전, 스탈린의 독재정치를 생각하지 않으면 내용의 깊이를 향유하지 힘들 것이란 점이다. 그저 소설 책 한권을 읽었을 뿐인데, 그 책에서 보이는 작가의 정신세계는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거나 혹은 그 시대상에 대한 자신의 관점이 들어가 있다. 그 시대적 배경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지도 알 수 있고, 거기에 대한 작가는 어떻게 여겼는지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작가 역시 인간이므로 자기의 이성적인 영역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가령 지와 사랑과 데미안을 저술한 헤르만 헤세의 경우 그의 책을 처음 읽는 순간 프리드리히 니체가 생각났다.

 

 

나중에 그 책을 다 읽은 후에 후기를 보니 그는 실제로 니체를 열심히 보고 심취했다고 한다.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고, 작가가 의도한 그 세계와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그 뿌리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책의 매력이면서도 큰 짐이기도 하다. 1권이 책이 세상을 살아가는 관점을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유가 바로 이런 점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아는 사람들 중에서 책을 통해 책을 알아가는 것은 또 어떤 이야기와 방향이 있을까? 어떻게 보면 최근에 본인이 계속 어느 특정인물을 추모하는 것일지도 모르나, 그는 분명히 우리 시대의 지식인이었으며, 정치가였다.

 

 

이번에 내가 읽은 서적은 <노무현의 서재>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상당한 정치적인 안목이 넓었으나 그가 처한 정치적 약세와 언론과 여론의 견제에 많은 타격을 입었다. <노무현의 서재>에서도 언급하다시피 “노무현은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5년 동안 별로 행복하지 못했다. 정치개혁과 지역주의 극복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출발한 참여정부는 보수 세력이 득세하는 우리나라 정치 현실 속에서 비주류에 속한 정부였다. 노무현 역시 우리 사회의 주류와 다투는 비주류, 마이너리그의 삶은 산 사람이었다. 반면 대한민국의 보수는 거대 기업, 거대 언론사, 거대 연구소, 법원, 검찰, 강남, 서울대, 학술원을 비롯한 각종 학회, 라이온스클럽, 로터리클럽, JC(청년회의소), 등을 장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네트워크 형성하고 있었다.”

 

 

라는 내용처럼 그의 대통령 생활은 단순히 옆에서 보면 한심할 지경이었으나, 막상 그 실상을 알고 보면 한심한 것은 그가 아니라 그의 목을 물고 늘어지는 한국의 고질병들이었다. 겉으로 뭔가 단순하고 무식한 말투를 내뱉는 그이지만, 막상 그가 가진 사고와 판단력을 생각해서는 그런 사고를 가지는 것은 한심하다는 말만 내뱉을 수밖에 없다. <노무현의 서재>를 읽기 전에 이미 <진보의 미래>를 읽어보았는데, 그 책에서 그가 인용한 도서나 철학자 그리고 내용은 보통 사람으로서 기대하기도 어려운 책이었다. 그의 독서량은 기본적으로 철학에서 시작되는 고전부터 시작하여 현대 사회과학, 경제학 도서까지 파고들었다.

 

 

특히나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공학도가 아닌 법대나 정치학 전공자란 한계로 과학기술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다. 그렇지만 노무현의 경우 과학과 기술에 대해 중시했고, 특히 공학적 기술력을 중시했다. 과학기술력의 발전은 여러모로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정치에 기술관료의 중요성을 인지했다. 앞으로 다가오는 미래는 에너지가 고갈되고, 자원이 모자라며, 물과 공기와 같은 자연환경 역시 위기에 처해지는 것을 알았다. 그런 점들을 정치적으로 풀어내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나, 그런 행동적 주체는 과학과 기술이란 점이다.

