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archive.is/EMwe2


왠만하면 저 위의 링크된 글을 들어가서 보는 것에 대해 말리고 싶지만,


도서모임에서 전에 내가 메갈리아 사이트에 대해 비판적으로 작성한 글에 대하여 잠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당시 내가 참석한 자리에서 인원은 나를 포함하여 4분이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분들은 여성이었고, 그 중 2분은 집에 자녀를 둔 기혼여성 분이었다. 그 중 한 분은 나의 글을 읽은 후 이번 넥슨 사태와 관련된 내용들을 인터넷에서 찾아봤다. 그리고 판정은 내 생각에 동의한다는 점이다. 나는 이번 메갈리아 사태와 페미니즘 논쟁 사이에서 그들을 도저히 페미니즘이라고 볼 수 없다.

 

우선 세상 인간들 중에 반은 남성이고, 반은 여성이다. 문제는 세상의 반이라는 여성들에게 그곳에서 또 구분되어 있는 것이 있다. 여성의 일부는 미혼이고, 여성의 일부는 기혼이다. 그리고 그 여성 미혼 안에서도 미성년자와 어린 아이들도 있고, 결혼하지 않은 채 노년을 맞이하는 분들도 있다. 내가 메갈리아의 문제점을 뽑자면 바로 그들 대부분 인원구성에 20~30대 미혼 여성이다. 그렇다면 기혼여성은 얼마나 되는가?

 

한겨레나 경향신문 자칭 진보성향 신문들이 메갈리아의 편을 들어 사설을 쓰는 것을 보았다. 물론 쓰는 것은 자유이고, 그 쓰는 것에 대한 원칙적인 내용과 논리적인 평이 있다면 문제가 없다. 그런데 문제가 조금 있었다. 서울 성공회대학교 신부님이나 많은 신문기자들이 영화 <서프러제트>에서 보여준 1910년대 영국 여성참정권 운동 이야기를 끌고 온 것이다. 이 영화는 에멀린 팽크허스트 여사의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란 자선을 토대로 만든 이야기이다. 신문기사에서 엄청난 오류는 페미니스트 역사에서 영국여성운동하고 지금 메갈리아하고 상당히 근본적으로 무엇이 다르다는 점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 세상 인간 중 반이 여성이라면 그 여성의 반이 기혼여성이란 사실이다. 영화 <서프러제트>에서 모드는 공장노동자이면서 가정에서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이다. 그녀가 처음 영화에서 공장노동자라는 열악한 환경, 그 공장노동자에서도 여성이란 약점, 또한 아이 때부터 착취당해야 하던 문제를 말한다. 즉 노동문제, 여성문제, 아동문제까지 이어진 것이다. 모드가 처음에 여성이란 이유로 무시당하는 것에서 분노했다면 모르나, 더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당시 영국에서 이혼을 하거나 가정에 문제가 있을 경우 여성에게 아이에 대한 양육권이나 친권을 소유할 수 없었다.

 

남편의 일방적인 행위에 따라 아이를 만날 수도 없고, 어머니로서 행위를 할 수 없었다. 영화 서프러제트> 마지막에 여성들이 참정권을 얻는 날짜가 새기지는 것도 있지만, 영화감독은 어머니도 자녀에 대한 친권행세를 할 수 있게 된 날짜도 집어넣는다. 그렇다면 영화 <서프러제트>와 메갈리아 운동을 같은 것이라고 보는 것에서 무엇이 문제인가? 서프러제트 운동에서 에멀린 팽크허스트 여사는 여성에게 사회적 쇠사슬로부터 해방되면 남성 역시 더 좋은 세상에 산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 부분은 존 스튜어트 밀의 <여성의 종속>에서 밀의 주장과 일치한다. 게다가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에서도 존 스튜어트 밀이란 이름이 거론된다. 가끔 페미니즘과 관련하여 왜 남성이 페미니즘 사상과 관련된 것에 반발하는 사람을 보면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가 없다. 페미니즘이 여성 그 자체를 위해 태어난 게 아니라 자유주의,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 등 다양한 사상과 결합하여 태어났기 때문이다, 18세기 프랑스혁명 때 여성운동가가 등장하여 19세기부터 영국을 시작하여 20세기는 전 세계로 뻗은 것이다.

 

문화인류학 도서를 보면 인류의 모습을 보기 때문에 페미니즘 관련 내용들이 참 많다. 매릴린 옐롬의 <아내의 역사><유방의 역사>는 서양에서 원시시대부터 중세, 근현대까지 망라하기에 다양한 관점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내가 메갈리아를 인정하지 않은 것인가? 페미니즘 이론과 관련하여 남성을 배제한 사상이 얼마나 있는지 까지 모르겠다. 단지 해러웨이 박사처럼 사이보그 페미니즘이라고 하여 인간이 생물학적인 조건이 아니라 기계적인 요건이라면 필요 없을 것이다. 만약 인간의 신체구조와 판단기관인 뇌조차 기계로 되면 인간은 굳이 동물적 존재로 살아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하고, 만약 된다고 해도 그것은 남녀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와 지구환경시스템 전반적이 문제로 이어질 것이다. 그런 공상세계가 아닌 이상 우리 현실을 바라보는 게 정답이다. 펭크허스트 여사는 자신에게 인간이란 존재가 여성이냐 남성이냐가 중요하지 않았다. 모든 인간은 동일한 조건아래 인격을 존중받고 사람답게 사는 것을 원했다. 여자라서 우대하고, 남자라서 존대 받는 게 아니다. 다시 영화 <서프러제트>에서 모드의 경우를 보자, 그녀는 자신의 자녀가 아들이었고, 아들을 볼 수 없던 그녀는 절망과 분노로 과격한 페미니스트가 된다.

 

그녀가 페미니스트가 된 것은 여성에 대한 탄압, 열악한 노동환경, 그리고 자녀에 대한 친권행위이다. 그런데 메갈리아에서 한국의 남성을 부정하고, 때에 따라서는 심각한 발언을 한다. 만약 그 발언자체가 성인남성이라면 모르나, 아이들까지 연계되고, 한국남성과 결혼한 한국여성까지 비난하는 것이다. 아주 비속한 언어 중에 명예자지라는 단어가 있다. 이 단어의 의미는 자신을 비판하는 여성 혹은 유부녀와 남성과 교제하는 여성이란 뜻이다. 결국 메갈리아는 한국의 남성만이 아니라 순수하게 아이를 사랑하는 어머니까지 욕을 하고, 남자친구와 연애하는 여성까지 욕하는 부류다.

 

페미니즘 이론에서 여권신장은 기본이겠지만, 아동인권에 대해서는 더욱 생각해 볼 점이다. 에멀린 팽크허스트 여사 역시 가난한 여성에게 태어난 2세에 대한 걱정을 심하게 했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병이나 굶주림으로 대부분 죽고,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면 교육환경이 좋지 않아 다시 비참한 일을 해야 하는 재생산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정말 한국남성에 대한 문제가 있다고 해서 시위나 저항을 하지 마란 소리는 아니다. 그러나 그 시위행위에서 그녀들은 모든 한국남자는 배제하고, 그들의 옆에 사는 여성도 포함하여 앞으로 그들 남성과 여성 사이에 태어날 아이조차도 부정한다. 나는 이들이 페미니즘이라는 포장으로 한국사회에 들이대는 게 너무 걱정된다. 누군가는 이들로 통해 페미니즘 담론이 활성이 된다고 하나, 막상 그들이 말하는 범주에서 윤리적 가치관이 통용되는가?

 

폭력으로 대응하여 그들에게 말할 수 있다는 논리에서 그 원심적 논리와 가치관이 어느 정도 윤리적 정당성을 받아야 한다. 사회적 권력과 흐름에서 정착된 도덕적 관념이 아니라 과거든 현재든 먼 미래가 되든지 보편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조건이어야 한다. 변증법적인 관계에서 그들이 페미니즘 이론에 대한 관심도를 불러일으킬 수 있겠지만, 그들 자체가 하나의 페미니즘이란 사실을 된다면 엄청난 모순이 될 것이다. 링크된 글을 보면 나와있다. 메갈리아에서 다시 나온 메갈리아4, 그들이 말하는 주장이란 무엇인가?

 

한국남성에 대해 한남충 같은 단어 같은 것은 그냥 넘어간다. 여성이 여성으로 목소리는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희 목표는 성재기 조롱과 오뎅드립으로 클리떨리게 웃고 마는 것이였나요? 씹치남 번식탈락이 목표가 아니였나요?”에서 나는 이들이 과연 인간이라 생각이라 여기는 것이 너무 어렵다. 성재기 씨가 일부 여성에게 불편한 감정을 준 것 같은 사실이나(고인에 대한 조롱하는 인간성에서 의문이 들지만), 세월호 희생자와 유가족에 대한 조롱에서 오뎅드립에서는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분명 말한다. 남자 말 잘 듣는 좋은 페미니스트만이 페미니즘 운동가가 아니라 저항하는 사람 역시 그렇다고 말이다. 하지만 페미니즘 담론 이전에 인간이 되는 게 정상이 아닌가? 이것도 메갈리아4 운영진이란 인간이 적은 글이고, 그 밑에 덧글은 안 보는 편이 좋다. 씹치남 번식탈락에서 왜 한국에 사는지 묻고 싶다. 한국남자가 싫으면 상대하지 않으면 된다. 내가 메갈리아를 비판하는 이유는 여성운동 이전에 먼저 자신이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자신의 얼굴에 흉악한 가면을 쓰고 시작했지만, 어느새 그 가면이 자신의 얼굴로 되었는지 말이다.

 

그리고 신문기자들, 진짜 영화<서프러제트>만 말고 에멀린 팽크허스트 자서전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 다 읽어보았나? 에멀린 팽크허스트 여사가 언제 세상의 모든 남자를 번식탈락이라든지 혹은 죽이야 한다든지 필요 없다는 말 한 마디가 있던가? 신문기자들도 나름 고인에 대한 모욕을 하고 있다. 메갈리아 논리로 보자면 영화 <서프러제트> 모드는 자신의 아들을 씹치남이고 한남충의 후예이기에 사라져야 한다고 말해야 했다. 모드가 과연 그런 대사를 하던가? 비 오는 날 창문 너머로 아이를 보기 위해 서서 기다린 모드. 아이의 생일일 때 집에 찾아가니 강제 입양되는 모습에서 오열하는 모드를 볼 수 있다.

 

서프러제트 운동에서 주요 인물들은 대부분 기혼여성이었고, 집에 아이를 둔 어머니이었다. 그녀들은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싸운 것이지 자신들의 오만을 위해 싸운 게 아니다. 참 당황스럽다. 어째 저런 인간들을 서프러제트 운동가들과 비교할 수 있을까? 되먹지 못한 남자들을 보고 쌍욕하고 화를 내는 건 당연하나, 그런 저항조차 할 수 없는 어린아이를 가지고 장난치는 인간들을 두고 뭐라 해야 할까? 아동인권(어린아이와 그 어린아이의 어머니)을 존중하지 않은 여성들은 페미니스트도 아니고, 아동인권을 존중하지 않은 인간(남녀 모두)들은 자유주의자도 민주주의자도 사회주의자도 아니다. 그냥 쓰레기다.



