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 전쯤 나는 생태학과 여성학이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공부 모임을 만든 적이 있다. 물론 모든 조건이 열악했던 시절이라 출발역 바로 다음이 종착역이 되었다. 그때 나는 후배와 제자들에게 말했다: 학문 이름에 생태라는 말을 앞뒤로 마구 붙이는 날이 곧 온다.

 

오늘은 말한다: 모든 학문 이름에 인류라는 말을 앞 붙이는 날이 꼭 온다.

 

우리가 익히 들은 바는 무슨 무슨 인류학이라는 허다한 인류학 분지다. 가령 정치인류학, 이런 식이다. 그러나 나는 인류정치학을 말한다. 이는 기존 정치학과 범주 자체를 달리하는 범주 인류학 종개념이다. 단도직입으로 말하면 내가 말하는 인류학은 서구 제국이 여태까지 만들어 놓는 모든 학문을 묶어 한 범주로 놓을 때 그 대칭에 놓을 범주로서 인류학이다.

 

범주 인류학은 그 주체가 인류고 방법론도 내용도 실천도 모두 인류적이다. 이때 인류는 제국주의가 모독하고 명명한 바로 그 인류. 이성도 진보하는 역사도 과학도 없는, 미개한, 제국 시민과는 전혀 다른, 죄악 자체로서 제국 시민을 포위하고 있는, 하여 마침내는 멸절 대상일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인류. 인류를 규정한 제국 시민을 나는 인간이라 부른다. 인간이 만든 모든 학문, 예술, 종교, 제도를 총칭해 인간학이라 부른다. 인간학인류학을 능멸하고 파괴하고 급기야는 살해해(버렸다고 믿고,) 없는 존재로 치웠지만, “인류학은 그 참혹하고 처절한 상처 속에서도 살아남아 저 인간학을 품어왔다. 이제 인간학이 인간, 그 세계, 나아가 비인간 세계에 끼친 패악을 치유할 서사와 실천으로 기어이 둥두렷이 인류학을 떠오르게 해야 한다.

 

범주 인류학은 형식논리, 인과율, 분석에 터 한 제국 학문 편협·편파성을 꿰뚫는다. 그 기본적 힘은 이른바 고대 지혜에서 발원한다. 고대라는 말은 단지 아득한 시간만을 가리키지 않고, 인간학 저편이라는 공간을 가리키기도 한다. 고대 지혜는 비단 석기시대 풍속을 그대로 간직한 부족에게만 아니라 인간학 세례를 듬뿍 받은 제국 시민에게도 엄존한다. 평범한 시민은 제국 인간학에 세뇌되어 이성과 과학으로 살아가려 애면글면하지만 결국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고대적 지혜에 기댄다. 체면상 안 그런 척하지만, 지배 집단이 훨씬 더 극단적·중독적이다. 오컬트적 자신을 식민지 주민에게 투사한 음모가 바로 그 인류학이다. 당연하게도 그 인류학에서 제국은 자기 성찰의 근거를 찾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변화를 거쳐 오늘날 인류학은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제국 시민인 한, 죽었다 깨어나도 저들은 범주 인류학 지평으로 들어올 수 없다. “인간에서 벗어나 인류본성을 되찾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류본성이란 인간이 결코 지구 생태계 주인이 아니며, 다른 유()와 특별히 다르지도 않으므로 서로 존중하고 지혜 나누어 공존·공생해야 하는 존재일 뿐이라는 진실을 그대로 살아내는 생명 바탕이다. 이를 거부하는 도그마, 그러니까 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됐다는 허황한 미신에 터 한 앵글로아메리카 제국 인간학으로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진리다. 같은 인간인 거북섬(토착민이 북미 대륙을 부르는 이름) 주민을 인간 아닌 존재로 몰아 멸절시킨 장본인인데 하물며 다른 유 생명체쯤이야. 그러나 저들이 얼마나 어떻게 무지하든 다람쥐며 버드나무며 석이며 송이버섯이며 미역이며 시아노박테리아며 레오바이러스가 존중하고 지혜 나누어 공존·공생하는 존재임은 자명하다. 이들과 이루는 팡이실이, 곧 네트워킹이 범주 인류학의 진경이자 전경이다.