 

 

물론 이 책에서 과학과 기술의 발전, 그리고 그런 인력을 위한 인프라 조성만 다루는 것만은 아니다. 시민사회를 구성하기 위한 정치적 안목을 매우 중시했다. 하지만 안타까운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어느 누구를 지지하거나 따르는 것으로나, 또는 어느 특정인물은 반대하고 무조건 배타적으로 대하는 것으로 지식인 내지 양심적인 인간이라고 외치는 것이다. 물론 정말 그렇게 반대하고 거부해야 하는 인물은 있다. 독재정치나 폭력정치를 하는 정치가들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나 그런 문제를 일어나서 투쟁하는 것도 좋으나 그런 사람들이 앞으로 나오지 않기 위해서는 국민 스스로 의식을 깨우치는 방법밖에 없다. 국민과 시민은 나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국민은 어떻게 보자면 대중인 mass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바라는 시민 즉 people은 무엇인가? 시민이란 정치적인 안목과 판단력이 가지고 있어서 그 사회의 정치적 지도자로서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올바른 안목으로 훌륭한 정치지도자를 선별하고, 그들이 바른 정치를 하는지도 판단해야 한다는 점이다.

 

 

문제는 그렇게 하려면 시민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이다. 그 정답은 좋은 독서라는 점이다. 참고로 그가 대통령이 될 수 있던 계기는 여러 가지이나 최고의 계기는 그의 정치적 팬클럽인 노사모와 더불어 인터넷 매체였다. 그가 2000년 부산 북·강서(을)에서 패배 직후 그의 안타까운 소식과 더불어 인터넷에서 이미 그는 많은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는 정치적인 인맥이 없다. 비주류 속에 비주류였던 그는 처음 자기 당내 대선경선에서 후보로 결정되었는데, 멀쩡한 사무실도 갖추지 못했다고 한다. 그 누구도 제대로 그에게 지원을 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대통령이 될 수 있던 것은 일반 사람들의 관심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 그여도 인터넷은 정보로서 가치가 높아도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책이라고 했다. 인터넷이란 공간은 너무 유동적이고 정보가 너무 넘쳐 흘러내리기 때문에 도리어 올바른 정보나 지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왜곡되고 와류되는 것이 더 쉽게 유입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책으로서 그가 추구하는 방향은 무엇일까?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내가 바르고 틀리고를 외부의 영향이 아니라 자신의 관찰에서 볼 수 있는 점이다.

 

 

현재의 시점과 과거의 흐름, 앞으로 다가올 문제들은 끊임없이 보고 연구해야할 사항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다양한 지식과 깊은 통찰력이 들어간 좋은 책들이다. 노무현의 서재에서는 노무현이 추천하던 책을 위주로 정리한 도서이다. 나는 반드시 노무현이 좋아서든 혹은 싫어서든 이 책을 권하라고 싶지는 않다. 단지 정말 자신이 시민으로서 올바른 지식과 판단력이 있다고 자부한다면 이 책을 읽어보고 판단하라는 점이다. 이 책에서는 노무현이 아낀 도서에 대한 소개와 노무현의 입장을 대비하는데, 노무현의 입장은 안 보더라도 그 책들에 읽어 보고 판단함은 좋다.

 

 

왜냐하면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과 서적들은 세계적인 석학들이고, 상당히 수준 높은 서적들이기 때문이다. 제레미 리프킨과 같은 세계적 사회학자 및 경제학자를 비롯해 앤서니 기든스와 같은 사람들은 세계 정치흐름과 사회, 경제흐름을 아주 잘 관찰해내고 있으며, 이들의 책에서 오늘 날의 우리가 처한 현실을 어떻게 대처하면 좋은 것인지를 잘 나타내어 주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런 도서가 아니라도 21세기는 환경과 에너지 문제를 토대로 자연환경도시인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은 매우 놀라운 내용이었다.

 

 

기본적으로 나는 환경공학을 전공했기에 환경 관련 업체에서 일을 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 환경적인 문제에 대한 내용은 언제나 접촉하는 내용이다. 환경오염으로 인해 지구 에너지 고갈과 수질오염과 수자원고갈로 인한 사막화 현상과 식수문제, 에너지 극단화로 통한 빈곤의 문제는 계속 우리가 풀어갈 수밖에 없는 문제다. 그가 대통령재임 시절에 환경문제를 생각하여 하이브리드 자동차 내지 친환경자동차를 추진하려고 한 것을 알았는데, 대기업의 압력에 무산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때는 그 반대였지만, 지금은 피해갈 수 없는 상황이다. 석유값은 계속 오르고, 석유에너지의 사용은 대기오염을 증감하고 있고, 대기오염으로 인해 비가 내리면 수질오염과 토양오염,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먹는물과 식량이 손실을 준다. 환경이란 것들은 계속 돌고 도는 하나의 생태계시스템이므로 전체적인 안목과 더불어 그 시스템에 대한 상세한 안목이 없다면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쿠바의 식량문제와 의약품 문제, 경제문제에 대한 해결을 오로지 자연에 순응하여 얻은 성과품인 것이다.

