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29일, 제가 태어나서 광주를 2번째를 방문했다. 처음 방문한 적은 아마 2년 전 3월 정도, 친구장사와 관련하여 도와줄 일이 있어서 잠시 같이 광주로 갔다. 당시 내가 광주를 갔을 때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방문한 곳은 광주시 북구에 위치한 518민주묘지에 갔다. 518이란 사건이 일어난지 36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생각하면 당시의 상처가 깊은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슬픔과 고통이 베여진 곳이 아니라 환희와 창의가 숨을 쉬는 광주 비엔날레에 다녀왔다. 다른 광역시와 달리 광주는 공기가 매우 깨끗했고, 대신 시내 진입하는 고속도로 진출입로가 좁고 불편했다. 예전에 올 때도 교통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그런 환경이었는데, 그 부분 만큼은 반드시 개선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직접 차를 몰고 가니 편도가 대략 270km 정도 나온 것 같다. 그러나 그 전에 1913 송정시장에 가서 맛있는 식빵도 사먹고, 이래저래 광주 시내를 운전했으니 거리는 600km 정도 달린 것 같다. 


몸은 약간 힘들어도 볼 만한 행사였고, 갈만 한 도시였다. 전주의 한옥마을처럼 광주는 억지로 송정시장을 꾸미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조성된 1913송정시장을 계속 유지하면서 발전했으니 과거의 흔적이 잘 보전되었다. 한국은 집안에서 원래 장사나 가게를 하면 가업을 유지하지 않은 편이나, 여기선 오랫동안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유산을 이어받은 분들이 장사를 했다. 그런 점이 참으로 좋았다.



광주비엔날레 행사장이다. 부산에 살면서 시립박물관을 가봤지만, 거기는 센텀시티, 그리고 벡스코 옆인 점에서 교통요충지에 위치해 있다. 광안대교와 맞물리고, 지하철역도 옆에 있다. 그래서 사람은 많으나 건물을 보자면 조금 위화감이 있다. 대신 교통이 좋으니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는 편하다. 몇 번 시립미술관에서 관람을 했지만, 광주는 아파트 단지 옆에 있었다. 교통은 왠지 불편한 것 같으나, 차들이 많지 않고, 옆에 호수공원이 있어서 산책하기 좋고, 또한 박물관도 위치하여 문화적인 여행코스로 적당했다. 


행사장 안에 들어오니 전시1관 메인은 녹두서점 재현이었다. 518광주민주화 운동(나는 민주화 운동보단 광주민간인대량학살사건-제노사이드-이라고 부르고 싶다. 너무 잔인했기 때문이다) 당시 지식인들과 학생들이 자주 이용한 녹두서점을 재현했다. 기억에 의해 재현된 서점, 당시의 상황도 재현해주며, 벽에는 시대의 아픔을 적어놓은 글들이 보였다. 518묘지공원 내 전시관을 1~2시간 관람하면 알게 된다. 그날의 잔혹함을 말이다.


책은 당시 책만이 아니라 여기 행사에 참여한 도서출판사도 책을 전시하고 판매했다. 내가 보고 싶은 책은 현실문화에서 발간한 자크 랑시에르의 <이미지의 운명>, 그런데 가격이 비싸다보니 결국 일행 분이 나중에 사자는 권유에 다음을 기약했다. 랑시에르의 책 말고도 알랭 바디우의 책도 있었다. 그러나 정희진 교수의 책을 보니 조금 한숨이 나왔다(최근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게이트 사건에 정희진이 지지한 집단 워마드 및 메갈에서 이 사건을 두고 여성탄압이란 말을 했으니 말이다). 


광주는 2번째이지만, 언제 다시 한 번 가야 할 것이다. 전에 시골 삼촌에게 518에 대해 조금 물어보니 왠지 모를 한탄감을 느껴왔다. 나보고 자기 대신 한 번 묘지공원에 다녀와 달라는 말도 들었다. 언제 다그 약속을 지킬 것을 생각하며, 광주에 또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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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0 15: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10 16: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11-10 16: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2일 상경 안하십니까 ?

만화애니비평 2016-11-10 17:42   좋아요 0 | URL
형집에 가려해도 참 허허..
 


<무현, 두 도시 이야기>는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에서 따온 제목이다. 영국인 찰스 디킨스의 소설은 직접 읽지를 않았으나, 읽은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프랑스대혁명 시기의 열기가 긍정적인 에너지보단 광기로 가득한 폭력적인 상태로 보였다. 폭력이란 행위를 정의란 이름으로 내세울 때 그것이 가지고 있는 정당성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찰스 디킨스를 비롯한 영국의 지성인들은 프랑스대혁명을 바르게 보지를 않았다. 심지어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 직접민주주의 이론의 시초, 혁명가들의 영원한 복음서를 만든 장 자크 루소조차 그러하다.


루소는 프랑스 당대의 문제를 알았고, 빈곤으로 고통 받는 프랑스 사람들의 슬픔을 알았다. 찰스 디킨스 이전에 영국 보수주의 에드먼드 버크 역시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혁명을 주도한 사람들을 보면 로베스피에르를 비롯한 산악파 자코뱅당의 주도세력이라 보겠지만, 그 에너지를 본다면 화가 난 프랑스의 신민(臣民)들이었다.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은 어떤 사물과 현상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척도를 제공해준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에는 결정적인 치명타가 있다. 그것은 그게 나하고 관계없는 일이라면 상당히 냉정하고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말을 한다.

 

막상 어떤 사건에 대해 뛰어든 인간들은 어떤 심정적 변화를 느꼈으며, 거기에 동조하거나 혹은 부정하여 몸을 던진다. 총알이 자신을 향하여 격발되어도, 창날이 자신의 심장을 노려도 달려드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이 세상에서 사상을 만들었으나, 그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사상인 것이다. 멀리서 본 인간들은 그 사건 당사자가 아니기에 철저히 객관적인 자세로 임하나, 그 자세의 한계점은 당하는 사람이 누구에게 가는 것인가? 물론 자코뱅당의 광기는 심했고, 로베스피에르와 생쥐스트의 단두대 향연은 테르미도르반동으로 이어지는 원동력이다. 그러나 그런 사건이 없었다면 프랑스란 공화국은 존재하지 않았고, 프랑스의 공화국역사가 17897월이 될 수 없었다.

 

7월은 더운 열기가 혁명적 에너지가 되어 왕정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란 이름을 세상에 알린 것을 본다면, 찰스 디킨스의 소설을 옆에서 들어본다면 뭔가 앞을 향해 가는 게 앞이 아니라 오히려 어둠으로 가려진 절망이 아닌가 싶다. 그래도 인간은 자신에게 선택되어야 할 순간에서 멈추면 안 된다. 그것이 자신에게 불리하여도 선택해야 한다. 선택의 순간을 피하고 양비론적인 가치관을 가진 인간들의 세계에선 아무런 변화가 없다. 양비론 주의자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선택에 대한 책임감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무현, 두 도시 이야기>를 보는 순간, 내가 들어본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하고 뭔가 미묘한 차이가 있을 것이란 여겼다. 무현이 도시 2개소라고 한다면, 무현은 단순히 하나가 아니라 둘이어야 한다. 그래서 무현이란 이름은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힘없이 사라져간 노무현이란 변호인이었고, 다른 무현은 여수에서 마지막으로 투혼을 불사른 백무현이란 시사만화작가이다. 이들이 등장한 배경에서 한 쪽은 부산, 다른 쪽은 여수이고, 한 쪽은 2000, 다른 한쪽은 2016년이었다.

