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제 초등 고학년인 아이들은 산타를 믿지 않는다.

 

아이들이 미취학일 때는 대목을 맞아 한껏 부풀린 가격으로 뒷목을 잡게 하는 여러 장난감을 찾아 헤매며 보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홀가분하기도 하고 어쩐지 그때가 그립기도 하다.

 

아들은 엄마가 자신이 원하는 로봇 시리즈를 구해오지 못하고 흔한 걸 사왔을 때 산타가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고 한다. 그리고 동생에게도 말해주어 동심 파괴.

 

산타가 있고 나는 착하고 선물을 받을 수 있고

내게 주어지는 모든 것이 당연하다고 믿는 동심.

 

아직도 이 세상에는 선물을 받을 수 없는 아이들도 많다는 것을 헤아릴 수 없는 그런 동심, 은 언젠가는 파괴되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삐딱한가?

 

기사를 보니 열 살 전후로 믿는 것은 좋다고 한다.

그런데 이미 그 이전에 세상을 빨리 알아버린 아이들도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브여서 조촐하게 집 근처에서 밥을 먹고 케이크에 잠시 불도 붙이고 아이들이 성탄 즈음이면 자주 보는 나홀로집에를 보았다. 

 

영화 보고 나서 찾아보니 케빈 역을 맡은 맥컬리 컬킨도 아재가 다 되었네.

무심한 세월 ㅜ.ㅠ

 

*

지난 주말에 그 유명한 <아몬드>를 읽었다.

 

-태어나 줘서 고마워.

엄마가 내 손을 조물거리며 덧붙였다. 생일 축하해. 태어나줘서 고마워. 어딘지 식상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해야 하는 날들이 있는 거다.   59쪽

 

크리스마스 이브에 모처럼 나온 가족 외식에서 '윤재'는 가족을 잃는다. 눈앞에서 할머니를 잃고 엄마는 의식을 잃었는데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윤재는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알렉시티미아'를 앓고 있어 사건을 수수방관한 사람들이 왜 그랬는지 의문을 품을 뿐 제대로 애도할 수조차 없다.

   

누구나 머릿속에 아몬드를 두 개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귀 뒤쪽에서 머리로 올라가는 깊숙한 어디께, 단단하게 박혀 있다. 크기도, 생긴 것도 딱 아몬드 같다. 복숭아씨를 닮았다고 해서 '아미그달라'라든지 '편도체'라고 부르기도 한다.

외부에서 자극이 오면 아몬드에 빨간 불이 들어온다. 자극의 성질에 따라 당신은 공포를 자각하거나 기분 나쁨을 느끼고, 좋고 싫은 감정을 느끼는 거다.

그런데 내 머릿속의 아몬드는 어딘가가 고장 난 모양이다. 자극이 주어져도 빨간 불이 잘 안 들어온다. 그래서 나는 남들이 왜 웃는지 우는지 잘 모른다. 내겐 기쁨도 슬픔도 사랑도 두려움도 희미하다. 감정이라는 단어도, 공감이라는 말도 내게는 그저 막연한 활자에 불과하다.  29쪽

 

드라마에서 봤든가 돌처럼 단단해지면 좋겠어, 라고 우는 주인공을 본 적이 있다.

윤재가 이런 상황에서 감정을 느낄 수 없어 덜 괴롭다면 다행일까.

 

가까운 이들을 잃고도 무심히 살아가는 윤재는 담담하게 자신의 일상을 잘 꾸려가는듯이 보인다.

 

폰과 대화하기 앱으로 무료한 시간을 달랜다.

 

잘 지내?, 라고 썼다.

응. 넌?

나도.

굿.

정상적인 게 어떤 거니?

남들과 비슷한 것.

 

한동안 정적. 이번엔 좀 길게 써  봤다.

 

남들과 비슷하다는 건 뭘까?

사람은 다 다른데 누굴 기준으로 잡지?

엄마라면 내게 무슨 말을 했을까.