 

 

오로지 파괴만을 일삼고,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계속 낭비하는 현대사회의 이기적인 합리주의는 양극화와 더불어 환경오염을 일으키고 있다. 사람들은 이런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환경적인 문제에 대해 말하기는 쉬워도 그것에 대한 하나의 구조나 체계, 그리고 거기에 대한 원인과 문제, 앞으로 대처해야할 과제나 방법에 대해서는 상당히 취약하다. 시민들이 갖추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문제에 대해 얼마나 깊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있는가이다. 뭐든지 정치인들이 위임한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 그런 문제를 공감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어야 하며, 그것이 현실에 적용될 경우 서로 그 문제와 앞으로 어떻게 대처하는지 서로 생각을 나누는 것이다.

 

 

물론 이런 판단에서 그의 생각을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제는 동조조차 할 수 없는 세계에 가있지만, 그에 대한 반대와 비판에서 그런 반대와 비판 역시 올바른 판단력과 객관적인 논리로서 대하자는 것이다. 때로는 그런 비판 역시 새로운 대안과 길을 창출 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런 길조차도 역시 올바른 지식과 양심이 필요하다. 솔직히 말하여 노무현의 서재에 들어있는 책의 양은 새 발의 피라고 말하고 싶다. 그가 참고하여 정책적 영역에 도움을 준 서적을 읽기 위해서는 그 책을 읽을 능력과 수준까지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래도 괜찮을 것이다. 그 책들을 읽으면 그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한 책들이 또한 제시되어 있을 테니 말이다.

 

1. 정치사회

가. 적이 사라진 민주주의 / 울리히 백 지음 / 정일준 옮김 / 새물결

나. 국민은 왜 정부를 믿지 않는가 조셉  S. 나이 엮음 / 임걸진 외 옮김 / 굿인포메이션

다. 제3의 길 / 엔서니 기든스 지음 / 한상진 외 옮김 / 생각의 나무

라. 노동의 미래 / 엔서니 기든스 지음 / 신광영 옮김

마. 시장인가? 정부인가? / 김승옥 지음 / 부키

바. 유러피언 드림 / 제레미 리프킨 지음 / 이원기 옮김 / 민음사

사. 주식회사 장선군 / 양병무 지음 / 21세기북스

아. 코리아 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 / 배기찬 지음 / 워즈담하우스

자. 쾌도난마 한국경제 / 장하준 외 지음 / 이종태 엮음 / 부키

차. 국가의 역할 / 장하준 지음 / 황해선, 이종태 옮김 / 부키

타. 대한민국 개조론 / 유시민 지음 / 돌베개

파. 대통령 보고서 / 노무현대통령 비서실 보고서 품질향상 연구팀 엮음 / 워즈덤하우스

하. 이제는 단신 차례요. Mr. 브라운 / 엔서니 기든스 지음 / 김연각 옮김 / 인간사랑

거. 디케의 눈 / 금태섭 지음 / 궁리

너. 유엔미래보고서 / 박영숙 외 지음 / 교보문고

더. 후불제 민주주의 / 유시민 지음 / 돌베개

 

 

2. 경제, 경영

가. 변화관리 / 존 코티 외 지음 / 현대경제연구원 옮기 / 21세기북스

나. 소유의 종말 / 제레미 리프킨 지음 / 이희재 옮김 / 민음사

다. 체인지 몬스터 / 지나 다이엘 덕 지음 / 보스턴컨설팅그룹 옮김 / 더난츨판사

라. 수소 혁명 / 제레미 리프킨 지음 / 이진수 옮김 / 민음사

마. 변화를 두려워하면 1등은 없다 / 오영교 지음 / 더난출판사

바. 생태도서 아바나의 탄생 / 요시다 타로 지음 / 안철환 옮김 / 들녘(코기토)  