 

범주 인류학이 빚어내는 팡이실이 서사는 인간학적 형식논리, 인과율, 분석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진실을 담고 있다. 팡이실이 서사에는 무엇보다 창발(emergence)이 약동한다. 창발은 인간 뇌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뇌는 받아들일 뿐 창발 자체는 장 점막 바깥에서 인간과 공생하는 온갖 미소 생명들에게서 온다. 그 미소 생명들은 다시 인간 바깥 미소 생명들, 나아가 비생명 존재들과 이루는 팡이실이 사건에 힘입어서 인간 뇌를 일깨운다. 이렇게 일깨워지는 뇌를 인간학하는 인간은 쓰지 않는다. 그래서 제국주의는 파멸 외길을 달린다.

 

제국주의 파멸은 빠를수록 좋다. 한 찰나라도 그 파멸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제국의 실체를 까밝혀야 한다. 제국의 실체를 까밝히려면 지배 집단이 구사하는 통치 전략에 극단적·중독적 오컬트 인류학이 작동하고 있다는 진실을 드러내야 한다. 그 진실은 인간학적 어법으로 드러내지지 않는다. 음모론 비판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음모론 덫에 걸리면 아무리 뛰어난 담론도 가십으로 굴러떨어진다. ‘음모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한사코 주장하는 지성은 제국주의 통치 전략, 그 음산한 사이비 인류학적 작태 은폐에 동원되는 특권층 부역자로서 당대 일급 엘리트이기 때문에 거의 난공불락이다. 이들을 무찌르고 제국의 추악한 지성소를 엎어버리려면 범주 인류학 고유 어법이 꼭 똑 필요하다.

 

영화 <파묘>부터 예로 들어 이야기한다. 나는 본디 영화를 좋아하지 않아 이 영화 또한 보지 않았지만, 워낙 커다란 화제가 됐던 터라 알라딘 서재에 세종대학교 독도종합연구소장인 호사카 유지 교수 글을 전재한 적이 있다. 그 글에서 호사카 유지 교수가 말한 바에 따르면 일제가 음양사를 공식 직책에 올리고 그들이 구사하는 각종 주술을 현실 통치에 동원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임이 분명하다. 풍수설에 의거 쇠말뚝을 박고, 총독부·신궁 자리를 정한 것 또한 모두 사실이다. 1945년 이후는 다를까? 여전히 총리대신과 각료, 국회의원들이 신사를 참배하는데, 무슨. 이는 일제의 높은 인간학수준과 세계적 기술력하고는 전혀 다른 문제다. 일제 지배 집단이 저지른 오컬트적 정치 행위를 문제 삼을 때, 과학·기술 운운하며 음모론 차원에서 일축하는 윤똑똑이 지식인은 인간학에 주저앉아 떡고물 받아먹는 한심 종자일 뿐이다.

 

피부에 와닿고 더 엄중한 예로 발 들여 본다. 세월호참사는 왜 어떻게 일어났는가? 이 문제에 당시 정부가 내린 결론은 정당한가? 과문 탓인지는 몰라도 아직 당대 일급 지식인 누가 나서서 정면으로 의문을 제기하고 인간학너머 지배 집단이 구사하는 오컬트적 정치 행위를 정조준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물론 당연하다. 그런 지식인이 있었다면 음모론자로 매도 아니 매장당했을 테니까. 익히 알기에 알아서 기었을 테니까. 아니다. 아예 처음부터 그런 담론 자체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이 없었을 테니까.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제국에서 베껴온 지식을 장착한 로봇일 테니까. 그러니까 이제 한 생각 크게 돌이켜야 한다.

 

4·16 직후 일부에서 제법 소상한 내용까지 담은 인신공양설을 제시했으나 즉시 도태되었다.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그러면 이 문제의식을 오늘날로 가져와 보면 어떨까? 윤석열이 대통령 후보일 때부터 끊임없이 따라다닌 가십성 정보에 무속인 멘토가 있다.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는 국가적 공식 행위에도 그들 또는 그가 등장했다. 대통령실과 관저 이전에서 의대 정원 2,000명에 이르기까지 영일 없이 오컬트적 정치 행태가 구설수에 오르내린다. 정말 이것은 구설수인가? 구설수 따위라서 당대 일급 지식인이 입 대서는 안 되는 문제인가? 역시 아무도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사회정치적 담론으로 꺼내놓지 않는다. 이유는 전과 동. 앞으로도 영영 이런 일은 전과 동. 언제 우리는 진실을 품을 수 있을까, 그럼? “인간학으로 인류를 묶어 놓고 오컬트 인류학을 구사하는 제국 부역 권력 집단이 존재하는 한,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원조 제국 지배 집단이 구사하는 오컬트 인류학은 성서에서 발원한다. 성서 자체가 가장 배타적이고 도착적인 음모론이다. 음모론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고려대 한국어 대사전):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사건의 원인을 명확히 설명할 수 없을 때 그 배후에 거대한 권력이나 비밀스러운 조직이 있다고 여기며 유포되는 소문. 신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소문, 그러니까 절대 음모론에서 성서는 출발하고 그 소문이 풀어낸 갖가지 소문에 근거해 앵글로아메리카 제국은 제노사이드로 인류를 말살했고, 에코사이드로 자연을 정복했으며, 옴니사이드로 지구 전체를 말아먹고 있다.

