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마인드 - 내 안의 한계를 넘어서는 인생 전략
마이클 하얏트.메건 하얏트 밀러 지음, 임윤진 옮김 / 다산북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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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초마인드 ( MIND YOUR MINDSET)

마이클 하얏트. 매건 하얏트 밀러 지음/임유진 옮김

안의 한계를 넘어서는 인생 전략

 

한계를 넘어선다. 거창하다.

그래서 제목으로 (: 뛰어넘을 ) 마인드(MIND: 정신/마음) 앞에 넣은것 같다.

책의 겉표지는 얼룩말이 주황색 열린문을 통과 하면서 표효하는 사자로 변한다.

니체는 사람의 정신 성장의 단계를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어린아이로 비유했었다.

낙타는 수동적인 인간의 상징이고, 사자는 삶을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사는 상징으로 비유했고, 나아가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아마도 책이 전하고자 하는 의미도 초식 동물인 얼룩말에서 백수의 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메세지를 전달하고 싶었나 보다.

제목과 표지 그림을 가지고 얼토당토 않은 확대해석을 하며 이야기를 만든가 싶겠지만 이책<초마인드> 바로 이런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경험과 기억, 지식을 사용하여 맥락을 연결 시키려는 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이 그렇게 주의를 줬지만 결국엔 선악과를 따먹고야 만다. 선악과를 먹고 나서 최초의 인간은 하나님의 세상에서 분리되기 시작 했다.

아담을 찾는 하나님, '어디 있느냐?'는 물음에 아담은 ' 여기 있습니다'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끄러워 숨어 있다' 답한다.

이때 부터 하나님의 질문에 대해 최초의 인간 아담은 갖은 이유를 대기 시작한다. 

이브가 뱀에 꾀임을 당해 선악과를 먹었다는 이야기와 자기도 이브가 줘서 먹게 되었다는 변명같은 이유를 줄줄이 말했다.

 창세기를 통해 알수 있는 점은 아담은 어떤 사실에 대한 설명보다 '?' 라는 해명을 우선시 다는 것이다.

인간의 구조에 대하여 우리 인간이란 원래 부터 해명을 하도록 창조 되어져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해명은 우리의 본능 이다.

해명을 하는 이유는 우리의 뇌속에 이야기를 만드는 '내레이터'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 머리속의 내레이터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생성하는데 이야기는 우리의 경험과 기억등을 연결해서 맥락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뇌속의 내레이터는 우리의 기억과 경험을 연결시켜 추측을 하는데 본능적으로 우리는 불확실한것들 혹은 위험으로 부터 또는 불편함으로 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여기서 인간이 사용하는 추측은 직관일 때도 있고 이성을 통한 분석을 사용한 예측일 수도 있다.

직관과 이성은 서로 다른듯 하지만 결국은 우리의 생존과 보호를 한다는 면에서는 둘은 연결이 하다.

 

결국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를 못한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은 나의 경험과 기억, 타인으로 부터 전해들은 정보를  종합해서 하나의 가설과 추측을 만들어 낸 것으로 마지막에 자신이 판단하는 의견에 불과 한것이다.

이러한 의견은 경험치를 쌓게 하고 이런 경험치는 부정적인 인식을 만들며 뇌속의 내레이터는 이야기를 부정적인 암시로 채워 우리에게 들려 준다는 것이다.

 

똑같은 환경일지라도 사람마다 경험을 통한 느낌과 감각은 다르다.

어떠한 사실에 대해 각자의 경험이 사실이라고 말할 지라도 결국 그것은 사실에 대한 의견이거나 가정 혹은 가설, 혹은 이야기를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가 말하는 초마인드는 뇌속의 내레이터의 말을 귀담아 듣자는 주장을 하자는것은 아닌것 같다.

작가는 우리가 당면하는 모든 문제들, 삶에서 겪는 불편함들, 그러한 문제에 대한 뇌속의 내레이터에 이끌려 문제를 회피하거나 해결에 대해 포기 하지 말라고 한다.

작가는 부정적인 인식을 만드는 내레이터를 이용하여 우리가 맞딱드린 크고 작은 문제를 해결 수있다고 말한다.

그러한 방법으로 니체가 인간 성장의 단계를 3가지 단계 과정으로 제시 하였듯 우리가 당면한 모든 문제 해결 대하여 이책에서도 3가지 단계를 제시 하고 있다.

문제를 인식하기, 문제에 대해 질문하기, 문제를 재설계 하기.

 

첫번째 단계는 뇌속의 부정적 내레이터를 통해 문제를 인지한 , 문제에 대하여 부정과 회피를 하기 보다 정확하게 바라보는 인식을 한다.

두번째 단계에서는 인식된 문제를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있을지 질문을 한다.

질문에 대한 답은 조건이나 제한을 두지 말고 뇌속의 연결 고리를 이용하라고 한다.

어린 아이같은 천진난만한 의식으로 기존의 관념에 얽매이지 말고 질문하라고 조언한다.

세번째 단계는 마지막으로 뇌속의 뉴런 신경망을 새로 설치한다는 의미로 부정적인 한계와 의식을 확장하여 문제를 아예 새롭게 다시 인식하여 이야기를 새로 쓰자는 것이다.

부정적인 내레이터의 목소리를 3가지 단계를 거쳐 긍정의 목소리로 바꾸어 머리속의 다이몬들이 문제 해결을 있도록 의식과 무의식 모두를 활성화 시킨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초마인드라고 작가는 주장한다.

 

책의 공동 저자 마이클 하얏트(아버지), 매건 하얏트 밀러() 자신들이 제시한 초마인드 단계를 통해 자신들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과정을 책속에 담아냈다.

 

그들이 예시로 문제점은 아버지 마이클은 회의시간에 자신의 리더쉽이 부족 했다는 지적을 받았다거나, 매건은 대중 연설에 대한 공포심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내가 때는 그들의 문제를 가지고 초마인드 단계로 설명하는데는 임팩트가 부족하지 않나 싶다.

 

거창한 제목과는 달리 예시로 내세운 자신들의 경험이 작게 느껴져 좀 더 경험의 폭이 넓은 예시 었었다면 을까 싶었다.

오히려 17 암벽 등반가 ' ' 등산 사고로 양다리를 절단한 불행을 극복하고 더욱 각성하여  다시 재기한 일화가 초마인드라는 주제를 설명하는데 공감이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최근까지 연구된 과학을 기반으로 내레이터를 재설정 있다는 주장, 창의성이란 '무에서 유를 만드는것' 아니라 기존의 경험과 기억의 연결 고리를 이어서 새롭게 의미를 만들어 내는데서 나온다는 주장등 책에는 곱씹어 만한 내용들이 많다.

 

' 없다. 된다. 망했다'   마음속의 내레이터의 부정적인 속삭임으로 비롯된 이야기에서 벗어나서 재입력하여 ' 있다. 것이다. 성공 한다' 인생 이야기로 다시 새롭게 쓰고자 한다면  이책은 일독 만하다.

