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이성비판 1 대우고전총서 19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 아카넷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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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形而上學)이란 무엇인가? 솔직히 말해 형이상학이란 단어는 철학(哲學)에서 자주 나오는 단어이며, 인간의 이성 사고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나는 생각할 수밖에 없다. 너무 깊이 자세하게 시시비비 하나하나씩 걸고 넘어가면 더 이상 무지한 범인(凡人)으로서 해석가능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이성에 대해 깊이 통찰하고 거기에 대한 깊은 반성과 비판으로 통해 인간 이성을 돌아보게 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나는 그런 어렵게만 느껴지는 철학이라는 학문과 거기에다가 형이상학이라는 뭔가 현학적인 단어에서 약간 움츠리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이 책을 읽고, 아직 페이지 전체가 아닌 일부만 보면서 이런 글을 적으려고 하는가? 그것은 이 책이 나에게 주는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과 행위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일련의 사건과 만남으로 통해 수많은 판단의 갈래에 서게 된다.


문제는 그 판단에 대한 양자선택에서 우리의 선택이 과연 그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반의적인 질문이다. 예를 들면 어느 지역에 어느 시대에 어느 특정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고 따르는 하나의 이념이나 가치관을 절대적으로 신봉하게 된다. 그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는 이념이나 가치관이 어떻게 보면 옳을 수도 있고, 어떻게 보면 옳지 않을 수가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에 대한 의문을 품지 않을 경우가 있다. 그저 그것이 하나의 정당한 가치관과 법적인 효율을 가진 인식으로 자리 잡혔을 것이다. 이런 인식론적인 교조주의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믿고 따르는 그 판단기준이 과연 옳은지에 대한 비판보다는 그 판단기준에 대해 비판하는 그 자체가 비판받을 것이라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인간의 인식에 대한 오류가 윤리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의 정당한 이념으로 정하여 인간의 가치가 윤리도덕적인 가치관이 아닌 이념의 잣대 아래 드리워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세상을 살아가면 어떤 특정한 이념이나 가치관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을 좀 더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방편이 인간을 억압하고 인간의 사고를 오염시키며, 인간 자체에 대한 이성능력을 저하시킨다면 그것은 바르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이 어디서 어떻게 무엇에 의해 잘못 되었는지 생각하고 개선할 필요가 있다. 내가 처음 본 순수이성비판 1권의 흐름은 그렇게 느꼈다.


칸트가 처음 머리말에 주지한 인간 스스로에 대한 이성 비판 오류는 인간이란 칸트가 살았던 당시와 혹은 칸트가 태어나기 이전과 혹은 칸트가 죽어 현재 이 글을 적는 내가 사는 현대에서도 종종 보는 일이다. 우리 인간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행동에 대해 언제나 생각하고 판단하여 본인의 이성아래 움직인다.


그러나 그 이성이 과연 정당한지 혹은 부당한지에 대해 결코 의미를 두려고 하지 않는다. 단지 어느 일정한 흐름과 거대한 틀에만 맞추려고 한다. 특히 자신의 가치를 내세워 스스로 보여주기 보다는 거대한 벽과 틀에 숨어 가면을 쓰고 타인을 공격하는 무비판적인 인간들은 그들의 이성이 과연 있다고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마저 든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자신들이 엄청난 과오와 행패, 불량한 태도를 보임에도 그것이 잘 못되었다는 반성보다 오히려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만 내세운다. 그게 과연 올바르고 정당하고 가치가 있는 일인가? 자신의 이성에 대해 비판하지 않고 그저 그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이성으로 비판하려고 드니 결국 돌아오는 것은 자신의 이성능력 결함이다. 게다가 더욱 불행한 사실은 그들은 자신의 이성능력에 결함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결함이다.


이 결함으로 인해 또 다른 결함과 결함이 불러 우리는 이렇게 어지러운 세상에 사는 것이 아닐까? 인간은 누구나 동일한 조건과 환경, 그리고 성장과 기억, 경험을 소유하지 않는다. 자신이 어디서 태어나고 자라고 누구를 만나고 이야기하고 또한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따라 조금씩 그 생각과 의견이 다르고 거기에 따라 판단능력과 행동범주도 다르게 된다.


