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에 문외한이라 해도 피카소라는 이름을 들어 보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세상의 부와 명예를 다 누리면서도 장수까지 한 그였지만 그 역시 무명화가로서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 이 시기를 ‘청색 시대’(1901~1904)라고 부른다.

 

1901년 당시 20세의 피카소는 가난했다. 돈을 벌지 못해 차가운 빵으로 연명했고 얼음장 같은 단칸방에서 살아야 했다. 가까운 친구 카사헤마스가 죽자 피카소는 자신도 제대로 먹지 못해 눈이 멀지 않을까 걱정해야 했다.

 

 

 

 

 

파블로 피카소 「인생」 1903년

 

 

‘청색 시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인생」은 젊은 예술가의 차갑고도 깊은 절망감이 느껴진다. 벽에 그린, 마치 웅크리고 앉은 인물은 고독과 절망, 아이를 어르는 어머니는 탄생과 모성, 연인(남자의 얼굴은 죽은 친구 카사헤마스)은 육체적 사랑을 상징한다. 사랑, 결혼 그리고 생명의 탄생. 인생의 황금 같은 순간들이 실은 고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청색 시대로 세상을 보면 인생은 하나도 아름다울 것이 없고 절망과 불행의 연속으로만 느껴지게 돼 있다. 청춘의 고통과 우울함, 복병처럼 찾아든 가난과 향수병, 미래의 불안으로 영혼과 캔버스를 온통 어두운 청색으로만 염색했다. 그야말로 무기력했던 청춘의 ‘청색 시대’였다.

 

그러나 인생에서 그 궁극적 과제가 생존이고 생존은 고통과 고난을 수반하는 것이다. 더 나아질 것이란 희망은 어쩌면 우울한 시대에 자라나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피카소도 그랬다. 1905년에 자신의 그림이 인정을 받고, 사랑에 빠지기 시작하면서 피카소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게 된다. 그의 그림에선 푸른색이 사라지고 화려한 붉은색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시기를 피카소의 ‘장밋빛 시대’라고 부른다.

 

 

 

 

 

 

 

 

 

 

 

 

 

 

 

인생의 무게는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든 이들의 어깨를 공평하게 짓누른다. 하지만 라이언 맥긴리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젊은 날이 삶 가운데 특별히 빛나는 시간이라는 미신도 설득력을 얻는다.

 

 

 

 

라이언 맥긴리 「Somewhere Place」 2011년

 

 

누가 청춘을 반짝 빛나는 순간이라고 했던가. 맥긴리의 「Somewhere Place」에서 청춘은 영원하다. 피카소의 「인생」의 연인은 공허한 초점으로 예정된 인생의 고통을 기다린다면, 맥긴리의 연인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어딘가에 있을 인생의 기쁨과 환희의 순간들을 기다리고 있다.

 

앞으로 이어질 내일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지만, 사진 속 비춰 내려오는 따사로운 장밋빛이 있어 마냥 두렵지만은 않다. 아마 우리가 나아가는 길도 그렇지 않을까. 인생을 살다 보면 청색 시대를 겪을 수밖에 없다. 거기서 절망하지 않고 노력하며 내일은 더 나은 날이 온다는 희망을 품은 사람만이 장밋빛 시대를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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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평론가가 내 그림을 마구 난도질해 댈 때마다 절망에서 버티게 해 준 힘은 오직 세잔의 그림이었다. 세잔만이 나의 유일한 스승이다.” (앙리 마티스)

 

외고집 세잔의 꿈은 소박하면서도 거대했다. 그는 평생 그림만 그리며 살다가 죽는 소박한 꿈과 불후의 명작을 만들려는 거대한 포부를 동시에 이루려 했다. 그의 그림은 처음에는 실력이 부족한 비주류로 멸시받았지만, 세잔은 스스로 선택한 화가의 길을 수도자처럼 고행하듯 살았다.

 

 

 

 

 

 

 

 

 

 

 

 

 

 

 

 

세잔의 그림을 원색적으로 비난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죽마고우였던 소설가 에밀 졸라였다. 졸라가 『작품』이라는 소설을 통해 누가 봐도 세잔이 모델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끌로드라는 인물을 만들어 놓는다. 끌로드는 능력도 없으면서 자기가 위대하다고 착각하다가 결국 자살하고 마는 화가이다. 이 소설을 계기로 그들의 우정은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폴 세잔 「생트 빅투아르 산」 (1906년)

 

 

세잔은 친구의 잔인한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고향에 있는 거대한 산의 풍경에만 집착했다. 그곳은 바로 생트 빅투아르 산이었다. 산은 세잔에겐 어머니 같은 대상이었다. 언제든 달려가 품에 안길 수 있고 유일하게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변함없는 산. 세잔의 상처를 제일 먼저 보듬어 준 곳도 이 산이다.

