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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무장의 예언자 트로츠키 - 아이작 도이처의 트로츠키 3부작
아이자크 도이처 지음, 한지영 옮김 / 필맥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1917년 10월 혁명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간 트로츠키, 그의 활약은 러시아 대표적인 영화감독인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10월”이란 영화를 보다시피 그의 영웅적인 활동은 이미 러시아 사회에서 누구나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1927년 영화 10월이 나올 적에 트로츠키의 모습은 분명히 그 누구보다 앞에 서서 열변을 토하고 전진하던 모습이었다. 만약 당시 러시아의 모습을 예기치 못했다면 그가 그런 비극적인 주인공이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의문까지 남길 정도다.
그는 당시 인생 최고의 비극적 난관에 부딪혔다. 오데사에서 붙잡혀 시베리아로 가는 유형에서도 심지어 10월 혁명전에 케렌스키에 의한 압박에서 말이다. 그는 분명히 러시아혁명을 성공시켰고, 거기에다가 외국과의 전쟁에서 더 나아가 외국이 지원하는 백의군까지 토벌했다. 그런 러시아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인권을 울부짖은 트로츠키의 말로는 비참하고도 우울하기가 짝이 없었다.
트로츠키는 너무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는 남들이 이해하지 못한 부분에서 시작하여 앞으로 다가오는 미래까지 알고 있었다. 그는 미래를 투시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역사적인 사실과 더불어 현재의 상황을 아주 객관적으로 과학적으로 그리고 냉정하게 바라본 것이었다. 그의 엄숙하고 차가운 시선에서 그의 열변은 뜨겁고 화염처럼 쏟아 오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주어진 것은 오로지 신념이고 의지였다. 문제는 그런 점들이 자신에게 독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어떤 권력과 특혜를 그는 원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기가 레닌생전에 제2인자를 위치라고 모두 인정할 때도 그는 권력을 주어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 권력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거부하였고, 그것에 대한 미련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모습에서 앞으로 다가올 암흑의 러시아가 도래함은 필연적이었다. 트로츠키의 그런 태도가 바로 자신의 파멸을 이어온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진보와 보수, 그리고 좌파와 우파를 오고간다. 러시아혁명에서 극렬한 좌파들이 이제는 러시아혁명정부에서는 극렬한 우파로 변모한다. 그들에게 권력이 생겼고, 그들에겐 명예와 지위가 생겼다. 그러나 그들은 어리석게도 자신들의 중요한 과업을 잊었다. 차르와 백위군, 케렌스키와 서구열강을 물리친 후에 다가올 자신들의 나라에 어떻게 이끌어가는 것이다. 이 모든 압제들이 사라진다고 하여 러시아에겐 희망이 오는 것이 아니라. 단지 희망을 열어갈 수 있는 열쇠 1개만 던질 뿐이다.
트로츠키는 이 모든 상황을 접수하고 나서 큰 위기가 도래함을 알고 있었다. 러시아는 당시 너무 후진국이고, 모든 국민 대부분이 농민이었다는 점이다. 외국에서는 수많은 무기와 기계장비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러시아 상황은 차르 정권보다 못한 공업생산량과 서유럽의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무장능력을 자랑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트로츠키가 서구열강에게 지원받는 백위군과 다투면서 그들을 이긴 것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나라가 힘들었다. 트로츠키가 선택할 사항은 독재였다.
하지만 그는 진실로 독재를 원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러시아 각 분파의 최고위원을 맡음에도 불구하고 초기에 자신이 살던 집은 매우 낡고 허름했으며, 그가 가진 가구는 싸구려 옷장과 침대, 식탁이었다. 그런 집에 늘 손님이 찾아와 트로츠키는 대화를 하고, 높은 지위에서 공장노동자까지 그는 그 누구라도 자신의 방문을 활짝 열었다. 그런 그가 욕심을 어떻게 냈으랴? 그는 독재를 하나의 수단으로 여기고, 그것을 토대로 다시 경제성장 후에 러시아 국민들에게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트로츠키의 정치력에서 가장 인상 깊은 점은 그가 만약 필요한 인물이나 사상, 체계, 문물이라면 그 적들의 소유까지 배우고 습득하여 언젠가는 그들에게 전달한 그 상대진영까지 계속 혁명을 나가야 하는 점이다. 트로츠키는 영구혁명론을 주장했다. 그는 자신만의 나라가 살기 위해서만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민주주의를 갈망했다. 당시 유럽에서는 노동자들이 심각한 경제난 식량난에 전쟁까지 당했으니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동쪽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의해 제국주의 침탈로 식민지 주민들이 심각한 고통을 받았다.