 

내레이터는 다른게 아니다. 생각을 말한다.

부정적인 생각도 '' 에게서 나왔고 긍정적인 생각도 ' ' 에서 나왔다.

(): 뛰어넘는다는 것은 기존의 고정된 관념을 벗어나라는 뜻이다.

결국  한계는 내가 만든것이고 한계를 넘어서는 것도 내가 하는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것은 용기 뿐이다.

초마인드는 한마음 이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기 전에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 P27

과거의 기억이란 사실의 기억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당신의 상상에서 비롯된 기억이다. - P77

사회성이 떨어진다는 것은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 P103

제가 다리를 잃은 것이지 생각이나 정신을 잃은것이 아니잖아요. - P107

우리의 목표는 우리가 더 나은, 그리고 더 힘이 나는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 P108

이야기를 새로이 만들어낼 때 핵심은 꾸준함이다.계속 실험하고 반복하면서 획득한 피드백을 활용해 시고를 좀 더 정교하게 만들자....중략...
실험적 마음가짐은 증명하려는 욕구가 아니라 발견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된다. - P217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과학은 원래 주관적이다.....중략..... 과학의 개인적인 부분은 주관적이라 할 수 있지만 대중과 접촉해야 하는 외적 부분은 개관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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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경계 - 나는 누구인가에 관한 동서고금의 통합적 접근
켄 윌버 지음, 김철수 옮김 / 정신세계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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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무경계 ( No Boundary)

켄 윌버 지음/김철수 옮김

 

 

 

그리스 델포이 신전 기둥 벽에 세겨졌다는 글귀이자 아테네 거리에서 소크라테스가 진리를 구하는 당시의 그리스 청년들에게 툭툭 던졌다는 말, '너 자신을 알라' .

이때 '너 자신을 알라' 고 전해 들은 대화 상대는 문득 자신을 돌아보았을 것이다 .

그리고는 '나' 라고 하는 존재에 대한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 '나는 과연 무엇일까?'

 

우리나라 선불교의 화두중에 가장 대표 되는 공안, '이 뭐꼬?' 가 있다.

한자나 중국어로는 '시심마(是什么 쓰션머)' 즉 '이것은 무엇인가?' 라는 뜻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라는 화두가 선방에 계시는 경상도 스님들의 사투리로 '이 뭐꼬' 로 굳어져 버렸다.

지금 현재, 여기에서 보고 듣고 말하고 있는 이것은 무슨 작용인가?

무엇이 있어 나를 이끌고 다니는가?  무엇이 나를 이끄는가? 이게 과연 무엇인가?

이는 곧 '나는 누구인가?' 로 자연스레 연결된다.

 

존재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인 '나는 누구인가?' 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의 영원한 화두이자 풀어야 할 숙제 처럼 느껴진다.

인류가 생겨난 이후 수 많은 철학적 논쟁과 종교와 영적인 차원, 그리고 오늘날 과학에 이르기 까지 '나' 란 존재에 대한 명확한 해답은 선뜻 내놓기가 어렵다.

어쩌면 지구상의 인간이 80억명이라면 80억개의 답을 가지고 있기 때문 일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주관적이기도 해서 만약에 보편적이고 타당한 대답을 원한다면 우리의 철학, 종교, 과학은 아마도 서로 일치된 견해를 내놓기가 어려워 보인다.

 

철학은 나에 대하여 존재와 실존을 연결하여 설명 할 것이고, 종교는 나와 신성을 연결해서 설명 할 것이고, 과학은 생명의 기원과 유전자를 연결해서 설명할 것이다.

 

 

 

이 책 <무경계> 에서 켄 윌버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명제에 대한 동서양 철학, 심리학, 종교와 영성에 까지 이르는 광대한 분야를 하나로 귀결시키는 통합을 시도한다.

 

그는 인간의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의식의 영역과 그에 상응하는 심리학의 각 분야를 스펙트럼화 시켜 명제에 대한 답을 자신만의 통찰으로 내보이는 작업을 한 것이다.

 

먼저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모든 답은 정확히 '나인 것(self)'과 '내가 아닌 것(not-self)' 사이에 경계선(Boundary)을 긋는 기본적인 절차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나/ 나 아님' 의 경계는 '나의 피부 경계선' 으로 나누어 진다고 한다.

이런 표현은 생소하지만 '나'는 내 피부 경계선 안에 해당되는것이고 '나 아님'은 내 피부 밖이라는 표현은 참신하다.

또한 경계는 선()을 의미하고 선은 구분과 분별을 뜻하며 이는 확장시키면 곧 전선(戰線) 과도 같아 경계는 '나/ 나아님' 의 투쟁의 상징을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란 정체성은 내가 어디에 그 경계선을 긋느냐에 따라 달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정체성은 하나가 아니며 수준에 따라 각기 다른 유형으로 나뉘어진다.

그게 바로 정신 의식의 스펙트럼이자 이 책의 핵심을 관통하는 내용이다.

나/ 나 아님에서 출발한 의식은 '에고' 또는 '자아상'을 정체성으로 하는 페르소나와 그림자로 나뉘게 된다.

페르소나는 가면이란 뜻의 '외부로 드러난 인격'을 말한다.  '나' 가 페르소나의 일부를 자신과 동일시 하면 나머지 '나가 아님' 은 그림자로 나뉘게 된다.

 

작가는 이러한 수준을 페르소나 수준이라 정했는데 페르소나 수준에서는 나 아님을 상징하는 그림자는 페르소나와 대립이 되는 관계로 나와 저항을 하며 경계를 긋는다는 것이다.  즉 저항은 경계를 상징한다.

 

이러한 저항은 페르소나, 자아수준, 켄타우로스 수준 까지 이어지는데 그림자, 몸, 환경 ,초개아 순으로 계속 존재하며 각각의 다른 수준에서 저항을 수용 하게 되면 경계는 무너지고, 즉 저항이었던 경계가 없어지면 계속해서 의식의 스펙트럼은 확장을 하게 된다.

작가가 고안한 의식의 스펙트럼 도표를 보면 보다 쉽게 이해가 되는데 결국 작가는 인간의 의식 수준마다 각기 다른 경계가 있고 이는 곧 저항을 뜻하며 이러한 경계가 결국은 없어지게 될 때 의식은 확장한다는 것이 요지가 된다.

 

 

 

 

도표를 보면 위에서 출발하여 아래로 향하는 하향으로 표시를 했는데 이는 각 수준 의식의 대립이 무너질 수록 작가는 더 깊어지는 것이라 본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의식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오히려 점점 내려 가는 하향으로 표시를 한 것 같다.

 

켄 윌버는 이러한 경계를 실제하는 것으로 받아 들였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것이라 봤다.

