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속 대통령 - 노무현, 서거와 추모의 기록 1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엮음 / 한걸음더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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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적는 나는 그 날의 허무와 감각적인 마비, 그리고 현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내 가슴속에서 타오르기 시작하는 분노, 슬픔, 분노, 좌절, 절망, 아픔, 고뇌, 번뇌, 충격, 충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들을 나를 덮치려 하고 있다. 책이라는 것은 이성적으로 보고 판단하고 생각해야 하는데, 도저히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도 판단할 수도 없었다. 오직 나에게서 분출되는 것들은 피로로 가득한 내 두 눈 속에서 흐르는 뜨거운 눈물과 입으로 말하지도 못할 한숨이었다.

 

그날의 기억을 어떻게 지우랴? 그날의 일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나는 이제 그것을 뛰어넘지 못하는 패배주의에 주저앉은 것 같았다. 내 마음을 이토록 괴롭게 하면서 눈물을 하염없이 쏟아내게 하는 사람, 노무현, 나는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할 수가 없었다. 점점 가난해지는 서민들, 나이가 환갑이 넘었는데, 나중에 아들 결혼비용 만들어보겠다는 내 아버지, 수축해져가는 내 지갑과 은행잔고들, 내 개인적인 상황, 주변 상황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답답하고 씁쓸하다.

 

물론 모든 생활이 정지될 정도는 아니나, 점점 박탈감으로 가득해지는 나와 주변사람들의 얼굴표정을 보면서 더욱 더 노무현이 그립다. 한때 봉하마을에 가는 것조차도 두려웠다. 나라는 자신의 무력함과 나약함에 좌절감을 맛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좌절감을 이기기 위해서 그리고 아픔과 고통을 넘어 새로운 인생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가시밭길을 넘어야 할 관문이다. 이제 추모 3주기를 맞아 내 모든 슬픔을 뱉어버리고 싶으나, 뱉어보려도 더욱 가슴만 아플 뿐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다 말인가?

 

“내 마음속 대통령” 노무현, 그는 정말 시대와 현실에 굴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힌 인물이다. 기득권과 특권계층에 대해 끊임없이 대항하고, 그들과 맞서다가 상처도 받고, 많은 오명 아래 괴롭게 가슴이 타들어갔다. 한국에서 살다보면 과연 도덕이 무엇이고?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면 회의적으로 돌변한다. 독일의 자유에 대한 모순과 왜곡을 신랄하게 조롱하던 니체가 과연 “정치는 권력에 향한 의지”라는 말처럼 한국에서 도덕과 정치는 말 그대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인식할 수 있는 하나의 role이 있었다. 그것은 인간적인 가치나 윤리적인 가치가 아닌 힘이라는 하나의 상징으로 모든 도덕과 정치가 변질되었던 것이다.

 

그는 말 그대로 그런 한국의 사회에 뿌리깊이 박혀있는 role과 싸웠다. 빽도 없고 힘도 없으면 그저 입 다물고 닥치고 박혀 있어야 한다는 것이 결국 최소한의 상식이 아닌 몰상식과 폭력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에서 말이다. 노무현의 죽음은 그런 사회에서 마지막으로 자신의 몸을 날려서 거기에 대항하던 하나의 상징이고, 그 상징으로서 기득권과 특권계층에 대한 상징에 대항하려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에 대한 언론과 여론은 너무 심상치 않았다. 검찰에서 분명히 확정되지 않은 정보가 다음날 특급 기사로 표지로 실려 생생하게 전파되고 있었다.

 

최근 차명계좌 관련하여 검찰에서 그것은 <사모님의 생활비를 여비서 통장 200만원에 입금한 것이었다.>라고 인정했다. 무참히 죽음의 사지로 몰아넣어 검찰마저도 그런 발표를 했다. 왜 사실이 2009년 5월에 나오지 않았을까 했다. 그저 생활비를 관리하던 여비서의 통장까지 스캔들로 만들어야 했으니 말이다. 그때는 오죽했을까? 측근비리라고 하여 증명되지 않은데, 마치 사실로 만들려고 했고, 증거가 나오지 않자 거래고객과 방문자들 심지어 고객들의 정보까지 억지로 검색했다. 자주 식사했었던 식당과 허리 치료를 받기 위해 진료한 병원까지 털었다. 정말 이것이 정치의 하나의 순리고, 인간에 대한 배려인가?

 

죽음에 직면의 고인은 어떻게 보았을까? 자기 주변의 사람들로 자신에게 겨누어진 화살은 받아들임은 분명 옳은 일이다. 하지만 아닌 일까지 겨누고, 진실의 메아리는 벽에 가려 막혔다. 억울한 일이 있으면 거기에 의탁하는 것이 진정한 법의 수호가 아니던가? 한국에서 법이란 그저 권력을 향한 도구로 변질되었다. 미디어는 진실이 아니라 진실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형이상이상학(pata-physics)적인 공상과학 소설처럼 변했다. 그 공상과학 소설의 끝은 전직 대통령의 자살이란 커다란 충격까지 이어졌다.

 

인간의 생명은 간단하지 않다. 우주만큼 귀한 것이 인간의 생명이라 했음에 자기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인간들이 살아간 인생이란 과연 얼마나 잔혹하고 슬프고도 분노와 광기로 쌓여 있을까? 그러나 그 죽음이 개인의 이유인가? 아니면 개인의 이유를 넘어 하나의 시대적인 비극일까? 노무현의 죽음은 어느 대통령의 죽음으로 볼 수 없다. 막막하고 답답하고 괴로운 우리 시대의 서민들 약자들 그리고 나 같이 아웃사이더적인 인물을 대신하여 죽음으로 지키려고 한 것이다.

 

노무현의 죽음은 10대 소녀부터 나처럼 30대 남자, 더 나아가 환갑 넘은 어르신들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기 했다. 그의 죽음은 우리들 가슴 속에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킬 수 없어 멀리서 그저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본 일개 서민들에게 그저 악몽에서 일어난 것처럼 보였다. 자기에게 너무 엄격하고, 남들에게 너무 관대한 바보 같은 사람, 내 주변 사람들 중에서는 그의 죽음을 너무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때까지 그 많은 시련과 고통, 장애들을 넘어간 일어선 그가 이토록 허무하게 가냐고 말이다.

 

하지만 더욱 더 큰 시련과 고통, 장애는 그의 죽음이 아니라 그의 죽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의 죽음은 편안하지 못했다. 국민장을 하느니 마느니 에서 갈등을 빚었고, 노제에서 살풀이를 하는데, 정부 측에서 일방적으로 등을 돌렸고, 시민들이 만든 자율분향소에는 경찰들만 즐비하게 놓여있었다. 처음에는 시민들의 분향소를 만들려고 하면 철거하던 경찰들이 시민들의 항의에 철거했지만, 어떤 건물 앞에는 버스를 세우고 뒤에는 물대포차량이 있었다고 한다. 상식인가? 정상인가?