그렇지만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모두 이성을 지닌 존재라는 점과 그 이성이 지닌 인간은 모두 자유와 평등을 누릴 권리와 지켜나갈 책임이 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 소유한 이성능력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한 관계성까지도 영향을 주므로 인간의 무비판적인 이성능력은 결국 나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이 타인에게 보여준 행동에서 본인은 옳다고 보겠지만, 사실 엄청나게 잘못된 경우가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문제들이 실제 발생하더라도 그 과오를 범한 인간들은 그것이 틀렸다고 해서 반성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아닌 남을 비판하고 그것은 어느덧 비난과 비방으로 이어진다.


과연 인간은 자신이 정말 올바른 이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에 대해 진실로 그러한지 알아나가야 한다. 그것은 사회적 정치적 동물인 인간이 타인과 교감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안타까운 인간의 오류는 자신이 윤리적으로나 혹은 도덕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이성이 결국 그 이성을 지배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지배받는 것이 아닐까 라고 하는 의문이다.


만약 그런 교조적인 신념 아래 타인과 교류하려는 인간은 오히려 교류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판단에 대해 오류에 빠진 인간들과 더불어 더 큰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라는 나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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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 교양사상서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정영하 옮김 / 산수야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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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읽으면서 1페이지 1페이지씩 넘어갈 때마다 그 의미와 내용은 마치 너무 당연하고 그래야할 주장처럼 들렸다. 그가 주장하는 인간의 자유라는 것은 모든 인간이 가져야할 재산이고, 모든 인간이 책임지어야 할 하나의 큰 숙제로 보였기 때문이다.


자유라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부여된 하나의 천부권이므로 모든 인간에게는 자신의 자유 권리에 의해 자신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h통용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자유롭지 못한 세상이다.


그런다고 해서 모든 자유가 자신의 이기심과 욕망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타인일지라도 그 타인 역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 권리를 소지하고 있다.


우리는 자유라고 하면 마치 거대하고 웅장하고 상당히 철학적으로도 볼 수 있지만, 자유라는 것은 사실 알고 보면 무척 보편적이고 일반적으로 사용할 있는 하나의 행위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그 무언가를 하고 있다면 그는 자유로운 인간일 것이다.


하지만 자유에는 의무와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다.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싶어서 그 일을 하게 되면 그 일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무시한다면 다른 사람과 약속한 특수한 약속과 조건을 일방적으로 파기시키는 일로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약속을 파기시킨 사람으로서 어떤 특수한 이익이나 즐거움을 얻겠지만, 이와 다르게 그 약속이 파기될 것이라고 판단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에서 엄청난 경제적 손실과 정신적 충격을 받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해 마치 자신과 같은 입장을 고려하여 그 타인에게 합리적이고 바른 행동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것 역시 자유가 아니다. 사실 내가 생각하고 싶은 자유란 “내가 소중하면 남도 소중하다”라는 상대방에 대한 인격존중이다.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을 적을 시에는 존 스튜어트 밀이 생각하기에 그렇게 자유롭지 못했던 것 같다. 남녀차별로 인해 여성투표권이 완전히 일반화되지 않았고, 공장에서는 노동자가 아닌 어린아이들이 고뇌 노동을 하고 있었으며, 아직 시대가 근대화가 되지 않아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잡아온 흑인들은 노예로 고통 받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자유일까? 사람 위에 사람이 있는 것은 위에 있는 사람이 자신에 비해 능력이나 판단력이 낮은 사람들을 올바르게 지도하기 위해 존재해야하는 것이다. 그 위에 있다는 사람조차도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존중하지 않으면 그것은 자신의 이기심이 타인의 자유와 인권을 무시하는 처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권력을 마치 하나의 자유로 인지하여 자유라는 단어가 어느 순간 모두를 위한 자유가 아닌 특정을 위한 자유가 되어 버린 것일까? 우리 인간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혼자서는 절대로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은 정치적·사회적인 동물이므로 그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친분을 쌓고 서로 대화로 통해 자신들의 가치를 추구할 수 있다. 그런데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관에서 남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은 남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 혹은 그 소속무리의 이기심에만 충성할 뿐이다.


자유 그것은 무엇인가? 나만 좋으면 자유일까? 아니면 타인의 시선 아래 살아가는 것이 자유일까? 최근 미디어의 발달로 인간의 소통방법은 예전보다 쉽고 간편해졌다. 그러나 정보의 유출, 개인 신상 해킹, 정보조작, 여론조작 등은 여전히 인간이 자유롭지 못하게 하고 있다. 왜 인간들은 자유롭지 못할까?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는 것은 팬의 권리이기도 하나 그 연예인에 대한 인격을 존중해야하는 것은 팬의 의무이기도 하다.