 

밥 다 됐다. 나와라.               71쪽  

 

감정을 느낄 수 없다는 설정이기 때문에 윤재의 감정보다 이후의 생활과 주변의 반응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가져본 적이 없는 것을 잃을 수는 없으니 윤재가 어떤 마음일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래도 혼자 살아가는 윤재가 어쩐지 한없이 가엾게 여겨진다. 보육원을 나와 독립한 청년들 다큐를 보았을 때처럼.

 

2부에서 '곤이'라는 상처받은 인물이 윤재의 세계로 들어오면서 이야기는 다른 국면을 맞는다. '곤이'를 보면 김영하의 단편 <아이를 찾습니다>가 저절로 떠오른다.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잘 자라다 유괴되어 여러 곳을 전전한 끝에 원 가정에 힘들게 돌아왔지만 모든 게 이미 돌이킬 수없이 어긋나 있다.

 

이렇게 많이 상한 '곤이'가 감정 불능의 '윤재'를 만나고 서로 치유하기까지의 과정이 3부에 담겨 있다.

 

그리고 기적.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결말.

 

뭔가 크리스마스에 어울리는 이야기이다.

 

억지스럽더라도 해피엔딩, 을 소망하게 되는 시기다.

 

*

 

<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날 확률>은 전에 기말 끝나고 이 시기에 아이들에게 보여준 영화이다.

 

사연 많은 노숙인 긴 상과 트렌스젠더 하나짱 그리고 10대 가출소녀 미유키 세 사람이 크리스마스 이브에 쓰레기더미에서 버려진 아기의 부모를 찾아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블랙유머가 난무하고 어이 없는 설정이 이어지지만 그래도 모두에게 해피엔딩!

 

의외로 하나짱에게 거부감을 갖는 애들도 있으나 재미있게 잘 보았던 영화이다.

 

성탄 미사를 오전에 드리고 아이들과 함께 이 영화도 다시 보고 싶다.

 

 

*

여기부터 철저히 일기

 

또 하나의 기적!

 

아들은 여름 첫영성체 이후 내내 냉담이고 판공성사도 안 봐서 기대도 안 하고 있었는데

성탄 미사를 같이 봐준다고 한다. (핸드폰 시간 늘려달라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그래, 부활절이랑 성탄절에만 나와도 어디니.

 

작고도 큰 기적들이

지금

이 자리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장 해결될 수 없지만 무척이나 마음 쓰이는 일들이 주변에 일어나고 있다.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다면 덩달아 일상의 활기를 잃고 만다. 집도 어수선해서 세탁소 옷걸이가 아무데나 널려 있어 그걸 밟고 넘어져 다치기도 했다.

 

그리고 책으로 도피, 이야기로 도피.

 

분명히 나보다 불행한 사람들이 널리고 널려 있다고 해서 

엄살은 이제 그만일까?

 

남의 불행을 보며 위안 삼는 걸 그만두어야 하지만,

현실 속 인물이 아니라면 그래도 이해받을 만한 사안일 것일까?

 

그냥 복잡한 생각을 잠시 멈추고 싶었다.

그럴 때는 장르물이 제격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작년 즈음부터 많이 읽었다. 새로 나오면 어떤 건 읽어보고 싶지만 소장은 잘 하게 되지 않는다. 두번 읽게 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어제도 어김없이 새벽에 깨서 거의 단숨에 <살인의  문>을 다 읽었다. 찍어내듯이 다작하는 히가시노 게이고도 역시 하루키같이 체력이 좋은 분이다. <살인의 문>은 2003년 작품인데 이제야 소개되나보다.

 

사회파추리소설답게 <살인의 문>은 흥미로운 인간의 심리를 그려낸다. 아주 평범한 사람들도  이건희같은 사람들이 부자인 건 용납하면서 동네 부자는 참아주지 못하는 그런 일그러진 마음을 가지고 있다.

 

죽음을 맨 처음 의식한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이다, 라는 문장으로 소설이 시작된다.

 

동네 유지이자 치과 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다지마 가즈유키는 경제적으로는 풍요롭지만, 가정 안에 마음 둘 곳이 없다. 노쇠한 할머니는 집안의 우환이고 간병 문제로  부모는 자주 다툰다.