 

2사람 모두 이 세상에 없는 하늘로 올라간 사람이다. 영화주인공은 살아있는 인물이 아니라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인간이다. 이들에게 당시 부산과 여수는 어떤 공간이라 할까? 노무현이란 이름은 역사적으로 볼 때 승자보단 패자에 가까운 인물이다. 고등학교 출신 변호사, 지지세력 없이 독불장군처럼 싸우다 자살을 선택한 대통령, 가진 자가 아니라 항상 가지지 못한 자에 있던 사람, 생각하면 우리 대부분 한국인들은 가진 자의 입장보단 가지지 못한 입장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가난과 굶주림이 거친 힘든 지난 세월, 그러나 그것은 계속되고 후세들에게 대물림 된다. 정직하고 바람직하게 살아가기보다 권력에 아부하여 작은 콩고물에 충성을 바치는 세상, 201610월과 11월을 지나가면서 그 느낌을 더 심하게 다가온다. 비선실세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니, 작은 허물이 있는 사람은 크게 두각 되어도, 허물밖에 없는 인간들은 은근히 묻어 가려한다. 노무현이란 인간이 대통령에서 은퇴한지 8년이 지나고, 한국은 노무현이란 이름을 동네북처럼 치다가 이제는 노무현이란 이름에 작금의 현실을 돌아본다.

 

다큐멘터리 영화가 나온 시점과 현실상황을 보자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노무현이란 인간이 패배자로 역사 속에서 사라져도 지금에 다시 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노무현을 따라 여수에서 나온 백무현이란 인간이 다시 기억해줘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부산은 노무현이 속한 당이 불리한 곳이고, 백무현이 나온 여수는 상대편이 유리한 지역이다. 불리한 싸움, 이기는 생각조차도 어려운 곳에서 그들은 승부를 건다. 지역주의와 싸우고 자신의 한계와 싸운다.

 

백무현 국회의원 후보는 암으로 투병 중인데도 끝까지 승부를 임했고, 최후는 한 줌의 재로 되어 2사람의 무현은 다시 만나게 되었다. 사실 이 영화는 백무현보단 노무현이 더 집중되는 작품이다. 그가 해오던 일들이 많았고, 지역주의에 대해 승부를 던지는 것도 그렇다. 지역구 국회의원이 다른 지역 사람이다가 막상 선거철 전에 들어와 그 지역의 일꾼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자신의 포장지를 보여준다. 김해 출생, 부산 학교 졸업, 부산 거주, 부산에 사는 가족들까지 본다면 오히려 진짜 이웃은 옆에 있지만, 사람들은 당의 그림자에 의해 사람을 외면한다.

 

노무현은 사람을 봐달라고 했다. 후보가 남의 집 수돗물이 막혀도 터줄 이유도 없고, 법적 자문을 해줄 이유도 없다. 그것은 무료로 봉사해주는 것이고, 대가도 받지 않는다. 국회에 가면 국가의 일꾼으로 지역주민 생활을 돌보는 게 당연하나, 그게 아닌 이상 해줄 이유는 없다. 영상에 잡힌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 소박하고 평범한 부산 사람들이다. 노무현이란 인간 역시 보면 부산 사투리에 농담 반, 진담 반 섞어가는 부산에 사는 옆집 아저씨 스타일이다. 백무현이란 시사만화작가 역시 그냥 길가다가 인상 좋은 옆집 아저씨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갈 사람이 중요하다. 하지만 인간 그 개인에게 부여되는 자질에서 누군가보단 잘날 수 있어도, 누군가보다 더 월등한 인간이어서는 안 된다. 월등한 인간이라 여기는 순간 타인들은 자신의 아래로 보게 되고, 그것 민주주의 이름을 이용하여 권력자와 그 주변의 권력 추종자들이 원하는 관료주의 체제로 만드는 결과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런 체제를 만들기 위한 가장 좋은 제도는 선거에서 이기는 방법이고, 선거결과로 승자는 하나의 당위성을 갖는다.

 

대신 선거는 나와 타자와의 싸움을 등치시키고, 지역주의에 함몰되어 통합과 화합이란 이름을 무색하게 한다. 그런 지역주의에 몸을 던진 무현, 그리고 한 줌의 재로 돌아간 무현, 영화 OST로 전인권 씨의 걱정 말아요 그대가 나온다. 그들이 걱정하던 지역주의 한계, 지금도 지역주의는 팽배하고, 그들은 지역주의에 의해 패배했다. 그러나 역사란 그런 패배조차도 먼 미래에 도래될 승리에 대한 발판이 된다. 지금은 패배해도 최후의 승자는 미래의 역사에 의해 재조명된다. 하지만 그 당시 패자들은 목숨을 잃고, 망자의 명예조차 박탈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전인권 씨의 노래는 무현들에게 바치는 헌정 곡으로써 그들의 마음, 그들을 떠나보낸 우리의 마음을 달래주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물론 주변에 흐느끼는 어떤 남성관객들의 숨소리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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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11-05 1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립네요..

만화애니비평 2016-11-06 19:32   좋아요 0 | URL
오늘 우병우 기사를 보니 더 마음이 그렇네요
 

집안의 먼 친척 한 분이 광주 북구에 위치한 518공원묘지에 안치되어 있다. 나하고 촌수가 제법 멀기는 멀지만, 한편으로 시골에 가면 작은아버지(나하고 사이좋다)가 그 518묘지에 안치된 분의 주변 가족이나 친척하고 잘 아시고, 큰아버지도 집안제사로 시골에 오면 그쪽 계열 일가 사람들이랑 친하다. 그분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가자, 그 분의 아버지는 화병으로 돌아가셨고, 그 분의 누이들도 끌려가서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1980518이 있을 때는 요주의 인물로 수배되었으니 편안한 삶이 아닌 불운한 인생이 살았다.

 

영화 <자백>을 보았다. <자백>이란 단어처럼 한자어로 自白이다. 자기 스스로 죄를 토해낸다는 뜻이다. 하지만 사실 자백의 의미를 볼 때 대한민국헌법 제12조 제2항과 제7항을 보면 국민들에게 고문을 받으면 안 되고, 그 고문으로 이루어진 진술은 모두 증거로 삼을 수가 없다. 하지만 고문으로 인한 자백 진술은 그대로 인정되어 사법살인이 유신시절 상당히 많이 이루어졌다. <자백>이란 영화를 보면 영화 시초는 몇 년 전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유우성씨를 간첩으로 몰다가 결국 중국 공안의 협조까리 받아 변호인단의 입증이 인정받아 무죄로 석방되었다.

 

그동안 죄 없이 감옥에 갇히고, 언론과 미디어에서 유우성씨와 그의 주변인들은 크나큰 고통을 당했다. 영화라고 만든 <자백>은 가상의 시나리오가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로 통해 전달되는 르포르타주식의 다큐멘터리이다. 시선의 관점이 피해자를 바라보는 시각, 즉 약자의 시각이다. 영화를 보면서 느낀 점은 시대가 거꾸로 가고 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헌법처럼 거짓 진실을 얻기 위해 고문이나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유우성 씨의 여동생은 국가기관의 통제아래 반년 가까이 구금되어 각종 폭력을 당해왔다.

 

폭행과 협박을 듣다가 갑자기 부드럽게 대하는 수사관들의 행위는 취조당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판단력을 상실하게 하고, 거짓진술을 유도하는 교묘한 전략이다. 21세기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헌법이란 이름 아래 헌법정치를 실시해야 할 국가정부가 오히려 헌법을 외면하고 오도하며 심지어 은폐한다. 이런 식의 자백을 받아낸 것은 1980년대로 끝이 나는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21세기 다시 부활했다.