그런 기억에서 그런지 방송국 특집에서 러시아5부작 혁명이야기를 다룬 작품에서 1920년 모스크바 코민테른 행사 현장에서 태극기가 높이 휘날리고 있음을 보았다. 독립군 이동휘와 박진순이 조선독립을 위해 러시아에 방문한 것이다. 레닌이 살아있을 때 그는 동북아시아이 약소민족인 조선의 독립을 지지했고, 군자금도 지원했다. 그러나 레닌이 죽고 트로츠키가 망명가고 난 뒤인 1936~1938 사이 많은 조선독립군들은 스탈린의 철권정치에 죽임을 당한다.
만약 이때 트로츠키가 제대로 자리를 잡았으면 중국 공산당이 일본과 항일전투를 제대로 벌였으며, 국제적인 관계를 제대로 유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에선 원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일국사회주의를 원했고, 그것은 국가자본주의를 넘어 전시공산주의로 유지하게 된 동기이다. 오늘날의 공산주의를 혐오하게 하여 이른바 반공사상을 만들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가 바로 스탈린에 의해 주도된 러시아 쇼비니즘적인 태도 즉 민족주의적인 요소이다. 역사란 항상 반복되는 것일까?
세계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혁명은 1789년과 1917년에 일어났지만, 결국 실패했다. 프랑스혁명은 자코뱅당은 몰락과 당통의 죽음 그리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국민이 주인이 아닌 관료주의가 주인이 되었다. 전쟁은 계속되고 국민들은 거기에 열광해 갔다. 여기서 러시아와 프랑스혁명의 비극은 국민들의 한계였다. 스탈린의 정책 중에서 스탈린주의를 늘리기 위해 많은 노동자를 당원으로 받았으나, 그들은 무식했다. 정치적 안목, 국제적 상황, 사회적 변화, 경제적 관점, 문학적 감명, 철학적 원칙 따위는 전혀 없었다.
오로지 레닌이 사후 레닌을 따르는 열광적인 군중심리와 한몫 잡아보겠다는 기회주의자들만 여기저기서 모여들었다. 그게 아직도 계속인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 자주 보인다. 그런 요소들은 스탈린을 강하게 하고 트로츠키를 어렵게 했다. 왜인가? 트로츠키가 하는 말은 상대방을 안심시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를 아주 논리적으로 철학적으로 때로는 열정적으로 토한다면 스탈린은 간단했다. 지금의 안위를 위해서란 것이다. 일국사회주의라는 체계에서 스탈린은 자신들의 안위만 중요시하고 그것은 결국 어리석은 군중으로 하여금 세뇌했다.
나중에 다가올 쿨라크의 학살과 착취, 노동자에 대한 막강한 착취와 억압, 자유로운 언론의 탄압, 과거 러시아혁명의 영광을 모조리 분뇨 속에 묻어버리는 스탈린의 작업은 드디어 준비되었다. 스탈린은 레닌이 트로츠키를 아낀 점에서 매우 경계했고, 그 둘 사이를 멀어지기를 바랐다. 특히 레닌이 1922년 총상 이후 1924년도에 사망할 때 스탈린은 기회를 맞이했다. 당시 트로츠키는 심한 병을 앓고 있었다. 오랜 투쟁과 열변에서 그의 몸은 병에 찌들어 갔다. 특히나 레닌이 죽을 때 그는 레닌의 죽음을 전해 듣지 못하고, 스탈린과 긴장관계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큰 치명적인 약점으로 만들어버렸다.
레닌의 장례식에 가지 못함은 결국 레닌과 트로츠키 사이를 의심하게 만든 것이다. 레닌과 트로츠키 사이는 레닌의 아내가 그러하듯 혹은 많은 10월 혁명가가 인정하듯 모두 둘 사이의 우정과 연대를 지지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런 트로츠키를 궁지에 내몰고, 트로츠키가 제안한 모든 정치적 과제를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특히 NEP라는 신경제정책에서 트로츠키가 모든 것을 일구어내고 그것에 따른 오류와 왜곡을 정정하려고 했으나 스탈린은 오히려 못하게 하고 그것에 생기는 현상 모두 트로츠키에게 전가시켰다.
당시 농부들은 정말 무지했다. 쿨라크라는 부농은 오로지 자신의 이익, 신경제정책에 생긴 벼락부자는 자신의 이익만을 보았다. 하지만 결국 이들은 스탈린에게 의지하다가 후에 자본주의보다 더 심각한 자본주의화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트로츠키가 옳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쯤 트로츠키는 이미 러시아에 더 이상 올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그나마 그가 나가기 전에 러시아혁명 정치가들은 얼마든지 트로츠키와 연대하여 정치를 원상 복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부하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같은 인물들은 처음에 트로츠키와 대립만 내세우다 어느 순간 스탈린에게 모두 권력을 빼앗긴다.