 

음모론으로 구축된 권력이 음모론으로 정적을 제거하는 투사(projection) 공작정치가 바로 제국주의 전가 보도다. 이는 공정과 극단적 대칭점에 있는 검사 윤석열이 불공정을 조국에게 투사해 개인은 물론 가문 전체를 멸절로 몰아간 난동과 완전히 결이 같은 사건이다. 이런 모순을 부역하는 대중에게 감추는 수법이 둘 있다. 하나는 프레임, 특히 언어 프레임 선점이다. 먼저 치고 달리면(hit & run) 나중에 진실이 밝혀져도 각인 효과로 말미암아 대중은 요지부동이다. 다른 하나는 증거 미형성과 인멸이다. 이 중, 특히 전자가 치명적으로 중요하다.

 

음모론은 본성상 인과율, 그러니까 이른바 과학적 차원의 증거가 없다. 과학에 닿지 못하거나 그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예외가 없지는 않으나 대개 사적 이득에 경도된 음모론은 그 증거가 과학에 닿지 못함에도 사람을 매혹하는 것들이다. 대표적인 예가 천공이 구사하는 파자(破字) 술이다. 공적 선의를 추구하는 음모론은 그 증거가 과학 너머에 있다. 초인과적·창발적 팡이실이(networking) 사건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동시성(synchronicity)이다. 제국주의나 그 부역자들이 구사하는 음모론 증거는 추종자들에게 쉽게 전파되지만, 반대하는 쪽에서 증거로 삼을 수 없으므로 빠져나간다. 자기는 빠져나가고 타자 음모론은 같은 무기로 공격할 수 있다. 뻔한 전략인데 대중은 진부해서 속고, 부역 지식인은 알고도 모른 체 한다.

 

증거인멸은 이미 우리가 헤아릴 수 없이 보아 온 저들이 협잡질이다. 대표적인 예가 세월호 선체에 있던 물증을 인멸하고, 증인을 매수·살해한 짓 따위다.

 

음모는 있다. 아니다. 음모는 인간 본성에 속한다. 이를 지배 집단이 전유해 오컬트적 일극 집중 체제로 만들어서 음모론은 오늘날 음모론으로 타락했다. 타락 이전, 또는 그 바깥 음모는 내가 말하는 인류학”, 즉 범주 인류학 주체인 인류인간본성과 비대칭 대칭을 이루며 균형 잡아 온 본성이다. 이들은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다. “인류가 구가해 온 음모는 형식논리 너머에, 인과율 너머에, 분석 너머에, 간직하고 발향해 온 슬기다. 팡이실이 별명이다. 버려졌던 이 운동을, 사건을 되살림으로써 인간인류됨을 되찾을 수 있다. “인류학곧 범주 인류학은 이래서 필수며 필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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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년 동안 줄기차게 해온 숲 걷기를 톺아볼 때마다 아뜩해진다. 아니 할 말로 죽으려고 용을 쓴짓 같으니 말이다. 아이젠, 스틱은 차치하고라도 기본인 등산화조차 신지 않은 평상복 차림으로 혼자서 서울 안팎 산 쉰여 개를 드나들었다. 그 가운데 절반 이상(27)200m 넘는, 그러니까 언제든 다치고 죽을 수 있는 산이었다. 아주 여러 번 길 아닌 곳으로 들어가 헤맸고, 길을 따라가다가 잃었는데, 위험천만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디보다 아찔했던 곳은 도봉산 회룡천 골짜기였다. 첫 번째는 눈 덮인 날 오르다가 길을 잃고 헤맨 끝에 결국 실패했는데 생각할수록 오금이 저린다. 두 번째는 처음부터 길 없는 숲으로 작정하고 들어가 내려가는 과정에서 세 번이나 수직 벼랑에서 굴러떨어지며 폭포 위 암벽 위를 생사 걸어 오른 끝에 결국 성공했는데 생각할 때마다 내몰고 받아준 손길이 느껴져 소름 돋는다. 내가 헤맨 모든 숲은 물론 골짜기였다.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다.

