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날에는 독서인구가 점점 줄고 있다는 뉴스가 빠지면 섭섭하듯, 오늘 같은 날에는 외래어 오남용이 심각하다는 뉴스가 없으면 왠지 허전하다. 4차 산업혁명을 말하는 이 시대에 농경시대의 유물이라 할 명절의 의미를 되새김하는 사람은 더 이상 없듯, 이제 한글날 외래어 오남용 뉴스는 일종의 구색 맞추기 용 '콘텐츠'로 전락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일 년에 하루 쯤 이런 뉴스를 생산하고 소비함으로써 외래어 오남용이 심각하다는 경각심과 한글 사랑의 마음을 동시에 키울 수 있다면 싸게 먹히는 장사일 수도 있다.


뉴스의 논조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시작부터 삐딱했다. 뉴스에서 문제 삼는 대상은 거리의 간판과 행정기관이다. 거리에 간판을 내건 자영업자든 행정기관의 공무원이든,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의 일기나 편지가 아니다. 누가 볼 것을 염두에 두고 쓴 문구다. 그들은 외래어를 오남용하는 것이 더 쉽고 빠르게 시선을 끌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이러한 신념이 틀린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믿고 있으니 그렇게 해왔던 것이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서울 강남까지 신분당선 타GO, 33분이면 OK'는 외래어 오남용이 아니라, 일종의 전술전략이다.


마치 그들만 정신 차리면 외래어 오남용 문제가 말끔히 해소될 것처럼 기사를 작성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의사가 환자에게 병명만 말해주고 치료와 처방을 하지 않는 것과도 같다. 소비자에게 외래어가 더 잘 '어필'할 것이라는 그들의 신념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신념은 한두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만들어낸 신념일 지도 모를 일이다. 그 기사를 작성한 기자에게 묻고 싶다. 밥집에서 먹는 음식과 레스토랑에서 먹는 음식 중 어느 것이 더 맛있는지. 나는 후자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만 탓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을 수밖에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오랜만의 서재 방문이다. 오늘은 하루 종일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9호선, 4호선, 3호선, 6호선, 공항철도. 중간 중간 택시와 버스도 탔다. 지하철 노선도만 봐도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다. 노선도에서 잠시 시선을 옮겨 앞에 서 계신 어르신의 신문을 엿본다. 아이돌 가수와 같은 문 대통령의 인기에 언론도 영합하고 있단다. '문비어천가'를 들먹이면서 비판 없는 찬양은 결국 정권에 독이 될 것이란 충고를 하려는 모양이다. 


불순하기 짝이 없게도 나는 탄핵당한 전직 대통령을 떠올렸다. 그의 집권 시절, 나는 그의 행보가 연예인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다. 완벽하게 연출된 방법으로만 자신을 드러내는 인기 많은 연예인. 어떻게 해야 팬들이 환호하는 지를 잘 아는 노련한 연예인. 한때는 그의 팬클럽에나 어울릴 법한 이름을 내세운 정당이 만들어지기도 했던 연예인, 아니 정치인.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신문 우측 상단으로 눈길을 준다. 역시나 조선일보다. 아, 그의 집권 시절에도 조선일보가 이런 사설을 냈더라면 하는 생각은 정녕 쓸 데 없는 생각인가.


조선일보는 믿을 것이다. 이것이 정녕 정론의 자세라고, 이것이 정녕 국익을 위한 충고라고. 선조도 믿었을 것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마자 명나라로 도망치는 것이 조선을 살리는 길이라고. 명성황후도 믿었을 것이다. 임오군란의 와중에 청을 끌어들인 것은 사익이 아닌 대의를 위한 것이라고. 이승만도 믿었을 것이다. 한강 다리를 끊고 도망치는 것만이 적화의 위협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그도 자신의 아버지가 일으킨 쿠데타를 가리켜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말했었다.


제기랄, 문제는 다들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선택이 최악일 수 있다고 의심하지 않고, 최선이라고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도 그러하다. 내가 지지하는 정당이나 정치인도 그러할 것이다. 나는 정말 양비론이 싫지만, 나의 상념은 양비론을 향해 내달리고 있다. 다시 한 번, 제기랄. 선택에는 쉬운 길과 옳은 길이 있다고 했다. 나는 비겁하다. 굳이 어려운 길을 가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쉬운 길을 가면서도 그것이 옳은 길이라고 우기지는 않으려 한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으니, 이것만은 지키자고 생각해낸 것이 고작 이 정도다. 역시 나는 겁쟁이에 위선자다.