 

학교에서 조용히 지내던 가즈유키는 가난한 두부 가게 아들 구라모치 오사무를 만나 어울리게 되면서 이상한 기운을 느낀다. 행운의 편지와 비슷한 부류의 '살(殺)'이 새겨진 엽서를 23통이나 받기도 하고 이후 할머니의 죽음, 부모의 이혼, 치과의사였던 아버지의 몰락으로 가즈유키는 자신이 저주에 빠졌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후 가난한 동네로 옮겨가 수영장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다시 오사무와 조우하면서 가즈유키는 원하는 것이 있을 때(주로 여성)마다 오사무에게 빼앗긴다. 초등학교 때의 저주 엽서도 오사무의 소행으로 밝혀지고 오사무는 수상한 일들(주로 사기)을 벌일 때마다 가즈유키를 끌어들여 계속 그의 앞길을 방해한다.  번번이 구라모치 오사무에게 당하면서 가즈유키는 속으로 구라모치에 대한 살의를 키워가지만, 실행에 이르지 못하고 악연을 이어간다.

1권 중반부터 과연 내 인생에도 저런 악연이 있을지 돌아보았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기억이 있기도 하지만 이제 와서 다 부질없다. 언제부터인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미운 사람들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미운 사람들이 정말 싫어지는 그 요소들이 다 내 안에 이미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책을 다 덮고 나름 반전을 접하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든다.

 

오사무는 물론 희대의 비열한 사기꾼이고 거대 악이지만 가즈유키 역시 5학년 때부터 스스로 바르지 않은 방향으로 인생의 선택을 지속해왔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보고도 할머니 지갑에서 몰래 돈을 빼오고 오사무와 어울렸던 때부터 하나하나 어긋나기 시작했다.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악이란 대단히 그럴듯한 어떤 것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데서 나온다. 성찰하지 않고 행동하면서 가즈유키의 삶은 점차로 무너져갔다.

 

그래도 가즈유키만 몰아세우기에는 오사무의 악행이 너무나 지독해서 엄연히 같이 악을 저지른 적도 있는 가즈유키를 변호하게 된다는 게 요상하다.

 

구라모치 오사무가 어딘가 있을 법한 인간이라서 더 그럴까. 주변 모든 인맥을 철저히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동원하는 그런 부류들이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저런 악연을 세상 살며 안 마주치길 바랄 뿐.

 

가즈유키는 늘 당하고 나서 삶의 방향을 다시 잡고 하는데 그때마다 오사무가 나타나 훼방놓는 순간 독자에게도 살인의 문이 열린다고나 할까.

 

사회파추리소설이라 일본사회의 문제, 다단계나 노인 대상 사기 과정 등도 잘 드러난다. 일본이 겪었던 사회 문제를 우리가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요즘 우리 지역에서는 사이비 종교가 극성이다. 시내에서 젊은아이들이 잘 차려입고 포교에 열중하는 것을 보면 슬프다.

 

 

*

화요일에 동네 북카페에서 <개인주의자 선언> 속의 아픈 사연들도 드문드문 읽었다. 

 

그리고 드디어 읽게 된 <아무튼, 스웨터>

 

이 시리즈를 좋아하는데 그냥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대충 서서 보게 된다. <아무튼, 스웨터>만 정독했다. 어릴 때 외할머니가 떠주신 스웨터의 색감이 기억났다.

 

터키블루 스웨터 

나란히 네 벌.

 

당시 큰아들과 큰딸이 동시에 힘든 일을 당해 친손주, 외손두 도합 네 명, 미취학과 국민학교 아이들을 돌보며 가게일도 하시면서 스웨터를 네 벌이나 떴던 외할머니께 경의를 표한다. 그중 내가 제일 커서 나만 금색사가 섞인 오렌지빛 카디건도 받았었지. 어린 마음에 할머니는 아들이자 친손주만 예뻐한다고 여긴 적이 있었는데 내가 아이들을 키우고 보니 새삼 그 시절의 할머니가 대단해 보인다.