사. 블루오션 전략 / 김위찬 외 지음 / 강헤구 옮김 / 교보문고

아. 동반성장을 위한 새로운 비전과 전략 / 국민 경제자문회의 엮음 / 교보문고

자. 역사를 바꾸는 리더십 / 제임스 맥그리그 빈스 지음 / 조중빈 옮김 / 지식의 날개

차. 기업이 원하는 변화의 기술 / 댄 코헨 지음 / 존 코터 감수 / 유영만 옮김 / 김영사

타. 대한민국 부동산 40년 / 국정브리핑 특별기획팀 엮음 / 한스미디어

파. 기업이 원하는 변화의 기술 / 존 코터, 댄 코헨 지음 / 김기웅, 김성수 옮김 / 김영사

하. 슈퍼 자본주의 / 로버트 라이시 지음 / 형선호 옮김 / 김영사

거. 사회정책의 제3의 길 / 양세진 외 지음 / 백산서당

 

 

3. 역사, 문화

가.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 이덕일 지음 / 김영사

나. 콜럼버스에서 룰라까지 / 송기도 지음 / 개마고원

다. 칼의 노래 / 김훈 지음 / 생각의 나무

라. 거의 모든 것의 역사 / 빌 브라이슨 지음 / 이덕환 옮김 / 까치

마. 일본제국흥망사 / 이창위 지음 / 궁리

 

 

4. 그 외

가. 괭이부리말 아이들 / 김중미 지음 / 송진헌 그림 / 창작과 비평사

나. 까치집 사람들 / 정시아 지음 / 토우

다. 그늘이 더 따뜻하다 / 정시아 지음 / 토우

라. 왜 우리 아이들은 대학에만 가면 바보가 될까? / 조기숙 지음 / 지식공장소

마. 대한민국 교육 40년 / 국정브리핑 특별기획팀 엮음 / 한스미디어

바.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 로펜 슬레이터 지음 / 조중영 옮김 / 에코의 서재

사. 생각의 오류 / 토머스 카다 지음 / 박윤정 옮김/ 열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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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된 예언자 트로츠키 - 아이작 도이처의 트로츠키 3부작
아이자크 도이처 지음, 이주명 옮김 / 필맥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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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예전에 읽은 동물농장의 중요한 이야기가 연결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40년 8월 2일에 일어난 트로츠키 암살 사건의 맥락이 연결된다. 트로츠키가 러시아에서 추방되고 이제 더 이상의 트로츠키가 정치적 권력으로서 정치에 임할 수 없게 된다. 여기서 그는 온갖 조작, 비방, 왜곡, 공작으로 통해 자기의 일어날 공간을 빼앗긴다. 그가 처음 러시아에서 떠날 때는 러시아혁명을 위한 전초전이었는데, 이제는 그가 영원히 러시아에서 머물 수 없는 추방자로 낙인을 찍혀버렸다.

 

그렇다.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에서 보여주는 비극의 유머는 이제부터 시작인 것이다. 성장을 위해 공업화가 필요하여 농민으로부터 야유를 받는 그의 난감함을 스탈린이 꼬리 잡아 트로츠키를 정치적으로 패배시켰다. 하지만 웃기게도 가장 러시아 농민인 굴락과 무지크를 억압한 사람은 스탈린이다. 그의 폭력적인 테러리즘은 사회주의 혁명이란 숙제를 그저 독재정치의 역사적 교훈으로 부각시켰다. 사실 트로츠키는 영구혁명론인 반면 스탈린은 일국사회주의였다. 그가 노린 전략은 대중들은 어리석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아가는 동물적 존재 본능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런 조작법과 더불어 공포심이란 것을 이용했다.

