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드랜드
제시카 브루더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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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희경 작가님의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는 두 명의 하우스리스가 나온다. 김우빈 배우가 맡은 정준은 버려진 버스를 예쁘게 리모델링해서 바닷가에서 산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 하는데, 경매일부터 배의 선장, 은희의 생선가게에서 생선 판매까지. 하지만 정준이 보여주는 삶은 억척스러움이나 가난이 묻어 나지 않는다. 그저 낭만적으로 보일 뿐이다. 이병헌 배우가 배역을 맡은 동준은 트럭 하나에 살림살이를 싣고 다니며 섬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한다. 엄마의 재혼 이후 엄마와 사이가 틀어질 대로 틀어진 동석은 엄마 집이 있지만 엄마 집에 들어가지 않고 반항하듯 집 없이 트럭에서 산다. <우리들의 블루스>에 나오는 하우스리스 두 사람은 빈곤이나 추락이 아닌 자유와 반항의 이미지로 비춰지기 때문에 어찌보면 멋있어 보이기까지 한다.



  <노마드랜드>에 등장하는 린다는 자신을 '홈리스가' 아닌 '하우스리스'라고 불리기를 바란다. 열심히 살았지만 예순네 살 여성인 린다는 결국 가진 집도 없이 소형 트레일러에 살며 살아남기 위해 앞 날을 알 수 없는 저임금 임시 노동에 의존하고 있다. 자급자족을 꿈꾸고 소형 트레일러의 삶이 자유롭다고 말하지만 현재 그녀의 삶은 선택이 아닌 '떠밀림'에 의해서였다. 

  현재 미국에는 전통적인 형태의 주거지를 갖지 않고 밴이나 RV 차량을 이용해 길에서 생활하는 노마들들이 많다. 2007년에서 2009년에 미국을 시작으로 전 세계를 경제 위기로 몰고 온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많은 미국인들이 집값보다 더 많은 집담보 대출을 견뎌내지 못하고 정상적인 사회에서 튕겨져 나왔다. 이들은 차량에서 생활하며 임시직 일자리를 찾아 이동한다.

  린다 역시 캠핑장에서 관리자로 일하기도 하고 아마존 물류창고에서도 일한다. 아마존은 배송 피크 시작 전 육체적으로 힘든 업무를 여름 휴가를 보내는 일처럼 아마존 창고에서 일하며 우정을 쌓으라고 일자리를 홍보하지만 창고에서의 도난을 막기 위해 실내온도가 섭씨 37도가 넘는데도 창고문을 열어주지 않고 문 앞에 엠블런스를 대기 시켜놓고 임시직 노동자를 착취한다. 축구장 13개를 붙여 놓은 크기의 창고에서 은퇴한 나이를 넘긴 노마들들이 창고를 가로지르며 육체를 혹사시키며 돈을 번다. 미국의 아메리카 드림은 깨진 지 오래다. 아메리카 드림 뿐만 아니라 미국식 자본주의,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신화 역시 깨지고 있다. 오히려 미국식 자본주의의 각자 도생만 남아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저자는 노마들을 피해자 집단으로 규정하지 않고 이들의 연대, 꿈과 희망을 그리며 책을 마무리한다. 린다는 어스십을 짓기 위해 땅을 사고, 어스십을 짓기 위한 첫발을 내딛는다. 노마들들은 서로를 환대하고 서로를 도우며 공동체를 만들어 나간다. 결국 희망은 사람일까? 착취적 자본주의 구조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 구조에서 빠져 나오는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최대한 덜 소비하고, 최소한의 소득만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자본주의에 속박된 삶이 아닌 내가 주체적으로 이끄는 삶을 살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하지만 미국의 여러 주에서는 길거리에서 잠을 자는 걸 법적으로 금지하고, 아마존과 같은 기업들은 저임금으로 임시직 노동자들을 착취한다. 결국 정치와 사회문제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데, 자본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삶을 강제로든 자율적 의지로든 선택했더라도 국가의 보호 아래 최소한의 기본권은 지키며 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표지를 채운 서부의 황량한 사막 풍경과 좁고 긴 길이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를 떠올리게 해 요즘 재독중이다. 1930년대 트랙터의 등장으로 땅을 잃은 소작농들이 캘리포니아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 1권에, 과일을 마음껏 따먹으며 돈을 벌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이들이 농장주에게 찾취당하며 멸시와 빈곤에 시달리게 되는 이야기가 2권을 이루고 있다. 대공황 이후 미국의 자본주의가 와 닿은 곳은 결국 길에서의 삶이다. 우리에게 아직 선택지는 있을까? 이대로 계속 열심히 살아간다면 나의 노년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떠돌이,뜨내기,부랑자,정착하지 못하는 자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다. 하지만 세 번째 밀레니엄에 들어선 지금, 새로운 종류의 유랑 부족이 떠오르고 있다. 결코 노마드가 되리라고 상상해본 적 없는 사람들이 여행길에 나서고 있다. 그들은 전통적인 형태의 주택과 아파트를 포기하고 누군가는 ‘바퀴달린 부동산‘이라고도 일컫는, 벤과 중고 RV, 스쿨버스, 캠핑용 픽업트럭, 여행용 트레일러, 그리고 평범한 낡은 세단에 들어가 산다. 그들은 중산층으로 직면하던 선택들, 선택 불가능한 그 선택들로부터 차를 타고 달아나는 중이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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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밤 - 당신을 자유롭게 할 은유의 책 편지
은유 지음 / 창비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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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회사일이 바쁜 하루였다. 퇴근 시간은 다가오지만 집에 가도 가사일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더 지치는 기분이 들었다. 옆 자리 동료에게 "퇴근해서 집에 갔는데 누가 짠 하고 저녁을 차려 놓고 있으면 너무 좋겠다"며 퇴근했는데, 진짜 저녁이 차려져 있었다. 목감기가 심해서 연차를 내고 쉬고 있던 신랑이 컨디션이 좋아졌다며 차려준 밥상이었다. 정희진 작가님은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에서 자기 입에 들어가는 밥은 할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늘 신랑과 아이들의 입에 들어갈 밥을 차려주면서도 내 입에 들어갈 밥을 해준 신랑에게 "고마워"라고 말한다. 옛날 사람이라 그런가. 신랑의 가사노동이 늘 고맙고,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해방의 밤]은 은유 작가님이 주부로서 살아온 지난 삶이 녹아있어서 유난히 공감하며 읽은 책이다. '할 것들로 꽉 짜인' 일상에서 '밤'은 은유 작가님에게 해방의 시간이었다고 한다. 하루치 노동을 마치고 나를 대면하는 시간, 가까스로 입장할 수 있는 나만의 시간.