 

20세기 한국은 반공 이데올로기가 하나의 당위성을 가진 세계이다. 냉전이데올로기에서 세상을 만드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사상이란 말처럼, 사상검증은 곧 모든 것을 넘어 인간의 존엄성마저 파괴한다. 많은 이들이 정식재판을 받지 못한 채 혐의를 받고 1일 만에 사형선고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누군가는 아버지를 총에 맞아 죽어 어린 시절 고생했다고 하나, 수많은 사람들은 총에 맞은 그 누군가에 의해 아버지와 형들을 잃었다.

 

그 당시의 정부실세, 최근까지도 실세 역시 그 당시에 용공조작 사건을 주도했고, 그 증거자료가 있어도 나는 모릅니다.”라고 하면서 도망치는 모습이 나온다. 지금 모르면 그 당시는 왜 그렇게 했다는 말인가? 당시 피해자들은 아직도 고문에 의해 온 몸이 망가졌으며, 정신적 충격과 지난날의 상처로 인생이 파괴되었다. 고문은 당하는 사람도 가하는 사람 모두 영혼이 파괴된다는 말이 있다. 육체와 영혼이 권력이란 이름 아래 무너진 그들에게 대한민국이란 이름이 자랑스럽다는 말을 내세우려면 그들의 과거를 풀어주는 게 당연한 게 아닌가?

 

최근까지 계속 1960~80년대 국가권력에 의해 사망하거나 징역을 살았던 이들이 명예회복을 위해 대법원을 들락거린다. 언제 죽을지도 모를 백로의 노인에게 자신의 한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변의 가족에게 이어져 갔다. 중앙정보부에 의해 끌려가 고문을 당하던 이 중에 자신에게 자백서를 쓰지 않으면 가족들에게 위해를 가한다고 협박을 하고, 심지어 그의 아내까지 성폭행하겠다고 말한다. 사람을 반죽음으로 만드니 그들의 말엔 일체의 허세는 없다. 남성에게 효과적인 것은 구타이고, 여성에게는 성추행과 성폭행이다.

 

현재 명지대학교에서 여성학을 가르치는 권인숙 교수는 부천성고문사건 피해당사자로 당시 경찰관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권인숙 교수가 그렇게 당해도 언론과 경찰은 계속 숨겼으며, 변호인단과 그 무엇보다 본인의 용기 있는 폭로가 아니었다면 과연 그 문귀동 경찰관은 자신의 죄를 들켰을까? 이미 그런 방법이 하나의 고문이었으니 더 많은 피해자가 있을 것이다. 그런 시대 때 말단과 현장에서 활약하던 경찰관, 검사, 언론인들은 건장한 20~30대로 현장에서 움직였다면 이제는 60~70대로 돌아와 그 말단과 현장을 통솔한다.

 

약자를 몰아세워 폭행과 고문 그리고 협박으로 유지된 권력, 그 모든 수단은 오로지 권력만을 위한 방법이다. 영화는 21세기 현실에서 일어난 간첩조작사건을 통해 30~40년 전의 암울한 시대와의 연결을 보여준다. 마지막 장면에 최초의 간첩조작사건과 희생자 그리고 그들의 명예가 회복되던 시점을 보여주면서 끝이 난다. 하지만 이미 간첩이나 국가 반역자들도 아닌데도 지금도 계속 빨갱이 취급당하는 사람은 여전하다.

 

이 글 서두에 거론된 그 분도 역시 그렇다. 영화라는 것은 매체이다. 매체로 보여준 진실 찾기에서 정치적 권력은 역시 매체로 통한 언론플레이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저널리즘은 바로 여기서부터 사실성과 공정성의 관계에서 어둠에 가려진 모순과 부조리를 밝혀야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대규모 언론은 사실성과 공정성보단 권력과 이익에 치중했다. 그런 나라이니 얼마나 상처가 뿌리 깊이 곪아있었는가? 세상은 정의로운 사람보단, 정의롭지 못한 사람을 원한다. 그래야 그 대상을 공격할수록 부정의에 의해 탄생된 정의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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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메갈리아 사태가 터진 후 잠잠하다 다시 또 터졌다. 메갈리아 전사이면서도 전에 JTBC 방송서 메갈 비판자를 모두 일베로 몰아넣으려던 사람 중에 하나가 이자혜란 인간이다. 아니 인간이라고 말하기 싫다. 그냥 쓰레기 같은 년이라 말하고 싶다. 사건을 전말을 보니 예전에 30대 남성에서 미성년자 소녀를 소개하여 강제로 그녀를 성폭행당하게 협조한 점이다.


한마디로 미성년자 성폭행 가해를 공범자로써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그런데도 페미니즘 전사라는 개소리와 함께 메갈리아 전대에 활동했다. 네이버나 알라딘이나 블로그 활동하면서 내가 계속 메갈리아 비판하면서, 여기 알라딘이 가장 많은 덧글 싸움을 했다. 나는 다시 물어보고 싶다. 내 알라딘 블로그에 와서 분탕질하는 분들에게 말이다.


미성년자 성폭행한 것을 도와주고, 그것도 모자라 이상한 발언까지 한 인간을 두고, 비판하는 게 문제인가? 오히려 성폭행당한 어린 여성에 대한 배려와 그녀가 당한 부당한 일에 분노해야 하는데, 현재 이자혜 라는 년은 가해자를 옹호한다. 와 살다가 여자(그것도 여자고등학생)을 먹는다고 대놓고 적는 인간 처음 본다. 해당 뉴스기사를 링크했다.

 

전에도 박가분 씨의 이야기가 납득이 있었고, 계속 나도 메갈리아에 대한 비판을 날렸지만, 지금도 계속 거짓과 날조로 선동하는 이들에게 다가오는 것은 경찰과 검찰이다. 무슨 여성탄압이라 하나, 미성년자를 성폭행한 것을 두고 광고해대는 자칭 페미니즘, 갑자기 "ㄷㄹㅂ"님이 생각난다. 책까지 내신 분이 나에게 무례한 발언을 한 적이 있었다. 지성이 있는 분이라면 스스로 자각하세요. 제가 메갈리아 비판할 때 자신이 페미니스트라면서 나도 메갈리아라고 말하던 그분, 지금 이글을 보고 부끄럽다는 생각하지 않으세요? 저 아직도 "ㄷㄹㅂ"님에게 감정 남아있습니다.


정신승리 조차 되지 못한 건조기후 이하의 알라디너들, 아래 링크 가서 성폭행당한 그 여성분의 글이라도 읽어보세요. 패거리즘으로 제 블로그 달려들 때 한국의 페미니스트라고 외치는 여성 수준이 이정도인가? 라는 의문만 들어갑니다.


https://www.evernote.com/shard/s509/sh/747fd801-b317-4256-a0c5-ad62f76d491c/a9522d9d7511edfe816626c4c45ffc34



https://realnews.co.kr/archives/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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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0 1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20 1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yureka01 2016-10-20 10: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미친거 아닙니까?? 고딩이 무슨 열매입니까 따먹게?? 집에 딸아이가 고딩입니다..네 앞에 이자혜는 절대 나타나지 말기를 ....(주먹 불끈 ㅠㅠ)

만화애니비평 2016-10-20 10:36   좋아요 3 | URL
우리 아주 위대한 페미니즘 전사, 그것도 트위터 3대 페미니스트 전사라고 하네요. 그것도 자기 팬이라고 찾아온 소녀였습니다.
저는 사형에서 2가지 죄는 찬성합니다.
한 가지는 국방비리이고, 하나는 아동 및 미성년자(임산부 포함)를 성폭행 및 살인하는 인간들입니다. 그냥 사형시키고 싶습니다.