 

가령 말 잘 듣지 않는 오리가 있다면 그 오리를 잘 대해주어서 길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오리털을 모조리 뽑아버리고 심지어 치유될 수 없는 큰 흉터까지 안겨주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러니컬하게도 오리는 폭력을 휘두른 인간에게 따라온다. 그것은 옛날 고대부터 이어온 정치적 테러리즘이다. 스탈린은 그 폭력을 아주 교묘하게도 이용하였고, 심지어 그 폭력으로 통해 스탈린주의자에게도 그 폭력을 향했던 수준만큼 되돌려준다. 오죽했으면 게페우라는 비밀경찰조직을 통해 온갖 살인과 테러를 일삼았던 것도 모자라 그들마저도 총을 심장을 향하게 했다. 단지 어이없는 부분은 처음에 희생당한 정치인들은 모두 트로츠키를 음모의 원흉이라고 했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레닌과 더불어 러시아혁명을 일꾼 영웅이고, 코민테른에서 아주 중요한 입장과 더불어 소비에트 연방의 위원회에서 활약을 했다. 그들은 트로츠키가 옳아도 트로츠키에게 죄가 있다고 했다. 그들은 죽음은 받아들이되, 그들의 어리석음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은 어리석음이 보였다. 그러나 지노비예프는 처음에 레닌에게 10월 혁명을 반대한 것보다 지금의 스탈린에게 당한 것이 치욕스럽다고 한다. 트로츠키의 선견은 결국 현실로 되었고, 트로츠키가 터키와 노르웨이, 프랑스로 전전긍긍한 후 최종적으로 멕시코에 들어오는 순간 그들은 죽음을 맞이한다. 그 후에 스탈린에게 절대적으로 봉사하고 버림받은 부하린마저도 죽음을 당한다.

 

예전에 보았던 모리스 메를로 퐁티의 <휴머니즘과 폭력>이란 서적에서 러시아혁명 이후 소비에트연방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내용에서 부하린의 죽음을 토대로 <한낮의 어둠>이란 소설을 인용한다. 대중들의 자발적인 폭력으로서 세워진 소비에트연방이 이제는 대중들에게 향하는 폭력으로 스탈린주의 독재국가로 변질된다. 시대착오적인 그 사상은 분명히 소비에트연방이 미국을 이은 경제 및 군사강대국과 과학기술의 절정으로 성장한 것은 분명하나 그것은 진정한 진보가 아닌 폭력과 조작으로 통한 집단주의였다. 아니 파시스트적인 요소가 강한 국가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시대착오적인 문제가 최근 국내에 일어난 점에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철저한 집단주의적이고, 오류만 남은 그 사고들이 아직도 망상의 유령이 아닌 현실의 유령에서 말이다. 그러나 더 무서운 사실은 그 유령과 더불어 그 유령을 향해 미친 듯이 침을 튀기고, 확대화 하려는 자들은 유령을 떠나 악령으로 보인다. 지금도 그러한데, 당시 사람들은 오죽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트로츠키의 선견지명에 정말 놀란다. 자신의 말과 행동을 의심하고 내쫓은 노르웨이 정치가에게 언제가 나치의 정복으로 당신들은 모두 도망칠 것이란 사실에서 말이다. 그런데 정말 그것이 현실이 되었다. 트로츠키는 독일에 일어난 나치의 강성과 히틀러의 위험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은 소비에트연방에게 쫓기고 스탈린에게 죽음의 위기가 오기에 말할 힘이 없었다. 자신의 입은 언제나 열려있으나 옆 사람들은 귀가 막혀버렸다. 그렇지만 결국 그의 위험은 확실했다. 실화에서 프랑스 대사관이 2차 세계대전 전에 히틀러를 만나는 자리에게 히틀러에게 트로츠키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히틀러는 매우 놀라는 표정으로 일어나며, 트로츠키의 위험을 언급했다. 무기 하나 가진 것도 없고 조직도 없는 늙은 정치사상가 한 명이 스탈린은 물론이고 히틀러에게 최고의 강적이었다.