인간은 항상 그 의무와 권리라는 두 가지에서 항상 뭔가 갈등하게 된다. 나를 위한 것인가? 남을 위한 것인가? 그 적절한 경계점으로 통해 해결해야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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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화
김익두 지음 / 한국문화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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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나는 우연히 신화에 대한 매력에 빠져 들기 시작했다. 그 신화라는 신이 나오는 이야기에서 우리 현대에 살아가는 많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 생활, 습관, 일상들을 꾸준히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한다.

오늘이 무슨날인데 왜 그렇게 정해지고 되었을까? 혹은 지나가는 길에 보이는 민속이나 풍속을 보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일상이나 왜 이렇게 되었을까라고 말이다.

솔직히 그런 생각을 한두번 하는 것이 아니다. 가령 나같은 유형의 사람은 신화라는 매개체를 연극, 문학소설, 영화보다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으로 통해 접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신화라는 것에 가깝게 다가간 이유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그 신화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신화라는 거대한 인간의 유산으로 통해 과거의 인간을 보는 게 아니라 오늘날의 인간까지도 보게 된 것이다. 신화는 결정되어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끝없이 생기고 변화고 소멸하고 탄생하는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의 사실이란 점에서 상당히 매력적이다.

그런 매력을 나는 처음에 에디스 헤밀턴의 그리스로마신화로 접해보기 시작했다. 거기서 느끼는 신화의 이야기는 재미있으면서 뭔가 당시 인간의 사고까지도 느끼기게 충분했다. 하지만 그리스로마신화는 우리 한국인들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닌 그저 서구사회에서 시작된 이야기라는 것이 조금 내 자신에게 부족한 공간을 만들어 내었다.

그런데 우연히 접한 김익두 교수님의 한국신화는 이 신화라는 주제가 뭔가 낯설게 보이기 보다는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순간마저도 공감대를 형성하게 한 책이다. 건국신화와 무속신화에서 한국의 역사기록이나 혹은 당시 생활상, 그리고 인간 세계관까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제일 인상깊은 내용은 우리 민족은 무속신앙이 흐름이다. 그 무속신앙은 도교, 불교, 유교를 흡수하여 발전하고 최근에는 서구 크리스찬 문화까지 흡수할 수 있다. 우리는 무속신앙이라면 그저 미신이라고 하나 그 미신이 우리 일상생활에 미치는 생각을 한다면 정말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예전에 집에서 문중제사가 있어서 시골에 갔는데, 그때 내가 조상신에게 절을 하고 난뒤에 따로 토지신에게 제를 올린 것이 있었다. 그리고 고시례라고 이야기하면서 제삿밥 일부를 땅에 뿌리는데 이것이 예전 한국 고대국가에서 고씨성을 지닌 사람에 대한 감사함을 표현함 행위하는 점과 시골이나 공원에 지나가다 돌무더기가 많이 쌓여 있는데, 이것 역시 무속신앙의 하나였다는 점이다.

신화에서는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낸 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짐승과 식물, 심지어 상상속의 존재까지도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한다. 까마귀가 왜 아장아장 걸어다니는지 노루가 왜 꼬리가 짧은지도 말이다. 심지어 제주도 지형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도 나오니 신화라는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가지고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는 그것을 의식하든 혹은 하지 못하든 신화를 여전히 끊없이 흘러가는 물줄기와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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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철학의 역사 시공 아크로 총서 6
브라이언 매기 지음, 박은미 옮김 / 시공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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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우리 인간은 철학이 무엇인가? 하고 물어본다면 쉽사리 대답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이란 우리 인간의 사고와 관념, 그리고 여러가지 일들에 대해 매우 깊이있는 내용을 다루는 분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철학을 알고보면 그렇게 멀게만 혹은 어렵게만 볼 수 없는 것도 철학이다. 그 이유는 철학이란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얼마든지 고민하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사항이기 때문이다. 그 예로써 최근 어려운 군사정치외교사항같은 거대한 사건 속에서 우리는 국가정책이나 외국의 반응을 두고 이것에 대해 심도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혹은 이렇게 큰 일들이 아닌 작고 사소한 일들로도 철학을 음미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보편적인 부분으로서 인간의 가치와 사고, 그리고 이성과 감정을 얼마든지 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언제나 철학적인 사항에 맞이하여 살고 있으나 본인 자체가 철학이란 것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철학은 지혜를 사랑하는 일이기도 하다. 과연 지혜란 무엇일까? 우리 인간은 문명을 가지게 되면서 인간 혼자가 아닌 여러 인간이 모여 사회, 조직, 국가 등의 다양한 단체를 만들어 갔다. 그렇게 거대한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 그 자신마저도 깊이 생각하고 고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런 인간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고찰하여 지혜를 사랑한다는 그 철학은 언제 어디서 시작되어 오늘 현대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까지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 우리는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 철학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진행되었다는 것은 아마 상당히 길고 긴 시간을 보낸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길고 긴 시간을 단번에 이해하는 것은 솔직히 말해서 무리다. 시간이 누적된 만큼의 여러 철학들이 누적되어 왔기 때문이다.