20년을 직장일과 가사일, 육아를 병행하며 살아오면서 나 역시 아이들이 잠이 들고 난 후의 '밤'에만 오롯이 나로서 존재할 수 있었다. 아들이 성인이 되고 딸이 17살이 되면서 '나를 위한 시간'이 많아지지 않을까, 라는 기대로 시작한 여러가지 것들을 해내는 게 여전히 버겁고 힘들 만큼 시간은 늘 부족하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노동, 가사노동. 


은유 작가님이 '나를 자유롭게 해주는 밤'에 '나를 살린 숨구멍'인 책으로 편지를 쓴 글을 모은 [해방의 밤]은 '살림서사'와 책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 보물 같은 책이었다. 


'책을 통해 대비할 수 있는 일이란 없고 벌어진 일은 벌어지고 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밤에는 문학만이 나를 살려두었다" -박혜진 [이제 그것을 보았어] 중에서 / [해방의 봄] p.358


좋은 책을 너무 많이 소개해주셔서 장바구니가 폭파 직전이지만 가사일과 직장일 등 꽉 짜인 일상 속에서 '바깥을 보며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자유를 알아가는 재미를 느낀 책이었다.


+책은 책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통해 나온 책은 '나'를 통과하면서 또 따른 색을 띄게 되겠지.

인터넷에서 인종차별 철폐 집회 사진을 봤는데 흑인이 든 피켓에는 이런 문구가 써 있었다. ‘평화는 백인의 단어다. 해방이 우리의 언어다.‘ 모아놓고 나니 이 책에도 해방이란 말이 꽤 여러번 등장한다. 읽는 사람이 되고부터, 즉 고정된 생각과 편견이 하나씩 깨질 때마다 해방감을 느꼈기에 쓴 것 같다. 나도 해방을 우리의 언어로 삼는다. 비록 앎이 주는 상처가 있고 혼란과 갈등이 불거지기도 하지만, 무지와 무감각의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나의 무신경함이 누군가의 평화를 깨뜨릴 수 있으며, 적어도 약자의 입막음이 평화가 아님은 알게 되었다. 더디 걸리더라도 배움을 통한 해방은 내적 평안에 기여하고 낯빛과 표정을 바꿔놓는다고 믿는다. 해방은 평화를 물고 오는 것이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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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끝의 버섯
애나 로웬하웁트 칭 지음, 노고운 옮김 / 현실문화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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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엉망이 되어갈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는가?