충무로역에서 3호선으로 갈아탄다. 나는 일곱 번째 칸에 탔다. 토요일 오후의 북적이는 지하철에 난 데 없이 자전거가 등장했다. 한 노인이 자전거를 끌고 앞으로 움직인다. 통로에 사람이 서있으면 경적을 울린다. 나는 그 소리가 참으로 뻔뻔하게 느껴진다. 사람이 어찌 이리 무례할 수가 있는가. 경적을 몇 차례 울린 끝에 여섯 번째 칸으로 이동한다. 보아하니 앞 칸 사정이 만만치 않다. 노인은 개의치 않고 제일 앞 칸까지 자전거를 끌고 갈 기세다. 타고 가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다.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노인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나는 문득 노무현을 떠올렸다. 자전거 때문만은 아니었다. 


과연 지하철은 서민의 발이기만 한가.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노선으로는 모자라는지, 다들 신규 노선을 원한다. 정치인도 유권자도, 집 주인도 세입자도, 자동차가 있어도 또 없어도. 물론 나도 원한다. 의정부와 용인과 김해의 경전철은 내가 알 바가 아니다. 지하철 역명에 담긴 부동산의 경제학은 또 어떤가? 신목동역과 신중동역이라는 이름에 담긴 욕망은 과연 그 지역 주민들만의 욕망일 뿐인가.


지하철은 욕망의 덩어리다. 노무현은 그 욕망의 덩어리 안으로 자전거 하나에 몸을 싣고 홀연히 들어섰다. 그리고 그 과정과 결말은 이미 우리가 지켜본 바다. 이제 9년의 세월이 흘러 노무현의 친구가 다시 자전거를 탔다. 지하철 안 사람들은 전보다 훨씬 힘들고 지쳤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람들의 욕망마저 지친 것은 아니란 것을. 그것은 어쩌면 더 강렬해졌다는 것을. 이 욕망의 덩어리 안을 비집고 헤쳐 나가려면 때로는 뻔뻔하고, 때로는 무례할 필요도 있다는 것을. 그 모습을 보며 9년 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많은 지지자들이 떨어져 나갈 것임을.


지난 가을부터 올봄까지, 많은 사람들은 각자가 응원하는 자전거가 지하철 맨 앞 칸까지 무사히 도착하기를 소망했었다. 이제 겨우 노무현의 친구가 탄 자전거가 출발했을 뿐이다. 나는 진심으로 바란다. 헌법을 지키고, 민주주의의 가치를 아는 자전거 주인이 지하철 운전석에 앉기를. 영화를 보지 않아 설국열차의 반전은 잘 모르지만, 현실 속의 반전은 잘 알고 있다. 바로 자전거를 응원하는 사람과 지하철 안을 욕망으로 가득 채운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 어쩌면 여기에서 노무현의 실패와 비극이 기인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부디 노무현의 친구는 실패하지 않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조윤선은 블랙리스트 관련 무죄 판결로 풀려났고, 안철수, 박지원, 이용주는 제보조작 관련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몰랐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들이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들은 시종일관 몰랐다고 주장하고 있고, 판사와 검사가 이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을 대신해 책임질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박근혜와 이재용 역시 재판에서 몰랐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박근혜는 일국의 대통령이었다. 조윤선은 정부 부처의 수장이었다. 안철수는 한 공당의 대선 후보였고, 박지원과 이용주는 각각 그 당의 대표였으며, 공명선거추진단장이었다. 이재용은 현재 굴지의 대기업 부회장이다.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이들은 허수아비, 얼굴마담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은 허수아비 공화국이고, 얼굴마담 공화국이다.


종편에 이른바 전문가라는 자가 등장해 박근혜에게는 전두환의 장세동과 같은 '좋은' 부하가 없음을 한탄한다. 박근혜가 헌법과 법률을 어긴 것이 문제가 아니라, 부하들과 인간관계를 잘 맺어오지 못한 것이 잘못이라는 투다. 기가 찰 노릇이다. 법을 지키는 것보다 의리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전근대적 사고방식이 아직도 우리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이런 사고를 하는 자들 때문에 내부고발자들이 고통을 받는다. 이명박의 선진화와 박근혜의 비정상의 정상화가 실패한 이유도 바로 이런 사고 때문이다. 이들은 왜 허수아비, 얼굴마담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면서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는 것일까? 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본다.