2016-10-20 1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10-20 10:56   좋아요 0 | URL
그냥 답이 없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정말 어느 여고생이 정말 남자친구를 사랑해서 미성년자지만, 관계를 맺고 그러면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30대 아저씨를 보고 두려움에 떨었다는 저 분이 아무런 대응조차 못했다니, 저 분의 부모님은 눈에서 피눈물 날듯합니다.

2016-10-20 1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10-20 11:31   좋아요 1 | URL
그 무엇이 되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자, 루소의 <에밀>에서 가르치는 내용이 이토록 다가오다니 참으로 슬프군요

2016-10-20 1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10-20 13:22   좋아요 0 | URL
전 조용히 점심 먹고 답글~~

2016-10-20 1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10-20 13:36   좋아요 3 | URL
그냥 쉴드 치는 인간들의 멘탈이 의심스럽네요.
이번 정유라 사건의 이화여대 총장사건도 그렇지만
메갈 수호자 정희진 이화여대 교수 역시 만만치 않은듯
그 정도로 난감합니다.

건조기후 2016-10-20 15: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미성년자 성폭행한 것을 도와주고, 그것도 모자라 이상한 발언까지 한 인간을 두고, 비판˝하는 게 문제는 아닌데, 이자혜가 욕먹을 짓 했으면 이자혜만 욕하고, 성폭행을 방조한 사람 말고 직접 성폭행한 당사자를 욕해야 정상 아닌가요. 둘 다 욕하던지.

님이 아무리 평소 메갈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다고 해도 이자혜 한 사람을 메갈의 전부로 치환해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고 정범이 아닌 방조자에게만 극렬하게 분노하는 것도 좀 이해가 안 됩니다. 성폭행한 사람보다 성폭행을 하게 만든 사람이 더 나쁜가요?

사실 지난 번 여러차례 올리신 글도 너무 감정적이고 비논리적이어서 힘들게 읽었는데 (메갈에 광분하시는 심리가 진심으로 궁금해서..) 짧은 글 하나에도 너무 감정만 넘치네요. 기본적으로 전체/일부, 원인/결과의 명확한 구별이 없고 맥락도 없고 그냥 메갈은 무조건 나쁜데 메갈 옹호하던 년 하나 걸렸으니 족치자, 로 밖에 안 보여요.

...왜 그러세요?

만화애니비평 2016-10-20 15:19   좋아요 3 | URL
1. 님 제 정신인가요? 이자혜란 당사자가 강간범에게 그 미성년자에게 강간하라고 문자넣고, 그 피해자가에게 문자를 넣는 것 자체가 옳은가요? 살인 같은 범죄도 실제 행사자도 큰 벌을 받으나, 그것은 사주한 자도 만만치 않게 법의 집행을 받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님의 정신상태가 의심스럽네요, 스스로 논리를 가지고 생각하세요.

2. 제가 감정적으로 메갈에 대해 좋지 않은 점은, 그들이 페미니즘의 본질을 흐리면서 페미니즘을 오도하여 마치 색깔론을 펼치는 마녀광기라서 비판합니다. 도대체 제게 뭐가 마음에 안 들어 논리 비논리를 따집니까?

3. 뭐 족쳐요? 전에 강남패치, 한남패치 하면서 그런 불법성인사이트를 마치 남자가 한 것처럼 말하더니, 그리고 어서 체포하라 하라고 한 분들이 알고보니 여자라서 이제는 여자니깐 잡아가는 것이냐고 말하는데, 누가 누구를 두고 논리를 따집니까?

맥락과 논리에서 님의 사고방식이 의심스럽네요. 무슨 전체 일부입니까? 이자혜가 JTBC에 나와 인터뷰하여 메갈 비판만 해도 일베로 모는데, 어디서 누가 먼저 전체일부, 원인결과 구별을 말합니까? 그런 님 말대로 하면 제가 일베하는 사람입니까?

저런 사람 족치는 게 옳은 게 아닌가요? 아니 저런 사람을 두고 옹호하는 게 정상인가요? 이자혜란 인간 이하가 성폭행범을 옹호했습니다. 아니 애초부터 성폭행하는 인간을 옹호하는 인간 비판하는 게 문제라면 뭐부터 시작해야 합니까? 님의 글이 참 개그네요.

건조기후 2016-10-20 16:32   좋아요 2 | URL
답글을 좀 성의있게 쓰셨으면 좋겠어요. 왜 제가 하지도 않은 생각/말을 했다고 단정짓고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말만 하십니까?

제가 이자혜가 옳다고 했나요? 둘 다 나쁘고, 방조자보다는 당사자가 더 나쁜 놈인데, 방조자`만` 욕하는 게 이해가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자혜 족치세요. 성폭행 당사자는 더 족치시고요. 그게 정상입니다.

이자혜가 메갈 비판하는 사람을 모조리 일베로 몰았나요? 그러면 그건 이자혜 개인의 생각이지 제 생각이 아닙니다. 메갈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모두 이자혜와 같은 의견이라고 생각하세요? 왜요? 무엇을 근거로?

메갈을 옹호한다 싶은 기미만 보이면 무조건 공격성이 발동해서 초면에 제 정신이냐고 막말하는 본인에게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세요? 처음부터 끝까지 감정에만 치우쳐서 앞뒤 논리도 없고 모든 것을 자의적으로 정의내리고 단정짓는 문장 하나 하나를 보세요.

한 번쯤 차분하게 객관적으로 생각해보셨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지만... 이것도 별로 소용이 없을 것 같긴 하네요.

만화애니비평 2016-10-20 16:46   좋아요 2 | URL
위에 덧글이나 답글 보고 전후맥락 안 읽히나요? 내용보면 미성년자를 죽이거나 성폭행하는 인간들은 모두 죽여주는 게 마땅하다 적었는데, 님이 오독하는 것 아닌가요? 이자혜 씨, 잘못했으면 인정을 해야지 안 하고 계속 헛말 하는 게 문제가 아닌가요? 저런 발언을 이전부터 꽤 해었고요. 전화문자질로 강간해라 강간당해라 말하는 자에 대해 비판 그 자체가 문제인가요?

전에 이자혜가 손석희 선생님의 방송에 나와 메갈리아 비판자를 일베로 오도했는데, 모르시나요? 근거도 없이 나보고 그런 발언을 하다니요? 메갈을 비판하는 사람에 대해 이자혜가 일베로 취급했습니다.

http://threppa.com/bbs/board.php?bo_table=0202&wr_id=92456

정리되어진 내용입니다. 메갈 옹호관련에서 저때부터 편파방송, 사회적물의에 대해 문제점을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부채질 하니깐 제가 이런 글을 적죠? 미성년자 겁탈하는 놈이나 그런 놈에게 주선하는 인간이나 근본은 뭐가 다릅니까? 님이 이성적으로 판단하시고 말하세요. 단지 그 남자놈을 비판하지 않아 내 글에 불만이다 하는 것이라면 그건 님 수준입니다. 예전부터 이자혜씨가 꾸준히 저질러온 일에 대해 욕을 하고, 그 짓을 보고도 쉴드친 거에 대해 까는 겁니다.

메갈하던 말던 뭔 상관입니까? 하면서 남에게 피해주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이상한 논조로 나가니 말이니 문제죠. 독립운동가 모욕하지 못하면 페미니즘이 아니라는 사람들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하나요? 님이라면 이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제 말이 틀렸나요? 이 모든게 연결고린데요

아무개 2016-10-20 15: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1.이자혜=메갈=ㄷㄹㅂ 인가요?
ㄷㄹㅂ 님이 이자혜를 옹호하는 글을 본적이 없습니다만,
ㄷㄹㅂ 님이 어느 부분에서 부끄러워해야 합니까?