많은 시간이 누적되어 처음 철학을 접하는 사람들은 철학에 대한 접근을 어떻게 해야할지 난감할 지도 모른다. 그 시간에 비해 뭔가 흐름을 잡아 낼 수 있는 방법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브라이언 매기 교수의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철학의 역사"는 철학을 접근하고 또 어떤 철학자가 있는지 알기에 매우 좋은 서적이다.

대부분 철학도서들은 모든 내용이 문자텍스트로 이루어진 반면, 이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철학의 역사"에서는 말 그대로 사진과 그림으로 나와 있어 어려운 철학을 접하는 사람에게 다소 접근하게 쉽게금 작성하였다.

사진과 그림으로 당시 그 시대적 상황이나 배경, 그리고 현재 상태를 알려줌으로 우리가 상상을 유도할 수 있게금 해준다.. 우선 이 도서는 서양의 철학자인 브라이언 매기 교수가 집필했으므로 근본적으로 서양중심 철학역사이다.

모든 서양철학의 시작점은 고대 그리스이다. 그리스의 위대한 3명의 철학자인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이전과 이후, 그리고 중세로 넘어가면서 교부철학의 토마스 아퀴나스, 중세로 넘어가면서 데카르트와 임마누엘 칸트, 근대로 넘어가면서 헤겔, 쇼펜하우어,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존 스튜어트 밀로 오고 현대로 오면서 아이슈타인, 슈뢰딩거, 메를리 퐁티와 같은 철학자가 나온다. 물론 여기에 언급한 철학자 아니더라도 수 많은 철학자들이 나오고 그 철학자들이 일꾸어낸 위대한 책과 이론들이 알기 쉽게금 정리되어 있다.

그러나 이 서적에서 약간 아쉬운 부분은 철학사 대부분이 고대, 중세, 근대 중심으로 되어 있어서 현대철학에 대한 분량이 조금 적어 보인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내가 철학을 접하게 된 동기는 현대철학자이다. 특히 프랑스 후기구조주의학자인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이론에 흥미가 생겨 이쪽에 발을 담구어 보았다.

물론 전체적으로 철학에 대한 이해능력이나 학습수준은 이제 걸음마에 불과한 단계다. 그러나 철학이란 것이 매우 고상해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매우 일상적이기도 하다. 오늘날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인간의 삶과 가치 그리고 이상과 이념들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한번 생각하기 전에 이 책을 보는 것으로 하여 그 실마리를 찾아 보는 것이 어떠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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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교양 교양인 시리즈 4
박석무 지음 / 한길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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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학교 동아리 활동을 녹차동아리에서 하였다. 이름은 지산다우회라고 작은 대학교 안에 있는 작은 찻잔이 있는 작은 동아리이었다. 그곳에서 대학교 3학년과 4학년을 보내며, 마지막 대학 청춘을 보낸 곳이다. 그러나 내가 대학교를 졸업 후에 군간부로 복무하던 중에 인원이 없어서 폐부된 것으로 인해 나의 마음을 심하게 아프게 한 추억이다.