선과 악, 성공과 실패, 삶과 죽음, 쾌락과 고통, 가치와 상실, 자기와 타인, 사랑과 증오, 낮과 밤에 이르기 까지 모든 한쌍의 대극은 긍정과 부정으로 나뉘게 되는데 부정적인 면을 근절 시켜야만 행복해질 거라는 믿음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결코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떠한 물건을 사고 파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건에 대한 양극을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모든 대극은 암묵적인 동일성을 공유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양극은 결코 분리할 수 없으며 상호 의존적이 되는 것이며 결국 이런 경계는 사실은 없다는것, 결국 선불교적 표현으로는 둘이 아니라는 것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주체와 객체, 시간과 공간 또한 서로 잘 짜여진 통합체 이자 하나의 연속체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물리학의 실제에 대한 대극의 일치와도 상통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켄 윌버는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경계는 결국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것이다.

결국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의식의 스펙트럼의 수준에 따라 답은 수준별로 다르게 답할수 있으며 그 수준이 깊어짐에 따라 결국은 '합일의식' 이라는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이는 철학적이며 영적인 수준에서 접하게 되는 현자들의 모순 처럼 보이는 수많은 답들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다.

하지만 이는 곧 수준별에 따른 답이 되므로 그런 모순되어 보이는 답들이 사실은 틀리지 않다는 작가의 의견에 공감을 할 수있게 된다.

 

우리는 시간의 존재를 넘어 오직 '스쳐가는 현재( 눙크 플루엔스)' 에서 '영원한 현재( 눙크 스탄스)' 로 확장되는 순간이 될 때 결국엔 합일의식의 본질, 무경계에 도달하며 여기에서 진정한 나를 만나게 되리라 내다봤다.

 

이러한 작가의 통찰은 작가가 불과 23세(1977년)때 발표한< 의식의 스펙트럼> 이라는 책을 통해 이루어 졌는데 약관의 나이에 동서양을 넘나들며 학술적으로 자신만의 통합적 사상을 전개 했다는데 놀라운 면이 있다.

 

켄 윌버, 나에게는 생소한 이름의 영성 철학가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인류 의식의 발달과 진화에 대한 통합이론의 사상가 였다.

책에는 작가의 사상을 형성한 수많은 심리학과 의학, 정신 계발 서적들에 대한 추천이 있다. 

그런데 추천한 책들은 60~70년대 책들이라 이미 절판 되었거나 아마도 현대 심리학과 의학의 발전, 정신 분야의 진화에 따라 시대 흐름에 맞지 않는 부분도 분명 존재 하리라 본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작가가 책에서의 내세운 내용이  50년이란 반세기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지금까지도 수정된게 없을 정도라니 놀라울 따름이다.

켄 윌버는 그 당시 이미 세상과 인류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이 있었던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냉정한 시각으로 본다면 작가의 동서양을 아우르는 학술적인 통합적 통찰은 경탄을 하지만 깨달음에 대한 부분은 본인의 체험이 아닌 알음알이로 깨달음을 이론화 시킨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떠오른다.

 

물론 깨달음은 각자의 영역이다.

켄 윌버의 의식의 스펙트럼 처럼 깨달음의 영역도 분명 스펙트럼 처럼 존재하리라 생각된다.

아마도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언급하면 '십지보살'이니 '여래지' 를 언급하면서 단계별, 수준별로  깨달음을 철저하게 분류를 하고 있다.

아직은 그의 사상에 대한 다른 책을 읽어 보지 못했지만 이미 확보한 <통합불교>, <모든 것의 역사>를 계속해서 좀 더 읽어 본후 판단해야 겠다.

 

다만 그가 지금으로 부터 반세기전에 70년대에 이런 사상을 내세운것은 분명 놀랄만한 업적인 것임에는 확실하다.

그래서 켄 윌보가70년대에 이 책을 쓴 배경에 대해 생각을 해봤다.

 

미국의 60년대 후반에서70년대는 그러한 의미에서는 독특한 시대인것 같다.

69년도 미국은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하며 인간의 작은 발자국을 남기지만 인류의 위대한 도약을 하게 되는 시기를 맞이한 시점이다.

하지만 이시기 미국은 베트남에서 명분도 없는 전쟁에 대한 당시 젊은이들의 반전의식과 정신적인 방황은 반항으로 이어져 히피즘 문화가 최고저에 이르렀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처럼 미국은 2차 대전이후 세계의 초강대국 반열에 들어섰고 전세계를 마음먹은대로 움직일수 있는 물질문명이 가장 발달한 국가 였었다.

그런데 반대 급부로 오히려 정신적으로는 공황을 맞이한 시기 이기도 했다.

히피즘의 자유와 반전사상은 70년대 넘어 오면서 약물의 남용및 사상은 급진 과격적 성향으로 변질이 되어 버리고 그에 따른 비판과 재제를 맞이 하게 되었다.

 

결국 이시기의 히피즘의 정신적인 방황은 동양적인 요가나 불교 사상에서 극복하고자 한 시도가 보이기 시작 했다.

즉 방황의 시기 동양의 사상은 서구 물질문명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바라봤다는 것이다.

때마침 영화계에는 '브루스 리(이소룡)'의 등장으로 서양인의 동양인과 문화에 대한 경계가 점차 옅어지는 시점의 출발이 된 게 아닐까 싶다.

 

또한 이시기 불교가 종교가 아닌 명상의 한 분야로 점차 확산되기 시작했다.

일본의 선불교는 60년대 부터 시작해서 샤쿠 소우엔('나스메 소세키' 의 선 스승) , 스즈키 다이세쓰(선을 일본식 발음 '젠Zen'이란 명칭을 사용) , 스즈키 순류('스티븐 잡스'의 선 스승) 로 이어지는 선사들이 미국에 알려 지면서 '젠(Zen)' 의 열풍을 이끌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때 이어진 일본의 젠불교는 하나의 문화로 미국내 대중적으로 자리 매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는 7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숭산 스님께서 도미(渡美)를 했는데 이때 일본의 젠불교는 우리나라 선()불교가 들어서는 교량 역할을 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무경게>에 소개된 선사상은 스즈키 순류의 <선심초심>을 많이 참조했다고 켄 윌버는 밝히고 있다.

(다만 참조한 일본 선불교가 전체 선불교를 대표 하는것 같아 개인적으로 좀 아쉬운 면이 있다. 아직 중생심이 남아 있으니 이것 조차 둘로 보는 것이라... )

 

결국 70년대 시기는 물질문명의 한계와 동양 정신문명의 대안의 전환기라 볼 수 있을듯 하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아래에서  켄 윌버의 사상을 이해하면  약간의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건 지극히 내 생각이다. (아무 하등의 관계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결론적으로 오늘날 현대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양극화 현상이라고 본다.

정치, 경제, 환경 분야등 모든면에서 양극화로 분열하고 나뉘고 있다.

하지만 통합이란 본질적인 열망도 양극화라는 틀 가운데 본래 함께 하고 있는듯 하다.

이미 수많은 학문의 경계도 무너지고, 계층 세대간의 벽도 무너지고, 수많은 고정 관념의 경계도 동시 다발적으로 무너지고 있다.

 

 

분열과 통합은 결국 둘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하나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다.

마치 바다의 파도처럼, 파도가 아무리 많이 쳐도 결국 바닷물에 불과 한것이다.