 

오히려 히틀러는 스탈린보다 트로츠키가 더 무서울지도 모른다. 히틀러는 독일이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을 점령 후에 독일과 소비에트연방의 조약을 맺어 군사적으로 두려울 것이 없는데도 말이다. 과연 무엇이 무섭고 두려운 것일까? 스탈린은 무척이나 트로츠키가 두려워 한 모양이었다. 스탈린의 정치적 압제는 수용소 죄수에겐 하나의 순교자로서의 길을 열어주었다. 덕분에 스탈린은 자신의 반대세력을 모조리 총살을 시킨다. 과거 1937년에 시작한 러시아 대숙청과 대이주와 더불어 교도소 역시 피의 바람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교도소에는 많은 트로츠키주의자가 있었고, 이들은 무식한 러시아 노동자와 농민과는 달리 엘리트였고, 한편으로 높은 도덕심도 보유했다.

 

그들의 존재란 스탈린에게 눈에 가시고, 하루 빨리 없어야 했다. 결국 없애버리고, 그것이 아닌 존재도 죽였다. 조금이라도 눈에 벗어나면 말이다. 그런데 처음에 트로츠키가 내쫓길 때는 모두 트로츠키를 의심하던 이들이 총살형으로 나무기둥에 묶여 있을 때 모두 트로츠키여 영원하라 하고 외친다. 심지어 트로츠키가 죽고, 스탈린이 죽은 후에 스탈린주의 후예들조차 뒤에서 몰래 트로츠키가 옳았음을 인정한다. 물론 100% 옳은 것은 아니나 그런 정치적 판단력을 가진 상태에서 말과 행동을 옮길 사람이 없었다. 덕분에 소비에트연방은 정치적 자유나 표현이 사라졌다. 오죽했으면, 스탈린이 자신은 노동자의 국가라고 하면서 독일 히틀러와 쪼개먹은 상대국가에 대해 모든 토지를 몰수하여 그 토지를 농민에게 죽는 것이라, 그 농민마저 강제노동에 부역시켰냐는 것이다.

 

그렇게 트로츠키는 현재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여 과거역사를 사례를 통해 앞날을 예견했다. 인간의 역사를 알고 과거를 반성하는 것은 오늘의 현재를 구성하는 원인과 구조를 파악하는 것도 있으나,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 수 있기도 하다. 사회가 발전하더라도 인간은 결코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간에게 이성이란 단어가 적용된 것은 그리스철학이 시작되어 데카르트와 칸트에게 이어진다고 해도 그것은 극소수 인간에게 적용된 것이었다. 오죽했으면,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이상향은 국민정치가 아니라 시민정치였다. 어떻게 보면 폴리스국가에서 귀족적인 시민정치로 통해 어떤 사회의 실력과 학식, 인품이 높은 사람에게 많은 정치적 참여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점이다.

 

차후 니체가 지적하는 대중사회는 이른바 군중심리와 도덕에 대한 의심 없는 순종이 더 인간을 부패하게 만든 것처럼 말이다. 이 책에서 트로츠키는 “도덕은 역사와 계급투쟁 속에 내재돼있는 것이며, 그 자체로 불변의 실체를 갖는 것은 아니다. 도덕은 사회적 경험과 사회적 필요를 반영한다. 따라서 도덕은 언제나 수단을 목적에 연결시킨다.”에서 그는 종교에 대한 도덕적 강요를 비판했다. 이런 점은 니체의 서적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내용과 비슷하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이성을 의심하고 스스로 되물어볼 수밖에 없다. 본래 철학이란 것이 자기 자신부터 생각하고 비판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당시는 이성의 시대가 아니라 광기의 시대였다. 유럽에서는 파시스트가 판을 치고, 그들은 전체주의로 통해 광기를 살기로 향상시켰다. 유럽이 아닌 동양의 일본도 그렇다. 트로츠키는 세계적으로 불안과 광기에 넘치자 항상 이에 대한 비판을 날렸다. 그런데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일본 천황과 독일 나치와 결탁했다는 것과 트로츠키가 미국의 언론과 정치인하고 진실규명이나 문제해결을 하려고 하면 자본주의의 앞잡이라고 했다. 그러나 실상 트로츠키에게 돈도 오지 않고, 나치도 트로츠키를 싫어했다. 본질과 상관없이 모든 대중들의 시선을 가리는 언론행위는 독재정치의 기본이고 필수라는 것이 여전히 드러난다.