 

숲 걷기 초반에는 의식하지 못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스스로 등성이 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눈이 열렸다. 무엇보다 거긴 물이 없기 때문이다. 물소리를 들을 수도, 물을 만질 수도 없다. 게다가 물기운이 있어야 사는 생명들을 볼 수 없다. ‘등산아니라 소통하러 숲 걷기 하는 내게는 등성이 아닌 골짜기가 똑 꼭 맞는다. 더군다나 나는 버드나무 화신이 아니던가.^^ 물길 이루지 못한 습지만 있어도 나는 아이처럼 좋아하며 걸었다.

 

그렇게 물기운에 배어든 나는 마침내 커다란 전환점을 맞는다: 이제부터는 숲에서 물을 볼 게 아니라 물에서 숲을 보면 어떨까. 더 굵은 내를 만들고 기어이 큰 강을 이루는 물을 따라가며 숲을 바라보다 보면 마침내 바다에 이르지 않겠나. 본디 숲은 바다니까 바다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어디부터 실마리를 풀어야 할지는 모른다. 물은 숲처럼 곧장 들어갈 수도 없으니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도 모른다. 발길을 돌릴 때가 왔다는 느낌뿐이다.

 

마침 이때! 양극성장애에 육박하는 우울장애로 숙의 치유를 했던 분이 스승의날 선물로 물멍을 준비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일요일 아침 일찍 직접 차를 집 앞으로 몰고 와 나를 태우고 경기도 안성 금광저수지로 갔다. 저수지 가장자리를 따라 물 위에 낸 길을 천천히 걸으며 물에서 숲을 바라다보는꿈을 이루게 해주었다. 첫걸음을 이리 예상치도 못하게 내디디도록 이끈 생명 팡이실이, 누가 어떻게 이해하든 오해하든 내게는 경이 그 자체다.


 

꾀꼬리 청아한 노랫소리, 살랑이는 실바람, 그 바람에 까르르 웃는 사시나무잎들, 도시에서 보기 어려운 연보라 오동나무꽃, 거울 같은 수면에 어린 산 그림자, 그 산 그림자를 흔들며 유유히 떠가는 쪽배 한 척··· 스며드는 물기운이 영혼을 정화하고 배어드는 숲 기운이 육신을 보양하니 신선이 따로 없다. 마지막 들른 미산저수지. 언덕에서 물을 내려다보는데 물 한가운데서 언덕을 올려다보는 내 모습이 찰나적 환영으로 떠오른다. 어이쿠,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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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내희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두어 주 전부터 국제사법재판소(ICC)가 가자의 민간인을 잔혹하게 학살하고 있는 이스랄의 내각 총리와 각료들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한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이스랄은 미국, 러샤, 중국, 인도 등과 함께 ICC에 미가입한 상태이지마는, ICC의 체포영장이 발부되면 총리인 네타냐후를 비롯해 고위 정치인들은 국제적 신망을 잃는 것을 물론이고 당장 외국에도 마음 놓고 다닐 수 없게 된다. 러샤 대통령 푸틴의 경우, 전쟁 피해로부터 보호하겠다며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의 어린이들을 대거 러샤로 이송토록 조치한 것을 놓고 ICC가 전쟁범죄로 단정해 체포영장을 발부한 바람에 2023년 남아공에서 열린 브릭스 정상회의에 본인은 참석하지 않고 외교장관인 세르게이 라브로프를 대신 참석시킨 바 있다.

ICC가 가자에서의 전쟁범죄 혐의로 자신과 고위 각료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 가능성이 제기되자 이스랄 총리 네타냐후는 당장 미국에 하소연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어떤 나라인가. 미국과 이스랄의 관계는 또 어떠한가. 한편으로 보면 이스랄은 미국이 서아시아 지역에 띄워둔 ‘항공모함’인 셈이다. 미국은 에너지의 보고인 서아시아 장악을 위해 이스랄을 미군의 전진 부대 또는 군사 교두보로 활용하고 있다. 서아시아에서 이스랄이 무슨 짓을 하든 미국은 허용할뿐더러 부추기까지 하는 이유가 그것인 셈이다. 지난 7개월 넘게 이스랄이 팔레스타인의 가자지역을 대상으로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잔인한 학살행위를 하는데도 미국은 이스랄군이 계속 가자 인민을 죽일 수 있게 무기를 대주고 있다.