2016.8.19 업그레이드한 사진입니다. 메갈이나 메갈의 후예 워마드 논리에 따라가든 말든은 자유나, 이런 것을 두고도 비판하지 않으면 그 운동자체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전태일 열사가 노동착취를 당한 어린 여공을 위해 분신자살까지 선택했는데, 그분의 여동생은 지금도 오빠생각에 가슴이 찢어지는데 과연 이게 인간의 얼굴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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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6-08-17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분히 그렇게 된 배경을 살펴본다면 그리고 근접원인과 궁극원인을 살펴본다면 서로의 이해를 바탕으로 문제 해결점을 제시한다면 ...

이런 것을 생각하는 자체가 이상적인 것 아닐까요.

알라디너들도, 저도 편견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요.

만화애니비평 2016-08-17 16:20   좋아요 1 | URL
솔직히 말하여 한국 기존 사회 문제점에서 남성중심이란 점은 충분히 압니다. 그런다고 하여 그것에 대한 미러링에서 방법론에서 공격대상과 목적의식의 전도는 인지해야 한다고 봅니다. 저기가 잘못되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면, 우리도 잘못되었다면 수긍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남성에 대한 혐오발언 정도는 웃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폭력으로 정치적인 운동노선과 전혀 다른 사람이 다치고, 아동이 학대당하는 시점, 게다가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을 두고 마치 잘한다고 옹호해주는 광기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부터 봐야하는게 정상이지 않은가 싶습니다.

편견은 누구나 있죠. 생각이 조금 달라도 친한 사람도 싸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 글에서 지적대상들은 이미 그 한도를 지나쳐 온게 아닌가 싶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8-17 16: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서프러제트는 대부분이 기혼 여성이고 어머니였기에 가치 있는 운동이다 ??!
이건 좀 상당히 오버 아닐까요 ? 그러한 사고는
전형적인 여자는 어머니일 때 위대하다는 남성 중심적 시각과 일치합니다.
만애비 님의 논리라면 미혼 보다는 기혼 여성에 높은 점수를
미혼보다는 어머니이기에 더 높은 점수를 준다는 것은 역으로
미혼과 기혼 여성을 이중 잣대로 평가하는 게 아닐까요 ?
왜 여자는 어머니여야지만 더 완벽한 가치를 부여받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에 만애비 님이 경제적 여건으로 인해 결혼을 하지 못했는데
누군가가 만애비님의 미혼을 들어 평가 절하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제가 보기엔 지나친 논리 모순이라 생각합니다..

한국 남성은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많은 것을 착취한 나라입니다...

문제 제기만 하고 갑니다. 딴지를 걸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

만화애니비평 2016-08-17 16:54   좋아요 2 | URL
반드시 기혼여성이고 어머니이었기에 가치가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단지 기혼여성들이 주류가 된 이유는 아이에 대한 미래였고, 그런 부분은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에서 계속 언급됩니다. 펭크허스트 여사는 늘 인간의 미래를 생각합니다. 물론 여기에 동의하여 따님 3분도 같이 운동에 참여하죠.

물론 어머니는 위대하다라는 관점도 있을지 모릅니다. 저는 환경공학자고, 생물학을 배웟기에 생물학적으로 근골계 제외하면 여성이 더 진화된 존재라고 여깁니다(물론 옆 자리에 있는 생물학과 출신자가 정확히 여성이 진화된 생명이라 말해줍니다). 이런 관점은 닉 테일러의 <히즈 스토리>에서 나옵니다. 상당히 그 책 이론에 공감되고요.

곰발님이 지적한 이중잣대에서 한국만 아니라 세계 어디든 어머니를 많이 착취했죠. 그건 <여성의 종속>에서도 나옵니다. 왜 어머니이어야 가치는 부여받는가에서 노동의 재생산이라고 봅니다. 전에 대화하면서 노동결정권론적인 요소가 있다고 했는데, 사실 우리가 이렇게 하루 살고 있을 때 누군가의 노동력이 있기에 가능하죠.

제 관점은 <4천원 인생>입니다. 한국이 이만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시간당 4~5천원을 받는 수백만의 식당이모가 있기에 가능하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분들은 무엇을 위해 살고 있을까요? 고의든 타의든 결혼이 있겠죠.

곰발님 말씀대로 왜 여성 중에 기혼여성(미혼모 포함)에게 더 높은 가치를 받는가에서(메갈리아는 기혼여성을 깎은 점에서 가장 큰 문제지만), 전 이래 봅니다. 만약 제가 버스를 타거나 지하철을 타거나 차를 타고 정비소에 갈 때, 저는 제 생활에 대한 편익을 보장받고 싶습니다.

옛날에는 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나 이제는 저와 비슷하거나 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할 때 옛날에 저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이 간호사로 있었지만, 지금은 저보다 젊습니다.

노동자의 권리가 중요한 건 우리의 일상의 타인의 노동력에 의해 존재됩니다. 그런 노동력이란 사회성을 존재해주는 것은 출산이고, 당연히 어머니란 존재는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이런 논리가 남성중심적이겠죠). 하지만 반대로 묻다면 이런 제 논리, 즉 사회적 노동력에서 우리가 이용하는 어떤 재화나 서비스에서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으면 모르겠지만, 결국 이용하죠.

저하고 유진식당에 가면 지하철을 타고, 지하철을 수리하는 사람도 필요하고, 넥슨사에 시위하는 분들도 지하철을 타고, 버스도 타겠죠. 그런 서비스를 계속 이용하는 점에서 단순히 한국남성의 문제의식을 말하는 것과 한국남자는 모두 절멸해야 하는 점에서 모순은 무엇일까요? 자기의 생각을 가지는 건 좋으나 현실적인 대안을 토대로 남에게 말하는 것은 무리수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제가 이 글에서 논의하는 것은 사회적인 공적인 영역이지, 곰발님의 질의하신 결혼내용은 사적인 논의입니다. 기분이 나쁘다 아니다보단 이 글의 요지와 다른 방향이 아닌가 합니다. 영화 서프러제트는 아이를 뺏기는 일은 사회적으로 당연한 도덕적 가치이고, 제가 결혼하지 못한 일은 단지 제가 사회적으로 경제력이 부족한 겁니다. 사회적인문제라 해도 모순의 지적이 조금 벗어난 것 같습니다.

물론 답변으로 저보고 결혼의 문제를 묻자면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직 제가 부족해서 그런가봅니다 라고 말이죠.

경제성 부분에서 대학강의 때 여성학 수업이 생각납니다. 여자교수님이 과도한 남성노동(가난함) 역시 페미니즘이 풀어야 할 문제라고요. 남편이 일찍 집에 오게 만들어주는 것도 페미니즘입니다. 아이에게 어머니만 아니라 아버지도 필요하죠. 저라면 단순히 여성과 남성의 프레임으로 보기보단 사회구조적으로 접근하였으면 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8-17 16: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서프러지스트는 평화적 온건 페미니즘을 주장했고
서프러제트는 폭력적 과격 페미니즘을 주장했습니다.
두 무리는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나 수단은 전혀 다른 방식이었습니다.
만애비 님은 메갈을 2,30대 미혼 여성, 그러니까 미혼이어서 어머니가 아닌 여자를 비판하는데
이 비판은 매우 위험한 비판입니다. 적어도 만애비 님이 페미니즘에 동조한다면
2,30대 미혼 여성이라는 이유로 아이를 낳은 적이 없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비판하는 것은
새누리가 여자는 애를 낳아야 여자가 된다는 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제 말은 비판의 핵심이 잘못되었다는 점입니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싸우는 것은 숭고하지만
여성들의 미래를 위해 싸우는 것은 덜 숭고하다는 것은
지극히 남성적 시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서프러제트는 메갈에 비해 기혼 여성이며 어머니이기 때문에 더 가치가 있다는 말은 차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대목이 아닐까 싶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8-17 17:09   좋아요 1 | URL
저는 20~30대가 결혼하지 않아 아이를 낳지 않은 것에 대해 비판한 게 아니라
그녀들이 결혼하여 아이를 낳은 여자까지 조롱하는 것에서 문제를 삼는 겁니다.
한국사회에서 기혼남성이나 여성은 여자나 남자로 보지 않는 그런 요소로 본겁니다.

물론 결혼한 여성의 행동만이 전부 옳다고만 하지 않습니다.

메갈리아에서 좃린이 사건에 대한 일들을 보고 있자면....

여성들의 미래를 위해 싸우는 것은 덜 숭고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아이들을 희생시키는 여성운동 자체에 무슨 미래의 가치가 있냐는 겁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8-17 18:29   좋아요 1 | URL
제가 보기엔 이 댓글은 변명처럼 들립니다만.
분명 윗 글의 논지에서 메갈 비판은 결혼하여 아이를 낳은 여자를 조롱하는 것에 방점을 찍은 것이 아니라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 싸우는 서프러제트와 자신의 미래만을 위해 싸우는 메갈.. 이라는 이분법으로 접근하신 겁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8-17 19:04   좋아요 1 | URL
아 그렇게 보였나요? 제가 글적을 때 그 부분의 맥락을 잘못 연결했나 봅니다.

저는 자신만의 미래가 아니라 자신만의 오만라고 했습니다. 미래와 오만은 다르다고 봅니다. 분명 이분법은 맞습니다. 서프러제트와 메갈리아 운동은 분명히 다른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다락방 2016-08-17 16: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서프러제트 책을 저도 읽었고,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싸웠다는 것에 대해서도 고개 끄덕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오만을 위해 싸운 건 아니다?? 이건 아니네요. 일단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것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여성에게 참정권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여성`이라서 정치에 참여하지`못`했다고요.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니 아이들이나 빈민을 위한 정책이 잘못된 걸 봐도 고칠 수가 없는 등의 문제점들이 눈에 보인것은 당연하지만 기본적으로 `여성`에게 참정권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 운동입니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것이어아먄 온당한가요? 여성이 자신들의, `여성이라는` 성별의 권리를 위해서 싸우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겁니다.

메갈리아가 `미러링` 사이트라는 건 아실텐데요, 실질적으로 그곳의 발언들은 일상적으로 남성들이 인터넷 공간에서, 현실에서 했던 것들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메갈에서 그런 글을 쓴 여성들이 현실에서 남성에게 데이트 폭력을 하고, 염산을 뿌리고, 불을 지르고, 손가락을 자르고, 아이들을 성적으로 학대하는 것을 보거나 들으신 적이 있나요? 단순히 남성들이 했던 말을 옮긴 것만으로 지금 분노하시는 건 아닙니까?


페미니즘은 반드시 조용하고 교양있어야 하고 누구도 건드리지 말아야 합니까? 왜죠? 정치도 철학도 여러종류로 나뉘고, 그 안에서 문제점들이 생기는데, 페미니즘은 그러면 안됩니까? 페미니스트들도 사람입니다. 페미니즘을 주장하며 그 안에서 많은 문제점들을 보일 수도 있고 또 그걸 고쳐나갈 수도 있습니다. 페미니스트가 완벽하다는 것과 동일한 단어는 아닙니다.