 

망자에 대한 예우나 격식에 대해 예초부터 없었다. 슬픔과 눈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공간이나 도움을 주지 못할망정, 그들을 예비 집회자 내지 시위자로 판단했다. 아니 오히려 이런 점들을 집회 내지 시위로 만들 수 있었던 자극제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럴 때에 집회와 시위를 한다면 장례에 대한 예의도 망자에 대한 존중도 아니다. 그래도 마음은 슬픔과 분노로 찰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장례행사가 마무리되던 때에 노란색 물건조차도 가지고 못하게 하던 공권력 앞에서 최소한의 자유마저 박탈했다.

 

노무현의 죽음에서 오늘날 한국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느끼고 있는가? 물론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니 이렇게 저렇게 옳다고만 여길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죽음이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일이다. 최근의 정철 카피의 “노무현입니다”를 읽었다. 그가 대통령 시절 사진 찍기 싫어하던 그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었다. 거기에 순간적으로 찍힌 그의 표정에는 어떤 권위의식이나 권력을 탐하던 모습 따위는 없었다. 오로지 인간 노무현만 존재했다. 가끔 나는 노무현의 신화를 생각한다.

 

노무현은 이미 육체적으로 죽었다. 존재하던 인간이 실존적으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그의 진행형적인 삶은 이미 모두 마감했다. 하지만 그는 신화적인 존재로 아직도 살아있다. 그의 죽음에 대해 인정하면서 그가 살아있다고 하는 신화적 존재처럼 과연 그는 살아 있음이 분명하다. 아직도 내 마음속에 살아있다. 단지 나는 그가 남긴 숙제를 하나씩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 같다. 최근 읽은 책 중에 존 롤즈의 “만민법”을 읽었다. 병실에서 누워 죽어가는 그날까지 책을 집필하던 위대한 미국철학자 존 롤즈의 글을 읽으면 이런 말이 있다. 단어가 모두 기억나지 않으나 어렴풋이 이런 내용인 듯하다.

 

<진보란 역사적 상황에서 역사적 인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적 인식조차도 철학적 인식에서 나온다.> 라고 말이다. 과연 영문이 The Law of Peoples처럼 Peoples란 만민도 되나 시민도 된다. 노무현이 꿈꾼 정치적 사회적 가치는 시민사회였다. 시민은 단순히 오늘날 살아가는 사람 중에 한명이 아니라 그 한명이 정치적 자유주의에 입각하여 올바른 가치관으로 통해 사회를 이끌어 가는 대다수의 리더이다. 물론 시민들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세계에 많은 지식인들은 시민들을 만들고 계속 유지하기 위해 글을 적고 가르쳐야 한다. 과거와 현실에 대한 인식만이 아니라 그 인식에 대한 재인식들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그런 세상을 만들기란 정말 너무나도 어렵다. 하지만 내 마음속 대통령이 살아있는 한 나는 계속 정진할 수밖에 없다. 그의 죽음보다 더 슬픈 것은 그가 단순히 죽음과 동시에 사람들의 뇌리에 잊혀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추구하던 가치관들이 모두 사라지는 것이다. 비록 실패하고 좌절했다고 하더라도 그 실패와 좌절이 반드시 모든 것을 실패했고, 좌절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실패와 좌절로 통해 오늘날 우리가 그를 타산지석 삶아 배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럴수록 마음이 아프다. 그의 진실함이 너무 가깝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는 영원한 내 마음속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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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무장의 예언자 트로츠키 - 아이작 도이처의 트로츠키 3부작
아이자크 도이처 지음, 한지영 옮김 / 필맥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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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17년 10월 혁명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간 트로츠키, 그의 활약은 러시아 대표적인 영화감독인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10월”이란 영화를 보다시피 그의 영웅적인 활동은 이미 러시아 사회에서 누구나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1927년 영화 10월이 나올 적에 트로츠키의 모습은 분명히 그 누구보다 앞에 서서 열변을 토하고 전진하던 모습이었다. 만약 당시 러시아의 모습을 예기치 못했다면 그가 그런 비극적인 주인공이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의문까지 남길 정도다.

 

그는 당시 인생 최고의 비극적 난관에 부딪혔다. 오데사에서 붙잡혀 시베리아로 가는 유형에서도 심지어 10월 혁명전에 케렌스키에 의한 압박에서 말이다. 그는 분명히 러시아혁명을 성공시켰고, 거기에다가 외국과의 전쟁에서 더 나아가 외국이 지원하는 백의군까지 토벌했다. 그런 러시아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인권을 울부짖은 트로츠키의 말로는 비참하고도 우울하기가 짝이 없었다.

 

트로츠키는 너무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는 남들이 이해하지 못한 부분에서 시작하여 앞으로 다가오는 미래까지 알고 있었다. 그는 미래를 투시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역사적인 사실과 더불어 현재의 상황을 아주 객관적으로 과학적으로 그리고 냉정하게 바라본 것이었다. 그의 엄숙하고 차가운 시선에서 그의 열변은 뜨겁고 화염처럼 쏟아 오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주어진 것은 오로지 신념이고 의지였다. 문제는 그런 점들이 자신에게 독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어떤 권력과 특혜를 그는 원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기가 레닌생전에 제2인자를 위치라고 모두 인정할 때도 그는 권력을 주어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 권력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거부하였고, 그것에 대한 미련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모습에서 앞으로 다가올 암흑의 러시아가 도래함은 필연적이었다. 트로츠키의 그런 태도가 바로 자신의 파멸을 이어온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진보와 보수, 그리고 좌파와 우파를 오고간다. 러시아혁명에서 극렬한 좌파들이 이제는 러시아혁명정부에서는 극렬한 우파로 변모한다. 그들에게 권력이 생겼고, 그들에겐 명예와 지위가 생겼다. 그러나 그들은 어리석게도 자신들의 중요한 과업을 잊었다. 차르와 백위군, 케렌스키와 서구열강을 물리친 후에 다가올 자신들의 나라에 어떻게 이끌어가는 것이다. 이 모든 압제들이 사라진다고 하여 러시아에겐 희망이 오는 것이 아니라. 단지 희망을 열어갈 수 있는 열쇠 1개만 던질 뿐이다.