다른 한편 이스랄은 이스랄대로 미국을 자기 안방처럼 여기고, 미국이 끝까지 자국의 만행을 지원하게 만들고 있는 셈이다. ‘미국 이스라엘 공공문제위원회(AIPIC)’라는 로비 단체가 있다. AIPIC는 미국에서 친이스라엘 활동을 벌이는 가장 강력한 로비 집단으로, 정치인으로 크기 위해서는 거기서 나오는 돈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미국의 정치인들에게 AIPIC이 정말 무서운 것은 그 조직의 눈에 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AIPIC은 정치인 가운데 누가 이스랄을 비판하면 당장 반유대주의자로 낙인찍고 선거 때는 낙선 운동을 벌여 낙마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미국 정치권과 이스랄의 그런 밀착 관계가 최근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4월 24일 자로 미국 상원의원 12명이 ICC에 네타냐후 총리 등 이스랄 고위 인사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협박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러샤와 중국, 인도처럼 미국도 이스랄도 ICC에 가입해 있지 않다. 하지만 그동안 미국이 ICC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해온 것은 세상이 아는 일이다. ICC가 러샤 대통령 푸틴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한 것도 미국의 입김에 따라 영국이 작업한 결과라고 알려져 있다. ICC의 수장인 카림 칸 검사장은 영국 출신이기도 하다.

ICC는 국제사법재판소(ICJ)와 비교해서도 훨씬 더 깊이 서방 세력의 수중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ICJ는 지난 1월 26일에 이스랄의 가자 공격이 “인종 말살의 타당성”이 있다는 임시 판결을 한 바 있다. 하지만 ICC의 경우 이번에 네타냐후 등을 대상으로 체포영장을 발부할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ICC는 원래 서방 세력의 꼭두각시로 알려진 조직인데다 미국의 상원의원들이 공개적으로 나서서 체포영장을 발부하면 제재를 가하겠다는 둥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ICC가 그래서 위협에 굴복해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는다면? 국제형사재판소로서의 그 권위는 여지없이 실추될 전망이다. 애초에 체포영장 운운하지를 말 것이지 왜 말을 꺼내놓고 꼬리를 내린단 말인가. 물론 ICC의 선택은 시간이 좀 지나야 확인할 수 있겠지마는 지금으로 보면 ICC가 미국의 위협에 맞설 공산은 매우 낮아 보인다. 미국의 눈치를 봐도 너무 본다는 점이 역력한 것이다.

아래에 이름을 걸고 ICC를 위협한 미국 상원의원 12명의 ‘낯짝’이 있다. 그들이 보냈다는 편지도 함께 있는데 그 내용 소개는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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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간단합니다. 과학에 적용되는 방법론을 창조과학의 주장에 적용해 이론으로의 정당성을 획득하면 됩니다. 가설을 세우고 증거를 제시하고 다른 학자들의 리뷰를 통과하면 됩니다. 진화론의 허점이 뭐니 하며 몰이해와 거짓으로 순진한 교인들 속이지 말고, 다른 과학자들이 따르는 과정을 따르면 됩니다.

예를 들어, 창조과학은 공룡과 인간이 같은 시대에 살고 있었다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가설을 세울 수 있습니다. “공룡의 유전자와 인간의 유전자는 동일한 시간을 거쳤다.” 이 가설을 증명하면 됩니다. 성경에 공룡으로 보이는 생물이 등장한다거나, 벽화에 사람과 공룡이 같이 그려져 있다 이런 증거 말고, 유전자를 분석해 증명하면 깔끔합니다.

유전자의 반감기는 대략 521년입니다. 유전자는 우라늄이나 루테늄 같은 방사선 동위원소에 비해 환경의 영향을 더 받습니다. 온도나 습기에 따라 유전자의 반감기는 달라지지요. 하지만, 지구 전체를 놓고 볼 때 공룡의 유전자와 인간을 비롯한 다른 유전자는 같은 환경의 영향을 받았다고 가정할 수 있습니다. 또한 모든 유전자는 같은 반감기를 가집니다. 말의 유전자가 인간 유전자보다 빠른 속도로 붕괴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공룡이나 인간이나 남겨진 유전자(정확하게는 유전자 링크)가 백 만개라 할 때 그 반인 오십 만개는 521년이 지나면 끊어집니다. 하지만 이는 확률이기에 개별 링크가 언제 끊어질지는 모릅니다. 한 시간 만에 끊어질 수도 몇 억년 후에 끊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제 가설을 더 좁게 만들어 보죠. ‘공룡의 유전자와 인간의 남겨진 유전자는 동일한 확률로 발견된다.’ 물론 더 정교하게 가설을 세울 수 있겠지만, 이 글의 목적상 이 정도로 하죠. 그러면 창조과학자들은 이를 입증하는 증거를 제시하면 됩니다. 아주 쉽죠.