2.이자혜의 해명글을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미숙해도 한참 미숙한 인간이고
강간의 방관자, 2차 가해자로서 현실 세계에서의 밥줄이 하루도 안되서 모두 절단 났는데,
1차 가해자 성인 남성 강간범인 ˝이익˝은 현재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은 상태이며
미디어에서도 이자혜만을 노출시켜서 페미니즘이 이자혜때문에 타격을 입네 마네 하는데
이자혜=페미니즘 아닙니다.
페미니즘 안에 이자혜같은 사람이 있을수 있는 것일 뿐.
이자혜의 글도 만화도 본적 없습니다. 그래서 이자혜를 옹호할 생각 따위는 전혀 없습니다.
정말 나쁜 행동을 했고, 방관자로서든 2차 가해자로서든 처벌 받아야 합니다.


3.이런 강간 사건이 공론화 될수 있었던것이 페미니즘 때문이었다고 피해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힘들게 사건을 공론화 시킨 피해자를 보호하고 가해자에게 적법한 절차로 책임을 묻는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님의 글은 `이자혜=메갈=페미니즘 너희 나빠나빠` 이런 느낌입니다.
미성년자 강간범 이익에 대한 처벌언급은 없고, 방관자이며 2차 가해자인 이자혜만을
조롱하고 그와 상관 없는 ㄷㄹㅂ 님의 반성을 요구 하는건 도대체 무슨 논리입니까?

아..이자혜 사건이 아니고 이익 사건 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10-20 15:24   좋아요 2 | URL
드디어 제 블로그에 시비거는 분들이 오셨네요, 반갑습니다. 메갈리아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그들이 저지른 문제에 대해 비판하는 게 문제라면서 저보고 ˝나도 메갈이라 해봐라˝ 식으로 답변하는 게 누가 먼저 시비거는 건가요? 전부터 계속 메갈리아에서 일베 미러링이란 이름으로 사회적 문제를 일으켰고, 이자혜란 인물이 2013년부터 저런 글(따먹는다)을 올렸는데, 이미 과거형에서부터 문제 일으킨 사람들을 두고 계속 옹호발언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게 틀린겁니까?

최근 소방관이 태풍피해 구조로 죽어 잘 되었다고 말하는 인간들이 옳은 겁니까? 누가 처음부터 이자혜 = 페미니즘이라 했나요? 저는 메갈리아 자체가 페미니즘이 아니라고 계속 발언했는데요? 님 제 글 그동안 읽었나요? 이자혜가 트위터 메갈리아 옹호 대표 활동자입니다. 그동안 웹톤작가로도 계속 활동해오면서 이런 짓을 하고 페미니즘이란 단어 자체에 댄 게 문제 아닌가요?

그럼 메갈리아에서 스스로 정화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요? 아무개님도 정말 답다반 분이군요. 처음부터 메갈리아를 제가 페미니즘 동급이란 한 적도 없는데 그것을 연결이라는 말에서 님 스스로 이성적 판단력부터 생각하세여.

매릴린 예롬 같은 저명한 페미니스트 사상가 책을 읽으면서 메갈의식과 합부되는 것을 본 것도 없습니다.

아무개 2016-10-20 15:44   좋아요 2 | URL
물론입니다. 메갈=페미니즘 아니죠.
페미니즘 안에 메갈같은 사회적 현상이 생길수도 있다 뭐 이정도로 보시면 될듯합니다.
저명한 메릴린씨가 메갈 현상을 직접적으로 뭐라고 분석하실지 무식한 제가 알수는 없지만
제가 읽고, 배우고 그리고 하고 있는 페미니즘은 `한개, 하나`가 아닙니다.

페미니스트로서 메갈을 지지 할수도 반대할수도 있습니다.
나의 페미니즘이 너의 페미니즘과 다르다고 해서 그것이 틀렸다고 하는것은
틀린 것입니다.

이자혜는 과거 잘못된 행동을 했고 그에 따른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썼고
중요한 것은 1차 가해자가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그부분에 대한 답은 없으시네요.

문제는 화면속의 메갈이 아니라, 현실세계에서 메갈이란 현상이 나오게 만든
사회 구조입니다.

한국 남성이 메갈을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이렇게까지 메갈때문에 힘들어 하시니 좀 안타깝네요.

시비걸려고 온게 아닙니다.
너무 혼자 광광 우시니까 안타까워서요.





만화애니비평 2016-10-20 15:53   좋아요 1 | URL
미국에서 해러웨이 처럼 사이보그 페미니즘이 있고, 옐롬처럼 미국식자유주의, 존 스튜어트 밀의 영국식 자유주의 혹은 마르크스주의적 페미니즘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내세우는 페미니즘이란 보편적 인권에서 시작됩니다. 인권이 있기에 페미니즘이 인정받지, 페미니즘으로 인해 인권이 나오는 게 아닙니다.
타인의 인권을 유린하고 그것을 두도 오히려 정신승리적 발언을 하는 부류가 페미니즘이라고 말하고 나서 그게 대표라고 발언하면, 그에 대해 저는 비판을 내세울 겁니다.

1차 가해자요? 1차 가해자는 이자혜 씨와 아주 친한 사람이라 합니다. 음악하고 디자인 하는 사람이라 합니다.

뉴스 링크 본문에 있는데 https://realnews.co.kr/archives/1751

읽지 않았나보군요? 네 맞습니다. 메갈이 나온 건 사회문제죠? 그리고 그 메갈이 물어뜯는 힘 없는 남자와(혹은 그와 사는 아내와 딸, 어머니조차)도 사회적 약자에서 문제되죠? 결혼한 여성을 두고 명예자지라고 하는 인간들에게 무슨 사회문제를 논해야 할지 난감합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시작하지 않고, 남녀프레임을 긋는 행위에서 모든 게 정당화되는 사람들이니 어찌 딱하지 않을수 있을까요?

네 열심히 울겠습니다. 소방관 순직자, 산업재해 사망 노동자가 남자라는 이유로 조롱하고, 독립투사도 모욕하는 인간들 때문에 열심히 울겠습니다.

.... 2016-10-20 16:55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뭘 광광울어요.. 휴..

아무개 2016-10-20 16: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예부터 보편적 인권에 여성이 포함되어 있다는 책을 읽어 본적 없습니다.
보편적 인권이 있어 페미니즘이 있는 것이 아니고
페미니즘이 있어 보편적 인권이 챙취 될것입니다.
여성은 고대, 중세, 근대에 이르기까지 남성의 재산이었을 뿐입니다.
여성이 보편적 인권에 포함되는 인간이었다면 어째서 여성의 참정권은 그리도 늦게 남성들로 부터 허락을 받았습니까? 여성이 보편적 인간으로 권리를 가진 독립된 개채라면 여성 자신의 몸에 대한 권리를 왜 국가와 남성이 갖고 있습니까?

누구누구의 페니니즘 저는 그런거 모릅니다.
만화애니비평님은 누구의 페미니즘을 하십니까?
저는 저의 페미니즘을 합니다.
권위에 기대고, 거울이 비추고 있는 상을 안(못)보고
일개 사회현상인 이제 일년 남짓되었고
그나마 현재는 거의 활동도 안(못)하는 메갈따위에
너무 큰 비중을 두시는듯 싶습니다.

열심히 올리시고, 그러는 과정에서 부디 거울이 뭘 비추는지 거울을 깰것인지
거울이 비추고 있는 것을 부술것인지도 고민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건승!