 

트로츠키는 이 모든 상황을 접수하고 나서 큰 위기가 도래함을 알고 있었다. 러시아는 당시 너무 후진국이고, 모든 국민 대부분이 농민이었다는 점이다. 외국에서는 수많은 무기와 기계장비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러시아 상황은 차르 정권보다 못한 공업생산량과 서유럽의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무장능력을 자랑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트로츠키가 서구열강에게 지원받는 백위군과 다투면서 그들을 이긴 것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나라가 힘들었다. 트로츠키가 선택할 사항은 독재였다.

 

하지만 그는 진실로 독재를 원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러시아 각 분파의 최고위원을 맡음에도 불구하고 초기에 자신이 살던 집은 매우 낡고 허름했으며, 그가 가진 가구는 싸구려 옷장과 침대, 식탁이었다. 그런 집에 늘 손님이 찾아와 트로츠키는 대화를 하고, 높은 지위에서 공장노동자까지 그는 그 누구라도 자신의 방문을 활짝 열었다. 그런 그가 욕심을 어떻게 냈으랴? 그는 독재를 하나의 수단으로 여기고, 그것을 토대로 다시 경제성장 후에 러시아 국민들에게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트로츠키의 정치력에서 가장 인상 깊은 점은 그가 만약 필요한 인물이나 사상, 체계, 문물이라면 그 적들의 소유까지 배우고 습득하여 언젠가는 그들에게 전달한 그 상대진영까지 계속 혁명을 나가야 하는 점이다. 트로츠키는 영구혁명론을 주장했다. 그는 자신만의 나라가 살기 위해서만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민주주의를 갈망했다. 당시 유럽에서는 노동자들이 심각한 경제난 식량난에 전쟁까지 당했으니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동쪽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의해 제국주의 침탈로 식민지 주민들이 심각한 고통을 받았다.

 

그런 기억에서 그런지 방송국 특집에서 러시아5부작 혁명이야기를 다룬 작품에서 1920년 모스크바 코민테른 행사 현장에서 태극기가 높이 휘날리고 있음을 보았다. 독립군 이동휘와 박진순이 조선독립을 위해 러시아에 방문한 것이다. 레닌이 살아있을 때 그는 동북아시아이 약소민족인 조선의 독립을 지지했고, 군자금도 지원했다. 그러나 레닌이 죽고 트로츠키가 망명가고 난 뒤인 1936~1938 사이 많은 조선독립군들은 스탈린의 철권정치에 죽임을 당한다.

 

만약 이때 트로츠키가 제대로 자리를 잡았으면 중국 공산당이 일본과 항일전투를 제대로 벌였으며, 국제적인 관계를 제대로 유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에선 원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일국사회주의를 원했고, 그것은 국가자본주의를 넘어 전시공산주의로 유지하게 된 동기이다. 오늘날의 공산주의를 혐오하게 하여 이른바 반공사상을 만들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가 바로 스탈린에 의해 주도된 러시아 쇼비니즘적인 태도 즉 민족주의적인 요소이다. 역사란 항상 반복되는 것일까?

 

세계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혁명은 1789년과 1917년에 일어났지만, 결국 실패했다. 프랑스혁명은 자코뱅당은 몰락과 당통의 죽음 그리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국민이 주인이 아닌 관료주의가 주인이 되었다. 전쟁은 계속되고 국민들은 거기에 열광해 갔다. 여기서 러시아와 프랑스혁명의 비극은 국민들의 한계였다. 스탈린의 정책 중에서 스탈린주의를 늘리기 위해 많은 노동자를 당원으로 받았으나, 그들은 무식했다. 정치적 안목, 국제적 상황, 사회적 변화, 경제적 관점, 문학적 감명, 철학적 원칙 따위는 전혀 없었다.

 

오로지 레닌이 사후 레닌을 따르는 열광적인 군중심리와 한몫 잡아보겠다는 기회주의자들만 여기저기서 모여들었다. 그게 아직도 계속인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 자주 보인다. 그런 요소들은 스탈린을 강하게 하고 트로츠키를 어렵게 했다. 왜인가? 트로츠키가 하는 말은 상대방을 안심시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를 아주 논리적으로 철학적으로 때로는 열정적으로 토한다면 스탈린은 간단했다. 지금의 안위를 위해서란 것이다. 일국사회주의라는 체계에서 스탈린은 자신들의 안위만 중요시하고 그것은 결국 어리석은 군중으로 하여금 세뇌했다.

 

나중에 다가올 쿨라크의 학살과 착취, 노동자에 대한 막강한 착취와 억압, 자유로운 언론의 탄압, 과거 러시아혁명의 영광을 모조리 분뇨 속에 묻어버리는 스탈린의 작업은 드디어 준비되었다. 스탈린은 레닌이 트로츠키를 아낀 점에서 매우 경계했고, 그 둘 사이를 멀어지기를 바랐다. 특히 레닌이 1922년 총상 이후 1924년도에 사망할 때 스탈린은 기회를 맞이했다. 당시 트로츠키는 심한 병을 앓고 있었다. 오랜 투쟁과 열변에서 그의 몸은 병에 찌들어 갔다. 특히나 레닌이 죽을 때 그는 레닌의 죽음을 전해 듣지 못하고, 스탈린과 긴장관계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큰 치명적인 약점으로 만들어버렸다.

 

레닌의 장례식에 가지 못함은 결국 레닌과 트로츠키 사이를 의심하게 만든 것이다. 레닌과 트로츠키 사이는 레닌의 아내가 그러하듯 혹은 많은 10월 혁명가가 인정하듯 모두 둘 사이의 우정과 연대를 지지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런 트로츠키를 궁지에 내몰고, 트로츠키가 제안한 모든 정치적 과제를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특히 NEP라는 신경제정책에서 트로츠키가 모든 것을 일구어내고 그것에 따른 오류와 왜곡을 정정하려고 했으나 스탈린은 오히려 못하게 하고 그것에 생기는 현상 모두 트로츠키에게 전가시켰다.

 

당시 농부들은 정말 무지했다. 쿨라크라는 부농은 오로지 자신의 이익, 신경제정책에 생긴 벼락부자는 자신의 이익만을 보았다. 하지만 결국 이들은 스탈린에게 의지하다가 후에 자본주의보다 더 심각한 자본주의화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트로츠키가 옳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쯤 트로츠키는 이미 러시아에 더 이상 올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그나마 그가 나가기 전에 러시아혁명 정치가들은 얼마든지 트로츠키와 연대하여 정치를 원상 복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부하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같은 인물들은 처음에 트로츠키와 대립만 내세우다 어느 순간 스탈린에게 모두 권력을 빼앗긴다.