일단 여기까지 나의 대학 추억담을 올려 놓으면서 저 위에 소개할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와 무슨 관계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 관계가 있다. 아주 깊고 깊은 관계가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내가 있던 녹차동아리에서 차의 인물로 꼭 등장시킨 역사적인 사람이 있었다. 18C 조선 후기 불교계의 거승이며 현학자인 아암 혜장 스님과 19C 한국 최고의 다인인 초의선사와 그의 친구인 추사 김정희 선생님, 그리고 이 3명의 다인에게 스승으로 존대받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하면 한국 정치, 철학, 사상, 문학, 의학 등 많고 많은 학문을 발전시킨 인물이다. 한국에는 이런 말을 들은 적도 있었다. 한국 철학사상의 마지막으로 나오고 그 집합되는 사람이 다산 정약용이라고, 물론 그 이전이나 그 이후에도 훌륭한 분들은 꾸준히 나왔다. 그러나 다산 정약용이란 인물이 한국 정치사상사에 끼친 영향은 매우 지대하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의 가렴주구로 병들어 가는 불쌍한 백성들에 향한 애정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베트남과 같은 다른 나라까지 가지 않았는가? 월남전이 발발할 때 베트콩의 지도자인 호치민은 다른 것을 다루 내버려 두어도 다산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만은 가지고 다녔다. 물론 월남전은 미국이 1964년 베트남 동쪽 통킹만에서 공작을 펼쳐 일어난 일이었으나 적어도 이 전쟁에서 승리로 이끈 호치민이 어떤 지도자였고 그 지도자가 그토록 중시하던 것이 무엇이냐에 대해 우리는 생각해 봂 필요가 있다.

그 호치민이 가슴 속에 품은 목민심서, 이 목민심서의 위대함은 그저 단순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목민심서를 만든 다산 정약용은 조선 후기 영조시절에 양반가문에서 태어나 얼마든지 권력을 누리고 편하게 살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은 열렬한 충신이었기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는 다산 정약용의 일대기와 그의 인생에 대해 고찰한 서적으로 다산 정약용이란 인물이 얼마나 자신보다 약한 백성들을 사랑하는지 얼마나 그 시대의 비틀림에 통곡했는지 얼마나 그 분이 어긋난 권력 앞에서 시련을 당했는지 우리는 절실하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으로 유배가는데, 어느 농민이 관에다가 세금(군포세)을 제때 납부하지 않아 집에 하나뿐인 재산인 소를 강제로 빼앗겼다. 그리고 그 농민은 자신이 가난하고 힘이 없다는 분노와 자신이 후사를 낳아 이런 부당한 일에 당한 것에 자괴하여 낫으로 자신의 남근을 베어버렸다.

그 농민이 자신의 신체를 날카로운 낫으로 베어 방안에서 시름하고 있을 때 밖에서 남편의 신음소리를 들은 아낙네는 방에 급히 들어오 보니 자신의 남편이 고통스러워 하는 장면을 보았다. 그리고 그 아낙네는 자신의 남편이 베어버린 남근을 손에 잡고 그 피가 줄줄 흐르는 슬픈 남편의 남근을 잡고 관아에 달려가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관아에 가서 호소만 하면 무엇하리, 관아에 퍼져 나가는 젊은 아낙네의 울음 소리는 동네방네를 돌아가나 높은 담으로 쌓인 관아에는 콧털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낙네는 남편의 남근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며 서럽게 울며 돌아갔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애절양"이라는 한국 국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의 탄생배경이다.

최근 75만원 용역에 300~400원 식사비를 제공받는 용역하시는 할머니와 아주머니의 슬픈 기사를 보았다. 물론 내가 보고도 직접 도와주지 못하는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면 내 자신도 그런 위선자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힘겹게 일을 하고 대우조차 받지 못한채 일자리에서 내몰리는 것을 본다면 위에서 보는 애절양과 무엇과 다르랴?

그런데도 세상은 그분들을 딱하게 여기지 못할 망정 그들에게 야유와 멸시를 보내는 이마져 있으니 참으로 슬프고도 원통하고도 분노가 넘치는 일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 그는 분명히 한 시대를 풍미하고 그 심한 박해속에서도 자신의 의지를 굴하지 않은 불멸의 인간이다. 하지만 그분의 위대하고도 아름다운 정신은 여전히 되찾지 못한채 이렇게 허무하게 지나가니 비극이 아닐 수가 없다.

이 책에서 나온 어느 시조를 인용하여 각박한 세상이 단군시대보다 못한 것 같으니 정말 답답하기 짝이 없다. 그런다고 다산 정약용 선생이 원한 세상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그저 조금 조금씩 바꾸어 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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