서프러제트에서 여성들이 창문을 깨는 등의 폭력적인 행동을 했을 때, 그들이 왜 그런다고 하던가요. 아무리 말을 해봤자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죠. 창문을 깼을 때야 남성들이 돌아봅니다.
링크하신 글을 보면 메갈리아가 생기고 또 지금까지 되는 과정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 걸 볼 수 있는데요, 일베나 소라넷이 자성하는 모습을 보이기나 했습니까? 지금 만화애니비평님이 서프러제트를 읽고 관심을 가지게 된 건, 메갈리아가 목소리를 높였기 때문은 아닌지요?


명예자지에 대해서도 오해하고 계신데요, 기혼 여성을 명예자지라 칭하는 게 아닙니다. 남성의 눈이 그러한것처럼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고 여성에게 개념녀라 되라고 말하는, 그 시선 때문에 명예자지라 칭하는 겁니다. 비혼 여성도 명예자지가 될 수 있습니다.


만화애니비평님,
저도 메갈입니다.
제가 바로 서프러제트와 비교하면 안되는 `그런 인간` 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8-17 17:05   좋아요 1 | URL
간단히 답을 드리죠.

1. 참정권을 알고 있습니다. 참정권이 없으니깐 바꿀 수 없으니 미래를 바꾸지 못하기 때문이죠.

2. 마인드C 작가사건 아시나요? 그분이 메갈리아 때문에 허위유포로 고생했습니다. 단순히 하나만 가지고 물고 늘어지는 게 아닙니다. 왜 그분을 말할까요? 저하고 같은 만화연대소속이고, 그 주변인물이 제 주변인물하고 겹치는 겁니다.

3. 제가 참고로 여자가 그랬다고 분노하는 것처럼 보입니까? 전부터 일베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강압적인 꼰대사회도 비판했습니다. 마치 여자만 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4. 그리고 제 글을 보면 착한 페미니스트만이 페미니즘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페미니즘 이전에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한 겁니다. 제가 영국인들이 유리창 깬 것 가지고 나쁘다 했습니까? 전에 글을 보면 부동액이나 피임약 먹인 음독기도 때문에 비판합니다. 잘 골라서 말해주세요. 그냥 단순히 재미로 홧김에 진짜 먹이든 아니면 가상이라도 할 말(행동)과 하지 않아야 말(행동)이 있습니다.

5. 참고로 저 노무현재단 후원회원입니다. 봉하마을에서 자원봉사도 했던 사람입니다. 일베가 하는 행동에서 노무현 대통령비하나 518왜곡에 무척 기분나뻐하는 사람입니다. 일베에 대해 몰라리가 있겠습니까?

6, 단편적인 글만 보고 이렇게 비판하는 게 다락방님의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ps 만약 메갈리아에서 순수하게 그런 분노만 했다면 좋은 곳일 겁니다. 만일 지하철 스크린도어 사망한 청년의 죽음을 조롱하거나 세월호 유족에개 조롱을 하는 점에서 무엇이 과연 옳고 그런지 자신이 있는 곳에서 생각해보세요. 정말 잘 못된 게 있다면 사회적으로 지적하는 게 바르지만, 전혀 무관한 자들까지 조롱하는 것에서 옳다고 여기고, 그것이 서프러제트의 유리창 깨기라면 대화는 누가 먼저 포기할 것일까요?



올드비 2016-08-17 17:40   좋아요 1 | 수정 | 삭제 | URL
다락방님에게 다는 댓글입니다. 저는 오래된 페미니스트고 메갈리아의 초창기 활동부터 관심을 두고 봤었습니다. 초창기에는 전복적이고 사이다 같은 분위기가 있었지만 지금 모습을 보세요. 엉망진창입니다. 저는 차라리 절망감을 느껴요. 페미니스트가 늘어난게 아니라 꼴통마쵸들만 늘어난거 같아서요. 옹호론도 많이 읽어봤지만, 전반적인 상황과 웹 게시판의 역사를 잘 모르고 하는 말이 대다수입니다. 모두가 일베와 싸울 때, 일베를 닮았던 사람들이 메갈리아입니다. 그걸 인정하고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저는 여자고, 남자들이 여자를 일반화 하는 걸 그렇게 반대했던 사람입니다. 동일한 논리로 말하고 싶어요. 남자를 일반화하지 마세요. 그래서는 진보가 없어요. 집단주의에 속하기 전에 개별적이고 서로 다른 인격으로서 인간을인정해야 합니다. 다락방님의 글을 많이 읽고 하는 말입니다.

소조 2016-08-17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 소중하게 읽었습니다.

요즘 알라딘에 오면 남들에게 아부하는(좋아요 많이 받고 싶어하는.) 글이 많아서 좀 답답했는데 이런 글을 보니 반갑네요.

당장은 서로 다른 의견일지라도, 서로 주고받으면서 이야기를 해야죠.
이게 진짜죠.

만화애니비평 2016-08-17 19:02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곰곰발님의 토론처럼 이런 의견이 분명 와야지 대화가 되는 겁니다. 서로 다른 충돌이 오면 바로 좋은 말부터 오고갈리 없습니다.

이갈리아 2016-08-17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누가 봐도 이 글은 미혼 여성에 대한 모독이죠. 김무성이 말한 것과 뭐가 다르죠? 새누리를그렇게 쥐잡듯이 하시더니 애 낳지 않은 미혼 여성은 멍청하다. 메갈은 미혼여성이자 어머니가 아니기 때문에 용서할 수없다는 것처럼 느껴지네요. 노무현지지 철회하세요. 부끄럽게 노무현 거들먹거리지 말고요

만화애니비평 2016-08-17 19:00   좋아요 1 | URL
님 지금 글 제대로 보신건가요?>

김무성이나 새누리나, 젊은 층보고 너네 알아서 낳아라 식인데
제가 봐도 현실은 경제적 어려움, 부동산에 의한 거품경제ㅡ 비정규직 등이 문제라 도저히 연애할 자신 없는 88만원 청춘에 대해 공감하는데, 무슨 망발인가요?

님의 문제가 뭔지 아십니까? 제가 20~30 미혼 여성을 무시한 게 아니라, 메갈리아가 먼저 기혼여성을 가지고 ˝명예자지˝라고 펌훼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 문제로 이 글을 적었는데, 전후맥락 고민 없이 제가 뭘 사과하죠?

먼저 메갈리아에서 기혼여성과 그녀와 같이 사는 가족 모두에게 사과하면 미혼여성 모두 사과하겠습니다.

치사하게 아이디 가리지 말고, 님 블로그 대고 오세요.
익명성으로 적는 글에서 님 그렇게 본인 주장에 자신없나요?

만화비평님 2016-08-17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만화비평님 누가 봐도 이 글은 미혼 여성과 애 없는 여성에 대한 조롱처럼 들려요. 사과하시죠.

만화애니비평 2016-08-17 19:01   좋아요 1 | URL
참 누군지 몰라도 비겁하신 분이군요. 그렇게 자신의 주장에 자신이 없습니까?
비겁하게 만화비평이 뭡니까? 그렇데 자신이 정당하다고 여기면 떳떳하게 하세요.
대학 때부터 교양수업과 여성학 강의를 하시던 그 모든 교수님은 당당하고 멋진 분이었습니다. 미혼여성 무시한다는 발상이 웃기군요. 메갈 비판 모두 일베와 같다는 그런 방식의 사고자같습니다. 변론하려면 정식으로 아이디 들고 오시죠. 치사하게 뒤에 숨어있지 말고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8-17 20:22   좋아요 0 | URL
제가 봐도 이갈리아와 만화비평, 소조처럼 껄끄러운 입장 표명하는 게 그래서 익명으로 다는 것들은 한심한 거죠...

다락방 님은 듣기 좋은 소리 들을려고 여기에 댓글 달았겠냐 ? 문제를 제기하려면 자기 이름 가지고 당당하게 욕먹을 생각을 해야지 뒷구멍에 숨어서 이게 뭐하는 짓인데... 병신새끼들... 특히 저 소조 쌔끼. 항상 익명으로만 달아요. 시발놈...

여자 블라우스 속 젖꼭지 색깔 운운하던 새끼가 이런 데 글을 쓸 자격이 있는지....

yamoo 2016-08-18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서프러전트? 운동에 별 관심이 없고, 관련 책과 영화도 본 적이 없어 만애비 님이 쓰신 글과 이후 이어진 댓글에 뭐라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

근데, 다락방 님의 저리 긴 댓글은 좀처럼 보기 드문 케이스라 좀 신선합니다^^

곰발 님 댓글을 보니, 소조라는 분이 좀 거시기 한 사람으로 보입니다..ㅎㅎ

전, 암 것두 모르고, 댓글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걍 눈팅만 했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8-18 08:54   좋아요 0 | URL
저는 다락방님이 메갈리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위의 링크를 보면, 메갈리아 운영자라는 사람이 ˝한국 모든 남자(비속어로 씹치남이든 한남충이든)를 박멸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다락방님이 아동에 대해 인류의 미래라고 인정하는 순간, 메갈리아 이념과 다른 겁니다.

영국 서프러제트 운동에서 유리창을 향해 돌을 던질 때나 우체통에 폭발물 설치할 때 기본적으로 사람이 없을 때 누군가 다치지 않게 하려고 했다면

자칭 한국의 서프러제트인 메갈리아는 단지 주변 남자가 싫어서 누가 맞든 말든 던지는 부류입니다. 그냥 제 글과 덧글, 답글보단 맨 위의 링크를 먼저 본 후 판단하면 좋겠다는 제 바람입니다.

yamoo 2016-08-18 11:27   좋아요 0 | URL
만애비 님, 이 글을 읽어봤는데요, 만애비 님이 주장하시는 부분이 명확하지 않고, 오해의 소지를 불러 일을킬 수 있는 논거가 꽤 있는 듯합니다. 만애비 님이 비판하시고자 하는 부분이 뭔지 어렴풋이 감이 잡히긴 합니다만, 표현상 문제로 이게 잘 전달되지 않은 거 같습니다.
곰발 님이 지적하신 부분은 만애비 님의 글에 분명히 보이는 모순점이구요..더군다나 `메갈리아들이 자신들의오만을 위해 싸운다`는 부분은 상당히 문제를 불러 일으키는 표현 같습니다. `자신들의 오만`은 뭘 가리키는 건가요? 논증이 필요한 부분이 논증 없이 넘어가다 보니, 만애비 님의 주장과 그 논거가 보는 사람으로하여금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키는 거 같습니다. 비문도 잡고, 논지를 좀 잘 정리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네요..

만화애니비평 2016-08-18 11:46   좋아요 1 | URL
오우~! 야무님의 의견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이런 것을 환영합니다.
제 잘못은 이 글을 적은 시점이 사무실서 일하다가 링크된 글을 보고 빡치 나머지 탈고나 검토없이 바로 올린 점입니다. 이런 점에서 다소 명확하지 못한 점과 연계성에 대한 오해가 있다는 점에서 인정합니다.

사실 저는 글을 적으면 메갈리아에 대한 비판요소에서 남녀 대립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려 했습니다. 남자라는 대상이 단순히 성인인지 아동인지 아니면 장애인인지도 포함되겠죠.