그 바탕은 한 바다 였다.

 

 

 

 

이책 <무경계>에서 제시한 통합이란 관점은 '나는 누구인가?' 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성찰과 함께 현대 사회의 양극화라는 문제점을 해결 할 수 있는 하나의 방안이 되지 않을까 싶다.

 

결국 둘이 아니다.

본래 경계는 없다.

No Boundary.

 

성장이란 기본적으로 자신의 지평(地坪)을 확대하고 확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 P45

창세기에 따르면, 아담에게 부여된 첫 번째 과제는 자연계에 속하는 동식물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었다...중략...
그는 다양한 동물 집단 사이에 마음속에서 ‘경계를 긋는‘ 일을 배워야만 했다....중략...
마음속에서 구분 짓고,도식화한 것은 바로 아담이었다. 아담은 최초의 위대한 지도 제작자였다. 아담이 경계를 그려냈다. - P49

경계란 본래 환상에 불과하다는 진실을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된다. - P66

당신이 가진 유일한 도구가 망치일 경우, 모든 것은 못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사실 당신은 실제로 경계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경계를 만들어 낼 뿐이다. - P86

‘초월적 나‘를 보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무슨 수를 써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당신의 눈은 자신의 눈 자체를 볼 수 있겠는가?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자신의 기억, 마음, 몸, 감정, 사고와의 잘못된 동일시를 끈기 있게 지속적으로 깨는 일뿐이다. - P228

본증묘수(本證妙修)는, 진정한 영적 수행이란 ‘깨달음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으로부터‘ 샘솟아 나오는 것임을 뜻한다.수행이 합일의식으로 이끌어주는 것이 아니라 수행은 처음부터 사실상 언제나 합일의식이다. -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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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송 대승기신론 낭송Q 시리즈
마명 지음, 김혜영 옮김, 고미숙 기획 / 북드라망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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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낭송 대승기신론

마명지음, 김혜영 풀어 읽음, 고미숙 기획 , 출판사 북드라망

 

중고등 역사시간에 무엇에 대한 답 인지는 모르겠지만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란 명칭이 몇십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왜 아직도 머리속에 남아 있는 것일까?

우리나라의 나라를 빛낸 위인들 하면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신라 시대 원효 스님.

해골물 마시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깨달았다는 일화 ,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와 요석공주와의 러브 스토리,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낳은 아들 설총 이야기등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전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원효 스님이 무슨 업적을 남긴건지는 대부분 모른다.

그냥 '원효는 대승기신론소를 남겼다'  는 역사 교과서의 한줄만 머리속 어딘가에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이책 <낭송 대승기신론>은 세월이 흘러도 머리속에 남아 있던  궁금증을 풀어줄 책이다.

대승기신론은 도대체 무슨 내용일까, 궁금했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를 지은이는 마명 이란 AD150 년 경에 살았던 시인이자 스님이라 한다.

원효대사가 지은게 아니었다.

원효스님은 마명 스님이 쓴 대승기신론에 소 ()를 붙였는데 이는 곧 대승기신론의 주석서이다.

그렇다면 책에 주석을 달아 놓는게 그게 무슨 대단한 업적이라고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것일까?

그런데 가만히 보면 사실 주석을 단다는게 지금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문제가 아닌것 같다.

조선 성리학에서는 공자의 유학 경전에 주석을 단 주자(朱子)를 거의 공자님 반열에 올려 놓지 않았던가? 그래서 주희의 주석에 대해 다른 해석을 용납하지 않았고 만에 하나 주자의 해석에 비판이라도 가하는 자는 바로 이단이나 사문난적(斯文亂賊: 학문을 어지럽히고 사회를 어지럽히는 도적)으로 취급하지 않았던가?

그만큼 예전시대에는 주석이란게 참으로 중요했었나 보다.

그렇다면 주석서를 달 정도의 원작은 분명 쉽게 이해 되지 않는 난해한 수준일 것이다.

아마도 주석서를 달 정도의 수준이 되려면 원작자의 사상을 완전히 이해한 상태에서  출발 해야 한다. 그 다음으로 원작을 처음 접한 독자나 이해가 안가는 독자를 이해 시키기 위해서는 다시 그 수준에 맞게끔 재해석 해내야 한다.

그러니 주석서를 단다는 것은 원작의 이해를 넘어선 경지에 들어서야 한다.

그렇다면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는 대승기신론의  어떠한 위치에 오른 주석서 일까?

이책은 마명의 대승기신론과 원효가 주석을 단 대승기신론소와 별기 일부를 함께 읽을 수 있게 되어있다.

대승(大乘)은 대승불교 소승불교를 나눌때 쓰는 그 '대승' 이다. 즉 큰수레라는 뜻을 가졌다. 마명은 대승은 곧 일체 중생으로 보았다. 일체 중생의 마음. 그 마음이 한마음(一心)이라는 것이다.

기신(起信)은 믿음을 일으킨다는 뜻이다. 혹은 믿음을 세운다. 논()은 논의 하다. 즉 조리 있게 따져서 말한다. 정도로 해석 할 수 있겠다.

즉 모두 합쳐 이해 하자면 '한마음을 믿는 마음을 일으키는 논' 이다.

마명은  대승, 즉 한마음은 두개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 진여는 우리 본성품을 말하고 생멸문은 나고 죽는 생사로 나타내어 지는 현상을 말한다.

즉 철학으로 따지면 본체와 객체로 나눌 수 있고, 본질과 현상으로 구분 할 수 있다.

진여문과 생멸문을 통해 한마음을 믿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설명한 책이 바로 대승기신론이 되는것이다.

쉽게 표현하면 '일심이문(一心二門)'  이 핵심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그다지 어렵지 않다.

뭐야? 대승기신론이 이렇게 쉬운것 이였어?

설마 이렇게 이해가 되는것을 원효스님이 다시 주석을 달았다면 이런 나의 이해가 틀린것일까? 뭔가 더 심오한 내용이 있는게 아닐까?

그렇다.  더 심오하다.

그런데 틀린것이면서 틀린게 아닌게 된다

진여문과 생멸문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여문과 생멸문이 둘이 아니고 그것이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처음 깨닫게 되는 시각(始覺), 확연히 깨달은 본각(本覺), 그리고 깨닫지 못한 불각(不覺)' 으로 나뉘어 지지만 사실 이 세가지 깨달음이 서로 의존하며 다르지 않다고 설하고 있다.

왜 그렇게 될까?

깨달음의 경지는 그 근본이 같기 때문에 가능한것이라 생각된다.

그렇지만 그 경지는 깨달음이라는 물 맛을 봐야 알 수 있다.

그래서 원효스님과 같이 유학길에 올랐던 의상(義湘) 조사의 법성계(法性界)에는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 즉 '깨친 지혜로 알 일일뿐 다른 경계로 알수 없네' 라고 하지 않았던가?

대승기신론의 둘이 아닌 경지에 대한 거듭되는 논의는 원효 스님이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은 경지, '일체 유심조' 사상, 즉 '모든것은 마음에서 일어난다' 는 근본 사상과 상통한 면이 있다.

