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셉 크리에이터
김근배 지음 / 책든사자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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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셉 크리에이터] 는 마케팅 용어인 '컨셉(concept)의 개념부터 종류, 층위, 과정, 효과 등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한 책이다. 감각적이고 세련된 제목이 멋지기는 하지만, 만약 내게 이 책의 제목을 고칠 기회가 주어진다면 주저하지 않고 '컨셉학 개론'으로 바꿀 것이다. 개론이나 원론 교과서처럼 내용이 방대하고 서술 방식이 딱딱하기 때문에, 제목만 듣고 여타 마케팅 서적이나 실용서 수준을 기대한 사람이 읽는다면 실망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반대로 나처럼 컨셉에 대한 개념이 아예 없는 초보자들이 입문서로서 이 책을 읽는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컨셉은 인간이 '감각적으로 경험한 내용'을 붙잡는 것이다. 인간은 외부의 사물이나 현상과 접촉하여 시각, 청각 등 오감으로 경험한 것들을 concept을 동원해서 인식한다. 일상생활에서 사물을 지칭하는 concept을 학습하기 전에는 그 사물을 보아도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p.20)  
   



<part1. 컨셉이란 무엇인가?>에는 컨셉의 개념과 유형, 기업 입장에서의 컨셉 등이 총 다섯 장에 걸쳐 체계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개념에 대한 설명이 주로 등장하기 때문에 딱딱하고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칸트의 인식론이나 불교 사상 등에서 컨셉의 개념을 이끌어낸 점은 신선하다. 마케팅, 홍보 등 실용적인 기술은 인문학적인 소양이 필요없을 것처럼 느껴지지만,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하고 기초적인 것이라서 넘어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걸 아는 경영학 전공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의문이지만...) 이 외에도 손자병법, 삼국지 등 다양한 이야기가 각 장의 초입마다 등장한다.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는 캔버스, 붓, 물감 등이 유형자산이라면 화가가 갖고 있는 미적 감각과 기술이 무형자산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화가를 마케터로 바꾼다면 마케터가 갖고 있는 경험과 지식이 중요한 무형자산이다. (p.480)  
   

 

<part2. 컨셉개발>에는 기능형컨셉, 감성형컨셉, 리뉴얼컨셉, 부가서비스 등 컨셉 개발의 유형이 설명되어 있다. 특히 최근 여러 기업에서 중시하고 있는 감성컨셉에 대한 내용이 재미있었다.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히는 '초콜렛폰'이 원래는 '손50(손오공)'이라는 이름으로 출시될 뻔 했다는데, 바꾸기를 정말 잘했다.  

 

마지막으로 <part3. 컨셉 정립과 표현>에는 포지셔닝과 브랜드컨셉, 표현방법 등 실질적인 기법들이 설명되어 있다. 광고 카피나 브랜드 이름 등 언어적인 요소가 제품의 컨셉에 큰 영향을 준다는 설명이 기억에 남는다. '맑은물이야기'처럼 이름만 들어서는 어떤 제품일지 잘 떠오르지 않으면 제품명으로 적합하지 않다. 사실 '맑은물이야기'는 섬유유연제인데, '맑은물'이라는 단어만 읽고 음료로 착각한 어린이가 마시고 죽을뻔 했다는 얘기는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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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의 지혜 - 혼돈의 세상에서 평온함을 찾기
앤디 메리필드 지음, 정아은 옮김 / 멜론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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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의 지혜] 는 앤디 메리필드가 당나귀 그리부예와 프랑스 시골마을을 여행하면서 얻은 깨달음에 대해 쓴 책이다. 표지만 보면 언뜻 여행기인가 싶기도 하지만, 당나귀와 함께한 여행을 주제로 한 '에세이 모음집'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다. 저자는 영국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때는 영국과 미국에서 강의를 하며 성공가도를 걷기도 했지만, 지금은 모든 부와 명예를 버리고 프랑스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호젓하게 살고 있다.