메갈리의 오만은 미러링이란 수단에서 기존 남성중심사회,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억압과 압제로 대한 저항이라면 저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가부장과 무관하게 남성 존재 그 자체를 두고 ˝번식탈락˝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남성 그 자체의 존재성을 부정하는 겁니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기존 남성중심사회의 문제점과 폭력성을 비판해도, 남성 그 자체를 모두 없어져 버려야 한다는 점에서 과연 이것을 두고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이라 할 수 있냐는 겁니다.

결혼하신 주변 기혼여성에게 제가 한 이야기를 해주고, 그분들도 그런 기사들을 찾으면서 하시는 말씀에서 메갈리아 생각에 대해 동의하지 않습니다. 특히 ˝좃린이 사건˝같이 아동 성추행에 대해 대상이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 자체가 나쁜 것이죠. 한남충이란 표현까지 할 수 있으나, 한남충의 유충(아들)이란 표현에서 글쎄요. 아직 아무 것도 시작조차 하지 않은 아이들까지 공격하는 그분들을 두고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문제는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만 아니라 그것을 오히려 호응해주는 분위기입니다.

아무튼 야무님의 좋은 말씀은 다시 생각하겠습니다.

루쉰P 2016-08-19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화애니비평님이 말하시는 인간으로서의 기본에 대해 공감해요 ^^ 어떤 사회이건 차별이 존재하며 그것을 깨 부수기 위한 집단은 존재해요. 그리고 강한 권력 집단들과 싸우기 위해 강한 발언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구요.

그러나 인간으로서의 기본을 철저히 지키지 않으며 싸운다는 것은 그것이 어떤 운동이건 옹호 받지를 못한다고 보여져요.

전 만화애니비평님의 글을 아무리 읽어봐도 `인간으로써 지켜야할 도리` 즉 남녀를 모두 아우르는 인간이라는 대지 위에 서서 그 대지는 뭉개고 파괴하지 말고 서로 논의하고 토론하며 차별점을 없애자라고 읽혀요 ㅎ

만화애니비평 2016-08-19 11:48   좋아요 1 | URL
저는 여성학 수업에서 여권신장을 두고 여성이 억압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남녀 모두 억압에서 배제하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여성만이 아니라 여성으로 분류되기보단 아동, 노인, 외국인까지 전부 배려하는 게 페미니즘이라 배웠습니다.

기본 마인드에서 타인의 인권이 없는 그 어떤 운동은 위선인 겁니다. 과격한 운동이 되더라도, 뭔가 전후맥락과 이념적 당위성이 있어야 봅니다.

제가 메갈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여러가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또 분노하게 만든 글을 보았습니다. 전태일 열사 아시죠?

그분이 1960~70년대 노동운동을 했고, 공장 내 여중을 갓 졸업한 어린 소녀들이 가혹한 노동에 혹사되는 것을 보고 괴로워했고, 나중에 분신자살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죽음은 영원히 잊을 수 없죠. 그분의 여동생은 현재 살아있으며, 오빠의 죽음에 많은 아픔과 후회를 한다고 합니다.

메갈과 워마드에서 한 소리가 전태일 죽음을 두고 분신자살했으니 앞으로 남자들은 재기하라가 아니라 태일하란 말을 하고, 그것에 동조하는 모습에 이것들이 인간인가 싶었습니다. 이건 남자만의 문제일까요? 전태일 여동생은 살아있는데 그분은 여성이 아닌가요? 여성이란 이름으로 행하는 게 과연 저런 것일까 합니다.

사진은 추가해드릴게요

루쉰P 2016-08-19 12:35   좋아요 0 | URL
어유 진짜 저건 아니죠...뭐 이건 뭐라고 말을 못 하겠네요....어떻게 저런 표현을 할 수 있는지.

전태일 열사를 쓴 조정래 변호사의 책을 읽고 정말 저런 분이 나오지 않을 세상이 되야 한다고 생각하고 노동법 공부를 위해 뛰어 들었어요.

그리고 저 역시 대학 수업 때 여성학 강의를 맨 앞자리에 항상 앉아, 전공이 컴퓨터과 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열심히 배웠습니다. 거기서 하는 여성해방 연극에도 참여해서, 입센의 `인형의 집`에서 주인공 노라의 친구 역을 맡았습니다. 물론 여장하구요.

여성들은 심한 차별을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거기서 해방을 위해서라도 마틴 루터 킹처럼 흑인과 백인의 화합을 목적으로 싸운 방식이 필요하다고 봐요.

그와 상반되는 사람이 말컴X죠. 그는 흑인만의 독립을 철저히 외쳤고, 백인은 죽어도 괜찮은 놈들이라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추종자들의 전투력(?)이랄까요? 그런 것은 말컴X쪽이 월등히 높았죠.

그러나 결국 흑인들의 인권을 향상 시킨 것은 마틴 루터 킹의 방식이었습니다. 인간이라는 대지 그 발판을 절대 무시하면 안 된다고 봅니다.

저 역시 여성 인권을 위해서 언제나 싸울 결심을 하고 있습니다.
 

2016년 여름 한국영화는 다소 이색적인 형태를 보였다. 여름에 주로 등장하는 공포 내지 스릴러 장르에서 기존 스크린을 장악했던 것은 외국 영화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한국영화가 주요 공포영화로 등장했다. 곽도원 씨가 주연을 맡은 <곡성>을 늦은 봄에 시작하여 늦은 여름에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으로 이어졌다. 이 영화들은 일반적으로 한국사회에서 자주 등장하는 장르가 아니다. 흔히 B급 정서라고 불리는 다소 서브컬쳐 요소가 강한 영화라고 볼 수 있다. 몬스터 내지 좀비가 직접적으로 한국 영화에서 등장할 사례들은 많이 없다.

 

미국이나 일본의 경우 B급영화라고 해도 그 시장의 규모가 형성된 반면, 한국영화 시장은 일반 대중문화를 중심으로 움직이며, 그 외 영화들은 인디 내지 예술영화로 상영되어 예술전용 소극장이나 혹은 대형극장 내에서 아트 시네마 홀에서 상영되기도 하나, 그 좌석규모는 매우 적다. 대중이 이용하는 영화관 내 예술전용 상영관 좌석규모는 80석 내외 정도다. 게다가 상영 회수가 매우 제한적이며, 상영기간도 길지 않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기에 큰 무리가 있다. 대중영화를 찾는 것보다 소소하게 볼 수 있는 예술영화의 맛은 기존 영화의 법칙이나 패턴에서 우회하거나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다.

 

서사나 소재 역시 우리가 직시하지 않은 부분도 많이 드러내며, 다큐멘터리나 르포르타주 형식도 많기에 사회적 문제에 대한 쟁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곡성>이나 <부산행>같은 B급 성격을 가진 영화는 예술영화는 아니나, 인디 내지 예술영화 쪽에서 다소 맥락을 찾아야 하는 이유는 연상호 감독이 그동안 해오던 작품들이 B급 정서의 영화보단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인디 내지 예술영화를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내가 그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옴니부스 애니메이션 <셀마의 단백질 커피>에서 내 사랑 단백질부분이었다.

 

가난한 자취생 3친구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통닭을 주문했는데, 팔 한 쪽이 없는 돼지가 와서 통닭을 건네준다. 그 통닭은 돼지 옆에 통닭가게의 주인의 아이였던 것이다. 닭의 아이이니 병아리고, 병아리는 하늘을 날 수 없지만, 하늘을 날고 싶어 했던 꿈 많은 아이였다. 배고픔 속의 자취생, 그리고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면서 살아가는 닭과 돼지의 모습에서 자본주의 사회라는 공간에서 살아가는 비참한 서민의 블랙코미디가 숨겨져 있다. 그리고 <돼지의 왕>은 매우 충격적인 애니메이션이며, 영상미학적으로 반() 리얼리즘인 애니메이션이나, 작품에서 보여주는 의미는 매우 현실적인 리얼리티를 부여하고 있다.

 

또 다른 작품으로 <>은 군대 내 신임병장과 막 입영한 이등병의 관계 속에서 바라보는 병영생활과 구타, 그리고 군대라는 공간에서 보이는 이질적 세계관을 고발한다. 연상호 감독이 보여준 작품은 언제나 불편하고 날카로우며, 때로는 매우 잔혹했다. 언제 학술 세미나에서 연상호 감독 작품세계에 대한 강연을 들을 때 연상호 감독의 작품은 대중사회의 폭력성과 ()연대성, 그것을 만들게 하는 비인간적 사회에 대해 그려내고 있다고 한다. 연상호 감독 작품 세계는 결국 우리 현실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으며, 그가 말하려는 현실이란 모순과 부조리, 폭력으로 가득하다는 점이다.

 

애니메이션 영상을 보면 화질 상태가 그렇게 좋지는 않다. 한국 애니메이션은 투자규모가 적고, 시장형성에서도 큰 빛을 보지 못했다. 그렇기에 <돼지의 왕>이나 <>, <사이비>를 보아도 화질은 좋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점들을 이용하여 현실의 날카로운 시선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돼지의 왕 GV>에서 그가 관객과 나누는 대화를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래서일까? 이번 <부산행>이란 영화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소극장 강당에서 애니메이션을 만들면 실사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으며, 단지 실사영화보단 애니메이션영상이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 더 다양하기에 앞으로 영화는 애니메이션 영상을 더 많이 의존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다. 대부분 한국영화나 외국영화를 봐도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상은 들어가고, 미니어처 세트에서 장면을 다른 화면과 연계할 때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상처리를 많이 한다. <부산행> 역시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상처리한 부분은 역시 많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부산행>은 실사영상이 메인이 되는 작품이다. 애니메이션 감독 연상호,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인디 애니메이터로서 대중영화에 첫걸음 한 그로써는 영화 <부산행>은 엄청난 성공과 새로운 도전을 보여준 것이다.

 

영화 팬 중에서 오랫동안 영화에 대해 깊은 이해와 비판, 그리고 연구를 하던 사람에게 <부산행>은 다소 실망한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영화를 보면 스토리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고, 뻔한 패턴과 흐름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B급 정서 영화는 대부분 황당하게 전개되거나 마무리되는 경우도 많으며, 마니아적인 요소를 가지기에 엽기 혹은 안 봐도 비디오로 갈 요소가 많다. 그러나 기존 연상호 감독이 인디 애니메이션 세계에 있다가 메인 주류 문화시장인 대중영화에 올라와 성공한 점은 분명 인정해야 할 부분이다. 여태까지 도전하지 못했던 새로운 방향성을 열었기 때문이다.

 

대신 <부산행> 이후 <서울역>에서는 실사영상이 아닌 애니메이션영상이기에 어떤 식으로 전개되고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 의문이다. 한국에서 한국애니메이션을 외면하고 미국 애니메이션과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은 충실하게 봐왔기 때문이다. 연상호 감독이 그동안 제작해오던 작품들과 방향성, 그리고 이번에 보여준 <부산행>, 그 연속적인 관계성에서 보자면 왠지 낯선 풍경이 아닐 수가 없다. 애니메이션 영상과 실사영상은 전혀 다른 영상미를 가지고 있으며, 배우와 배경을 바라보는 카메라 앵글 속의 풍경도 다르기 때문이다.