그러니 원효스님은 자신이 깨달은 바가 마명 스님의 전하는 대승기신론의 논지와 서로 다르지 않음을 알고 그에 대한 주석서를 달아 놓게 된것이 아닐까 싶다.

원효 스님의 주석서 '대승기신론소' 는 후에 중국과 일본으로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중국 스님들이 인도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업적을 가지고 있다면 한국 스님은 그 번역을 토대로 다시 원래 인도 불경의 참뜻을 이해를 했다고 볼수 있다.

즉 붓다의 마음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선()이다.

다만 일본은 한국과 중국을 통해 그저 겨우 수입해서 자신들이 따라 하는 수준 정도 였다고 볼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일본을 비하하는것은 아니고 물론 이건 지극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불경은 부처님 말씀을 문자로 표현 한 것이고 그 문자 이전의 마음을 우리 조상 스님들이 알았다면 그건 깨우침을 통해서 알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부처님 열반이래 깨달음의 불빛이 꺼지지 않고 인도와 중국으로 전해지는 것을 전등(傳燈)이라고 표현 하는데 깨달음의 경지가 결국 우리나라 까지 전해져 온것은 참으로 희유한 일이 아닐수가 없다.

오직 깨친 눈밝은 사람만 알아 볼수 있는 경지.

마음과 마음으로 전하는 이심전심(以心傳心).

아직 그 경지는 나는 모른다.

하지만 그 모르는 나(불각) 가 바로 진여의 작용이고, 그 진여는 생멸과 다르지 않다고 대승기신론은 설하지 않는가?

그러니 무엇이 걱정인가?

오직 지켜 볼 뿐이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라고 선방(禪房) 스님들은 표현 하신다. 원래 공부는 목숨을 다해서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예전 선사들은 매달린 벼랑 끝에서 손을 놓는 마음으로, 잘 벼린 칼 끝에서 서있는 마음으로 공부를 했다고 한다.

'부처님 마음과 중생의 마음이 둘이 아니라고' 했듯이 바로 '내 자신이 바로 부처이고 그 것을 믿는 마음을 일으키는것' 그것 이야 말로 대승기신론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인 아닌가 싶다.

그래서 법성계에선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是變正覺: 처음 발심하는 마음이 바로 바른 깨침을 이룬 때이다)이라고 한것 아닐까?

그것이 바로 불각(不覺)이 시각(始覺)으로 변하고 다시 시각이 바로 본각(本覺), 즉 정각이 되는 경지인것이다.

이 세가지 깨달음이 결국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낭송하고 또 낭송해야 겠다.

마명 스님이 전하고자 하는 마음과 원효 스님의 간곡히 다시 전하는 마음이 내 마음속에 훈습(훈습: 연기에 스며 들듯 천천히 젖어 들게 되는 )이 되도록 ...

모두가 한마음 이다.

 

 

이 논은 간략한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붓다의 넓고 크고 깊은 가르침을 모두 담았다. 그런 까닭에 이 논을 지었다. - P26

불각 이라는 망상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름과 의미를 분별하여 참된 깨달음(眞覺)에 대해 말할 수 있다. - P45

만약 여러 불보살과 선지식 등 외부에서 그를 돕는 인연을 만나지 못하면, 스스로 번뇌를 끊고 열반에 드는것은 불가능하다. - P72

삼매에 들면 존재의 근본이 하나라는 것을 안다. 이것은 모든 붓다의 법신과 중생이 평등하여 둘이 아님을 아는 것이다. - P123

이 글을 쓰는 것은 중생이 의심을 없애고, 잘못된 집착을 버리고, 대승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일으켜서 붓다의 가르침이 끊어지지 않기를 바리기 때문입니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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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니, 자기사랑으로 가는 길
존 페인 지음, 최지원 옮김 / 나비랑북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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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옴니 (자기사랑으로 가는 길)

OMNI REVEALS

 

옴(om)은 우주의 소리라고 한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에서는 주인공 싯다르타 가 강가에서 명상을 하며 옴의 소리를 깨닫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천수경 속의 관세음보살의 여섯 글자로 된 진언 '옴마니반메훔' 도 옴을 부르고 있다.

옴 과 훔, 둘다 같은 소리라고 한다.

우리나라 토속 종교인 증산교의 주문(呪文) 태을주에는 '훔치 훔치' 로 시작 된다.

옴은 동양의 종교에서는 진언의 한 종류이며 명상이나 요가를 하는 사람들 에게는  '옴' 이란 소리는 낯설지가 않다.

 

이책 옴니는 그러한 옴과 같은 계열을 지닌듯 전형적인 뉴에이지 계열의 책이다.

영적 진화, 끌어 당김의 법칙, 붓다, 예수, 신, 사랑, 건강, 웰빙, 풍요, 창조가 이 책의 주요 키워드 이다.

 

이책은 보는 사람이 책의 내용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이냐 에 따라 쓰레기 같은 책이 될 수 있고, 영적 진화에 관한 안내서가 될 수 도 있을것 같다.

 

이책의 저자(존 L. 페인)는 있지만 일반적인 책의 저자와는 조금 다르다. 이 책은 채널링을 통해 메세지를 써내려 갔다고 여겨진다.

 

채널링이란 사람과 사람이 아닌 존재와 영적으로 소통하는것을 말하는데 작가는 펜만 움직일뿐 다른 비물질계의 개입으로 메세지를 적었다는 뜻이 되는것이다.

<신과 나눈 이야기> (저자: 닐 도날드 윌쉬) 가 그런류의 책이다.

 

즉 우리나라 사고 방식으로 말한다면 대나무 꽂은 집에 사는 사람이 무슨 보살님이나 무슨 장군님의 계시를 받아 쓴 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비유를 하면 너무 수준이 떨어지나? )

서양식으로 표현 한다면 이책은 '고차원적인 영적 존재와의 교감으로 써내려 간 메세지 글이다.' 라고 할 수도 있겠다.

 

어쨓든 동양이든 서양이든 '인간'과는 다르게 존재하는 고차원 적인 영적인 존재가 있다는 점은 수긍이 가는 면이 있다.

그게 신일수도 있고, 외계인일 수도 있고, 또 우리 인간중에서 수행으로 차원이 높아진 수행자일 수도 있고...  책에서는 돌고래와 고래를 언급 한다.

인간과 돌고래의 의사소통은 우리의 세계관에 변화를 끼칠 만큼 큰 전환이 된다고 한다.

여기서 의사소통은 단순히 동물원 돌고래 쇼에서 볼 수 있는 조련사와 돌고래 사이의 그런 의사소통 수준은 아닐것이다.

고래라는 종과 인간의 종은 같은 종이고 고래 종의 역사가 인류의 진화와 발전 과정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인류의 기원과 다른 동물종과의 관계 까지 알수 있다는 것이다.