 

책에는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다양한 관심사가 엿보이는 부분이 많이 있다. 당나귀를 예찬하면서 [돈키호테], [동물농장],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 등을 인용한다든가, 예수와 마호메드, 호메로스, 스피노자, 발터 벤야민, 랭보 등 많은 사상가, 학자, 문인들이 당나귀에 대해 어떻게 언급했는지를 꼼꼼히 일러준다. 특히 [돈키호테] 의 산초와 그의 당나귀 대플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이미 알고 있는 얘기인데도, 산초가 당나귀와 어떤 관계였는가에 주목한 저자의 해석으로 읽으니 새롭게 느껴졌다.   

 

 

저자의 ‘당나귀 예찬론’을 읽고 있노라면, 당나귀가 이렇게 대단한 동물이었나 싶다. 당나귀를 뜻하는 말인 ‘donkey’나 ‘ass’는 욕으로 쓰일 만큼 서양에서는 당나귀에 대한 인식이 안 좋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나귀는 말처럼 좋은 대우를 받는 동물은 아니며,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나귀처럼 늙고 지친 동물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책에는 ‘아프리카의 민간설화에 따르면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과 한 쌍을 이루는 동물이 하나씩 있다(p.249)’는 문장이 나온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천대하고 멸시하는 당나귀에게 애정을 느끼고 지혜를 얻은 것을 보면, 저자의 동물 짝은 당나귀인 것이 틀림없다.  




당나귀들이 대지에서 뒹굴고 있다. 마치 백일몽 같이.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안개 속에서 산을 누비며 여행했던 기억들이 모두 백일몽의 한 장면일지도 모른다. (p.188)



[당나귀의 지혜] 에는 몇 번에 걸쳐 ‘백일몽’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저자는 뉴욕에서 강사로 활약하며 남부럽지 않은 명예와 부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프랑스 시골에서 한낱 당나귀에게 지혜를 얻는다는 것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며, 헛된 공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헛헛한 도시에서의 삶이야말로 허상이고, 당나귀와 함께 여행을 하며 지나온 삶을 반추하고 인생의 의미를 되찾는 시간이 진정 인간다운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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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밥바라기별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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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2008년작 <개밥바라기별>은 출간 전에 네이버에 연재되었고, 연재 종료 후에는 석영의 개인 블로그를 통해 공개된 바 있다. 네이버에 연재된다는 소식을 듣고부터 종이책과 이북 사이에서 갈등하는 요즘 독자들이 이 책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궁금했던 나는 연재 종료 후 작가 블로그를 통해 읽고 책으로 다시 읽었다. 같은 소설을 차가운 모니터와 따뜻한 종이책이 각각 어떻게 전달할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역시 나는 종이책으로 읽는 편이 더 좋았다. 일단 모니터로 읽으나 종이책으로 읽으나 소설의 재미가 더하거나 덜하지는 않았다. 역전된 시간과 복수의 화자라는 설정이 복잡하면서도 독특하게 느껴지는 것은 같았고, 유준, 인호, 미아, 정수, 상진, 영길, 중길, 선이 등 그 때 그 시절 치열하게 살았던 청춘들을 보며 공감하는 마음 또한 다르지 않았다. 허나 줄거리만이 아닌 문장을 읽는 재미는 역시 종이를 손으로 한장 한장 넘겨가면서 읽을 때 제대로 맛볼 수 있었다. 시대가 변하고 강산도 바뀌었지만 그 때 그 시절 청춘들이나 지금의 청춘들이나 왜 이렇게 세상살이가 힘겨운지. 어른들의 말을 듣기엔 젊은 꿈이 너무 크고, 그렇다고 세상을 짊어지기엔 뱃심이 부족한 청춘들의 애환을 작가는 적확하게 그렸다. 그에 반해 102개에 달하는 포스트를 연속으로 읽어내는 동안 어찌나 눈이 아프고 마우스 위에 놓은 손이 저리던지.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책을 아끼는 사람에게 선물할 때 느낄 수 있는 기쁨은 종이책만의 장점.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좋아하는 L선배에게 선물했다. 유난히 청춘을 힘들어하는 그 선배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황석영 작가 블로그에서 보라고 링크 주소를 알려줄 수도 있었지만 그건 너무 정이 없는 것 같다. 내 책 선물이 선배 마음에 들었는지는 몰라도 선물한 내 마음은 흡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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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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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치기 여행길, 버스안에서 조용히 이 책을 읽었다. 분주히 지나가는 차들, 재잘재잘 얘기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만 홀로 붕 떠서 책 속을 여행하는 기분이 들었다. 책 역시 미하엘의 사랑과 삶을 통해 인간과 사회를 관통하는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여행을 하는 내용이었다.  