 

<부산행>은 좀비가 서울역에서 발생하여 전국으로 퍼져 국가적 기능에 큰 타격을 일으킬 정도로 심각한 상황을 만든다. 우연히 부산에 있는 아내에게 가기 위해 딸 수안과 함께 KTX에 탑승한 석우는 기차 안에서 이상한 현상을 목격한다. 어떤 여성 승객이 발작 후 사망하자, 그 승객 옆에 상황을 보고하던 KTX 여승무원을 공격한다. 그리고 여승무원은 오한과 발작을 일으킨 후 사망하더니 어느덧 다시 일어나 승객들을 공격했다. 이때부터 기차는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사람들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좀비로부터 도망치기 시작한다.

 

달리는 기차 안에 기차역에 도착할 때까지 멈출 수는 없고, 오로지 괴물을 피해 도망쳐야 한다. 이때부터 영화는 전개되어진다. 영화는 일반적으로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이란 틀을 가진다. <부산행>은 사실 발단 그 자체가 위기였고, 절정까지도 위기의 연속이다. 영화에서 어느 일정한 시간을 기준으로 위기의 해소가 있고, 그 해소 안에서 긴장감을 잠시 풀기도 하나, 위기의 순간을 벗어나는 그 조차도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다. 잠시 숨만 돌렸을 뿐이지 앞으로 계속 전진하고 후퇴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렸다.

 

보통 인간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 그런다고 가만히 앉아 죽을 수 없으면 인간은 과연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가? <부산행>에서 다양한 인간군상을 볼 수 있다. 자신을 위해 남을 이용하는 인간, 남을 위해 도와주는 사람,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가 결국 선동에 의해 집단이기주의화 되는 인간들, 인간 군중에 대해 연상호 감독은 다소 비관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인간이 위기에 빠지면 소수에게 구원을 손길을 줄 수 있어도 오히려 외면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영화는 연상호 감독의 기존 시각만을 보여주지 않았다.

 

<부산행>을 보면 열차승객(일단 승무원은 배제)의 분포현황을 보면 대부분 성인이다. 일부 고등학교 야구부 학생들도 탑승했다. 그리고 어린아이는 오직 수안만 있었고, 임신기간이 거의 다 된 성경만이 유일하게 다른 부류였다.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다. 최후의 생존자는 누구라는 것이다. 분명 임신부인 성경과 그리고 석우의 딸 수안이란 점이다. 왜 그럴 수밖에 없을까? 가임 중인 여성과 어린 아이는 사회적으로 가장 약자 중에 약자다. 그들은 육체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없으며, 누군가의 도움 없이 살아가기 어려운 존재다.

 

<부산행>은 좀비로 인해 아수라장이 된 기차 안에서 생존투쟁을 그린 영화다. 그 지옥 같은 공간에서 자신의 목숨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목숨을 무시하는 인간들의 냉혹한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관객이 느끼기엔 인간으로 용서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막상 인간이 그런 처지에 높인다면 자신이 그런 인간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은 과연 얼마나 되는 것일까? 그래도 영화는 이기적인 인간의 세계에서 마지막 희망은 있다고 말해주려 한다. 석우는 서울 유명 펀드매니저 회사의 직원이고, 그는 돈의 움직임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적인 삶을 택한다.

 

석우의 유일한 핏줄인 수안의 행동에 그는 이때까지 자신의 삶을 반성하게 된다(닌텐도 게임기가 있었는데, 다시 또 사온 것을 보면서). 딸을 이끌고 부산에 갈 때 그는 현실세계의 직장과 가정 사이에서 번뇌한다. 그리고 상황이 터지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는 마지막으로 눈을 뜬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이다. 아버지란 집안의 가장으로 군림하는 게 아니라(그러나 그는 늙은 홀어머니를 모신 점에서 완벽한 의미로 가장은 아니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자녀에게 미래라는 시간을 넘겨주는 것이다.

 

석우와 상화, 그리고 영국 일행이 좀비의 벽을 넘어 수안, 성경, 진희에게 목숨을 걸고 찾아간 것은 인간이 마지막 순간 무엇을 선택하는지를 보여준다. 아버지와 딸, 남편(아버지)와 아내(), 친구와 친구로 말이다. 마지막에 용석의 배신으로 영국과 진희는 같이 죽음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석우와 상화는 자신의 죽어도 수안과 성경을 포기할 수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간단한 질문을 받고, 그것을 영화의 장면으로 등장한다. ‘인간은 무엇을 위해 행동하는가?’

 

물론 가족과 친구 혹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라고 말할 수 잇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어가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은 과거가 되어도 사랑하는 사람은 미래로 나아간다. 그래서 <부산행>은 처절한 현실을 보여주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은 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패턴을 포기하지 않았다. 단지 영화 중간에 볼 수 있는 것은 이데올로기에 젖은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배당하는 인간사회를 두고 헤게모니라고 부른다. 뉴스에서 좀비로 난리 났는데, 그것을 반국가적 세력이 꾸민 짓이고, 군경이 투입하여 해결 중이라 한다. 실제로 일어난 현실과 미디어의 정보는 분명 다르다.

 

정치권에서 올바른 정보로 해결방안을 주기보단 그저 이 상황을 넘어가려는 오묘함만 보여준다. <부산행>에서 좀비가 나타나 위기에 봉착한 것은 맞으나 위기가 터진 이유, 그리고 그 문제가 발생해도 대처가 되지 않고 오히려 치명적으로(대전역사의 탈출 장면처럼) 작용된 점이다. 시스템이 붕괴한 시점에서 현실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존재는 너무 연약하고 무기력하다. 좀비의 탄생은 그저 단순히 우발적으로 생성된 존재는 아니다. 개봉예정인 <서울역>에서 풀어줄 것처럼, 그것은 시스템 오류라는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시스템 오류가 발생하면 기본적으로 그 오류의 근본을 고치기보단 임시방편적으로 누군가를 항상 희생시켜 오류의 발생 그 자체를 은폐시킨다. 처음 좀비의 탄생이 석우가 맡고 있던 생물연구기관에서 발생되었다는 점에서 정치, 경제, 권력, 언론 등의 이해관계에 부조리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다. 물론 현실의 세계에 나는 좀비가 나올 것이라 생각하지 않으나, 단지 좀비 같은 인간을 만들어 내는 존재들은 항상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그 상황에서도 <부산행> 결말처럼 희망을 포기하지 말자는 점에서 참으로 어려운 주문이 아닐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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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8-16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좀비가 산 사람보다 행복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고통도 없어, 미래에 대한 걱정도 없어, 경쟁도 없어, 죽음에 대한 공포도 없어, .......

만화애니비평 2016-08-16 11:08   좋아요 0 | URL
여기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좀비가 되면 덕질을 할 수 없는 겁니다!!!
오덕에겐 잔혹한 일인 겁니다!! 오오오

곰곰생각하는발 2016-08-16 12:31   좋아요 0 | URL
아 !
 


정의당 내 메갈리안에 대한 문제로 많은 당원이 탈당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여성 정의당 회원이 자신의 글을 올린 것을 링크를 타고 읽었다. 지금 내가 가장 열받는 사실은 이른바 지식인이란 자들이 정확한 전후맥락의 상실과 자신들의 발언에 대한 논리적 모순이 있다는 점을 간파하지 못한 점이다.


한국사회든 세계사회이든 남녀차별은 있었고, 여성은 억압을 당한 것은 사실이다. 19세기 존 스튜어트 밀의 사상이 영국 서프러제트 운동에 큰 방향성이 되어주었다. 서프러제트 당시 그녀들은 돌을 단져 유리창을 깨고, 우체통에 폭탄을 집어 넣으며, 심지어 방화사건까지 일으킨다. 


그래도 그녀들이 인정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녀들이 주장하는 바가 언제나 한 가지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위한 과정에서 폭력이 수반되었다고 해도, 그 폭력은 대화를 원하는 것이다. 대화를 하는 것은 논리와 감성으로 진행되어야 하는데 지금 메갈리안 사태는 폭력만 있고 대화는 없다.


서브컬처 향유를 하면서도 리뷰와 학회논문을 쓰면서 지금 참 한심해 보이는 이유는 그들이 전후맥락성과 이번 사태의 가려진 폭력성의 인과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메갈리안 옹호자들의 글을 보면 한국사회와 세계사회에 대한 전후맥락은 맞다. 


그리고 일베의 여성혐오도 있다는 것까지는 사실이다. 문제는 무엇이냐? 일베를 한국남성이 가지고 있는 심리를 보여주는 표본이라 한다. 그리고 메갈리안의 극단성은 그동안 여성에게 가해진 억압을 저항하여 보여준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일베는 한국남성이고, 메갈리안은 한국여성이라면, 결국 이번 사태는 한국의 모순을 남성 VS 여성이란 프레임으로 만든다.


일베가 저지른 문제는 여성혐오만이 아니라 외국인, 장애인에 대한 차별적 발언, 지역감정에 대한 부추킴 등 다양한 사회적 논란을 야기했다. 일베에 대한 문제성을 단순히 여성에 대한 혐오가 아니라 다변적인 현재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그런데 메갈이 일베에 대항한 유일한 집단이라 말하는 정신나간 지식인을 보면서 그들이 진짜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간과하고 있는 알 수 없다. 메갈이 외치는 것은 여성의 이름이지 지역차별, 인종차별, 빈부격차에 침묵하기 때문이다.


내가 분명히 말하고 싶은 그동안 메갈리안에서 판매해오던 티의 수익금의 출처이다. 그 수익금은 메갈리안 회원 중에 타인에 대한 명예훼손죄로 고소된 사람만 아니라 아동성추행을 저지르거나 커피에 여성호르몬제를 타서 상사에게 준 범죄자의 소송비용으로 나가는 점이다. 물론 페이스북 내 홈페이지 문제도 있겠지만,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한 지원은 반인간적인 행위가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순수하게 우발적 내지 기획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자에게 후원해주는 것이다. 영국의 서프러제트처럼 사회적인 모순과 부조리에 불만을 느껴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서프러제트 운동당시 여성들은 사람들 그 자체에게 그 어떤 폭력을 가하지 않았다) 단순히 개인에게 저지른 범죄를 두고 돈을 지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 서북청년단이란 말하탄 자가 자신의 신념에 맞지 않는다고 강연회 자리에서 폭탄을 던진 일베학생에게 돈을 주는 행위와 같다. 


일베는 자본주의사회에서 낙오된 남성이 강력한 남성권력층와 자신을 동일시 하는 심리에서 국가주의 내지 전체주의적인 요소로 볼 수 있다. 즉 그들이 저지르는 범죄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이에 반면 메갈리안의 범죄행위는 개인적 인성 문제점을 감추기 위한 저지르고. 그것은 수단을 위한 목적으로 왜곡한다. 일베의 여험에 따른 사적인 만행들은 전체주의적 발상에 따른 파시즘이고, 메갈은 그동안 축적된 불만이 사적인 영역에서 범죄를 저지른다. 그 행위에 대해 페미니즘이란 이름으로 뒤덮은 형태인 것이다.