 

책의 전체 구성은 '옴니' 라는 존재가 '당신', 즉  읽고 있는 독자에게 해당하는 '나' 에게 보내는 우주 법칙, 창조, 기도, 풍요, 인류, 환생, 종교, 외계 문명, 죽음, 명상 등의 주제에 대한 메세지들로 구성 되어있다.

 

책에서 화자 '옴니'는 물질계의 형상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한다.

옴니는 다차원적 존재이며 하나가 아닌 343명으로 이루어진 그룹의식인데 하나의 존재 처럼 나타낼 수 있다고 한다.

만약 우리 인간중에 영적인 기운이 열려 옴니를 볼수 있다면 옴니는 '흰색 가운을 입었으며 이마와 가슴에서 빛이 나오는 3미터 크기의 잘생긴 존재' 라고 설명 한 부분이 나오는데 , 솔직히 책의 대중성을 위해서는 이 부분은  차라리 빼는게 나을 뻔 한 게 아닌가 싶다.

어느 누가 3미터 크기의 잘생긴 다차원적인 존재를 믿을 수 있겠는가?

이 부분 빼고 나머지 내용은 다 괜찮다.

 

그건 다름 아닌 주제에 대한 메세지 내용들 때문이다.

 

옴니는 '당신' 이란 표현으로 읽는 독자를 지칭하면서 자신의 메세지를 설파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작가 혹은 타인의 질문에 대한 옴니의 답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시종 일관 주장하는 핵심은 명확하다.

 

우리는 자신이 신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 세상을 통해 경험을 한다.

우리는 지구행성에서 자신이 곧 신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기 위해 수없는 윤회를 하며 경험을 통해 창조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자신이 설정한 게임을 지구 행성에서 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모든 현실의 상황은 붓다나 그리스도의 삶을 깨닫기 위한 과정 과도 같은것이며 이것은 우리 자신이 선택 했다는 것이다.

 

그 선택을 위해 우리는 사랑을 해야 하고, 이때의 사랑은 우리가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사랑보다 더 깊다.

 

수용이라고 표현 했는데 이 사랑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한다. 자신에 대한 수용을 통해 사랑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까지 확장하여 모든 생명과 결국 나는 하나 이다 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 의식이고 더 나아가 붓다 의식은 이 모든 하나가 곧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이것을 통해 곧 신을 알게 되는 의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생겨난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은 사랑이라는 것이다.

현실의 모든 문제는 결핍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결핍을 해결 하기 위해 우리는 욕망을 꿈꾸지만 그런것은 망상에 불과 하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 풍요, 건강과 웰빙, 창조를 통해 그리스도와 붓다 의식으로 나갈수 있다고 전한다.

 

더구나 사랑의 법칙과 더불어 끌어당김의 법칙을 설명하는데 가만히 보면 시중에 나오는 거의 모든 자기 계발서에는 끌어 당김의 법칙으로 부를 이루고 성공하는 면만을 이용하고 있다.

얼마전에 읽은 '더 마인드' 의 책이나 '역행자' 같은 책에도 끌어 당김의 법칙이 등장하고 그외 성공과 부자가 되는 그런류의 모든 자기 계발서에는 끌어 당김의 법칙이 최고의 무슨 비법 처럼 말 하고 있다.

 

 

 

'원하는것을 생각을 하면 그게 다 곧 나한테 온다' 라는 과장된 설명을 하는데 그건 엄밀히 말하면 '자신의 소망이 현실을 창조 한다' 는 면에서는 사기는 아니지만 일부 작가나 유튜버들은 그걸 이용하여 순진한 사람들 상대로 돈벌이를 하는것은 사실인것 같다. 

그게 다 끌어당김 법칙을 미끼로 사용하여 성공에 목말라 하거나 돈이 필요한 결핍을 느끼는 사람의 호주머니를 터는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런데 끌어 당김의 법칙은 별다른게 아니다. 그냥 유유상종을 말하는 것이다.

대행 큰스님 께서도 금은 금끼리, 은은 은끼리 같은것 끼리 모이는게 세상 이치라고 하지 않으셨던가?

이책에서 전하는 메세지는 어렵지 않다. 그뜻도 어렵지 않다.

 

일부 내용은 다소 횡당무계 하지만 그건 보는 사람마다 차원이 다 틀리니까  달리 이해 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결국 우리 인류가 통합의 의식으로 확장하고 있다는 옴니의 메세지에는 적극 공감한다.

또한 인간은 신의 손가락을 가졌으며 비물리적인 면과 물리적인 면을 동시에 가진 존재라는 면도 공감한다.

우리가 가진 마음. 이 마음은 비물질적이지만 이것을 통해 물질화 시킬수 있는 것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즉 공은 여기서는 에너지가 되는 것이다. 색은 물질을 말한다.

우주는 진동이고 이 진동에 맞추어 우리의 영적 의식을 확장하고 이 생의 삶을 게임을 하듯이 경험하라는 조언.

그리고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나 붓다 의식을 가진 차원의 존재를 스스로 자각하게 되리라는 옴니의 메세지는 2600년 부처님께서 법화경에서 설하신 내용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결국 모두 부처를 이룰것이다.

 

이 책을 읽는 시기에 아들 처럼 아끼고 키웠던 조그만 앵무새 '사랑이' 가 몸을 벗었다.

그때 사랑이가 떠난후 몇일은 슬픔에 빠지며 몇가지 깨달은게 있다.

생명은 크고 작던 다 신비 하다. 그리고 소중하다.

그 자그마한 생명이 살아 있을때는 활발하며 날아다니던 존재가 생명의 빛을 잃으니 순식간에 생기가 없어졌다.

생명의 빛은 한순간에 밝아지고 또 생명의 빛은 한순간에 사라질수도 있는 것이었다.

허무했지만 생멸은 결국 하나이다.

이렇게 사랑이는 떠나면서 작은 깨달음을 전해주고 갔다.

 

옴니가 전하는 메세지 처럼 우리 모두는 연결 되어 있다.

우리는 하나다.

금강경의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모든 형상 있는것은 모두가 허망하니 모든형상을 본래 형상이 아닌 것을 알면 여래의 형상을 보게 된다)' 의 구절이 있다.

옴니가 상이 없은 존재이니 그가 전하는 메세지도 무상하며 또한 그 상없는 상을 통해 우리는 다시 자기 안의 불성을 볼 수 있으리라.

 

 

 

 

당신은 세상의 한 부분에서 당신이 하는 일이 세상의 다른 모든 부분들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경험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 P28

이것은 우주의 게임입니다. 당신은 사랑으로 돌아가는, 사랑하는 집으로 가는 많은 다른 길들을 경험하기로 결심했습니다. - P49

모든 판단은 자신에 대한 사랑이 부족한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판단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나 상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 P78

쓸데없는 대화란 결코 없다. 쓸데없는 생각이란 것도 없다. 모든 생각은 살아 숨쉬며 창조한다.