 

그리고 1936년에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 1938년 부하린은 스탈린의 공포정치 아래 총살당한다. 여담이나 부하린의 죽음은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이 소련을 침범할 때 큰 타격을 줄 수 있었다고 한다. 스탈린은 정치공작과 권력정치에는 능했으나 정치, 외교, 경제, 군사, 문학에는 소질이 없었다. 그의 수완은 그런 뼈아픈 경험으로 생긴 하나의 대가였다. 트로츠키의 어리석음은 그런 스탈린을 방조한 것이었다. 그를 좀 더 알았더라면 많은 고통들이 자신에게 러시아에게 닥치지 않았을 것이다.

 

1번째 아내에서 태어난 2딸이 스탈린과의 대립에 의해 죽어나갔다. 그녀들은 트로츠키주의자였고,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아내였다. 그들에게 주어진 냉대와 핍박은 가난과 병폐로 생을 마감하게 한다. 그런 가족의 죽음 친구들의 배신과 전복에서 트로츠키는 병마와 더욱 싸워야 했다. 불면증에 말라리아는 그를 지치게 했다. 하지만 그를 더욱 지치게 하는 것은 불량하고 사리사욕만 채우는 인간들이 마치 위대한 정치가 놀이에 빠진 것이다. 마지막으로 트로츠키가 코민테른 회의장에 갔을 때 각 국의 대표를 보니 가관이었다. 예전에 파시즘에 빌붙은 위선가 앞으로 나치에게 붙은 변절자들이 모두 모여 트로츠키에 향해 공격했다.

 

그에게 더 이상 러시아에 있을 위치는 없었다. 그래도 희망이란 스탈린의 정치적인 능력이 너무 떨어져서 그의 복귀를 모스크바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나, 스탈린은 그것마저 용인치 않았다. 그를 모스크바에 멀리 떨어진 카자흐스탄 어느 벽촌에 나둔 것도 모자라 이제는 그를 러시아에 두려하지 않았다. 트로츠키는 그렇게 스탈린이 보낸 특수열차에 러시아를 영영 볼 수 없게 된다. 자기가 러시아에 올 때 그는 비참한 혁명가고, 이제는 비참한 망명자였다. 그러나 그는 질수만 없었다. 그의 동료가 트로츠키가 처음으로 스탈린에 의해 유형을 보낼 때 자살하면서 트로츠키에게 이렇게 “불굴한 의지와 단호한 태도”를 유지하길 바랐다.

 

운명이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하나, 트로츠키의 역사적인 상황에서 이토록 변화될지 몰랐을 것이다. 그가 이때가지 자신을 희생하여 모든 것을 이루려고 살았던 것만큼 그 배반의 아픔이란 이루어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 가슴 아픈 사실은 여전히 역사란 되풀이된다는 사실이다. 스탈린에 의한 군중심리 자극과 무지하고 이성적이지 못한 대중들은 여전히 정치적으로 사용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들은 당장 눈앞의 이익만 따르고, 먼 미래를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오로지 안일만을 위해 살아가다 결국 희생당한다. 인간에게 왜 지나간 역사를 보고 또 보란 이유는 역사로 통해 당시의 사회를 알고 인간의 한계를 배워나가 자신이 살아가야 할 철학적 자세를 유지함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혁명의 자리에서 레닌보다 더 앞에 나서서 언제라도 총알에 맞을 각오가 된 트로츠키는 배신당한 혁명에서 병마에 시달린 채 가족을 잃은 채 멀리 아주 멀리 떠나야 했다. 그의 인생살이에서 우리는 어떤 점을 생각하고 보고 생각해야 하는가? 미래를 준비하는 자들은 항상 고독한 것 같았다. 때로는 비난과 배신에 시달리고, 자신이 주장한 것이 결국 도래하는 사태로 인해 허무함과 박탈감에 주저할지도 모른다.

 

트로츠키는 “어중간한 지식과 어쩡쩡한 능력만을 지닌 사람들이 많다”를 알고 있었고, 그것을 타계하기 위해서는 “배우는 법을 배우는 것”도 중시했다. 그는 단순히 알고 있는 것만이 모든 것이 아닌 그 자체를 알아서 그 원리까지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많은 불가능으로 다가왔다. 대중들은 러시아혁명으로 차르를 몰아내고 백위군을 몰아낸 것이 전부로 알았던 것이다. 단지 그것은 또 다른 시작을 향한 하나의 초석임을 몰랐으며, 그들의 어리석은 결국 자신들의 미래까지 모두 버려야 했다. 그것이 바로 역사의 사실이며, 냉정한 현실이란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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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한 예언자 트로츠키 - 아이작 도이처의 트로츠키 3부작
아이자크 도이처 지음, 김종철 옮김 / 필맥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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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에게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은 계속 끝나지 않은 이야기처럼 다가온다. 이전에 조지 오웰의 소설에 탐욕스럽고 난폭한 돼지 나폴레옹의 이야기는 지속되고 있었으나, 그 돼지에게 쫓겨난 작은 돼지 스노우볼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오로지 나폴레옹이 키운 사냥개에게 내친 이후로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없었다. 나는 그 작은 돼지의 후기가 참으로 궁금했다. 그리고 나는 트로츠키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다. 트로츠키가 저술한 러시아 혁명사는 보았으나, 정작 그는 어떤 사람을 알기란 그의 일대기를 적은 책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무장한 예언자 트로츠키>라는 서적을 읽게 되었다. 페이지가 700에 이르는 거대한 장편 도서로 그의 인생이 얼마나 파란만장했는지 다시금 알 수 있게 해주었다. 한편으로 이 책을 접하면서 아직도 북한과 대치하는 분단국가의 고통과 아픔 그리고 내부의 갈등과 위기는 어디서부터 시작일까라는 초점을 생각해본다. 1905년 러시아 피의 일요일과 1917년 2월과 10월에 발발한 혁명, 이것은 전 세계적으로 큰 사건이었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레닌과 트로츠키가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돌이켜보면 레닌과 스탈린은 있어도 그 자리에 트로츠키가 없었다. 트로츠키의 일대기를 통해서나 혹은 마르크스주의들에 대한 역사와 업적에 본다면 그의 업적은 레닌 이상이었다. 레닌은 분명히 러시아 차르권력으로부터 국민들을 억압에서부터 해방시키려 한 것이 사실이고, 1차 세계대전에서 허무하게 죽어가는 농민으로 구성된 군인들까지 인명을 살리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상황에서 트로츠키가 있었다는 점과 그 트로츠키가 그 중심점과 그 최전방에서 구군분투를 하고 있음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스탈린과 스탈린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그를 희생시킨 것이다. 역사라는 이름에서 말이다. 트로츠키는 참으로 미묘한 인물이었다. 이 책을 저술한 아이작 도이처는 폴란드 공산당에 가입하고도 제명당한 인물이다. 제3 인터내셔널인 코민테른이 사실 정말 노동자의 편이 아니라 스탈린과 스탈린주의자들의 권력도구로 전략한 사실이다.