 

그리고 대학 다닐 때 겨울마다 입었던 여러 스웨터들도 떠올랐다.

 

호감 가는 분이 있어 엄청 신경 써서 스웨터랑 그 안에 받혀입을 조화로운 셔츠도 골라 입고 나갔건만 집에 가다보니 스웨터 아래로 내복이 비어져 나와 있어 지하철 유리문에 머리를 박았던 흑역사도 떠오른다.

 

아이를 낳고 기르며 스웨터의 까슬한 감촉 때문에 잘 입지 않게 되었고 최근에 점차 살이 오르며 니트류는 포기하게 되었다.

 

스웨터가 잘 어울리는 여리여리 체형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이제 힘들듯하고

겨울상품 세일 시기에 현재 내몸에 어울리는 풍덩한 멋스러운 베스트나 한번 잘 골라보아야겠다.

 

*

아무튼, 도피.

 

행복은

어떤 만족은 강도보다는 빈도에서 오는 것.

 

잡다한 책을 읽고 마음 속 깊은 근심보다 가벼운 고민을 말할 수 있는 이들과 차를 마셨다.

판공성사에서도 말을 줄이고 줄여 간단히 고하고 오래 기도하고 침잠하기로 마음먹었다.

 

 

  

 

 

 

 

 

 

 

 

 

 

 

 

 

 

 

행복이란, 온천물에 들어간 후 10초 같은 것. 그러한 느낌은 오래 지속될 수 없기에, 새해의 계획으로는 적절치 않다.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을 바라다보면, 그 덧없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쉽게 불행해진다. 따라서 나는 차라리 소소한 근심을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 이를테면 ‘왜 만화 연재가 늦어지는 거지’, ‘왜 디저트가 맛이 없는 거지’라고 근심하기를 바란다. 내가 이런 근심을 누린다는 것은, 이 근심을 압도할 큰 근심이 없다는 것이며, 따라서 나는 이 작은 근심들을 통해서 내가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새해에 행복해지겠다는 계획은 없다>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이를 낳고 나서는 주말이 제일 부담스럽다. 아이들도, 나도 쉰다고 여기려고 해도 온전히 쉬게 되지 않는다.

 

시간을 보내려고 유명한 <고령화가족>을 이제야 읽었다. 재미있다고 추천한 분들 말대로 술술 읽혔지만 뒷맛이 개운하지는 않다. 뭔가 급조한 해피엔딩 같다. 그래도 가족이라면 마땅히 행복해야 한다는 당위를 두고 결말을 지은듯하다.

 

결론은 힘들게 하는 가족이 있다면 담백하게 살기는 힘들다는 것.

 

아마도 현실 속에서는 형 '오함마'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을 것이고 조카 민경이도 섬에 팔려가고 엄마가 과거에 사랑했던 상대를 다시 만나는 일도 없었을 테지만, 이렇게 안 풀리는 사람들도 그래도 종국에는 행복했으면 하는 그런 바람에서 나온 이야기는 아닐지.

 

그냥 <고래>의 환상성과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에 더 매혹되었다고 해두자.

 

영화도 아직 못 보았지만 당분간은 볼 생각이 없다.

 

*  

 

태어날 때 주어진 가족을 벗어나 스스로 가족을 선택하고 지금 이 자리에 있다. 한 사람을 선택하는 순간 원치 않게 맺어지는 인연도 있다. 내 개인적 인연이라면 할말도 편하게 하겠지만, 여러 층위로 얽힌 관계에서는 쉽지 않다.

 

아들이 치열이 고르지 않은 편인데 자라나는 아이라 별 생각 없이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주말에  '헬륨'님(내가 받은 첫 인상으로 가벼워서)이 교정을 해야겠다며 자신이 아는 동생을 소개한다고 한다. 이분은 대체로 아는 형, 아는 동생이 많고 그들을 통해 만사를 해결하려고 한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대부분 그걸 잘하는 사람을 찾기 마련인데 이분은 신기하게 아는 사람 중에 그 일을 할 만한 사람이 있는지 보는 식이다.