 

산의 기운이 상처투성이 세잔에게 와서 붓을 잡아 준다. 세잔은 성실한 농사꾼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생트 빅투아르 산을 그리고 또 그린다. 죽을 때까지 그린 산의 풍경은 87점. 평온하고 웅장한 형태의 생동감 넘치는 산을 20년 동안 여러 각도에서 다양하게 창조해낸다.

 

 

 

폴 세잔 「생트 빅투아르 산」 (1906년)

 

 

세잔은 사물을 바라보며 있는 그대로 그리려 하지 않았다. 본다는 것은 눈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사물의 본질을 그림에 반영할 수 없었다. 그 사물을 감각적 부분들로 해체함으로써 이미 우리 머리에서 해석된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생트 빅투아르 산」연작은 하늘이나 바위나 나무에 대한 것이 아니다. 자연이 뇌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그대로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그림들은 훗날 입체파(자연을 입방체로 묘사하는 화파, 대표적인 화가는 피카소)의 탄생을 예고한다.

 

평생을 걸어 생트 빅투아르 산을 그리다 죽어간 세잔. 외고집은 예술을 위한 투지였다. 그는 자신의 꿈이 옳았음을 세상 앞에서 증명했다. 산 하나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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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 미술의 주요 특징은 간단히 말해 꿈과 자연, 이상향이다. 낭만주의자들이 동경하는 이 모든 것은 지금 여기 없는 것이다. 아득하고 무한하며 끝닿을 데 없는 저 너머를 향해 있다. 윌리엄 터너(1775~1851)의 그림은 낭만주의의 이런 원형적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비, 증기, 속도」는 좀 더 각별해 보인다. 일단 제목에 ‘증기’, ‘속도’가 있는 것부터 근대적이다.

 

 

 

 

 

윌리엄 터너 「비, 증기, 속도」 1844년

 

 

화면을 아래와 위로 나눈다면, 아래는 땅을 보여주고 위는 하늘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리 분명하지는 않다. 자세히 보면, 오른편에 조그맣게 말이 끄는 마차가 보이고, 그 강물 위로 희미하게 조각배 한 척 지나간다. 기차는 몇 가지 색들이 교차하는 철길 위로 치닫듯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비와 기차는 붕 떠다니는 듯하다. 이 효과는 화면을 채우는 안개의 희뿌연 색채로 인해 더 실감 난다. 악조건의 기상에도 불구하고 질주 중인 기차의 속도감이 느껴진다. 어딘가에서 달려와 다시 어딘가로, 무한으로 기차는 달려간다. 기계의 힘, 그로 인한 가속도의 증가는 무한정 뻗어 갈 것이다.

 

여기에서 속도가 풍경을 압도하고, 기술(과학)이 자연(이상향)을 능가한다. 원래 무한성이나 신비는 자연의 속성이었지만, 이제 자연을 벗어나 기계 문명의 성격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기차는 산업화 이후 자연을 파괴하는 문명의 괴물을 암시하기도 한다. 낭만주의자들은 고대 신화나 중세 등 이미 가버린 시대를 갈망했지만, 터너가 갈망한 세계는 인간과 자연의 대립이 지양된 곳이다.

 

터너는 문명에 의해 잊힌 이상향의 은유물을 그림에 숨겨 넣었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토끼의 얼굴도 있다. 토끼는 순결함과 평화로움의 상징이다. 그래서 이상향에 사는 동물로 그려지는데 우리 조상들은 달을 늘 이상향으로 그렸고, 그 이상향에는 토끼가 방아를 찧고 있다고 했다. 토끼가 어두운 밤 달나라에서 방아를 찧을 수 있는 것은 눈이 그만큼 밝기 때문이다. 그래서 토끼 눈을 명시(明視)라고 한다.

 

달에 토끼가 살고 있다고 믿으면서 눈이 밝은 분이라면 이 그림에 숨은 토끼를 찾을 수 있다. 터너가 그린 토끼는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무의식 속에 남아있는 이상향의 희미한 흔적인 것이다. 과거에도 현재도 인간은 변함없이 자연과 이상향을 동경한다.