 

사실 그런 내용은 1936년 코민테른 현장에서 북한 김일성이 나타난 점과 더불어 1937년부터 한국독립군 중에서 홍범도 장군처럼 비롯한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고, 또한 1936년부터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살해당하고, 1938년 독립운동가 김산도 숙청당하는 일들이 발생한다. 트로츠키 죽이기 이름은 스탈린의 철권통치에 대한 하나의 수단이었고, 스탈린이 어느새 트로츠키가 공헌한 러시아혁명을 대체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계속 유지되지는 않았다. 책 뒷면에 “살아 숨 쉬는 한 나는 미래를 위해 싸울 것이다”라는 트로츠키의 구호처럼 그는 스탈린의 자객에게 죽음을 맞이하나, 그의 염원은 다시 미력하게도 꽃을 피웠다. 1968년 프랑스 5월 혁명에서 시민혁명의 주체적으로 선동한 자들은 프랑스의 마지막 아방가르드인 상황주의자였으나, 그 속에는 트로츠키주의자들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자 중에서 레닌과 트로츠키는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며, 그들이 쌓아온 역사적 산물은 20세기에 큰 여파를 주었다.

 

그런 트로츠키의 일대기를 <무장한 예언자>라고 했으니, 그의 일대기가 얼마나 화려했는가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처음에는 레닌의 친형이 러시아 차르를 암살하려고 했으나, 실패하여 죽게 되자 귀족의 후손인 레닌이 러시아 혁명의 시발점이 되었고, 트로츠키는 유복한 유태인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어린 시절 자신보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다. 한편으로 자신의 농장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이 아버지에 의해 착복당한 모습을 보면서 슬퍼하기도 분노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비상한 머리를 가지고 있었고, 솔직한 자신의 신념을 가진 그는 소년시절부터 고향을 떠나 친척집에서 공부를 했고, 그의 출중한 학업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많은 지식을 섭취하고 현실적인 안목을 갖추었다. 그리고 다소 나로드니키 성향을 가진 트로츠키는 학창 시절에 그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 오히려 마르크스주의를 지탄했다. 당시 러시아는 공업화가 되지 않았고, 거대한 영토에 농민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열렬한 논쟁의 상대자이며, 첫 번째 부인인 소콜로프스카야와 상당히 많이 다투었다.

 

그녀는 트로츠키에 대해 가장 분노한 태도로서 말과 행동을 나타냈고, 거기에 반대하여 나중에는 그에게 가장 헌신적이었다. 왜냐하면 확고한 의지와 명석한 두뇌, 과학적인 사고와 현실적이면서 이상을 추구하는 모순적 현실을 해결하기 위해 모순적인 행동으로 해결하는 트로츠키에게 그녀가 가장 자신의 편이었다. 러시아 차르의 강렬한 탄압과 거기에 대한 반항으로 두 사람은 감옥에 갇힌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앞일을 도모하기 위해 결혼한다고 한다. 결혼하면서 소콜로프스카야는 트로츠키의 딸 두 명을 낳는다.

 

사실 그녀는 트로츠키와 연배가 비슷할 뿐만 아니라 나이가 훨씬 많았다. 두 사람의 첫 만남에서 트로츠키는 십대였다면 그녀는 이십대였다. 정말 사랑했을까 에서 그들은 남녀의 사랑과 더불어 정신적 사랑을 나눈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앞으로 일어날 러시아의 미래를 위해 헤어지고, 트로츠키는 두 번째 아내 나타샤를 만나고, 마지막 눈감는 그날까지 나타샤를 사랑하고 그녀가 있어서 자기가 존재했다고 할 정도로 아꼈다. 물론 나타샤 그녀 역시 러시아혁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트로츠키가 귀하게 편하게 자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의 농장에서 떠나, 편하게 공부하고 집필할 수 있는데도 오데사 친척 집에서 나오고, 그 역경 속에서 가족들을 버리고, 다시 권력을 잡음에도 그 권력을 이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정말 사람들이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외로웠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어느 당을 일방적으로 가입하지 않았고, 일방적으로 어느 사람에게 편을 들지 않았다. 그와 가장 친밀하고 가장 같이 업무를 한 레닌조차도 처음에는 잘 지내다가 12년 동안 그를 비판하고, 그 후로는 레닌과 러시아정부를 위해 가장 헌신했다.

 

세상에는 호사다마란 말이 생각난다. 너무 앞서 나가거나 활보를 하면 적을 많이 만드는 뜻에서 말이다. 그는 처음에는 친구들이 정치적으로 입성하자 배신을 당하고, 또 배반과 반대를 당하다가 어느 순간 동지로 만드는 과정을 보인다. 그의 지적인 열변과 토론, 정력적인 활동은 누가 봐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러시아 10월 혁명에서 레닌은 자리를 조용히 지키고 있는 반면, 트로츠키는 그 앞에서 선동하면서 나아간다. 그는 자신이 반대되던 찬성하던 그 누구라도 상관없이 자신의 웅변을 토해내었다.

 

그리고 그 어떤 불리하고 부당한 사람들이 있다면 어떤 그것을 마다하면서까지 대변과 변호를 해주었다. 한편으로 그는 또한 냉정하고 잔혹한 면도 없지 않았다. 결단과 의지로 행동한다는 것은 곧 최악의 상황에서 다른 상황을 감수함에서 그는 망설이지 않은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러시아혁명에서 1917년 10월에 모든 것이 끝난 것으로 본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러시아에서 아직까지 내전이 있었고, 차르정권 아래서 부귀영화를 누리려한 백색군이 남았다.

 

그 내전에서 트로츠키는 직접 진영에 나가 군사들을 지휘하고 응원하고 격려했으며, 심지어 전쟁의 한 가운데 직접적인 잠수함 침투에서 그 잠수함에 탑승했다. 그는 죽음을 두려하지 않으며 전진했다. 다른 러시아혁명 공로자들은 모두 모스크바와 다른 도시에서 지켜볼 뿐이다. 게다가 그 백색군은 주변 강대국의 지원까지 받고, 1차 세계대전이 끝남에도 불구하고 그 후속 군사력들은 러시아의 안전을 위협했다. 트로츠키는 끝까지 그들에게 저항하고, 또 응전했다.