일베나 메갈이 비슷하게 보이면서도 서로 다른 점은 행동방식이 되는 사고방식의 차이나는 점이다. 지식인들의 최대 오류는 메갈이 하는 행동이 여성의 표현이고, 일베는 남성의 심리라 하자. 그렇다면 남성들은 잠재적인 성범죄자고, 여성은 잠재적인 아동학대자고 음독기도자이다. 한국사회의 모든 남자와 여자는 범죄자란 논리가 성립된다. 미러링의 수단이 혐오발언이나 표현까지라면 몰라도 혐오범죄가 되는 순간 미러링은 방법론적 가치에서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번 일로 한국사회가 얼마나 전후맥락을 안 보고, 누가 의문을 제기하면 한 번 더 알아보고 해야 하는데 이미 지식인부터 자신의 프레임 속에 갇혀 있다. 초반 사태부터 코미디는 여성 성우의 노동권을 말하는 분들이다. 만화애니메이션 산업에 대한 기본적 지식에 대한 논의는 없고 단지 불이익 당했다고 말한다(그동안 공장애서 부당해고 당하거나 산업재해를 당하신 여성노동자에 대해서 그래 신경써 주면 고맙겠는데). 우선 만화와 게임의 성우는 그 제작사의 직원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프리랜서나 혹은 소속사에 속해진 사람이다.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과 일본 애니메이션 및 게임제작 시 성우는 자신이 출현한 작품에 목소리를 더빙하여 계약금을 받는다. 이것은 내 억지가 아니라 애니메이션 관련 도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차라리 그 성우분의 노동권을 운운하기 전에 이번 사건으로 다음 더빙 계약건에 불이익이 없으면 좋겠다고 해야겠지만, 사실 그것조차 못하게 하는 것은 과연 넥슨일까? 네티즌일까? 아닌 넥슨 본사 앞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일까? 


일부문제가 생긴 것은 사회적 부조리가 있는 것은 맞으나, 일부 문제에 대한 논의에서 그 대상을 사회적 전체로 확대오류화 시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발상이다. 그리고 지식인이나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진 사람들의 오해는 더 위험하다. 이번 일로 한국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일어날 것이다 라고 하겠지만, 그들의 믿음에는 대중의 시각에 대해 배려성이 없다. 대중은 하나같이 어려운 책을 읽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 납득할 수 있는 공감이란 단어를 원한다. 


일베가 처음에 애국논리를 내세워도 왜 지금은 대중사이에 혐오집단이 되고, 현실인간 사이에서 기피대상이 되었을까? 대중들의 공감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프레임 분석과 프레임 짜맞추는 것도 좋겠지만, 자신조차 프레임에 갇힌 것부터 인지했으면 좋겠지만, 지금 급하는 것은 어서 더운날 넥슨사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우선 멈추고(또 다른 이유는 더운날 그러면 일사병에 걸림), 하나씩 근본부터 풀어가는 게 우선이다. 지금 인터넷을 보면 경찰 고소장이 그들에게 계속 넘어가고 있다. 


고소장 내용이 물론 넥슨사 항의에 대한 집회법이라면 민주주의 이념으로 반발이 가능해도 부동액을 타서 먹인 것이나, 남의 가족사진을 들고 가서 온갖 험담과 욕설을 퍼부은 사람들이 주로 고소장의 소환타임을 맞이했다. 그들은 그런 사건에 대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억울하거나 오히려 고소한 사람에 대해 찌질하다고 한다. 


한국의 여성들이 다 저런 사람들인가? 아니다. 물론 기존 사회의 문제에 대해 개선하는 것은 옳은 말이다. 하지만 그 말 뒤에 저지르는 일탈행위에서 말과 행동은 서로 다르다는 사실과 그 행동이 분명 잘못되었다는 점을 반드시 말해야 한다. 메갈과 페미니즘이 동일시하는 순간, 한국여성들의 수준만 격하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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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5 1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5 1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쉰P 2016-08-05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수단과 결과는 동일하다는 마하트마 간디의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더러운 수단을 가지고 깨끗한 결과를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천사를 닮으려다 괴물이 되어 버린` 파스칼의 말처럼 불합리를 바꾼다고 그것을 똑같은 방식으로 푼다는 건 반대에요 ㅠ 왜이리 우리는 본질을 제대로 못보는지 모르겠어요

만화애니비평 2016-08-05 12:19   좋아요 0 | URL
수단(자신의 불만)을 숭고한 이데올로기로 덮는 것만큼 미친짓이 없죠

기억의집 2016-08-05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메갈의 후원금이 저런 범죄자들을 위한 건가요? 저는 메갈은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남성혐오라는 이유로 부동액을 타서 주었다는 게 믿기지 않네요. 게다가 그런 사람을 위한 변호사비를 대 준 다는 거죠. 이 글 사실인 거죠??????

만화애니비평 2016-08-05 12:18   좋아요 0 | URL
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160803000810

부동액 사건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sid1=102&oid=014&aid=0003569312

아동문제..

사실 남성이나 여성 모두 아동에 대한 성적 발언은..
귀여워서 로리나 쇼타 정도까지 문제 없으나...
차라리 성적욕망을 하려면 성인을 해야하는 게 맞죠.

일부는 편향되었다고 하나 위키 메갈리안 사고사건 항목을 참조하면 더 나옵니다.

https://namu.wiki/w/%EB%A9%94%EA%B0%88%EB%A6%AC%EC%95%84/%EC%82%AC%EA%B1%B4%EC%82%AC%EA%B3%A0

메갈 사이트 내 자신들이 올린 글이 사실인지 아닌지 몰라도 저런 발상 자체가 문제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8-05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애비 님의 논리가 저는 이해가 안 가는군요.
메갈4는 메갈`과는 차이를 두고 시작하는 커뮤니티입니다.
메갈 4는 본격적으로 여성주의를 진지하게 논의하겠다고 출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애비 님의 논리는
성추행 목사가 잊을 만하면 등장하니 하느님은 그들과 다를 게 없다는 논리와 같습니다.
전형적인 확증 편향이죠.

만화애니비평 2016-08-05 13:03   좋아요 0 | URL
차이라고 하나, 결국 관점의 차이겠죠..

예전에 좃린이사건(아동성추행사건)의 후원을 메갈리아4에서 한다는 점에서(링크된 아카이브) 곰발님이 정말 그들이 옳은 취지로 간다고 여기시면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아카이브에 마인드C에 대한 내용도 있는데, 글쎼요? 과연 누가 누구하고 같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http://archive.is/W7z1I
http://archive.is/L4cN7

곰곰생각하는발 2016-08-05 14:07   좋아요 0 | URL
메갈 4의 취지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단, 실행 과정에서의 오류는 있겠지요. 모든 운동이라는 데 시행 착오를 거치기 마련입니다.

하튼, 이것은 저와 만애비 님의 입장 차이라고만 정리해 두겠습니다.
우린 때 되면 막거리 마시는 사이 아닙니까. 건강 챙기시고요..

은령 2016-09-20 02:28   좋아요 0 | URL
메갈의 취지를 최선편향 해석하고 실체는 투영상의 오점의 일종으로 보는 건

비유하신 것으로 말하자면 기독교를 표방하고 있는 그 어떠한 반도덕적 종교집단도 그 표상을 감안하여 고려해야한다는 논리와 일치합니다. 더군다나 페미니즘의 해석적 권위를 누리는 일종의 교황권이 메갈에 있지 않음은 자명하고요.

취지를 키워드로 변환한 다음 그 키워드를 이끌어 낸 사상의 최고 가치를 찾아내어, 그것을 기준으로 삼은 다음,
그 취지를 명목상으로 표방한 것 만으로 그 특정 발언집단을 `그 기준`을 준거로 재단할 수 있다는 것은 비약의 극치가 되겠지요.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여성 명배우 메릴 스트립이 영화 <서프러제트>에 아주 중요한 인물 에멀린 팽크허스트 여사를 맡은 점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과거 영화 <철의 여인>에서 영국의 총리 대처 수상 역을 맡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찬사를 받은 대처이었으나, 대처 정권 때 가해진 아일랜드 독립운동가에 대한 탄압, 노동자에 대한 탄압은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영국 노동자 계급은 결국 영국 대다수 국민이다. 그들의 경제적 내수붕괴는 영국의 경제악화로 이어진 것이다. 물론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찬사와 비난이 오가겠지만, 메릴 스트립이 영화주인공으로 등장한 <철의 여인>과 그리고 이번에 등장한 <서프러제트>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다.

 

그녀가 맡은 에멀린 팽크허스트 여사는 자신의 여성운동을 기록한 자서전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로 통해 열국 여성정치 참여에 대한 철저한 투쟁을 보여준다. 사실 자서전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와 영화 <서프러제트>는 공통된 분모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여성운동이 노동문제와 깊게 연결된 점이고, 많은 희생을 당하는 여성들이 공장에서 심각한 노동착취를 당하는 점이다. 그녀들이 공장에서 일하는 이유는 가난 때문이고, 그녀의 어머니들은 10대에 애를 낳고, 그것도 모자라 아이들조차 7세 정도가 되면 공장에서 일을 한다.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의 팽크허스트 여사는 그나마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고, 그녀의 남편은 인권운동에 매우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팽크허스트 씨는 비록 그녀와 같이 운동 초반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는 자신의 남편 사이에 딸 3명을 낳았다. 그리고 그 딸들도 서프러제트 운동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소설은 팽크허스트 여사 중심으로 흘러가나, 영화 <서프러제트>는 공장 노동자인 모드 와츠의 중심으로 진행된다. 처음에 공장에서 힘든 노동을 마치고 집에 오면 사랑스런 아들과 다정한 남편이 있다.

 

하지만 아들은 몸이 아프고, 공장 안의 분위기는 언제나 험악하다. 그녀가 서프러제트 운동에 참여한 것은 현실에서 느끼는 부당한 현실이다. 영화를 보면 잘 봐야 하는 장면들이 있다. 모드 와츠는 남편과 침대에 누워 있을 때 남편이 그녀를 뒤에서 안아주고 그녀의 등에 키스를 한다. 근데 와츠의 한쪽 어깨를 잘 봐야 한다. 그녀의 어깨는 화상을 입어 약간 흉측하게 변해 버린 것이다. 와츠의 어머니는 공장노동자였고, 그녀는 뜨거운 세탁물로 인해 사망했다. 자신의 어머니가 노동착취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자신도 노동착취에 몸을 다쳤고, 심지어 공장 내 감독관은 과거 그녀를 성폭행까지 한 것을 알 수 있다.

 

여성문제가 왜 노동문제로 이어지는가? 남편 혼자서 돈을 벌어도 해결되지 못하고, 여성도 공장에 가게 되며, 그녀들에게 주어지는 임금은 남성의 2/3 정도이다.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의 서평을 적으면서도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엥겔스의 도서를 봐야 한다. 마르크스의 <자본>1870년대 전후 영국 런던 공장노동자의 생활을 정확하게 묘사했고, 엥겔스는 맨체스터에서 공장을 운영하면서 당시 노동자들이 겪은 비참한 모습을 고발한다. 그리고 존 스튜어트 밀의 <여성의 종속>을 읽으면, 여성에게 가족의 일원으로 권한이 없었으며, 자신이 가진 돈조차 남편에게 갈취당한다고 했다.