 

 

 

 

* 터너가 숨겨 놓은 토끼의 얼굴은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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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너가 숨긴 토끼의 얼굴은 기차가 지나가는 다리 아래에 있다.

단순한 착시에 의한 형상이라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실제로 미술 연구가들도 그림에 남아있는 토끼의 얼굴 형상에  

각자 나름대로 해석을 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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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땅, 죽음의 땅, 유령마을. 어느덧 3년째가 된 일본 원전 사고 지역을 표현한 말이다. 도저히 불과 얼마 전까지 사람이 살았던 곳이라고 상상조차 할 수 없어져 버린 곳,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부에서 일어난 지진은 예상치 못한 비극을 불러왔다. 지진에 이은 쓰나미,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로 방사능이 대량 유출된 것이다.

 

아비규환이던 당시에 대한 기억도 어느새 제3자들은 잊어가고 있다. 인간이 '망각의 동물'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잊혀져가는 기억 속에서 3자인 우리는 스스로를 자위한다. '자연이 입힌 상처는 치유되기 마련이다'라면서.

 

하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과 상처도 있다. 바로 인간의 오만이 남긴 상처다. 후쿠시마 원전 폭발은 세계 최고 수준의 안전함을 자랑하던 일본 원자력 발전의 몰락과 함께 이 지역을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으로 만들었다. 앞으로 몇십 년이 걸릴 지 모르는 자연의 재생을 그저 바라만 보게 만들었다. 이미 후쿠시마 원전 반경 20㎞는 인간이 정한 '죽음의 땅'이 돼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점차 흐릿해져 가고 있다.

 

바쁜 일상 속에서 남의 나라 일, 남의 지역 일이라며 우리들 대부분은 스스로를 달랜다. 아프지 않게 달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의 '죽음'이 속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년이란 시간 동안 간간이 들려 온 백혈병 환자 발생 소식도 더 이상 충격적이지는 않다. 인간이 살아 있음에 우리는 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망각의 귀퉁이에 버려진 동물들에게 현세의 지옥과도 같은 그 곳은 현재진행형이다. 얼마 있으면 풀리겠지 싶던 긴급 대피령에 남겨 두고 온 반려동물과 가축들은 하릴없이 주인을 기다리며 죽음과 대면해 왔다. 그들의 소외, 굶주림은 오만한 인간이 만든 자화상이다.

 

쓰나미가 뭔지, 방사능 수치가 뭔지도 모르는 동물들은 자신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도 모른 채 죽어가야 했다. 일본 정부가 후쿠시마 원전 20km 내에 거주하는 시민들에게 대피령을 내려 사람들은 마을을 모두 떠났다. 동물을 돌볼 이가 없다는 의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지진과 쓰나미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동물들이 굶어죽거나 먹이를 찾아 떠돌며 야생화되었다.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죽거나 떠도는 동물들. 죄 없는 생명들의 이 비참함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 벌써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 떠도는 동물 중에 살아남은 수가 몇이나 될까? 아마도 죽음의 땅에서 오지도 않는 가족을 기다리다가 굶어 죽었을 것이다.

 

 

 

 

 

쓰나미에 온 가족이 쓸려나간 가운데 개 한마리가 살아남았다.

카메라에 잡혔다.

조용한 바다를 배경으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무엇인가 말하고 싶다고, 그 눈은 말한다.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좌로 다시 우로 돌린다.

 

누구일까, 개로 하여금 하고 싶은 말을 못하게 하는 그는.

또 사람한테 개의 말을 들을 능력을 갖지 못하게 한 그는.

 

- 신경림 「누구일까」-

 

 

죽음의 땅을 목격한 시인은 말한다. 이런 끔찍한 지옥을 만들어낸 그들은 누구일까. 시인의 질문 속에는 참혹하게 죽어가는 작은 생명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무력감이 배어 있다. 눈에 눈물이 고인 채 고개를 돌리기만 하는 개의 모습은 스페인 화가 고야의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프란시스코 고야 「개」 1820~1823년 

 

고야가 그린 ‘검은 그림’ 연작의 한 작품인 「개」는 천진한 무방비함의 초상이다. 화가는 광대한 배경에 몹시 조그만 개 한 마리를 떨어뜨려놓았다. 창백한 황색 허공과 암갈색 바닥은, 형체와 스케일을 헤아릴 수 없어 더욱 위압적이다. 개의 네 다리를 집어삼킨 어둠은 쓰나미에 불어난 진흙 같기도 하다. 사방을 둘러봐도 개를 구해줄 지푸라기 하나 없다. 순종의 표시로 귀를 뒤로 젖힌 개가 주시하는 오른쪽 허공에는 어렴풋한 음영이 보인다. 개가 그토록 기다리던 주인일까. 아니면 가엾은 생명에 차가운 손길을 내밀려는 죽음의 신일까. 희미한 음영의 정체가 누구인지 중요하지 않다. 개의 눈빛을 보라. 원망도 호소도 없다. 그저 영문을 모른 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채 고개를 좌우로 돌리면서 주변을 둘러보면서.