 

그러나 전쟁이란 것은 사람을 피폐하게 하고, 국내 사정을 악화시키며, 토지와 산업시설을 척박하게 하였다. 트로츠키 입장에서는 비록 러시아가 공산주의로 되었을망정 미국의 테일러주의적인 정책을 도입하자고 했다. 화폐의 통화정책이 고물가로 이어지고, 전시 공산주의정책은 결국 국유화로 통해 농민들의 생산력을 저하시키고, 노동자들에게 식량공급이 되지 않을 것이란 점에서 말이다. 그가 그런 정책을 내놓을 때 많은 정치가들이 반발했다. 그러나 그가 그런 말을 한 직후 그가 옳았음이 나타난다.

 

트로츠키는 비록 자신들이 공산주의국가가 되었다고 해도 만약 그것이 과거의 차르의 유물이나 혹은 1차 세계대전에서 교전한 국가 내지 혁명 이후 자신들을 위협한 국가의 체계나 문물이라도 필요하면 받아 들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단순히 혁명으로 모든 것을 종지부를 마무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개혁성을 강조한 것이다. 물론 시행착오 내지 강압적인 태도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나, 그것은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본래 국가가 재정이나 경제적으로 충분한 상태에서 혁명이 일어나면 분배의 원칙이 어느 정도 성립이 가능하나, 러시아는 오랜 기간 동안 이어온 가난과 낙후된 문화에서 그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분배가 가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러시아혁명 자체가 지독한 가난과 그 가난 속에서 시작된 차르의 무능함과 전쟁의 연속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물론 다음 편을 봐야겠지만, 이 책에서 저자는 트로츠키가 스탈린과의 정치적 투쟁에서 밀려 자신이 행한 것들이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자신이 추진하려한 신경제 정책이 스탈린에 의해 다른 명분으로 바뀌어 그대로 통용된 사실을 말이다.

 

가끔 나는 국가와 정부체계, 국민들의 상황에서 위에가 아무리 바뀌어도 하부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바뀌기 어렵다는 칸트의 생각처럼 나도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지도자의 의지가 계속 낙후되어 무능하고 수동적인 차르가 된다면 그 정부의 능력은 최악으로 떨어져서 최후의 고통은 국민들에게 간다는 사실이다. 트로츠키는 그런 상황에서 바꾸려고 했으나, 결국 실패한다. 이번은 <무장한 예언자>이나 다음 편에서는 <비무장한 예언자>로 등장할 트로츠키, 그는 국제상황과 사회정치 문화생활에 대하여 상당히 조예가 깊은 정치가, 문학평론가, 군인, 경제학자였다. 그는 러시아혁명을 성공하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 후가 문제였다. 과업의 완료는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서곡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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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입니다 - 노무현 대통령 미공개 사진에세이
정철 글, 장철영 사진 / 바다출판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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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보고 싶은 사람도 있고, 보기 싫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보고 싶은 사람을 다시 보면 반갑기도 하나 한편으로 슬픈 사람이 있다. 사진으로 영상으로 보는 그의 얼굴은 미소를 짓고 있으나, 어째서인지 웃는 그의 모습을 뒤로 한 채 내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나도 모르게 흘러내렸다. 노무현, 그는 나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의 관련 도서 중에서 그의 일대기나 소개, 일화 소개보다는 그의 사상과 철학에 대한 책을 나는 더 많이 읽는다.

 

왜냐하면 인간적인 그의 모습을 느끼면 느낄수록 마음이 아파오기 때문이다. 너무나 인간적이었던 노무현, 하지만 너무나도 자신에게 엄격하고 강박관념에 집착한 인간인 노무현, 그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풍차를 괴수로 보고 승리와 패배의 계산도 없이 달려가는 기사 돈키호테와 같다고 볼 수 있다. 그의 그런 모습은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안타깝게도 했으며, 한편으로 좋아하게 되었다.

 

인간적인 매력이란 완벽한 미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완벽하지 않지만 그 누구라도 깊이 공감하거나 또는 다가갈 수 있는 인간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에게 주어진 것은 완벽한 미나 상징이 아니다. 가진 것도 없고 가방끈도 짧으며, 정말 힘도 빽도 없이 시작한 인물이다. 그런 사람들이 나오니 기존 권력을 지닌 엘리트주의자들에겐 얼마나 가소로워 보였을까?

 

그는 그런 세상에 대해 홀로 싸워나갔다. 그러면서 친구도 만나고 동료도 만나고 지지자도 만났다. 그러나 그는 자만하지 않았다. 그는 그 어떤 누구라도 자신의 키에 맞추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키에 맞추기를 바란 것이다. 그의 일화 중에 한 가지가 생각난다. 그가 국회의원 출마를 위해 주거지역을 돌아다닐 때 그는 우연히 호떡 장사를 하던 예쁘장한 아주머니 한 분을 마주친다. 그 아주머니는 아주 부끄러워하며 말없이 노무현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분의 손은 호떡을 굽기 위해 밀가루가 묻어 있었다.

 

그런 아주머니의 모습을 보고 노무현은 그 분의 손을 꽉 하며 잡았다고 한다. 그 아주머니가 사실 부끄러워하던 이유는 노무현이 악수를 청하고 했으나, 손이 깨끗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것에는 아랑곳 하지 않은 채 그 아주머니의 손을 잡았다고 한다. 아주 작고 사소한 일이나, 인간은 규모가 크고 웅장한 일에는 자신의 본성을 드러나지 않지만, 일상적이고 사소한 생활에서 일어나는 순간마다의 행동들은 그 사람의 인간 됨됨이를 나타내어주는 것이다.

 

그가 사법고시를 합격하여 판사를 거쳐 변호사에 국회의원과 대통령까지 거치고, 마지막 봉하마을에서 눈감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그렇게 인생을 보냈다. 나는 인간에 대해 평등하냐고 묻는다면 평등하지 않다고 대답한다. 오히려 인간이 모두 평등하다고 한다면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재산적으로 불리한 사람들은 어떻게 그 평등에 쫓아갈 수 있을까? 절대로 불가한 일이다. 오히려 평등하지 않기에 그 평등하지 않음을 인정하여 스스로 그 높이에 맞추는 것이 평등으로 향하는 철학적 자세라고 본다.

 

난장이와 대화할 때는 난장이처럼 되어 대화하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노무현은 그랬다. 권력이란 것은 결코 자신의 이익과 부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선택이 결국 마지막 최후라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정치라는 것은 힘 내지 권력에 향한 의지일까? 정치하는 자나 혹은 정치하는 자를 멀리서 보는 자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같은 인간인데, 왜 이리 박하게 살아가야하는지가 정말 미스터리이다.