만화애니비평 2016-10-20 16:12   좋아요 3 | URL
저는 아무개님의 덧글을 저에게 열린 마음. 넓은 시야를 가지라는 의미에서 받아들이겠습니다. 님 말대로 고대 그리스는 여성은 인간도 아니고, 중세 역시 그러하며, 밀의 <여성의 종속>을 보면 끔찍할 정도죠. 저는 밀의 사상과 펭크허스트 여사(싸우는 여자가 이긴다의 저자)의 사상에 동조합니다.

인권이 남성도 강자와 약자로 나누고, 그리고 그 약자남자보다 못한 여자가 있다는 것은 압니다. 저는 누구의 페미니즘이 아닙니다. 단지 그렇게 저자들의 책을 보며 제가 역사와 사상을 이해하고, 판단력을 키우기 위해 읽습니다.

님 말대로 큰 비중을 차지않은 메갈에 신경을 쓸 필요 없지만, 그들로 인해 인권을 손상당해 피해보는 분도 있고, 저 같은 경우 아이디처럼 서브컬처 유저이기에 메갈로 인해 서브컬처에 큰 피해를 봐서 저 역시 큰 충격을 받았죠. 오타쿠인 이상 웹툰작가의 행동을 보지 않을 수 없겠죠. 어째든 좋은 오후시간 보내세요.

지나가던 행인 A 2016-10-21 11:21   좋아요 4 | 수정 | 삭제 | URL
거의 활동을 안(못)해서 강남역 시위하면서 유가족분들께 욕질하고
어린이집 앞에서 애들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소리를 지르며
각종 패치류 등장에
태극기 훼손에 소방사분들 모욕
심지어 이번에 돌아가신 경찰분을 모욕하기까지...

너무 많아서 열거할 수도 없네요. 이것들은 대체 뭘 바탕으로 한겁니까?
거울속 환상이 어떻게 현실에 이렇게 피해를 입혔답니까?

님들은 거울이 아니에요.
님들은 인간이고, 인간으로서 행동을 한 이상 그 행동엔 책임이 뒤따릅니다.

˝사회의 악˝으로 규정되어 있는 이들과 똑같은 행위를 하고서
책임을 회피하시겠다니.

아무개님께서 말하시는 ˝자신의 페미니즘˝이라는건
˝무책임한 인간성˝을 나타내는겁니까?

ㅇㅇ 2016-10-22 08:38   좋아요 3 | 수정 | 삭제 | URL
뉴스에서 벌어지는 범죄는 한국 남성 전체의 문제로 옮기기 좋아하시는 분들이 왜 자기 앞마당에서 벌어진 사건은 꼬리자르기를 열심히 하시는지 미스테리 ㅠ

2016-10-25 07: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26 1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립 반 윙클의 신부(일어: リップヴァンウィンクルの花嫁, 영어: A Bride for Rip Van Winkle)> 영화 제목에 대해

 

영화제목은 왠지 간단해야 사람들에게 쉽게 인식하고 다가가는 것이 쉽다. 만일 발음이 어렵거나 단어가 길게 되면 사람들은 뭔가 특이한 것을 알겠지만, 뇌리 속에서 금방 잊어진다. 이런 점에서 영화 <립 반 윙클의 신부>는 그동안 한국에서 <러브레터>로 유명한 이와이 슌지를 기대하고 온 관객에겐 많은 희비가 오고갈 작품이다. 내 생각으론 희극이나 비넣기극적 요소보다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별개의 세상이 열린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 영화가 20세기 말에 개봉하면서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고, 영화배경이 된 훗카이도는 눈의 왕국처럼 아름다운 영상미를 드러낸다.

 

그래서 아마 이 영화를 두고 이와이 슌지라는 네임드에 의해 이끌린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영화가 개봉하여 로맨스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파국으로 스쳐가니 말이다. <립 반 윙클의 신부>에서 영어 Rip Van Winkle를 찾아보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잠만 자고 있는 사람으로 검색된다. 그렇다면 “Rip Van Winkle”가 있다면 “A Bride for”는 누구란 말인가? 영화는 감독이 남성이나, 주인공은 여성이다. 남성감독이 여성주인공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잠만 자고 있는 사람모두 여성이란 점이 특징이다.

 

물론 신부는 잠만 자는 사람이나 혹은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일 수도 있다. 처음 붉은 우체통에 나타난 나나미(한글로는 7가지의 아름다움)는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고, 마시로(한글로는 아주 하얗다는 의미)는 잠만 자고 있는 사람이다. 마지막 앞부분을 보면 <립 반 윙클의 신부>처럼 2사람 모두 신부이고, 2사람 모두 상대방의 신부인 것이다. 다소 동성애적인 코드가 숨겨져 있지만(이런 점에서 미국 페미니스트 인문학자 매릴린 옐롬 신간 <여성의 우정에 관하여 - 자매애에서 동성애까지, 그 친밀한 관계의 역사>을 읽어보지 않은 게 아쉬울 뿐이다), 일본 대중문화가 아닌 서브컬쳐 내에서 이런 동성애적 요소는 깊이 자리 잡고 있다.

 

2. <립 반 윙클의 신부>와 서브컬쳐의 관계성

 

영화를 보면서 이것이 과연 <러브레터>의 이와이 슌지 감독이란 말인가? 라는 의문을 느낀 분들은 아마 대중문화만 젖은 분일 것이다. 대부분 한국인들이 보는 미디어의 관계성은 대중문화에 의해 주도되고, 그것은 다양성이나 개성을 존중하지 않은 일관적인 시선을 요구한다. <립 반 윙클의 신부>를 보면 상당히 일본 오타쿠적 문화가 깊이 개입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성애적 요소에서 일본은 이미 코믹 유리히메(백합공주)라는 잡지를 발행하고 있다. 유리라는 단어가 백합을 의미하고, 백합은 일본에서 여성의 동성애를 의미한다.

 

애니메이션에서 <유루유리>, <카나 메모>, <마리아님이 보고 계셔>, <케이온> 등은 동성애적인 코드가 숨어있지만, 대중적으로 유명하고 나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본 리뷰를 작성중인 남성인 나조차도 <유루유리>, <케이온>을 매우 재미있게 봤다. 동성애적 코드라 해도 너무 극단적인 요소를 추구하지 않고, 재미나 유쾌함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특히 <마리아님이 보고 계셔>는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서 매우 유명한 작품으로 장기간 TV에서 방영한 작품이다. 한국에서 동성애라는 문화적 코드는 매우 낯설고도 이상한 존재이다. 하지만 이미 일본에서 직접적인 성행위를 강조하는 일부 레즈비언 세계만이 아니라 친구끼리의 우정적 요소가 많다.

본인은 여성이 아니라, 뭐라 말하기가 다소 곤란하나, 가끔 대학이나 회사에서 보면 화장실을 갈 때 남성은 혼자 가는 반면, 여성은 2명이서 같이 가는 경우가 많다. 남성의 시각에서 보자면 여성 2명이 화장실을 사이좋게 손잡고 가는 장면을 이해할 수 없다. 단지 생각할 수 있는 요소는 동성애가 위에서 말하듯이 그런 극단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우애성에 대한 스킨쉽 내지 프랜드쉽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영화 <립 반 윙클의 신부>에서 나나미와 마시로의 관계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부터 새롭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3. <립 반 윙클의 신부><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연장선인가?