 

아무튼 이분 말씀에 따르면 그 아는 동생이 치과에 교정기를 납품하는 일을 하는데 치과 의사들이 수술을 제대로 못하고 영업사원에게 시키는 것도 많고(대체 무슨 근거로 ㅜ.ㅠ) 그래서 심지어 영업사원이 동물에게 연습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누가 봐도 얼토당토 않은 주장인데 옆에서 애들 아빠는

그래서 그 동생이 어디 사는데 하고 묻는다.

 

아, 이래서 원 가족이구나.  

비합리적인 사고라 해도 아예 무시하지는 않는다.

 

나도 왜 헬륨님이 이런 주장을 하는지 생애를 알기 때문에 이해는 한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인데 뜻대로 되는 일이 없어 사회 기득권층에 막연한 반감을 품고 있다. 생각을 교정해주기 어렵고, 그 마음에, 막연한 울분에 공감해주어야 하겠지만 그마저도 나는 원 가족이 아니라 매번 힘들다.

 

그냥 다 듣고 있다가 나중에 기어이 한마디 하는 나.

 

아이 다니는 치과 병원 원장님이 교정 전문으로 대학에 강의를 나가고 있어요.

헬륨님 모교 치과대학 교수고 좀 지켜보자고 했어요.

 

나는 그저 아이 문제에 개입하는 것이 싫을 뿐이다. 

 

이 아이는 어떤 집안의 장손이 아닌 그냥 우리집 아이 아니 더 나아가서는 그냥 누구로만 살면 좋겠다.

 

이어지는 집안 먼 친척 누구누구가 잘되고 어찌 되고 하는 이야기들이 편하게 들리지만은 않는다.

 

그냥 내가 많이 불편하구나, 예능이나 열심히 보자 하고 아이들과 예능을 엄청 보다가 딸아이가 집에 가자고 적당한 때에 신호를 주어 집에 왔다.

 

집에 오고 나서는 본가 식구들이 요새 아프기 때문에 줄줄이 안부 통화를 하다가 또 지치는 부분이 있었다.

 

경계를 설정하고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담백하게 만나기 힘든 관계들이 있다.

 

이번 판공성사는 엄청 길어질 것만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활자가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시기이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상상이 더해져서 온갖 근심에 마음이 짓눌리고 일상이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딸아이는 엄마, 괜찮아, 라고 자주 묻고 난 감기가 덜 나았어, 피곤할 뿐이야, 라고 둘러대곤 했다.

 

<러빙 빈센트>를 보는데 애들은 역시 보다가 나가버린다. 어딘가 우울할 것 같다며.

너희들 진짜 눈치 빠르다. 그래도 순도의 우울은 아닌데

 

*

 

막연하게나마 그래도 고흐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위대한 '화가', '천재'라는 수식에 가려진 진짜 일상의 고흐에 대해서 그동안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

 

당신은 그의 죽음에 대해 그렇게나 궁금해하면서 그의 삶에 대해선 얼마나 알죠?
- 마르크리트

 

 

고흐가 산책하고 그림을 그릴 때 함께한 사람들은 당대의 유명한 예술가보다는 마을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기억하는 고흐는 광기 서린 예술가가 아닌 더없이 조용하고 다감하고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의 점심을 뺏어 먹는 까마귀를 보며 행복해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이 사람이 정말 외롭다는 것을 알았죠.
- 뱃사공

 

예술사에 큰 족적을 남겼지만 살아생전에 부와 명예를 누리지도 못했고 늘 외롭고 빈곤했던 빈센트는 노란벌판에서 권총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여러 정황을 보면 자살이라기보다는 '사고사'에 가깝게 보인다.

 

오래 전에 서프라이즈에 나왔을 것이다. 아마도 동네 아이들이나 한량이 권총을 가지고 장난을 치다가 실수로 고흐를 향해 발사했을 것이다. 이때 고흐가 이에 대한 책임을 지우고 싶지 않아 자살을 시도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당대의 부족한 의료기술로 고흐를 살리기 힘들었을 터.