나는 책을 읽는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수작'을 발견한다."


친정 부모님이 계시는 강원도 동해로 이사 온 지 올해로 10년 차가 됐다. 부모님이 사시는 아파트는 90년대 후반에 지어진 저층 아파트로 건물의 노화만큼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주로 거주하는데, 옆집 할머니, 5층 할머니, 201호 아줌마 등 주거민이 서로 가깝게 지내며 '두레'의 역활을 한다. 


"옥수수 살래?" 하고 엄마에게 전화가 오면 장마철이 다가오는 구나 생각하고(1층 할머니가 텃밭 정도의 땅에서 옥수수를 키우신다) "고구마 살래?" 하고 전화가 오면 늦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겠구나(5층 할머니가 텃밭에서 고구마를 키우신다) 생각한다. 202호 아저씨는 퇴직 후에도 몸을 놀리지 않고 버섯도 따서 나눠 먹고, 참두릅도 따서 나눠 먹는다. 제삿상에 올라오는 문어는 늘 202호 아저씨가 잡았을 때 미리 사서 냉동실에 얼려 놓은 것이다. 


부모님이 사시는 아파트의 어르신들은 돈의 가치로 환산되지 않는 노동을 하지만 나는 엄마를 '현장중개인'으로 끼고 돈을 주고 옥수수와 고구마 등을 구입한다. 


"삶이 엉망이 되어갈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는가? 

 나는 산책을 한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버섯을 발견하다."


라는 문장 때문에 읽게 된 <세계 끝의 버섯>은 폐허가 된 오리건주의 소나무숲에서 자라는 송이버섯을 통해 다양한 '패치'들로 구성된 주변 자본주의적 세계를 너무 멋지게 보여주는 '수작'이었다. 제국주의적 수탈과 전쟁으로 오리건주로 온 미옌인과 몽인, 난민으로 미국에 왔다가 오리건주로 온 이주민들, 베트남 참전 상이용사로 자본주의적 세계와 맞지 않아 오리건주로 온 미국인 등  '확장적 자본주의'세계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이 목재산업으로 폐허가 된 오리건주의 숲에서 버섯을 채집한다. 송이버섯은 1980년대 초고속 성장을 이룬 일본에서 최고급 선물로 통용되는데, 일본에서 채집된 송이버섯으로 수요가 충족되지 않자 오리건주에서 채집된 송이버섯을 수입한다. 채집인들에 의해 채집된 송이버섯은 '프리랜서 구매인'과 '현장중개인', '대규모구매업자'를 통해 상품화되고 자본화되는데, 이 과정을 저자는 구제축적이라고 한다. 


비자본주의적인 패치들이 자본화되어 가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책을 시작한 저자는 파괴된 숲을 어떻게 부활할지,자본주의와 지구 생태계 간의 어떻게 형성해나가야 할지, 다종의 얽힘이 만들어가는 자본주의적 교환가치, 주변자본주의적 공간을 어떻게 형성해나갈지, 소나무와 버섯처럼 사람과 자연은 어떤 역사를 만들어갈 수 있을지로 확장해서 나간다. 


부모님이 거주하는 아파트의 어르신들의 옥수수 농사와 고구마 농사 역시 비자본의적 패치이고, 부모님의 아파트는 패치를 구성하는 공간으로서 자본주의적 노동을 하지는 않지만 자본을 생성하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공간일 것이다.


전남대 문화인류고고학과 조교수로 계시는 노고운 교수님이 번역을 하셨는데, 번역가님은 <해재>에서 묻는다. "번역은 노동일까?"


번역도 너무 훌륭하고 구성도 훌륭하고, 오랜만에 읽는 내내 감탄하면서 읽은 책이다. 우리는 어떤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할지, 여러가지 질문을 함께 던져주는 책. 




이보다 더 글로벌 공급 사슬에 더 적합한 참여자가 있을까? 자본이 있든 없든 자발적이고 준비된 기업가들, 거의 모든 경제적 기회를 잡기 위해 자신들의 종적적이고 종교적인 동료를 동원할 수 있는 기업가들과의 접점이 바로 여기다. 임금과 혜택은 필요하지 않다. 공동체 전체가 동원될 수 없고, 그것은 공동체 구성원이 공유하는 공동의 이유 때문이다, 복지의 보편적인 기준은 거의 유의미하지 않은 듯 보인다. 그들의 활동은 자유의 프로젝트다. 구제축적을 찾는 자본가들이여, 여기에 주목하라.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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