 

그런 상태에서 트로츠키는 언제나 죽음과 마주보고 있었다. 그가 프랑스, 노르웨이, 터키를 오고가던 시절에 항상 암살과 테러의 위험에 쳐해 있었다. 게다가 그가 가던 집에 불이 나고, 누가 자신의 자료들까지 훔쳐가려 했다. 게페우가 으르렁 거리면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1936년 멕시코로 이주를 가나, 거기라고 안정은 없다. 오기 전에 1번째 부인에게 얻은 딸 니나가 죽고, 2번째 딸 지나는 트로츠키의 손자인 세바를 데리고 오지만, 지나친 피로와 병들은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고, 그녀는 쓸쓸하게 독일의 침대에서 자살한다. 아직도 인상 깊다. 그녀는 자신의 방을 함부로 열지 못하게 하고, 가스를 채워 질식사를 했는데, 그 표정이 고통이 아닌 행복이었다.

 

그 후에 트로츠키의 아들인 료바는 우울증과 피로, 병세로 32세의 일기로 죽는다. 그는 아내 사이에 아이를 두지 못했고, 그의 누나의 아들인 료바를 아들처럼 여겼으나, 결국 죽고만다. 아내인 진은 트로츠키주의보다는 몰리에르파로 료바를 보내려고 하지 않는다. 부부 사이에 아이가 없었고, 세바가 아들처럼 귀여워해준 것이다. 하지만 결국 트로츠키 품으로 세바를 돌아간다. 세바를 찾은 트로츠키는 다행일까? 불행일까? 자신의 2딸 중에 1명은 러시아에서 병으로 굶주림으로 죽고, 1명은 병으로 인해 자살한다. 그리고 그녀들의 남편 모두 행방이 묘연해 생사조차 알 수 없다. 아들인 료바는 괴로움 속에 죽었고, 다른 아들인 세르게이는 러시아에서 긴 유형생활을 하다 죽는다. 물론 죽기는 트로츠키가 죽는 것으로 나오나 트로츠키는 모든 가족들을 잃게 되었다. 심지어 1번째 부인인 알렉산드라는 자신의 공간이 없어 늙은 몸을 이끌고 그녀의 언니에게 의탁한다.

 

트로츠키에게 남은 가족은 세바와 그리고 40년 넘게 그를 지탱해준 나탈랴였다. 트로츠키는 평생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를 찬양했으며, 그녀가 없었으면 자신은 없었다고 한다. 영화 트로츠키 암살사건에서 트로츠키는 자신을 걱정하고 아이들을 잃어 슬픔 속에서 살아온 그녀의 눈물을 보면서 그녀를 위로하고, 그녀의 손등에 자신의 입술을 바친다. 그러나 그렇게 노부부는 힘들게 망명생활을 하나, 결국 트로츠키는 잭슨이란 가명을 쓰던 라몬 메르카데르에게 피켈을 맞고 잔혹하게 쓰러진다.

 

여기서 스탈린과 게페우의 치밀함이 보인다. 라몬에게 지령을 내릴 적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그저 트로츠키의 여비서인 실비아의 애인으로 등장하게 하더니, 그녀와 지내게 하면서 트로츠키 주변에 갈 기회를 만들어 단순히 살해하도록 부추킨 것이다. 라몬이 트로츠키를 살해하기 전에 라몬이 왜 살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게페우는 라몬의 어머니를 볼모로 잡았고, 어머니가 멕시코에 있었다. 굳이 멕시코에 나둘 이유가 없어도 나둔 이유는 라몬에게 협박을 한 것이란 점이다. 트로츠키 역시 인질을 잡은 적이 있었다. 러시아혁명 이후 백위군과의 내전에 백위군의 가족들을 인질로 잡았으나, 그들을 죽이거나 가혹한 대접을 하지 않았다. 단지 내전으로 인해 차르의 가족들이 그의 부하의 손에 죽을 때 그 책임을 자기가 맡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최소한의 인간적 행위에 대해 양심과 윤리, 기준이 있었다. 그는 폭력과 억압이 폭주하는 광기의 역사에서 그 고리를 부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이성적인 영역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그는 미국의 전설적인 인권대통령인 링컨을 생각하면 말을 남겼다. “미국 북부군의 잔혹성과 남부군의 잔혹성에 대해 역사는 상이한 잣대를 갖고 있다. 속임수와 폭력으로 노예에게 족쇄를 채우려는 노예주인과 속임수와 폭력으로 족쇄를 벗어던지려는 노예를 생각해보자. 오직 경멸스러운 환관들만이 도덕의 법정에서 이 두 가지경우가 동등하다고 우리에게 말항 것이다.”라고 말한다.