 

죽을 때까지 죽음을 들여다보며 붓질했던 고야는 쓰나미처럼 덮쳐오는 거대한 멸망의 공포 앞에서 텅 빈 눈동자를 힐끔거리는 개의 대가리를 그렸다. 200여 년 전 그린 그 개의 모습은 인간이 만든 재앙이 덮친 후쿠시마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고야는 개의 가엾은 눈망울을 그린 것이 아니다. 죽음의 땅을 만들게 한 장본인, 바로 오만한 인류의 모습을 보고 있는 개의 눈망울을 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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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르 브뤼헐 「추락하는 이카루스가 있는 풍경」 1558년경

 

 

 

그는 하늘을 나는 마법에 도취돼 더 높이 올라갔다. 새의 깃털과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달고 태양에 가까이 가는 바람에 날개가 녹아 바다에 빠져 죽었다.

 

검푸른 물빛이 내게로 달려들었다. 순간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에 빠져 발버둥치는 이카루스를 보았다. 나, 아니 세상사람 모두가 광활한 삶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또 하나의 이카루스였다.

 

 

피터르 브뤼헐의 「추락하는 이카루스가 있는 풍경」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펼쳐졌다. 푸른 바다엔 배도 떠있고 섬도 있다. 언덕에선 목동이 양을 치고, 비탈 밭에선 농부와 소가 밭을 갈고, 또 한사람은 바다에 낚시를 드리우고 있다. 전경은 너무나 평화스럽다. 화폭 사분의 일이 하늘이고 나머지가 바다다. 목가적인 전원 풍경이 너무나 아름답다.

 

그러나 한 생명이 광활한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갈색의 막대기처럼 보이는 두 다리만 보일 뿐이다. 한 인간의 예기치 못했던 재난 앞에서 세상은 꿈쩍도 않는다. 그림에는 어부, 농부, 양치기 세 사람이 등장한다. 그도 아니면 물에 '풍덩' 하고 빠지는 소리를 그들 중 하나는 분명 들었을지 모른다. 물에 빠져 살려 달라는 이카루스의 절규를. 그러나 모두들 자기들 일에만 몰두 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이카루스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나고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했다는 교훈을 남겼다. 그러나 세계적인 경영 구루 세스 고딘은 이카루스 신화의 교훈을 반박한다. 날개를 만든 발명가이자 이카루스의 아버지인 다이달로스는 아들에게 너무 높게 날지 말라는 말만 한 것이 아니었다. 너무 수면 가까이 날아 날개가 물에 젖지 않도록 주의를 줬다.

 

이 이야기를 교훈 삼아 적은 것에 만족하고 겸손한 태도로 사는 사람이 '안전하다'라는 착각에 빠져 현실에 안주하는 것에 대한 경종을 울린다. 그는 새로운 틀을 구축하고 정해진 규칙 없이 시도하는 것을 '아트'(Art)라 말한다.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용기와 통찰력, 결단력을 갖춘 사람을 ‘아티스트’라 일컫는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날 때부터 아티스트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한다.

 

세상은 위험한 곳이라는 과장된 정보와 줄밖으로 벗어나면 먹고살기 힘들어질 것이라는 일상적인 불안을 안고 산다. 이 같은 채찍과 더불어 보상이라는 당근을 사용하는 산업사회 시스템에 완전히 길들여지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자존감 따위는 생각지도 말아야 한다. 꿈이라는 단어는 머릿속에 둬선 안 된다. 줄을 맞춰 지시대로 움직여야 한다.

 

자유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또한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려는 의지를 말한다. (36쪽)

 

이제 세상의 시선에 눈치 보지 않으면서 자신의 길을 가는 아티스트의 시대가 시작했다. 아티스트는 어떤 선입견 없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남을 따라하지 않는다. 백지상태에서 최초로 시도하려는 자유의지가 강하다.