 

밀의 책에서는 여성은 남성보다 뒤처지지 않고, 오히려 섬세한 일을 잘 할 수 있으므로 때로는 남성과 같은 일을 할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남성보다 훨씬 더 우수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적었다. 물론 내가 가진 생각을 밀의 철학에 상당히 공감을 거기에 바탕으로 판단한다. 여성과 남성은 생물학적으로 다르지 사회적 관계에서는 분명 공정한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당시 남성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성들을 억압했고(물론 여왕은 제외) 착취했다.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고 나서 최종 착취당사자는 인간이다.

 

부조리한 사회에서 와츠는 공장과 사회에서 겪는 모순에 딜레마에 빠진다. 원작인 책을 보면 영국의 대다수 노동자는 비참한 생활을 했지만, 남성 노동자들은 상당히 개선된 반면 여성에게는 아직 많이 부족했다. 처음에 모든 노동자가 지배계급에 반항했지만, 이젠 남성노동자에게 여성을 지배한다는 명분을 살려 사회의 부조리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와츠는 우연히 의회에 대신 진술하면서 그녀가 살아온 이야기를 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가난한 여성노동자의 딸이고, 오랜 노동으로 인해 각종 질병을 이야기한다.

 

마르크스 <자본>에서 눈이 아프고, 가관지가 좋지 않으며, 휴식이 없어서 다리에 정맥이 생기고 관절이 불편하다. 그래도 그녀가 일하는 이유는 자신의 아이 조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와츠가 경찰에 간 후 다시는 서프러제트 운동에 참석하지 않으려 했으나, 남편과 대화에서 그녀는 투사가 되기로 결정한다. 만일 아들 조지가 아닌 딸을 낳았다면 이름은 무엇이 좋겠냐는 말에 남편은 자신의 할머니 이름인 마가렛을 주고 싶다고 한다. 할머니를 좋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마가렛이 태어나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라는 질문에 남편은 무심한 표정으로 아내처럼 살 것이라 한다.

 

팽크허스트 여사나 와츠나 그녀들이 목숨을 걸고 세상과 싸우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이 불만인 것도 있지만, 앞으로 자신을 이어 살아갈 후손들이 그 부조리한 세상에 희생되는 게 너무 싫었던 것이다. 후반부로 가면 남편은 조니를 더 이상 돌볼 수 있는 여력이 되지 않아 억지로 입양을 보낸다. 이 순간 와츠는 완벽한 서프러제트가 된다. 팽크허스트 여사가 수배 중 기회를 노려 많은 청중 앞에서 연설을 한다. 그녀가 하는 말은 여성의 권리를 찾는 이유는 미래를 위해서이고, 우리 아들딸에게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결국 영화 <서프러제트>에서 모질게 싸우는 그녀들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는 결국 자신의 권리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다. 흔히 우리가 현재 남녀 모두 공평하게 투표를 해도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면 참으로 답답하다. 어느 누구는 그냥 누가 좋아서 무조건 , 누구는 나는 저 사람이 싫어서 저 사람 반대되는 자에게 투표라고 말한다. 또는 누가 되면 집값이 떨어질 것 같아 라는 말도 한다. 하지만 진정 투표를 실행하려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이후의 미래를 위해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여성인권 중심이 모권에서 시작되었고, 모권이 중요한 것은 아동인권이 어머니 처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여성인권을 두고 흔히 남녀평등이란 말을 사용하는데, 나는 그 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여성의 인권을 올리는 것은 남녀 사이의 성적인 양성평등으로 여기는 것은 서로 간의 프레임에 빠지기 쉬운 논리오류가 발생한다. 여성의 인권을 올리는 이유는 인간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고, 그것은 남녀평등보단 인간평등이라고 말하는 게 옳다는 점이다. 내가 이번에 이 영화를 보게 된 동기는 현실문화연구(담당자님 더운 날에 파이팅인 겁니다.) 직원이 운영하는 포스팅도 있지만, 최근 페미니즘 논쟁 때문에 그렇다.

 

내가 그렇게 많은 페미니즘 도서를 읽은 것도 아니고, 페미니스트도 아니다. 하지만 내가 읽은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도 그렇고, 매릴린 옐롬의 <아내의 역사>를 봐도 현재 상황에 이해가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이 과거에서 받은 핍박과 부조리는 알고 있지만, 정말 이 영화 <서프러제트> 같은 상황이라면 페미니즘 논쟁에서 다소 시위자의 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나 많은 도서를 읽어도 페미니즘 이론에서 미래란 가치를 과거에 투쟁하던 여성들은 외면하지 않았다.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 타개하는 자세는 좋으나 그 시작점은 이상하다. 누군가는 이 사건들을 두고 페미니즘 운동이라 하는 사람도 있고, 결국 이게 페미니즘 논쟁이 되어 긍정적인 방향이 될 것이라 본다. 물론 내가 회의적인 이유는 나는 왕자가 필요 없다 에서 한국의 대부분 남성들은 왕자로 살아가기보단 거의 일개미로 살아간다. 일개미가 왕자일 수도 없고, 왕자가 될 수도 없다. 티 한 장이 아니라, 티 한 장에 숨어있는 전후맥락을 아는 분도 있고 모르는 분도 있다. 그런데 현재 진보적 매체에서는 티 한 장만 가지고 보려 하지, 그 뒤에 숨어있는 전후맥락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서프러제트>에서 주인공 와츠는 어린 아들을 가진 어머니다. 그녀는 아들을 볼 수 없는 게 가장 마음이 아프고, 입양되어가는 장면에서는 주변 관객들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티 한 장의 수익금 일부가 다양한 범죄행위를 저지른 사람의 합의금 및 소송비로 이용된다는 점이다. 서프러제트 운동처럼 반인권적 여성탄압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위해나 모욕, 그리고 아동 성추행과 같은 범죄를 저지른 자에 대한 지원금이다. 아동 성추행을 일으킨 사람은 유치원 교사였다면, 그 피해아동의 부모, 혹은 자신의 자녀를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맡긴 부모들은 어떤 기분이 들까?

 

그것도 한국남자의 아이니깐 당해도 상관없다는 논리에서 저들이 말하는 페미니즘에서 많은 국민들에게 어떻게 보일까(여전히 이런 문제에 대해 논하지 않고 계속 어려운 말만 내뱉는 지식인들에게 반대로 묻자면 그람시가 <옥중수고>에서 말한 지식인의 오류는 이해나 심지어 느낌 및 열정 없이도 알 수 있다고 믿는데 있다. (중략) 즉 민중의 기본적 열정을 느끼고 이해함이 없이도 지식인일 수 있다고 믿는데 있다.”)? 그것도 그런 글을 적으면 마치 당연한 것처럼 모두 달려드는 현상에서 말이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남자들과 말만 잘 통하는 착한 페미니스트만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거칠게 싸우는 페미니스트도 페미니스트라고 말이다. 하지만 페미니즘이란 성적인 담론을 제시하기 전에 먼저 인간이란 사실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지 않은가 싶다. 좋은 페미니스트이든 나쁜 페미니스트이든 그 당사자가 나쁜 인간이 되면 그들이 외치는 구호는 그저 가식과 위선에 불과하다. 영화 <서프러제트>에서 많은 여성들은 아주 강하게 나간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은 폭력을 폭력으로 대응하는 자세로 말이다.

 

그러나 행동과 달리 사상적 근본에는 항상 자신들의 신념과 명분이 존재했다. 그 명분이 결국 언론과 대중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에 영국은 여성들에게 정치적 자유주의가 부여된 것이다. 영화는 진짜 애밀리의 죽음과 장례식으로 끝나며, 마지막 장면은 흑백영상으로 기록된 그녀의 장례식이 등장한다. 우리 인간의 역사에서 부조리와 모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수많은 폭력과 희생이 수반되었다. 어느 누군가의 희생을 정당화할 수 없으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영화 <서프러제트>는 단순히 여성의 인권을 원하는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전 인류가 조금 더 행복해지기 위해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건 내 생각이 아니라 영화 원작자인 에멀린 팽크허스트 여사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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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1 0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1 08: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쉰P 2016-08-03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읽으러 올 때마다 많은 사색을 하게 됩니다 만화애니비평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인간이라는 공통의 대지 위에 서 있는데 왜 거기서 뭐가 다르고 뭐가 다르다 하면서 차별을 하는 것일까요? 여성 역시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하는 권리에 있어서 정말 많은 피해를 직접적 구조적 폭력을 당해 왔어요 ㅠ 정말 좋은 글 입니다 ㅎ

만화애니비평 2016-08-03 11:01   좋아요 0 | URL
신해철 씨가 이런 느낌의 유고를 남겼죠.

대한민국 여자들은 정말 X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런다고 남자들도 X같은 곳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찌보면 둘 다 X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데, 단지 그 차이는 사회구조적인 차이겠죠. 재벌 2세 따님이 불쌍할까요? 공사장 노가다 아저씨 아들이 더 불쌍할까요? 물론 공사장 노가다 아저씨의 따님이 더 불쌍하겠지만, 조금 생각해 볼 게 있겠죠.
 
해방된 관객 컨템포러리 총서
자크 랑시에르 지음, 양창렬 옮김 / 현실문화 / 2016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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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된 관객>은 왠지 모르게 이때까지 내가 읽은 책들을 다시 되짚어 보는 기회가 되는 도서인 것 같았다. 물론 여기에 등장한 다른 저자나 책들 모두 읽은 것은 아니나, 많은 부분이 인용되고 연구된 점에서 랑시에르가 제시하는 현대적 미학이 무엇이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랑시에르의 책 중에서 과거 <무지의 스승>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랑시에르의 책은 쉽지가 않다. 제법 난해하고 어려운 개념이 등장하고, 번역자 입장에서 전공자이겠지만, 타 전공자 입장에서 매우 힘든 책이다.

 

그래도 읽는 이유는 이런 책들을 도전해야지 새로운 것들을 익히고 다른 것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전해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솔직히 랑시에르의 <해방된 관객>은 내 사고에는 이중적인 판단이 내린다. 하나는 해방된 관객이란 결국 대중문화를 소비하는 대다수 인간을 말하고, 그들이 바로 새로운 문화적 주체자로 되어야 하는 점이다. 그리고 여기에 반대되는 의미는 이 책이 너무 적혀진 것이다. 랑시에르가 말한 지적인 권력에서 이미 이 책도 제법 지적인 권력이 담겨있다.

 

이런 모순 속에서 계속 우리는 모순과 역설적 관계로서 세상을 대할 수 없다. 만일 대중들이 일반적인 패턴에 익숙해진 이상 그들은 여전히 같은 모습과 같은 이야기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등과 같은 Sub-culture 계통 콘텐츠를 좋아한다. 대중문화에 최근 웹툰의 약진과 웹툰 원작을 바탕으로 영화와 드라마의 재구성에서 새로운 문화적 조류를 일으키는 것이 Sub-culture이다. 하지만 왜 Sub-culture의 등장이 중요한가?