그래서 나에게 노무현이란 이름과 얼굴은 그립다. 그의 솔직하면서 또는 인간적인 면이 말이다. 물론 솔직한 경박함과 날카로움을 들어내고 인간적인 면은 약한 인간의 모습을 나타낸다. 하지만 나는 솔직하지 못하여 꿍꿍이를 숨기며 국민을 속이고, 자신의 약한 모습보다는 국민의 약한 모습을 물고 늘어지는 정치하는 자들을 생각하면 무엇이 진정한 정치의 가치냐고 말이다.

 

질문 자체는 물론 모범답안으로 돌아와도 현실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부분일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을 다 넘어서서 정치하는 사람 노무현은 어떠한가는 다들 판단기준이 있으니 어떻게 옳다고 혹은 틀렸다고만 할 수는 없다. 그래도 나는 인간적 노무현을 좋아하기에 정치적 노무현을 좋아한다. 나는 논리와 합리성으로 무장한 인간보다는 조금 윤리와 인간성으로 무장한 인간이 좋다. 그들은 나 같은 사람들을 업신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적인 얼굴과 표정, 말투와 행동을 한 노무현의 비공개 사진을 보자니 마음이 막막해진다. 가식 없는 그 투박하면서도 정겨운 모습은 뇌리에서 지울 수 없다. 근엄하고 높게만 보이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어린아이 앞에서 친구가 되어주는 그의 낮은 몸짓을 말이다. 물론 그는 인간적인 면만 강조한 것이 아니다. 일에도 열정을 다했다. 그가 국회의원 시절 그의 방은 불이 계속 켜져 있었다고 한다. 밤샘과 철야를 하면서까지 일을 했다고 한다.

 

대통령이 되어서도 항상 이동 중이라도 업무를 하기 위해 보고를 받고 결재를 하였으며, 그 바쁜 와중에도 독서를 꾸준히 실천했다. 그의 독서력을 본다면 결국 바보라는 명칭은 어울리지 않았으나, 그는 바보임을 자처했다. 그런 바보 노무현의 미공개 사진에세이에서 사소하나 세심한 그의 배려감이 돋보인다. 이 책에서 재미있는 일화로 그는 편한 자동차로 이동하기보다는 헬기를 많이 이용했다고 한다. 헬기로 이동하면 소음진동으로 시끄럽고, 자리도 편안하지 못했다.

 

그러나 헬기를 탑승하면 자신의 이동으로 인해 주변 시민들에게 교통피해를 미치지 않게 된다. 최근에 어느 행사가 열린다고 길거리 위로 장애인들을 못 지나가게 한 일이 있었다. 장애인들도 인간이고, 그들도 인간으로서 누릴 인권이 있는데, 단지 그들이 몸이 불편하게 보여 시각적 미에 저하된다는 이유로 묵살 당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는 무엇인가?”에서 사람들은 자기보다 불행한 사람을 보면 2가지 이유로 인상을 찡그린다고 했다.

 

1가지는 그들의 모습이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여 얼굴을 찡그리는 점과 다른 1가지는 그들이 귀찮게 여겨지고 보기 불편하다는 것으로 얼굴을 찡그리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어디에 초점을 두고 인상을 주는 것이 당연한 것인가? 군대 가기 전에 친하게 지낸 어떤 형님은 선천적으로 소아마비로 2다리를 사용하지 못한다. 그는 엄청난 멸시와 차별, 경계의 세상과 시간에서 살아왔다. 내가 그와 같이 길을 걸을 때 그와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런 사람까지도 같이 살아봤으면 좋겠다고 하는 어느 바보의 외침이 그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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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외로운 전쟁
김용한 지음 / 포북(for book)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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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사람을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사람이 돈을 지배하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라는 말을 들으면 누구나 이성적으로 겉모습에선 근엄하고 당연한 표정으로 “예, 그렇죠. 사람이 중요하죠.” 라고 말을 할 것이다. 그러나 막상 뒤를 돌아보거나 주변의 시선들이 사라지면 방금 했던 어디로 갔는지 전혀 다른 이야기로 다가온다. 물질만능주의가 팽팽한 이 사회에서 사람들에게는 이성이 있기는 있다.

 

단지 그 이성이란 자신이란 존재가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하는 일순간의 임기응변에 불과한 것들이 많다. 왜 그렇게도 나는 회의적으로 다가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2년 전인가? 우리 집에 동네 통장인가 하는 사람이 와서 설문조사를 했는데, 그 통장 아줌마가 나의 엄마에게 질문을 했다. 살아가면서 차별받고 사는 것 같은지 말이다. 우리 엄마의 입에서는 받는다고 했다. 그러자 그 아줌마는 왜 그러냐는 말에 엄마는 이렇게 대답했다. 없는 것이 말이죠.

 

우습지도 않거니와 그냥 일상적인 흐름 같이 보이는 이 글에서 정말 사실이다. 가난이란 단어에서 우리 가족 역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물론 나나 형이나 대학교는 나왔고, 하루 3끼를 다 먹고 살고 있다. 하지만 그만큼 되기까지의 지난날과 희생이란 감출 수 없었다. 내 형은 어린 시절에 2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1번은 폐렴으로 1번은 연탄중독으로 말이다.

 

잘 못 먹고, 잘 못 입고, 잘 못 자던 점에서 내가 어릴 때까지 의식주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살았던 것이다. 철없는 지난 과거를 돌이켜 본다면 정말 내가 철이 없고 대학생까지 나는 진짜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힘겨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우리 가족만이 아니라 주변에 너무나도 많았다. 초등학교 당시 국민학교에 다닌 시절 내 주변 학급친구 중에서 기성회비를 내지 못해서 가끔 교실에 남은 것이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또는 부모님 1분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사는 동네는 부산에서 가난한 동네였던 것이다. 가난, 그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가난이란 이름 아래 멸시받고 천대받는 것들은 왠지 모르게 내 가슴에 앙금으로 남은 것 같았다. 이제 나이도 먹었고, 도서관에 가서 어려운 철학 도서나 사회과학 도서 한권씩 들고 다니면서 폼이나 내는 게 아닌가 하지만, 왜 가난한 것이 죄가 아닌데, 죄라는 이름이 되었는지 한편으로 원한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가 참 아쉽기만 했다.