 

지도 없이 새로운 길을 걷는다는 것은 무모하고 두려운 일이다. 세상은 개인의 도전과 실패, 그리고 그 고통과 아픔에 귀기울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 위험이야말로 진짜 아티스트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할 관문이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이카루스는 어리석지 않다. 태양에 가까이 가고 싶은 욕망! 이카루스의 도전은 아티스트 본연의 모습이다. 정해진 일만 하면서 안락한 생활을 추구하는 낚시꾼, 농부, 양치기는 아티스트가 될 수 없다.

 

태양을 향한 이카루스의 날개는 아름다웠다. 도전과 추락은 전보다 더 높이 더 멀리 날아 갈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림 왼쪽 덤불에 있는 시체는 ‘사람이 죽어도 경작은 계속된다’라는 플랑드르의 옛 속담을 상징한다. 죽을 때까지 현실에 안주하면서 삶의 경작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하늘을 나는 이카루스가 될 것인가.

 

 

 

 

※ 책에 관한 쓴소리 : 감정노동이 아트를 위한 최선의 능력이 될 수 있을까?

 

최근 페이스북에서 이 책에 대한 간략한 평을 본 적이 있다. 자신의 주장을 계속 반복하고 사례만 열거하는 세스 고딘의 글쓰기 때문에 책을 구입한 돈이 아깝다는 혹평도 있었고, 번역의 문제를 제기한 내용이 있었다. 인용된 문제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그 자신이 하나의 신화적 존재인 조지프 캠벨은 이렇게 못을 박았다. (중략) 신화는 우리 인간이 신 또는 전설적인 존재의 옷을 걸치고 인간적인 행동을 하는 이야기다... 우리가 좋아하는 인물 또는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자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104~105쪽)

 

처음에 읽었을 때 별다른 느낌은 없었는데 인용된 문장만 봐도 잘못된 문장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어법이 잘못되었다기보다는 한 번에 읽고,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인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문제 제기하고 싶은 번역의 수준이 아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저자답지 않은 억지스러운 내용의 글은 실망스럽기만 하다. 내가 인용한 문장을 읽어보라.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과 감사하는 마음을 얻고, 그들의 영혼 깊숙이 파고들려면 감정노동을 통해 다가서야 한다. 기존의 경제는 확장 불가능한 육체노동의 성실함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여기서 ‘육체노동’이라는 말은 인간의 근육이나 두뇌를 써서 하는 반복적인 작업을 가리킨다. (중략) 아트는 감정노동을 통해, 즉 위험과 기쁨, 두려움, 사랑을 통해 이룰 수 있다. 감정노동은 ‘좀 더 많은 노력으로 때로는 엄청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확장 가능하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는 육체노동이 아니라 감정노동으로 형성된다. (75쪽)

 

 

‘감정노동(Emotion work , Emotional labor)’. 책의 원문을 이 ‘감정노동’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궁금하다. 세스 고딘은 ‘감정노동’을 아트를 위한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새롭고도 긍정적인 노동의 한 형태로 봤다. 미국에서는 감정노동자에 대한 처우가 잘 되어 있을지 몰라도, 우리나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상황도 전혀 다르다.

 

 

 

 

 

 

 

 

 

 

 

 

 

 

 

 

우리나라의 감정노동은 실제 자신의 감정을 숨기면서 직무를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감정노동으로 생긴 감정적 부조화는 감정노동을 행하는 조직 구성원을 힘들게 만든다. 감정노동으로 생긴 문제가 적절하게 다루어지지 않는 경우엔 심한 스트레스(좌절이나 분노, 적대감)가 나타난다. 육체노동을 하면 할수록 건강에 좋지 않다. 감정노동 또한 거의 육체노동과 마찬가지로 노동자의 정신적 상태에 악영향을 주는 문제점이 부각되고 있다. 과연 ‘감정노동’이 신뢰와 사랑을 형성할 수 있는 잠재적인 가치의 능력으로 볼 수 있을까?

 

‘감정노동’이라는 용어는 최근에 등장한 것이 아니다. 세상에 나온지 지금으로부터 무려 21년이나 되었다. 미국 출신의 사회학자 앨레 러셀 혹실드가 1983년에 처음으로 『managed heart: commercialization of human feeling』이라는 책에서 사용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감정노동’으로 번역됐다.

 

사실 세스 고딘이 말하는 ‘감정노동’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이에 대한 부연 설명할 수 있는 간단한 사례 또한 언급되지 않았다. 세스 고딘은 ‘감정노동’의 원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던 걸까? 이렇듯, 아무리 영향력 있는 저자라고 해서 그의 주장에 무조건 동의할 수 없는, 의문이 들 때가 간혹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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