현실은 어떨까요. 유전자가 온전히 복원한 가장 오래된 경우는 7만 년 전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말입니다. 인간의 경우 셀 수 없이 많습니다. 4만 년 전에 사라진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까지 100% 복원되었고, 이를 통해 현생 인류인 사피엔스와의 관계도 분석되었습니다. 공룡의 경우는 전혀 없습니다. 100% 복원은 커녕 부분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파편이 남았을 뿐입니다. 소위 창조과학의 이론가(라기보다 거짓말 생성가)들은 공룡 유전자 파편이 발견되었기에 진화론이 거짓이라 주장하지만, 이는 반감기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공룡과 인간 유전자에서 보이는 명확한 차이를 이들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설명하려는 시도조차 없습니다.

반복합니다. 창조과학이 과학으로 인정받으려면 가설을 세우고 이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면 됩니다. 공룡 유전자가 인간 유전자와 비슷하게 발견된다는 증거만 있으면 끝입니다. 아니면 차이에 대한 타당할 설명을 하던가요. 그때까지는 사이비 취급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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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봄비가 장맛비처럼 오는 일요일이다. 몸을 한껏 가벼이 한 다음, 젖히지 않고도 머리 위 숲 풍경을 보기 위해 투명 비닐우산을 찾아 든다. 마을버스를 타고 서울대학교 치과병원 앞에서 내려 관악산 줄기 나지막한 숲으로 들어간다. 지난주와는 정반대로 북쪽 길로 접어든다. 충무공 선영과 주위 숲을 찬찬하고 촘촘하게 걸으려 함이다.

 

덕수공원 정문에서 올라가는 경로를 택하지 않는다. 꿈이 위 숲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샛길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꿈과는 다른 풍경이지만 나는 어렵지 않게 길 아닌 숲길을 걸어 묘역으로 들어간다. 정정공(貞靖公) 이변과 정경부인 양성(陽城)이씨 무덤은 찾기 쉽다. 가장 높은 곳에 있어서다. 제물을 올린 뒤에 감사 말씀을 드린다.

 

충무공을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묘 앞에서 쑥대 하나를 챙긴다. 남은 후손 묘들을 꼼꼼히 돌아보고 나서 공원으로 조성한 공간으로 이동한다. 예상보다 규모감이 떨어지고 허투루 가꾼 느낌을 물씬 풍긴다. 최근에야 세웠을 과시성 묘비도 좋아 보이지 않는다. 압권은 박정희식한옥 건물이다. 충무공을 배출한 가문에도 식민지 그림자는 어김없구나. 표표하게 떠나간다.


 

비에 젖은 몸도 무겁지만, 충무공 선영 풍경 때문에 마음이 더 무겁다. 나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강감찬 생가터로 간다. 탑을 빼앗겨 버린 낙성대 풍경도 오늘따라 처져 보인다. 나는 정색하고 결기를 세운다. 아까 거둔 쑥대를 유허비 아래 신목으로 둠으로써 두 영웅 사이를 잇는 의례에 갈음한다. 내 상상 시공이 빚어내는 서사 사건이다.

 

충무공이 인헌공을 삼가 뵙니다.”

 

그렇다. 오늘을 부끄럽게 사는 무지렁이 부역자 처지에서 각성하기로는 지푸라기 신주라도 모실 일이다. 거대와 치밀을 동일 무기로 구사하는 특권층 부역자 언··권과 맞설 때, 날카로운 이성은 빼빼 마른 관념이 되고, 진실 무비 과학은 그림의 떡이 되니 말이다. 내가 불러올 힘은 현실 세계 반대편 저 부정당하는 존재한테서나 나온다.

 

숲을 떠나 도시 한가운데로 들어간다. 교보 가서 온갖 뜨르르한 책에 눈 정을 붙여봐도 심사가 이미 관심을 놔버렸다. 국시 한 그릇 먹고 다시 길을 나서 인사동 뒷골목을 지나는데 담벼락이 나지막이 부른다. 홍범도 장군이 눈으로는 내 너머를 보고, 손가락으로는 내 심장을 가리킨다. 내게만은 덕수공원이 이순신 숲이어야만 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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