 

<립 반 윙클의 신부>이 다소 서브컬처적인 요소가 강하게 반영된 이유는 이와이 슌지 감독의 약력이다. 그는 영화감독이기도 하지만, 영화배우이기도 하다. 보통 영화감독이 자신이나 혹은 타인의 작품의 조연이나 엑스트라로 등장하는 경우가 있지만, 본인 그 자체가 주인공이 되어 시나리오를 전개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러브레터>같은 멜로드라마를 제작했으니 그가 <립 반 윙클의 신부> 말고도 다른 영화에 주인공에 나온 점을 일반 대중들은 쉽게 생각할 수 없다.

 

그것도 제목에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란 단어를 올린 이유는 더욱 그렇다. <신세기 에반게리온>1995TVA26, 25화와 26화를 새롭게 극장판으로 만든 <End of Eva>가 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20세기 말, 인간의 소외 군중 속의 고독, 14살 소년의 가족과 사회에 대한 고민이 사이코드라마처럼 펼쳐진다. 흔히 말하여 중2병을 본격적으로 보여준 작품이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다. 일본사회나 한국사회는 그동안 전통사회를 유지하여 유교적 가치관에 의해 어른이 어린아이를 돌보고 가르쳤다. 공동체문화는 인간이 태어나서 자라고 결혼하여 죽을 때까지 모든 것을 관장했다.

 

그러나 서구화에 따라 인간사회는 전근대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변경되고, 인간은 공동체 안의 구성원이 아니라 개인이 구성원을 조직하는 부품이 되었다. 인간소외가 발생하고, 어린 아이들에게 어른들이란 자신을 관심으로 대해주는 보호자가 아니라 단지 어른들이 모인 사회에 필요한 도구에 불과한 것이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이카리 신지라는 어린 소년으로 보는 세계라면, <립 반 윙클의 신부>는 결혼적령기에 도달한 성숙한 여성이 보는 세계이다.

 

4. 이와이 슌지 감독과 안노 히데아키 감독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가이낙스에서 제작된 애니메이션이다. 안노 히데아키는 가이낙스에서 애니메이션감독을 맡다가 퇴작하여 KARA라는 미디어제작업체 사장이 된다. KARA 설립 시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다시 재각색하여 만든 <신극장판 에반게리온>을 제작한다. 그런데 이와이 슌지 감독과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무슨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안노 히데아키 감독은 애니메이션 감독이지만, 상당히 우수한 실사영화 감독이기도 하다. 영화 <Love and Pop>은 일본 여고생들의 원조교제에 대해 날카롭게 다룬 작품이고, 영화 <식일(式日)>은 인간의 느끼고 보고 싶은 이상과 괴리에 대해 다룬 작품이다.

 

<식일>이란 작품을 보면 남자주인공이 이와이 슌지이다. 2000년에 나온 작품으로 가이낙스에서 <신세기 에반게리온> 극장판 이후 실사판 및 애니메이션판 <큐티 허니:Re)를 만들기 전이다. 나름 실험적이고 과감한 영상을 보여준 <식일>에 이와이 슌지는 영화배우이면서 작중에서 그의 직업처럼 영화감독으로 나온다. 세계 최고의 오타쿠, 일본 최고의 애니메이션 감독이 만든 실사영화에 <러브레터> 감독이 나왔다는 점에서 이미 2사람은 상당히 문화적 감성을 나눈 것으로 알 수 있다.

 

<립 반 윙클의 신부>에서 음악 몇 가지가 중요한 장면에서 나온다. 특히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는 주인공 나나미가 매우 고통스러운 상황, 매우 슬픈 상황, 그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상황에서 나온 음악이다. 이 음악이 유명해지게 된 동기는 <신세기 에반게리온> 극장판 <End of Eva>에서 아스카가 양산형 에바와 싸우면서 나온 OST이다. 안노 히데아키의 아스카, 이와이 슌지의 나나미, 1사람은 어린 소녀, 1사람은 성숙한 여성이다. 그러나 그녀들에게 세계란 가혹하고 처절하다.

 

이뿐만 아니라 안노 히데아키의 KARA 홈페이지에서 단편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다. 그때 회사에서 만든 로고가 보이고, BGM이 들리는데, 바로 그 음악이 <립 반 윙클의 신부>에서도 나온다. 이와이 슌지 감독이 만든 <립 반 윙클의 신부>가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작품세계와 전혀 무관하지 않음이 음악이나 혹은 촬영기법(나나미가 거짓 이혼청부업자에게 속을 때 묶은 방)은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실사 및 애니메이션 영상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영화를 볼 때 감독의 작품들을 보는 것도 좋으나, 그 감독이 누구하고 작품을 같이 이끌어 나갔던 점도 중요하다.

 

5. 가식의 세계 일본

 

<립 반 윙클의 신부>에서 플래닛이란 마이너계통의 SNS에서 나나미는 친구와 애인을 만난다. 그의 남편을 SNS에서 만났고, 그녀는 바로 약혼과 결혼식을 거행한다. 하지만 나나미는 주변에 친척이 없어서 플래닛의 아무로를 통해 가짜 친척을 초빙하고, 그의 도움으로 여러 가지를 해결한다. 하지만 어느 날 그로부터 남편이 바람을 핀다는 말을 듣고, 남편의 불륜 대상자가 자신의 여자 친구라고 말한 어느 남자에게 속아 그녀는 강제로 이혼을 당한다. 이혼을 시어머니로부터 권유당하는 장면에서 아무로가 시어머니의 의뢰에 의해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로는 플래닛에서 활동하는 이른바 정보를 이용하여 돈을 버는 인간이었다. 현실의 인간이 아니라 가상세계에 존재하는 인간들을 찾아 자신의 이윤을 추구한다. 생각해보면 왜 이렇게 일본사회가 차갑게 되었을까? 인간관계성에서 일본사회, 그리고 그 안에서 나나미라는 여성은 상당히 힘든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는 나름 순수하고 진지하며 언제나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생활을 영위한다. 하지만 세상을 그녀를 속이고 외롭게 만든다. 인간(人間)이란 한자어는 사람 사이라는 의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성이 있어야 사회적으로 인간이란 존재가 탄생하는 것이다.

 

나나미에게 친구가 많이 없다는 점, 모든 것을 SNS에서 도움을 받는 점은 일본사회가 진정한 인간관계가 파탄난지 옛날이란 사실을 상기해준다. 나나미의 어머니는 젊은 남자와 눈이 맞아 이혼했고, 아버지는 그런 아내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그리고 나나미는 함정에 빠져 바람을 피워 이혼을 당했기에 아버지의 집으로 갈 수 없다. 인간관계가 사람들의 움직임에서 찾을 수 없게 된 세상이었다. 이혼을 당한 후 혼자 외롭게 걸어가는 나나미는 모든 세상의 관계성에서 단절된 것처럼 보였다.

 

6. 해체된 가족, 조립된 가족

 

나나미는 부유한 여성도 아니고, 누군가 의지할 곳도 없는 여성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사회적 약자였다. 호텔에서 머물며, 호텔 관리인을 일하던 그녀에게 다시 아무로가 다가온다. 여유가 넉넉하지 못한 나나미에게 들어온 제안은 아르바이트였다. 그것도 주말 결혼식 하객으로 말이다. 결혼식에 등장한 남성은 이미 결혼한 사람이나, 새로운 애인을 위해 결혼식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미 결혼한 몸이나 새로운 결혼식에 친척을 부를 수가 없었다. 대신 찾아온 이들은 아무로에 의해 만들어진 가족, 임시로 조립된 가족이었다.

 

조립된 것들은 다시 해체되기 마련이다. 조립된 가족관계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언니와 남동생이 생긴 나나미에게 순간적으로 가족이란 안식처가 생긴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서로 뒤풀이한 후 모두 흩어지고, 이날 처음 본 마시로는 나나미에게 1잔 더 하자고 했지만, 가게를 나온 후 그녀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만들어진 가족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맡은 2사람에게 실제 가족을 물어보니 그들은 결혼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돌아갈 곳은 있지만, 자신을 받아줄 곳은 없었다.