 

과거 한국만화사 연구에서 문학비평가이신 김현 선생님은 만화란 민중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민중에 의한 예술이라고 말했다. 그분이 말한 것처럼 만화는 누구나 쉽게 만들고 접하고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이란 인간의 삶을 하나의 굴절된 빛으로 보여주는 것이기에 인간이 가진 모습을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전해줄 수 있다. 반드시 예술이 예술가의 자신만의 세계에도 있을 수도 타인의 모습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예술은 시각과 청각으로 구성된 매체로 제작됨에 따라 남에게 보이기 마련이다.

 

바로 여기서부터 이 책의 가진 의문과 검토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그나마 다행인 게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를 읽어봤다는 점이다. 아이러니하게 <해방된 관객>은 현실문화연구 출판사 직원 분에게 운 좋게 받은 도서이다. 내가 <스펙타클의 사회>를 본 것 사실 현실문화연구에서 나온 도서이나, 그 책은 절판되고, 대신 <울력의 책>에서 재출간 되었다. 스펙타클에 대해 쉽게 말하자면, 우리는 관객이고, 관객은 자신의 의지와 판단으로 상황을 맞이하는 게 아니라 그 상황에 의해 조작되는 것이다.

 

이른바 프레임에 갇혀서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프레임이란 상황에 묶인 것이다. 그래서 드보르는 상황주의자로서 그 상황을 타파하는 새로운 시도를 했던 것이다. 그들이 하는 행동들은 유쾌하거나 괴짜다. 가령 책을 전시하는 책장에 자신들의 책을 나두는데, 그 책의 표지는 사포로 되어 있어서 다른 책 커버를 손상시킨다. 야간에 에펠탑의 빛이 강해 잠을 잘 수 없으니 폭파하겠다는 협박을 한다든지 그렇다(물론 환경공학 전공자 입장에선 최근 경관위락에서 조명에 의한 수면부족 및 생태환경 변화는 무시할 수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미디어의 이미지에 얽매이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그것에 탈출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드보르는 스펙타클은 이미지가 매개가 되는 사회이고, 이미지는 고정된 게 아니라 시시각각 변화한다. 따라서 스펙타클의 전복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이미지에 의해 붕괴되고, 또 다른 이미지로서 스펙타클의 재정립이 시작된다. 스펙타클은 멈추지 않고 계속 새로운 죽음과 탄생이 반복되는 영원한 굴레이다. 이미 현대인들은 TV, PC, 인터넷, 스마트폰으로 스펙타클에서 탈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수동적인 인생에 대해 생각하자면 내 가치관의 시작점인 장 자크 루소에서 생각할 수 있다. 루소의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편지>를 직접 읽은 것은 아니나, <루소의 사상>이란 책에서 루소가 말하는 연극에 대한 글을 연구하는 파트를 보았다. 시간이 몇 개월 정도 지났기에 모든 것을 기억하지 않았으나, 연극이 가진 문제를 비판했다. 연극에서 권선징악적 요소에서 건전한 사회라면 좋은 작품이나, 그렇지 못한 세계에 나쁜 작품이라는 것이다.

 

즉 관객에겐 하나의 구경거리로 제공되고, 연극에서 나쁜 역할을 맡은 자는 관객에게 야유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 보면 된다. 즉 관객이 그런 나쁜 역할을 맡은 사람들 중에 하나의 표본이 될 수 있겠지만, 나쁜 사회는 그런 반성은 없는 것이다. 루소의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를 읽으면 루소의 반계몽주의적 요소를 볼 수 있다. 학문과 예술이 인간에게 도움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도구로 되는 것을 설파하다. 이런 점은 추후 푸코의 <감시와 처벌>과 같이 지배계급이 지식이란 권력을 이용하여 통제시스템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분석하는 것과 이어진다.

 

대중문화는 일반 대중을 위한 미디어일 수 있겠지만, 그 안에는 담겨있는 내용은 대중에게 보여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대중을 위한 여가생활보다는 대중으로 하여금 같은 사고를 자아내게 하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가 책에서 나중에 영화로 나온다. 다양한 영상들이 짜 맞추어 육성에서 나오는(나는 불어를 모르니 무슨 말인지 모르고 영어도 잘 몰라 자막의 영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세히 모른다) 내레이션을 따라가면 책을 읽은 것을 상기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각종 미디어에 집착하게 만드는 구조라는 점이다.

 

그러나 <해방된 관객>에선 재미있는 말이 나왔다. 어떤 군인의 돌격하는 장면을 두고, 우리에게 그것을 비판하기보다는 아방가르드의 반미학 운동가들의 유쾌한 논조가 상당한 아이러니로 다가왔다. 전장의 군인처럼 우리도 이 현실에 대한 수동적인 삶에 대하 돌격하자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돌격하자는 것은 우리 삶의 주인이 우리란 점을 만들기 위해서 관객 스스로 뛰어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스펙타클의 사회>와 걸맞게 점심시간 돼지국밥 한 사발을 하는데, 뉴스에서 재미있는 기사가 나왔다.

 

연극을 하는 장소에 관객석이 없다. 관객이 위치하는 곳은 연극이 이루어지는 무대 위에 작은 빈 공간, 10명 정도 되는 관객은 자신의 몸에 하얀 천을 가린다. 마치 그 모습은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보면 코러스가 뒤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관객이 이제 무대 위의 소품 내지 혼자 등장인물이 되었다. 급박한 상황을 구경하고 놀라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대변해주는 유기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연극을 몇 번 본적이 있었다. 무대를 멀리서 혹은 가까이에서 말이다. 연극이나 공연은 무대 위의 사람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청중이 있어야 가능하다. 하지만 청중조차 연극에서 필요한 소재로 된 것이다.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의 브레히트의 연극에 대한 글을 보았다. 일반적인 연극이 아니라 연극을 보는 대중에게 충격을 주는 요법, 아방가르드란 반미학적 가치관에서 예술은 어느 일정한 목표를 향해 가는 게 아니라 그 목표와 별개로 각자에게 그 목표로 가라고 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에서 아방가르드가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한다. 어차피 프랑스 후기구조주의 이전 모더니스트 단계에서 전환되는 과정에 아방가르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우리 대중은 우리 시선을 자극하는 것에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가 무엇인지 생각해야 하는게 아닌가?

 

작년문화예술 강의를 듣고, 어느 작은 아트갤러리에서 전시회 관람과 강연을 들었다. 여러모로 재미있는 추억이다. 다양한 사람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술도 마시고, 내가 살아가는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인간관계가 아니라 더 많은 인간과 대화할 수 있었다. 그때 내가 돌아다니면서 어느 예술프로젝트를 보았냐면, 서울 홍대처럼 사람이 많은 곳에 이동식 포차를 움직이는데, 그 포차는 이상한 오브젝트로 구성되어 있으며, 거기서 안주와 소주 1잔을 돈을 받아 판다는 점이다.

 

오브젝트를 이용하는 많은 사람들은 돈을 주고 술을 마시고, 안주를 먹었다. 술을 나누는 포차가 하나의 예술적 기능은 무엇인가? <해방된 관객>에서도 비슷한 관점, 아니 우리보다 앞선 관점이 등장한다. 전시회를 여는데, 그 곳은 사람들이 잠도 자고 밥도 해먹을 수 있으며, 소파에 앉아 다양한 사람이 대화까지 나눈다. 인간이란 한자어를 보면 사람의 사이다. 결국 사람들이 모여 자신과 타인의 대화를 나누며 교감이 이루어지는 게 진정한 예술의 세계가 아닌가? 나는 예술의 최종목적을 두고 말한다면 결국 교감이다.

 

교감은 서로 가지고 있는 자신만의 의사와 판단을 나누는 곳이다. 개인의 의사와 판단은 사회적 고정관념과 편견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 간의 입장을 돌아보면 다른 가치관으로 이어진다. 예술의 기능을 두고 다양한 말이 있지만, 예술이 필요한 이유는 새로운 소통방법, 새로운 가치관, 기존 사회의 앞으로 다가온 사회의 대화라고 본다. 물론 나는 기존의 모든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지금 현재 모습이 있는 이유는 기존의 역사적으로 진행된 인간들의 축척이 존재했기에 가능하다고 본다. 과거가 없다면 현재도 없다. 단지 미래를 위한 것이란 현재를 어떻게 구성하는가이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관객이 해방된다는 것은 자기 삶을 무엇을 보고 있느냐이다. 19세기 노동자의 삶에 대해 랑시에르는 생각한다. 자신의 집이 아닌 노동자가 그 집이 아름답게 빛나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는 사실, 그것은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을 고생이 아닌 하나의 예술(물론 본인은 예술이라 여기지 않는다)을 만드는 과정이라 느낀다. 자신이 만들어내는 가치가 결국 그 자체를 만들어내는 하나의 과저이라면 예술은 어디에 구속된 것이 아니라 주변에 손을 뻗어 어디든 잡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해방된 관객>에선 자꾸 대중에게 자신에게 갇혀진 세계에 나오라고 한다. 가령 베트남전쟁을 보자. 아직도 한국에서 베트남전쟁을 두고 이데올로기적인 가치관으로 평가절가 하려고 한다. 하지만 막상 통킹만사건이나 고엽제 같은 일을 보면 공정성은 보이지 않은 것 같다. 어째든 현대전쟁은 주로 폭격과 화생방 작전이 많이 수행되었다. 미국의 어느 부유한 가정에 어느 한 베트남 남성이 목숨을 잃은 딸을 안고 절규하는 장면이 나온다. 포토몽타주, 즉 서로 다른 사진을 이어 붙여 만든 작품이다.

 

우리는 이것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가? 사실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에서도 전쟁은 진짜 이루어진 전장보다 우리가 보는 헐리웃 영화의 전쟁영화가 더 실감나는 전쟁이란 말을 한다. 대중이 보는 매체가 그렇게 만들어 현실적인 비극을 마치 산파극의 정당한 내러티브로 전환해버린다. 해방은커녕 자신이 현재의 스펙타클에 얽매인 사실조차 알기 어렵다. 그런다고 관객이 새로운 눈을 가지도록 하는 일은 멈출 수 없는 일이다. 다양한 가치관과 인간들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대중은 한 가지 틀에 갇힐 수 없다. 누가 그랬던가? 모든 시민은 자신이 예술가와 작가 그리고 비평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래야 우리는 진정으로 해방이 된다고 말이다.

 

물론 책을 보고 현실을 돌아본다면 무척 어려운 조건이란 것은 안다. 어렵다고 자신 스스로의 해방이란 단어란 말처럼 간단한 일은 아니다.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처럼 배우는 사람들, 즉 우리 대중은 무엇을 위해 그것을 배우는지 모른다. 그저 권력의 관계성에서 자신이 모르기에 단지 그 이유로 수동적인 삶을 받아들인다. 그게 곧 대중으로 이어지고, 우리에겐 스스로의 삶보단 통제된 삶을 강요하여 현재로 이어진 것이다. 그것을 멈추기 위해선 누가 강요할 수 없다. 칸트의 철학이 모든 게 맞을 수 없더라도 칸트는 계몽이란 자신이 스스로 그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과연 스스로의 알을 깰 수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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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빠 2017-04-10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사게 하는 리뷰네요. 멋집니다.

만화애니비평 2017-04-11 08:44   좋아요 0 | URL
아이고 감사합니다.
아이디가 참으로 인상적이네요...
팔루스의 기표.....읽다말은 라캉이 생각납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