 

서프라이즈 식의 해석이든 영화에서 나온 대로 테오에 대한 미안함과 현실에 대한 중압감 때문에 생을 저버린 것이든 죽음 자체에 매몰될 필요는 없다. 

 

진짜 중요한 것은 고흐의 실제 삶이지 않을까?  

 

고흐의 죽음의 미스터리를 쫓아가는 가운데 고흐의 진짜 삶이 드러난다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묘미일 것이다.

 

영화 내내 시종 온화한 빈센트의 표정과 몸짓에 마음이 편해진다. 격정에 차서 기행을 일삼는 고흐가 아닌 자연과 이웃, 가족을 사랑했던 본연의 모습이 드러난다. 여러 화가들이 다시 그린 고흐는 음울하지 않고 온화하다.  

 

 

나는 내 예술로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싶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길 바란다. 마음이 깊은 사람이구나.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구나.
- 빈센트

 

아름다운 장면들이 모두 지나가고 영화 말미에 고흐의 말이 스쳐지나갈 때 다시 눈물이 살짝.

 

외롭고 그저 이해받고 싶었던 사람이었구나.

 

 

 

 

한참 어릴 때 싸이월드 대문에 한동안 걸어두었던 이 그림의 의미를

그때 진짜 알았나 싶다.

 

허세허세유치유치의 시절

 

누구나 그런 시절은 있었겠지.

 

 

 

*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삶을 살다 보면 무너질 수 있다.
- 조셉 룰랭

 

영화를 보고 가장 마음에 남는 말이다.

 

속절없이 몸과 정신이 무너지고 있는 누군가를 떠올려본다.

 

나도 어느 정도는 그렇다.

정신력?이 마음?이 너무 약해져서 요즘 자주 놀라고 상황 대처력이 떨어지고 있으니.

 

 

그냥 이 새벽에 이런 생각이 든다.

 

태어날 때 주어진 각자의 에너지 분량이 있어서 생애 초반에 미리 당겨 무리하게 그걸 다 써버리면 노년에는 아예 쓸 수 없지 않을까.

 

언제나 (남들이 보는) 최선을 다하려 하지 말고 이제 좀 적당하게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두고 기다리자.

 

그리고 '친절'만이 최대의 덕목.

 

최근에 따뜻했던 기억이 모두

기대하지 않았던 '친절'에서 왔다.

 

남에게나

특히

나 자신에게 엄격해지지 말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난 주는 정말 힘겨웠다.

 

엄마랑 동생이 동시에 건강이 좋지 않아 본가에 다녀왔다. 육아카페에는 호기롭게 친정간다며 사진을 올렸지만 요 몇 년은 본가에는 거의 좋지 않은 일로 가서 늘 발걸음이 무겁다.

 

창 밖에는 우리 지역에서 거의 첫눈이라 할 만한 눈이 내리고 객차 안도 고요했지만 지금 이 분위기를 즐겨보자고 마음 먹었지만 목이 부어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데 또 이렇게 불려가야 하니 서글프기만 했다.

 

직접 가서 보니 역시 엄마는 안정되지 않았고 여동생은 산후우울증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작년에 늦은 결혼하고 바로 아이가 생겨 좋아했는데 뜻하지 않은 복병이 이렇게 또.

 

안타깝지만 제부에게 맡기기로 하고 위로를 하고 본가로 향했다.

 

본가의 상태는 처참했다. 옷도 못 갈아 입고 치우고 또 치웠다. 깔끔해지기 위한 청소가 아닌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청소였다.

 

*

<나이든 부모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라는 무거운 질문을 주는 이 책을 나는 부모를 사랑할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으로 집어들었다.

 

세상에는 가엾고 안타깝고 하지만 진심으로 사랑하기 힘든 경우가 있기 마련이다. 저자는 치매인 아버지를 직접 돌보며 많은 번뇌 끝에 무엇을 해서 가치로운 존재가 아닌 있는 것만으로 감사한 존재가 부모라는 모범 답안을 내놓는다.