진정한 힘은 당신이 신의 사랑을 받을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신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아는데서 나온다. 당신이 곧 신이다.
- P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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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양록, 조선 선비 왜국 포로가 되다 - 기행문 겨레고전문학선집 15
강항 지음, 김찬순 옮김 / 보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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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간양록, 조선 선비 왜국 포로가 되다.

강항 씀, 김찬순 옮김

 

<선조 정유년(1597) 2월 형조좌랑의 신분으로 나는 전라도 영광에서 부모님과 휴가중이었다... 5월 17일 명()의 부총병 양원은 남원으로 군사 3천을 이끌고 내려왔고 나는 군량을 공급 관리하며 운반을 감독하는 종사관으로 배치되었다.

7월그믐 원균은 한산도를 지키지 못하며 패했고 남원을 향한 왜군의 창끝에 양원은 도망치고 끝내 남원성은 무너져 버렸다... 9월 14일 적은 이미 영광을 불지르고 산과 바다를 샅샅이 뒤져 사람들을 마구 찔러 죽였다...  나는 식솔들을 이끌고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9월 20일 나는 새로 임명된 통제사 이순신있는 우수영으로 가기로 했다. 두배에  장정이 모두 마흔이나 되니 통제사를 따라가서 나라를 위해 싸우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사공의 잘못으로 인해 내가 탄배와 아버지가 탄배가 떨어지는 바람에 아버지를 찾으러 섬을 돌아다니다가 느닷없이 왜선에 잡히고야 만다....>본문 서두 부분 요약.

 

 

 

내가 중국에서 20여년 생활하면서 가장 아쉬운점 하나를 꼽으라면 보고 싶은 한국 영화를 영화관에서 볼수 없다는 점이다.

이번달 매체를 통해 접하게 된 이순신 장군의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는 너무 너무 보고 싶은데, 그럴수 없다는게 참으로 아쉽다.

 

 

 

비오듯이 쏟아지는 총탄과 화살 세례, 바다와 하늘을 흔드는 불 뿜는 총통의 포에서 나오는 연기들, 그 가운데 끊이질 않는 우리 병사와 왜놈 들의 고함소리 속에서 나는 다리를 움켜 잡고 있다. 화살이 허벅지를 관통했다. 누가 쏜 화살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시 일어나 싸워야 한다. 온몸은 땀과 피로 범벅이 되었고 지옥같은 전쟁의 한복판에 내가 누워있다. 고통스럽다.

그순간 눈이 떠졌다. 꿈이었다.

내가 어릴때 꾸었던 꿈 내용이다. 이 꿈을 깨고나선 악몽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에 조선왕조 500년 임진왜란 드라마에서는  ()김무생 배우가 이순신 장군을 열연 하였었다. 아마도 그 날 전쟁장면을 보고 꿈을 꿨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임진왜란으로 생각되는 전쟁 장면이 나의 기억속에 꿈으로 저장되어 있다.

그런데 점차 나이를 먹으면서  혹시 그 꿈이 내 전생이 아니였을까 하는 망상이 가끔 든다.

혹은 어쩌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나라 전체가 집단 무의식으로 임진왜란 같은 큰 전쟁의 역사들을 잠재의식에 깊이 각인 되어 진게 아닐까 ?

결국 영화의 영향으로 다시금 이 책 간양록을 꺼내어 읽었다.

 

 

임진왜란, 그 당시의 역사에 대해서는 학교에서 배운 역사나 매체, 각종 책을 통한 내용은 풍부하다. 하지만 그 당시 끌려간 포로에 대한 내용은 그다지 많이 다루지 않는것 같다.

'도자기 전쟁' 이란 이름으로 우리나라의 수많은 도공(陶工)들을 일본으로 끌고 갔다는 내용의 다큐는 있었던 것 같다.

 

 

이 책 <간양록>은 임란시기, 정확하게는 정유재란때 '강항'(姜沆:호는 수은1567~1618) 이란 선비가 포로가 되어 일본에서 몸소 겪은 일은 '나'의 시점으로 보고 듣고 느낀것을 남긴 글이다. 굳이 분류를 한다면 기행문이라고 할 수있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기행문은 아니다. 책에는 전쟁의 참상과 포로 생활의 고초, 일본에 대한 증오, 특히 전쟁의 원흉인 풍신수길에 대한 저주와 조선 선비로서의 충절, 임금에게 전하는 간곡한 상소문 까지  모두 담겨져 있다.

 

포로로 잡혔으나 관원이란 이유만으로 강항은 죽음을 면했지만 포로로 수송되는 과정에서 죽어가는 가족들을 보며 비분강개(悲憤慷慨)하는 마음과 일본에서 감시를 받는 가운데 목숨을 건 탈출 시도와 실패,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남은 일, 뇌물을 주고 중국 사신을 만나는 장면, 몰래 수집한 일본에 대한 정보를 은밀하게 조선의 임금에게 까지 전달되는 장면등 긴장감 있는 첩보 영화 한편을 보는 기분이 든다.

 

 

특히 강항은 풍신수길을 향해서 격분에 찬 글을 쓴 후 그것을 성문에 붙히는 장면에서는 우리가 익히 아는 조선선비의 선비정신 기개를 느낄수 있었다.

<...중략...너희는 제 땅이 있으면서도 남의 나라를 침범하고 남김 없이 죽여 없애려 하니 해와 달이 어찌 너희 아침을 받으며 석가가 어찌 너희 불의를 용서하랴!....지금 동방을 맏은 부처를 보내어 글로 너희 군신에게 이르노니 너희 군신이 아직까지 깨닫지 못했다면 나는 큰재앙을 너희 나라에 내릴것이다.... 나는 두말을 아니한다. 너희는 후회함이 없을지어다....중략..>

강항은 이 글을 쓴후 풍신수길이 6월 초부터 병에 누워 죽었으니 이 말에 효험이 있다고 생각했다.

 

 

강항의 포로 생활중 가장 큰 운명적인 사건은 순수좌(舜首座: 후에 개명하여 '후지와라 세이카')와의 만남이다.

후에 후지와라 세이카는 강항에게서 유학을 배운후 도쿠가와 막부의 스승이 된다. 

나는 이장면을 떠올리면 묘한 아이러니를 느낀다.

강항은 본래 유학자이므로 불교를 숭상하지 않는다. 그런데 풍신수길을 향한 격노의 글에는 부처를 내세운다.

그리고 후지와라 세이카는 원래 스님이였다. 강항에게 유학을 배워 제자가 된 이후 부처를 떠나 유학자가 되었다.  스승은 부처의 힘을 찾았고, 제자는 부처를 벗어났다.

물론 강항도, 제자 후지와라 세이카도, 각자의 신념을 떠난게 아니고 오히려 일본이란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나라를 유학으로 기틀을 세우고 한단계 성숙한 나라가 되는 토대를 마련한 셈이다.  이런점에서 강항과 후지와라 세이카로 이어지는 유학의 법맥은 이후 이에야스에 의해 통일된 일본을 다스리는 이념으로 까지 발전하게 된다.

결국 이 이념은 도쿠가와가의 에도 막부시대 260년을 지탱 시켜준 근간이 되는것이다.