 

폭력과 속임수를 파괴하기 위해 폭력이란 극단적 행위로 미칠 수 없는 현실의 비극에서 그는 피할 수 없는 길이라 여겼다. 그 결과 그는 추방되고, 버림받고, 배신당하고, 가족과 친구 그리고 자신 역시 죽음을 맞이했다. 그래도 그는 저항했다. 피켈을 맞아 머리에 70㎜정도 들어가도, 그리고 뇌수막이 찢어지고, 뇌신경이 파괴되어도, 뇌에 두개골 파편이 박히고 있을 때도 그는 라몬에게 저지했고, 그의 비명과 소란에 달려온 사람들을 설득하여 라몬을 포박하여 그의 증언을 내놓게 하라고 한다. 죽어가는 자리에서도 미래를 향한 이야기와 나탈랴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다. 그녀는 트로츠키가 죽어 20년 넘도록 트로츠키가 죽은 집에서 살아간다. 그의 시신이 화장되어 그 집에 묻혀 작은 비를 항상 바라보면서 말이다.

 

그의 죽음은 스탈린에게 큰 미소로 되었으나, 후에는 아픔을 맞이했다. 부하린을 죽인 스탈린은 부하린만큼 군사전략을 잘 아는 지휘관이 없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처음에 히틀러와 계약하여 이익을 보던 소비에트연방은 결국 나치에 의 큰 타격을 받는다. 그것도 모자라 스탈린은 1919년 레닌이 세운 코민테른을 1943년 와해시키고, 무력으로서 혁명을 수행한다고 했다. 트로츠키는 소비에트연방이 타국의 혁명을 도와주는 것이지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런 엇갈린 혁명은 결국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한국에서도 이상하게 만들어졌다. 정복이 혁명이라고 하는 스탈린의 잔재가 여전히 유령처럼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트로츠키 모든 것을 잘 한 것은 아니나 그가 살아온 투쟁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고, 생각해야할 가치이다. 그의 유언에서 아내인 나탈랴에 대한 사랑과 동시에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내용이 나온다. “나타샤(아내의 애칭)가 정원에서 창문으로 바짝 다가서더니 그 창문을 더 넓게 열어 공기가 내 방으로 좀 더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게 했다. 나는 담장 아래로 밝은 녹색의 풀들, 담장 위로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도처에 반짝이는 햇빛을 본다. 인생은 아름답다. 미래 세대는 모든 악과 억압, 폭력을 씻어내고 이 아름다운 인생을 마음껏 향유하게 하자.”

 

그의 유언은 한편의 시와 같아. 아름답고 절대적으로 인류가 이루어야 할 가치관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가난과 빈곤, 죽음과 전쟁, 그리고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 등과 같은 문제로 병을 앓고 있다. 그의 가치관은 아직 유효한 것일까? 자유라는 것은 무엇이고, 인권이라는 무엇인가? 세상에 평화는 무엇이고 인류가 가져야할 가치관이란 무엇일까? 스탈린과 많고 많은 권력자들에게 목이 졸리고 졸려 죽음을 당한 트로츠키는 러시아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으나 그 자신의 인생과 가족들은 패배로 끝난다. 하지만 이제 그를 패배한 영웅이 아니라 진정한 영웅으로서 두각을 보이고 있다. 이에 반해 그들을 핍박하고 모함한 이들은 모두 후대 역사의 패자로 남았다. 진정한 승자라는 것은 당시의 승자인지 혹은 후대의 평가인가는 모르나, 적어도 인간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는 것처럼 그의 죽음으로 얻은 이름은 패배라는 아픔을 뛰어넘은 채 승화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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