 

단지 돈이 없어서 그렇게 살아갈 뿐인데, 단지 힘이 없는 서민이라서 마음을 사리면서 살아가는데, 그마저도 못 살 것 같은 기분이 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래서 인간에게는 언제나 신화라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단지 그 신화가 우리의 욕망을 반영하는지 아니라면 억지로 끼워 맞추어진 틀에만 의존하느냐는 분명 다른 것은 분명하다. 그에 대한 욕망에 대한 신화는 없는 놈들도 좀 살아보자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노무현을 알았는가와 이 책은 절묘한 타이밍에 걸려있었다. 2001년 시기에 나는 대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겨울방학이 지나고 2002년 겨울방학 때 나는 학교에서 주관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부산시 내의 폐기물현황을 알아보는 것인데, 북구에 위치한 덕천동, 화명동, 금곡동 일대를 돌면서 쓰레기 성상별 현황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가정폐기물도 있고, 사무실도 있었고, 특히 기억나는 것은 가정집 중에 아파트, 일반가정주택이 있어서 종량제봉투를 우리가 사서 그 쓰레기봉투를 준분에게 다시 준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모습을 처음 대하던 사람들의 눈에서는 경계심과 더불어 낯선 배타심에 나는 힘들었다. 게다가 집도 멀고, 아주 추운 겨울이라 오후 5시만 되도 온 몸이 시리고, 밤 9시 가까이 돌던 나는 괴로웠다. 단지 내가 하고픈 것은 집에 가고 잠자고 만화책보면서 TV에서 재밌는 방송만을 찾는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 일생일대의 변화를 준 사건이 있었다. 북구 덕천동에 돌면서 멋모르고 국회의원 사무실에 가서 폐기물현황 조사한다고 말하고, 환경부에서 나온 협조공문을 보여주었는데, 우리가 들은 말은 상상 이상이었다.

 

바로 꺼지라는 것이다. 꺼지라는 말을 시민에게 내뱉은 보좌관인지 비서관인지 모를 아저씨, 게다가 욕까지 해대는 것이다. 나는 학교선배와 마치 바보가 된 것처럼 거기서 나왔다. 그리고 그때부터 현실정치인에게 불신이 생겨버렸다. 나의 정치관은 권력을 지녔다고 사람 깔보는 자들에 대한 분노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서야 노무현이란 사람을 알게 되었다. 당시 덕천동은 북구·강서구 갑이었고, 노무현은 2000년 총선에서 북구·강서구 을에 나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때마침 군대에 전역한 형방에 가보니 이 책이 1권이 꽂혀있었다. “여보 나 좀 도와줘” 라고 노무현의 자서전이었다. 아마 형이 군대 가기 전에 구매한 책인 것 같았는데, 그때 나는 처음으로 노무현이란 사람을 알았다. 청문회 스타라는 것과 매우 가난한 변호사 출신이란 점, 그리고 노동인권변호사였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인권변호사란 말이 참 이상하다. 변호사라는 것은 인간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인데, 이제 그 변호사가 인권을 지키지 않아 인권변호사란 단어가 탄생한 점은 그야말로 아이러니였다.

 

게다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영도다리 몇 번 안지나간 입장에서 대학교 올라가면서 자주 겪은 교통 불편 중에 한진중공업과 금속노조 파업이 있었다. 당시는 몰랐다. 그저 왜 저렇게 하고 있을까라는 생각만 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때부터 알게 되었다. 해고는 생계수단을 잃은 자에겐 희망을 버리게 하는 행위고, 그 사람에게 매달려있는 가족들에겐 비참한 생활만 기다릴 뿐이다. 어린 시절 가난함에 기성회비를 못 내어 남아있던 애들을 생각하면 당시로는 이해하지 못했으나,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지금 읽고 있는 <노무현의 외로운 전쟁>에서 이 말이 가슴 속에 깊이 찌른다. “종로 선거 때 일입니다. 찬바람 부는 날, 노 의원을 모시고, 창선동 꼭대기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노 의원은 ‘나의 꿈은 사람 사는 세상, 힘 없고 빽 없는 사람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사회 건설에 일조하고자 하는 것’이라며 다부지게 갈 길을 재촉하던 그의 모습에서 나는 희망의 한 단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정말 힘도 없고 빽도 없어서 늘 무시와 고통만 받은 내 아버지, 그런 것도 모른 채 철부지로 자란 나의 지난날, 하지만 몰랐다고 하여 이제는 모를 수가 없었다. 나 역시 힘도 없고 빽도 없고, 가진 것이라면 오직 몸뿐이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세상살이에 고개를 숙인 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못 배우고, 못 살고, 힘도 없고 빽도 없는 나와 내 아버지, 그리고 나 같은 사람과 나보다 못한 사람들이 조금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 물론 그런 점에서 나는 노무현이란 인물을 좋아한다. 이에 반면에 싫어하거나 멀리하거나 부정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힘겨운 인생을 살고 있을 때 노무현이란 사람은 신화의 주인공이 되었고, 신화의 주인공처럼 사라졌다. 전에 누군가 서민이 뭔가라는 질문을 사회자에게 받았다. 그 의원후보는 서민이란 희망을 기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했다. 정말 비웃고 싶었다. 서민들은 희망을 기대하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너무 지치고 지쳐, 이제 큰 희망 따위는 기대하지 않는 사람들이 서민인 듯하다. 그들의 희망이란 단어는 눈 먼 떡이고, 현실의 괴로움에서 그저 벗어나는 것만이 희망이다.

 

괴로움을 벗어내는 것이 희망이라는데, 과연 희망이 무엇일까? 지역주의와 패권주의, 보이지 않은 사회적 차별과 그것을 합리화해버리는 사회구조 이 속에서 우리는 무엇에 대해 정의를 논한다는 말인가? 최근에 존 롤즈에 대한 서적을 계속 읽고 있다.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공화주의 이 거창한 말들에 대해 무엇이 옳고 그른가까지 말이다. 이 위대한 철학자의 도서에서 찾아낸 내용은 인간을 윤리적으로 대하고,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여 이성적인 가치로서 공공선을 추구하며, 합리를 지나 합당한 것을 찾아가는 현실적 유토피아이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 외로운 전쟁에서 노무현은 갖은 차별에 시달렸고, 패배한 선거라도 비굴하지 않게 패배 아닌 패배를 맞이했다. 지난 총선에서 우리 동네에서 어느 후보가 당선되었다. 그런데 그 후보는 뇌물문제로 동네방네 소문났고, 그것이 사실이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무마되었다. 게다가 어느 특정 종교단체에선 밥을 준다든지 혹은 뭔가 당장의 눈앞의 이익을 준다는 말까지 들었다. 결국 그런 것으로 선거를 치르고 돈을 사용하면 그 만큼 금액을 결국 국민의 세금에서 빼놓을 수밖에 없다. 멀쩡한 보도 블럭을 깨고 부수고를 연거푸 실시하는 모습을 보면 아직도 멀었나? 라고 생각한다. 그럴 때마다 생각난다. 노무현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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