첫째, 이들은 이미 모든 것을 가진 '오너'이기에 책임질 필요가 없다. 남경태에 따르면 동양의 지배자는 언제나 오너였다. 오너가 아니라 관리자였던 서양의 지도자들은 몸소 전장에 나아가 전공을 세우려 노력한 반면, 동양의 지도자들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전쟁이 나면 도망가기 바빴다. 군왕이 곧 사직이었고, 국가였기에 자신부터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마자 선조는 의주로 도망쳤다. 그 '전통'을 이어받아 공화국의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도망친 것도 모자라 한강다리를 끊어버렸다. 선조가 전쟁 후에도 왕위를 지킨 것은 그렇다 쳐도,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는 사람이 지금도 있는 걸 보면 유시민의 후불제 민주주의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다. 아직도 우리는 무늬만 공화국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안철수의 전대 출마 소식을 전하는 앵커들은 그를 창업주라 부른다. 그 당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뉴스에서 이재용을 비롯한 재벌가 소식을 전할 때면 오너 일가라는 말이 꼭 등장한다. 그 기업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이런 표현이 등장한다는 사실보다 더 놀라운 것은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을 당연시한다는 사실이다. 나부터가 그들을 주인으로 또 오너로 인정해주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어느 한 사람이 공당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주식회사의 주인은 주주들이 아니었던가? 아니, 법인격을 가진 법인을 소유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둘째, 이들은 책임지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 한다. 이들의 '모른다'는 정말 몰랐다는 무능의 고백이 아니라, 본인 대신 책임질 사람이 있다는 힘의 과시이다. 따라서 몰랐다는 말을 하면서도 이들은 부끄럽지 않다. 뻔뻔하면 뻔뻔할수록 이들의 힘은 강한 것으로 판명되고, 따르는 무리를 결속시킬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조폭의 논리보다 못한 것이리라. 나는 재판에서 부하에게 얼굴마담 소리를 들었다는 이재용이 무죄로 풀려나더라도 어떻게 기업 경영에 참여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었다. 그러나 그 고민은 잘못된 것이었다. 부하가 구속되고 본인이 풀려난다면 그의 힘은 더 강해질 것이 분명하다. 박근혜도 그러하고 안철수도 그러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주인'은 몰랐고, 내가 알아서 했다고 말해줄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흔히들 그 힘을 권력이라 부른다. 한병철에 따르면 권력은 폭력이나 영향력과는 다른 것으로서 억압과 금지와 같은 부정적 맥락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부당하다. 오히려 권력은 긍정적이고 생산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책에서 특히 흥미로웠던 대목은 권력이 느껴진다면 이미 권력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박근혜, 조윤선, 안철수, 박지원, 이용주 그리고 이재용은 권력자인가, 아닌가? 그들의 부하들이 그들에게 동화되어 스스로 알아서 따르는 것이라면 정말 그들은 권력자인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들의 권력은 과연 무엇을 생산하는 권력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것이 알고 싶다>를 봤다.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이런 충격적인 사건들 앞에서 사람들이 보이는 공통적인 태도가 몇 가지 있다. 가해자나 피해자의 특수한 상황을 부풀려 그것을 사건의 유일한 원인으로 돌리는 것이 대표적이다. 어쩌면 이것은 비슷한 일이 자신에게도 벌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부른 비겁한 회피일지도 모른다. 이런 시선이 피해자에게로 향하면 당해도 싸다든지, 원인제공을 한 잘못이 있다는 등의 말로 2차 피해를 야기하기도 하는데, 다행히 이번 사건에 그런 일은 없었던 듯하다. 대신 가해자의 정신질환이나 장애가 원인으로 지목되었는데, 사실 나도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다. 이런 끔찍한 사건의 원인을 조현병이나 아스퍼거 증후군으로 생각하면 그나마 안심이 되고 편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현재진행형의 사건이 마치 종결된 사건처럼 느껴지고, 아무 근거도 없이 나에게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처럼 느껴진다. 동원되는 용어가 어렵고 생소할수록 그 효과는 커진다. 참으로 쉬운 방법이다. 방송 말미에는 캐릭터 커뮤니티라는 것이 다뤄졌다. 나는 스마트폰도 사용하지 않는 원시인이라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사건과 관련해 캐릭터 커뮤니티라는 말은 앞으로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 생소한 온라인 공간에 이번 사건의 모든 책임이 있는 것으로 기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쉽고 편하기 때문이다.