 

고독과 가식, 허무함이 넘치는 일본사회의 단편을 그렇게 희극적인 장면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닐까 싶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광야에 버려진 청소년들이 느낀 소외라면, <립 반 윙클의 신부>에서 어른들 역시 고독과 소외에 몸부림을 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나미는 그런 세계에서 오직 솔직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런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배신인 점에서 아이러니한 세상이란 점을 엿볼 수 있다. 호텔에서 계속 근무하던 나나미가 어느 날 아무로에게 제안을 받는다. 그것은 어느 고급저택의 메이드로 근무해달라는 요청이었다.

 

7. <립 반 윙클의 신부>의 집

 

그녀가 도착한 집에 주인이 없고, 단지 집을 지켜주면 된다고 했다. 혼자인 줄 알았던 나나미는 전에 만난 마시로를 만나게 된다. 마시로는 일하는 하우스메이드인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집주인이었다. 집안을 보면 여러 가지 물건들이 있다. 방 한쪽을 보니 맹독을 지닌 생물이 있고, 마루에는 파티를 한 흔적이 있었다. 옷이 가득한 방에는 이상한 옷들이 가득했다. 메이드복, 교복, 각종 의상들, 나는 처음에 어떤 오타쿠의 방 내지 코스프레를 즐기는 사람의 집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시로의 직업이 배우였고, 그녀가 맡은 역할은 AV(Adult Video), 일본 포르노 여배우였던 것이다(AV장르에 여배우가 교복이나 메이드복을 입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언제나 술에 취해 밤늦게 찾아온 마시로, 나나미에게 찾아온 마시로는 이상하게도 나나미에게 과도한 스킵쉽(나중에 키스도 한다)을 하고, 나나미에게 많은 따뜻함을 느끼려 한다. 나중에 마시로가 몸이 아픈 와중에 전화를 대신 받은 나나미는 그녀가 AV라는 사실, 그리고 그녀가 이상한 약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무로는 나나민에게 마시로에게 필요한 건 진정한 친구라고 말해준다. 영화를 보면 계속 느끼지만, 모든 사람들이 가식의 세계에서 소외를 느낀 채 고독한 하루를 보내는 점이다.

 

나나미는 아무로에게 위조된 마시로의 비밀을 듣는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절실한 친구, 모두와의 관계성이 끊긴 나나미가 마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고, 나나미는 단순히 하우스메이드로 월100만엔의 급여가 아닌 진정한 마시로의 친구로서 대해준다.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마시로를 위한 눈물에서 마시로는 나나미에게 신부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서로 파티를 연다. 마시로는 나나미에게 같이 죽어 줄래? 라고 묻는다. 마시로는 이미 시한부인생이기에 그렇게 묻는 것이나, 나나미는 자신에게 아무 것도 없기에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8. 나나미의 슬픈 승리

 

다음날 아무로는 마시로의 집에 장의사를 데리고 와서 시신이 2구가 있을 것이란 한다. 하지만 나나미는 살아있었고, 그녀의 손에 고동이 잡혀있지만, 독이 든 것이 아니라 평범한 고동이었다. 마시로는 아무로에게 같이 죽어줄 사람을 원했다. 만일 나나미가 속물적 인간이었다면 같이 죽자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나미에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시한부 인생, 말기암 환자이던 마시로에게 세상을 그야말로 허무의 세계이다. AV세계 목숨 걸고 촬영한 이유는 무엇일까? 적어도 자신이 살아있다고 느껴보려 했던 것은 아닐까?

 

말기암이라면 그동안 암이 진행되었으며(몸무게가 10가 감소한 점에서 암이 발병한 시기가 알 수 없다), 그것을 모를 리가 없다. 술로 밤을 보내고, 독이 든 동물을 구입해 언제라도 죽을 준비가 된 마시로, 그녀가 AV배우로 많은 돈을 벌어도 결혼하객 아르바이트를 한 이유는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그 자리에 나와도 마시로는 나나미처럼 외로움과 허무함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그런 마시로가 아무로에게 같이 죽어줄 사람을 추천할 때 아무로는 나나미를 추천했다.

 

인간은 나를 위해 우는 것은 가식이나, 남을 위해 울어주는 것은 인간애의 표본이다. 나나미의 눈물에 마시로는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던 것이다. 나나미의 가식 없는 행동에 그녀는 주변으로부터 버림받고 이용당했다. 그녀의 마음은 죽음을 앞둔 1사람의 영혼을 위로했던 것이다. 나나미의 승리를 슬픈 이유는 그녀의 삶이 옳다는 것이 마시로의 마지막 모습에서 보였고, 소중한 이를 떠나보낸 나나미의 입장에서 힘든 고통이었다.

 

9. 왜 그들은 옷을 벗는가?

 

영화를 보면 매우 충격적인 장면이 나온다. 나나미와 아무로는 마시로의 유골단지를 들고 그녀의 어머니에게 찾아간다. 마시로의 어머니는 딸이 못마땅하고, 유골도 받기 싫었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찾아온 2사람을 맞이해준다. 딸의 죽음을 두고 가슴에 한이 맺힌 그녀는 마시로의 유산(거대한 액수)을 보고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단지 독한 소주를 마시고, 과거와 현재의 얼굴이 다른 마시로를 말하며, 그녀를 찾아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때까지 때렸다고 고백한다.

 

오열에 젖은 마시로의 어머니는 슬픈 눈물을 보이면서 옷을 벗기 시작한다. 당황한 나나미와 아무로는 그녀를 말리나, 그녀는 옷을 다 벗고 정좌한 후, 입은 연다. 자기도 옷을 다 벗으니 이렇게 부끄러운데, 마시로도 너무 부끄러웠을 것이라 말이다. 차를 가지고 와서 소주를 입에 대지 않은 아무로는 그 모습을 본 후 자신도 옷을 벗기 시작한다. 그리고 술을 미친 듯이 마시기 시작한다. 오직 이윤만 생각하던 현실주의자가 눈물을 흘린 채 나체로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마시로란 존재가 그동안 아무로에겐 돈줄, 어머니에게 꼴도 보기 싫은 못난 딸이었다.

 

하지만 1사람이 세상을 보내고, 마시로란 인간 역시 힘든 삶을 살아왔다는 점을 진정으로 알게 되는 순간, 인간의 존재가 가식이 아닌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 인간은 태어날 때 자유롭다. 하지만 도처에 사슬에 묶여있다. 알몸의 인간에게 쇠사슬을 모두 벗어던진 자연인이다. 순수하게 자연인이란 존재로 마시로의 죽음을 위로한 것이다. 사회가 급변하면서 인간의 관계가 점차 오프라인보단 온라인으로 이어진다. 친구와 연인조차 SNS와 인터넷으로 매개된 경우가 많다. 겉모습은 포장되어 있지만, 그 이면의 진실성은 상대방에게 요구하기가 참 힘든 세상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나나미처럼 진지하고 솔직한 마음을 알아봐주지 않을까? 영화에서 나나미는 아무로가 옷을 벗는 장면을 보면서 그녀 본인은 벗지 않은 이유는 이미 그녀는 가식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식 없이 세상을 살아가기 어렵다. 나나미처럼 살아가면 직장에서 쫓겨나고, 시댁에서 쫓겨나며, 심지어 목숨 그 자체도 박탈당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나나미의 삶을 부정한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그런 삶이 정말 행복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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