 

 

 

마침내 강항은 4년의 포로 생활 끝에 1600년 5월 제자의 도움으로 자신을 식솔을 포함한 조선인 포로 38명을 데리고 무사히 조선으로 돌아온다.

돌아온 강항은 선조를 만났다. 그전에 강항은 이미 여러 루트를 통해 3번이나 조정에 자신이 직접 몸소 보고 듣고 느낀 일본의 실정을 상소해 올렸었고 또 다시 상소 글을 올린다.

그후 조정에서 벼슬을 내렸으나 스스로를 죄인이라 여겨 곧 바로 사직하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양성했다. 그때 이 책 간양록이 나온것으로 보이는데 강항이 이 글을 쓸 때 원래 제목은 '건차록(巾車錄)' 으로 지었다고 한다. 

건차는 죄인을 호송하는 차량을 말한다. 스스로를 죄인이라 낮춘것을 제자 윤순거 가 펴낼때 간양록(看羊錄)으로  고치게 된다.

 

간양(: 볼 간, 양 양) 은 글자 그대로 '양을 보다' 는 뜻이다.

'간양' 에 대한 유래는 참으로 오래 됐다.

제자 윤순거(1596~1668)는 스승 강항의 일본 포로 생활을 한나라 시대 흉노에게 잡힌 소무(蘇武: B.C 140~60)에 비유했다.

간양이란  소무가 북해에서 19년간 양을 치며 흉노 선우의 회유와 협박을 거부하며 절개를 지켰다는 고사에서 유래 한다.

이 부분에 관련된 이야기를 찾아 보면 좀 더 흥미로운 내용들이 있다.

 

한나라 무제 시절(B.C141~87) '소무' 라는 한나라 장군이 흉노에 사신으로 왔다가 흉노에 사로 잡히게 된다.  소무의 절개 감동한 흉노의 선우(왕과 동격) 회유를 하지만 소무는 한나라의 지조를 지키고자 회유를 거부하게 된다. 이에 화가난 흉노의 선우는 지금의 바이칼 호수 근처로 유배를 보내고 19 동안 양을 치게 한다. 무제가 죽고 한나라 조정과 흉노가 평화적으로 화친을 함에 따라 외교정책의 변화로 소무는 한나라에 돌아 오고야 만다. 그렇게 한나라로 돌아온 소무는 '충절의 상징' 되어 버린다.

 

(참고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부하중에 김완(金浣:1546~1607) 장수가 있었다. 그는 원균과 칠전량 해전에 참가 했다가 대패하는 과정에서 물에 빠졌다가 일본군에게 잡혀 포로가 되었다.

김완은 일본을 탈출하여 조선에 돌아오는데 조선의 선조는 김완에게 '해동소무'(海東蘇武)라는 어필을 하사했다. 그만큼 '소무'는 충절의 대명사이다.)

 

 

'간양'이란 '소무가 19 동안 적지에서 양치기를 했다' 이야기에서 유래한 '충절' 뜻하는것이다.

여기서 연관 되는 하나의 뜻깊은 사건은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 유래' 들수 있다.

소무가 흉노 땅에서 양치기를 하고 있을때 동시대에 '이릉()'이란 한나라 장수가 흉노와 싸우다 붙잡히게 되었다. 이릉은 당시 5천명의 보병으로 3만의 흉노 기마병과 맞서 싸웠으나 결국 패하고 잡히게 된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은 싸움' 임에도 불구하고 이릉은 용감히 싸웠다. 하지만  결국 사로 잡히게 되고 후에 이릉은 선우에게 포섭이 되고야 만다.

소식을 전해 들은  한무제는 폭발하여 이릉 집안의 삼족을 멸하고자 하였다. 수많은 신하들이 잠자코 있었는데 그때 오직 사마천만 이릉을 변호 했었다고 한다.

당시 사마천은 일면식도 없는 이릉을 위해 당시 상황에 근거하여 이릉의 입장에서 변호 했다가 오히려 한무제에게 노여움을 사게되어 버린다.

이것이 바로  죽음보다 치욕적인 궁형에 처해지게 된 이유이다.

결국 사마천은 자신의 남성을 버리는 고통과 굴욕을 극복하고 인간 능력의 최고의 정점을 붓끝으로 집약하여  '사마천의 사기' 탄생 시키게 된다.

사마천이 변호했던 이릉은 훗날 소무가 19 포로 생활 끝에 한나라로 돌아가기 전에 서로 만나게 된다.

소무와 이릉의 만남.

이릉은 가고싶지만 돌아갈수 없는 자신의 처지(자신은 이미 충절을 버린셈이 된것이고 또한 고향의 집안은 이미 멸문지화를 당했다) 19년을 양을 치며 충절을 지키다가 결국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소무와의 엇갈린 운명앞에서 동시대의 두 주인공은 서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들의 심금을 울리는 마음이 지금까지도 전해지는 듯 하다.

 

 

간양록 속에 담긴 16세기말 조선시대 선비 강항의 충절과 2000년전의 소무와 이릉의 엇갈린 운명속의 충절을 생각하면 시간과 공간이야 다를지 언정 하나로 이어지는 운명이 느껴진다.

 

 

나를 만약 한()의 소무(蘇武)에 비춰보면 나도 이미 23년이 넘게 중국에서 살고 있다. 현재 나에겐 내 가족이 양이다. 양이 다 클 때 까지 아직 중국에 남아 있어야 한다.

내가 돌아가야 할 우리나라. 대한민국.

돌아갈 그날이 올때 까지 부지런히 공부해 놓고 있어야 겠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을 어린양을  돌보는 목자에 비유한다.

나는 내 내면의 어린 양을 키우는 목자가 되어야 한다.

간양, 양을 잘보는것. 여기엔 많은 뜻이 담겨 있는것 같다.

 

 

(만약 간양록을 보기전에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대망>이란 소설을 먼저 읽고 난 후 간양록을 본다면 강항이 수집한 당시 일본의 정세를 담은 내용이 쉽게 이해가 될 듯 하다. )

죄 없는 널 죽였구나 모두가 내 죄여라
백 년 두고 통분해 눈물 언제 마르리. - P22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이마에 땀이 나는 줄도 깨닫지 못하였다.
무인 중에 이런 사람이 있었구나! 나는 글 읽은 사람이 아니던가!

..... 중략

만권 서적 읽은 서생 면목이 바이 없네
이태 동안 궁진 신세로 양 치고 있으니.
- P29

한평생 경영한 게 한 줌 흙 된단 말인가
열 층의 황금 전당 부질없이 높구나
탄알만 한 네 땅 지금 남의 손에 갔느니라
무슨 일로 청구 땅에 당돌히도 대들었나 - P31

방비를 위한 충언
관원을 임명할 때 가문을 묻지 마시고
장수들이 백성을 침탈하지 말도록 하옵시고
지리와 성읍 제도를 살펴 고치시길
항복한 왜군을 죽이지 마시고 거두어 주시길
무기를 날카롭게 갖추시옵고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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