 

<더 리더>의 화자는 독일 작가 특유의 담담한 문체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천천히, 하지만 또렷하게 흘러가는 이야기는 마치 달콤한 첫 맛 뒤에 씁쓸한 끝 맛을 남기는 커피 같았다. 열다섯살 소년 미하엘의 사랑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독일 사회의 아픈 역사와 현재, 그리고 인간이 끌어안고 있는 고민까지 포용한다. 미하엘이 평생 간직하고 있었던 고민과 외로움, 타자로부터의 자발적인 소외가 한나가 남긴 상처와 그 안에 담긴 사랑 때문이었음을 깨닫는 결말에 이르렀을 때, 나는 이것이 곧 역사가 우리에게 (특히 독일의 역사가 독일의 현실과 미래에 시사하는 바) 지워주는 부담과 교훈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죄인으로서 미하엘을 사랑한 한나와, 죄인인 한나를 사랑한 미하엘처럼, 죄를 지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그것과 영원히 결부되어 살아야하는 현실의 관계란 얼마나 어려운 물음인가.

 

책을 읽으면서 2차 대전의 참상으로부터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는 우리의 역사가 자꾸 떠올라서 마음이 답답했다. 비록 가해자와 피해자로서 입장은 다르지만, 죄를 지은 자와 그로 인한 피해를 입은 자의 관계, 용서를 구하는 것과 용서, 그리고 화해-, 이 모두가 어느 입장에서든 완전한 답을 내리기엔 너무나도 어려운 문제들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사유와 고민이 없다는 것 역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에게도 역사에 대한 이해와 처벌, 그리고 새로운 관계의 정립에 대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는 피해자인 우리 뿐 아니라, 누구보다도 가해자인 일본의 적극적인 반성과 보상이 가장 요구되는 부분이다. 학계와 사회 뿐 아니라, 이런 문학 분야에서도 과거의 잘못에 대해 반성하고 이를 어떻게 용서받고 극복할 것인지를 논의하는 독일의 사정이 참 부럽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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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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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부는 재밌는데 후반으로 갈수록 별로야." 학교 문학 수업의 과제로 이 책을 읽은 동생은 책의 감상을 묻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부분의 한국 소설이 전쟁이나 운동권의 얘기로 귀결되는 것이 불편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도 그럴 것이 동생은 세상의 온갖 걱정과 시름을 잊고 한바탕 웃을 수 있는 그림, 즉 만화를 그리는 아이이므로, 웃음보다는 한숨과 눈물이 어울리는 우리네 역사가 자신의 감성과 맞지 않는다고 느낄 것이다. 재미있게도 동생과 동년배인 후배도 같은 평을 했다. 단 두 명의 표본을 가지고 일반화를 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겠지만, 어쩌면 1988년 서울올림픽 이전에 태어난 나와 이후에 태어난 동생과 후배는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광주 민주화운동의 전범인 전두환 치하에서 태어난 나, 그리고 적어도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이라는 명목이라도 있는 노태우의 시대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태생(?)이 다르니 세상을 보는 관점도 일치하지 않으리라. 