어제 방송에서도 어김없이 가해자는 피해 아동 부모의 입을 통해 인간이 아닌 것으로 규정되었다. 참혹한 방법으로 자식을 잃은 부모가 울부짖으며 내뱉은 이 말을 부정하기는 참으로 어려웠다. 바로 여기에 이런 사건을 직시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는 듯하다. 결국 우리는 가해자가 우리와 같은 인간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다. 이 사건의 주범과 공범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다. 인간이 아닌 그 어떤 존재도 이런 짓을 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이런 짓을 한다. 힘들지만 이것을 인정해야 처벌도 가능하고 예방도 가능할 것이다. 그들을 인간이 아닌 것으로 규정하여 밀쳐놓으면 잊기도 쉽고, 일상으로 돌아가기도 쉬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기에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한 짓이고, 인간만이 하는 짓이다. 어쩌면 인간 본성들 가운데 일부는 짐승만도 못한 데에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방송을 보는 내내 인간이란 결국 이런 존재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힘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택시를 탔다. 라디오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관한 뉴스가 나온다. 기사님의 자문. 이렇게 쉽고 간단한 것을 지난 정부에서는 왜 못 했을까. 기사님의 자답. 지난 정부 놈들이 무식해서 그래. 내 대꾸가 없자 기사님은 그렇지 않으냐며 대답을 요구한다. 능력이 아니라 의지가 없었겠지요. 다들 좋은 대학 나온 똑똑한 사람들이니까요. 학교만 좋은 데 나오면 뭐 하나. 대가리에 똥만 차서 제 잇속 챙기기만 바쁜데. 대화를 이어가다 보니 내 생각과 기사님의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선이 끝난 지도 열흘이 넘게 지났다. 언론에서는 변화를 실감한다며 연일 호들갑인데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사실 비관론자에 가깝다. 대통령 하나 바뀌었다고 대한민국이 순식간에 다른 나라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나의 일상이 그대로이지 않은가. 오늘 만난 택시 기사님의 일상도 아마 그러할 것이다. 언론의 행태도 그대로 인 듯하다. 박근혜의 우아함과 고상함이 문재인의 소탈함과 탈 권위로, 박근혜의 한복이 문재인의 등산복으로, 박근혜의 부모가 문재인의 부인으로 바뀌었을 뿐. 그들이 퍼스트레이디 역할 운운하며 박근혜의 능력을 치켜세우던 입으로 탄핵국면에서 박근혜의 무능을 말할 때 나는 역겨움을 느꼈었다. 그런데 그 입으로 이제 새 정부를 칭찬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내게 이번 대선은 두 가지 면에서 좀 특별했다. 먼저 탄핵 이후에 선거에 대한 흥미가 급격하게 떨어졌다는 점이다. 나는 뉴스도 잘 보지 않았고, 대선 후보 토론회는 한 차례도 시청하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일찌감치 표를 줄 사람을 정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다음으로 특별했던 것은 처음으로 대선에서 특정 정당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한 투표를 하지 않았다는 거다. 한마디로 나는 이번에는 문재인에게 표를 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혹시 정권교체가 되지 않으면 어쩌나 괜한 걱정을 하기도 했다. 내 표를 받은 이는 5위를 했다. 그래도 이만하면 만족할 만한 성적표라고 생각한다.


낮에 잠시 광화문에 다녀왔다. 지금까지 내 표를 받은 유일한 대통령의 8주기 후모행사가 있었다. 국민성공시대를 견디고, 국민행복시대를 버틴 끝에 문재인 정부를 보게 되었는데, 그가 없어 아쉽다. 막판에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던 것이 좀 미안하기도 하다. 뜬금없이 김어준 총수의 말이 생각났다. 이명박은 국가를 수익모델로 삼았고, 박근혜는 아버지의 살풀이를 위해 권력을 잡았다는 취지의 말. 김어준다운 독설이면서도 핵심을 꿰뚫는 통찰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이명박의 키워드는 '돈', 박근혜의 키워드는 '박정희'라는 말이다. 전문가들이 말하길 대선은 총선이나 지방선거와 달리 미래를 보고 하는 투표라던데, 돈과 박정희에는 미래가 없었다. 그들과 그들을 당선시킨 우리의 욕망과 집착이 있었을 뿐.


생각해 본다. 노무현의 키워드는 '시도', 문재인의 키워드는 '준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특별한 근거는 없다. 일종의 인상비평이다. 노무현의 당시 행보는 여러모로 새롭고 낯설었고, 문재인의 행보는 뭐랄까 치밀하게 계획된 프로세스를 밟고 있는 느낌이다. 특히 개헌을 다시 한 번 약속한 것에서 그런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물론 시간이 더 지나봐야 확실해지겠지만.


다시 나의 상념은 '일상'으로 돌아온다. 나는 신임 대통령이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일상이 편안하고, 즐거운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우리들의 일상이 어떻게 되는 지는 이미 지난 정권에서 학습을 시켜준 바 있다. 다소 욕을 먹더라도 소위 측근이라는 사람들을 불러 밥도 먹고, 술도 마셨으면 좋겠다. 부인과 더불어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들었으면 좋겠다. 이 판국에 무슨 한가한 소리냐고 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대통령이 비선실세 한 사람만 만나면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로 대통령이 장차관들만 만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대통령이 약물에 중독되면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로 일에 중독되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일상이 편안하고, 즐거운 대통령. 내가 바라는 대통령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