 

매일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나가면 됩니다. 어제부터 시작된 관계를 오늘도 이어나가는 것이라 생각지 말고, 오늘부터 새롭게 시작한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물론 앞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내가 먼저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를 일이지요. (87-88쪽)

이런 구절을 보면 존경스럽다. 작년에 간호하며 빌려보았는데 계속 생각나는 것을 보면 사서 보아야 하나 싶다.

우리가 부모님을 돌보면서 해야 할 일 중에 하나가 이상적인 부모님에게 미련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이상적인 부모님을 생각하는 한 현실의 부모님은 점수를 빼버리는 감점법으로만 판단하게 됩니다.  111쪽

 

지금보다 엄마가 건강하셨던, 젊었던 시기에도 나는 이상적인 어머니 상을 갖고 그것에 부합하지 않는 엄마를 꾸준히 단죄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자꾸 분리해나가기 시작했는데 불가능한 것이었다.

 

대학 때 선배언니 하나가 우리집 가정사를 듣더니 엄마와 여동생, 내가 분화하지 않은 하나의 아메바 같다고 그러다 공멸할 것이라고 해서 슬펐는데 살다보니 차차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되었다. 이제야 겨우 떨어져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쉽지 않다.

 

아버지를 간병하면서, 저는 자식이 부모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도 사람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줄 수도, 누군가에 의해 행복해질 수도 없습니다.   124쪽

 

진실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니 더 슬프다.

 

내가 내 딴에는 무리를 해서 본가에 들러도 엄마와 동생의 슬픔과 불안은 쉽게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엄마의 젊음을 되돌릴 수도 없고, 동생의 육아를 대신할 수도 없다. 그냥 내 마음 편하자고 가서 보고 온 것인데 어째 보고 나니 나도 더 힘들어졌다. 아이들에게 배달음식을 주고 이틀 집안도 방치하다 어제 미사보고 겨우 청소하고 밥해주고 숙제도 봐주게 되었다.

 

*

집에 가는 길에 무거운 마음으로 기차를 탔는데 뒷자리 아주머니들 수다가 엄청났다. 참을 수가 없어 결국 지나가시는 직원분에게 이야기해 좌석을 바꾸었다.

 

<예민함이라는 무기>는 전에 함께 읽기로 한 책이라 보고 있는데 읽기도 전에 내 얘기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보다 감각이 예민해서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고 처리하는 데 곤란을 겪나보다.  어느 자리에 가든 내가 있을 자리인지 아닌지 단번에 파악된다. 예민하지 않은 사람들이야 자기에게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서도 자신만 좋으면 웃고 떠들 수 있지만  예민한 사람들은 그게 잘 안 된다. 그러니 고립되기도 쉽다.

 

아직 읽고 있지만 중간까지의 결론은 예민한 사람은 감각의 질과 양을 조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민함'의 특성을 이해하고 항상 자신에게 보다 나은 환경을 만들어가라는 것이다.

 

책의 결론에 따르면 난 오늘 좀 쉬어가야 하는데 안타깝지만 수업이 있는 날이다.

 

그래도 어제 나만의 의식을 밤에 치르며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나만의 의식이라....

 

욥기를 읽으며 밤에 조금 울다가 이마저 너무 뭔가 감상적이고 우스워져서 그냥 누워서 새벽이 되니 오늘 할일들이 자동적으로 생각났다.

 

미역국에 밥을 말아 먹고 감기약을 먹고 애들 아침 챙기고 수업 준비해서 가야지.

 

올초에는 참 하기 싫은 일이었는데 이마저 없었다면 정말 힘든 한해가 되었을 것이다.

 

블로그에 투병기나 그런 개인사를 상세히 적는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았는데 그냥 쓰게 되는구나 싶다.

 

아, 제발 누가 나의 이야기를 적어 두었으면!

제발 누가 비석에다 기록해 주었으면!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다 영원히 새겨 주었으면!  (욥19;23-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