음, 결국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나는 전후반 상관없이 이 책을 재밌게 읽었다는 것이다. 내 주변만 봐도 이 책에 대한 내 윗세대와 아랫세대의 감상은 거의 일치하지 않는다. 김연수님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언니가 있는가 하면, 민주화 운동이나 남북통일을 빼면 '한국' 문학이 어떤 것을 논할 수 있을까하고 반문하는 후배도 있다. 어린 친구들은 이 책을 386 세대, 혹은 그 후의 세대의 레퍼토리 쯤으로 여기는 걸까. 하지만 소설에 등장한 역사적인 배경과 사건들은 작가 자신의 의식을 형성한 주요 경험들 -작가 자신이 주인공과 비슷한 시기에 어린시절을 보내고 대학생활을 했으므로- 이기 때문에 등장한 장치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의 문제의식과 주장은 지금의 세대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오히려 수능과 내신, 스펙 쌓기와 공모전, 토익으로 점철되는 청춘을 보내는 지금의 20대가 더 불쌍하지 않은가. 10년이나 20년 후, 내 또래의 작가들이 수능 회고담이나 공모전 후일담 정도를 소재랍시고 글을 쓸 것을 생각하면 끔찍하다. 


 

자기 자신이 되어라 

"인생은 자기 자신이 지배하는 것이다. 너의 인생을 누구에게도 맡기지 말라. 무엇보다도 네가 선출한 지도자에게는 맡기지 말라.자기 자신이 되어라." [네가 누구든]에는 일제 시대부터 90년대 초의 민주화 운동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였던 사람들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이러한 연(緣)은 대한민국의 서울은 물론이요 독일의 베를린까지 넘나든다. 인물들은 국가, 체제, 정부, 이데올로기 등 개인의 상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들을 탐구하거나 혹은 저항한다. 그런데 갖은 고초와 열병 같은 외로움을 겪은 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새로운 정부나 이데올로기의 승리 따위의 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그저 이 시간, 지구 위에, 사랑하는 누군가를 그리며 존재하고 있다는 것뿐.  우리는 불식중에 국가나 정부, 법, 회사, 조직, 학교 등이 우리 위에 존재하며, 우리를 통제하거나 간섭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태생적인 경향이라기 보다는, 교육과 사회화, 매스미디어, 혹은 군대를 통해 그런 생각을 주입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우리가 만약 이 나라에 지금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 같은 조직과 관여할 일이 있었을까? 21세기 한국이 아니라 화랑들이 말달리는 신라의 어느 벌판 위에 태어났다면? 높은 빌딩과 아파트가 들어찬 서울이 아닌 스위스 산골마을에 태어났다면? 그래도 우리는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가고 괜찮은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 노력해야 했을까? 결국 개인과 체제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스스로 택한 조직을 위해 '종사'할 수는 있어도 그들이 시키는 대로 '복종'할 필요는 없는게 아닐까? 이런 말을 하는 나를 무정부주의자라거나 반체제주의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르는데, 그건 결코 아니다. 내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의 선택'이며, 지금 여기에 이렇게 사는 것 역시 우리가 선택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살이나 이민, 자퇴나 퇴사 등의 선택을 했겠지...
 
 

책을 읽으면서 종종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떠올렸다. 뫼르소는 보이지 않는 존재 -신이나 국가, 가족이라는 관습 등- 에 매달려 있는 다른 인간들에게 '이방인(the stranger)'이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뫼르소에게는 이방인이었고, 그들은 그들 서로에게 결국 이방인일 것이다.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을 빼면 자기 외의 인간은 모두 '이상한(strange)' 사람에 지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네가 어딨든 어떤 체제에 속해있든'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 이라고 얘기한다. 인간이 느끼는 사랑과 외로움, 열정과 고통의 감정에 충실한 것이 어떤 사상이나 학문보다도 중요한 삶의 방식이라고 말하는, 지극히 '인본적인(humanitarian)'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러 세대를 거치고 다양한 공간을 누벼 다다른 주제가 결국 '사람'이라니, 허무한가? 뭐 어때! 그것이 인생인걸.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우주 어딘가에 너를 이해해 줄 존재가 있다. 결국 사람의 외로움은 국가나 관습, 회사나 조직이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외로운 '사람'일 뿐이다. 어쩐지 내 머릿속에는 인간이라는 '이방인'들이 지구라는 '게스트 하우스'에 모여서 통하지 않는 말로 일치되지 않는 경험을 늘어놓으며 껄껄대는 모습이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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