그리고 1936년에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 1938년 부하린은 스탈린의 공포정치 아래 총살당한다. 여담이나 부하린의 죽음은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이 소련을 침범할 때 큰 타격을 줄 수 있었다고 한다. 스탈린은 정치공작과 권력정치에는 능했으나 정치, 외교, 경제, 군사, 문학에는 소질이 없었다. 그의 수완은 그런 뼈아픈 경험으로 생긴 하나의 대가였다. 트로츠키의 어리석음은 그런 스탈린을 방조한 것이었다. 그를 좀 더 알았더라면 많은 고통들이 자신에게 러시아에게 닥치지 않았을 것이다.
1번째 아내에서 태어난 2딸이 스탈린과의 대립에 의해 죽어나갔다. 그녀들은 트로츠키주의자였고,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아내였다. 그들에게 주어진 냉대와 핍박은 가난과 병폐로 생을 마감하게 한다. 그런 가족의 죽음 친구들의 배신과 전복에서 트로츠키는 병마와 더욱 싸워야 했다. 불면증에 말라리아는 그를 지치게 했다. 하지만 그를 더욱 지치게 하는 것은 불량하고 사리사욕만 채우는 인간들이 마치 위대한 정치가 놀이에 빠진 것이다. 마지막으로 트로츠키가 코민테른 회의장에 갔을 때 각 국의 대표를 보니 가관이었다. 예전에 파시즘에 빌붙은 위선가 앞으로 나치에게 붙은 변절자들이 모두 모여 트로츠키에 향해 공격했다.
그에게 더 이상 러시아에 있을 위치는 없었다. 그래도 희망이란 스탈린의 정치적인 능력이 너무 떨어져서 그의 복귀를 모스크바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나, 스탈린은 그것마저 용인치 않았다. 그를 모스크바에 멀리 떨어진 카자흐스탄 어느 벽촌에 나둔 것도 모자라 이제는 그를 러시아에 두려하지 않았다. 트로츠키는 그렇게 스탈린이 보낸 특수열차에 러시아를 영영 볼 수 없게 된다. 자기가 러시아에 올 때 그는 비참한 혁명가고, 이제는 비참한 망명자였다. 그러나 그는 질수만 없었다. 그의 동료가 트로츠키가 처음으로 스탈린에 의해 유형을 보낼 때 자살하면서 트로츠키에게 이렇게 “불굴한 의지와 단호한 태도”를 유지하길 바랐다.
운명이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하나, 트로츠키의 역사적인 상황에서 이토록 변화될지 몰랐을 것이다. 그가 이때가지 자신을 희생하여 모든 것을 이루려고 살았던 것만큼 그 배반의 아픔이란 이루어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 가슴 아픈 사실은 여전히 역사란 되풀이된다는 사실이다. 스탈린에 의한 군중심리 자극과 무지하고 이성적이지 못한 대중들은 여전히 정치적으로 사용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들은 당장 눈앞의 이익만 따르고, 먼 미래를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오로지 안일만을 위해 살아가다 결국 희생당한다. 인간에게 왜 지나간 역사를 보고 또 보란 이유는 역사로 통해 당시의 사회를 알고 인간의 한계를 배워나가 자신이 살아가야 할 철학적 자세를 유지함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혁명의 자리에서 레닌보다 더 앞에 나서서 언제라도 총알에 맞을 각오가 된 트로츠키는 배신당한 혁명에서 병마에 시달린 채 가족을 잃은 채 멀리 아주 멀리 떠나야 했다. 그의 인생살이에서 우리는 어떤 점을 생각하고 보고 생각해야 하는가? 미래를 준비하는 자들은 항상 고독한 것 같았다. 때로는 비난과 배신에 시달리고, 자신이 주장한 것이 결국 도래하는 사태로 인해 허무함과 박탈감에 주저할지도 모른다.
트로츠키는 “어중간한 지식과 어쩡쩡한 능력만을 지닌 사람들이 많다”를 알고 있었고, 그것을 타계하기 위해서는 “배우는 법을 배우는 것”도 중시했다. 그는 단순히 알고 있는 것만이 모든 것이 아닌 그 자체를 알아서 그 원리까지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많은 불가능으로 다가왔다. 대중들은 러시아혁명으로 차르를 몰아내고 백위군을 몰아낸 것이 전부로 알았던 것이다. 단지 그것은 또 다른 시작을 향한 하나의 초석임을 몰랐으며, 그들의 어리석은 결국 자신들의 미래까지 모두 버려야 했다. 그것이 바로 역사의 사실이며, 냉정한 현실이란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